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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의 하나님 | [새찬송가] 17장 사랑의 하나님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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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하나님 (Dios Incomparables) (악보/영상/가사)

사랑의하나님 (Dios Incomparables) (악보/영상/가사) – 뉴제너레이션워십/천관웅목사님 (B코드). Worship Leader 2017. 12. 10. 14:20. 사랑의 하나님 (Di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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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orshipleader.tistory.com

Date Published: 10/23/2022

View: 3653

[이경섭 칼럼] 사랑이 전부이신 하나님 – 기독일보

그러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은 영원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까지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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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10/19/2021

View: 3510

사랑의 하나님 [요 3:16]

오늘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로 알려진 ‘무디’에 관한 일화중 무디가 그의 동역자 무어하우스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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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1/22/2021

View: 765

사랑의 하나님 – 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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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v1611.net

Date Published: 4/21/2021

View: 4813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선지자

가사. 1.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선지자 축복하사. 위안과 건강과 강한 힘 주시어. 의로운 선택을 하게 하소서. 2. 선지자 말대로. 주님의 왕국이 널리 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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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2/4/2022

View: 7284

찬송가 17장 – 사랑의 하나님 (악보/가사)

찬송가 17장 – 사랑의 하나님 (악보) †. † 찬송가 17장 – 사랑의 하나님 (가사) †. 1. 사랑의 하나님 이 곳에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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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cmakbo.tistory.com

Date Published: 3/30/2022

View: 332

사랑의 하나님 (렘 31:1-6) – 목회자료 – 기멀전

제목 : 사랑의 하나님 본문 : 렘 31:1-6 주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을 갖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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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6/6/2022

View: 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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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찬송가] 17장 사랑의 하나님
[새찬송가] 17장 사랑의 하나님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랑 의 하나님

  • Author: Beecompany 비컴퍼니
  • Views: 조회수 65,7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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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3.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3Q6VgEAjFY

사랑의하나님 (Dios Incomparables) (악보/영상/가사)

사랑의 하나님 (Dios Incomparables)

사랑의 하나님 날 구원하신 십자가

주는 영광의 왕 내 삶 주께 드리네

주님을 경외해 영원한 노래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님만 바라봅니다

영원하신 주님 선하신 나의 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영원하신 그 사랑 끊을 수 없네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경섭 칼럼] 사랑이 전부이신 하나님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 같은 형용사적(adjective), 서술적(descriptive) 정의(definition)를 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며 ‘하나님’과 ‘사랑’을 치환(置換, substitution) 혹은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 방식이시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 개념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것도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엡 1:4),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도(창 1:27)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해 주신 것도 독생자(골 1:16)와 택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전 3:21).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저주 아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사,그들을 구속하셨으며, 이 구속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요일 4:10, 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구속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불과(?) 2천 년 전이었고, 각 사람이 구속의 사랑을 입기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개인의 생애에서 찰나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은 영원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까지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뿌리내려져 있고, 영원 속에 함께 연루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4)”.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은 역사 속의 유한된 사건이나, 피조물들에 의해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유한된 것들이 ‘영원의 영역(territory of eternity)’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 사랑의 기원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의해 작정되고 경륜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오직 부르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되는(롬 9:11)” 구원 경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기원적 사랑은 선악간의 인간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제적 어떤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무조건성’을 특정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에 기원하고 있음을 아는 지식은, 유한된 피조물에 의해 구원이 훼방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므로,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북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하나님 사랑’ 타령은, 대부분 위에 열거한 정의들과 합치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사랑’ 개념은 대개 이런 내용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앞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 반대로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 내가 잘못하면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을,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닌 하나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이 자기에게 있게 된 시점에 둡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을 자신의 행위에 세울 때, 사랑의 영원성은 소멸되고, 제 하기 나름인 조건적인 것으로 전락됩니다.

나를 사랑해 다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를 사랑하라(마 22:37)”고 요구하신 것은,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으니 너도 받은 만큼 내게 사랑을 되돌려 달라’는 반대급부적 요구가 아닙니다. 혹은 ‘피조물인 너는 창조주인 나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절대자의 전횡적 요구도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의 표출입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구절 중 하나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잠 8:17)”는 말씀인데, 이는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도 나를 사랑한다”는 조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에서 그 시작이 하나님이라고 못 박기 때문입니다(요일 4:10). 사실 이 말씀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순환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풀이하자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 주려므나. 내게도 너의 사랑이 필요하단다”는 뜻입니다. 비유컨대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엄마에게 과자 하나 주면, 나중에 엄마가 장난감 하나 사주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이로부터 과자 하나를 받아야만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엄마는 아이가 그에게 과자를 주든 안 주든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 줄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과자가 아니라 과자를 건네주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손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혹자는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고 스스로 자족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슨 피조물 인간들을 향해 사랑 타령이실까 싶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이기에 더욱 사랑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고 하신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희귀하여 주님은 사랑을 구걸(?)하십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아 5:2)” 고 읍소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에 마음을 뺏긴 채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은 교회(성도)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레나데입니다.

독점적인 전부의 사랑을 다오

“마음, 성품,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30:6-8)”는 성경 말씀은 일견 현실성 없는 무리한 요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랑을 명분으로 우리를 그에게 종속시키려는, 사랑을 가장한 매정한 율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오직 나만 사랑해 달라’는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의 요청이고, 남겨지거나 유예된 것 없는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받고 싶다는 요청입니다.

또한 이는 사랑의 속성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사랑이란 결코 부분적이거나 나눠질 수 없는 독점적 속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사랑은 나누는 것이니 다른 여성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성을 사랑하면 마땅히 질투를 느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상을 용납지 않으시고(요일 5:21) 우리에 대해 질투하시는 것도(신 4:24, 아 8:6, 약 4:5), 우리에 대한 사랑의 독점욕 때문이었습니다.

독점적 사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이전에, 먼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렇게 독점적이고 완전한 전부의 사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하셨고, 열방 가운데서 오직 우리만 알 정도로(암 3:2)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을 하셨습니다.

한 순간도 우리를 망각하지 않고(사 49:15), 우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습니다(사 49:16). 마지막에는 아예 우리와 떨어지지 않으시려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십니다(고전 3:16).

이렇게 우리를 향해 독점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자신이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 독점적인 사랑을 주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상에게 마음을 뺏겨 하나님께 무관심한 이스라엘을 향해 종일 손을 내밀며 사랑을 구걸하셨던 그 하나님은(롬 10:21), 오늘도 간음하는 여자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을(약 4:4) 향해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구걸(?)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email protected])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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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

흔히 기독교 하면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흔히 기독교 하면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사랑이야 말로 성경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권의 성경을 사랑의 연서(戀書)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솔로몬의 아가서 같은 성경은 사랑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절절히 그려져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일생동안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사랑 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T.V 연속극, 영화, 그림, 음악, 문학, 연극 등 어디에서나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며, 소재가 사랑입니다. 누구와 누구의 사랑, 무엇인가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다룰 때 공감을 얻고, 매료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했습니다. 이는 자식 사랑입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이 역시 자식 사랑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이 역시 자식 사랑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이는 부인 사랑입니다. 하몰의 아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사랑했습니다(창34:3). 얼마나 사랑했던지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으라고 하자 망설임 없이 모두 할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삼18:28).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사랑이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정의하는 사랑과 성경이 정의하는 사랑은 너무나 달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조차 개념이 불분명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흔히 그리스어의 어휘를 따라서 아가페(상대방이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에로스(남녀간의 성적 사랑), 스트로게(가족이나 친족간의 사랑), 필리아(우정) 등으로 분류하는데 이는 성경적인 분류 방법이 아니며, 성경이 정의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란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유일한 구분은 Charity와 love가 전부입니다. Charity는 성령의 은사(선물)이며,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입니다. love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의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성경에는 사랑의 정의가 명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가장 유사한 정의라고 한다면 요한이서 6절에 [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안에서 걸으라 하는 것이라. ](요이6)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며, 처음부터 들은 대로 주님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이외에는 어떤 것도 성경이 인정하는 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성품입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4:7).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걷지 않을 때는 결코 사랑을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나지 않는 자는 진정한 사랑을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 주신 선물입니다. [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음이니 ](롬5:5).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해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결코 우리 안에 사랑의 자원이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디나를 향한 세겜이나 다말을 사랑한 암논, 악한 현 세상을 사랑한 데마(딤4:10)와 마찬가지 그런 종류의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썩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없듯이, 악한 것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영,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넓게 부음 받은 성도는 거룩한 영적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만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며, 마음과 혼과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 (갈5:22). 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고, 씨앗이 심기지 않고 나무가 자랄 수 없듯이 성령이 없이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이 내 안에 거할 때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은사(선물)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영적 은사들에 대해 무지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 형제들아, 이제 나는 영적 은사(恩賜)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12:1). 그러면서 최상의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 오직 /너희는/ 가장 좋은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또한 너희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리라. ] (고전12:31).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제시한 최상의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주님이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최상의 은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최상의 은사,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서 이 사랑을 발견할 수 있고 어디서 이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저 하늘의 시온 산이나 저 바다 깊은 곳이나 땅 끝 어딘가에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곧바로 갈보리 십자가로 가면 됩니다.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신 것이라 .](요일4:9-10). 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의 죄들로 인해 화해 헌물로 삼으신 갈보리 십자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롬5:8) 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당당히 제시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사랑, 주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갈보리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사랑이 어떠한 사랑입니까? [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그런즉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요일3:1).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를 죄인들의 대속물로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일컬어 성경은 완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죽음에 내어준 희생적인 사랑이요, 진리 안에서의 사랑이며, 말이 아닌 행동으로 드러낸 사랑입니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Action입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갈보리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대속한 하나님의 희생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거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것이며, 소유한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에 불과합니다.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고 또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게 됨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이는 그분께서 어떠하신 것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6-18).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었다는 말은 십자가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서 당당히 제시된 그 사랑을 알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주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온전히 충족시켜 주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신 사랑이며, 율법을 완성시켜 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허다한 모든 죄를 덮어 준 사랑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선포하시면서 곧 바로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성육신을 가리키는 구절이 아닙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란 말씀은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신 죽음을 가리키는 구절이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탄생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이것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며, 선포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언급된 모든 곳은 반드시 그 전후 구절을 보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관련되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혀와 말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동일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 나의 어린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8).

성경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모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안에서 걸으라.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과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란 말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같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은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영에서 난 것이 영이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듯이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며,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사랑은 성경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 흘린 피를 먹고 자라며, 거기서 열매를 맺습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일3:16). 이 역시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 역시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음으로써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불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사랑을 쏟아 부어주시기 위함이요, 제자들이 자신이 행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요15:13~14). 주님의 친구가 되는 조건은 주님이 명령하신 것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친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으라는 요구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런 사랑을 나타내며 죽을 수 있는 것에 대해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기독교의 순교사화는 바로 이런 사랑의 표출이었습니다. [ 참으로 너희 믿음의 희생과 섬김 위에 /나를 헌물로/ 드린다 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2:17).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제시해 주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데서나 죄를 지으며, 육신의 정욕을 채우면서 사랑 타령하는 것은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라고 말하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우깁니다. 하나님은 정욕이라고 말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탐심이라고 말하는 것을 사람들은 애정이라고 말합니다.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5:24).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할 것들을 마치 보물단지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으며,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금지된 사랑은 무엇입니까?

금지된 사랑 첫째,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잘못된 사랑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 행해지는 사랑이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딤전6:10). 사랑은 최상의 덕목이 아닙니다. 올바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사랑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출로 만족하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5:10).

금지된 사랑 둘째,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표적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 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3:20).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지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성경적인 유일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 이와 같이 남자들도 마땅히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 ](엡5:28). 부부는 둘이 한 몸입니다. 성경적으로 부부는 두 개의 육체가 아니라 한 육체입니다. [ 말씀하시기를, 이런 까닭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마19:5). 고로 아내를 사랑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결국 교회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신비가 크도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1-32).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길은 나와 연합된 대상을 사랑하면 됩니다. [ 그러나 {주}와 결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6:17). 이것이 성경적 자애(自愛)입니다.

금지된 사랑 셋째,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말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딤후3:4). 쾌락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쾌락을 즐기거나 거기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 쾌락을 사랑하는 자는 가난한 자가 되고 포도주와 기름을 사랑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잠21:17).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쾌락은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심겨진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린다고 경고하셨습니다. [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나아가다가 이 /세상/ 삶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완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라. ](눅8:14). 쾌락을 사랑할 영적 성장이나 열매는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 언제였습니까? 그는 쾌락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선택의 순간에 올받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히11:25).

금지된 사랑 넷째,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 ](요일2:15-16).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십자가에 아들을 내어 주신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게 됩니다. 십자가는 이런 것들을 모두 못박아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면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십자가를 사랑하면 세상의 원수가 됩니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하기를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요일4:8)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인 줄로 오해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지 하나님을 정의해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란 진리는 점점 변질되어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사랑’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란 진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만 따로 떼어 놓아서는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성경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랑 놀음, 사랑 타령이 온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모두 그릇된 진리에서 나온 곁가지와 같은 것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과 동일시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 사랑을 경배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의 많은 성품 중의 한 가지를 서술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며, 하나님과 동일시되지 않습니다. 거룩함, 공의로움, 신실함, 긍휼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주님의 한 가지 속성에 해당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란 의미는 맹목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눈먼 사랑이나 왜곡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란 말에서 사랑의 본질적인 의미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성경적인 사랑의 속성이 잘 나옵니다.

성경적인 사랑의 속성은 이렇습니다.

첫째, [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고전13:4).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 주신 사랑, 성령의 열매로 맺어진 사랑, 진리 안에서 행해지는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이요, 친절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는데 얼마나 사랑했던지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 [18.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이르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칠 년 동안 섬기리이다, 하니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을 섬겼으나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인하여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창29:18, 20). 이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벧후3:15a). 주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불친절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사랑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이요, 죄입니다.

둘째, [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한다는 것은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기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아무도 자기 것을 구하지 말고 각각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구하라. ](고전10:24). 쉽게 성내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닙니다. 이는 성질의 문제나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까닭 없이 화를 내는 것은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마5:22). 쉽게 성을 내는 것은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 이는 사람의 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 ](약1:20). 화를 내서 될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감독의 요건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오직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딤후2:24).

악을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몸에 해를 입히거나 물질에 손실을 입히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혼에 해를 입히고, 상처를 주는 일이 더 큰 죄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악을 생각한다는 것은 몸의 죄가 아니라 혼이 행하는 죄입니다. 주님은 죄의 범위를 몸의 행동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 즉 혼의 영역으로 확대하셨습니다. [ 옛 사람들이 말한바, 너는 간음하지 말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淫慾)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 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 ] (마5:27~28). 여기서 죄를 범한 간음의 주체는 나의 영, 혼, 몸 가운데 혼입니다. 악한 생각과 상상은 혼의 죄 문제입니다. 사랑은 몸 이전에 혼의 죄 문제를 해결합니다.

셋째, [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6). 불법을 기뻐한다면 그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벧전1:22). 진리에 순종함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죄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한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며, 성경을 제쳐 둔 연합을 추구합니다. 진리와 거룩함을 제외하고 오직 사랑만 추구하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그 까닭은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살후2:10). 진리의 사랑!! [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라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엡4:15). 성경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나의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주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다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희 속에 없음을 내가 아노라. ](요5:42). 이는 진리를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음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넷째,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7).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하는 모든 말을 믿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일점 일획도 의심없이 모두 믿습니다. 모든 것을 소망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는 주님의 영광스런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사랑이며,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한 가지 성품은 결코 다른 성품을 훼손하거나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란 진리는 결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다는 진리를 깎아 내리는 일이 없으며, 부딪치거나 모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히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로움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유기적인 관계성 가운데 있습니다. 고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거룩한 사랑이며, 의로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에 사랑 역시 영원한 사랑이며,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의 힘으로는 아무도 성경적이고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은 사람만이 사랑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란 성경적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사랑의 하나님 (렘 31:1-6)

제목 : 사랑의 하나님

본문 : 렘 31:1-6

주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을 갖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구주대망 2004년 한달이 이제 지나가고 오늘 2월 첫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무척 춥던 날씨는 풀렸으나 마음들은 아직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해 들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는 시간들을 집중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지난주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살폈습니다. 오늘은 사랑의 하나님을 살피려고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만큼 진부한 제목도 없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시길 소원합니다.

사람들은 사랑받고자하는 심층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다오”라고 내면에서는 소리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이고 인간의 심연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면 늘 들어온 말이라고 느끼지만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소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 하면 아주 시적인 것이나 감상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랑이란 현실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듣는 것은 감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 동참한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는 모두가 다릅니다. 정말 오늘 난생 처음 예배의 자리에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진리를 찾는 구도자로서 여기에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신앙세계가 실제적인 것인지를 알고자, 진리의 답을 알고자 애쓰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을 위해서 드릴 말씀은 한 마디로 하나님은 지금 모습 그대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의 자리에 들어오시긴 하셨지만 바로 붙잡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긴 하는데 자신이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지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아직도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깊숙이 사랑하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 구도자도 아니고 몸부림치는 수준도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가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잊고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름을 당신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구약에 성막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어 있는 흉배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 흉배는 12보석이 달려 있고 보석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입고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신 것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그렇게 당신의 가슴에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어디에 이르렀든지 상관없이 오늘 말씀을 듣고 이 자리를 떠날 때는 이 자리를 찾아 나온 것과 같은 상태의 사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정서적인 감동보다는 인격적인 감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굶주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육수준은 높아졌지만 세상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살벌하고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굶주린 세상에 대한 대답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신간서적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세미나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국회에서 새로운 법령을 통해서, 아니면 새로운 상품을 통해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랑에 굶주린 세상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선포합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31:3) 그 옛날 이스라엘을 인도한 사랑이 바로 오늘 우리를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합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한결같은 사랑을 너에게 베푼다.” “나는 늘 너를 사랑하였다. 나는 맨 첫날이나 오늘이나 똑같이 네게 변함없는 사랑을 지니고 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올 들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심층적인 욕구를 채우시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욕구는 물질이 아닙니다. 성공도 아닙니다. 명성도 아닙니다. 새로운 직업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욕구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성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이 사랑은 신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얻고자 온갖 몸부림을 치고 여러 가지 사랑의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사랑을 얻고 싶어서 우리는 성공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사랑을 얻고 싶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다못해 아이들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고 듭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동정을 통해서도 사랑을 누리려고 듭니다. 아니면 승진을 통해서도 사랑받기를 추구합니다. 높아지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할거라고 상상합니다.

때로는 신체적인 접촉을 사랑과 동일시합니다. 성적인 관계를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휴가와 쾌락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소유가 사랑을 얻는 수단이 될 것처럼 여깁니다. 아이들은 문제를 일으키므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일시적이고 일시적인 형태의 사랑일 뿐입니다. 일시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가치, 일시적인 환영, 일시적인 인정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만 사랑에 대한 더 심각한 갈망만 일으킬 뿐입니다.

소금물은 해갈시키지 않습니다. 더 심한 갈증을 불러일으킬 따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무궁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바울은 지금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하듯이 에베소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장,광,고,심 즉,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고 넓으며, 얼마나 깊고 높은가를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도 커서 그 끝을 볼 수도 없고 또 그 사랑을 다 헤아릴 수도 없음을 스스로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에베소 성도들도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며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할 만큼 넓으며 우리의 모든 고통과 절망을 헤아릴 만큼 깊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셨습니까? 여러분 개인의 삶에서 경험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좋은 날들도, 나쁜 날들도 하나님은 받아주시며 사랑합니다.

신앙인은 이 하나님을 사랑을 알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신앙의 형제들에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저는 성도님들을 만날 때 어떤 경우로 만나든지 늘 질문하는 것은 거의 동일합니다. 언제 첫발을 교회 디뎠습니까? 언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덧붙여서 성경은 몇 번쯤 읽어 보셨습니까?

목회가 참 쉬운 것 같아요. 세 가지만 물으면 상대방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대체로 다 알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그 큰 하나님의 사랑에 휩싸이고 나면 우리는 부족함을 더 이상 느끼질 않습니다. 언제나 만족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우리 삶의 감동과 열정, 만족과 감격을 가져갑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입니다. 신약에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10:11, 표준새번역)

양이란 어떤 동물인지 사실 우리는 잘 모릅니다. 사진으로만 보면 괜찮은 동물처럼 보입니다. 털도 하얗고 보송보송해 보입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그 실체를 압니다. 세상에 양처럼 고집 세고 미련한 가축도 잘 없습니다. 동시에 멍청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주위가 산만해서 제 마음대로 가 버립니다. 가면 간 길로 다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주인에게로 잘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은 곁길로는 갈 줄 아는데 돌아오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아이큐가 따라 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우리를 양에 비유하는 것 때문에 대단히 자존심 상한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의 실체가 특별히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새 탁구를 하는데 탁구공을 기계가 쏴 주면 내가 칩니다. 그런데 속도가 정확하게 날아오기 때문에 친 공이 잘못 떨어졌다고 해서 지나간 공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게 되면 새로 날아오는 공을 놓칩니다. 그런데도 지나간 공에 대해서, 실패한 공에 대해서 빨리 포기를 못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회를 또 놓칩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어리석고 고집 센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깐 5년마다 대선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더라구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저는 올해 56세입니다. 제가 선거권 얻고 나서 4년, 5년마다 계속 투표해 왔는데 투표 할 때마다 기대를 가졌죠. 그러나 수십년동안 아직도 그 기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쯤 포기해야 되는데 놀랍게도 아직도 누굴 찍을까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거든요.

정말 멍청하기가 이를데 없고 고집 세기가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한시도 관심을 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양과 같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1. 하나님은 우리 실체를 아시고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그 위대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요10:14)라고 밝힙니다. 아시는데도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알면 돌아설까 싶어서 우리는 예쁘게도 꾸미고 가진 것처럼, 아는 것처럼 처신해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발버둥치는데 하나님은 훤히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보고 “야, 너 입 좀 열어봐”해서 입 속을 들여다 봐야 속을 아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아실까?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하실까? 내가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지 정말 기억이나 하고 계실까? 그럽니다. 그런 여러분의 불신앙은 왜 늘어갑니까? 담임 목사가 날 잘 모르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우리 집사님들이 “목사님, 절 아세요?” 하는 질문을 가끔 합니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반장을 왜 한번도 못해 봤을까 하고 늘 아쉬워합니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60명은 기억할 용량은 가졌을텐데. 내가 해본 줄반장은 12명-14명은 끝이 나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하고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내 문제에 뭐 그렇게 신경을 쓰실까?’ 신경을 쓰신다니까요.

성경대로 얘기를 해줘도 ‘에이, 설마 하나님께서 내 문제에 그렇게 세세한 관심을 가지랴’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너희 머리카락도 다 세고 계신다.”(마10:30, 표준새번역).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일에 세밀하고 자상하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여러분을 잊어버리고 무시하여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시인은 노래합니다. “여호와 어지시어 삼라만상을 아끼시며 주께서 손수 지어내신 모든 것에 극진한 사랑을 베푸시도다.”(시145:9, 현대어성경) 아, 이렇게 시를 읊을 수 없다고 하면 읊어 놓은 시라도 읽으면서 감동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리는 참 딱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바쁘긴 바쁘지만 어떨 때 보면 신문의 요만한 코너에 시들이 실리는데 그것조차 한번, 1분이면 충분히 읽어 볼 수 있는 분량인데도 이것을 읽지 않고 지나갈 때가 있더라고요.

“여호와 어지시어 삼라만상을 아끼시며 주께서 손수 지어내신 모든 것에 극진한 사랑을 베푸시도다” 왜 삼라만상을 아끼시고 극진한 사랑을 베푸십니까? 당신이 지으셨기 때문에. 지음 받은 만물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며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은 그의 극진한 보살핌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리의 반항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마치 세상에서 우리가 유일한 존재인 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그처럼 끊어 버리고 세상을 떠날 때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유한한 두뇌로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 상상도 경험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감탄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세상을 지은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우리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것을 다 믿기가 힘들죠. 죽기 전까지 몇 번씩이나 바뀌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불변하십니다.

젊은 아빠 여러분은 비디오카메라로 여러분의 아이의 영상을 담아보셨습니까? 어쩌면 아이의 모습을 줌인으로 확대해서 계속해서 그 아이의 움직임을 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식을 찍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찍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를 않습니까? 여러분은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만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 대해서 줌인해서 여러분의 모습 한사람, 한사람을 다 살핍니다. 오늘 처음 오셨습니까? 군중 속에서 숨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호하심으로 들어납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양떼를 보살피듯이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그러나 현대인 성경은 더 실감나게 번역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늘 여러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벧전5:7 현대어성경)

여러분 연애를 해 보셨습니까? 연애도 할 때는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잘 이해를 할 수가 있어요. 연애를 해 보시면 그 사람 생각에 항상 사로 잡혀 있습니다. 늘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 하신다니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만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무슨 일이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세상을 살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과 저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더 더욱 염려할 것이 아주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서는 지금도 힘들어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날 좀 건져주십시오. 절망 가운데 있습니다. 문제와 고통이 너무 큽니다. 살림이 너무 어렵고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 곁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돕기에 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베푸시길 기뻐하시는 분이시라고 지난 주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에 능하신 분이시오 도와주길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인은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니, 주의 자비하심을 나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과 미쁘심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십시오.”(시40:11) 다른 번역은 이렇게 마지막 구절을 표현합니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당신의 사랑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시인의 처지와 비슷합니까?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재앙이 나를 에워쌌고, 나의 죄가 나를 덮쳤습니다. 눈앞이 캄캄합니다. 나의 죄가 내 머리털보다도 더 많기에, 내가 낙심하였습니다.”(시40:12 표준새번역)

여러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재앙이 나를 덮치고 내 죄가 나를 휩싸고 있어도, 눈앞이 캄캄하고 죄가 머리털보다도 더 많아도 희망을 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당신의 사랑에 있습니다. “옛부터 하나님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고, 그 영원한 팔로 여러분을 떠받쳐 주십니다. 여러분이 진격할 때에 여러분의 원수를 쫓아내시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신33: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 분 안에서 안전을 맛보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하신 분이 누구신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앞서 행하시고 여러분을 따라서 가십니다. 엄청난 일들이 터지는 세상에서도 안도와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그렇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3.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선한 목자처럼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규정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하나님의 아들의 정의가 바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인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시길 즐겨 하십니다. 여러분을 더 성숙한 수준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살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느끼십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건강한 신앙인은 하늘 아버지의 인도를 체험하면서 그것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릴 향해서 나쁜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오늘의 평안과 내일의 희망입니다.

그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자들이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사랑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셔야 됩니까?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1. 무엇보다 먼저 그 사랑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물과 같습니다. 주면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우리는 선물 받기를 참 주저하고 망설입니다. 안 받는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는 뭐 이런 것을 주느냐고 하면서 차떼기로 줘도 다 받더라고요. 나는 유교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살겁니다. 저는 기쁘면 찬양하고 어려우면 기도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저에게 선물을 주면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한번 실험해 보세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하면 그 큰 사랑을 설명하면 할수록 하는 말이 “저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반응합니다. 그 말은 맞아요. 우리 모두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소식이 바로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을 제하면 소돔과 고모라 같은 폐허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용서의 범위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난 도대체 저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다른 사람이 여러분 보고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8절은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 받아들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여러분 위해 생명을 주신 그 분을,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습니다.

주님이 자기 땅 유대나라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지금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하나님께서는 주십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시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행세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반응을 기다리십니다. 새롭게 시작해 보십시오.

신정 한번 구정 한번, 설을 두 번이나 쐬었는데 아직도 새롭게 시작하지 못합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의 그 성숙한 모습을 닮아서 한 걸음씩 나아가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다음 도전을 들어보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언제나 계속 채워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히 솟아나는 우물물과 같다면 우리의 사랑은 그 우물물을 퍼 담는 두레박과 같습니다. 퍼 가지고 오는 물은 금새 바닥이 나더라고요. 여러분 이번 겨울에 추워서 수돗물이 얼어붙어 며칠동안 물을 길러서 써 본 분이 있습니까?

저도 언젠가부터 방안에 있는 화장실 물이 안나오더라고요. 그때 미련하게 물이 안 나오면 사용을 안해야 되는데 왜 씁니까? 급하니깐 물이 안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는 또 사용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냄새가 나니까 물을 길러 와서 부어야 됩니다. 그러고는 또 실수하고. 그래서 나중에는 스카치테이프로 발라 버렸어요. 미련한데는 약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길러 와서 쓰는 물은 금새 바닥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주일날 한번 은혜 받은 말씀으로 한 주간 살려고 생각을 하십니까? 한 양동이의 물로 한 주간 살려고 해보세요, 되는가. 그래서 제가 매일 성경 읽으려고 합니다. 복 있는 사람 3천원이면, 하루 50원 투자하면 두 달 복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하는데 비타민 C보다 훨씬 싼데도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까?

주일날 한번 말씀 들은 것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엄청난 믿음을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연명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데도 계속해서 잘 살기는 살더군요.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그냥 연명만 하지 마시고 성경도 통독하시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채워가야만 합니다.

저는 요즈음 기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일어나서 바로 더운 물에 온몸을 담그면 잠이 아무리 와도 뜨거운 물속에서 계속 졸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졸음을 쫓고 나서 컴퓨터에서 <내가 사랑하는 책>이라는 성경의 본문을 긁어서 내 큐티 창에다 다시 띄워놓고 한 구절 한 구절 살펴보면서 어쨌든 30분 내에 오늘 뭔가 말씀을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요 며칠 전에는 그런 말씀이 있더군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없으니 주인께 청해서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 그런 날은 기도 제목을 찾으려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면 되니깐. “주님, 정말 울산에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좋은 사람들 보내주세요” 보내 달라고 하다 보니깐 이미 있는 사람들도 지금 비실비실한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제 주위에. 그래서 “어느 교회 아무개 목사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새로운 힘으로 강건하게 세워 주십시오. 또 모 감리교회 목사님은 앞으로 동역하게 될지 어떨지 모호합니다. 하나님, 영육간 강건함으로 세워주십시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 혈당 테스트를 했더니 웬걸요, 제 혈당이 내려가 있더라고요. 말씀 쫓아서 기도하고 나가보면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금 여러분이 아는 그 삶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라니깐요. 어떤 분들은 자식들 보기 부끄러워 헤어지지 못하고 사는 그것을 부부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은 부부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셨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구역장 눈치 보여서 주일날은 빠지면 전화 올까봐서 나오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로워지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공급받아 보십시오. 찬송과 감사와 기도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 마감할 때 다시 주님과 여러분과의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하루 40분 빠른 통독테이프를 가지고 통독을 하니깐 하루 10장을 읽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작년 말부터 계속해서 새해 되면 큐티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통독은 내가 생각도 못했습니다. 한 가지도 못하는데 두개를 어떻게 합니까? 옛날 같으면 새해 되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고 한꺼번에 하지만 저도 한 30년 살았으니까 이제는 한꺼번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이제는 성경 통독은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1월 10일께부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하루 40분씩 빠른 성경 통독테이프와 같이 읽으니까 지금은 계획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저는 1월달 지나면서 목표 상향 조종했습니다. 올해는 2독 한다. 제가 옛날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나이 56살 될 때부터는 1년에 두 번씩은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몇 번 읽었느냐고 물으면 내가 교인들에게 묻듯이 물으시면 우물쭈물해 가지고 “글쎄, 안 세어 봐서 모르겠습니다” 할 수는 없잖아요.

그 크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시렵니까?

3.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 베푸신 것은 우리가 사랑이 급해서 썩어가는 사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은 사랑이 우리 가슴에, 우리 삶 속에 들어오는 것은 그 사랑이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 다섯 살 때부터 예수님 믿는 가정에서 자랐고 그러기 때문에 50년 주님의 사랑 안에 살다 보니까 저는 정말 어떤 때는 “내가 사는 것이 황홀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문득 듭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바대로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고 자기 자식을 스스로 죽이는 비정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 내가 누리고 있는 엄청난 새로운 삶을 맛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저는 그들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길거리를 다니면서 그 일을 하기에는 제가 너무 시간이 바쁘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한번 지난 주간 지나면서 내가 어떤 일에 더 집중해서 할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어젯밤에는 12시 반까지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월요일 밤에는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을 끝내고 금요일까지는 원고를 탈고한다.’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할 것입니다. 결심한다고 바로 해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몇 달 내에 그것이 제 삶의 습관으로 삼겠습니다.

왜 공포합니까? 대로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그룹에서 만나서 새로운 삶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새로운 소원을 말하는 것은 돌아갈 길을 끊어 놓고 우리가 분명히 가야 될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으로 우리는 누굴 사랑해야 되겠습니까? 먼저 우리 구역원들을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그 사람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내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을 베풀어야 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에게는 선물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끼리는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유교 문화이기 때문에 위에 사람, 높은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은 선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선물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정근두 목사가 아니라 우리 교회에 있는 구역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 사랑으로 누굴 사랑해야 됩니까?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도다….시인은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모든 삶의 모든 즐거움이 있는 그들을 보살펴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이웃 사람들, 사랑에 굶주린 이웃들이 널부러져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조그만 사랑만 베풀어도 세상은 바뀝니다. 산불은 결코 온 산에 휘발유를 끼얹어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산을 태웁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작은 친절 하나가 세상을 바꾸어 갑니다. 여러분이 수억씩 벌어서 장학재단, 봉사재단 만들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가끔씩 나눠 드리는 사랑의 옥수수도 좋고 어린양도 좋습니다. 거기에 동전을 채우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채우는 겁니다.

“하나님, 나는 이 동전이 누구에게 혜택이 돌아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동전만 넣지 않겠습니다. 여기에 내 꿈을 심겠습니다, 내 기도를 심겠습니다. 이 동전이 가는 사람의 삶이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이 베푼 작은 사랑실천이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만들어 갑니다. 설 명절에 누구에게 여러분은 사랑을 나타내었습니까? 명절은 지나갔지만 아직도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의 실천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랑으로 우릴 사랑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숨기려고 꾸미려고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다 말해도 하나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십니다. 왜?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고백하기에 힘드셨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들으시고 하나도 놀라지 않으십니다.

다 알고, 익히 알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성도의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떻게 보답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십시오. 다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채워 가십시오. 마지막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며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세상이 갈망하는 사랑에 충족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새로 사랑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웃들을 사랑함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아직도 목숨을 끊기에는 희망이 있는 곳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직 살아 있는데 기댈 데가 없어서 마지막 생명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그런 살벌한 사회로 버려둬야 되겠습니까?

우리 울산교회는 천명, 이천명의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린 뜻을 같이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삶을 살 때 세상은 갑자기 달라질 것입니다. 그때 울산교회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이고 사람들의 칭송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평과 사람들의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 교회, 좋은 교회 울산교회를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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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찬송가] #17장 #사랑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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