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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장 설교 | [하루 한 장] 사무엘상1장_만군의 여호와께 18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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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6 [하루 한 장]“만군의 여호와께” (삼상1장)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http://sungminch.com
사사기의 혼란과 무질서와
룻기의 희망의 씨앗을 지나
이제 사무엘상으로 들어갑니다
신정정치가 끝나고 왕정정치가
시작되는 그 출발점입니다
화려하게 소개되지만 아이가 없는
엘가나와 한나의 모습은
대단해보이지만 미래가 없는
매우 안타까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경쟁자 브닌나는 자신을 비웃고
남편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격동하게 하는 이 위기 속에서
한나는 도리어 주의 여종임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고백하며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그 도우심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를 기억하사
그녀에게 사무엘을 주십니다
이 사건은 이제 이스라엘을
한 시대를 이끄는 강대한 나라로
변화시켜 나가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의 등장을 알리는
웅장한 서막이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끌어 가시는
그 역사의 위대한 페이지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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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무엘상 1장 설교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13,4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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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11.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OVR6y5uHuE

새역사의 시작 (사무엘상 1장 1-8절)

새역사의 시작 (사무엘상 1장 1-8절)

사무엘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는 인물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구원의 모델이라고 하는 출애굽 사건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광야생활을 거쳐 드디어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으로 일단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로서 타락하게 되는 과정이 사사기서이다. 사사기서의 주제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그리고 그 왕의 등장을 알리는 성경이 룻기와 사무엘서

룻기는 이방여인이었던 모압여인 룻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 불리우는 다윗의 조상이 되는가하는 내용이고 사무엘서는 어떻게 다윗이 세워지냐를 다룬 책입니다.

사무엘은 실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그 처소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부르기도 하고, 모세 이후의 첫 대 선지자로서도 여겨지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왕을 세운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사사에서 선지자로, 왕정국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어찌보면 온 인류의 참 왕이신 예수를 예비했던 세례요한과도 같은 역할이 바로 사무엘 입니다.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부모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절에 보면 사무엘의 부친인 엘가나를 소개합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가 있었는데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었더라.” (1절)

이 족보가 나타내 주는 것은 그가 에브라임에 살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레위 족속인 고핫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다음에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주지만 레위 지파에게는 따로 땅을 나누어 주지 않고 6개의 도피성을 비롯한 전국에 퍼져 살게 하였습니다.

레위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에 거주하지 못하고 전국에 퍼져 있는 레위인은 퍼져 있는 장소에서 이른바 산당의 예배를 집례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서를 보면 알다시피 이러한 산당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고 쉽게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기 일수 였습니다. 그나마 경건한 제사장들은 해마다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재교육도 받으면서 그들의 경건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엘가나도 그런 레위인이었습니다. 레위인 이었지만 실로에서 집례하지 못하고 멀리 에브라임 산지에서 살며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는 자였습니다. 속된 말로 하면 중앙에서 떨어져 변방으로 밀려난 레위인이었습니다.

엘가나는 패역한 시대에 나름 레위인으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코자 한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두가지 큰 문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1)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사랑하는 아내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해서인지 당시의 문화 때문인지 엘가나는 둘째 아내 브닌나를 두었는데 브닌나는 자녀를 생산한 여자였습니다. 문제는 이 두 여인 사이에서 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으로 불화가 끊이지 않는 것 보다 더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2) 두 번째의 문제는 영적인 공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매년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매년 가는 이 행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유도 있지만 레위인으로서 영적으로 교육받고 무장받고 돌아와 자기 고장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육해야 하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지금 실로의 제사를 맞고 있는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 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로 성전에서 음행을 저지르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패역한 제사장들입니다.

지금 훌륭한 제사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돌아가도 한 해 동안 사람들을 인도하기가 얼마나 고되고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를 인도하고 지도하는 자들이 가장 부패하고 패역한 제사장이라면 정말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자들이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은 엘가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불행이었습니다.

엘가나의 두 아내인 한나와 브닌나에게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첫째 아내였지만 자녀가 없습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자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식의 의미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업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녀의 영혼을 괴롭히고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한나의 이름은 “은총”이라는 뜻인데 자식이 없으니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도 없는 듯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합당한 기업과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어딜 가서도 떳떳하지 못했고 남편이 사랑해도 그것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사람구실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느라 브닌나와 그 자녀의 분깃보다 갑절이나 그녀에게 더 주며 물질적으로 그녀를 위로하지만 이러한 영적인 허전함은 남편의 사랑으로도, 남편이 주는 갑절의 물질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둘째 아내인 브닌나는 자녀를 가진 아내였습니다. 4절에 “그의 모든 자녀에게”라는 표현을 보자면 브닌나는 여러명의 자녀를 낳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녀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남편의 사랑은 언제나 자신이 아닌 한나에게 가 있습니다. 여러명의 자녀를 낳아도 항상 한나가 더 많은 사랑과 보상을 받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 여자에게는 수치 중의 수치 입니다.

한나와 브닌나의 관계를 보고 있자면 마치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낳아도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열매맺지 못하는 아내…. 두 여인 모두 행복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더 불행한 것은 이 두 여인이 앙숙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채워지지 않는 불행한 삶을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면 그나마 평안할 텐데 사랑받지 못하는 브닌나는 “한나를 격붖ㄴ하게 하여 심히 괴롭게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레위인인데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집례하지 못하고 에브라임 산지에 머물고 있는 엘가나… 그나마 한 해의 영적인 무장을 위해 실로로 오면 홉니와 비느하스로 인해 더욱 영적인 침체를 벗어 날 수 없는 엘가나

남편의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은혜를 잃어버린 은혜라는 이름의 여인 한나

자식이 있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한 여인 브닌나…

이들의 모습은 단지 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 주는 모습이요, 어찌보면 우리의 삶과도 대치해 볼 수 있는 그런 모습들입니다.

문제를 향한 세사람

세사람은 모두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지닌 문제는 이들의 힘으로는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엘가나 – 가장 큰 문제 : 가정의 불화

이때 엘가나가 한나에게 하는 위로를 보십시오.

(삼상 1: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그는 문제를 일으키는 브닌나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한나에게만 내가 니편이니 울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이 한나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금 한나의 가장 큰 고통은 브닌나가 자기를 조롱하고 속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가나는 와서 그 원인도 묻지 않고 단지 내가 널 사랑하니까 다 참으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한나에게도 별로 위로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만약 브닌나가 이 광경을 보면 더욱 브닌나의 속을 뒤짚어 놓는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입니다. 편애는 결국 갈등을 낳습니다. 이삭의 편애가 형제의 우애를 깨뜨리고 야곱의 편애가 오히려 요셉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안겨줍니다.

본문에 비친 브닌나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그녀는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요 탐심이 넘치는 여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가진 것에 분노합니다.

물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남편을 통해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언제나 한나에게 가서 화풀이를 하고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그녀의 질투는 남편의 사랑보다도 한나에게 돌아간 갑절의 물질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러한 시기와 탐심으로 한나를 대하면 대할수록 남편의 사랑은 점점 더 멀어져 갈 것이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하는가?

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어찌보면 자기의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전가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녀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탓이요 변명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자기의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관계요,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뿐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 엘가나에게 탓하지도 않고 브닌나와 맞서서 싸우질 않습니다. 오직 자기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문제를 만난 세명의 인물은 이제 한나에게로 시선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브닌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언제나 문제를 키우고야 마는 엘가나

모든 문제의 근본이 하나님 앞에 있고 그 해결 역시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그 앞에 엎드리는 한나…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옮겨가는 전환점에 우리는 중요한 두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룻과 한나라는 두 여인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모압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베들레헴으로 와서 결국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한나는 모든 문제 앞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그런 시대에서 자기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며 그 앞에 업드림으로 기도의 어머니, 기도의 사람의 대명사가 됩니다.

어찌보면 구원의 이야기는 잉태치 못하는 자가 잉태하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잉태치 못하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하지 못하는 마노아가 순종함으로 삼손을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하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앙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한다는 것은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땀흘려도 보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그런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를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다가 더 큰 구렁이에 빠지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잉태치 못하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선택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고난이 있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고 또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문제가 닥쳤는데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엘가나와 브닌나가 되지 마시고 한나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https://youtu.be/IisEzxxHHOg

1장 1-18절(삼상1:1-18)

성도의 고난

삼상1:1-18

사무엘서는 사사시대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사시대가 끝나는 시점이 사무엘서의 배경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시대는 신정정치에서 왕정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대이며, 신정정치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왕이 되고 주인이 되어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종교적으로 타락했던 그런 시기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들어 종교를 회복시키고, 정치를 안정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그 사무엘의 출생에 관계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장1절에 보면 그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이 족보와 역대상 6장의 족보를 함께 보면 그는 레위족속에 속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에브라임지파에 살고 있는 레위족속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일부다처제가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경건하였던 엘가나도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아내의 이름은 “은혜”라는 뜻의 히브리 말인 “한나”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진주”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브닌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브닌나에게는 아이가 있고,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였습니다. 또한 나아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합법적인 이혼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나가 격었던 이 고난을 살펴보며, 이 고난이 한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으며,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세 가지의 유익이 있습니다.

1.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룹니다.

본문 3절을 봅시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그들은 매년 자기들의 성읍인 라마를 떠나 성막이 있는 실로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매년 3회씩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번 유월절은 온 가족이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 이유로 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절기는 유월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에 올라가 제사를 드리고 제사를 드린자의 몫을 받아 그것을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기 때에 엘가나는 브닌나와 그의 자식들에게는 그들의 분깃만을 주고 한나에게는 다른 사람의 배를 더하여 줌으로 그를 사랑하는 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브닌나를 시기하게 하였고 브닌나는 한나를 못살게 굴므로 한나를 격동시켰습니다. 얼마나 괴롭혔는지 성경은 브닌나를 표현하기를 한나의 대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6절을 봅시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1:6)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셨던 계획을 한나의 삶을 통하여 이루실 수 있도록 한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한나는 많은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힘들고 어려울 뿐이지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이루실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뜻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 고난이 있으나 그 순간에는 그 뜻을 알 수 없었던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은 9장에 제자들과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절)

당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부모의 죄로 인해 자식이 저주를 받아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모의 죄도 본인의 죄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심으로 그를 치료해 주십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요셉을 보면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 하심”이 얼마나 실감나게 그려져 있는지 모릅니다.

부요하게 자란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해 인정을 받고 그 집의 청지기로 봉사 할 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일로 인해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종으로 팔린 것도 그렇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후반에 보면 요셉의 그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요셉의 고난으로 인해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을 받으며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인 애굽에서 400년간 있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오리라는 예언의 성취를 위한 첫 단추가 끼워진 것도 그러합니다.

요셉의 사건을 보더라도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명을 더 볼까요?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복음의 일꾼이 되기 전에는 믿는 자들에게 고난을 주는 자였지만 주님이 그를 만나주신 이후의 삶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삶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소아시아에서 흑해 방향으로 전도를 가려 할 때 하나님은 그를 정 반대 방향인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지방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는 순종하여 배를 타고 마게도냐지방의 빌립보에 도착했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사건을 당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은 그에게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성령충만한 바울도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려집니다. 무엇입니까? 그들이 찬송하고 기도할 때 지진이 발생해 옥터가 흔들리고 빌립보 감옥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의 매인 것이 풀렸습니다. 간수를 죄수들이 모두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말립니다. 그 일로 그 간수와 그의 집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됩니다.

이 사건이야 말로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알려 주는 일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갑시다. 소경을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비밀한 뜻, 요셉에게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비밀한 뜻,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나에게 아이를 주지 않으신 비밀한 뜻은 무엇일까요?

본문7절부터 보면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1:7)라고 합니다. 제사를 드리고 난후 그들은 각각의 분깃을 나누어 배부르게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너무 슬퍼서 먹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슬픔을 인하여 성전에 가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는 11절에서 기도하기를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1)

만약에 그가 괴로움이 없었다면 기도하기를 원했을까요? 만약에 그가 고난이 없었다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 할 수 있었을까요?

한나는 수 년 동안 하나님께 자식을 달라고 매달리며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응답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뜻은 한나로 하여금 먹지도 못하고 울음으로 지새며 절박한 심정이 되어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기를 ‘이제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를 다시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라며 그 아이의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토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나는 틀림없이 삼손의 어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의 어미는 한나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아마 약 30 살 정도 연상이었을 것입니다. 역시 무자하였던 삼손의 어미에게 어느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을 예언하면서 그 아들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것과 그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실인으로 키울 것에 대한 명령이 있었음을 소문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이 때 삼손은 이미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있었고 블레셋 족속에 대한 그 무용담은 이스라엘 방방곡곡에 퍼졌을 것이며 아마 벌써 그 육신의 정욕에 굴복함으로써 서서히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던가를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을 한나는 하나님께 자기에게도 아들을 달라고 구하면서 절박한 심정이 되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자신도 그 아들을 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적부흥으로 이끌어 갈 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셨는데 당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쓰실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제 한 여인을 사용하시어 그러한 사람을 이 세상에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는 뜻”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립니다. 비록 우리가 당장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을 인내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성도의 고난은 자신을 경건하게 만듭니다.

2장을 보면 한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사무엘을 젖 뗀 후(만3세 이후)에 실로로 데리고 와서 엘리에게 보이고 난후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합니다.

이 한나의 찬양의 기도는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 많은 세월동안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그 고난의 기간 동안 인격이 성숙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훈련된 후에 경건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데 고난만큼 빠르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매일 그리고 매년 마다 영적인 브닌나로부터 괴로움을 받고 고통의 나날이 계속되다보면 자신에게 한계를 느끼며 저절로 하나님께로 달려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져 영적으로 성숙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 성숙은 경건한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평안할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다가 고난이라는 문제를 만나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달려가지 않습니까?

한나는 자식이 없는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자주 나아갈 수 있었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 앞으로 밀려나온 한나를 하나님께서는 들어 쓰시어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한 한 사람을 이 세상으로 내 보내는 창구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는 우선 그 어머니가 되는 이 한나라는 여인을 먼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만드셔야 했습니다.

이 합당하게 하는 과정이 바로 한나의 기도 중에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한나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떠셨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언제 성숙하셨습니까? 우리의 경건은 언제 더 온전해 지십니까?

그것은 고난이 올 때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넉넉히 그 고난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성도의 고난은 깊은 기도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본문 12절부터 1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쏟아 놓느라 자신이 어떻게 기도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서서 손을 들고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에 스스로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기도하고 눈물로 얼굴을 뒤덮었습니다. 또한 그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나의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주석학자 풀핏은 말하기를 “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온 심령을 토로하는 깊고도 은밀한 내적기도였다. 또한 이러한 기도는 간절한 소원과 깊은 신앙심 없이는 아무나 하기 힘든 차원의 높고 고상한 기도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본 엘리는 그에게 다가가 언제까지 술취하여 있겠느냐하며 그에게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합니다. 엘리가 늙기도 했지만 그 당시 종교의 타락으로 많은 사람들이 절기 때에 술에 취해 성전에 와 주정을 하는 여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말에 한나는 15절에서 말하기를 “나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여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 뿐이오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통하다”라는 말은 “부르짖다”, “신뢰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한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부르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시나니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에도 성령이 우리가 말로써 발성할 수 없는 탄식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우리 대신 친히 하나님께 간구해 주신다고 말하였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귀에 들리도록 말로써 한 기도가 아니라 성령으로 탄식하고 자기 심정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기도는 말로써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기도를 통하여 한나는 하나님과 깊이 교통 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야곱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가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비록 오늘의 한나와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나 그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천사에게 말하기를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밖에 없었나요? 그것은 그의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들을 저 깊은 고난의 수렁 속으로 몰고 가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깊은 체험을 하게 된 것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해 봄으로써 그러한 순간들은 우리 인생 중 가장 의미있는 체험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을 통채로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기도를 통해서 그리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박한 마음이 되어 우리의 온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고 전심으로 혼신의 기도를 드릴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장 잘 만나 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한나에게 17절과 18절에서 하나님은 엘리를 통해 응답하십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나는 이 약속을 믿고 평안해 졌습니다. 그 증거가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라는 구절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고난의 유익의 세 번째가 깊은 기도의 경험을 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룹니다.

2.성도의 고난은 자신을 경건하게 만듭니다.

3.성도의 고난은 깊은 기도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하심으로 고난이 올 때 넉넉히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매일말씀묵상. 8월 11일. 사무엘상 1장. > 매일말씀묵상

사무엘상 1장. 고통은 우리의 경건과 기도를 성숙하게 합니다.

1. <사무엘상하>는 <열왕기상하>와 연결되어 있는 책입니다. 전후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다윗입니다 . 이들 세 사람이 사무엘상의 주요 인물들입니다. 사무엘의 출생에서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죽기까지 약 100년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2.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에브라임 사람으로 소개되지만 , 아마도 그는 에브라임에 살고 있는 레위인의 후손일 것으로 예측합니다 ( 대상 6).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 그는 레위인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고 , 부유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 그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경건을 유지 하고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상당히 타협하고 있던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 사사기 마지막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 사건에서 보았듯이(이 사람도 엘가나와 같이 에브라임에 거하는 레위인이었다), 엘가나도 두 부인을 두고 있었습니다. 다만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이를 얻기 위해서 두 번째 부인 브닌나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3. 아들을 낳지 못했던 한나는 비록 남편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식을 낳은 브닌나로부터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 하지만 이 불임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5, 6). 한나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한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 한나의 경건은 그의 고통으로부터 빚어진 결과였던 것입니다 . 오늘 우리의 고통, 불만족, 아픔, 괴로움,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빚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4. 한나는 실로에 제사 드리러 와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오래도록 하나님께 쏟아놓았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 자식을 드리겠다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제사장 엘리가 기도하는 한나를 술에 취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점은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풍속도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하지만 사정을 알게 된 엘리는 한나를 축복하고, 한나는 마음에 놀라운 평안을 얻고 돌아가게 됩니다 .

5. “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19).” 기도한 이후에, 제사장의 축복을 받은 이후에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고서 다시 얼굴이 소망으로 빛이 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아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 고향으로 돌아간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낳게 되고, 그의 젖떼기까지 기다렸다가 때가 되어 서원대로 사무엘을 실로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바치고, 엘리 제사장의 수하에 두게 됩니다.

6. 기도 응답 이후에 그의 서원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응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바칠 테니 일단 주시라는 욕심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원대로 아들을 얻었지만, 젖을 뗀 후에는 하나님 앞에 영원히 두기 위해 다시 여호와의 집을 찾아갑니다. 단지 아들 욕심으로 하나님께 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출산 이후의 한나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중요한 것은 , 기도 응답 그 이후입니다 .

7. 고통은 우리의 기도와 경건을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한나의 경건 그리고 그녀의 깊은 기도의 삶은 그녀의 말로 다할 수 없는 불임의 고통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 하나님은 이렇게 한 여인을 준비시켜서 , 한 시대의 인물인 사무엘을 낳게 하셨던 것입니다 . 룻기의 등장인물인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와 마찬가지로, 불경건하고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지키고 살아가는 한 인물로, 사무엘상은 한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인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에 여명을 밝히고 계십니다. 반면에 엘가나라는 인물은 많은 아쉬움을 던집니다 . 레위인으로서 과연 하나님의 법에 따라 거룩하게 살고 있는가 ? 적당한 선에서 경건을 말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 하는 아쉬움 말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혼탁한 영적 흉년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따라 참된 경건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때로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 고난과 어려움과 결핍들이 우리로 적당히 타협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유혹할지라도,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함으로 근심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의 믿음을 빼앗기고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시대에 우리의 믿음이 한나처럼 더욱 빛나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무엘상 1장 설교 | [하루 한 장] 사무엘상1장_만군의 여호와께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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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장 강해 설교말씀] 한나 서원으로 사무엘 출생(삼상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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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무엘상 1장 강해 설교말씀 중에서 한나 서원으로 사무엘 출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엘가나는 한나를 위로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브닌나는 자녀를 낳았다고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한나를 마음이 괴로워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시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하셔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엘리 제사장 밑에서 훈련받게 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사가 됩니다.

한나 서원으로 사무엘 출생(삼상 1:1-28)

[1-2절]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사무엘상 1장은 선지자 사무엘의 출생에 대해 증거한다. 사무엘은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살았던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아들이었다. 엘가나는, 역대상 6장이 증거하는 대로, 레위 지파 사람이었다(6:28; 34-38). 그러면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말은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에브라임 지역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는 자녀들이 있었고 한나는 자녀가 없었다. 레위 사람 엘가나가 두 아내를 취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일이었다. 그들의 갈등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일부일처(一夫一妻)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데서 생긴다.

[3-5절]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엘가나에게는 이런 약점이 있었으나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함도 있었다. 그는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 실로에 올라가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다. 당시에 성막은 실로에 있었으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다.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는 날에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아들들과 딸들에게 주었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다. 그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로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셨다. 자녀의 잉태와 출산은 오로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

[6-8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여호와께서 한나로 자녀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는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였다.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였으므로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켰고 그러므로 한나는 울고 음식도 먹지 아니하였다. 그 남편 엘가나는 그에게 말했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엘가나의 가정에는 평안이 없었고 갈등과 시기와 격동함과 번뇌만 있었다. 브닌나는 교만하였고 남에 대한 동정과 배려가 없었으며 한나는 연약하고 예민한 여성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갈등은 남편의 차별적 사랑 때문에 더욱 커졌다.

[9-11절]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 한나는 일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그때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였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심적 고통 중에 단련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녀를 가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의 훈련을 위해 주신 일이었다. 그는 고통 중에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하며 기도했고 심지어 서원기도를 올렸다. 서원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묶는 간절한 기도이다.

[12-18절]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 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그는 여호와 앞에 오랫동안 기도하였다. 그는 형식적으로 기도한 자가 아니고 참으로 기도한 자이었다. 그는 진실하게,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엘리는 한나의 입을 주목하였고 그가 속으로 말하므로 입술만 움직이며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자 그가 술취한 줄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나에게,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했다.

한나는 대답하였다.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엘리는 그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였고,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며 가서 먹고 다시는 얼굴에 근심하는 빛이 없었다.

[19-23절]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그 사람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하니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엘가나 가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렀다. 엘가나는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였고 여호와께서는 그 여자를 생각하셨다. 한나는 잉태하였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으며 그 이름을 ‘사무엘’(쉐무엘)이라고 지었다. 그것은,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었다.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말하였다.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에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그 남편 엘가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한나는 그가 낳은 아들을 양육하며 젖떼기까지 기다렸다. 아이가 젖 떼는 나이는 보통 2-3살이었다고 한다.

[24-28절]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나는 사무엘을 젖 뗀 후 그를 데리고 수소 셋과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렸다. 그들은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로 갔다. 한나는 말했다.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한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을 그대로 지켰다. 아이 사무엘도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했다.

본장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본장은 엘가나 가정의 갈등을 증거한다. 그것은 일부일처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게다가 브닌나의 인간적 교만과 시기 질투심이 그 갈등을 증폭시켰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근원적으로 죄 때문에 온다. 죄는 슬픔과 불행을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과 뜻에 순종하여 의를 행하는 자는 평안을 누릴 것이다. 이사야 48:17-18,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라.” 우리의 몸의 건강도 그러하다. 잠언 3:7-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저버리지 말고, 그 뜻을 깨닫고 오직 그 뜻에 순종하며 살자.

둘째로, 본장은 우리에게 고통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교훈한다. 한나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다. 게다가, 브닌나는 그를 심히 격동시켰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울었고 음식을 먹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찾고 그를 의지하였고 그에게 기도했다. 그는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는 서원의 기도를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생각하셨다. 한나는 잉태하였고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하며 구한 것을 허락하셨다.

우리의 고통은 한나의 고통과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각 사람의 고통은 각각 다른 종류의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나가 고통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은 것처럼, 우리도 고통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간절히 기도하자. 기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예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누가복음 11장에 기록된 주의 교훈과 같이, 우리는 강청의 기도, 끈질긴 기도를 하나님께 아뢰자. 또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주의 교훈과 같이, 우리는 낙망치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셋째로, 본장은 우리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이행하라고 교훈한다. 사람과의 약속도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지켜야 한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약속이랴!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평생에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였다. 그는 그 약속을 이행하였다. 서원을 이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며 믿고 섬긴다는 표시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있으면, 다 이행하자. 시편 15편은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자의 자격 중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자”를 말했다(시 15:4). 우리도 하나님께 서원한 것, 약속한 것을 다 이행하자.

예수님과 강도 바라바의 관계(막 1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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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기도(사무엘상 1장)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 – 기도하는 이 시간(361장)

한나의 기도(사무엘상 1장)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

기도하는 이 시간(361장)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정리하였습니다.

2019년 4월 19일, 금요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금요기도회

옛날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어느 수요일 날 설교 준비가 좀 빨리 마치게 되어가지고, 교회 계단을 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1층에서 아주 한 젊은 여성이 아기 하나를 가지고 계단을 올라올려고 막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보니까 심한 뇌성마비에 걸려가지고 눈을 뜰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고, 그 아기를 안고 계단을 올라올려고 하면서 ‘이 계단을 올라가면 교회가 나옵니까?’ 그렇게 저한테 물었습니다. 그래서 ‘올라가면 교회가 나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수요일인데 그 김목사님이 오늘 설교 하시느냐’고. 그래서 ‘한다’고. ‘내가 그 김목사라’고 이랬더니 ‘아, 살았다.’ 이러면서 그 아기를 안고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느낌이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하면, 어떤 무슨 운명적인 무슨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좀 시간이 좀 지나고 난 뒤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남편하고 부인하고 결혼했는데, 결혼한 그 해에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 안 좋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만났는데, 그 부채 18억을 이 남편이 떠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를 낳았는데 심한 뇌성마비를 걸린 아기를 낳게 된 것입니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그런 심한 뇌성마비 아기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는 직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사건이 한 해에 다 일어났습니다. 그 때 그 부부는 의논을 하다가 우‘리가 갈 곳이 어디냐, 서울에 있는 그 김목사님이 있는 교회다.’ 그래서 모든 것 다 챙겨가지고, 서울로 올라온 겁니다. 그게 수요일 날 그날 예배가 서울에 올라오는 길이었습니다. 올라와서 인제 교회를 찾아가지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저하고 만난 것이었습니다.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어요. 처음에 탁 만났을 때, ‘이거는 뭔가 운명적인 만남이다. ‘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어려움을 당한 부부에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해 줄 수도 없었습니다. 애를 치료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고, 18억의 부채를 갚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었고, 직장이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가만히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교회를 왔습니다. 그 형제는 빚 18억을 다 갚았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주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뇌성마비 그 아기는 중학교까지 마쳤습니다. 어떻게 그, 지적 능력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중학교까지 마쳤느냐 이렇게 하니까, 그냥 엄마가 데리고 오면 출석으로 졸업한다는 겁니다. 그냥 앉아 있으면 그냥 출석인 거예요. 그리고 중학교 졸업하고 얼마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아기가 하나 태어났습니다. 제가 한 번 서울에 가서 만나보니까, 키가 큰 여자애가 있어요. 외국 애 같이 생겼어요. 얘가 그 딸이라는 겁니다. 죽은 언니 다음에 태어난 애라는 겁니다. 이번에 대학교 합격했다는 거예요.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못하는데, 아주 좋은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머리를 막 레게 머리로 땋아가지고 돌아다니는데, 흑인인 줄 알았더니 아니에요. 한국인. 한국 앤데, 키도 크고, 굉장히 성격이 활발했습니다. 그 형제가 부채 다, 빚 18억 다 갚고, 부자가 되고 난 뒤에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추천사를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말씀 들어라’ 이런 추천을 해야지, ‘돈 모으라’ 이런 추천을 어떻게 내가 할 수 있겠느냐고 그랬더니, 그냥 ‘알겠습니다.’ 이러면서 내 추천사를 받지 못하고 그 책을 내었습니다. 그 형제는 교회 생활도 굉장히 성실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자매는, 그 부인은 더 이뻐졌어요. 더 이뻐졌어요. 그리고 신앙도 굉장히 깊어졌어요. 그 애를 안고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계속 다니고 이러니까 아마 굉장히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결혼하자마자 이놈의 집안이 어떻게 된 집안인지 아버지는 빚만 떠안아주고, 아기는 그냥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고, 남편을 실업자가 되고, 그런데 원망 안 해요. 원망 안하고, 그냥 꾸준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저는 해 준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감사하다고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내가지고, 지금 굉장히 부자가 되었습니다. 월수입이 막 굉장히 많다고 그래요.

얼마전에 대만에 화련이라는 데서 큰 지진이 나서 사람들이 많이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습니다. 그 화련은 제가 가 본 적이 있는 곳입니다. 설교 때도 나오기도 했는데, 대리석이 많이 생산되기도 하고, 또 옥이 나오기도 하고, 그런데 그 관광지가 절벽에 있는 길로 차가 들어갑니다. 굉장히 깊은 골짜기, 바위로만 된 그 골짜기에 길을 내가지고, 관광버스가 들어갑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거기 길은 외길입니다. 들어가면, 지진 나면 못 나와요. 만약 인제 거기 지진이 나가지고, 사람들이 다쳤다면, 방법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가만히 있든지, 아니면 열심히 구조대를 부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이 번 신문에 보니까, 그 부상 당한 관광객들을 막 구조하는 그런 사진이 실린 것을 보고, ‘아유,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늘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엄청난 스트레스, 엄청난 위기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살얼음판 걷듯이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런 현실인데,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가지고 돌연사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자기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자살이라고 하지 않고, ‘극단적인 선택이다’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그 무기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상한 마음이 치료가 되고, 부르짖으며 기도할 수 있는 그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백성만 가지는 특권입니다. 딴 사람들은 그냥 죽든지, 그냥 극단적인 선택을 하든지, 그냥 바보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인데,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듣고, 아, 그 짐을 내려놓고, 기도할 수 있는 무기가 있습니다.

제가 옛날 어느 곳에 근무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사가 굉장히 무지한 그런 사람이고, 아주 아첨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크리스천이고, 제 성격이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줬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할 때는 천국인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지옥이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들었던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어느 누구도 내 천국을 뺏어갈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내 행복을 뺏어갈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주일날은 교회에 있는 게 천국입니다. 월요일부터는 지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거 좀 바꿔주시지 않겠습니까? ‘ 그 기도드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일주일 만에 그 상사가 딴 곳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옮겨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상당히 고위직인데 갑자기 발령이 나가지고, 일주일 만에 옮겨지는 일은 없습니다. 고위직 사람들은 다 자리가 대충 정해져가 있는데, 기도하고 일주일 만에 딱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행복해졌습니다. 행복해지고, 일도 창의적인 일들을 많이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경험을 합니다. 굉장히 행복한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서는 병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고, 또 나름대로 직장에 어려움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고, 결혼이 안 된다든지, 자녀의 문제라든지,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런 어려움들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어떤 때는 그냥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됩니다.

조지 뮬러는 한평생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대통령과 5만 번 통화한 사람은 없습니다. 조지 뮬러는 대통령보다 훨씬 높은 하나님과 5만 번 통화하고, 5만 번 ‘예스(Yes)’ 응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기도하는 것도 쉽지 않고, 기도 응답을 받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을 때, 결국 선택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죽든지, 기도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응답해주십니다. 죽지 마시고, 자포자기하지 마시고. 죽을 그 힘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반드시 길이 열립니다.

1. 한나의 통곡하는 기도

오늘 여기 첫 번째로 한나의 통곡하는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는 원래 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혼자 성전에 가서 통곡하면서 기도하는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여성이었는데, 하나님이 아기를 안 주는데 어떻게 해요. 그래서 그냥 아이가 없이 그냥 살다가 그냥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를 위기에 빠트린 것은 브닌나라고 하는 또 다른 부인이었습니다. 브닌나는 한나가 아기를 낳지 못하니까, 남편이 또 결혼한 여자인데, 보란 듯이, 떡 보란 듯이 아이를 여러 명을 낳았습니다. 그 후에 브닌나의 마음은 교만해져서 사사건건 한나를 괴롭히고, 한나를 대적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시기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시기심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내가 독차지하고 싶은데, 만약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인기 있고, 나보다 더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으면, 죽이고 싶은 정도로 미움이 생기는 것이 시기심입니다.

저도 이 강아지를 한 번 키운 적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이쁜 강아지입니다. 요크샤테리어. 굉장히 이쁜 강아지, 우리 집 아이도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장모님을 모셔야 되는데, 장모님이 개를 굉장히 싫어하세요. 너무 개를 싫어하세요. 개만 보면 연필로 찌르고 이렇게 합니다. 아이를 설득을 시켜가지고, 그 예쁜 요크샤테리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크샤테리어가 새끼를 낳았는데, 주인이 그 새끼를 좋아하니까, 자기 새끼를 물어 죽이는 겁니다. ‘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그거 틀린 말입니다. 이 세상에 개들 다 나빠요. 자기 새끼를 주인이 좋아한다고 물어 죽여 버렸어요. 개도 타락한 게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모든 사람의 심리 속에 이 시기심이 있습니다. 내가 더 이뻐야 되고, 내가 공부 더 잘해야 되고, 내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 되고, 내가 더 유명해져야 되고. 그런데 딴 사람이 더 이쁘고 더 똑똑하고, 더 인정받으면, ‘아, 저거는 안 죽나, 교통사고 나서 안 죽나, 메르스 걸려서 안 죽나’, 그런 미운 마음이 생기게 되고, 이 성격이 콘트롤이 안 되는 사람은 대놓고 막 사람을 적대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미움 당하는 사람은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못 생긴 것도 아니고,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저 사람이 미워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나를 미워하고 못 살게 굴까? 이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쁘기 때문에,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너무 성실하기 때문에, 시기심이 발동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인제 교회 생활을 많이 하게 되면, 아, 내가 너무 이쁘니까, 시기한다 이러면 인제 화장을 안 한다든지, 일을 좀 대충대충 한다든지, 그렇게 해서 살아남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런 걸 모르니까, ‘아, 왜 나를 미워할까? 나는 미워하지 않는데, 왜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할까?’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누가 잘 되고, 높아지는 것을 절대로 봐주지 못합니다. 떨어트려야 되고, 밟아야 되고,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아이들에게 공부 1등해라 이렇게 가르쳐가지고는 안 돼요. 시기심이라는 게 있다는 거, 질투심이 있다는 거, 나무에 올릴 때는 흔들어가 떨어트린다는 거, 그걸 같이 가리켜줘야 안 죽는 겁니다.

한나는 브닌나라는 여자의 시기심의 대상이 되게 됩니다. 브닌나는 한나의 모든 것을 싫어했습니다. 한나를. 남편이 한나를 사랑하는 것도 싫었고, 제사 드린 후에 고기를 갖다 주는 것도 싫었고, 한나가 눈에 띄는 것도 싫었고, 한나가 살아 있는 것도 싫었고, ‘한’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싫었고,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브닌나가 남편이 없기만 하면, 아, 정신적으로 한나를 굉장히 괴롭히고, 스트레스를 줬던 것입니다. 브닌나가 원하는 게 뭔가 하면, 한나가 없어지는 겁니다. 자살하든지 죽든지, 가출하든지 없어져야 이게 시기심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 때 한나는 죽든지, 내가 죽든지, 브닌나가 죽든지,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죽든지 네가 죽든지 하자 이게 이제 그 말입니다. 한나가 죽든지 브닌나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가 결판이 나야 되는데, 한나 자기도 죽을 수가 없고, 브닌나도 죽일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엘가나는 여자들의 관계의 문제를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남편 있을 때는 안 하니까요. 그래서 한나가 울고 밥도 안 먹고 이렇게 하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아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아이 러브 유(I love you),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재물을 갑절이나 주는데, 왜 당신은 행복하지 않으냐고, 왜 당신이 행복하지 않으냐고, 꼭 아들을 낳아야 되느냐고, 나도 남자 아니냐고.’ 그 때 한나는 뭘 느꼈습니까? ‘엘가나는 도움이 안돼. 도움이 안돼.’ 여자들의 그 섬세하고 복잡한 문제를 엘가나는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그냥 고기만 주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아요. 세상에 그런 무식한 남자가 어디에 있어요? 여자들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합니까? 여자들은. 고기 한 덩어리 더 준다고 해가지고 해결 될 것 같으면, 이 세상은 전쟁도 없죠. 아무 어려움이 없죠. 여성들의 문제는 굉장히 복잡합니다. 이걸 엘가나는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그런데 한나는 그 말 못합니다. ‘당신 사랑 필요 없다’ 그 말 못합니다. 도움이 안 돼요. 그러면 한나가 브닌나하고 부딪쳐서 싸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까 벌써 성경에서 느끼는 것이 브닌나가 체력이 엄청나다는 겁니다. 엄청나. 이 여자는 덩치가 엄청나고, 그 팬이 있습니다. 애들은 다 엄마 편 아닙니까? 부부 싸움 할 때 불리한 게 애들은 다 엄마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1대 5로 싸워야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 할 말은 아니지만,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이렇게 힘 겨루기 하면, 우리는 전부 엄마 편이거든요. 아버지 다리 막 넘어뜨리고 그렇게 했다고요. 자주 한 거는 아니지만, 아버지 발 물고 막 이랬다고요. 우리는 전부 엄마 편이기 때문에. 한나는 큰 소리 칠 입장도 못 되고, 브닌나는 이게 벌써 등빨이 이런 거예요. 이게. 등빨이 벌써 굉장한 거예요. 한나는 남편은 도움이 안 되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 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는 없지, 브닌나하고 붙었다가는 이거는 뭐 떡 되기 십상이니까, 한나의 선택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고, 스트레스 받다가 죽든지, 화병으로 죽든지, 자살하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보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겁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우울증 증세가 있는 사람은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넘습니다. 거의 대개 우울증 증세가 있어요. 그 이유가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사회는 굉장히 스트레스를 주고 있어요. 청년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고, 부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고,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주고 있고, 아기들에게도 스트레스를 주고 있습니다. 아기들. 여러분,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이 다니는 학원이 몇 개인 줄 아십니까? 태권도부터 시작해가지고, 영어부터 시작해가지고, 학원을 몇 개 다녀야 되는지 몰라요. 어떤 때는 입력이 잘못 되면 딴 학원에 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소리 없이 사람들을 죽여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미스(Miss)들 얼마나 아름다울 때입니까? 얼마나 웃고, 까불고, 재미있게 놀 때입니까? 그런데 미스들 행복하지가 않아요. 미스터(Mr.)들, 총각들, 우울합니다. 불행합니다. 불행해요. 우울증에 걸리면 정신적으로만 스트레스가 있는 게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도 병이 와요. 많은 병이 옵니다. 많은 병이 와요. 그리고 살아갈 의욕을 잃습니다. 살고 싶지가 않아요.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고, 어떤 때는 1분도 못 견딜 때가 있습니다. 너무 이게 숨을 못 쉬면 화가 납니다. 화가 나면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요. 그러다가 뛰어내리는 겁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를 가족이 아느냐? 모릅니다. 가족이 몰라요. 가족이 알 때는 벌써 이거는 병원 치료를 받을 때이고, 가족도 모르고, 그냥 의사도 모르고, 부인도 모르고, 남편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겁니다. 자기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릅니다. 화만 자꾸 나요.

얼마 전에 어떤 곳에서 조현병 환자가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을 칼로 많이 찔러 죽였습니다. 이 조현증, 정신분열증이죠. 그런데 아무도 그 사람이 정신분열증 환자인 줄 몰랐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본인도 몰랐을 겁니다. 본인도. 그냥 기분이 나쁘고, 이웃 사람들이 다 자기 욕을 하는 것 같애요. 살고 싶지가 않으니까, 불 지르고, 이웃 사람들 도망치니까 칼로 찔러 죽인 겁니다. 자기도 몰라요. 자기는 절대로 옳다고 그러죠. 지금은 이런 일들이 그냥, 그냥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나도. 이 브닌나가 아, 굉장히 스트레스를 주는 거예요. 죽어라, 죽어라. 극단적인 선택을 해라. 아니면 미치든지, 죽든지, 한나는 길이 없어요. 뭐 힘이라도 세면 이 여자하고 한 번 붙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남편은 도움이 안 되고, 죽기는 죽을 수는 없고, 죽을 수는 없고. 요즘은 사람들이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한나가 결정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죽도록 기도할, 죽을 힘이 있으면, 그거 가지고 기도해보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 하지 않습니까? 죽을 힘 있으면 살아보지. 죽을 힘 가지고, 한 번 기도해 보자. 그런데 이때 이미 기도를 할 때 한나는 분노와 스트레스가 그냥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참을 수 없어서 그냥 저절로 막 나오고 있었어요. 사무엘상 1장 10절 말씀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사무엘상 1장 10절: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한나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이 소극적인 여자가, 이 얌전한 여자가 성전에 나가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할려고 했는데, 실제로는 고통이 꽉 차 있으니까, 그냥 고통이 참 울음, 이게 사람의 소리가 아닌, 그 비통한 깊은 상처를 입은 동물의 울부짖는 소리 같은 그런 소리를 내면서 우는 겁니다. 어떤 분은 자기 아이가 이래 죽고 난 뒤에 말을 계속 합니다. 그 왜 그런가 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속에 너무너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꽉 차 있기 때문에 뭐 이야기를 계속 중얼중얼 해야 됩니다. 해야 돼요. 그게 사는 길인 것입니다. 한나는 그냥 그 상처 입은 짐승의 비명 소리를 지르면서 울고, 또 그리고 기도도 하고, 비명과 기도가 섞여 있는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나의 이 기도는 문장으로 된 기도가 아닙니다. 울부짖는 그 통곡과 기도가 섞여있는 그런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입술을 막 물어뜯고, 머리를 집어 땅기고, 자기 뺨을 막 때리고, 막 그러면서 몸부림치는 기도를 한 겁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 당하면 기도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운 일 당하면 기도가 안 돼요. 왜냐하면,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실 것 같애요. 지금까지 기도 많이 했지만, 안 들어주셨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또 이런 어려운 일이 생겼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비겁한 거 같애요. 하나님께서 ‘너 비겁하다. 평소에는 그런 기도 안 하더니 왜 어려움이 생길 때만 기도하느냐’ 비겁한 거 같고, 지금까지 안 들어줘서 이렇게 된 거니까, 또 기도해도 안 들어줄 거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거는 마귀의 생각입니다. 마귀의 생각이고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어느 정도 채워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제일 걸림돌 되는 게 자존심입니다. 자존심. ‘이거 비겁한 거 아닐까?’ 그래서 실제로 기도가 안 나와요. 그냥 가만히 ‘될 대로 돼라’ 그냥 멍청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꼭 서로가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그냥 본인이 기도가 안 되기 때문에 기도해 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지금까지 안 들어주셨다면, 지금은 더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의 생각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상대방을 미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거는 마귀가 뒤에서 조종을 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소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하소연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 엘가나들입니다. 엘가나. 사람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라는 멋진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는 그냥 주절주절 이야기해라는 겁니다. 있는 대로 그냥 이야기 해라는 것입니다. 죽을 힘이 있으면 기도하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안 들어주셨다면, 더 기도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들어주실 때,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2. 한나의 서원

오늘 여기 두 번째로 한나의 서원이 나오게 됩니다. 한나가 반은 막 짐승의 비명 소리를 지르면서, 또 반은 중얼거리면서 기도한 것을 문장으로 만들어 보면, 11절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1절 같이 기도했다는 게 아닙니다. 정리를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실제 기도는 부르짖음이죠. 몸부림이었죠. 11절에 보면,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무엘상 1장 11절: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런 식으로 기도 못했습니다. 이거는 정리를 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지, 실제로 한나의 기도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울부짖음. 그런데 이런 내용이 틈틈이 들어있었던 겁니다. 한나의 기도는 서원 기도였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비참한 여종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의 머리에 면도날을 대지 않고, 한평생을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서원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어떤 일을 걸고서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서원 기도에는 항상 위험이 있습니다. 무슨 위험이 있는가 하면, 내 마음이 변해요. 지금 당장은 하나님께 바치고 싶지만, 시간 지나면 아까운 마음이 들게 됩니다. 또 상황도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서원 기도는 항상 위험성이 따르게 됩니다. 얼마를 헌금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작정을 했는데, 시간 지나고 나니까, 너무 많이 작정한 거예요.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안 하고, 질질질질 끌다가 보면, 결국 안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나중에는 기도할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헌금 떼먹은 놈, 헌금 떼먹은 여자는 뭐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요. ‘헌금 떼먹은 놈’ 이렇게. ‘아들을 주시면 선교사로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너무 잘생긴 거예요. 아들이 못생겼으면 그냥 선교사로 그냥 보낼려고 했는데, 너무 잘 생겨서 주위에서 전부 ‘배우 시켜라, 배우 시켜라’ 이러는 겁니다. 배우 시켰어요. 마음이 늘 찜찜합니다. 아, 이 놈의 자식이 왜 이래 잘 생겼냐, 좀 못생겨야 선교사로 보내도 안 아깝지. 아들을 주시면 목사로 하겠다 이랬는데, 공부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 너무 잘하는 거예요. 서울대 막 붙는 거예요. 법대 붙고, 고시 붙고, 의대 붙고 막 이러니까, 선교사로 보내기가 너무 아까운 거예요. 좀 돌대가리 같아야 우간다나 이런 데 보내도 안 아까운데, 막 MIT 이런 데 들어가고. 이게 다 있은 일들입니다. 있은 일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서울대 나오죠. MIT 가죠. 하버드 가죠. 선교사로 보내기가 너무 아까운 거예요. 너무 잘 생긴 거예요. 이건 탈렌트예요.

그래서 미래를 담보한 서원은 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한 번도 약속헌금을 시킨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마음이 변하고, 사람은 마음이 하루에 열두 번 변하는 사람은 적게 변하는 겁니다. 500 번씩 변합니다. 500 번씩. 뭘 믿고 그렇게 헌금 하겠다고 작정을 합니까? 목사님들은 그게 좋은 게 아니에요. 저는 차라리 건축을 못해도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서원 기도는 뭔가 하면, 지금 은혜 받아서 너무 기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내가 기꺼이 부담 안 되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은 이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병원에서 진찰을 했는데, 암으로 나왔습니다. 유방암으로 나왔습니다. 옛날에만 해도 암에 걸리면 다 죽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이 분은 자기가 죽는구나 이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제 큰 병원에 가가지고, 정밀검사를 해보니까, 암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분이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생각을 했어요. 내가 어차피 내가 수술을 했을 것이고, 치료를 받았을 것인데, 그 돈을 그냥 내가 사먹고, 생활비로 쓰기에는 참 아깝다. 좀 의미 있게 썼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사람이 수술비용과 치료비용을 헌금으로 내는 겁니다. 그거는 참 좋은 것이죠. 우리 교회에 그런 식으로 해서 장학금을 헌금하는 분이 계셨어요. 장학금으로. 너무 감사해가지고, 이거 그냥 쓰기에는, 생활비로 쓰고, 옷 사 입고 이거보다는 그냥 하나님께 드리자. 장학금으로 내요. 이게 인제 시험도 안 들고, 굉장히 좋은 그런 겁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잖아. 지금 내가 돈이 있는 거잖아. 지금. 그러면 좋은 겁니다. 외국에서도 하버드라든지, 예일대라든지, 이런 명문대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참 감사해가지고, 유학하고, 아프리카나 또는 아시아나 또는 어떤 이런 데 가서 자원 봉사를 1년이나 2년 합니다. 참 좋은 거예요. 하버드 나오고, 그 다음에 또 박사 받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박사 받고, 그 다음에 교수 되고, 그리고는 죽고.

저는 평신도로 자원봉사 7년 했습니다. 7년. 봉급 한 푼 안 받고, 7년 했습니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한평생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한평생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그냥 목사 되게 하는 바람에 심장병이 왔어요. 한 평생. 한평생 그냥 평신도로 살고 싶었어요. 월급 안 받고. 참 좋았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서울대에 들어가고, 하버드 들어가고. 이러면 아프리카로 가는 거예요. 아프리카로. 학교에 휴학계 내고, 아프리카로 가는 거예요. 전쟁터로 가는 거예요. 아, 이게, 이게 멋진 것이지, 거기서 뭐 공부해가지고, 박사 받고, 교수 되고, 그러니까 학장 되고, 병신 같은 것들, 그래가 죽고 말이죠. 심장병 걸려가 죽고 말이죠. 어떤 분은 신앙이 너무 좋아가 아이를 주시면 목사를 만들겠습니다. 애는 자기는 절대로 목사 안한다는 거예요. 자기는 딴따라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싸웁니다. 계속 싸워요. 너는 서원했다. 애는 막 ‘나는 서원 안했다’는 거예요. 나는 딴따라가 좋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뭐 기타치고 이거 얼마나 아름답게 봅니까? 옛날에는 그거 전부 상놈들이 하는 건 줄 알았거든요. 지금은, 지금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이 찬양이 없으면, 참, 우리 부흥회도 지장이 있을 겁니다. 찬양 때문에 진짜 부흥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조건을 달면 안 됩니다. 미래에 대해서 조건을 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하버드나 예일대나 버클리나 이런 데 딱 들어가면, ‘야야야, 너 교수 되고, 박사 받고 이런 생각하지 마라. 너 저 아프리카나 가고, 아시아나 가고 말이지, 이런 데 가가지고, 자원봉사도 좀 하고 말이죠, 캠프도 가고, 주일학교도 좀 봉사하고, 이런 생각을 해야지, 무슨 공부만 죽어라고 해가지고, 그렇게 교수 되고, 학장 되고, 총장 되고, 죽고,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라고 하지 마라. 우리 인생이 뭐 공부할라고 태어난 인생이냐.’ 그거를 가르쳐 줘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1년이나, 2년이나, 10년 봉사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인생이 늦어지느냐, 안 늦어집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보면 대사가 되고, 무슨 굉장히 성공을 해요. 벌써 생각하는 스케일이 벌써 틀리거든요.

오늘 우리나라는 보면 막 그 고시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굉장히 속 좁은 인간들을 만들어냅니다. 똑 같은 놈들입니다. 우리는 우수하고 뛰어난 머리를 가질수록 ‘아, 이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구나. 하나님께 바쳐야 되겠구나. ‘ 이거를 부모가 가르쳐 줘야 됩니다. 엄마가 가르쳐줘야 됩니다. 어떤 분은 자기는 아프리카에서 자원봉사를 너무 오래 한 거예요. 몇 십 년을 한 거예요. 그래서 결혼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우자를 만나지 못해가지고. 50이 넘어가지고 배우자를 만났습니다. 비슷한 연령의 배우자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러면서 본국에서 저하고 이렇게 같이 앉아가지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그 분이 참 하나님의 뜻은 놀랍더라 이러면서 50이 넘어가지고 결혼을 했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머리가 좋아서 판검사가 되고, 빨리 의사가 돼가지고, 종합 대학 교수가 되고 그래봐야 한 사람도 못 살립니다. 우리 교회는 일부러 그래 안 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래 승진시켜준다 해도 승진 안합니다. 교회 예배드리고, 주일학교 봉사하고 싶어가지고. 개업도 안하고, 그냥 의사로서, 왜냐하면 예배도 마음껏 드리고, 마음껏 봉사하고.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라요.

성경에서 서원을 해가지고 비참해진 사람이 입다입니다. 입다는 창녀의 아들이기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암몬 자손들이 쳐들어왔는데, 길르앗 사람들이 리더가 없는 거예요. 애들이 전부 수시, 정시, 수능 만점 먹고 이런데, 리더십이 없는 거예요. 리더십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찾다찾다 보니까, 입다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입다에게 돌아오면 장관을 시켜 주겠다고. 입다는 딱 압니다.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전멸한다.’ 이런 불길한 예감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아상이 좋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참 자아상이 좋아야 됩니다. 성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어떤 누구에게도 나는 비겁하지 않는다.’ 이 자아상을, 이걸 가져야 돼요. 입다는 무당 아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굉장히 신앙이 좋고, 뜨겁고 이래도 이 안의 피의 몇 %는 무당 피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조건을 답니다. 만약 이기고 오면 집에서 처음 나오는 사람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래 안 해도 하나님은 지금 이기게 하실려고 지금 작정하고 있는데, 그냥 기도하면 안 들으실 것 같아요. 뭔가 큰 거를 걸어야 될 거 같애요. 전쟁에 이깁니다. 전쟁에 이기는데, 파죽지세로 이기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처음에 딱 뛰어나온 사람이 누굽니까? 집에서 일하는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할머니들 조심해야 돼요. 희생의 1번 타자로 할머니들을 생각하거든요. 다 살았으니까. 그런데 애가 막 튀어나오는 겁니다. ‘너는 나를 비참하게 하는 자로다’ 하나님께 맹세를 했기 때문에 그 애를 죽입니다. 결국. 애를 죽여서 하나님께 바칩니다. 안 해도 하나님은 이기게 하실 것인데. 그의 마음속 몇 %, 한 1%, 2% 정도의 무당의 피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싫어합니다. 무당이 예수 믿고 교회 오는 거는 좋지만, 무당은 싫어해요. 어릴 때 제일 싫어했던 벌레가 무당벌레입니다. 그래서 제 아내는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은 무당이라는 말만 붙으면 그렇게 싫어하느냐고. 저는 지금도 어떤 사찰에 가면 거기 물 안 먹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막 마셔요. ‘아, 하나님이 주신 건데’ 이러면서 막 마십니다. 저는 안 마셔요. 안 마셔요. 제 아내에게 1%의 뭔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제사 드린 음식 절대 안 먹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식었죠. 그리고 그런 것도 몰라요. 좌우간 싫어요. 좌우간 싫어해요. 뭐 미신과 관계되는 것은 무조건 싫어해요.

그런데 한나는 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이야기 했을까요? 아들의 인생. 아들이 죽자고 자기는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나는 머리를 깎겠다고 막 대들고 이러면 어떻게 해요? 한나는 브닌나가 자기를 막 괴롭힐 때, 자기는 죽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하나님, 한나는 죽었습니다. 한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낳은 아이도 없는 겁니다. 우리는 다 유령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한나는 그거를 아이에게 설득을 한 거 같애요. 애에게 ‘엄마는 그 힘센 여자 있지? 그 여자가 괴롭힐 때, 엄마는 이미 죽은 거야. 그리고 너는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한 평생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거야. ‘ 그런데, 그 애가, 좌우간 교육이 굉장히 무섭습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거. 우리 유치부 아이들이나 유아부, 영아부 아이들, 교육이 굉장히 무서워요. ‘밥 먹을 때, 기도해야 된다.’ 이런 것도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밥 먹을 때, 기도하는 거 제일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집 애가 할아버지를 막 야단치는 겁니다. 왜 밥 먹을 때 기도 안 하시느냐고. 애가 막 ‘왜 기도 안하고 밥 먹으시느냐’고 할아버지한테 이야기하니까, ‘하께, 하께’ 이러면서 그 손녀를 못 이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교육이라는 게 굉장히 무섭습니다. 여러분, 이 중고등부 아이들도 교회 다닌다는 게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위기 때, 위기 때 애들이 분명합니다. 분명해요. 선생님들이 뭐라고 이상한 이야기해도 딱 틀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죽은 거야. 너희 엄마는 죽은 거야. 그리고 너는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 있어. 우리 유령인간이야. 유령인간 참 좋지? ‘ 그러니까 애도 ‘아, 그거 참 재미있겠네.’ 이래가지고 하나님께 바치는 겁니다. ‘하나님께 절하고, 기도하고, 이거 참 재미있다.’ 애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 어린이들 그 헌금 거두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유치부에서 어린이들이 헌금 거두거든요. 헌금 거두는 거 굉장히 좋아해요.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지니라”(마태복음 16장 24절)

우리는 누군가가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주었을 때, 교통사고가 날 뻔 했을 때, ‘그 때 나는 죽은 거야. 나는 죽은 거야, 나는 없는 거야.’ 누가 막 욕해도, ‘나는 없는데 뭐’ 시기해도 ‘나는 없는데 뭐’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되는 것이지, 자기가 살아있으면, 자꾸 유명해질라 그러고, 자기주장을 하게 되고, 자기 잘난 체하게 되고, 절대로 십자가 못 집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자꾸 죽을려고 하면 삽니다. 지금 우리는 죽을려고 하는 겁니다. 금요일 날, 금요일 날 왜 그렇게 자꾸 나오느냐, 죽을라고 나오는 거라고. 금요일 날 살라고 막 텔레비전 보고, 맛있는 거 자꾸 먹고 이러면 나중에 살쪄가지고 죽는 겁니다. 물에 빠졌을 때, 막 살아날라고 발악하면, 물에 가라앉습니다. 굳어져가지고요. 힘을 쫙 빼면 떠오릅니다. 힘을 빼면 떠올라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정도로 고통을 받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응답의 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하는 자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다. 이 고통을 알아야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지, 고통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천국 갈라고요. 마음의 고통, 육체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도 모르면서 무슨 예수를 믿는다고 그래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3. 엘리 제사장의 오해

오늘 여기 세 번째로 엘리 제사장의 오해가 나오게 됩니다. 이 때 제사장은 나이가 많은 엘리 제사장이었는데, 한 번씩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봤던 거 같애요. 하필이면 딱 그 날 엘리 제사장이 나와 가지고, 성전을 둘러보고 있는데, 그 때 인제 어떤 젊은 여자가 나와서 막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발광하는 것도 아니고, 좀 이상했어요. 여자가. 정상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딱 이게 운명적인 만남인 겁니다. 운명적인 만남. 어쩌면 딱 그 날 하필이면 엘리가 시간이 나가지고 성전 뜰에 이래 왔는데, 그 때에 이 한나가 와가지고, 막 기도를 하는데, 이거는 기도도 아니고, 발광도 아니고, 이거는 그냥 상처 입은 짐승 소리를 내면서 막 울어대는데, 늑대 소리도 아니고, 고양이 소리도 아니고, 사람 소리도 아니고, 그리고 막 울어대는데, 말은 하나도 안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엘리 제사장이 내린 결론이 뭔가 하면, ‘이 여자는 술 취해서 알콜 중독자가 돼가지고, 술 주정을 하고 있다.’ 이렇게 판단을 한 겁니다. 그래서 이 여자에게 성전에 와서 술 주정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책망을 줍니다. 12절부터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사무엘상 1장 12절: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사무엘상 1장 13절: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사무엘상 1장 14절: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한나에게는 엘리 제사장의 이 말이 참 실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한나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서 지금 하나님 앞에서 막 통곡하고 비명 지르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그런 사정 하나도 이해 못하고, “넌 왜 술주정을 하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이렇게 하니까, 이 한나가 원하는 대답하고 얼마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까? 아마 다른 사람 같으면 막 화를 냈을 겁니다. ‘뭣이라고요? 제가 술 취한 여자로 보입니까? 모르면서 아무 소리 하지 마세요. 이 늙은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이렇게 화를 냈으면 한나는 40년 더 기다려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 응답을 주시기 전에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십니다. 그 믿음을 달아보시는 게 뭔가 하면, 거절이고, 모욕이고, 멸시와 천대입니다. 거기서 합격을 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로라는 이방 지역에 갔을 때, 한 이방 여인이 자기 딸이 귀신 들려가지고, 정신병에 걸려가지고, 막 발광을 하는데,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예수님은 들은 체도 안 합니다. 자꾸 고쳐달라 그러니까 제자들이 ‘아, 예수님, 이 여자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데, 고쳐주든지 말든지 뭐라고 한 마디 하세요.’ 이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법이 없느니라” 여자를 아예 개 취급을 했습니다. 다른 여자 같으면 욕을 퍼부을 겁니다. ‘내가 무슨 개라고요? 그러면 한 번 물려 보세요.’ 이러면서 막 물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벌써 자기의 자존심을 예수님 앞에서 다 버렸습니다. 이미 말씀을 들었어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자존심 다 버렸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그러면서 “네 믿음대로 되라”고 말했습니다. 요즘은 개 키우시는 분들이 참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개들도 주인의 침대에 올라갑니다.’ 이러면 불합격이에요. ‘요즘 저희 개 저하고 같이 안고 잡니다.’ 이러면 불합격이에요. 요즘 그런 개 생각하면 안 돼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래 겸손하게 대답해야지, ‘우리 집에서는 개가 왕입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그거는 불합격입니다.

오래 전에요. 오래 전에 어느 교회에 가서 제가 개 설교를 했습니다. ‘주인의 음식을 말이지,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법이 없다고 말이지’ 이랬더니 그 교회가 막 난리가 났습니다. 왈왈 거리면서, 우리를 개 취급 한다고 말이죠. 예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아예 막 못 들은 체 하십니다. 그 때 어디로 가야 됩니까? 어디로 가야 돼요? 술 마셔야 됩니까? 텔레비전을 봐야 됩니까? 어디로 가야 됩니까? 그래도 계속 달라고 해야 됩니다. 해결해 달라고.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은 지금 하나밖에 없는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무릎꿇고 간절하게 딸에게 손을 얹어 기도해줘서 딸을 낫게 해 달라고, 그래서 예수님이 가겠다고 해놓고 또 딴 여자하고 무슨 병 고치는 거 가지고 한참 이야기하는 동안에 집에서 연락이 와가지고 애가 죽었다고 그럽니다. 야이로는 막 예수님이 원망스러워요. 그런데 애가 죽어 가면 같이 뛰어가가지고 기도해 주면 애가 낫는데, 살아나는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꾸물거릴까? 애가 죽어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애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 “달리다쿰” 탁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더 좋은 것을 주세요. 그래서 선 봤는데, 깨지고 이러면 더 좋은 남자, 또 깨지면 더 좋은 남자, 그래서 어떤 처녀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더 좋은 남자 원하지 않습니다. 안 깨지게만 해 주십시오. 저는 마 차인표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그런데 자꾸 깨지는 거예요. 최고로 잘 생긴 거 줄려고 그렇게 하시는가 봐요.

히스기야가 병에 걸려서 죽어 가는데, 얼마나 기도 많이 했겠습니까? 그 백성들, 제사장들, 선지자들, 얼마나 기도 많이 했겠습니까? 왕이 죽어가니까요.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이 뭡니까? 이사야를 보내서 “너 곧 죽을 거니까 집안 정리해라” 그게 답이었습니다. 죽는 것이 응답이었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벽을 쳐다보면서 막 통곡을 합니다. 늑대 소리 내면서. 늑대 소리인지, 이게 뭐 상처 입은 맹수 소리인지 막 웁니다. 그 때 하나님 뜻이 딱 바뀝니다. 이사야가 ‘죽는다’고 전달하고 가는데, ‘돌아가라”고 그럽니다. 돌아가라고. “네가 15년을 더 살 것이라고” 그리고 “그 증표로 해시계가 뒤로 10도 물러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나도 엘리 제사장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죽었습니다. 한나는 브닌나가 자기를 괴롭히고, 갑질을 하고, 못살게 굴 때, 한나는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무슨 화를 내겠습니까? 제사장이 무슨 소리를 해도 화를 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나는 죽었기 때문에, 한나는 없어졌기 때문에. 한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딴 사람 이야기처럼 자기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15절과 16절에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마음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상 1장 15절: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사무엘상 1장 16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한나는 그 제사장이 너무 엉뚱한 소리 하는데 화를 내지 않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고 한심하다고 푹 한숨을 쉬거나, ‘당신의 말을 듣고 나는 실망했소. 난 하나님께 안 오겠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차분하게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이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내가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고 그냥 입만 달싹달싹한 것은 큰 소리로 기도할 그런 염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만약 그렇게 기도한다면, 이게 감정이 막 터져 나와서 걷잡을 수 없이 될까 싶어서 조금씩 조금씩 뱉어낸 것밖에 없습니다. 저의 기도가 이렇게 길었던 것은 술이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원통함과 격분함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저의 기도가 그렇게 길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하거나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합격입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남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자기 입을 다물 수 있다면, 그리고 참 온유하게 설득을 시킬 수 있다면, 이거는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고, 이거는 합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분노와 격정과 우리의 슬픔을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입을 다무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아, 요즘 막 테레비에서 하듯이 소리 막 지르고, 소리 막 지르고 이렇게 하는 것은 다 불합격입니다. 한나는 자기는 ‘술 마시고 주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거나 양식이 없거나 날씨가 너무 더우면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막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세를 욕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40년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욕하고 소리 지르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 알았다. 40년 더 돌아라” 그래서 40년을 더 돌아야 되는 겁니다. 지금 스무 살이라고요? 아, 네. 60에 정신 차리게 될 겁니다. 지금 60이라고요? 100 세에 정신 차리게 됩니다. “돌아” 계속 돌리는 겁니다. 계속 돌려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감정을 잘 콘트롤하고, 말을 많이 예쁘게 할 때, 말을 아이들에게도 막 떼쓰고 이렇게 하면 예쁜 말을 해라고 이야기해야 됩니다. 예쁜 말을 해라고. 그리고 소리 지르지 마라고. 엄마도 소리를 지르지 마세요. 엄마가 막 마이크 대놓고, ‘이 망할 놈아’ 이렇게 하면 망합니다. 애들이. 틀림없이 망합니다.

엘리는 그 당시에 영성이 굉장히 떨어지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정말 기도가 부족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오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이쁘게 말하는 이 여인을 보았을 때, 아, 자기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마음이. 그래서 17절에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하는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무엘상 1장 17절: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엘리는 그 한나의 말을 듣고, ‘요즘 세상에 이런 여자가 어디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엘리 당시에는 사람들이 분노에 꽉 차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말을 안 듣습니다. 성전에서 제물을 강탈하고, 여자들을 건드리고, 그리고 막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자기 멋대로 다 하는데, ‘어떻게 이런 시대에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하는 여자가 있는가, 천연기념물이구나. 보석이구나.’ 그래서 엘리도 확신을 합니다. ‘오늘 네 기도 한 것은 응답이 된다. 이거는 합격이다. 내가 보기에도 이거는 완전히 합격이다.’ “하나님이 너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기를 원하노라” 아주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한나는 이게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8절에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사무엘상 1장 18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한나는 하필이면 그 시간에 엘리가 보러 와가지고, 자신에게 아주 긍정적인 축복의 말을 해주었을 때, 이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그때부터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금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브닌나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브닌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브닌나를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 무식한 여자,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이 브닌나에 의해서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한나는 엘리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기드온은 양털을 통해서, 양털이 이슬에 젖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적진에 들어가서 적들이 꿈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에 싸워서 이겼습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들에 핀 백합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를 통해서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번에 파리에 노트르담의 성전이 불탔는데, 아, 사람들이 그 꼭대기에 있는 그 닭 동상을 떼 가지고 왔습니다. 그 동상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불 타는 가운데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을 건져내어왔습니다. 진짜 가시면류관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거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생물들, 살아있는 사람을 통해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살 수 있는 길이 없는 거 같고, 절벽이 나를 에워싸고 있어도 여러분, 하나님에게는 살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 길을 꼭 열어주실 것입니다. 죽을 힘을 가지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무거운 짐과 답답한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풀리지 않는 어려움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시고, 응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모든 슬픔과 고통들, 하나님 앞에 내려놓게 하여주시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덤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기도할 때에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료출처: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 2019년 4월 19일, 금요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금요기도회>

대구동부교회 홈페이지

http://dongbu.org/sub02/sub02_1.php

성경 66권을 모두 설교하시고 책으로 엮어내신

김서택 목사님의 강해설교집을 소개해드립니다.

서적과 테입 판매의 수익금은 전액 청소년 사역을 위해 사용됩니다.

문의: 053-780-8000 (교회사무실)

책 한 권, 말씀 한 구절로도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강해설교집:

순종하는 자의 형통

불순종하는 자의 파멸

시편의 세계 안에서 뛰놀자

시편강해 2집: 시편 51-100편

김서택 목사님 출간도서 목록

기도하는 이 시간(361장)

https://youtu.be/gtQ6vM4Fq14

​기도하는 이 시간(361장)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무릎 꿇고

우리 구세주 앞에 다 나아가네

믿음으로 나가면 주가 보살피사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 속에 기쁨 충만하네

기도하는 이 시간 주가 곁에 오사

인자하신 얼굴로 귀 기울이네

우리 마음 비우고 주를 의지하면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 속에 기쁨 충만하네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엎디어서

은밀하게 구할 때 곧 응답받네

잘못된 것 아뢰면 측은히 여기사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 속에 기쁨 충만하네

기도하는 이 시간 주를 의지하고

크신 은혜 구하면 꼭 받으리라

의지하는 마음에 근심 사라지고​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 속에 기쁨 충만하네

사무엘상 제1장 강해: 사무엘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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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무 엘 서

히브리 원전에 있는 사무엘서는 본래 상, 하권으로 분리되지 않은 한 권의 책이지만, 70인 역에서 상, 하로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 원전이나 70인 역 모두 본 서의 제목을 ‘사무엘의 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무엘서가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스라엘 신정왕국의 건립 및 초기 왕들의 역사에 있어서 사무엘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사무엘서의 저자를 사무엘이라고 했지만 삼상 25:1에 사무엘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또 사무엘 사후의 상당 기간의 역사까지 세세하게 기록한 것을 보면 사무엘서를 사무엘이 기록했다는 근거가 희박해 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 상은 크게 3부분으로 내용을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7장까지 최후의 사사인 사무엘의 출생과 활약상에 대하여 또한 그의 말기에 왕정 체제가 요구되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으며, 8-15장에서는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 올바른 신관이 붕괴된 후에 왕권이 상실되어 새로운 왕 다윗이 등장하게 됩니다. 16-31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부름을 받은 다윗은 사울의 핍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 등극을 하게 되고 하나님 뜻에 합한 왕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치세를 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제1장 강해: 사무엘의 출생

사무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공식 태동한 이후 사무엘 때까지 이어져 온 신정체제(Theocracy)가 사울, 다윗을 중심으로 건립된 왕정체제(Monarchy)로 변화되는 과도기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상권에서 사무엘은 신정체제에서의 최후의 사사였고, 왕정체제 수립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여 택한 왕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이스라엘 왕국이 신정왕국이 되도록 산파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8절: 사무엘 가문의 배경입니다. 사무엘은 혈통적으로 레위 자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장차 이스라엘의 영적지도자로 활약하는 데 신분적으로 하자가 없음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는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외면적으로 경건한 자였습니다. 이는 장차 그의 가정에서 태어날 사무엘이 어릴적부터 하나님의 종으로서 경건하게 준비되고 훈련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술의 현손이더라.

에브라임 산지는 팔레스틴 중앙부에 위치한 산간 지대입니다. ‘에브라임 산지’로 불린 잉유는 그곳이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이기 때문입니다(수 17:15). 그러나 그곳의 일부는 베냐민 지파의 영토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거주하였습니다(수 18:11). 이런 에브라임 산지는 땅이 매우 비옥하여 포도, 올리브, 무화과 등의 소출이 풍부하였다고 합니다. ‘라마다임’은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의미하는 두 개의 고지라는 뜻입니다. ‘소빔’은 파수꾼이라는 뜻으로 사무엘의 조상인 숩의 후손들 혹은 그들이 거하는 땅을 의미합니다(대상 6:26, 35). 그러므로 ‘라마다임소빔’은 ‘숩 땅에 있는 고지들’이라는 의미로 사무엘의 조상들이 거했던 장소임을 나타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8km 지점에 있는 도시로 신약에서는 ‘아리마대’로 불렸습니다.(요 19:38). 이곳은 줄여서 ‘라마’로도 종종 불렸는데(19절; 삼상 7:17) 본 절에서 정확히 언급된 것은 당시에 있던 여러 라마(수 18:25; 19:8, 29, 36)와 혼동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엘가나(אלקנה)’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형성하셨다.‘ ’하나님의 소유자‘입니다.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것은 엘가나의 출신 지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에 거주하던 자임을 나타냅니다. 대상 6:16-28, 33-38에서 보면 그가 레위 지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기업이 없기 때문에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종교적 직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엘가나의 조상들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직분을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술의 현손이더라.‘ 이 같은 족보는 대상 6장에 나오는 족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를 종합해 보면 사무엘의 아비 엘가나가 레위이었음만은 분명해집니다.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하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중혼 제도는 성경적인 결혼관에 위배가 됩니다. 창 2:24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만드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많은 아내를 거느렸던 경우가 있지만, 시대와 인습에 기초해서 묵허된 것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거느렸을 경우 대개 심각한 갈등과 비극이 따랐던 점에 의해서도 입증이 됩니다.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암흑기인 사사 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보편적 사회 현상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주변의 이방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삿 9:1). 엘가나는 한나가 잉태하지 못하여 아내를 더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도 그 시대의 풍습에 따른 것일 뿐 성경의 원리는 아닙니다. 엘가나의 가정에 일어난 갈등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한나(חנה)’는 ‘풍성한 은혜’ ‘사랑스러움’이란 뜻입니다. ‘브닌나’(פננה)는 ‘홍보석’ ‘진주’라는 뜻입니다. 엘가나와 같이 남성들의 이름은 주로 종교적인 의미를 많이 지니고 있는데 반해 여성의 이름은 보석이나 애정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자식을 둔 브닌나와 달리 한나가 무자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그 일로 인해 심적 괴로움과 압박감을 당했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많은 자녀를 거느리는 것을 하나님의 풍성한 복으로(시 127:3, 4), 무자한 것을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 년에 세 차례씩 정기적으로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에 중앙 성소에 나가서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도록 의무화 되어 있었습니다(출 23:14-17). 엘가나는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엘가나가 레위인이면서도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결점이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열심은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실로’는 예루살렘 북쪽 30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여호수아가 이곳에 성막(tabernacle) 세운이래(수 18;1) 사사 시대 동안 이곳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체바오트: יהוה צבאות)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축약어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는 260회 정도 나오는데 여기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지역 신이 아니라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엘리(עלי)‘는 ’존귀한‘ 즉 ’여호와는 존귀하시다‘의 뜻입니다. 엘리의 가계는 구약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의 전승이 있는데 하나는 그가 ’이다말‘의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대상 24:3)과 다른 하나는 이다말과 경쟁 관계에 있는 엘르아살 가문에 속해 있다(출 6:23, 24)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역사 요세푸스는 엘리를 아론 자손 중 이다말의 후손으로 봅니다. 이처럼 엘리의 뿌리는 불분명 하지만 사무엘의 출생 시기에 자신이 사사 및 대제사장 직무를 맡고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한 것으로 볼 때에 아론의 후손임은 분명하며 상당한 믿음과 영향력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자녀들을 올바로 지도하지 못해서 방종의 길로 걷게 하였다는 점입니다(삼상 2:12-17, 21-25).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가 노쇠하자 대신 제사장직을 수행한 두 아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벨리알의 아들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악한 자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삼상 2:12). 이는 곧 저들이 여호와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다름없는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삼상 2:17, 22). 엘리 말기에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략을 당해 대해를 당하고 만 것은(삼상 4장) 결코 이들의 죄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제물의 분깃’ 화목 제물 가운데서 제물을 드린 자에게 속한 몫을 말합니다. 그 몫은 여호와께 속한 기름과 간에 덮인 꺼풀과 콩팥(레 3:3-5), 그리고 제사장에게 속한 가슴 및 우편 뒷다리(레 7:34)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였습니다. 화목 제물을 먹는 규례는 첫째 감사제의 경우에는 제사드린 당일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서원제나 자원제의 경우에는 그 이튿날까지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만약 먹다 남은 고기가 생겼을 경우 그것은 불태워 없애야 합니다(레 7:15-18). 이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에 대한 존중 사상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이러한 잔치는 기쁨의 잔치가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는데(신 12:2; 16:11) 신약 시대의 성찬식과 애찬식을 통한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과 우리, 우리 서로간의 교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행 2:46)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갑절(마나 아하트 아파임: מנה אחת אפים)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기본 의미는 ‘특별한 분깃’입니다. 벌게이트 역에서는 ‘슬픔’ ‘안타까움’으로 번역하여 본 절을 ‘엘가나는 한나에게 그녀의 분깃을 줄 때에 슬퍼하였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한나의 무자함에 대하여 위로하고 애정으로 감싸는 엘가나의 애틋함을 나타내주는 구절로 이해하였습니다. ‘70인 역에서는 ’한 분깃‘으로 번역하여 ’하나에게는 한 분깃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한나에 대한 엘가나의 극진한 사랑을 잘 나타내 줍니다. 이는 남편인 그가 아내의 약점과 부족함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감싸주었음을 의미합니다.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한나의 무자함은 그녀의 육체적 결함이 아니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시기까지 출산을 유보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 18:9-15; 21:1-7)와 야곱의 아내 라헬과(창 30:1, 2, 22-24),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삿 13:2-5, 24)와 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격동하다(카아스: כעס)’는 ‘성가시게 하다’ ‘괴롭히다’ ‘화나게 하다’는 뜻입니다. 브닌나는 한나가 무자한 것을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하여 그녀를 괴롭히며 마음을 아프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엘가나가 자신보다 한나를 더 사랑한 것에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기도 합니다.(5절) 그러나 브닌나가 어느 때보다 성결하며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그 자리에서까지 한나를 시기하며 괴롭힌 것은 가정적 차원의 불화를 넘어서 하나님 앞에서 망령된 행실을 보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을 교훈삼아 성도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성도끼리의 다툼이나 미움으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브닌나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한나를 박대한 것이 오히려 남편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를 사랑하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가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괴롭게 한다면 그 성도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여 함께 웃고 우는 것이야말로 성도의 도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롬 12:15~16).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의 슬픔에 대한 엘가나의 위로의 말입니다. ‘어찌하여’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울며’ ‘먹지 아니하며’ ‘마음이 아프뇨’라는 말을 사용하여 한나에 대한 세심하고도 애틋한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고 위로하기는 하지만 아들이 없어 애통하는 한나의 슬픔을 씻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엘가나가 두 아내를 거느린 것이 결국에는 가정의 화목을 깨고 한 여인에게는 깊은 슬픔과 마음의 상처를 안겨 주는 비극을 가져왔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말씀에 청종하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9-18절: 한나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실로에 올랐던 남편 엘가나를 따라 하나님의 성소에 이르렀을 때에 브닌나에게 당한 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심히 통고하였습니다. 만약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게 됩니다. 한나는 엘리의 오해도 받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당한 일과 그 신앙심을 알게 된 엘리로부터 평안함과 형통함의 축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의 출생이 단순한 인간적 사건이 아니라 위대한 신앙적 사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지만 자신의 사욕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의를 추구하며 기도한 후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한나를 돌아보시고 사무엘을 잉태케 하셨습니다. 이는 한나 개인의 기쁨을 넘어서 이스라엘 최후의 위대한 사사이자 뛰어난 영적 지도자였던 사무엘의 출현을 낳은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우리가 미처 예기치 못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고 역사를 진행해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이 때문입니다(눅 18:1-8; 살전 5:17).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화목 제사 후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드린 자가 가족이나 이웃과 더불어 갖는 공동 식사를 마친 후를 가리킵니다. 엘리가 의자에 앉았는데 ‘앉다(야솨브: ישׁב)’는 ‘직무를 행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역시 엘 리가 단순히 성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음을 뜻하기 보다는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헤칼 예호와: היכל יהוה)’ 엘리 당시는 아직 성막(Tabernacle)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왕궁’을 뜻하는 ‘헤칼’을 사용한 것은 성막이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심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시 5:7).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마음이 괴로워서’(마라트 나페쉬: מרת נפשׁ)는 ‘영혼이 괴로워서’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아픔과 슬픔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자함으로 인한 한나의 슬픔은 남편의 위로의 말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여호와 앞에 울며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나의 깊은 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재 아니하겠나이다.

‘서원’은 하나님께 대한 변개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민 30:1, 2) 한나의 서원은 아들을 일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뜻합니다. 만일 자식을 주시면 그 자식은 근본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여 그 자식5을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롬 2:1)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만일(임 라오: אם־ראה)’은 성취를 확신하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믿음을 표현하는 말이지 앞날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의심을 표현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에서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간구하는 한나의 마음 상태를 보여줍니다. 한나는 ‘돌아보시고’ ‘생각하시고’ 잊지 아니하사‘ 3중적 표현으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긍휼과 자비를 간구하는 간절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성경에서 머리는 전인격체를 지배하고 좌우하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머리털‘은 그 사람의 힘, 더 나아가서 생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런 머리나 머리텅레 임의로 손을 대지 아니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권위자 하나님께서 계심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삶과 의지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헌신의 다짐입니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의 기도의 간절함뿐만 아니라 끈질김을 보여줍니다. 기도는 한 번 드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계속해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통하여 끈질긴 믿음의 기도가 결국에는 응답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1-8)

13-14: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돌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나의 기도는 온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은 정성스럽고 은밀한 기도였습니다. 이는 흐느껴 울며 애원한 모습과 함께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잘 나타내 줍니다. 엘리는 하나의 이런 모습을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화목제를 드린 후 갖는 공동 식사에서 포도주를 과도하게 마셔 취하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대체로 히브리인들은 말 없는 묵상 기도는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엘리는 경건한 여인 한나를 술 취한 여자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런 엘리의 오해는 한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겠지만 그러나 한나의 믿음은 그것까지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모두 자신의 같은 슬픈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통한 것(솨파크: שׁפך)’은 는 ‘쏟아 놓다’ ‘부르짖다’의 의미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소리 나지 않는 묵상 기도였으나 온 몸과 마음을 다한 전인격적인 기도였음을 나타냅니다. 성도에게 이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눅 22:44).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가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악한 여자(바트 벨리야알: בת־בליעל)로 여기지 마옵소서’ 악한 여자는 ‘벨리알의 딸’(a daughter of Belial, KJV)이라는 뜻입니다. 벨리알은 본래 ‘사악한 자’ ‘악랄한 자’를 뜻하는 일반 명사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불량자(삼상 2:12)’ ‘악인’(나 1:15)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점차 그 뜻이 변하여 신약 시대에는 사단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고후 6;15). 그러므로 한나 자신이 성전에서 술 취해 주정하는 무가치하고 질이 나쁜 여인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애절한 성도의 기도를 술 취했다고 꾸짖은 것은 능히 반격을 당할 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할 수 있는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고 ‘나의 주여’라고 엘리를 불렀습니다. 이런 한나의 태도는 술 취함의 오해가 벗겨지는 것은 물론 그의 신앙을 증거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오해나 비난을 받았을 때에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엘리는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고 한나의 기도가 응답 받기를 위한 축복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이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대제사장이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게 된 것은, 한나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런 한나의 자세가 친구를 만들고, 대적자를 축복자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엘리가 빌어 준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얼굴에 수색이 없다는 것은 평안하다는 뜻인데, 기도가 응답될 것은 전적으로 믿는 믿음에서만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19-28절: 하나의 서원 기도가 응답되어 마침내 위대한 사사이자 동시에 선지자이며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이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수유기가 끝나자 한나는 자신의 서원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 위대한 어머니로서의 한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약속을 망각하고 배은망덕하기 쉽지만, 한나는 그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무엘은 유년기부터 신앙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들어 쓰시는 가운데, 특히 헌신하는 자들을 통하여 그 뜻을 펼치시며 역사를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생각하다(자카르: זכר)’는 ‘기억하다’의 뜻으로 어떠한 일을 마음속에 항상 담아 두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8:1; 느 5:19)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잉태케 하신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혜무아엘(שׁמוה־אל)’ 즉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사무엘은 한나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아 얻은 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매년제’(제바흐 하야밈: זבח־הימים)는 때를 따라 드리는 제사‘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해미다 지킨 제사로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삼상 20:6, 29). 그런데 일 년 삼 차례 지켜야 하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중 어느 한 절기에 매년 제를 지켰는지 아니면 그 절기들과 별도로 지켰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서원제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공식화하는 제사입니다. 여기에서 정관사 ’ב‘(the)가 붙은 것은 자식을 주시면 일평생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 하나의 서원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민 30:6-8에 의하면 그 남편 엘가나가 서원을 무시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의 서원에 동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부는 영적, 육체적으로 동반자가 되어야 함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벧전 3:7).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한나가 성전에 올라가지 않고 아이를 돌본 것은 그녀의 신앙이 퇴보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자였기 때문에 젖떼기까지 신앙 안에서 양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자녀들을 키울 때에 혈육이기 때문에 키우는 것에 앞서 하나님께 바친 하나님의 백성을 키우는 관점에서 대해야 합니다. 즉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며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생후 3년 동안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레위인들은 25세에서 50세까지 성소에서 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민 8:24,25). 그러나 한나는 서원한 대로 젖 뗀 후부터 영영히 사무엘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꼭 갚는 것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성도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입니다(렘 44:15).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엘가나는 한나가 서원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동의하며 축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엘가나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아내의 뜻을 막지 않고 존중하며 기도로 도와주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4,25: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수소 셋(파림 쉐로솨: פרים שׁלשׁה)’말은 ‘3년 된 수소 한 마리’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25절의 ‘수소(하파르: הפר)’ 단수이므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24절의 ‘수소’(파림: פרים)가 복수이므로 모순이 됩니다. 그러므로 ‘수소 셋’이란 번역이 맞다고 봅니다. 아마도 엘가나와 한나는 세 마리의 수소 중 한 마리는 서원 제물로, 나머지 수소는 화목 제물(감사 제물)로 드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원한 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한나의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루 한 에바’ 가루는 번제를 드릴 때 소제물로 함께 드리던 고운 곡식 가루입니다(레 2:1, 2, 13). 에바는 고체의 부패를 재던 단위로 1에바는 약 22리터에 해당합니다.(출 29:40)

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이런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는 독특한 맹세의 방식입니다(삼하 14:19; 왕상 1:29; 왕하 2:2). 이처럼 맹세에 있어 ‘삶(생명)’이 언급되는 것은 맹세의 진정성을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한나가 자신이 기도하며 서원한 것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주셨음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잇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자식에 대한 모성애를 초월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한나의 굳은 신앙적 자세를 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했던 자세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창 22:1-19).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신앙과 헌신을 귀히 보시고 그녀에게 세 아들과 두 딸로 갚아 주신 것입니다(삼상 2:21). ‘그 아이는 거기서~ 경배하니라.’ 여기서 ‘그 아이’는 사무엘이라고 하기보다는 엘가나와 한나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3살이 되도록 신앙 안에서 키웠다면 서툴기는 하겠지만 얼마든지 하나님께 경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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