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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 장 설교 | 로마서강해 | 로마서 5:1-11 | 하나님 사랑, 정말 믿습니까? | 유기성 목사 131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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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1-11절 말씀 묵상 [김연희 목사] – 복음뉴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와 화목하길 원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자기를 비우시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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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4/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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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화) “로마서 5:1-11” / 작성: 최현준

[본문] 로마서 5:1-11 [찬송가] 294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5)] 로마서를 처음 마주했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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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0/5/2021

View: 1800

[로마서 5장 강해 설교말씀] 칭의(稱義)의 결과(롬 5:1-21)

로마서 5장에서는 칭의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죄에 있을 때에는 전혀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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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dk153.tistory.com

Date Published: 6/27/2022

View: 6368

소망, 오늘과 내일을 바꾸다(롬 5:1~11) – 유평교회

본문: 로마서 5장 1~11절. 설교자: 이병권. 로마서 5장이 좀 다른 분위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구분할 때 4장까지가 편지의 첫 번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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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1/13/2022

View: 2264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롬 5:1-4)

2021-04-21 우인택 목사 로마서 5:1-4 …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볼 5장에는 ‘이신칭의’가 어떻게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지 그 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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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tynch.kr

Date Published: 4/18/2021

View: 7563

9월 9일 큐티설교(로마서 5:1-11) 확증하여 보여주신 하나님 사랑

로마서 5장부터 8장까지 가르쳐주는 내용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소망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을 가르쳐 줍니다. 로마서 5:1 말씀을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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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iic.net

Date Published: 10/14/2022

View: 573

[로마서 5장 설교말씀]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일때!(롬 5:1-11)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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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ihonsam153.tistory.com

Date Published: 9/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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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 mission – 그리스도인의 특권 (로마서 5:1-11)

1장부터 4장까지 죄에 대해서 지겹게 들었습니다. 인생은 100%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의롭다 할 인생이 없고… 그 예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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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10/5/2022

View: 356

[로마서 5장 주일 성경말씀] 구원의 축복들(롬 5:1-11) – 엘벧엘

오늘은 로마서 5장 주일 성경말씀 중에서 구원의 축복들이라는 하나님 … 님은 사위 부족에게 설교할 기회가 있게 되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렇게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el-bethel.tistory.com

Date Published: 3/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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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 로마서 5:1-11 | 하나님 사랑, 정말 믿습니까? |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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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로마서 5 장 설교

  • Author: 선한목자교회
  • Views: 조회수 62,214회
  • Likes: 좋아요 877개
  • Date Published: 2019. 3.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e6QxouG59Q

로마서 5장 1-11절 말씀 묵상 [김연희 목사]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이란?

(로마서 5:1-5: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죄인인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강하게 선포합니다(로마서 3:23, 5:12). 이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주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소망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에 대해 말씀합니다.

즉,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평해야 합니다(1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합니다(2절). 더 나아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깊은 신앙의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3-4절).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화목과 하늘의 소망과 성령 안에서의 희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가운데 피할 수 없는 여러 모양의 크고 작은 어려움과 환난도 함께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고난을 대하는 주의 자녀들의 태도가 예전과는(믿기 전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부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희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와 화목하길 원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자기를 비우시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길 원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자기를 비우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화목 제물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만에 살아나신, 즉 자기를 비우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처럼 성부 성자 성령님의 자기 비움을 통한 사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화평과 소망 가운데 즐거움을 누립니다. 이 복음의 비밀 중심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 되신 십자가의 사랑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자기를 비워 화목하게 하신 사랑임을 알고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이 사랑에 힘입어 우리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길 원합니다.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이웃과도 화목하길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통해 내 뜻과 내 생각과 내 계획을 고집하며 불평과 원망할 것이 아니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도록 자기를 비우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평 속에 마음의 평안, 삶의 평안을 얻을 뿐 아니라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들어주신다는 하늘의 소망과 천국의 영생을 바라보므로 우리 모두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세워지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2020/11/24(화) “로마서 5:1-11” / 작성: 최현준

[본문] 로마서 5:1-11

[찬송가] 294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5)]

로마서를 처음 마주했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주전 753년 왕정으로 시작해 공화정과 제정으로 정치 체제를 바꿔사며 넓은 영토를 통치했습니다. 지중해 연안 전체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로마의 통치 전략에는 정교한 법이 있었습니다. 로마 법에 의해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서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었으며 법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법률 용어와 법정 분위기가 자연스레 연출 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까지는 마치 법정에 와있는 것처럼 다소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율법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아브라함을 증인으로 불러내어서 유대인들이 왜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 받지 못하는지 변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판장이 되어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유무죄를 가리고 형벌을 선고하셨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인 재판에서 판결이 확정 된 후 형을 집행하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미 죄의 판결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형이라는 법정 최고형을 집행 받았음에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채 저마다의 근거에 기초하여 불가능한 항소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사람의 영적 상태를 가리켜 에베소서 2장 5절은 ‘허물로 죽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로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이라고 표현하지만 성경은 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단호하게 죄 아래 모든 인간은 죽은 상태였다고 선포합니다.

죄로 인해 죽은 우리는 항소할 수도 어떠한 소망을 기대할 수도 없는 전적 무능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치러야할 죄의 댓가를 대신 치르셨으며, 하나님은 누구든지 이와같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믿기만하면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의롭다 여김 받은 성도가 여전히 죄의 유혹 가운데 연약한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며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영원한 소망 가운데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은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이전까지는 하나님과 적대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의 표현처럼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크고 작은 실수를 하였을 때 그것들로 자녀와 원수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교우님들의 자녀가 “나는 당신 같은 부모님은 이제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아들이, 딸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면 단순히 실언한 것으로 대충 넘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담은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충성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어야했고 이전처럼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약속은 일방적으로 파기 되었고 아담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었던 에덴에서 추방 당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약속은 회복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아담 이상의 권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갈4:6). 따라서 모든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은혜를 입게 되었고 소망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5)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2절에서 ‘들어감’이라고 번역 된 헬라어는 사람에게 적용 될 때에는 A가 B에게 C를 소개해주어 친분을 맺을 수 있도록 돕는 의미이며, 사물에게 적용 될 때에는 배가 항구에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암초와 같은 죄의 유혹에 부딪혀 파선하지 않고 은혜의 항구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절과 3절에서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성도의 중심 감정이 ‘즐거움’인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성도의 즐거움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성도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어떤 외부의 힘과 환경의 변화로도 성도가 가진 기쁨의 근원을 흔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으로 우리는 잠깐 낙심할 수 있지만 이내 영원한 기쁨 안에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기쁨 보다는 우울감과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주도하고 있다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우리의 소유에 마음이 빼앗긴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고 우리의 마음을 오롯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며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영원한 소망을 묵상함으로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환난을 믿음으로 대응할 때 특별한 연쇄 작용을 일으킵니다. 첫째로 환난을 만난 성도는 인내를 이루게 됩니다. 성도의 인내는 단순히 힘든 상황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약속에 근거한 소망을 견고히 붙드는 것입니다. 성도는 환난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목적 삼았던 것들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보며 잠시 힘들어하지만, 이내 환난도 녹여내지 못하는 변함없는 소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인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숨은 우상들을 구별하고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환난 중에도 주님 안에 있는 소망을 붙드는 과정을 통과한 인생은 단단해 집니다.

연단이라고 번역 된 헬라어는 사물에 사용 되면 품질 보증을 받은 것을 의미하며 사람에게 사용 되면 훌륭한 인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어 번역은 연단을 ‘성품’이나 ‘인격’을 의미하는 단어(Character)로 번역하였는데요 NASB는 ‘증명 된 성품’(proven character)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하루 아침에 형성 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의 성품은 믿음으로 인내한 시간들이 빚어냅니다. 모세는 그의 다혈질적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 가운데 연단 되어 마침내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민12:3). 성도의 성품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내하는 시간만큼 빚어집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다고 해도 믿음으로 구별 된 삶을 살지 않았다면 성품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환난은 성도로 하여금 염려와 걱정과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결한 성품을 빚어내는 통로가 됩니다.

성도가 환난으로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소망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바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헬라어 ‘엘피스(ἐλπίς)’는 희망으로 채워진 확신을 의미합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긍정적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약속에 근거하여 장래의 은혜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아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에도 소망을 품고 선포할 때 그와 같은 행동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음은 성도의 소망은 단순한 자기 긍정이나, 긍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보증하시는 믿음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도가 고난을 겪을 때에 때로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는 것 같고 함께하시지 않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붙들고 있던 소망을 포기하고 싶게 만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당장에 마주한 고난을 물리쳐 주시거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주시는 대신에 성령님을 통해 고난 중에도 소망을 붙드고 있는 성도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확인시켜 주십니다. ‘부은 바 됨’이라는 묘사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잘 표현해줍니다.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쏟아 부어져서 넘치는 모습입니다. 고난으로 인해 메말라있던 성도의 마음은 단비와 같이 쏟아지는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회복 됩니다. 비록 마주하고 있는 문제가 당장에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될 때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신뢰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을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의 소망은 문제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변함 없는 사랑으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한 희망으로 채워진 확신입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6-8)] [(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6절은 헬라어 본문에서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에게 고난을 허용하시고, 인내를 요청하시지만 그럼에도 변함 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확증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6절), 경건하지 않은 자였을 때(6절), 아직 죄인 되었을 때(8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사랑을 받을만한 어떤 이유도 찾기 어려운 상태였음에도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즉, 처음부터 우리는 사랑받을만한 자격이나 삶의 행위가 없음에도 일방적인 사랑으로 살 길을 얻었기에 때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를 붙들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확증 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셔서 고난 중에도 소망을 붙들게 하십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성령의 충만을 간구애햐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식이 아닌,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상황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인생의 수 많은 갈림길 속에서 최선의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음에도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확신에 차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문제 상황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지나고 보면 오히려 장애물이 아니라 지름길이 되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느니라(9-11)] [(9-1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성도가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적용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성도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음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강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과거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며 현재 삶 속에서 죄의 유혹과 뜻하지 않은 환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소망을 견고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매일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장래의 은혜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확신에 찬 소망이기에 교회 밖의 사람들은 조롱하며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소망 안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변함 없이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심을 신뢰하며 눈 앞의 상황으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함으로 변함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나 깊이 알아가며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내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일방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여전히 연약한 인생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구하게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으로 인생을 견고하게 세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마주한 눈 앞의 상황과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현실로 인해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성령님을 통해 확신하게 하셔서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우리를 지으신 주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신실하게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심을 신뢰하며 상황이 아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로 배우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상태는 어떠하였습니까?

2. 성도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지금 마주하고 있는 어려움을 믿음으로 대처할 때 예상 되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4.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드러난 우리 안에 숨은 우상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최현준)

[로마서 5장 강해 설교말씀] 칭의(稱義)의 결과(롬 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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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에서는 칭의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죄에 있을 때에는 전혀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양자의 영을 받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칭의(稱義)의 결과(롬 5:1-21)

1-11절, 하나님과의 화목, 즐거움, 구원의 확신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디카이오덴테스 과거분사)이라는 원어는 칭의(稱義)가 점진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고 단회적임을 보인다. ‘누리자’라는 말(에코멘)은 어떤 사본들과 역본들에 ‘누리느니라’(에코멘)고 되어 있다.

칭의의 결과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과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해 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큰 특권이며 복이다. 그것은 에녹과 노아와 욥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이다(창 5:21-24; 6:9; 욥 29:4).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는 칭의(稱義)의 은혜를 가리킬 것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이제 칭의의 은혜 안에 서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은혜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하며, 결코 이 은혜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칭의의 은혜가 곧 구원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얻는 것은 그를 통하여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칭의의 결과 중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장차 올 영광스런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신과 견고한 소망에서 나온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롬 3:23),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얻은 성도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천국의 영광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인 것이다.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鍊鍛)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평안할 때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연단’이라는 원어(도키메)는 ‘연단의 경험’ ‘연단된 인격’이라는 뜻이다. 환난이 성도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여 그의 소망을 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환난은 온전한 인격을 위해 유익하다.

[5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도의 소망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헛된 꿈이나 망상이 아니다. 성도의 소망이 확실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확증이시다.

[6-8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그](善人)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확증하셨음이니라].

우리가 불경건과 죄 가운데서 연약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이며 그 사랑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았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사랑인가! ‘그 선인(善人)’(투 아가두)은 앞에 말한 ‘의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9-11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확실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 성도가 장래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을 것이며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도는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므로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오고 그의 마지막 진노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다.

바울은 또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한다. 칭의의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릴 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이요 천국을 소망하며 항상 기뻐하는 삶인 것이다.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은혜 때문이며 환난 중에도 낙심치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달려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

넷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도 확신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현재 하나님과 담대히 교제하게 할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대에서의 구원도 확신케 한다.

12-21절, 영원한 생명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그 안에서 혹은 그것에 근거하여](에프 호)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러므로’라는 말은 21절 전체에 연결되어서 “이러므로 한 사람 아담으로 죄와 사망이 들어왔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의와 영생이 왔다”는 뜻이라고 본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 그 한 사람이 아담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의 사건을 가리킨다. 인류의 죄와 사망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담의 첫 범죄는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그 안에서’라는 말은 한 사람 아담 안에서 혹은 그의 범죄에 근거해서라는 뜻 같다. 인류의 대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의 결과로 죽게 되었다.

[13-14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본문은 문맥상 삽입적 성격을 가진다. 인간의 사망의 원인은 죄이다. 율법이 없었던 모세 이전에도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다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죄인은 누구나 다 죽는다.

[15-16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왜냐하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죽었으나]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넘쳤음이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定罪)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살았고, 또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정죄(定罪) 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하였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많은 사람을 지배할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풍성히 받아 영생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6)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본절이 이 단락의 요점임을 보인다. ‘한 범죄’는 ‘한 사람의 범죄’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고 ‘의의 한 행동’도 ‘한 사람의 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라는 말은 직역하면 ‘생명의 의롭다 하심에’인데, 그것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가 생명임을 보인다. 의와 생명은 함께 간다. 죄는 사망이요 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생명의 칭의이다. 즉 칭의의 결과는 영생,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15절부터 18절까지 반복되는 말씀은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어떻게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아담의 죄는 온 인류의 죄이었다. 이것이 원죄(原罪)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이 원죄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또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증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그러나 정반대의 내용으로, 이 본문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어떻게 믿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은혜로 풍성히 넘치도록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많은 사람을 대신한 속죄’이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셨고(마 20:28), 그의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신’ 피이었다(마 26: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된 것이다.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는 불순종이다. 죄악된 세계의 특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다. 순종은 의요 불순종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과 의를 요구하신다. 노아는 순종하는 의인이며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갈렙도 그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최고의 모범이시다. 그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율법을 주신 자로서 친히 율법을 준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그의 순종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의가 되셨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의 안에 거해야 하며,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거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잠잠히 믿고 순종하되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가진 진리가 진리일진대, 우리는 하나님과 성경 교훈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20-21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가 적었으나 율법을 알게 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 본성의 전적 부패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고 넘쳤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의 크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의 정도에 비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죄사함을 많이 받은 자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눅 7:47). 이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많은 죄의 사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얻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죄들은 크고 심각하였으나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는 크고 놀라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첫 사람 아담의 죄의 전가(轉嫁)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에 대해 증거하며, 또 우리가 받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로서 영원한 생명을 증거한다.

첫째로, 온 인류의 대표자이며 시조(始祖)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다 죄인이 되었고 죽게 되었고 정죄함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언약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원죄(原罪)이다.

둘째로, 우리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였다.

셋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생이다. 죄는 죽음이요 의는 생명이다.

[민수기 히브리어 원어 성경강해] 레위 지파 직분과 계수 명령(민 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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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오늘과 내일을 바꾸다(롬 5:1~11)

제목: 소망, 오늘과 내일을 바꾸다

본문: 로마서 5장 1~11절

설교자: 이병권

로마서 5장이 좀 다른 분위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구분할 때 4장까지가 편지의 첫 번째 본론이고 5장에서 8장까지가 편지의 두 번째 본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4장까지 바울의 설명이 좀 논쟁적이었다면 5장에서는 좀 달라집니다. 5장 1절이 그러한 전환을 만들고 있습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

바울은 지금까지 설명했었던 복음의 핵심, 의롭다 하심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요약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말을 하면서 복음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특히 오늘 본문에서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우리 성경으로 계산하면 15번이나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에게” “우리로” “우리”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가 경험하는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딱딱한 말로하면 ‘칭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고 친숙한 말로하면 ‘구원받은 우리가 누리는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가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소망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복은 하나님과 화평입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로 되어 있는데, ‘누리자’로 번역하는 것보다 ‘누린다’, 혹은 ‘누리고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다른 모든 성경들은 청유형이 아니라 평서형으로 ‘누린다’로 번역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고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에 하나님과 어떤 관계였습니까?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원수였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전쟁 중에 있었습니다. 누가 주인이냐를 두고 그 통치권을 내가 차지하기 위해 계속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무지했기에 상대를 모르고 까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진멸하지 않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전쟁을 끝내셨습니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질병이나 가난이나 재난이나 전쟁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신들이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 자료에서 보니까 당시의 사람이 신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했던 행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러운 누더기를 두르고 자기 집 밖에 앉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여러 가지 죄와 잘못을 고백하면서 종종 벌거벗고 진창에 구른다.‘ 방법이나 모양은 다르지만 지금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고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부적을 쓰기도 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갖가지 일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화를 풀게 하려고 이렇게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과 노력을 다한다 하더라도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화목제물이 되셨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 화평을 10절과 11절은 화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복은 은혜에 들어감입니다.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그 은혜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표현을 두고, 학자들은 두 가지의 상황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는 왕을 알현하기 위해, 왕을 만나기 위해 왕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으로, 또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리 성소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합니다. 어느 것이든 아무나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허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왕이 계신 곳, 그 특별한 곳에 들어가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로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왕의 원수 집안이었던 므비보셋이 언제나 왕의 식탁에서 왕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런 원수였는데 왕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이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자기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생각해서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나의 상태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할 때 완료시제를 사용합니다.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일은 전에 있었고 그 결과는 계속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갔다가 상황에 따라 다시 쫓겨나오고 또 상황이 괜찮으면 다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변덕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것처럼, 흔히 역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왕의 곁에 있더라도 계속 그 안에 머물기 위해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눈치보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굳게 서 있습니다. 언제든 그분께 나아갈 수 있고 친밀한 관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감을 얻은 그 은혜의 자리는 안전합니다.

셋째 복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롬5:2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그날에 우리가 하나님처럼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로운 상태로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9절과 10절에서도 이러한 미래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그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연약해서 실패하고 자주 넘어집니다. 괴로울 때도 많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홍해의 그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기대하며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여전히 거친 광야의 길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잊을 때도 있고 그 영광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우리가 소망으로 그 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장막이 걷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이 변화되어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누리는 복,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그러면 이 복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어지는 3절부터의 본문은 좀 특별한 방법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2절과 3절을 무엇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요? 2절과 3절에 나오는 같은 말이 무엇입니까? ‘즐거워하다’입니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만납니다. 기쁜 일도 있지만 슬픈 일도 있습니다. 문제가 없고 인생이 잘 풀릴 때 그럴 때 즐거워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환난 중에 있을 때 즐거워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우리는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여기 이 말씀은 환난 그 자체를 즐기라는 말은 아닙니다. 환난 자체를 좋아하고 환난 당할 때 웃고 그러면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환난 자체는 괴롭고 힘든 것입니다. 즐거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환난을 통해서 얻는 것, 하나님이 그 환난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환난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 환난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33).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행14:22). 환난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환난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환난을 가지고 특별하게 훈련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특별 훈련과정은 이러합니다. 환난을 통해 인내를 이룹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고 연단은 다시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훈련 프로그램입니다.

우리가 각 단어의 의미를 알면 이 훈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환난은 쉽게 말하면 ‘압박’입니다. 당시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을 짜기 위해 누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삶을 힘들게 짓누르는 것을 환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형태의 압박을 경험합니다.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압박을 만나고 경험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자로서 겪게 되는 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이나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환난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환난을 말합니다.

이러한 환난은 인내를 이루게 됩니다. 인내는 ‘밑에 남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끈기 있게 견디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 왔을 때, 그런 압박이 있을 때 위에서 나를 누릅니다. 계속 밑에 남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피하는 것입니다. 압박이 고통스러우니까 그 자리를 피하고 그 사람을 피합니다. 힘든 일을 피하고 부담스럽고 어려운 것, 하기 싫은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내하면, 압박의 자리 그 밑에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환난이 나를 누를 때 도망가지 않고 그 밑에 남아서 끈기 있게 견디면 우리는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연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한다는 것은 압박에 대해서 끈기 있게 밑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운동을 할 때 어떻습니까? 힘듭니다. 하지만 힘든 운동을 계속하면 근육이 생깁니다. 그리고 근육이 생기면 그 일이 더 쉬워집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핑계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근육은 생기지 않습니다. 나에게 압박이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피하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님을 위한 환난을 계속 피한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단단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내한다면 우리는 그 열매로 연단을 이루게 됩니다. 연단은 문자적으로 ‘시험’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시험을 통과한 상태를 말하는데 비유적으로 단련된 인격을 의미합니다. 끈기 있게 압박을 견디면 우리는 단련된 인격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선하신 뜻대로 환난을 통해 우리를 빚으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더 하나님을 닮게 하시려고 우리의 성품을 다듬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더 분명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소망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열매를 기대하며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환난을 이기는 위로가 됩니다. 소망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바꿉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었다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국가대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축하하며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국가대표가 되고 나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고생입니다. 엄청난 훈련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생이 훤히 보이는데 왜 사람들이 축하하고 기뻐합니까? 열매를 기대할 수 있고 그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국가대표로서 가질 수 있는 소망이 있기에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에 영광을 바라보고 오늘을 다르게 삽니다. 내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바꾸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환난 어떤 압박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환난으로 채워진다 하더라도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환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소망이 아닙니다. 환난이라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 밝은 빛을 내서 진짜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소망으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우리의 소망을 현실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4절과 5절은 무엇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요? ‘소망’입니다.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이유 다시 말해,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소망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있는 소망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음 단락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6~8절의 단락을 5절과 연결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의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 놀라운 일입니다. 선인을 위해, 좋은 사람 혹은 착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주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나의 원수를 위해 할 수 있을까요? 뉴스에 나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죄인을 위해 사람들이 사형이 마땅하다고 죽여야 한다고 소리치는 죄인을 위해 그 죄인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음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십자가를 봐라! 너를 대신해서 죽은 나의 독생자 예수를 봐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경건하지 않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로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을 흔들리지 않는 것이며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증거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최악인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우리를 품어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오늘은 평화롭고 우리의 내일은 안전합니다.

무엇으로 6~8절의 단락과 9~11절의 단락을 연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 그 구원의 시작을 경험한 자로서 미래에 있을 완전한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 구원의 완성을 소망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망으로 오늘을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그 하신 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된 소망은 이렇게 우리의 과거를 바꾸었고, 그리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바꿉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시간을 여행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주인공이 과거로 가서 뭔가를 바꾸면 그로 인해 미래가 바뀌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지난날의 아픔이 있고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기에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대해서 그와 같은 일을 하신 것이 아닐까? 예수님이 과거 십자가에서 하신 일, 그 일이 나의 현재와 미래, 나의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나의 영원한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나에게 소망이 되어서 그 소망으로 내 삶이 바뀌고 있습니다.

폴트립은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은 다만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소망은 모든 일을 지혜롭고 강한 손으로 쥐고 계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 그 소망은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안에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을 즐거워할 수 있고 환난 중에 있다 하더라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과거에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셨고, 뿐만 아니라 지금도 보여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기에 안전합니다. 그래서 소망을 가진 자의 삶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소망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바꿉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롬 5:1-4) – 새벽기도 설교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볼 5장에는 ‘이신칭의’가 어떻게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지 그 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먼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누리는 첫 축복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1절).

여기서 ‘화평을 누리자’라는 말은 권유가 아니라 이미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의롭다 함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가 아니라 불화의 관계였음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의 뜻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당시 로마법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을 지닌 사람은 어떤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청원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반역이라는 큰 죄를 지닌 용의자는 로마 황제에게 청원하여 직접 황제로부터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도가 생겨난 이유는 무고한 자가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때 로마황제가 그 용의자를 직접 재판하여 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라는 선고와 함께 용의자는 반역의 죄를 벗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로마황제와 화목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와 같은 로마법을 배경으로 하나님께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의 선고를 받은 성도는 이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한 삶을 누리게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던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죄인이요, 그 영혼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늘 불안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롬 8:15-16).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과 원수지간으로 사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보일지라도 사실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지간에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지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가 우리의 삶의 기반입니다.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자 모든 기쁨의 근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있습니까?

이 화평을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어서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말씀합니다(2절).

여기서 ‘바라고 즐거워 한다’라는 말은 ‘소망을 품고 자랑한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 등을 소망하며 자랑하는 사람이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한다”라고 말씀합니다(3절).

이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환난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환난도 당하지 않고 늘 만사형통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러한 오해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환난을 당할 때 낙심하고 원망과 불평에 빠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 환난이 그치는 때는 이 땅의 삶을 다 마치고 하나님나라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늘 기쁨만이 넘치는 곳입니다(계 21:4).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곳입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공중 권세 잡고 지배하는 곳입니다(엡 2:2).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9).

또 사도바울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환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더 많은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은 즐거워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환난 중에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환난 자체는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히 12:11).

그렇다면 환난 중에 어떻게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환난 자체만 보면 우리는 결코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환난은 그저 고통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난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능히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롬 8:18).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가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영광입니다.

사람의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광입니다(고후 12:4).

그리고 그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어떻습니까?

일시적인 것입니다.

길어야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너머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현실의 만족을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영원한 영광을 위한 신앙입니다.

만일 현세의 만족을 위해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실망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요 15:19).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신앙입니까?

환난 중에도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 할 수 있는 신앙, 그것이 바른 기독교 신앙인 것을 기억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이어서 사도바울은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하여 ‘신앙의 성장’이라는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절)

여러분, 환난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하여 항상 악한 것은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환난은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어도 영적으로는 도리어 유익한 것입니다.

환난이 없다면 성도의 신앙은 성숙하기 어렵고 또 그 신앙의 참됨 여부도 가려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성도들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환난은 참된 신앙을 가려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통과의례, 곧 성도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여러분, 체육대학에 입학하는 사람은 누구나 체력과 인내력테스트를 받습니다.

여기서 인내하지 못하면 결코 입학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환난이 임할 때 인내하지 못하면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신앙인이 참된 신앙인인가 아닌가의 여부는 반드시 환난을 통과해 보아야만 합니다.

거짓된 신앙인은 환난을 만나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환난을 당하면 더욱더 소망을 굳게 잡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시골에서 ‘키질’하는 것을 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키에 알곡과 쭉정이가 섞인 곡식을 올려놓고 키질을 합니다.

그러면 바람에 의해 쭉정이는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알곡은 안쪽으로 모입니다.

그래서 그 알곡만 모아 곡식 바구니에 담습니다.

여기서 바람은 환난을 상징합니다.

쭉정이는 거짓 성도를, 알곡은 참 성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을 보내시는 것은 이렇게 알곡 성도, 곧 참 성도를 가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순물이 제거된 순결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환난을 통해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또 이기지 못할 시험은 피할 길을 주십니다(고전10:13).

그러므로 환난을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환난은 우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는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를 망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도리어 우리를 단련시켜 소망을 이루게 합니다.

환난을 인내로 극복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사실을 믿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인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마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결단합니다. 또한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환란도 있음을 기억하여 이 모든 환란들을 통해 참소망을 이루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로마서 5장 설교말씀]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일때!(롬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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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5장 설교말씀 중에서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일 때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존재입니다. 또한 죄인이면서 원수였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게 되므로 우리도 자연스럽게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회복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내가 연약할 때 주님이 힘을 주시고 내가 죄인이었을 때 주님이 의인되게 하셨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화목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일 때!(롬 5:1-11)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한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었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과 화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부모와 자식 사이 혹은 부부 사이 혹은 이웃 과의 사이에서도 어떤 일로 말미암아 앙금이 생기고 인간관계에서의 단절이 있다면 그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그런 앙금이 없어지고 인간관계의 단절됨이 회복되고 화해가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순간들이 도래됩니까? 우리 이런 관점에서 인간과의 관계보다도 더 비중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화해를 오늘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는 죄 문제로 말미암아 단절되었습니다. 이 단절 때문에 수많은 인생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그런 수많은 종교들의 종교생활이 이런 하나님을 찾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스러운 찾음 속에서 우리가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들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도를 닦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기도 하고 심지어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도 하나님을 바로 알기 전에는 자신의 고행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런 것들이 다 부질없는 일임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도를 닦고 고행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르러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개입하심 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런 사실을 우리들에게 잘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세 가지의 때를 말함으로써 이런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1. 6절에 연약할 때

2. 8절에 아직 죄인 되었을 때

3. 10절에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이 세 가지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화해의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의 때가 어떤 상황인지 또 그런 상황의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6절에 “우리가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연약할 때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성장하지 않았을 때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출석하고나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은 여러분이 교회 출석을 하고 몇 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영적으로 성장하고 나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벌레 많아도 못한 죄인의 신분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까지의 수준으로 올라간다면 과연 얼마만큼의 수준에 까지 올라가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교만의 소치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화해하심은 우리가 믿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사랑으로 확증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의 단절이 없어지고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사도바울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머니의 태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연약할 대로 연약한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우리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을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갓난아이의 시절입니다. 강보에 싸여서 어머니의 품에 있을 그때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똥, 오줌을 싸도 그게 좋다고 사랑스럽다고 야단입니다. 울어도 부모는 그저 좋다고 온갖 아양을 마치 광대처럼 아이 앞에서 다 피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실을 그 아이가 성장하고 강건해지고 나서 아느냐는 것입니다.

모릅니다. 대개 사람들은 4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문제를 두고 볼 때 내가 성장하고 나서 내가 철이 들고 나서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연약할 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최고의 사랑을 말입니다. 우리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말씀 우리가 연약할 때 이미 하나님의 화해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해 확증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2.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역시 앞에서 언급한 우리가 연약할 때의 경우와 같은 맥락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만 이 부분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쓰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의인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됨의 신분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무자격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의로우냐 의롭지 못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선한 일을 얼마나 했느냐 못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 된 상태에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 의롭기를 기다리셨다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일 때에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기독교의 깊고 오묘한 진리가 풍성하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갑시다. 예수 믿읍시다’라고 하면 “술 끊고, 담배 끊고 사람 좀 되어서 나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이런 경우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3. 10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원수 되었을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위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지점이 중간지점이 아니라 완전히 극과 극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극과 극의 최악의 상태에서 하나님은 화목의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말입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통해서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바울의 경우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이라고 하는 곳으로 일주일 동안이나 걸어갔습니다. 아주 극성스러운 사람이요 지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주님께서는 부르십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나님과 원수의 만남인 것입니다. 원수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많은 경우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욕을 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못할 짓을 많이 할 때 바로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사랑하사 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참된 진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연약할 때,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의 희생적인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아 화목해진 상태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까? 토마스 헤리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헤리스라는 사람은 자기의 저서 “I am Ok , You are Ok”라는 책에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을 가질 때 그는 배타적이고 투쟁적인 인생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옳다면 너도 옳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오히려 이웃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시면서 진정한 화해를 하셨던 것입니다. 참 사랑은 화해를 가져와야 합니다. 화해가 없는 사랑은 주님의 사랑도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도 아닙니다. 투쟁을 능사로 하는 사람은 열사나 투사는 될지는 모르나 진정한 신앙의 사람은 되지를 못합니다. 이런 경우는 정치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에서는 옥살이 3년 이상을 한 사람은 나라의 수장으로 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화해를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가족 간에, 고부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화해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시렵니까? 끝없는 주님의 희생이 우리의 희생과 양보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한 주간도 이런 주님의 사랑과 화해가 실천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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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특권 (로마서 5:1-11)

그리스도인의 특권 (로마서 5:1-11)

우리들교회/김양재 목사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200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일년을 잘 지켜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들이 특권을 누리고 화평을 누리기 원하는데 마지막은 또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셨사오니 마지막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이 시간 찾아오셔서 말씀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주고 받으셨습니까.

연말연시에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입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또 우리들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지난 주 신문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보았습니다.

켄터키 넉스빌에 있는 미들브룩 연합감리교회 프랭크 포토 담임목사가 자기 교회 성도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50세 된 어느 성도가 재혼을 해서 아내와 신혼 여행을 떠났는데 한 곳의 백화점에서 아내가 진열대의 진주 목걸이를 보면서 ”너무 예뻐요. 값이 무척 비싸겠네요. 그래도 누가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진열했겠죠.”하고 감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혼 생활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고 6개월밖에 못 살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결혼 10주년을 맞아서 주례 목사님을 초청해 예배를 드리는데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선물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선물은 10년 전에 아내가 갖고 싶어했던 진주 목걸이였습니다.

아내는 너무 놀라서 이렇게 비싼 것을 어떻게 샀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에게 이 선물을 하기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내가 좋아하던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목마를 때 마시는 콜라도 안 마시고 한 푼, 한 푼 저금을 했소.”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고 했을 때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그 아내는 기쁨과 평안 가운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기쁨과 평안이라는 말이 저에게 들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어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고, 부부끼리도 서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인가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특권을 주신다고 오늘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선물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선물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사단이 우리 자존감을 짓밟아서 자녀가 마땅히 누려야 할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 권사에게 주어지는 선물도 아닙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소유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꿔놓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가진 것은 쉽게 없어지지만 존재 자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부모된 모든 사람의 마음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합니다.

성탄에, 생일에 물건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자녀들의 존재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선물을 줄 수만 있다면 생명이라도 버리겠습니다. 정말 자녀들의 존재 자체가 바뀌는, 업그레이드되는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중고등부 열린 예배를 하는데 여러분이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까.

이 근처에 사는 분들에게 이런 선물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떤 특권을 선물을 주고자 하실까요.

첫 번째,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선물입니다.

1절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모든 사람이 평화를 원하지만 얻지 못합니다.

먼저 화평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바른 진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건강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멋있는 사랑을 만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것은 죄입니다. 1장부터 4장까지 죄에 대해서 지겹게 들었습니다. 인생은 100%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의롭다 할 인생이 없고… 그 예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었습니다. 허물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이제 그 선물을 주신 분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화평을 누리자”는 권고가 아니라 선포입니다. 원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특권을 왜 못 누리는가 말입니다. 못 누리고 있으니까 “누리자”고 선포를 했겠죠.

화평은 하나님과 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분쟁이 없는 어떤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선물을 아무리 주고받아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평은 권세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일대일의 관계에서 성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바른 지식을 알고 있다해도 알아듣지 못할 상대방에게 교훈을 하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바른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이 절대 의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한 며느리 다말을 보고 시아버지인 유다가 “그는 나보다 옳도다”했습니다. 그것을 ”의-righteousness”로 표현했습니다.(창38장) 이것이 어떻게 도덕적인 개념이겠습니까.

히브리어로 ”샬롬”의 역어이고 헬라어로 ”에이레넨”이라고 하는 “화평”은

전쟁이 없는, 전쟁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보상과 회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빚진 상태를 청산하고 긴장 관계가 풀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믿으면서도 이런 화평이 없습니까. 긴장 관계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빚진 것부터 갚으십시오. 회복할 것 있으면 빨리 회복하시고, 보상할 것 있으면 빨리 보상하십시오.

우리들교회의 비전이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는 교회입니다.

누리는 것 중에 화평을 누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가장 먼저 빌어주신 말씀도 “평강이 있을지어다” 였습니다.

돈이 있고, 자식이 잘나고, 건강하고, 용모가 빼어나도 평강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성탄 예배 때 정몽준 캠프의 대변인이었던 김행씨 간증을 들려드렸습니다.

지난 대선 때 후보지지 철회 일로 세계 언론이 보는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신문기자에 대변인으로 그렇게 잘하는 글과 말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느끼고,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는 그 상황에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정몽준 후보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너무 미워하다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25년이나 안 만나던 어머니를 찾아가서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평강을 누리려면 이렇게 빨리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강을 누리려면 관계에서 자기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일대일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아내 자리, 남편 자리, 자식 자리, 사장 자리, 사원자리.. 자기 자리를 알아야 어떻게 하면 평강이 이루어지는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상대방의 수준과 학력과 성격으로 낮아지면서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섬기는 것이 성실입니다. 화평의 근거입니다.

2절 말씀은 이것이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는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절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과거형입니다.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간 사람들은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즐거워한다”는 원래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자랑할 만큼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아내 자리, 남편 자리…. 각각 제 자리로 찾아가는 것, 이것이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나의 영광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역대 뉴욕시장 중에서 1934년부터 45년까지 재직하며 가장 훌륭한 시장이라는 평을 들었던 피에렐로 라가디아씨가 판사로 재직할 때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쳐먹다 기소된 노인을 재판하는 자리였습니다. 라가디아는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벌금 10달러 형(刑)에 해당합니다. 그 10달러는 제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는데 나는 그 동안 그것도 모른 채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벌금으로 제가 10달러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중절모를 벗어 재판장 서기에게 주면서

”여기에 계신 여러분 중에서 나처럼 너무 잘 먹은 것에 대해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금 47달러를 손에 쥐고 기소되었던 법정을 눈물을 흘리며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람의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공부도, 결혼도, 이제 목적이 달라집니다. 은혜를 받으면 즐거워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균 수명이 이미 희수(喜壽-77세)를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20년이면 망구(望九-81세)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고령화되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치매인데 어느 신문에서 치매 안 걸리는 방법을 보도했습니다. 하루 2시간씩 책을 읽어라, 의도적으로 왼발과 왼손을 많이 사용해라, 웃어라 등등.. 여러 가르침이 있는데 가장 기억나는 것이 ”가능하면 자주 감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제임스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 보도에서는 감동하기 위해서 극장과 공연장을 자주 찾으라고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감동하면 어디에 와야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목장 모임에서 누리는 감동을 어디에 비교하겠습니까.

우리는 축제로 교회에 오기 때문에 이미 즐거움과 감동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습니다. 제가 피아노를 전공하고, 평생 피아노 치느라 애썼는데 연주회 가서 울어본 적이 없고, 미술 전람회에서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심방을 하면서 또 어찌나 웃는지 다들 코미디언이 따로 없습니다. 왜 웃는 지도 모르고 그냥 말 한 마디만 해도 웃습니다. 큐티를 하면서 우리끼리 통하는 ”방언”이 있고, 성경을 읊어대면서 딱 던지는 말들이 그렇게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줍니다.

참 평안은 의롭게 살기 위해 흘리는 눈물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 평안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자꾸 합리화시키며 다른 사람과 화평을 이룬 것으로 속입니다.

진리를 온 마음으로 생각하면 거기에 불안이 있습니다. 심각함이 있습니다.

복음이 바르게 전파돼서 100% 죄인임을 지적 받으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하면 적용이 힘들고 고민스럽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거룩함은 힘들어합니다.

지옥 가는 건 싫어서 용서 구하는 일은 너무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열광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거룩을 이루어 가는 일에 소홀하기 때문에 참 화평을 못 누립니다.

우리 믿음의 수준이 말씀으로 올라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파산을 할 지경이고, 남편이 부정맥이고, 카드 빚을 지고…. 그런데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 있는가 할 수도 있습니다. 빚이 많은데 빚 안 갚고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게 옳으냐 그르냐…. 적용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만 부르면 평안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배는 열심이어도 그런 일에 적용을 못하면 평안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거룩을 열심히 이루어가기 때문에 화평이 아니고,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거룩을 이루어가면서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자마자, 또는 믿은 후로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3~4절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의 의롭다 함, 화평, 즐거움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체험인 신유, 환상, 방언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것만 대단하다고 합니다.

성경 지식,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주관적입니다. 내 체험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으로 하나님께서 양육시켜 가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환난이 올수록 내 믿음이 객관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의 사랑은 맹목적이거나, 이기적이거나, 이해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나를 양육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복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단잠도 주시고, 환난도 주시고, 가난도 주시고, 박해도 주십니다.

육체와 물질과 정신의 고통은 모두 영적 시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환난은 누르다, 짜내다, 분쇄하다 그런 뜻입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필수 코스입니다.

바울 사도가 275명과 함께 행선하다 유라굴로 광풍의 환난을 만났습니다. 배가 파손되고, 기구, 재물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 없이 로마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환난에는 인내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는 무엇 무엇 밑에서 누구 밑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 밑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내를 모릅니다.

밑에서 누구 밑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 밑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내를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한 것은 시어머니 밑에서 극심한 시집살이를 하고 남편 밑에서 힘든 경험을 당해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성도를 섬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날마다 합니다.

온유와 화평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확고 부동함으로 끝까지 버티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연단은 그런 인내를 가지면 인정받는 품질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인정받은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은 인정받은 인격에 예수 안에서 항상 좋은 것만 바라고 기대하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5절 –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 소망이 강해 보일 때도 있고, 약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했다, 미워했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환난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만취한 상태로 음주운전을 한 차에 치어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이지선 자매의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그 자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미팅에서 만나야 될 의대생을 스물 세살 처녀가 발가벗고 병원에서 만나는 환난을 겪으면서 스무살의 나이를 없애버렸다고, 세살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올바른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선이의 어머니는 지선이가 아프고 고통 당할 때 부둥켜안고 울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엄마가 감정적이 되면 아이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수술에 들어가면서 지선이는 다른 아무 것도 안 보고 엄마 눈이 흔들리는가만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에 힘주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 안 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기에 열 세 번 수술에 한 번도 울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힘이었고 계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울어야 할 때와 안 울어야 할 때를 이렇게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가해자가 떠오르지 않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 바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화상을 당해서 힘이든데 가해자를 떠올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내 힘으로 못하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선이가 하루, 하루를 눈물로 시작하고 모든 거울을 다 치웠는데 숟가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살려놓았으면 대책이 있으실 것 아니냐”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화상을 알기나 하느냐고 따졌다는 겁니다.

제가 전에 조그만 화상을 입고 화상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사포(sand-paper)로 문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선이가 전신화상으로 55% 이상 피부가 죽었기 때문에, 온 몸을 날마다 소독하고 거즈를 붙이면서 당하는 고통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습니다. 염증이 나면 죽기 때문에 날마다 그렇게 해줘야 하는데 정말 예수님이 화상을 당해봤느냐는 말이 나올 것 같습니다.

스물 세살의 여대생 마음으로는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으면서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좀 성숙했을 때는 완벽주의가 생깁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한 것까지는 좋은데 화평이 깨질 정도로 예민하게 되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안 고쳐주신 질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질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안질인지, 간질인지 모르지만 안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히고, 간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 설교하다가 갑자기 발작을 하면서 쓰러지고,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설교를 한다면 그 모습이 어땠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끝까지 안 고쳐주셨습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편두통이 심해서 일주일에 두 세 번 편두통이 발작하면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졸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이고, 설교자인데 그 분이 화평을 누렸겠습니까. 그러니 날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언행심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정죄감과 완벽주의 때문에 예수 믿고 나서도, 의롭다 함을 얻고 나서도 화평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시고, 우리는 100% 죄인입니다.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과 100% 죄인인 인생이 만나는데 어떻게 날마다 공포와 두려움과 갈등이 없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보겠습니다.

6절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연약할 때”, 8절 “죄인 되었을 때”, 10절 “원수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나의 많은 정죄감과 나의 불완전한 모습,

나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화평이 깨어집니다.

그 때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보라는 겁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화평을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를 의롭다 칭해주신 근거도 예수님이고, 화평의 근거도 예수님입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갈 일이 쉬지 않고 엄습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어떻게 해야될까요.

오늘 바라봤으면 내일은 안 바라봐도 될까요.

그래서 올바른 예배가 쉬지 않고 드려져야 되고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말씀 가운데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봐야 합니다. 순간 순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 나눔 예배, 수요 예배… 이 모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굉장히 시간을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한 주일 동안 나를 보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얼마나 감정의 낭비가 줄어드는지 아십니까. 훨씬 유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을 줄여주시는 주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 순간 나를 보게 됩니다.

말 한 마디하고도 금새 나를 봅니다. 내가 말 실수를 했어, 쓸데없는 말을 했어, 말을 해야 될 때인데 못했어, 거긴 괜히 갔어…. 이러면서 나를 보기 때문에 이상한 데 가서는 교만하고 이상한 데 가서는 열등감이 듭니다. 나를 보기 때문에 교만과 열등감이 교대, 교대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화평이 깨집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자신도 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은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되었다 하는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처럼 그렇게 설교를 잘 해도 ”나”를 보는 겁니다. 다 똑같습니다. 금새 믿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나”를 보기 때문에 화평이 깨집니다. 나는 100% 죄인이기 때문에 나에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7~8절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지선 자매가 아프고 힘든 시간을 지내면서 자기 고통을 천 번, 만 번이라도 대신해줄 수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 동생을 구해준 오빠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금식해주는 교회 분의 사랑을 광야 같은 투병생활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픈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화상이 사랑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백 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내 삶이고 얼굴이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이만하면 꽤 귀엽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지선 자매의 화상 전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선이는 대학교 2학년 때의 그 아름다운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용모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체격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지선이는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오픈하고 나서 ”괜히 오픈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깁니다.

지선이는 서럽고 힘든 시절 다 지나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너의 찢김과 찔림과 고통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공포와 두려움을 내가 알고 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아시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선이가 병들고 약한 자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안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를 보기 때문에 용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못 보던 거울도 이제 볼 수 있게 되고, 거울을 보면서 ”안녕 이지선!” 하고 인사하면서 지나간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데 7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7개월, 너무 아픈 동안에 자기 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55%의 죽은 피부 대신에 나머지 피부를 가져다가 이식을 하고 붙이는데 스테플러로 찍는 것처럼 갖다 붙이니까 여기 저기 땡기고, 쭈글쭈글 해집니다.

화상을 당하고 초기에 수술을 하러 일본에 갔는데 병원에서 어떤 꼬마가 지선이를 보더니 ”엄마, 괴물이야, 괴물!”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는 걸 듣고 지선이는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놓으셨으면 사람답게 고쳐주세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 후 수술을 하고 교회에 가게 됐는데, 교회에 간 첫 주에 식당에서 어떤 아이가 지선이를 보더니 ”엄마, 저기 이상한 <사람>있어.” 하더랍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된 것 때문에 너무 감사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지선 자매가 감사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그 즉시, 즉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선이의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실 것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도 자기의 완벽주의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기로 했더니 놀라운 평안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목사님도 해결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을 껴안아주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껴안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 3주 후에 편두통이 사라지고 그 이후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 아플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보다 수준이 훨씬 높아서 평생 안 고쳐주셨습니다.

고쳐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고쳐주지 않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셔야 합니다.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도… 나를 보지 말고

“모든 죄를 사하셨으니”(골2:13)

순간 순간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의 피, 보혈의 공로만 의지한다면

9절에도 “구원을 얻을 것이고”, 10절에도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미래형이지만 로마서 8장 24절에 가면 “구원을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끊임없는 갈등 구조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봄으로 화평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나의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가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지만 또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면 화평이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보혈을 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나를 쳐다 볼 때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기도 제목을 드립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됐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선물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올바른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믿고도 정죄감과 나의 완벽주의 때문에 절망할 때 나를 보지 말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이 보혈의 공로만 즉시 즉시 바라보게 해달라고

그래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우리가 화평을 누리자 했는데 왜 화평을 못 누리는가를 알았습니다. 주님,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바라볼 때가 많은 것을 고백합니다. 열등감과 교만이 날마다 오갑니다. 나는 되었는 줄 알고 거기에서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해서 절망했습니다.

주님, 참으로 화평을 누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100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옛날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환난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올바른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서, 부끄럽게 되지 않는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지금 환난을 주셨사오니 누르고, 분쇄하고, 짜내는 고통을 통해서 저희들이 올바른 소망을 이루어가기 원합니다.

주님,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볼 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에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주님의 공로를 인하여,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을 오늘도 고백합니다.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쳐다보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나는 100% 죄인입니다. 즉시, 즉시 주님만 쳐다보게 도와주옵소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 예수님만 바라보게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이렇게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찾아가 주옵소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화평을 누리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로마서 5장 주일 성경말씀] 구원의 축복들(롬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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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5장 주일 성경말씀 중에서 구원의 축복들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칭의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불러 주시고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전에 선택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가 덮어졌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제 목 : 구원의 축복들

본 문 : 롬 5:1-11

설교자 이동원 목사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두려움의 심리를 이용해서 발달한 현대적 사업이 있다면 아마도 보험업이 아닐까 합니다.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동차 보험을 들고, 또 비행기 타는 기회가 많아지니까 항공보험, 해상보험, 그리고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료보험을 들고, 모처럼 장만한 내 집에 대한 애착과 집을 잃을 두려움 때문에 주택보험도 들고, 도난보험, 화재보험도 들곤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축구스타들은 발이 생명이기 때문에 발 보험을 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발가락 보험이 되겠지요?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손 보험을 들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무슨 보험을 들까 생각하다가 주둥이 보험을 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이런 모든 유형의 보험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보험이 있다면 아마도 생명보험일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도 생명보험을 들으라는 가입 권유를 받았는데 그 필요성은 충분히 납득되고 동의가 되면서도 다음의 두 가지 때문에 주저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아직은 죽을 때가 되진 않았는데.”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들어봤자 내가 받는 당장의 유익은 없지 않은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에도 불신자의 입장에서 사고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천국 가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 신앙이 지금 당장 살아가는 오늘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며 축복이 있느냐라는 반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복음이 사후의 저기에서 복음일 수가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복음이 지금의 여기에서도 복음일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그 대답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예스)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에는 미래적 차원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믿는 자들을 위해서 선물로 준비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현재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9절을 읽어보시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 받고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벗어나 천국에 갈 것이라는 구원의 미래적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은 조금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10절에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구원은 얼마나 놀라울 것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11절을 읽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가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씀은 바로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놀라운 삶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구원의 현재적 축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본문은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아와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는 사실을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얻어지는 열매, 즉 칭의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입니다. 화평을 누리자는 말이 영어 성경에 보시면 ‘우리가 현재 평화를 갖고 있다(We have peace)’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늘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현재적 축복은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로, 성경은 이것을 ‘화평’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평화라고도 말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화평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통속적으로 사용하는 화평이라는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은 주관적 평화가 아니라 객관적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느낌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것은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한다’는 말은 영어로 ‘Peace with God’(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을 이룬다)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 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본문 10절의 첫 부분에 보시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까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가 있는 곳에 진노를 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 시 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 편에서도 자신의 죄 때문에 자기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부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10절을 보시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화해자로서 죽으신 것이며 또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는 놀라운 사건이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대한 가장 드라마틱한 설명을 해 놓은 것을 인도네시아의 이리안쟈라는 정글에서 사는 식인종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돈 리챠드슨이라는 선교사가 쓴 ‘화해의 아이’란 수기의 책을 읽다가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그 야만의 식인종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까를 고민하다가 어느 날 자기의 선교 대상이었던 사위 부족이 이웃 부족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할 것이 확실시되자 그들의 지도자의 아들을 상대 부족에게 내어주게 되고 그 아들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자 마자 곧 전쟁이 끝나는 광경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돈 리챠드슨 선교사님은 사위 부족에게 설교할 기회가 있게 되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렇게 생생하게 설명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의 아이(Peace Child)’로 주셨습니다. 이 화해의 아이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된다는 사실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문의 2절을 통해서 그 대답을 발견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서 있다’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들어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사실인지 아십니까? 죄인인 나를 속속들이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내가 나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사실입니까? 요즘 투시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이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만약 제가 이 투시의 은사를 가져서 여러분을 다 투시한다고 해 보십시오. 제가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안다면 제 앞에 설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하물며 전능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요?

비유 건대, 이런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구약에 보시면 옛날 중동지방의 왕가의 습관 가운데 하나는 왕을 만나려면 왕이 먼저 불러야만 왕 앞에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왕비라 할지라도 왕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고 만약 왕의 부름 없이 나아간다면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얘기가 구약의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더가 자기 삼촌인 모르드개의 요청을 받고 유대민족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기 위해서 왕 앞에 나아가서 얘기를 해야겠는데 나갔다가는 죽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유명한 결심을 한 뒤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자기 마음대로 왕 앞에 나아갔을 때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한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왕이 지팡이 비슷한 홀을 내어 밀고 그것을 잡으면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에스더 왕비를 본 순간 갑자기 그녀가 사랑스러워져서 홀을 내어 밀었고 에스더 왕비는 그 홀을 잡아서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었던 우리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순간 그분 앞에 나아오는 우리들을 괜찮다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가는 그 특권이 얼마나 두려운 특권인지 여러분이 히브리서를 읽어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는 말씀에서처럼 그냥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꼭 강조되는 단어가 있는데 ‘담대히’ 나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감히 설 수가 없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특권만 주실뿐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서 있다는 말은 그냥 하나님 앞에 선다는 말이 아니라 서서 그분의 얼굴을 뵈옵고 서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과 대화하며, 서서 그분의 사랑을 입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과 더불어 누릴 수 있는 교제와 대화의 놀라운 특권, 저주의 대상이었던 내가 감히 그분 앞에 서서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이 특권이 내게 주어진 은총의 특권임을 믿으시는지요?

둘째로, 성경은 구원의 축복으로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기쁨이라는 명사는 나타나지 않지만 기쁨이라는 단어가 동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즐거워하느니라”(2절)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기쁨의 삶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저는 우리 한국 크리스천의 삶 속에 좀 더 기쁨이 표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한 선교사님과 함께 일할 때 그분이 제게 왜 한국 크리스천들은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오기 전까지 바깥에서는 명랑하게 얘기고 하고 웃기도 하는데 교회당에 들어서면 갑자기 인상이 달라집니다. 얼마나 어둡고 우울한지 모른다고 하시길래, 제가 갑자가 변명할 말이 인색해서 대답하기를 “선교사님, 한국 교인들은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교사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래요, 그러면 그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은 잊어버렸나요?”라고 하시더라고요. 다시 사신 주님,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놀라우신 그 주님을 통해서 당당히 마땅히 누려야 할 이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누려야 할 이 기쁨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이유 때문에 우리가 즐거워할 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리라” 고 하십니다.

로마서 3장 23절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달라진 모습입니까? 이 말씀을 묵상하던 죤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은 천국이란 말과 동의어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계시된 곳이 아닌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즐거움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바라보며 이 땅 거센 비바람 그 많은 역경의 삶을 살면서도 우리가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가 있는 이유는 주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젊은 연인들이 잠시 후에 결혼하면 같이 살게 될 신혼의 집을 생각만 해도 감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의 구원의 즐거움의 이유는 그리스도적 인격에로의 성화의 확신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지금 그 주님을 닮아가도록 주께서 역사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것이 3절과 4절의 말씀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먼저 여기서 ‘연단’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어 성경에 보시면 연단이라는 단어가 Character(인격, 개성)이라는 단어로 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인격이 아니라 이 인격이라는 단어는 시험에 합격되어 통과된 인격이라는 뜻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주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연단시켜 주님이 원하시는 인격으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환난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환난이란 말은 본래 ‘–아래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 당시에 이 단어가 쓰인 유래를 살펴보면, 감람유 같은 기름을 만들 때 보통 그 당시의 기계는 아래에 감람나무 열매를 놓고 위에서 꽉 눌러서 기름을 짜냈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스트레스나 우리를 괴롭히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환난은 우리를 빚어 만들며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인격을 닮아 사는 삶과 그 인격에로의 연단인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신 후에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 인내야 말로 얼마나 주님이 우리에게 보시고 싶어 하시는 주님 자신의 인격인지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만들어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의 열매는 원하면서도 그 과정을 견디질 못해합니다. 누구나 다 인내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인내하는 과정은 견디기가 매우 힘듭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인내가 필요하다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발 저에게 인내를 주시옵소서. 지금 당장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인내는 당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즉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만들어져 간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11절에 보시면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환난이 허용되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한 단계가 있습니다. 그 환난이 왜 오는지, 내가 그 환난을 왜 겪어야 하는지, 그 환난을 왜 통과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우리가 그 환난 중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가 있다면, 그 환난 중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환난 중에도 다가오시는 주님, 그리고 환난의 깊이보다 더 심오한 기쁨으로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해 보셨는지요? 그때 우리는 환난의 비바람과 역경과 캄캄한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환난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찬양할 수가 있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세 번째의 구원의 축복은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 평생의 삶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희망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은 내일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군 군목이 참호마다 다니면서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데 어떤 참호에 가서 “젊은이, 기도해 드릴까요? 기도제목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 젊은이는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희망들은 이루어지면 별 볼 일 없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소원했던 희망이 성취되자마자 또 다른 좌절과 허무를 느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 희망의 초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들의 희망은 이기적이고 지나치게 순간적인 희망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내용을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정말 붙들어야 하고 기대해야 할 소망은 인격적인 소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소망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가는 소망입니다. 4절의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워 우리가 빚어 만들어야 할 인격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할 소망인 것을 믿으십니까?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반드시 주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비바람, 폭풍우 속에서도 주께서 나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빛나는 인격으로 빚어 만들어 주 앞에 세워주실 이 희망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이 희망 때문에 바울 사도는 자기의 육신이 낡아가는 황혼을 바라보면서, 젊은 날의 로맨스와 젊은 날의 모든 기대가 사라지는 인생의 노경에 처해서도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내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내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쇠하지 아니하는 흥분 속에 날로 더 큰 기대와 영원한 희망, 주님은 마침내 나를 주님 닮은 놀라운 사람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손해, 오늘의 영광, 오늘의 내가 받는 중상과 모략, 내가 받는 슬픔과 내가 받는 까다로운 짓밟힘이 모든 인생의 역경과 뒤틀리는 관계 속에서도 주님은 나를 빛나는 존재로 세우시기 위해서 이런 환난의 틀속에 집어넣고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네 번째의 구원의 축복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적 소망이 마침내 실현될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주께서 우리 안에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난을 만날 때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자도 불신자도 똑같이 환난을 만납니다. 신자라고 환난이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환난 속에서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는 사람들은 환난에도 불구하고 그 환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고 기뻐할 수가 있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랑의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여기서 부은 바 되었다는 말은 문법적 완료형입니다. 한번 부어졌는데 그 효과가 지금도 충분한 효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부어주신 사랑은 우리가 평생을 사용할 수가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넉넉한 이 사랑의 강을 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이 사랑을 체험했나요? 십자가 앞에 섰을 때였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을 체험했을 때, 그 사랑은 또한 내가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는 능력의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그 사랑의 깊이, 그 사랑의 놀라움을 아시기 위해서는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내가 주님 만나기 전에 어떤 모습의 인간이었는가를 본문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본문은 네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본래 “연약한 자”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연약한 자라는 말은 사실 연약한 번역입니다. 원문에 보시면 ‘무력한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 우리는 인간을 강한 사람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남자들도 예쁜 여자만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무력한데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6절 후반부에는 우리가 “불경건한 자”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있었던 불경건한 사람이었음에도 그 추함을 보시고 아시면서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표를 빗나가고 있었던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식도 계속 방황하면 꼴 보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나의 방황을 아시면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수”되었을 때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무력했고, 불경건했고, 죄인이었으며,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었음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아무 능력이 없었음에도 우리의 최선의 선도 나를 구원하기에는 절대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불경건함과 추함을 보시면서 아시는 하나님, 나의 죄인 됨과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원수 됨을 아시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신 분이시라면, 이제부터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나, 사랑하지 못할 환경, 사랑하지 못할 운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는 사랑치 못할 사람이나, 환경이나, 운명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넉넉한 사랑으로 한평생 세상을 이길 능력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히브리어로 보는 창세기] 천지창조 셋째 날과 넷째 날(창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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