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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 장 19 절 | [묵상]끝을 묻는 자들에게(창세기 3장 19절) 최근 답변 28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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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19절), “하와”라는 이름(20절),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14절),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22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15절), 타락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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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성경공부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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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창세기 3장

창세기 3장 · (창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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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1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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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17절 – 19절 – 네이버 블로그

나 주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나니 공의로운 하나님과 구주가 나 외에는 없느니라. 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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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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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3/17) 말씀 묵상 (창세기 3장19절, Genesis 3:19)

오늘의 (3/17) 말씀 묵상 (창세기 3장19절, Genesis 3:19) …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By the sweat o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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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kbcoregon.org

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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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 창세기3장17절-19절, 환경의 변화 – 다음블로그

여자의 후손 시리즈 제9강, 환경의 변화 (창3:17-19) 창세기3장17절부터19절입니다, 우리같이 읽겠습니다,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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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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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19절 / Genesis 3:19 – 말레이시아 어학원(eskyedu)

“너는 먹기 위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하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네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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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skyedu.tistory.com

Date Published: 9/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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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4. 주일설교 창세기 3장 19절 너는 흙이니

창세기 3장 19절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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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ongsanchurch.org

Date Published: 10/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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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설교문] “인간의 저주”(창3:16-19) – 복음 빵집 – Tistory

예수님은 아담이 파괴시켰던 것을 예수님은 다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이 죄악으로 파괴되어 도저히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을 해결할 수가 없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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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dk153.tistory.com

Date Published: 8/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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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19절 주석 | 헤르메네이아 미문

창세기 3장 19절 주석 … 19절과 20절은 삶과 죽음 그리고 탄생의 원리를 소개한다. 삶은 더 이상 태만한 것이 아니다. 침이 아닌 땀이 흘러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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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moonchurch.com

Date Published: 6/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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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 성경주석 – BIBLE STORY

즉 여자의 후손으로 나실 메시야를 통한 구속에 대한 암시가 15절과 21절에 … <창세기 3장 성경주석>. 3:1 뱀. … 3:19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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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5/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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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끝을 묻는 자들에게(창세기 3장 19절)
[묵상]끝을 묻는 자들에게(창세기 3장 19절)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창세기 3 장 19 절

  • Author: 십자가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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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11.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DTLdnZWcH5Y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생명의 개념

It is revealed in Genesis 1-2 that God was the Creator, who not only created the lives of the human beings, but also those of the animals and plants, and all lives in the ecological system in the universe. However, it is described in Genesis 3 how the whole ecological system, including the human beings and the animals and plants, lost their lives because of the Fall of man. Genesis 3 shows how the decree that “when you ea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you will surely die” in Gen 2:17 was fulfilled in the lives of Adam and Eve. This article first attempted to exegete the passages in Genesis 3 which contain the concept of ‘life’ in its context. The following passages are analyzed: “for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v. 19; ESV), the name of “Eve” (v. 20), “dust you shall eat all the days of your life” (v. 14; ESV), “lest he reach out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ever” (v. 22; ESV), “he shall bruise your head, and you shall bruise his heel” (v. 15; ESV), and man’s psychological changes after the Fall and God’s judgment (vv. 7-19). After analyzing these passages, the author attempted to synthesize the data to define the concept of life revealed in Genesis 3. As a result of this study, the concept of life was suggested as follows. (1) It means the physical life in contrast with the physical death. (2) It means the spiritual life in contrast with the spiritual death. (3) Eternal life means the living relationship with God. (4) Life not only means the concept of life in contrast with that of death, but also means the concept of restoration to the original order of creation which was severely damaged by the Fall of man. In short, God is the Creator, the Provider, and the Taker of all lives. According to Genesis 3, it is revealed that the human beings not only lost the physical lives, but also the spiritual lives because of the Fall. Owing to the Fall of man, the animals lost their lives (Gen 3:17), and the whole ecological system including the plants suffered under the shadow of death as well (Gen 3:17). However, God did not stop there, but delivered an exciting message of hope that man would be restored to life through the descendant of the woman (the Messiah).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의 생명과 모든 생태계의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주로 계시하고 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태계가 어떻게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창세기 3장은 창세기 2장 17절에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금령이 어떻게 아담과 하와의 삶에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본 논문은 먼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생명과 관계된 개념들이 나오는 구절들을 문맥 속에서 주석을 하였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19절), “하와”라는 이름(20절),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14절),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22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15절), 타락 후 인간의 심리적 변화와 하나님의 심판(창 3:7-19) 등의 구절들을 분석하였다. 이들 구절들을 분석한 후에 데이터를 종합하여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생명의 개념을 정의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 내린 생명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육체적 죽음과 대립된 개념으로서의 육체적 생명을 의미한다. (2) 영적인 죽음과 대립된 개념으로서의 영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3) 영생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4) 생명은 죽음 자체의 반대 개념일 뿐만 아니라, 타락의 결과 생긴 것들을 원래의 창조의 질서대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창조자요, 생명의 수여자요, 생명을 취하시는 분이시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영적 생명까지 잃게 되었다. 타락의 결과 동물도 생명을 잃게 되었고(창 3:14), 식물을 포함한 생태계도 함께 죽음의 그늘아래서 고통하게 되었다(창 3:17).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여자의 후손(메시야)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을 다시금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감격스러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창세기 3장 17절 – 19절

17 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 까닭에 내가 네게 명하여 말하기를 ​’너는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너로 인하여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너의 전생애 동안 고통중에서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또 땅은 네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요 너는 들의 채소를 먹을 것이며

19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해졌음이라.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창세기에서만 벌써 7번째로 접하는 보편적인 진리인 셈이다. ​이 보편적 진리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고 지속된다. ​신정통주의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2장과 3장의 사건들의 기록들이 거의 사실인 것처럼 가르치긴 하지만 그 내용들을 거의 다루려하지 않는다.

나는 신시내티에 있는 하비에르 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마리아의 무염시태와 영원한 순결성은 열렬히 믿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입증할 만한 성경구절은 단 하나도 없는데도) ​창세기 5장에 열거된 인물들의 아내들은 오류거나 과장일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부류의 크리스챤에 대해 예수님은 요5:46-47로 대답하신다.

요5:46-47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나에 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의 글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의 말들을 믿겠느냐?

6000여 년 동안 한번도 변하지 않은 과학적 사실들을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의 처음 3장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수많은 과학적 사실들이 1400년 이래 1960년까지 서서히 낡아버려 못쓰게 되어버렸다. ​파리의 루우브르 박물관에 가면 못 쓰게 된 과학 서적들이 무려 2km 이상이나 쌓여있다고 한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유럽과 미국의 학술원 회원들을 전부 합해도 창세기의 기록자보다는 그 두뇌에 있어 모자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기록은 6000년 인류 역사 동안 그 수치나 진술들이 변해 본적이 없이 그래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창3:17-19에 기록된 내용들은 이제껏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의 역사를 미리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구절들은 너무도 적나라하게 인간들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 예언의 말씀에 대한 그 누구의 의견도 무시해 버린다. ​이 말씀은 예언된 그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며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사40:21 43:9-12 44:6-8 45:20-23)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대학 졸업자들을 위해 간략하게 인류의 미래를 제시해 보도록 하자.

① 땅은 뭔가 잘못되었으며 아무리 비료를 써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② 인간이 먹게 될 모든 것은 땅으로부터 나온다. 가축들은 땅에서 나는 것들을 먹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

③ 땅은 먹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을 자라게 할 것이다.

④ 인간은 과일만 먹는 대신 채소들도 먹게 될 것이다.

⑤ 인간은 살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한다. 이 구절을 어기고 살면 몸에 독소가 가득 쌓여 죽게 될 것이다.

⑥ 인간은 땅에 묻히게 될 것이다.

사40:21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는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들이 설 때부터 깨닫지 못하였느냐?

사43:9-12 모든 민족들을 함께 모이게 하고 백성들을 집결하게 할지니, 누가 그들 가운데서 이것을 선포하며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그들의 증인들을 내세워 자기들이 옳음을 증거케 하여 듣는 자들로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게 하라.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나를 믿고 내가 그인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내 앞에 지음을 받은 하나님이 없었으며 내 뒤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주요 (I am the LORD) , 나 외에는 구주가 없느니라. 너희 가운데 어떤 이방신도 없었을 때, 내가 선언하였고 구원하였으며 또 내가 보여 주었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요, 나는 하나님이라 (I am God) , 주가 말하노라.

사44:6-8 이스라엘의 왕, 주, 그의 구속자,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느니라. 내가 옛 백성을 정한 이래로 나처럼 부르며 선포하고 나를 위해 정렬시킬 자가 누구랴?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과 이루어질 일들, 그것들로 그들에게 보이게 할지니라. 두려워 말고 무서워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에게 말하며 선포하지 않았더냐? 너희가 곧 나의 증인들이니라. 나 외에 하나님이 있더냐? 정녕, 다른 하나님은 없나니,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하노라.

사45:20-23 민족들에서 도피한 너희는 스스로 모여서 오라. 함께 다가오라. 그들은 지식이 없어서 자기들의 새긴 형상의 나무를 세우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도다. 너희는 고하여 그들을 가까이 데려오라. 그들로 서로 상의하게 하라. 옛날부터 그것을 말한 자가 누구냐? 나 주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나니 공의로운 하나님과 구주가 나 외에는 없느니라. 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내가 스스로 맹세하였으며, 그 말이 의로움으로 내 입에서 나갔으니 되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나에게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이제 모든 것이 충분히 납득되는가? ​과학과 교육 분야에서의 인간의 모든 노력과 업적을 참된 빛(시119:105,130)에 비추어

살펴보면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그 모든 것이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너뜨리려는 인간의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증거를 보라.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30 주의 말씀들이 들어가면 빛을 주며, 그것이 우매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

ⓐ 출산시에 고통을 당할 것이다. – 인간의 답변 : 마취를 통해 고통을 없애겠다.

ⓑ 임신이 늘어날 것이다. – 인간의 답변 : 피임약과 낙태

ⓒ 땅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 인간의 답변 : 우리는 별들 위로 올라갈 것이다.(사14장)

ⓓ 함의 자손들은 노예가 될 것이다. – 인간의 답변 : 인권운동(심지어는 다른 인종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흑인을 돌본다고 한다)을 통해 흑인의 지위를 높이겠다.

ⓔ 셈은 종교적 진리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 인간의 답변 : 로마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다. – 인간의 답변 : 에어콘

ⓖ 남자가 여자를 지배할 것이다. – 인간의 답변 : 남녀는 평등하고, 여자들도 투표권이 있다.

ⓗ 땅 속에 묻힐 것이다. – 인간의 답변 : 화장해서 날려보내어 매장을 못하게 할 것이고 흙과 다른 종류의 성분으로 된 별들에 가서 인간은 살 것이다.

ⓘ 땅은 저주를 받았다. – 인간의 답변 : 우리는 온도와 날씨를 조절해서 땅이 다시 축복받도록 하겠다.

ⓙ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다 – 인간의 답변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렸다.

ⓚ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계속될 것이다. – 인간의 답변 : 유엔이 지구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인류는 특히 과학자들과 교육자들은 어둠의 세력들의 통치자(엡2,6장)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통제받고 인도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상태에 있을지라도 모두가 헛되다(시39:5) ​즉 인간의 모든 선한 의도들과 노력들은 모두 물질적인 발전과 교통통신의 발달 및 생활개선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대가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자연법칙을 무너뜨리려는 타락한 인간의 이기적인 허황된 투쟁에 불과한 것이다. ​인생의 참된 논쟁점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향후 50년 동안 인간의 과학이 시도하는 것이래야 고작 하나님께서 시115:16에 기록해 놓은 사실을 무너뜨리는 것 뿐이다.

시39:5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손 너비만큼 주셨으므로 내 연수가 주 앞에서는 없는 것 같사오니, ​진실로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시115:16 하늘, 곧 하늘들까지도 주의 것이나, 그가 땅을 사람의 자손들에게 주셨도다.

앞에 제시된 인간들의 답변들을 한번 검토해 보도록 하자.

ⓐ 여자들에게 최면을 걸거나 마취를 해서 통증을 없앨 것같지만 그럴 경우라도 출산 후의 고통은 피할 수 없으며 고통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통증 이상의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산아제한을 하면 다음과 같은 위험들이 따른다. 생식기관들의 감염, 남편과 아내의 애정관계에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자연스럽지 못한 성습관들의 획득, 부부관계를 합당하게 즐기지 못함, 극단적인 경우 기형아 출산, 그 어떤 산아제한 방법도 절제만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문제에 관한한 과학은 아무런 개선도 이루지 못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 인간은 달에 도달할 수도 있으며 다시 지구로 귀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 인류를 가지고 별들에 식민지를 세우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세계대전도 부족해서 스타워즈까지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전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결을 보신다.

ⓓ 수많은 법률을 제정하고 연방수사국과 중앙정보국을 동원하더라도 유색인종에 관한 유일한 문제는 누가 그들을 다스릴 것인가로 귀착된다. 그들 스스로 다스리도록 내버려 두면 즉 자치를 허용하면, 그들은 결국 굶어죽거나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게 된다. 누가 뭐라고 하든 이들은 다른 인종들을 섬기고 말 것이다.

ⓔ 모든 종교는 셈족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로마카톨릭 교회 교리 중 참되고 올바른 것은 모두 셈족이 기록한 샘족의 책인 성경으로부터 나왔다. 북아프리카(함)으로부터 나온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 라틴종교, 침례에 의한 중생, 마리아 및 성인숭배 등 – 반종교적인 허풍에 불과하다.

ⓕ 당신은 땀을 흘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된다.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20년간 땀흘리기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에는 당신의 의사에 의해 몸에서 독소를 배출해야 한다. 과학의 혜택으로 땀 안흘리고 살 수 있을 것같지만 당신은 결코 전능하신 분을 기만할 수 없음을 기억하라.

ⓖ 공중에서 폭발하든, 화장을 하든, 달에 가서 죽든지 해보라. 폭발된 시체는 결국은 대기중에 떠있다 땅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며, 화장한 재를 담는 용기는 진흙 혹은 땅에서 나온 광물질로 되어 있고 달 역시 지구에서 발견되는 똑같은 화학물질로 되어 있으니 피차 일반이다. 아무리 두들겨봐도 창세기 3장을 무너뜨릴 수 없다.

ⓗ 계속해서 비료를 뿌려보라. 벌레들이 더 극성을 부릴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살충제를 뿌려대겠지만 그것은 땅을 망치게 한다. 인공비를 뿌려보라. 홍수가 날 것이요, 비를 그치게 해 보라. 땅은 갈라지고 당신은 좋은 수확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좋은 농작물을 심어보라. 아마 잡초가 나서 그것을 망쳐버릴 것이다. 땅은 저주를 받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셨다. 품종개량, 뉴딜정책, 인공비를 동원해 봐도 이 말씀은 무너뜨릴 수 없다.

ⓘ 유대인은 1918년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 1948년 그곳에 국가를 세웠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지구를 다스라게 될 것이다. 이 사실에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이 사실은 변함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 국제연맹, 국제연합, 국제기금, 지구촌협회, 그 무엇이라도 원하는 대로 만들어보라. 그분께서 오시기까지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그치지 않을 것이며 적어도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커다란 전쟁보다 더 큰 전쟁이 두 번이나 있고 나서야 그분은 오신다. 비가 오면 전쟁은 체육관에서 열릴 것이다.(옛 프러시아 속담)

인간이 어느 곳으로 빠져나가려고 할지라도 인간은 성경에 둘러싸여 있다. ​어떤 마귀적인 힘이 인간의 노력을 애초부터 정죄해 버리기로 정해놓은 것 같다. ​인간의 모든 동기와 시도들은 최악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조작되어 있다. ​그 누군가가 당신이 성경을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이 당신을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본다면 당신이 성경을 싫어하는 이유는 성경이 당신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주장을 하신 분은 마귀적인 분이 아니고 만군의 주이시며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전능하신 그분이시다. ​그분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 있을 것이다.

옛소련의 교육부 장관은 1950년대에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은 성경의 광대함에 비해 너무도 작아져가고 있다. 이제 성경이 없어지든지 이 세상이 없어지든지 해야될 것같다.’

​성경이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도록 하자.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이 세상이 없어져야만 할 것이다. 안됐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너로 인하여 땅은 저주를 받고” ​이 말씀은 땅이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담이 행한 그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는 너의 전생애 동안 고통중에서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 소산을 먹는다는 말로 미루어 음식을 먹는 습관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창1:29에 따르면 지면 위에 씨 맺는 모든 채소라고 되어있다. ​즉 옥수수, 귀리, 밀, 보리, 콩, 완두콩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간은 땅 속에서 얻을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은 자기들의 고향인 흙에서 나는 채소보다는 지면 위에 있는 과일을 선호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 순서를 취한다. ​아이들은 사과, 오렌지, 복숭아, 배, 포도, 바나나, 귤 등을 먼저 먹고 그리고 나서 푸른 채소를 억지로 먹는다. ​모세가 기록한 성경은 다윈과 같은 원숭이-인간이 인간의 습성에 관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

창1:29 보라, 내가 온 지면 위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를 내는 나무의 열매가 있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그것이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저주받은 인간이 땅을 파는 첫 번째 괭이 소리에 하나님의 안식은 깨지고 만다.(창2:2) ​이후부터 마지막 아담이신 그분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그때까지는 그 어떤 인간에게도 참다움 안식은 없게 된다. ​그리고 야생동물 역사 창조주께서 지상에서 통치하실 때에야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된다. ​이 우주 역시 의가 거하게 될 새 하늘들과 새 땅(벧후3:10-13)을 창조할 때까지 안식하지 못하고 신음하게 된다.(롬8:22) ​결국 에덴동산은 잡초밭이 되어버렸다. 이후 인간이 무언가를 심은 곳에서는 반드시 잡초가 무성해진다. ​아무것도 심지 않은 곳에는 이끼, 덩굴 및 풀이 뒤덮이게 되었다.

창2:2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시던 일을 끝내시고, 자신의 하시던 자신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시니라.

벧후3:10-13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 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그때 이 모든 것이 녹아지리니 너희가 모든 거룩한 행실과 경건에 있어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겠느뇨?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질 것이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

롬8:22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여자의 후손 시리즈 제9강, 환경의 변화 (창3:17-19)

창세기3장17절부터19절입니다, 우리같이 읽겠습니다,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제가 며칠 전에 제 주변에 어릴 때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세상에서 다들 잘 나갔던 분들 이였는데 지금은 나이가 차서 소위 은퇴하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 좋을지 잘 몰라가지고 아주불안해하는 모습들을 저에게 보여준 것이 아니고 저에게 말까지 해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 운동하고 그다음에 무엇을 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한두 분은 교회를 다니지만 그래서 삶이 무료하다는 말을 이렇게 합니다,

그분들이 경제적으로는 걱정 없는 분들입니다 연금도 많이 타고 또 모아놓은 재산도 있고 빛도 없고 집도 대출 없이 있고 아이들도 다 잘 자라고 이런 사람들인데 어딘가 무료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반면에 제가 이렇게 선교지에 나가거나 주변에 하나님일하는 공동체 안에서 볼 때 그 나이또래의 사람들 중에서 바쁘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신도들인데 전도하려 다니고 또 선교지에 열심히 방문하여가지고 거기서도 열심히 하나님 일에 봉사하고 아주 그냥 자기가 과거에 가졌던 모든 경험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그냥 기쁨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두 그룹을 보면서 우리교회 교인들은 어떤 그룹에 속하게 하여야 할까 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죠,

언젠가는 이 두 그룹 중에 한 그룹 중간그룹은 있을 수가 있지만 의미가 없습니다, 있다면 양쪽 중에 한쪽에 계셔야 됩니다,

제가 우리교인들 보면서 이분은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분은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라고 제 나름대로 보고 있습니다, 왜 그렸냐면 제가 지난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인간은 흙과 먼지로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존재의 생활양상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보면 근방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담과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모든 것이 다 편안하게 되어 버리니까 가질 것 다 가지고 육신의 죽음도 경험할 필요 없고 모든 걸 다 주어버리니까 거기에 사탄이 와서 이렇게 유혹을 했던 겁니다, 그럴 때 너무 편하면 사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든 우리는 가끔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가다가 왕 침을 맞아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나의존재가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담이 그렇기 때문에 소위 타락했다 그랬지 않습니까,

아담이 이렇게 타락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였냐면 과연 너는 흙이구나, 먼지구나 라고 하나님께서 다시 재확인 하시는 겁니다,

안 되겠다 내가 너에게 왕 침을 줘야겠다, 환경을 조금 변화시켜줘야겠다 그래서 이분이 환경을 변화시켜주었습니다 생태계도 변화시켜놓고 삶의 환경 삶의 조건 전부다 이것을 변화시켰습니다,

변화시킨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변화시켰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이 다 편안하면 할 일이 없고 무료해지면 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지 흙이기 때문에 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딴 생각하지 말라고 환경을 변화를 시켜 주신 겁니다,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이제 땀을 흘리게 만들어 놓고 바쁘게 만들고 그렇게 되면 이제 주인의 다시 찾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는 그러한 습성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게 피조물이고 흙이기 때문에 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환경을 변화시켜주실 때 꼭 우리주변에 여기 나오는 그 환경을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토지를 저주시키고 땀을 흘려야 너희들이 이제 먹고 살리라 이것만이 아니고 육적인 환경도 변화시켰습니다,

또 혼적인 환경도 변화시켰습니다, 혼이라는 것은 지. 정. 의 우리의 인격입니다 그다음에 영적 환경도 변화시켰습니다,

그것을 변화라는 말보다 성경에서는 뭐라고 그러냐면 저주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 저주지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감정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때는 격한 말씀도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인간의 약한 부분을 재확인 시켜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변화시켜 준다고 그랬지 않습니까, 환경을 더 나쁘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 역사에 아담의 타락부터해서 예수님의 재림 그다음에 천년왕국 다시 새 에덴이 올 때까지의 인간역사의 흐름입니다, 땀을 흘리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해서부터 우리가 다시 새 에덴으로 들어가는 것이 7000년입니다 아담이 언제 지음을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아담이 타락하는 그 순간부터 7000년 인데 하나님의 눈으로 시간을 보면 7일입니다 7일 동안 이런 일들이 있다가 나중에 신천 신지로 다시 들어가는 겁니다, 새 에덴이 다시 생겨나는 겁니다, 오늘은 제가 말씀 드리는 게 환경 변화가 어떻게 변화가 오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속에서 적용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7000년의 역사를 한 눈으로 간단하게 볼 수 있도록 설명하여 드리려고 그럽니다, 이 환경의 변화를 처음 우리에게 준 분야가 있습니다, 예컨대 육적 환경의 저주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지금 아담이 타락한 후에 그 저주를 어떻게 주었냐면 아담이 본래는 육이 영원히 살게끔 되어 있잖아요,

그 육이 영원히 산다는 말은 그 육이 아주 영광 체로써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영광 체의 어떤 모습의 육인데 그 육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의 모습으로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보다도 훨씬 더 좋은 조건의 육입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아담부터 시작해서 노아까지 1000년 기간인데 이 기간 동안에 사람들이 1000년씩 살았습니다, 죽지 않고 그러니까 육의 조건이 지금 우리의 육의 조건과 다릅니다, 아마 보약을 먹지 않아도 천년씩 살았으니까 육이 특별한 육인 모양입니다 창세기5장에 보면 1000년씩 살았던 명단이 10명이 나옵니다, 아담을 1대로 보시면 아담은 930세를 살았습니다,

그다음에 2대는 셋인데 912세까지 살았습니다,

3대 에노스는 905세까지 살았습니다, 4대 게난은 910세까지 살았습니다,

5대 마할랄렐 이분은 895세까지 살았습니다,

6대 야렛은 962세까지 살았습니다, 7대 에녹은 365세에 들림 받았습니다,

8대 므두셀라는 969년 까지 살았습니다,

9대 라멕은 777세까지 살았습니다, 10대손 노아는 950살 까지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상대적으로 지금보다는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장수하였습니다, 여기 오늘 말씀 속에서 땅이 저주를 받고 이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고 했지만 또 땀을 흘려야만 된다고 했지만 지금 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1000년씩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천년씩 살았던 것이 그냥 천년이 아니고 우리가 과학적인 눈으로 볼 때 천년씩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왜 그렸냐면 환경을 주욱 보시면 첫째 이분들이 채식을 하였습니다, 18절에 보면 채소를 먹을 것이다,

그랬습니다,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생명수 먹고 과일 먹고 이렇게 열매들을 먹었는데 이분들이 타락한 후에 몸이 변형되면서 이제는 식습관이 채식문화가 되어가지고 농사를 지어서 땀을 흘리면서 농사의 열매들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채식을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공기는 어떻습니까, 공기는 살림이 울창하고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기후조건은 사계절이 없었습니다,

항상 약18도에서 20도 정도의 온도로 유지 되었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물 층이라고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위에 물 층이 파괴가 되지 않았든 것이거든요, 물 층이 온도를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그랬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위에 물 층이 존재합니다, 물 층이 나중에 언제 없어졌습니까,

노아의 홍수 때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후에 사계절이 생긴 겁니다, 창세기8장22절에 보면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시베리아에는 춥고 남쪽에 더운 나라도 있고 이렇게 그냥 환경이 변화되어 온도차이가 그때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도 나이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환경을 좋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에덴동산보다는 나쁩니다, 공기도 오염 없이 신선하고 물도 오염이 없고 오존층이라고 그것도 그대로 있고 지금은 오존층이 파괴되어 있잖습니까, 전자파도 없습니다, 핸드폰 이런 것도 없습니다,

지금 전자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게 지금 우리를 파괴시키거든요 이게 지금 암도 만들고 그러잖아요, 핸드폰을 너무 많이 사용하면 뇌 암이 온다고 그럽니다, 생활양상도 아주 단순하고 이렇게 보니까 마음도 편안합니다, 다른 생각 별로 안하니까 우리처럼 지금 핸드폰에 누구 메시지 왔나 확인 안하고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 것이 없으니까 오래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육적인 삶은 그런데 이분들의 혼적인 삶에도 타락한 후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냐면 이분들이 에덴동산에 살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질그릇 같은 토기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성품이 거기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도 있잖습니까, 항상 사랑이 있고 아가페사랑은 무조건 사람을 안아주고 껴안아주는 조건 없는 사랑 그런 마음이 항상 있고 그리고 항상 희락이 있고 기쁨이 항상 있고 그다음에 화평이 있고 평강이 오고 오래 참는 것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고린도전서13장에 하나님의 성품 사랑은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왜냐하면 자랑하면 제3자가 마음 아파합니다, 모든 것을 제3자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자랑하지 않는 겁니다,

질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 생각 안하고 모든 것 다 용납하고 참고 모든 것 다 믿고 모든 상항에서 다 견디고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담이 처음에 그런 마음들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인격이 점점 점 하루아침에 없어진 게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점점 없어지면서 마귀의 성품으로 대체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흙이기 때문에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질그릇 자체가 이게 언젠가는 무너지고 깨어지는 존재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성품을 담아보니까 이게 온전치가 않는 겁니다, 온전치가 않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내가 승화되려도 승화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승화될 수 있는 최상의 존재가 누구였습니까, 에녹과 노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분들도 질그릇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황 목사가 제 아무리 승화되었다고 까불어 봐도 에녹을 따라 가지 못합니다, 노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한번 옆 사람을 보세요, 어느 수준인가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질 그릇 항상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질그릇인 것을 깨달으면 옆 사람을 정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질그릇이고 저 사람도 질그릇이야 질그릇이 이렇게 깨어졌잖아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질그릇을 깨어지도록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질그릇은 깨어져야 됩니다, 안 깨어지면 교만하여 집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닮았지만 그 질그릇이 나 닮았다 내안에 모든 하나님의 성품이 다 있다 그러면 사람이 하루아침에 교만해져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냐면 너 교만한 티를 내기만 해봐라 내가 깨어버린다 그럽니다, 왜냐하면 너는 질그릇이야 너 가 어떻게 나처럼 되려고 그래 그러는 겁니다, 사람은 이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아주 원칙입니다 깨질 때 깨어져야 되고 깨질 때 무엇을 느끼게 하는지 아세요, 아하 나는 하나님이 될 수 없구나,

그런데 이 사탄은 하나님처럼 된다고 속였거든요, 하와에게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구나, 이게 하나님의 성품을 내가 닮고 있지만 이게 깨지는구나, 불완전한 피조물이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이 질그릇 자체도 내가 유지 못하겠구나, 이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자꾸 고백하게 하나님께서 만드는 겁니다,

이 질그릇이 깨어질 때 마다 환경을 변화시키는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질그릇을 깨는 일을 하기 위해서 환경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환경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질그릇이구나,

내가 하나님형상대로 살 수 없구나, 하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 이 경우를 한번 봅시다, 아담이 이렇게 타락한 후에 아담의 아들들이 누구였습니까, 가인이었고 그다음에 아벨이었잖습니까,

이 가인이 질그릇입니다 아벨도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타락이 있은 후에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하였다고 지난시간에 제가 말씀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미하잖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가 다음시간에 말씀드리겠지만 이 가죽옷을 입혀서 동물을 잡아서 피 흘리는 연습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그 아들 가인과 아벨에게 이제 너희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그러느냐면 동물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라 이렇게 아담에게 하나님이 말씀 하셨으니까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아담이 두 아들들에게 말했는데 큰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양반이었고 둘째아들 아벨은 양을 치는 아들 있었는데 제사를 아벨은 양을 치니까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그렇게 안 하였다고 그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가인보고 너 이놈아 너 왜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 어떤 분은 그럽니다, 그분은 농사지으니까, 자기가 농사지은 일부를 바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피의 제사를 안 드렸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그랬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랬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로마서10장17절에 그랬습니다,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을 한 것을 듣고 믿고 그냥 한 것은 아벨입니다 가인은 듣고서 안 한 겁니다,

가인이 불순종한 겁니다, 가인이 이렇게 불순종 했다는 것은 우리가 이분이 사탄의 마음이 그의 질그릇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 가인의 불순종한 모습을 보면 우리모습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랬습니다, 너 이놈아 너 이렇게 불순종했느냐 그러니까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니까 성경에 보면 4장5절에 그랬습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심히 분을 내었다고 그랬습니다,

자기는 자기대로 다 했는데 하면서 그 분을 내는 것은 누구의 마음입니까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사탄의 마음입니다 벌서 이미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덤벼드는 겁니다,

그래놓고는 안색이 변하였다 그랬습니다,

안색이 변하여 가지고 막 덤벼들었습니다,

그 속에 이미 사탄의 마음이 있어서 그리고는 질투심이 유발되어 가지고 어떻게 했습니까, 동생을 죽였잖습니까, 살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랬지 않습니까, 가인아 너 아우 어디 있느냐 그러니까 이분이 무엇이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거짓말을 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랬습니다,

이렇게 오리발을 내미는 겁니다, 이런 것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실수해놓고 무엇 하였느냐 그러면 자기가 해놓고 난 몰라요 그럽니다, 이게 다 마귀의 성품들입니다 그리고는 가인이 가지고 있는 마귀의 성품들이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부터 노아 홍수 때까지 노아홍수는 아담의 타락부터 해서 1600년 후에 일어났습니다,

그 1600년 동안에 죄악이 관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을 닮은 성품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바로 직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 계획하는 것이 다 악했습니다,

이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이 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이라 그랬냐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 지으심을 보고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했다 어떻게 하나님이신데 미리 다 아시는 분이신데 한탄하시고 근심하십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생각이 되십니다, 질그릇에다가 하나님의 모습을 집어넣어주니 이놈들 가봐야 얼마나 가겠느냐 그냥 이 정도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이 한계가 있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질그릇이라는 것은 이렇구나,

라는 것을 하나님이 한번 다시 재확인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노아홍수가 있은 후에 누구누구가 살아났습니까,

노아의 8가족이 살아났습니다, 그 후부터 하나님은 노아홍수를 왜 일으켰냐면 하나님이1600년 동안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져 가는 겁니다,

질그릇이 이제는 깨어지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제는 안 되겠다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더 깨는 겁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입니다 더 깨어가지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환경의 변화를 더 나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홍수이후에 사람들을 다 점멸시키고 그 후에 나이도 더 격감을 시켜 버렸습니다, 나이도 급격한 격감이 일어납니다,

노아의 아들 셈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까지가 10대거든요, 그것도 창세기10장26절부터 보시면 나오는데요, 거기에 사람들 나이를 이렇게 보면 창세기5장에 나오는 아담에서부터 노아까지의 나이와 엄청나게 구별이 됩니다, 셈부터 시작해서 주욱 나오는데 그 후부터 나이가400세.300세.200세.100세 이렇게 나이가 내려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몇 살에 죽었느냐면 205살에 죽었습니다, 데라는 셈에서 9대손입니다 셈에서 10대손이 아브라함입니다 셈의 아버지 노아 때 까지만 하여도 근 1000년씩 살은 사람들이 환경이 나빠져 가지고 데라가 205세에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처사라는 127세에 죽었습니다, 이삭은 180세에 죽었습니다, 야곱은 147세에 죽었습니다,

요셉은 110세에 죽었습니다, 모세는 120세에 죽었습니다,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약 500년 후에 유명한 분이 다윗이 나옵니다, 주전1000년인데 아브라함 후 1000년 된 사람인데 다윗은 몇 살에 죽었냐면 70세에 죽었습니다, 다윗은 나이가 계속 급감하는 겁니다, 모세가120살까지 살았잖습니까, 그렇지만 모세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면 500년 후 사람이거든요 아담부터 시작하면 2500년 후 사람이 모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면 1500년 전 분이십니다 모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70정도 밖에 못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만 120살까지 살았습니다, 시편90편10절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모세가 쓴 글이거든요 우리연수가 70이요 강권하면 80이다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부터3500년 전의 사람들의 나이가 70살 이었다는 겁니다, 잘 살면 건강하게 살면 80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를 보면 지금부터 2000년 전입니다 예수님 당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보고 내가 2000년 전에 아브라함하고 같이 지냈단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8장에 보면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여보 당신30세 된 젊은 사람이 어떻게 2000년 전에 아브라함과 같이 지냈다고 그러느냐 당신 지금 나이 50도 아닌데 우리말 같으면 환갑도 안 된 젊은이가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그 당시에는 50이 환갑이었든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병원도 좋지 않고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으니까 환경이 그렇게 나빴습니다, 오늘날도 환경이 나쁜 곳에서는 50살을 넘기지 못합니다,

특히 육식문화를 하는 사람들은 그렸습니다,

지난번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몽고사람들은 생선이나 채소를 싫어합니다, 성격이 아주 거칩니다, 육식음식문화가 나이가 수명이 이렇게 단축되는 겁니다, 그것도 저주 같습니다, 홍수가 일어난 후에 창세기8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써놓았는지 아십니까, 홍수가 일어난 후에 하나님이 살아있는 동물 육식을 먹게끔 하였습니다, 창세기8장22절을 보세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홍수이후에 사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9장3절에 3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 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 피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우리가 상징하기 때문에 이때부터 홍수이후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몇 년 전입니까 홍수가 주전 2500년 전이거든요 지금부터는 4500년 전에 갑자기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육식은 이게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이게 복이 아닙니다, 그러면 채식은 복입니까 복이 아닙니까, 그것도 저주의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에덴동산에는 채식이고 육식이고 없었습니다,

다른 것을 먹었습니다, 한번 씩 혼내줄 때마다 음식을 주시는데 그 음식모양이 가면서 점점 나빠졌습니다, 혼 내 줄때마다 그런데 이 육식을 왜 먹게 되었을까요, 우리 육이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육이 단백질이 필요합니다,

탄소화물이 필요하고 단백질이 필요한데 모든 조직이 활성화 되려면 단백질이 필요합니다, 단백질의 재료가 채식에서 나오는 단백질은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삶이 어려워지고 환경이 나빠지니까 이제는 식물성 단백질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이 사회가 악하여져서 너희들 고민도 많고 욕심도 많고 경쟁도 많고 이런 복잡한 사회에서 너희 에너지를 다 뽑아버린다 그러니까 이제는 너희들 체식가지고 안 된다는 겁니다, 단백질 공급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동물을 잡아먹으라는 겁니다,

동물에서 나오는 단백질 그런데 동물을 먹을 때 기름을 먹지 말라 기름까지 먹으면 그것이 성인병으로 변하여 버리는 겁니다,

내장 먹으면 안 되고 그런데 우리는 내장 먹고 선지피 먹고 우리는 가리지 않고 다 먹습니다 얼마 전에 K B S에서 장수마을 프로그램 제가 유심히 보았습니다,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면 세계에 장수마을이 여러 곳이 있는데 그중에 두 곳은 어떤 곳이냐면 고기만 먹는 동네입니다 고기만 주식으로 하는데 장수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K B S카메라가 거기 가서 찍었습니다,

이분들이 어떻게 고기 육식을 먹는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장수 하는가 가서 보니까 이유가 있더랍니다, 어떻게 고기를 먹는가 하면 고기를 푹 삶아서 기름기 다 건져내고 또 삶고 그래가지고 기름을 다 제거한 고기를 국물은 먹지 않고 고기만 뜯어서 먹는 답니다, 카자흐스탄과 중국 국경지역입니다 이슬람사람들이였습니다 그런데 보통 젊은 사람이 80. 90입니다 또 한군데를 보여주는데 일본 오끼나와를 보여 주는데 오끼나와에도 80. 90이 젊다는 겁니다, 왜 그렸느냐면 그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삶는데 한번 삶고는 기름기 다 뽑아내고는 또 삶고는 그다음에 거기에 소스 바르고 해서는 삶아서 기름기를 다 뽑아가지고는 소스를 발라서 먹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도 결론을 이렇게 내리는 겁니다,

고기를 삶아서 먹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고기 안에 병균도 죽고 기름기가 다 빠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 속에 들어있는 단백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고기 구워먹는 것 이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기름기가 안 빠진다는 겁니다, 삶아서 먹어야 된다는 겁니다,

기름기를 뽑아내어야 된다는 겁니다, 식당에서 숯불에서도 화학 성분이 나온답니다, 그래서 불고기니 갈비니 구워먹는 것 절대로 먹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냉면집에 가면 수육을 먹어야 됩니다,

이렇게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이제는 이렇게 고기까지 못 먹게 만들어 놓고 고기도 우리가 선별해서 먹지 않으면 우리가 성인병 걸리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홍수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홍수 후에 육신의 변화만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의 변화 혼의 변화도 이것도 엄청나게 더 심화시켰습니다,

사탄의 성품으로 더 많은 혼의 마음이 사탄의 마음으로 변하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홍수이후부터 사람들 보면 지금은 더 심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때는 더 심하다 그랬습니다, 우리 속에 지금 법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세상 사람들 볼 것 없이 내 마음에 지금 뭐가 들어 있습니까,

마귀의 성품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미움이 들어있고 질투가 들어있고 시기가 들어있고 다툼이 들어있고 혈연 지연 학연으로 편 가르고 있고 이게 전부 마귀의 성품들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러면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습니다, 이기심. 분 내는 것. 원수 맺기. 술 취함. 당 짓기. 분쟁. 혈기 부리기. 불만. 불안. 초조. 이간질. 불평. 평강이 누구 보면 사랑스러운 모습보다도 그냥 밉기만 하고 이런 마음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냥 찬양하고 뭘 다하는데 교회가 그것이 더 심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그런 것 없는 줄 알았는데 교회에오니 그런 사람이 더 많아 혼돈되어 있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내고 성경 많이 알고 그런 사람인데 보니까 이런 것들이 더 많습니다, 이게 성령님과 하나님말씀이 믹서가 되어서 막 나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혼 돈 되는지 아십니까,

이게 깨끗하지가 않는 겁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이 이런 모습이 있느냐 없느냐 다 가지고 있지만 이런 걸 없애려고 노력하느냐 그렇기 때문에 매일 눈물 흘리며 주여 내가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 보면서 저분이 저런 모습이 있구나, 나하고 똑같구나,

내가 더 심하구나, 자꾸 비교하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용서해주는 마음이 들어오고 우리가 이런 마음을 다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굴을 보면 웃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각합니다,

또 우리가 성경 많이 알고 또 영적인 사람들 보면 더 심각합니다,

얼굴에 평강이 없는 겁니다, 왜 그렸습니까,

이게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일수록 밝아야 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마귀의 성품이 나갔다는 소리입니다 순진해지고 밝아지고 그런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인류역사는 계속해서 사람의 마음이 더 악해지고. 악해지고 악해지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이고 왜 하나님이 악하도록 허락하여 놓았는가,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다 쥐고 계십니다, 우리가 더 못났고 우리가 너희들은 사탄의 밥이 될 수 있는 질그릇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점점 더 악하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소수의 사람들 너희들 그것을 깨달았느냐, 내가 이제 다 회복시켜줄게 그런 마음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가지도록 하나님이 지금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너희 존재가 누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끼리 있으면서 아 저분의 존재가 저렸구나, 그래서 우리가 뭘 해주어야 됩니까, 저분이 질그릇이구나,

소위 용서해주고 이해하여주라는 겁니다,

너희들 똑같은 질그릇들이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들 질그릇인데 오늘도 내가 너희들 알아주고 있지 않느냐 오늘 우리 모두 하나님이 율법가지고 따지면 여기 앉아 있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리몽동이 다 부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하시잖아요, 너희들 질그릇이야 그러면서 안아주시고 또 안아주시고 나의마음을 받아서 너희들도 이웃들에게 똑같이 베풀어라 싸움하지 말고 베풀어라 잘났다고 도토리 키 재기 하지 말고 베풀어라 그래 베풀어라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겁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똑 같습니다 내가 조금 높아요, 높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이제 7년 환란이 큰일들이 3차 전쟁이라 하잖습니까, 앞으로 일어날 것 아닙니까 이제 그게 우리 눈에 보이잖아요, 3차 전쟁이 일어난 후에 이게 불의 심판입니다 일어난 후에 3차 전쟁이 끝나고는 천년왕국이 있습니다,

이 천년왕국은 물의 심판 전에 있었던 천년씩 살던 그 상황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겁니다, 물의 심판 전에 그래서 사람들이 천년씩 삽니다,

환경을 다시 회복시키는 겁니다, 과거에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그 천년기간의 환경으로 변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그 때는 고기를 먹었습니까, 안 먹었습니까, 그 때는 고기를 아마 안 먹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불고기가게들은 전부 문을 닫아야 될 겁니다 채식문화를 가지게 되고 모든 환경은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시니까 그러니까 천년씩 살 수 있을 겁니다,

천년씩 살지만 사탄은 아직 있고 세상은 어렵지만 과거보다는 덜 어지러운 겁니다, 그러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천년왕국이 끝난 다음에 심판이 있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새 에덴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새 에덴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오리지널 아담을 만들었던 그 에덴으로 회복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하여 지금 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불의 심판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상태가 가장 나쁠 때가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보면 이런 표현을 쓰서 죄송하지만 다 도둑놈들 같습니다, 하나같이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위주고 모든 사람들 다 죽일 놈들이고 이런 악한 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에녹같이 되어야 되고 노아같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에녹은 어떤 사람 이였습니까, 하나님과 동행 했던 사람입니다 거기에 물들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성품이 하나님을 닮았던 사람 이였습니다,

우리는 그래야 됩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들어있을 때 무엇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그랬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들어놓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임을 다시 확인하게 합니다,

나의 나약한 부분. 한시 성. 불완전성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내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자꾸 확인 시키거든요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하나의 인간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개인의 삶이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딱 보시고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조금만 환경을 좋게 하고 모든 걸 잘 해주면 교만이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허용하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이끄십니다, 어떤 분은 그럽니다,

죽으라고 물질 달라고 10년을 기도하여도 나보다 악한 사람들은 돈을 잘 버는데 나에게는 어려움만 주고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 나는 안 되는군요 그렇지만 감사합니다,

나 이것 되기만 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될 텐데요 주님 나 이것 투자하여 두 배의 이익이 되면 내가 선교하겠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선교 좋아한다, 만약에 두 배 이익이 되면 너는 딴 짓할 거야, 주님이 아시고는 그런 사람에게 안 주십니다 그게 복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니야 너는 무엇인지 모르게 너는 교만하게 된다, 안돼 너는 진흙이야 너는 질그릇이야 자꾸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있는 그대로 만족해라 그러는 겁니다,

그 안에서 평강을 누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오늘날 이 상황이 제일 좋은 상황이 구나 하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세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평강을 주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용서하는 마음도 주시고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도 주시고 주님 저 사람은 나보다도 잘 났지 않은데 모든 게 잘 풀립니까,

그런데 내가 영성으로 깊이 그 사람을 들여다보면 어리석다는 겁니다,

저게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텐데 저사람 보니까 교만기가 조금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 제가 없는 것이 훨씬 좋군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는 하루 세끼 먹고 있잖아요, 이 훈련 그러면서 하나님의 위대성을 내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계속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시구나, 나는 진흙이고 질그릇이시구나,

이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는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 그게 영성이 깊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영성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닙니다,

하나님중심으로 생각하시면서 오 하나님 너무나도 위대 하십니다,

나는 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자꾸 느끼는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아시겠지만 교만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한국말로 제가 K S마크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미국에 가서 할 것 다하고 대학생활만 20년 했다고 그랬습니다, 공부도 엄청나게 제가 많이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모자란 사람입니다 공부만 하였으니까요 그러니까 공부벌레 아니면 학교 다니는 것이 저사람 직업이야 이런 식으로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보면 자칫 잘못하면 교만하게 됩니다, 자랑거리가 많아지는 겁니다, 아는 체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하나하나 손보시는 겁니다, 손보시면서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나를 과거 10년 동안 밑바닥부터 다시 돌아가게 하여 선교 지를 많이 다니면서 밑바닥사람들과 같이 지내게 하시면서 그분들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내가 이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구나, 오지를 다니니까 태국까지만 오면 태국공항에 내리면 이게 천국 같습니다, 그리고 태국 공항에서 다시 비행기타고 한국에 오면 낙원이구나,

그런 걸 느낍니다, 우리나라가 너무나 잘 삽니다 그러다가 미국가면 거기는 천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 천국에서 지옥으로 왔다 갔다 해 보았습니다 과거10년 동안 해보았는데 알고 보니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들이 저를 보면 제가 아직도 교만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더 많이 깨어져야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85세 까지 사역 좀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진흙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세요,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영성생활입니다,

여러분들 어떤 환경에 있든지 이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깨시려고 그러구나, 환경의 변화를 주님이 나에게 허락하시구나,

왜냐하면 기독교의 전체역사를 보니까 때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환경의 변화를 자꾸 주시는 겁니다,

이유는 너 가 누군가를 알아라, 내가 누군가를 알아라,

이걸 자꾸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있을 때 마다 이걸 해결하여 주십시오, 해결하여 주십시오,

하는 것 보다 주님 이걸 통해서 주님이 누구신가를 나에게 분명히 더 가르쳐 주시고 내가 누군가를 스스로 더 깨닫게 해 주세요 이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레이시아 어학원(eskyedu) :: 창세기 3장19절

“All your life you will sweat to produce food, until your dying day.

Then you will return to the ground from which you came.

For you were made from dust, and to the dust you will return.”

“너는 먹기 위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하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네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직독직해 & 문법 & 중요 표현 및 단어]

All your life / you will sweat / to produce food / until your dying day.

네 평생을 / 넌 땀을 흘릴 것이다 /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 너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 넌 죽는 날까지 먹기 위해 평생을 땀을 흘릴 것이다.

[ until : ~까지 계속 ]

[창세기 3장 설교문] “인간의 저주”(창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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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3장 설교문 중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인간의 저주”(창3:16-19)

오늘 말씀은 아담과 여자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결국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은 강력하게 말씀하셨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먹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 죄 때문에 결국 인간들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여자에게 저주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여 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짓기 전에는 해산의 고통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라는 단어는 (רבה라바)입니다. 히필을 사용하고 있고 강조 문입니다. 많아지게 하다, 넘치다, 강하다, 라는 뜻입니다. 여자는 죄를 짓고 나서 임신하여 출산하는 고통을 엄청나게 많아지게 되고, 넘치게 되고, 강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하나님이 강력하게 주고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라는 문장에서 ‘원하고’라는 단어는 (תשוקה테슈카)입니다. 뒤쫓다, 원하다, 갈망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나서 남편을 항상 뒤쫓아 사는 인생이 되고, 남편을 원하고, 남편의 그늘에서 사는 존재가 되고, 항상 남편을 갈망하면서 살게 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남편은 아내를 다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스릴 것이니라’ 라는 단어는 (משל마샬)입니다. 통치하다, 주관하다, 다스리다, 라는 뜻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통치하고, 주관하며, 다스리는 관계가 됩니다. 원래는 동등한 위치였는데 여자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남편의 통제를 받고,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완벽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어쩌면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죄를 지음으로 추락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고 다스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떨어진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신랑으로 표현이 되고 우리는 신부로 표현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죄악에서 구원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고 나면 신랑과 신부는 동등한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아담과 여자가 지은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주님과 동등한 입장으로 올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서 함께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과 동등의 관계가 되었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말도 조심스럽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파괴시켰던 것을 예수님은 다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이 죄악으로 파괴되어 도저히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을 해결할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완전히 자신이 희생함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해결해 주신 분입니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다음은 아담의 저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아내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 라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담이 저주를 받았는데 왜 땅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이것도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땅은’ 이라는 단어는 (אדמה아다마)입니다. 붉어지다, 붉게 물들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에 흙에서 아담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흙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은 아담의 근원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담을 저주하게 되니 결국 땅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근원을 저주하여 고통을 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의 문장에서 ‘수고하여야’라는 단어는 (עצבון이차본)입니다. 근심하다, 슬퍼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아담은 저주를 받아 평생토록 근심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죄로 인한 저주입니다. 육신이 힘든 것은 쉬면 풀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과, 마음의 고통은 쉽게 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이렇게 심령의 근심은 사람의 뼈를 마르게 하여 골수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아담은 평생토록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번뇌하고, 슬퍼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육신이 사는 930세 동안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수고하지 않으면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먹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열심히 일을 해야 먹고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만 섬기면 고통도 없고 평생 즐거운 삶을 살 수가 있었는데 한 순간 죄를 짓고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 즐거움과 낙을 찾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결국 일을 할 때에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땅은 저주를 받아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것들을 보면 가시가 많이 달려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벼도 가시가 있고, 보리나 밀도, 가시가 나와 있습니다. 과일로는 복숭아도 먹으려면 겉에 가시가 나와 있습니다. 밤도 가시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먹는 주식이 가시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가시를 제하고 먹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고하고 애쓰면 더 은혜가 됩니다. 내가 말씀을 더 연구하고, 듣기를 사모하고,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먹으려고 하면 꿀 송이처럼 달고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충대충 하면 말씀도 은혜가 되지 않고 나에게 별로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는 과일이나 주식들을 보면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알맹이는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것 같지만 속에는 아주 맛있는 것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벼도 속 알맹이를 먹고, 보리나, 밀도 알맹이를 먹고, 밤도 가시를 발라내야 먹을 수 있고, 호도도 껍데기를 까야 먹을 수가 있습니다. 포도도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먹습니다. 이렇게 많은 과일들이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를 먹는 것처럼 영적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흠모할 것도 없고, 외모적으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비밀이 있고 영생을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인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법칙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많은 기도와, 수양과, 말씀을 읽게 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하늘에서 순간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를 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기초적인 말씀의 기본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토대로 하나님도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은 땅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먹고사는 존재가 됩니다. 일을 하지 않고는 쉽게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흙에서 취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라는 문장에서 ‘취함을’이라는 단어는 (לקח라카흐)입니다. 푸알, 완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탈취하다, 강권하다, 잡혀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푸알로 강조수동입니다. 흙에서 취함을 받은 것이 엄청난 탈취와 강권함으로 잡혀 가듯이 아담은 흙에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쉽게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고뇌 속에서 어떻게 인간을 창조해야 할까?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으로 탄생된 것입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들도 평생 하나의 걸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행착오와 열정을 가진 후에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 고민하시고 최고로 만들기 위해서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된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수억만의 경쟁을 뚫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엄청난 축복입니다. 수억만 마리의 정자들과 싸워서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지금도 수억만 마리는 난자를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난자를 만나 생명을 만들어 탄생시킨 하나님의 놀라운 걸작품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생명으로 지음을 받기 위하여 강조수동으로 정자들끼리 싸우고 경쟁하여 하나의 난자를 만나기 위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뱃속에서 10달 동안 열심히 먹고 자라나야 하고 이 세상에 나올 때는 얼마나 큰 고생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여 자라게 하고 태어나게 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러면 엄마는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많은 고통을 인내한 후에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한 영혼을 잉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잉태할 때에 얼마나 큰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수억만 마리의 정자들과 경쟁하여 승리한 것과 같은 확률입니다. 이 세상에 60억 인구가 있는데 그곳에서 내가 선택받았다는 것은 정자가 난자의 선택을 받아 생명을 잉태하듯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은 엄청난 기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잉태하여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밖의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달의 인생을 살고 나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영원한 세상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생각하듯이 엄마 뱃속이 전부다. 라고 살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으로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생명이 잉태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로 부활되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장사하여 불에 태우면 남는 것은 한 줌의 흙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성분을 조사하면 흙과 똑같은 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잉태해야 합니다. 어쩌면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짧은 10달을 살면서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엄마 뱃속이 전부가 아니라 이 세상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곳은 거듭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명이 잉태되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영원한 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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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 성경주석

<창세기 3장 흐름정리>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하게 된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최초에 인간은 영적, 도덕적으로 무죄한 상태로 창조되었지만,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가 끊어지는 이른바 영적 사망의 중징계를 받았으며 각종 저주와 고통 속에 처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타락의 주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불순종한 것이다. 하지만 이 최초의 타락 기사 가운데서도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계획이 이미 계시되어 있다. 즉 여자의 후손으로 나실 메시야를 통한 구속에 대한 암시가 15절과 21절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창세기 3장 줄거리>

1. 뱀이 하와를 속임.

6. 인간의 수치스러운 타락.

9. 하나님이 그들을 심문함.

14. 뱀이 저주를 받음.

16. 인류의 처벌.

21. 그들의 첫 옷.

22. 그들이 낙원에서 추방됨.

<창세기 3장 개역한글>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장 성경주석>

3:1 뱀.

뱀과 더불어 이 이야기 가운데는 새로운 존재, 곧 이후에 계속되는 세계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자가 등장한다. 모세는 낙원의 완전한 상태에 대한 묘사에서 타락의 역사로 주의를 돌리는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지구가 행복과 사랑과 완전의 세상에서 슬픔과 증오와 악의 세상으로 전환되었다. 모세는 에덴에서의 축복에 넘치는 기간, 곧 자연의 역사를 연구하며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대로 정원을 돌보며 저녁 서늘할 때에 창조주와 더불어 날마다 교통하던(3:8), 완전한 행복 속에서 보냈던 시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둔다.

3:1 들짐승 중에…가장 간교하더라.

뱀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간교한 피조물로 소개된다. “간교하다”는 단어, 아룸(‘arum)은 성경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품성의 경향을 나타내기 위하여 몇 차례 사용되는데(욥 5:12; 15:5), “영리하다” 또는 “교활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대개는 “신중하다”는 호의(好意)적인 의미로 사용된다(참조 잠 12:16, 23; 13:16; 14:8, 15, 18; 22:3; 27:12). 여기서는 후자의 호의적인 의미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왜냐하면 뱀은 하나님이 “좋았더라”, 심지어는 “심히 좋았더라”(1:25, 31)고 선언하였던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뱀의 악한 특성은 타락과 그에 뒤이은 저주의 결과이지, 그것이 창조되었을 당시 그 동물의 특성은 아니다.

뱀은 실재한 동물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존재였다는 반대 주장은 그것이 진정으로 동물이었다는 명백한 진술에 비추어 볼 때 심각하게 반박할 필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온 성경은 뱀 자체가 인간의 타락에 책임이 있지 않고, 오히려 사단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매우 명백히 한다(참조 요 8:44; 고후 11:3, 14; 롬 16: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인간을 속이기 위한 시도에서 뱀을 매개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때때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뱀으로 불린다(참조 계 12:9; 20:2).

하늘의 천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루시퍼의 타락(사 14:12, 13; 겔 28:13~15)은 명백히 인간의 타락보다 앞서 일어났다. 에덴 동산에서 매일 인간과 대화를 나누었던 하나님은 인간이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모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고 사단과 다른 천사들의 배도에 대해 알려 주었으므로, 아담은 그의 침입을 경계해야 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이 천사로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였을 것이며,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단을 맞아 그의 유혹을 거절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사단은 뱀을 통하여 하와에게 말했고, 그리하여 그녀를 기습하였다. 하지만 비록 하와가 그것에 속은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것이 결코 우리의 첫 어머니의 죄를 면할 수는 없다(참조 딤전 2:14; 고후 11:3).

우리의 첫 부모의 시험은 그들의 충성과 사랑에 대한 시험으로 허락되었다. 이 시험은 그들의 영적 개발과 품성의 형성에 필수적이었다. 만일 그들이 상처를 입지 않고 시험을 통과했다면, 그 결과는 그들에게 영원한 행복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견뎌낼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고전 10:13), 그는 사단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또는 이 한 나무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단은 하나님보다 훨씬 열등할 뿐 아니라 인간 자체보다 훨씬 저등한 한 피조물의 형태로 왔다. 아담과 하와는 단순한 동물의 매개체를 통하여 사단이 그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게 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이중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3:1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뱀을 자기의 매개체로 사용한 사단은 여자에게 단독으로 말할 수 있을 때를 찾았다. 한 개인이 자신을 보호해 주는 환경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 나쁜 일을 저지르도록 그를 설득하기가 항상 더 쉽다. 하와가 남편 곁에 머물러있었다면, 남편의 존재는 그녀에게 보호막이 되었을 것이며, 그 이야기는 의심할 바 없이 다른 결말을 맺게 되었을 것이다.

3:1 하나님이 참으로…하시더냐.

사단은 순진해 보이지만 매우 교묘한 질문을 그녀에게 했다. 그 질문은 (1) “너희들이 먹지 말아야 할 실과 나무들이 동산에 있느냐?”라는 뜻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로 번역해야 할지 혹은 (2) “동산의 어떤 나무의 실과도 먹어서는 안 된다”로 번역해야 할지 논란이 되어 왔다. 히브리어는 두 번역이 다 가능하므로, 다소 모호한 점이 있다. 사단은 자신의 말이 불명확하고 모호하도록 의도하였다. 그의 목적은 명백하였다. 그는 여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명령의 진정한 어법과 정확한 의미에 관해서, 특히 그러한 명령의 타당성과 공정성에 관해서 의심의 씨를 뿌리기 원했다.

3:2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하와는 그 질문을 위에서 논의된 두 번째 의미로 이해했음이 명백하고, 따라서 돌이켜 남편에게로 달아나는 대신에 망설임과 의심의 표시를 나타내고, 그 주제를 뱀과 더불어 더 깊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선언하였다. 하와는 이 말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로 바꾸었다. 왜냐하면 계명을 범함으로 이르러 오는 죽음의 형벌을 충분히 확신하였으므로, 그 여자는 그러한 행동에는 죽음이 뒤따를지도 모른다고 선언한 것이다. “~할까 하노라”에 해당하는 단어 펜(pen)은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장난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내적인 경각심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취해진 냉소적인 태도 아래 숨겨져 있다. 하와의 말 속에 담긴, 뱀의 말을 반영하는 의심과 머뭇거림은 그녀의 자비한 창조주에 대한 본래의 사랑보다는 오히려 현저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순종의 동기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명령의 절대적인 공의에 대하여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징후는, 하와가 자신에게 분명하게 알려진 그 나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나무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는 식으로 그것의 위치를 일반적인 용어로 언급함으로써,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에덴 동산의 가정에 있는 다른 나무들과 거의 동일한 부류 가운데 두었다.

3:4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사단의 첫 번째 질문이 정말 그러했듯이, 의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의도된 것이라면, 그가 뒤이어 한 진술은 권위적인 선언의 모습을 띤 기만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진실과 거짓이 가장 교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 주장은 히브리어로 할 수 있는 최고의 강조법으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반박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사단은 공공연한 거짓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에 도전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가 그를 거짓의 아비라고 부른 것(요 8:44)은 옳다.

3:5 너희 눈이 밝아.

사단은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금지한 이유를 그럴듯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1) 그는 피조물의 행복을 시기하였다. 사단은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내 말을 믿어라. 그 나무를 금한 것은 그 열매를 먹음으로 너희가 죽을 것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너희의 주인과 경쟁자가 될 것을 염려해서이다.” (2) 그의 말은 거짓말이다. 사단은, 그 과일을 먹으면 죽음이 이르러 올 것이라고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하나님의 요구가 가장 가증스럽고 괘씸한 양상으로 제시되었다. 진실에 거짓을 뒤섞음으로써 사단은 하와의 마음을 혼란시켜 하나님의 말과 그의 말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고자 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한 말(2:17)과 유사하게 들린다. “선악을 알 줄”이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다. “너희 눈이 밝아질 것이라”는 약속은 현재의 제한된 시야가 뱀의 충고를 따름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3:5 하나님과 같이 되어.

「제임스왕역」에서 “신들”(gods)로 번역된 동일한 단어 엘로힘(’elohim)이 1, 3, 5절에서는 “하나님”(God)으로 번역되고 있다. 여기서 「제임스왕역」의 번역자들은 「70인역」과 「불가타역」을 따랐다. 올바른 번역은 “너희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이다. 이것은 사단의 말(참조 사 14:12~14)의 신성모독적인 성격과 그의 속임수의 심각성을 가장 예리하게 나타낸다.

3:6 여자가 본즉.

여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싹튼 다음에는 그 나무가 매우 다르게 보였다.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세 번씩이나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미각과 눈 그리고 지혜의 증가를 바라는 그녀의 갈망에 호소하였다. 열매를 따먹고자 하는 욕망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사단의 유혹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마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는 죄를 지었다.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그 열매를 따서 먹는 행위는 범죄의 길에 들어서는 일의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었다.

3:6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신에게 권리가 없는 것을 탐함으로, 그 여자는 계명을 하나씩 차례로 범했다. 그녀는 다음에 하나님의 소유를 훔침으로 여덟째 계명을 범했다(출 20:15). 금지된 열매를 먹고 그것을 남편에게 줌으로써 그 여자는 또한 여섯째 계명을 범했다(출 20:13). 그런 다음 그녀는 사단을 하나님보다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창조주보다도 오히려 그의 말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첫째 계명을 위반하였다(출 20:3).

3:6 남편에게도 주매.

자신이 즉시 죽지 않는 것, 즉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는 유혹자의 단호한 주장을 확증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을 목격하고, 하와는 기만적인 의기양양한 감정을 경험하였다. 그녀는 또한 남편과 그 느낌을 함께 나누기를 원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담을 “남편”이라고 부른 첫 번째 경우이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 되는 대신에 그녀는 그를 파멸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여자가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었다는 진술은 남편이 유혹의 현장에 내내 말없이 그녀와 함께 서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 “자기와 함께” 먹고 예상되는 유익을 함께 나누도록 그 실과를 그에게 주었다.

3:6 그도 먹은지라.

아담이 먹기 전에 그와 그의 아내 사이에 대화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가 죄와 불순종의 길에 들어선 아내를 따라야 할까 아니면 하나님이 어떻게든지 그의 깨진 행복을 회복시켜 줄 것임을 믿고 그녀를 포기해야 할까? 그녀가 그 실과를 먹은 결과로 죽지 않았으며 어떤 명백한 해(害)도 그녀에게 이르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담을 미혹하지는 못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았다(딤전 2:14). 그러나 아내에 대한 그 자신의 사랑과 더불어 그녀의 설득의 힘 때문에 그는 어떤 일이 닥치든 타락의 결과를 함께 나누기로 하였다. 치명적인 결단이었다! 그가 그 비극적인 문제 전체를 하나님과 함께 의논할 기회를 갖기까지 기다리는 대신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였다. 아담의 타락이 더욱더 비극적인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심하지도 않았으며 하와처럼 속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무서운 위협이 실현될 것이라는 어떤 예상을 갖고 행동한 것이다.

하와의 범죄가 통탄할 만하고 인류에게 잠재적인 불행을 가져왔지만, 모든 인류가 반드시 그녀의 선택으로 인한 형벌에 연루(連累)되지는 않았다. 죄와 죽음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게 한 것은 하와의 선택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백한 계명을 분명히 이해하고 행한 아담의 고의적인 선택이었다. 하와는 꾀임을 받았으나, 아담은 꾀임을 받지 않았다(참조 롬 5:12, 14; 고전 15:21; 딤전 2:14; 고후 11:3). 하와의 불충성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하나님께 충성했다면, 하나님의 지혜는 그가 처한 궁지를 해결해 주고 인류에게 임한 재난을 피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3:7 그들의 눈이 밝아.

사단의 모호한 약속의 성취를 기록한 이 말 속에 얼마나 풍자가 담겨 있는가! 그들의 지성의 눈이 열렸다-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무구(無垢)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들의 육체적인 눈이 열렸다-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3:7 치마를 하였더라.

서로의 면전에서 부끄러운 상태로 서 있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면하고자 애썼다. 무화과 잎으로 만든 치마는 그들이 상실한 무구(無垢)한 빛의 의복을 대신한 가련한 대용품이었다. 양심은 일깨워졌다. 이 부끄러운 감정은 감각에 그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는 의식에 뿌리를 둔 것임은 그들이 그분을 피해 숨었다는 사실로 볼 때 명백하다.

성경에서 언급된 인간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와 유사한 내용을 보여 주는 고대의 유일한 명각은 수메르와 아카드의 이중 언어로 된 시인데, 그것은 “그 처녀가 금지된 것을 먹었으며, 그 처녀, 곧 죄의 어머니는 악을 범했고, 죄의 어머니는 고통스런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A. 제레미아스, 고대 동양의 빛으로 본 구약[라이프찌히, 1930], 99).

3:8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조용한 저녁 바람이 정원을 상쾌하게 하는, 하루가 끝날 무렵의 하나님의 정기적인 방문은 그 행복한 부부에게 항상 기쁨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가까이 오는 소리는 놀람의 근원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감히 그들의 창조주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은 겸손이나 정중함이 아니라 깊은 죄의식이었다.

3:9 네가 어디 있느냐.

항상 하나님의 접근을 환영하였던 아담은 이제 숨었다. 그러나 마치 그가 숨은 곳을 몰라서 아담을 부른 것이 아니라, 자복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는 하나님을 그는 피할 수 없었다. 아담은 자신이 벗었음을 알고 당황하여 스스로 숨었다고 하나님에게 말함으로써 죄를 그 결과 뒤에, 자신의 불순종을 자신의 수치심 뒤에 숨기고자 하였다. 죄의 결과에 대한 그의 의식은 죄 자체보다도 예민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는 타락한 상태에 처한 인간의 특성인, 죄와 형벌 사이의 혼동을 목격한다. 인간은 죄 자체보다도 죄의 결과에 더 민감하며 그것을 더 혐오한다.

3:12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여자.

하나님은 당신이 아담의 범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질문을 함으로써 그에게 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주고자 하였다. 아담의 대답은, 자신의 곤혹스러움에 대한 우회적이고 회피적인 변명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비난이 되었다. 아담의 품성은 불순종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와 같이 변하였다. 자신의 아내를 그처럼 소중히 여겨 그녀와 분리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범했던 그 사람이 이제는 그녀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라며 냉담하고 무정한 반감을 가지고 말한다. 그의 말은, 아버지에게 요셉에 대하여 “아버지의 아들”(창 37:32; 비교, 눅 15:30)이라고 말한 야곱의 아들들의 말과 닮은 데가 있다. 죄의 쓴 열매들 가운데 하나는 “무정하”고(롬 1:31) 가혹한 마음이다. 그처럼 연약하고 유혹적인 피조물에 속박됨으로 인해 생긴 자신의 비통한 곤경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져야 마땅하다는 암시는 배은망덕의 타락의 심연까지 내려간다.

3:13 뱀이 나를 꾀므로.

여자도 자신을 속인 일에 대하여 뱀을 비난하면서 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담도, 그의 아내도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움으로 비난을 피하려고 하였다. 어느 쪽도 회개의 증거를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 가운데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차이점이 있다. 여자는 자신이 속았다고 항의하였으나, 아담은 자신의 행위가 그 결과를 충분히 아는 가운데 행해진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넌지시 인정하였다.

3:14 네가…저주를 받아.

뱀이 그의 동료들보다도 더 큰 죄의 저주를 감당해야 했지만, 죄의 저주는 그에게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에게도 내린다. 원래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아름다웠던 뱀은 이제 날개를 빼앗기고 이 때부터 먼지 속을 기어다닐 운명에 처하였다.

이렇게 하여 생각이 없는 짐승들이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저주는 멀리까지 미치는 죄의 결과를 그에게 각인(刻印)시켜 주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아담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의 죄의 결과를 담당해야 하는 이 피조물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그의 마음에 격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음이 틀림없다(부조와 선지자, 68). 언제나 악의 상징이 되어왔던 뱀에게는 고통을 당하도록 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 앞에서 죄의 결과에 대한 상징이 되도록 하기 위해 저주가 더 무겁게 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뱀 앞에서 극도의 불쾌감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14 흙을 먹을지니라.

뱀은 실제로 흙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비평적인 주석가들은 고대인들이 오류를 범했다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고대인들은 뱀이 항상 배로 기어다니며 심지어는 거의 어떤 음식도 구할 수 없는 사막에서 흙을 먹고 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창세기의 저자에게 영향을 미쳐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이 신념과 조화되게 뱀에게 선언된 저주를 공식화하도록 했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뱀이 자신의 먹이를 먹을 때는 약간의 흙도 먹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다소간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땅에서 그들의 먹이를 취하는 많은 동물들에 대해서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닌가? 이 문제는 “흙을 먹을지니라”는 구절을 비유로 간주할 때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최근에 발견된 고대인들의 문학과 편지들이 나타내는 대로 그들에 의해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계(下界)로 내려간 이쉬타르(Ishtar)에 대한 이교의 신화는 “흙이 그들의 음식이요 진흙이 그들의 식물”인 저주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다. 원수들에게 선언된 저주들 가운데는 그들이 흙을 먹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할렉 사람들의 행진”이라는 오래된 웨일즈의 전쟁 노래에서 “그들은 흙을 씹을 것이다”라는 조롱이 원수들에게 퍼부어진다. 이러한 빛에 비추어 볼 때,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네가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큰 저주를 받을 피조물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3:15 내가…원수가 되게 하고.

여기서 여호와는 하와에게 말을 건넨 실제적인 뱀에게 말하는 데서 돌이켜 옛 뱀 곧 마귀에게 심판을 선언한다. 예언적인 언어로 표현된 이 심판은 그리스도 교회에 의해서 구원자의 도래(到來)에 대한 예언으로 항상 이해되어 왔다. 비록 이러한 해석이 의심할 나위 없이 옳지만, 그 예언은 또한 문자적으로도 사실임을 지적할 수 있다. 뱀과 사람이 어디서 만나든지 그들 사이에는 무서운 적의가 있다.

3:15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사단의 “후손” 즉 그의 추종자들(요 8:44; 행 13:10; 요일 3:10)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영속될 투쟁이 언급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놀랍게도 “후손”으로 불려진다(계 12:1~5; 참조 갈 3:16, 19). “마귀의 일을 멸하려”(히 2:14; 요일 3:8) 온 이는 바로 그였다.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상하게 하다”는 히브리어로 슈프(s∨up)이다. 이 말은 “분쇄하다” 또는 “누워 기다리다”라는 뜻이 있다.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임이 분명하다. 비록 예언된 적의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있게 될지라도, 분쇄되어야 할 것은 뱀의 머리요 그의 후손이 아님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복으로 뱀은 단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밖에 상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후손”이 단수형으로 말해진 것은 여자의 무수한 후손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일에 연대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개인이 이 일을 성취할 것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찰 결과들이 분명히 보여 주는 대로, 그 선언 속에는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있는 대쟁투, 곧 하늘에서 시작된 전쟁(계 12:7~9)은 그리스도가 다시 그를 패배시킨(히 2:14) 세상에서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천년기 끝에 사단의 멸망과 더불어 끝날 것(계 20:10)이라는 기록이 압축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이 전쟁에서 상처를 입지 않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손과 발에 난 못자국과 그의 옆구리에 난 상처는 뱀이 여자의 후손을 상해한 격렬한 투쟁(요 20:25; 슥 13:6)을 영원히 상기시켜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법도에서 떠나 그분 앞에 서 있는 실의에 빠진 두 죄인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 주었음이 틀림없다. 충성되게 남아 있는 한,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었을 아담은 그의 충성심을 하나님에게서 뱀에게로 옮김으로써 그의 권세를 사단에게 양도하였다. 사단은 자신이 찬탈한 이 세상에 대한 “권리”가 아담의 굴복을 통해서 얻은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이, 시험의 산에서 그가 그리스도에게 한 진술(눅 4:5, 6)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담은 자신의 손실의 범위, 곧 이 세상의 지배자에서 사단의 노예가 된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 대한 선고가 선언되는 것을 듣기 전에, 그의 산산이 깨어진 영혼에 소망의 치료하는 향유가 발라졌다. 그는 이제 자신의 타락에 대한 책임을 씌웠던 여자에게서 구원-하나님과 사람의 대적(大敵)을 정복할 권세가 있는 약속된 후손-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은 얼마나 친절하신가! 하나님의 공의는 죄가 그 형벌을 치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하나님의 자비는 이미 타락한 인류를 구속할 길, 곧 하나님의 아들의 자발적인 희생에 의한 길(벧전 1:20; 엡 3:11; 딤후 1:9; 계 13:8)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를 이해하도록, 시각 교재를 제공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제사 의식을 제정하였다. 무죄한 어린양은 인간의 생명을 위하여 생명의 피를 흘려야 했으며, 죄인의 벌거벗음을 가려주기 위하여 그의 가죽을 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항상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적으로 상기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는 인간의 범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었으며 그의 의(義)만이 인간을 덮어주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우리는 아담이 구속의 계획을 얼마나 분명하게 이해하였는지 모르나, 죄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구속주가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이고 잃어버린 통치권을 다시 얻으며 에덴의 행복이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계시되어 그에게 보증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의 복음은 성경의 중심 주제이다.

3:16 내가 네게…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잉태하는 고통”이라는 구절(문자적으로는 “너의 고통과 너의 잉태”로 되어 있음-역자 주)은 일반적으로 유사한 두 구절로 하나의 사상을 표현하는 문학 형태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너의 잉태의 고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바로 시초부터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라”(1:28)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잉태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죄의 유입은 그때부터 잉태에 고통이 수반될 것임을 의미하였다.

3:16 수고하고.

참으로 출산의 고통은 성경에서 육체와 정신의 극심한 고뇌에 대한 상징(참조 미 4:9, 10; 살전 5:3; 요 16:21; 계 12:2)이 될 만큼 격렬할 것이었다.

3: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사모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크(s∨uq)는 “쫓아가다, 어떤 것을 간절히 열망하다”는 뜻으로, 그것에 대해 있을 수 있는 가장 강한 열망을 나타낸다. 비록 남편에게 억압되고 출산의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여자는 여전히 남편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느낄 것이었다. 주석가들은 이것이 형벌의 일부냐 아니냐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려 왔다. 이 “사모함”은 여성의 고통을 경감시키고 남편과 아내의 마음을 더욱더 밀접하게 연합시키기 위하여 주어졌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3:16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 여자는 하나님이 정해 준 남편과의 관계를 깨뜨렸다.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 되는 대신에 그녀는 그를 꾀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남편과 동등했던 그녀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남편은 지배자와 주인으로서 그녀를 “다스릴” 것이었다. 성경에서 아내는 그녀의 주인에 의해 “소유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대부분의 비(非)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여자는 수세대를 통하여 신분의 저하와 실질적인 노예 상태에 처해 왔다. 하지만 히브리인들 가운데서도 여성의 조건은 비록 압제나 노예의 상태는 아닐지라도 명백히 종속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복음의 축복에 관하여 여자를 남자와 동일한 위치에 두었다(갈 3:28). 비록 남편이 가정의 머리가 되어야 할지라도, 그리스도교의 원칙들은 남자와 그의 아내가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경험하도록 이끌 것이며, 각자가 다른 사람의 행복과 복리에 헌신하므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다스리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참조 골 3:18, 19).

3:1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아담”이라는 명사가 관사 없이 고유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2:19, 23; 3:8, 9에 나오는 하아담(ha’adam)이 「제임스왕역」에서 인명(人名)으로 번역되어 그 사실이 분명치 않아 보이지만, 각 경우에 있는 관사 하(ha)는 그 단어가 “그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형벌을 선고하기 전에 하나님은 왜 그 일이 필요하고 적절한지 설명하였다. 아담은 하와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따라 행동함으로 그녀의 말을 하나님의 말보다 더 우위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최고의 애정과 충성심을 하나님으로부터 거둬들였으며, 삶의 축복들, 심지어는 생명 자체까지도 상실하였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높인 후에,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 독립한다는 것은 보다 고양된 삶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였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에게 그 자신의 본성의 무가치함을 보여 줄 것이었다.

3:17 땅은…저주를 받고.

하나님이 아담이나 그의 아내를 저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한다. 저주는 오직 뱀과 땅에게 선언되었다. 그러나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했다.

3:17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잉태와 관련된 고통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동일한 단어가, 이제 저주받은 땅으로부터 빈약한 생계를 꾸려갈 때 직면하게 될 난관을 아담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가 생존하는 동안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소망은 없을 것이다. “종신토록”이라는 표현은 죽음이 확실히 이르러 올 것이지만 그 사건이 얼마간은 연기될 것임을 나타내는 첫 번째 암시이다.

3:18 가시덤불과 엉겅퀴.

타락 전에는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거나 보기에 아름다운 식물들만이 땅에서 자랐으나, 이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도 낼 것이었다. 땅을 경작하는 데 필요한 증가된 노동은 사람의 생존에 따른 불행을 증가시킬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생활은 기껏해야 슬픔과 고통의 생활임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하였다.

3:18 채소.

1:11, 29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형벌은 식사에도 부분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곡류와 견과와 과일의 양과 질은 저주의 결과로 매일의 식량을 위하여 인간이 채소로 눈을 돌려야 할 정도로 감소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변화는 또한 부분적으로는 생명나무로부터 얻는 어떤 요소들의 상실, 그리고 기후의 변화 때문에 이르러 왔을 수도 있고, 어쩌면 대부분은 생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힘든 노동을 하도록 인간에게 내린 선고에 따른 결과였을 수도 있다.

3:19 얼굴에 땀이 흘러야.

인간의 수고로운 삶에 더해질 고생이 이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다루기 힘든 땅에서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식물을 끌어냄으로써 살아가야 하는 농부를 구체적으로 가리키지만, 다른 모든 직업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의 성취는 오직 수고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벌은 사실상 죄된 인간들을 위해 변장된 축복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이 일을 하면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때보다 죄를 훨씬 덜 짓게 될 것이다. 수고와 노동은 품성을 계발시키며 사람에게 겸손과 하나님과의 협력을 가르쳐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회가 일반적으로 노동자 계급에서 가장 충성된 추종자와 지지자를 얻게 되는 한 가지 이유이다. 일은 고된 때에라도 멸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 안에 복이 있다.”

3:19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여호와는 아담에게, 무덤이 그의 확실한 종착지임을 알려 주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속의 계획(15절)이 그의 현재의 생명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보증해 주는 것임을 이해하였다. 조건적 불멸에서 죽어야 할 운명으로 옮겨진 아담의 본성 가운데 일어난 변화와 더불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무서운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자비로 은혜의 날을 허락받지 못했다면, 죽음은 즉시 일어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생명을 요구하나, 그분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이 성경 구절은 어떤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타락과 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의 문맥에 삽입되어 혼란을 일으키는 구절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이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었으며 이 믿음을 그가 지금 그의 아내에게 준 이름을 통해 나타냈음을 보여 준다.

하와 (h.awwah)는 “생명”을 뜻하며, 여기서 「70인역」은 조에(Zo-e-)로 번역한다. 그것은 또한 고대 페니키아의 명각들에서 발견되는 고대 셈어 형태이지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히브리어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아담이 고대 셈어를 말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안되었다. 만일 모세가 당대의 히브리어에 상응하는 말을 사용했다면, 그는 여자의 이름을 하와(h.awwah)라고 하는 대신에 하이야(h.ayyah)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색다른 고어 형태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지식이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4:1에서 하와(h.awwah)는 「70인역」에 의해 유아(Eua)로 대충 음역되었는데, 여기서 영어의 이브(Eve)가 유래하였다.

3:20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아담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선고가 막 선언되었을 때에 그녀를 “모든 산 자의 어미”로 보면서 믿음으로 그의 아내에게 “산 자”라는 이름을 주었다. 또한 그는 무덤 너머를 바라보고 그의 아내에게 약속된 후손에게서 그 날 그들이 빼앗겼던 불멸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회복시켜 줄 한 분을 보았다. 우울과 낙담-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으나-속에서 그녀를 “모든 죽을 자의 어미”라고 부르는 대신에, 그는 믿음으로 자신의 눈을 그의 심판자에게 고정시켰으며, 그녀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전일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그녀를 “산 자”라고 불렀다. 그에게 믿음은 진정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였다.

3:21 가죽옷.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보내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힘든 노동과 타락에 뒤따른 극도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줄 보호막에 적합한, 보다 내구력이 있는 의복을 그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또한 가죽옷은 그들이 잃어버린 순결함과 죄의 삯인 사망과 그분 자신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세상의 죄를 없이 할 하나님의 약속된 어린양을 항상 상기시켜 줄 것이었다. 동물의 보호자가 될 사명을 부여받은 그가 이제는 불행하게도 그 동물들 중 하나의 생명을 그 자신이 취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살기 위해 동물들이 죽어야 하였다.

비록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제사 제도가 이때에 제정되었다. 다음 장에서 언급될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들이 이 의식(儀式)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만일 하나님이 희생제사에 대하여 명확한 규정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은 사실은 독단적인 처사가 되었을 것이다. 가인이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의 동생과 마찬가지로 요구되었던 바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고대에 보편화된 동물의 희생제사는 이 관습의 공통적 기원을 말해 준다.

3:22 우리 중 하나같이.

인간은 자신의 형벌과 구속의 계획에 관해 배웠으며, 옷을 제공받았다. 불순종으로 그는 선악간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그가 하늘의 뜻에 자발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이 지식을 얻게 할 작정이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단의 약속은 이제 인간이 죄의 결과에 대하여 어떤 것을 알게 된 그 점에서만 성취되었다.

3:22 그가 손을 들어.

인간이 불멸하는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계속하여 취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일이 이제 필요하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60).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음의 권세 아래 떨어졌다. 그러므로 불멸을 주는 열매는 이제 그에게 단지 해(害)만 끼칠 수 있을 뿐이었다. 죄와, 그로 인한 끊임없는 불행한 상태에서 불멸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계획한 삶이 아니었다. 인간이 이 생명을 주는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아담이 당시에는 충분히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나 장차 올 세상에서는 감사하게 될 하나님의 자비의 행위였다. 거기서 그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의 열매를 영원토록 먹게 될 것이다(계 22:2, 14). 그리스도의 희생의 상징들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믿음으로 그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낙원에서 모든 구속받은 자들과 더불어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게 될 그때를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는 특권을 누린다(교회증언 8권, 288).

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이마에 땀을 흘림으로 생계를 유지하도록 아담을 에덴에서 내보냄으로, 하나님은 틀림없이 아담뿐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슬픈 의무가 되었을 일을 실행하였다. 원시림을 말끔히 치운다고 하더라도, 잡초와 곤충과 야수들과의 계속되는 투쟁이 상존할 것이었다.

3:24 그룹들.

“그룹”이란 이름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크룹(kerub)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축복하다” 또는 “기도하다”는 뜻의 앗수르어 카라부(karabu)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성경은 그룹을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 존재들, 특히 하나님과 그의 보좌에 가까이 있는 천사들의 계급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낸다(겔 9:3; 10:4; 시 99:1). 이러한 이유로 그룹의 형상이 법궤와 성막의 휘장 위에 있어야 했으며(출 25:18; 26:1, 31), 나중에는 성전의 벽과 문들에 새겨졌다(왕상 6:29, 32, 35).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지키고 있는 하늘의 존재들에 대한 기억은 아마도 고대 메소보다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생명의 풀” 즉 불멸을 찾아 나섰던 사람이다. 그 서사시는 “생명의 풀”이 발견되어야 했던 곳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전갈같이 생긴 사람들이 그 문을 지키고 있는데, 그들의 공포는 무시무시하고, 그들의 바라보는 눈길은 죽음이다. 곧 그들의 무서운 영광은 산들을 무너뜨린다”고 하였다. 앗수르의 궁전들은 반은 황소이며 반은 사람인 카리부(karibu)라고 하는, 큰 날개를 가진 거상(巨像)들에 의해 수호되었는데, 아마도 하나님이 지정한 낙원의 수호자들에 대한 기록의 이교적인 와전(訛傳)일 것이다. 애굽의 신전들에서는 그룹을 나타내는 무수한 조상(彫像)들이 발견되는데 인간과 유사한 형상이며 보호하려는 듯이 그 날개들을 신의 전각(殿閣) 위로 펴고 있다.

3:24 화염검.

빛은 항상 거룩한 임재의 상징이 되어 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셰키나의 영광도 지성소 안의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 양쪽에 하나씩 있는 두 그룹들 사이에 나타났다(참조 출 25:22; 사 37:16; 시대의 소망, 464; 부조와 선지자, 349; 각 시대의 대쟁투, 24). “화염검”은 문자적으로 “검의 번쩍임”으로 읽히는 히브리어에 대한 다소 부정확한 번역이다. 낙원의 문을 지키는 실제적인 검은 없었다. 오히려 매우 신속하게 “두루 도는” 검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번쩍이는 반사처럼 보이는 것, 즉 강렬하게 빛나는 중심부로부터 발산하는 번쩍이는 빛줄기들이 있었다. 더욱이 「제임스왕역」과 「개역한글판」에서 “두루 도는”으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 미트합페켓(mithappe-ket)은 “스스로 두루 도는”을 의미한다. 이 동사 형태는 강조형으로, 재귀적인 동작을 표현하는 데만 사용되며, 이 경우에는 “검”이 스스로 빙빙 도는 것처럼 보였다는 결론을 요구한다. 이 찬란한 살아 있는 빛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의 현시(顯示)인 셰키나의 영광이었다. 수세기 동안 하나님에게 충성된 자들은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것 앞에 모였다(부조와 선지자, 62 83, 84).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1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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