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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예수님을 죽인 빌라도는 억울한 사람이다?│성경꿀팁 이것이 궁금하다 1회 상위 177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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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사도신경에 나오는 빌라도
예수님의 죽음은 빌라도 때문이었다 라고 말하지만
빌라도는 억울한 사람이다?
성경꿀팁 이것이 궁금하다 1회 │유재덕교수 1강
성경꿀팁 이것이 궁금하다 – 매주 화,목 오전 8시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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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 – ::::: 수영로교회 :::::

그러나 성경은 빌라도를 지목합니. 다. 그가 사형집행을 언도하는 자리에 있었. 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대. 의 입장에서는 종교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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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7/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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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네이버 블로그

예수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비참한 현실에 내버려 두시지 않으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혼자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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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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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7.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38문에는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원인이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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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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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그런데 사도신경을 보면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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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7/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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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막15:15 – 썹목사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가?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사람들-특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심지어 제자들에게 배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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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sub2.tistory.com

Date Published: 9/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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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 예수님의 고난은 지어낸 허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이며 재판장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의 실존이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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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wchurch.org

Date Published: 7/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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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 을 받으 사 | 다시보는 시리즈 설교

본 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 을 받으 사 | 사도신경 강해 8강,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 다시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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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ou.covadoc.vn

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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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한국의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에 대하여 이 영어문장은 under Pontius Pilate 이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번역은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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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hyjesusonly.com

Date Published: 12/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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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다가 아니고 빌라도인가 – NEWS M – 미주뉴스앤조이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대목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사도신경이 처음 작성될 때는 없었다. 이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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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m.com

Date Published: 2/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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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죽인 빌라도는 억울한 사람이다?│성경꿀팁 이것이 궁금하다 1회
예수님을 죽인 빌라도는 억울한 사람이다?│성경꿀팁 이것이 궁금하다 1회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Author: CBSJOY
  • Views: 조회수 4,78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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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3. 2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NxnDmOurrE

제5강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Pontio Pilato)

교회에 여러 해 출석하여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얻게 되면,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의아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오늘의 주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심문했던 빌라도 총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실 빌라도보다 당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이 더 사악한 무리가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했고, 몇 번이나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바로는, 빌라도는 적어도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했고,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동정심도 가지고 있었고, 호의를 베푼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 많은 적대자들 가운데 ‘빌라도’의 이름만이 사도신경에 선명히 남아 있어, 수많은 성도들에 의해 저주스러운 이름이 끊임없이 불려지게 된 것일까요? 빌라도는 A.D. 26년부터 36년까지 10년간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다스린, 로마 제국의 제5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총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한 인물입니다. 총독들은 평상시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 로마의 직영 도시인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다가, 유월절과 같은 명절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될 것이라 우려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는 예루살렘에 임시 총독 관저를 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 머물곤 했습니다. 로마 총독은 대개 법률과 치안, 그리고 세금 징수 문제만 관장했으며 나머지는 대개 산헤드린 공의회를 통한 유대인의 자치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나 총독들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많은 세리들을 고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A.D. 6-7년에는 납세를 위한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로부터 큰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이 시기에 갈릴리 유다와 같은 사람들의 지휘 하에 많은 저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행5:37 참조) 또한 총독들은 유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기도 했는데, 예수님을 심문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 총독에 의해 임명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과 직접 연관된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미움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무시하고 이교도의 신상이 새겨진 동전을 새긴다든지, 황제들의 조각상과 로마 군대의 깃발들을 예루살렘에 반입하는 등의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조각된 황금 방패를 성전 안에 걸기도 했고,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성전세를 전용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빌라도 치하에서 로마 병정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까지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A.D. 36년 사마리아인들의 대학살 사건으로 인해 로마로 소환 조치되었습니다.

하여튼 빌라도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와 있다가,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그에게 끌려오게 된 예수님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발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였습니다. 1)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2)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3)자칭 왕이라고 했다.

사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때마침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이 일을 떠맡기려 했습니다. 헤롯은 오래 전부터 예수의 소문을 듣고 보기를 원했던지라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원했던 진정한 이유는 인간적인 호기심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지 않자 조롱하고 모욕한 뒤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본래 빌라도와 헤롯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이 사건에서는 두 사람이 마치 친구처럼 교류하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해 모의를 꾸몄다는 시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시2:2)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었습니다. 빌라도는 양심과 의협심에 순종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인 유익을 위하여 편의 위주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마지막 순간 치명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도신경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곧 마리아와 빌라도입니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존재 의미에서도 정반대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야망과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세상과 야합함으로써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예수의 잉태를 받아들임으로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거부함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지극히 존귀한 인간성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한 비참한 인간성을 대표합니다.

빌라도의 말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빌라도와 관련된 몇몇 전설들과 창작된 이야기만이 전해올 따름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빌라도를 통해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빌라도는 그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전가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면한 문제는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랴?’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 앞에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물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 죄의 책임성을 씻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한 여러 어려운 현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선택을 스스로 한 후,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지는 않았습니까? 첫 사람 아담 이래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하는 습성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후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어떤 핑계가 우리의 죄를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죄악이 진홍같이 붉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 의지하여 진정으로 회개할 때, 흰 눈 같이 양털같이 우리의 죄악이 깨끗이 씻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주님게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같은 소망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받기 위해 총독 빌라도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옆에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심판하는 빌라도와 고함지르는 군중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멀찌감치 서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자리에서 한번 둘러보십시오. 어쩌면 예수님을 심판하는 그 순간, 진정으로 심문받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빌라도였을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 앞에서 재판받고 있는 것은 고함지르던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빌라도는 자신이 어떤 소리를 따라 가는 사람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양이 도살장으로 가는 것처럼 끌려오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듯이 주님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심판자이시며 중재자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억울함, 고달픔, 배신감, 수고로움을 누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까? 누가 심판해 주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까? 진정한 재판관, 최후의 심판자는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여러분의 문제를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께 호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빌라도라는 로마 총독이 등장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철저히 인간의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저 피안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전개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의 자리가 확보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명과 소망과 구원의 역사는, 이 현실의 역사 안에서 분명히 펼쳐졌습니다. 그것을 보증해 주고 확증해 주는 것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는 거룩하고 순결한 동정녀 마리아와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 같은 사람, 가룟유다 같은 사람, 베드로 같은 사람, 기생, 세리, 귀신들린자, 문둥병자, 학자, 왕… 얼마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 성경은 거룩한 경전과는 거리가 먼 듯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역사를 꾸며내거나, 비현실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오히려 있는 현실 그대로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다시 이해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까? 성경 속에 등장하는, 여러분 보다 훨씬 초라하고 비참했던 인물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생 라합이, 세리장 삭개오가, 시골처녀 마리아가 별처럼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저들 속에 주님께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자신을 주님께 순종시켜 내어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 있는 여러분은 천하보다 소중한,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 고난을 받으사

이것은 물론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사실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셨다는 이 사실은 예수께서 현실의 역사 속에서 삶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셨는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의 삶으로,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셨다는 것은 그의 삶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고난, 실패, 죽음의 현실에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증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달픈 인생 나그네길 속으로 찾아오신 예수를 통해,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믿으면 고난, 질병, 죽음을 면제 받는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고난을 현실로 받아들여, 그 고난의 현장 한가운데 살아가지만, 시험에 들지도, 악에 빠지지도 않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시하는 진정한 회개는, 현실을 부인하던 삶에서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책임과 죄를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비참한 현실에 내버려 두시지 않으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혼자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관심하고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지도, 고난 가운데서 자기를 학대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고난 가운데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현실의 역사 안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지평에는 마태와 같은 세리도 있고, 베드로와 같은 어부도 있고, 바울과 같은 박해자도 있습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라합과 같은 기생도 있고 다말과 같은 여인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이 현실 역사의 그 어느 한때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구원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 스스로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의 한 시점에서 예수님을 직접 대면한 빌라도는, 예수보다는 자신의 야망과 안전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는 물론 그 자신까지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현재와 영원 모두를 잃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며,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참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생의 여정에서 의도적이건 우연이건 간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때의 선택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의 절기에, 여러분 모두 주님을 온전히 모심으로 말미암아,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저주의 삶이 아니라, 허다한 성경 속의 선진들과 같은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커뮤니케이션하는 그리스도인 쎄이영

7.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38문에는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원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이사야53:4~5,고린도후서5:21,갈라디아서3:13,누가복음23:13~24,요한복음19:4) 당시 유대인들을 관장하던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재판을 관장하는 재판장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폭도로 변해버린 유대인들과 그들의 시위에 굴복한 빌라도는 균형을 잃은 재판으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사형선고로 지체없이 집행되었고 예수님의 고난은 밤이 새도록 이어졌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37문은 “고난을 받으사”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생애를 특히 그의 마지막 순간에 전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친히 몸과 영혼으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정죄로 부터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주시기 위한 유일한 구속 제사였습니다”(이사야53,베드로전서2:24,로마서8:1~4,갈라디아서3:13,요한복음3:16,로마서3:24~26,로마서3:25,히브리서10:14,요한일서2:2) 예수님의 고난은 대제사장들과 로마군인들에 의해 체포된 이후로 보다 격화 되었습니다 유리채찍과 폭행은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죄가 없이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대속함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죄가 있어서 받는 고난이라면 그 십자가의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십자가위에 세워진 두개의 형틀은 분명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앙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밑에서 조롱하며 자신을 희생시켰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지고 가신 희생이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39문은 십자가의 죽음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지셨다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3:10~13,신명기21:23) 요리문답40문은 왜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길로 가셔야 했는가에 대한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만이 우리의 죄값을 치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창세기2:17,로마서8:3~4,빌립보서2:8,히브리서2:9,이사야53:9,요한복음19:38~42,사도행전13:29,고린도전서15:3~4) 십자가형은 사형선고를 받은 결과물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십자가형은 파렴치한 범죄자에게 주어지는 공개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은 죄가 파렴치하고 안면수심의 죄였을까요? 어떤 죄명으로 예수님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일까요? 유대인들의 음모와 계략으로 예수님은 사기꾼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예수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사기꾼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인도할 메시아는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로마와 모든 제국을 쓸어버릴 파워의 하나님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을 위협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단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고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를 정죄하고 영구적으로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고,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죽음으로서 죄를 용서하고 사망으로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고난과 십자가의 진실인 것입니다

(1)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우유부단한 성격의 빌라도(Pontius Pilatus,유대지방총독,26~36)는 자신이 처한 정치적 곤경에 대하여 피로감을 느꼈습니다 종교적 문제의 복잡성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빌라도는 헤롯에게 문제의 공을 던져주었지만 헤롯 역시 유대인의 종교에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공은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 인하여 공정한 재판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군중들의 시위와 데모는 갈수록 격렬해졌고 여론재판에 몰린 예수님의 형량에 대한 중심은 이미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빌라도가 자신의 권한에 대하여 예수께 말하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19:10) 빌라도 총독은 유대관할의 행정은 물론 재판장의 역할까지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권한은 무죄석방에서 부터 사형에 이르기까지 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빌라도에 의해 직접적인 고난을 당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유대지역 행정수반이며 최고 재판장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무죄한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카톨릭 고백서에는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이 부분을 수정한 바 있습니다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은 “sub 본디오 빌라도”라 되어 있습니다 ‘sub’는 ‘~아래서’라는 의미로 “직접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통치자의 아래에서 묵인하에”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권한과 행위에 대하여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19:11) 예수님께서는 죄의 경종을 말씀하시면서 대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셨지만 빌라도 총독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빌라도의 재판은 처음부터 정당성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인들이 극렬한 시위를 하며 광분해 있을때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무죄”하다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19:6) 빌라도 총독은 아내의 불안한 꿈이야기에도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습니다(마태복음27:19) 그렇다면 자신의 권한대로 예수님을 무죄석방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소요를 염려한 빌라도는 우유부단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여의치 않은 빌라도 총독은 살인죄로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는 바라바와 예수 그리스도 중 한 사람을 유대명절의 특사로 사면하려는 계획을 선포하였습니다 민중들의 바라바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고려할 때 예수님을 특사로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 빌라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민중들이 선택한 것은 그들의 원흉인 바라바 였습니다(마가복음15:6~15) 예수를 석방하기 위해서 나름의 노력을 한 빌라도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민중의 소요와 저항에 부딪힌 빌라도는 십자가형을 선고하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넘겨 줌으로서 소요를 잠재우려 한 것입니다(요한복음19:16) 빌라도총독은 정치적으로 예수님의 사건에서 무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 무리가 당하라고 주장하였습니다(마태복음27:24) 뿐만 아니라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십자가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붙이기 까지 하였습니다(요한복음19:19) 스스로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고 싶었던 빌라도 총독의 이름은 끝내 정결한 자의 명패위에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곡해는 예수님이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릇 행하며 각기 흩어져 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온전히 담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이사야53:4~6)

빌라도 총독의 재판이 사형선고로 막을 내린 후, 예수님의 가치는 철저히 훼손되고 짓밟혀 버렸습니다 살인, 역모죄와 동일하게 결박을 당하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워 피투성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옷을 벗겨 수치를 당하게 하는가 하면 창으로 찔러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유리섬유로 만든 채찍에 살이 찢겨 나가고 얼굴에는 침을 뱉는 등 수모와 고난은 극으로 치달았습니다(누가복음22:44,요한복음18:12,19:15,19:23,19:34,마태복음26:67,누가복음22:63,마태복음27:26,27:34)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최측근으로 재정을 담당하던 가룟유다는 스승인 예수를 은30에 팔아 넘기고(마태복음26:15~16), 주를 버리고 뿔뿔히 흩어져 어디론가 숨어 버렸습니다(스가랴13:7), 베드로는 성밖에서 세번씩이나 부인을 하였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동참하였던 성도들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시 종려나무를 수놓던 환영 인파들은 이제 유대인의 대열에 서서 질긴 목숨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십자가, 홀로 가야하는 길, 골고다 언덕길에는 예수님의 보혈이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누구도 무죄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생애 부르짖었던 복음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철저히 홀로 지고 가야만 했습니다 수치와 수모도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도 남겨졌습니다 시험을 기쁘게 여기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며 부족함이 없는 성숙과 완전한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 고난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야고보서1:2~4)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고(히브리서5:8~10), 고난으로 어긋난 길에서 주의 말씀으로 회복하며(시편119:71),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함으로서 승리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히브리서12:6~8) 고난은 더 큰 은혜와(시편66:10~12) 평안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이사야38:17) 그러나 그 어떤 고난이라도 우리가 감당할 선을 넘어선 고난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모든 시험에도 피할 길이 있었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10:13) 이와같이 우리의 고난은 나그네 인생길에서 잠시 겪는 고통에 불과하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길을가셨고 그것은 완전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2)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십자가형(Crucifixion)은 고대 로마의 사형집행 방법 가운데 하나로 페르시아제국의 처형법이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BC 1세기 말 식민지배에 있던 백성들에 대한 처형방식으로 십자가형을 공식 채택하였습니다 AD 1세기 부터는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한 처형법으로 그 성격이 보다 잔인하였습니다 70년경 유대인 독립전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로마군인들은 거의 매일 500여명의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으로 처벌함으로서 독립전쟁의 도화선을 무기력화 시켰습니다 로마제국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할 때에도 그같은 이유를 명분으로 들고 나왔습니다 십자가형은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가 근육경련과 질식현상으로 수시간내에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어 고통가운데 죽게하는 공개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자기가 못박힐 십자가를 본인이 지고 가야한다는 점에서 잔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형수들이 키톤(헬라어, 팬티)만 입혀진 상태에서 수치와 고통을 겪으며 처형된다는 점에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은 9시간동안 매달려 있으면서 까마귀와 타는 듯한 태양에 상처와 탈수현상이 겹쳐서 죽어가는 최악의 선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형을 선고 받은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30대 이상의 채찍으로 거의 회생불능상태에 이르게 한 후 십자가에 매닮으로서 고통의 시간을 단축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스스로를 낮추시고 종의 형체로서 이 땅에서 사시다가 고난과 죽음으로서 보여주신 구속사업의 성취였습니다(로마서6:23) 십자가라는 인간세계에서 주어지는 최고의 형벌을 받음으로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가상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 이후 채찍과 고난과 고통속에서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후에야 입을 여시고 하신 일곱마디의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 유언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우고 고통에 빠지게 하였으며 시련을 안겨다 준 유대인들과 로마병정들을 염려하시는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부터 말씀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편강도와의 짧은 대화속에서 그를 구원해 주시는 마지막까지의 복음과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를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 마리아를 부탁하는 말씀은 인자로서 마지막 보내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버림을 받은것은 아니었지만 인자로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 가속화하고 있슴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바로 완전한 인간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수되시는 예수께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목마름은 인자로서 경험하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마름보다 더 깊은 사막의 수렁에 빠진 것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모든 것을 성취하신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심으로 이제 영혼은 안식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23:34)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23:43)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너희 어머니이다(요한복음19:26~27)

④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27:46)

⑤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19:28)

⑥ 다 이루었다(요한복음19:30)

⑦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누가복음23:46)

예수님의 십자가의 특징은 이것이 무죄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라도 총독의 재판결과에서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19:6) 예수께서는 무죄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오셨고 그것을 죽음으로서 이루신 것이었습니다(베드로전서2:24~25,말라기53:4~6) 그리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재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15:3~4,사도행전1:11,마태복음24:44) 이로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며(골로새서1:14),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시고(마태복음11:28~30), 삶의 목적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고린도전서10:31) 놀라운 믿음의 능력을 주셨습니다(빌립보서4:13) 더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주시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 주셨습니다(요한복음1:12)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구속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로마서3:24) 죄의 종노릇하며 살았던 우리가 죄로 부터 해방된 기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온전한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로마서5:10,고린도후서5:18~19) 화목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요한일서4:10) 짐승을 잡아 제물로 삼았던 구약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오직 예수님 한분으로 모든 제사의 제물을 한번에 성취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입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막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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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막15:15)

계속되는 사도 신경 시리즈에서 이 시간 함께 나눌 주제는 ‘예수님의 고난’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가?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사람들-특히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심지어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모진 매를 맞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으셨다. 여기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조롱, 모욕, 미움, 배신, 폭행과 죽음.

이런 표현만 들어도 예수님이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하심이 영원 무한 불변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토록 모진 고난을 당하셨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이 되지 않으셨다면 이런 고난도 겪지 않으셨을 것이다. 즉,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고난의 시작점은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 자체이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바울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이렇게 선포한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에 분명히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자기를 비우는 일이었고, 자기를 낮추신 일이었다. 한마디로 종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비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예수님의 낮아지심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동반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임금이 어느날 갑자기 평민의 신분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한 평생을 궁궐에서 살다가 허름한 집에서 살아야 하고, 수라상을 받다가 퍽퍽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화려한 용포를 입다가 모시 삼베를 입는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지만 이 모든 고통보다 임금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임금이 아니라는 사실 그 자체다. 하물며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얼마나 더 고통스럽겠는가? 마구간에서 나시고, 일평생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살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매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말 할 수 없이 큰 고난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고난이요, 모든 고난의 뿌리이다. 그래서 성육신 을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당하신 고난이 너무나 극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일주일 동안 겪으신 고난은 그 어떤 고난 보다고 크고 심각했다. 예수님은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고, 군중들의 야유와 조롱을 당했다. 그리고 로마 군사들에게 무자비한 매를 맞고, 마침내 십자가에 두 손과 발이 못 박히셨다. 이 일에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하고 해치려고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스승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 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해 예수님께 십자가 판결을 내린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이다. 이 세 사람 중에서 사도신경이 주목하는 것은 본디오 빌라도이다. 사도 신경은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 받았다고 하지 않는다. 가룟 유다 때문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본디오 빌라도가 누구인가? 여러분들은 빌라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지 못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신경을 암송 할 때 마다 그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아는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배운 역사-특별히 서양사는 대체로 학창 시절에 잠깐 배운게 전부다. 그런데 2,000년 전 로마의 황제도 아니고 기껏해야 총독에 불과한 사람을 어떻게 일일이 다 배우겠는가? 만약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그 이름을 모르고 살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왜 하필 빌라도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일까? 아까 말했던 것 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 두 사람이 개입한 사건이 아니다. 적어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개입했고, 가룟 유다가 가담했고, 수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어떻게 보면 빌라도는 이 중 가장 소극적이고 조심스럽게 관여한 사람이다. 심지어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한 일말의 존경심이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어떻게든 그냥 놓아주려고 여러 차례 힘을 썼다. 이것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빌라도의 모습이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만 봐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막15:9-10)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 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막15: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비록 빌라도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해서 군중들의 소란을 잠재우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언도하긴 했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관여한 정도와 강도, 의도의 경중을 따지자면 오히려 가장 약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왜 하필 콕 찍어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고난을 했다고 고백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둘째, 예수님의 고난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적이고 법률적인 차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빌라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어떤 사건-거창하게는 역사가 일어 났을 때, 가장 객관적이고 분명한 자료는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이다. ‘왜’에 대해서는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만큼은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 할 수 없다. 이 내용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입해 보면 언제-서기 33~35년 경에, 누가-나사렛 예수가, 무엇을-십자가 처형을, 어떻게-당했다. 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 빠진게 하나 있다. 바로 또 다른 누가이다. 즉 십자가에 처형 당한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처형 시킨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게 누구인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이다. 이처럼 사도 신경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인 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사건(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왜 하필 본디오 빌라도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공적이고 법률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다. 그러므로 만약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손으로 예수를 죽이게 되면 이건 명백한 살인이 된다. 하지만 빌라도의 손을 빌려 예수를 죽이면 사형이 된다. 이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만약 예수를 자기 손으로 죽여서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 로마의 법을 어기게 될 뿐만 아니라,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사실이야 어떻든 간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또 한참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누리고 있는 예수를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되면 세간의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이건 그야 말로 자충수다.

하지만 빌라도의 손을 빌려 예수를 죽이면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이 된다. 이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한번에 해결 할 수 있다. 로마법에 따라 사형을 집행했으니, 로마법을 어기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로마 법의 심판을 받은 것이니까 예수에게 죄가 있는게 분명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 로마가 집행하는 일에 감히 누가 발벗고 나서서 반대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든 예수의 죽음을 사적인 가해가 아니라, 공적이고 법률적인 집행으로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현실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도 공적이고 법률적인 죽음이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말씀 드리겠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기 때문인가? 유다가 배신했기 때문인가? 빌라도가 십자가 처형을 언도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진짜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고전1:18). 즉 우리의 죄를 사면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죄가 사면을 받으려면 응당한 대가-죄값을 치러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모른 척 그냥 눈감아 줄 수 없다. 반드시 죄를 벌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에 대한 징벌을 우리에게 내리지 않으시고 예수님께 지우셨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값은 다 치러졌고, 이 사실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사면하는 공적이고 법률적인 죽음이다. 사도신경은 이러한 구원의 진리, 대속의 진리를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고난 받으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말씀을 맺겠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는 고난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공식적이고 법률적으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이유는 당신의 지극히 크신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고 아무 자격도 없지만 오직 하나님이 크신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다. 그러므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함축되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예수님께 고난을 가한 빌라도를 저주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고난의 의미와 깊이, 그 가치를 소리 높여 선포하고 찬양하는 고백이다.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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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 을 받으 사 | 사도신경 강해 8강,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 다시보는 시리즈 설교 | 김승욱 목사 113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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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오 빌라도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한국의 사도신경

한국의 사도신경과 사단의 간계

1. 다음은 자칭 정통이라는 사람의 사도신경 해석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에 대하여 이 영어문장은 under Pontius Pilate 이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번역은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가 맞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문장이 틀림을 말하지는 않다.

그 이유를 실제적으로 살명하자면, 박대통령 아래에서 DJ가 고난을 받었다는 뜻은, 박대통령이 직접 DJ에게 고난을

준 것이 아니라, 박대통령의 통치 아래 DJ에게 고난을 주었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그 당시 실질적인 책임자였으며, 모든 것이 그의 통치 하(下)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빌라도는 실제적으로 예수께서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예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고난을 주었으며, 군중들의 압력

에 못이겨 바라바를 놓아주는 비열한 인간이었다.

과연 빌라도가 무죄한가? 빌라도가 누구였는가?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눅13:1)

저희의 우상의 제물을 위하여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제물로 바친 자가 바로 빌라도이다. 즉 빌라도가 무죄하

다는 사람들은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더욱이 예수님이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직접 받은 적이 없으므로, 사도신경을 거부한다는 것은 더욱 궤변이 된다

…………………………………………………………………………………………………………………………

이같이 말하는 궤변자는 더하여 말하기를 “한글 사도신경은 교리적이나 성경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번역을 함으로서,

전혀 하등의 문제가 없음을 알려 드린다.”고 하나 이것은 사단을 옹호하는 말이다.

2.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는 영문 번역은 올바르게 하였으나 궤변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즉 “본디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와 “박정희에게 고난을 받았다”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는

궤변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박정희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그의 부하들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말로서 박정희나 그의 부하들은 같은

부류이다. 때문에 박정희 치하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나 박정희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와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전혀 다른

말인 것이다.

3.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1) 본디오 빌라도는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사람이지 종교에 대하여 관여한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그는 “나는 그에게서(예수님)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선포 하였다.(요19:6)

눅23:14,15 –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2)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밖으라고 요청하였다

요19:6 –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눅23:18-21 =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 이 바라바

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

하되 /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3)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하셨다

요19:11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유대인들)하시니

(3)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하심

마16:21 –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20:18,19 –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4)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죽였다고 공표하였다

행2:23 –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유대인)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행2:36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유대인)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

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3:14,15 – 너희가(유대인)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4. 결론 :

성도는 사단의 간계를 파악하면 즉시 진리로 말하여야 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죽인 죄를 본디오

빌라도에게 뒤집어 씌워 왔다. 사단의 종들은 이 거짓말을 수호 하려고 온갖 거짓말을 지어낸다.

성도는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조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니 성도들은 거짓말을

즉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도신경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왜 유다가 아니고 빌라도인가

한기총과 한교연은 빌라도에게서 배우라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대목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사도신경이 처음 작성될 때는 없었다. 이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공공의 적’으로 사도신경에 추가되었다.

4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이라면 반드시 외어야 할 사도신경에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을 유다로 하지 않고 왜 빌라도로 했을까?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전승에 따르면 빌라도는 우유부단하고, 예수를 살려줄 마음도 있었고, 성명 미상의 그의 아내는 기독교인이었다고 전해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면 유다는 예수를 판 배신자이고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일차적 책임자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 유다의 배신으로 죽음에 이르사’라고 하지 않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하고 있다.

로마서 1장 1절만을 가지고 <남겨진 시간> (코나투스, 2008년)이라는 걸출한 책을 썼던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빌라도와 예수> (꾸리에, 2015년)를 통해 빌라도의 역할에 주목한다.

아감벤은 예수의 재판 장소가 무려 7번이나 바뀌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날 밤의 일을 연극적 서사로 설명한다. 5시간 동안 진행된 이 재판에서 빌라도는 ‘진리’와 ‘왕국(하나님 나라)’에 대해 궁금해 한다. 여기서 재판석은 베마(bema)인데 이 베마에서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 대립” 하고 있다. 이 재판 이후 세속과 하늘, 판결과 구원은 철저하게 분리된다. 고린도 후서 5:10에 따르면 베마는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베마) 앞에 나서야 합니다.” 이처럼 베마는 성서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이다.

세속과 하늘, 판결과 구원이 분리되면서 위기(크리시스)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감히 사실이 진실을 판결하고 지상의 왕국이 영원의 왕국을 판결하려 함으로써 초래된 위기 상황이다. 아감벤이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굳이 신학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현대 문명의 위기는 ‘영원’과 세속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위기다.

빌라도 재판의 의미

예수의 재판은 판결문조차 없었던 재판 같지 않은 재판이었다. 우유부단한 빌라도는 예수를 대중들에게 ‘넘겨줌’으로써 판결없는 사형 집행을 묵인한다. 이런 판결없는 재판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서구 사회를 지탱해 온 법적 질서가 이미 예수시대부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감벤의 설명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판결받은 것이다. (…) 이것이 판결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복음 3:18-19)는 예수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세상에서 말하는 법적 판단의 기준을 파기해 버린다.

영리한 빌라도는 직접 예수를 심판하지 않고 대중에게 넘겨줌으로써 최종 판단을 유보한다. 그는 이미 진리를 ‘법’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빌라도의 이런 선택이 도리어 예수를 진리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유대민족의 원로 회의가 아닌 로마 제국의 대표가 예수를 심문한 것은 구원사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 일이었다. 예수는 진리, 즉 자기 자신을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십자가를 통해 제 살과 피를 넘겨줌으로써 예수는 스스로를 증명했다. 완전한 진리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로마 제국의 공적인 시스템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빌라도와 예수>, 123쪽

빌라도가 예수에게 던진 질문, “진리가 무엇인가”는 세속 법정의 판단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고민의 흔적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사도신경을 최종적으로 승인한 교부들이 유다보다 빌라도를 집어 넣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다와 빌라도 모두 예수에게 고난을 가한 인물이 맞기는 하지만 그 중 빌라도는 역설적이게도 예수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한기총과 한교연 소속 목사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지만

지난 11월 14일 서울 광화문에서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다. 정부 측은 법적 조항을 들이대며 이 날의 시위가 불법 시위였음을 강조한다. 반면 시민들은 평화시위를 정부가 불법적으로 진압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농민 한 명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 개인에게 퍼부어진 살기 어린 물대포가 설사 적법한 행위라 할 지라도 그 때 말하는 ‘적법’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시위대건 정부건 ‘법의 테두리’안에서만 논쟁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아감벤의 <빌라도와 예수>를 읽은 뒤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세속 법의 집행자들이 과연 진리를 재판할 수 있는가? 역사는 왜곡되어서는 안되고 민중의 삶은 개선되어야 하고,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런 종류의 진리’ 말이다.

국정교과서 찬성이 악이고 반대는 선이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런데 감히 진리의 영역을 판결하려는 정부측의 손을 들어주는 한기총과 한교연은 빌라도의 재판에 담긴 의미를 알기는 하는가? 그들은 입으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면서 항상 세속적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집단이다. 세속의 법이라는 것이 빌라도가 앉아 있던 베마에서 이미 효력을 상실했는데 이들은 여전히 세속으로 영원을, 사실로 진실을 판단하는 데 앞장 서고 있다. 자신의 신념을 권력에 예속시키는 이들에게 <빌라도와 예수>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책이 많이 어려운 게 흠이다.

책의 내용을 기독교적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빌라도는 제아무리 당시 세계의 보편적 질서의 토대인 로마 제국을 위해 일하는 총독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진리인 예수를 재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비겁하게도 예수를 끝까지 보호하지는 못했지만 영원한 진리가 드러나는 시기를 종말까지 유보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한 심판(베마)은 종말의 순간에 일어난다. 그들이 그렇게 편들고 싶어하는 세속의 가치와 권력과 법은 그때 진리로 인정받지 못한다.’

김기대, 편집장 / <뉴스 M / 미쥬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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