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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상 13 장 | 열왕기상 13장 403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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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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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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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3

열왕기상 13. … 제 13 장 … 20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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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7/21/2021

View: 4857

2007/07/14(토) “열왕기상 13:11-34”/ 작성: 박종호

2007년 7월 14일 토요일 <본문> 열왕기상 13장 11-34절 오늘 말씀에 젊은 선지자와 늙은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11-12절을 통해 늙은 선지자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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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2/9/2021

View: 2083

열왕기상 13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열왕기상 13. 13. 1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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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1/15/2021

View: 3741

열왕기상 13장 & 성경주석 – BIBLE STORY

<열왕기상 13장 흐름정리>.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죄악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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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9/9/2021

View: 9706

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상 13장

13:1 징계를 받은 여로보암 왕(열왕기 상 13:1-10) Ⅰ.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을 알리기 위하여 여로보암에게 한 사자가 파견되고 있다(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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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8/10/2021

View: 5830

열왕기상 13장 강해(여로보암의 죄를 책망하신 하나님)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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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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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3장.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사람>의 의문사 사건의 …

(1) 훗날 다윗의 집에서 요시야라는 아들이 이 제단 위에 제사장을 제물로 바칠 것이다. (2) 그날에 대한 징표로 오늘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있는 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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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unmill.tistory.com

Date Published: 11/14/2021

View: 5592

하나님의 사람을 죽인 늙은 선지자(왕상 13) – 유평교회

하나님의 사람을 죽인 늙은 선지자(왕상 13) ·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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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7/29/2022

View: 4209

[스크랩] 열왕기상 (13 : 1~34) 주석

열왕기상 13장 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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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ntiochministry.tistory.com

Date Published: 6/15/2021

View: 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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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3장
열왕기상 13장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열왕기 상 13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 Views: 조회수 18,104회
  • Likes: 좋아요 126개
  • Date Published: 2021. 1. 2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H6Lr7cfCuus

열왕기상 13

벧엘 제단 규탄 1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벧엘의 늙은 선지자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12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그가 타고 14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20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3 그리고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서 있더라 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가서 말한지라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넘기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27 이에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안장을 지우매 28 그가 가서 본즉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서 있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30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2007/07/14(토) “열왕기상 13:11-34”/ 작성: 박종호

2007년 7월 14일 토요일

열왕기상 13장 11-34절

오늘 말씀에 젊은 선지자와 늙은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11-12절을 통해 늙은 선지자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늙은 선지자에게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젊은 선지자의 행적을 그의 아버지 선지자에게 보고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들은 여로보암이 세운 우상숭배의 절기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시대에 하나님을 구하기 위해 많은 선지자들이 남유다로 넘어갔는데(대하 11:16) 이 선지자는 여전히 벧엘에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젊은 선지자를 유혹하기 위해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도 않았음에도 받았다고 거짓말한 점 등을 감안해볼 때 그는 이미 여로보암의 종교정책에 동의하고 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신실하지 아니한 그 늙은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 땅에 버젓이 잘 사는데,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무명의 선지자는 한 순간의 잘못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오늘 문제의 발단이 된 것처럼, 왜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사명을 끝내고 돌아가던 무명의 젊은 선지자를 따라갔습니까? 12-14절을 읽어 보면, 늙은 선지자는 굳이 젊은 선지자를 따라가기 위해 나귀를 타고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젊은 선지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능수능란한 거짓말을 시도했으며 그 젊은 선지자는 한두번 버티다가 결국 그를 따라 집으로 가게 됩니다. 성경은 늙은 선지자가 왜 그를 따라가 유혹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늙은 선지자가 무명의 선지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과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9-31절에서 젊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결과로 죽게 되었을 때에 그 늙은 선지자가 그 젊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붙들고 울었으며 무덤을 마련해 묻어주었으며, 자신이 죽거든 그 사람의 묘에 함께 묻어달라는 당부까지 그의 아들들에게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대책으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종교 정책에 충실하게 살았던 여로보암 왕의 죄악을 지적하기 위해 북 이스라엘 제사 행사에 나타났던 무명의 신실한 선지자는 어떤 거짓말에 속았습니까? 늙은 선지자가 말한 1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도 선지자이며 내게도 천사가 나타나 말씀을 주셨는데,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 했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내게 오히려 당신에게 떡과 물을 주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직전까지 선지자답게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있던 그 하나님의 사람은 순간적으로 그 늙은 선지자에게 경계심을 풀게 되었으며 순순히 그를 따라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번의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성경은 매우 엄중하게 다루기 위해 무명의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얼마나 엄중한 경고를 내리시는지 그 하나님의 사람이 먹으려고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그것도 아이러니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신을 속였던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1-22절에서 하나님은 한때 신실했었던 그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먹지 말고 마시지 말한 떡과 물을 마셨으니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어서 나오는 23절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 무명의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신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떡과 물을 먹고 마셨을 뿐 아니라 나귀 선물까지 받아 길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솔로몬의 타락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폭정으로 민심이 멀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대안으로 여로보암을 보내셨지만 그 또한 왕가를 부흥시키려는 야욕을 종교 정책을 통해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급기야 그 거국적인 제사를 벌이는 행사에 그 누구보다 철저히 말씀에 붙잡혀 있었던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그 제단을 박살내고 여로보암의 손을 무력화시키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때 그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 누구보다 철저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그 젊은 선지자의 이해 못할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명령 불순종은 그러하기에 너무나 크게만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신실했던 하나님의 사람은 길에서 사자를 만나 죽임을 당했으며 사자는 그 하나님의 사람을 물어 죽였지만 타고온 나귀는 건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물어 죽인 시체를 뜯어먹지도 않았습니다. 짐승에 불과한 사자임에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리자로 정확하게 그 일을 마무리짓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냉정하게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상세하게 다뤄주고 있습니까? 왜 우상의 도시 벧엘에서 거짓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도 그 늙은 선지자는 징계받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는데, 오히려 한순간 잘못한 선지자가 죽어야 하는 걸까요? 33-34절입니다.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성경은 여로보암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일반 백성들 중에 원하기만 하면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 완악한 죄악을 외치는 자 또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몇 번씩이나 분명한 경고와 예언이 주어졌음에도 여로보암과 그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고 악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실패한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 그가 전한 예언의 권위를 더욱 확고하게 보여주셨으며, 그의 죽음 또한 여로보암 왕가의 불순종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드러내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솔로몬과 르호보암, 여로보암, 그리고 그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철저히 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께 부름받았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여전히 우상숭배에 몰입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그 모든 하나님의 진심을 묵살해버린, 예전의 그 하나님의 대책이었던 여로보암의 모습을 성경은 보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교훈의 거울로 삼고 오늘도 겸비로 허리를 동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그렇게 신실했던 무명의 선지자의 죽음을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르호보암의 폭정에 지친 백성을 위해 그 대책으로 여로보암을 보내주셨으나 그 또한 우상숭배와 혼합주의에 빠져 살게 되었습니다. 세속의 가치관에 충실한 이 땅의 교회와 세상을 변혁시키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겠다는 우리의 삶에, 한때 그르친 그 잘못에 대해서도 철저히 회개하는 영성이 우리 가운데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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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 여로보암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찌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12 그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 저가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저가 타고 14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15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 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18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20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3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27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28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30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33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열왕기상 13장 & 성경주석

<열왕기상 13장 흐름정리>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죄악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여로보암에게 경고하셨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벧엘에서는 아무런 음식도 먹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고 명하신 것은 금송아지 우상이 있는 벧엘이 저주의 땅임을 증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벧엘에 살던 노선지자의 거짓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적인 순종임을 깨닫게 된다.

<열왕기상 13장 줄거리>

1. 벧엘에 세운 단을 쳐서 예언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여로보암의 손이 마름.

6. 그 선지자의 기도로 손이 회복됨.

7. 선지자가 왕의 영접을 거절하고 벧엘에서 떠남.

11. 한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꾀어 가던 길을 되돌아오게 함.

13.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질책을 받고,

23. 사자에게 죽임을 당함.

26. 늙은 선지자가 그를 장사함.

31. 늙은 선지자가 자신의 예언을 확증함.

33. 여로보암이 돌이키지 아니함.

<열왕기상 13장 개역한글>

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 여로보암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찌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12. 그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 저가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저가 타고

14.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15.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 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18.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19.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20.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23.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27.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28.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30.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33.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34.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열왕기상 13장 성경주석>

13:1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이 행사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여로보암은 벧엘에 세운 새로운 제단의 봉헌식에서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하여 그 제단에 신성성을 부여함으로 백성들의 충성과 존경심을 얻으려 하였다. 하나님은 왕의 이런 방자한 도전을 책망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13:2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

여호와는 어떤 특정 역할을 맡을 사람을 지적해서 이처럼 구체적이고 상세한 예언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예를 들면, 바사 왕 고레스가 출생하기 오래 전에 그를 지명하여 예언하였다(사 44:28; 45:1). 요시야에 관한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23:15, 16).

13:3 예조.

이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참 선지자요 그의 경고의 기별이 매우 엄중하다는 점을 여로보암과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즉시 성취될 충격적인 예언을 하였다.

13:4 손을 펴며.

하나님이 엄숙한 기별을 주어 보낸 사람을 대항하여 손을 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건 매우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편 손이 즉시 말라버림으로 왕의 마음은 물론 백성들의 마음에 두려운 생각이 들었고 저들이 하나님의 참 선지자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였다.

13:5 단이 갈라지며.

이 여호와의 임재와 능력의 현시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백성들은 그 제단이 신성하고 그들의 왕이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생각을 갖는 대신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을 하여 그분의 책망을 자초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다.

13:6 나를 위하여…구하여.

이제 왕은 겸비해졌다. 그는 또한 지금 처한 곤경에서 자신을 구해 낼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을 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왕의 굴복과 선지자의 기도로 팔이 회복된 것은 여로보암에게 회개할 또 다른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아직 여호와께서 포기할 만큼 멀리 가지는 않았다. 만약 왕이 기꺼이 하나님의 길로 행하고 손은 물론 마음의 회복도 간절히 구했더라면 그의 나라는 여호와께 돌아갈 길이 열려 온 이스라엘에는 큰 개혁이 있었을 것이다.

13:7 예물을.

왕의 이 같은 제의는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라 정략적인 생각에서 나왔다. 선지자가 왕의 접대와 예물을 받아들였다면 백성들의 눈에 선지자가 왕의 하는 일을 묵과한다는 의미로 비쳐, 결과적으로 선지자가 끼친 엄숙한 인상을 흐리게 할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품성과 사명에 관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13:8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왕이 하사하겠다는 예물을 결연한 태도로 거절함으로써 선지자는 유리한 위치에 서서 왕과 백성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3:11 한 늙은 선지자.

선지자이긴 했지만 거짓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그릇이 아니라 사단의 도구였다. 사단은 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다른 방법을 써서 여호와의 사자의 평판을 흐리게 하여 여호와의 목적을 좌절시키고자 하였다.

13:15 집으로 가서.

선지자가 왕에게 이런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명백한 뜻(9절)과 어긋났기 때문에 거절했던 초청과 같다. 원수는 매우 끈질겨서 여러 가지 모양의 유혹으로 방법을 바꾸어 가면서 거듭거듭 되돌아와 한 인간을 기어이 패망케 하려 한다.

13:18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그도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는 아니었다. 여호와는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상치되는 기별을 보내지 않는다.

13:18 천사가…내게 이르기를.

이렇게 말했다 해도 악한 천사였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므로 먹지 말라고 말했을 때, 뱀은 그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별을 들고 와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창 3:4)고 말하였다. 이 거짓 선지자의 말은 이와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참 선지자는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면 벧엘의 선지자를 통해서 말한 천사가 사단의 사자(使者)였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았어야 했다.

13:18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기만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가 속임수를 쓸 때 즉시 간파해야 한다.

13:19 돌아가서.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이 맡긴 일에서 절대 돌이키지 말고 그분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 참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았고, 그것과 반대되는 요청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이유로 그 지시를 두 번이나 되풀이했었다. 그는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명백한 명령과 반대되는 길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을, 그분이 함께할 수 없는 원수의 땅에 두고 있었다.

13:20 여호와의 말씀이.

이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 거짓 선지자를 통하여 참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단의 사자가 전한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려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분명한 명령에 불순종한 후에, 하나님은 자신을 사단의 사자로 내준 사람의 입술을 통하여 그 사실을 깨닫게 하셨다(참조 선지자와 왕, 106).

13:22 네 시체가.

히브리인들은 가족 묘실에 묻히고 싶은 소원이 특히 강하였다. 불순종한 선지자는 이 특권을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악의 나무는 일찍 확실한 수확물을 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불순종함으로 자신을 원수의 땅에 두어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13:24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선지자들이 사자(獅子)를 만난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저들이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히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보다 더 큰 담력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용기를 가져야 할 강력한 이유를 지닌 사람도 없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사 43:5)는 약속은 이런 사람에게 적합하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 주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사자가 그에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였다. 그는 그렇게 된 이유를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하였기(단 6:22)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그런 간증을 할 수 없었다.

13:26 말씀을 어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사람은 사명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다음 순간 그의 시체가 길가에 나뒹굴고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급속하고도 불명예스러운 죽음의 원인이었다. 그에게 임한 신속한 형벌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유일한 안전의 길임을 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 주는 강력한 증언이었다. 제단이 갈라지고 왕의 팔이 말라 버린 일과 여호와의 명령을 거스른 선지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나라는 여호와의 진노를 감지하고, 불순종의 길은 슬픔과 죽음의 길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13:30 자기의 묘실에.

자신의 배신행위 때문에 희생된 자에 대한 회한과 동정의 표로 이렇게 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흔히 바위를 깎아 만든 묘실에 매장했으며 거기에 가족들을 함께 묻었다.

13:30 나의 형제여.

여호와를 믿는 참 신앙과 여로보암의 새 우상 종교가 동일시되고 있었던 것처럼,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동일시되었다. 이는 백성들의 마음을 혼란시켜 지금 대두된 문제의 심각성을 그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책략일 뿐이었다. 그 선지자의 불순종은 악의 손아귀에서 놀림거리가 되고 있었다.

13:31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다시 말해, “나의 시신을 그의 묘실에 함께 장사하라. 우리는 살아 있을 때도 형제였으니 죽어서도 형제가 될 것이다.” 요시야 왕이 묘실들에서 사람의 뼈를 내다가 벧엘의 제단 위에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할 때 그 두 선지자의 뼈들을 발견했으나 저들의 뼈는 불사르지 않았다(왕하 23:17, 18).

13:32절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서 북족 10지파의 모든 영토를 지칭할 때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아직 수도가 아니었다. 본문은 앞으로 일어날 예언이다.

13:32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이 예언은 조건적이 아니었다. 이 경고의 기별은 죄악의 행동이 필연적으로 불러올 파멸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구하기 위해 자비와 사랑으로 주어진 것이다.

13:33 돌이키지 아니하고.

경고를 계속 주었으나 거부하였다. 파멸이 닥칠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졌지만 왕은 악의 길을 계속 고집하였다. 이때 이후로 그는 자신이 고집하는 악한 길에서 생길 결과에 대해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었다.

13:34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견고히 섰을 수도 있었던 여로보암의 집은 신속히 멸망당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하고 악의 길을 고집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집에 파멸을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죄는 결코 영원히 설 수도 없고 서서도 안 되며, 또한 영원히 서지도 못할 것이다(참조 사 1:28; 시 34:16; 37:9).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4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메튜 헨리 주석, 열왕기상 13장

13:1 징계를 받은 여로보암 왕(열왕기 상 13:1-10) Ⅰ.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을 알리기 위하여 여로보암에게 한 사자가 파견되고 있다(1절). 여로보암의 파멸을 꾀하던 유다군은 소환되었고 그를 치기 위해 한 자루의 칼을 뽑아 드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왕상 12:24). 그런 대신에 유다의 한 선지자가 여로보암을 악한 길로부터 돌이키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그 시기는 적절하여서 여로보암이 단지 자기 제단에 분향하고 있을 때였고, 그의 마음이 아직 자기의 거짓된 죄로 강퍅해지기 전이었다. 이런 시기를 택하셔서 그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죄인의 죽음을 즐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이 돌이켜서 살게 되기를 바라시는 때문이다. 감히 자존망대한 왕을 공박하고 그가 자랑으로 삼고 있던 의식을 훼방한 이 사자는 얼마나 대담한가! 하나님의 심부름을 가는 자들은 사람의 낯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누가 자기들을 지원하고 계신지를 안다.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하시기 위하여 사자를 보내신 하나님은 매우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여로보암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고였다(롬 1:18 참조). Ⅱ.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달된 말씀은 기어드는 듯한 속삭임이 아닌 큰 소리로 외쳐서 선언되었는데 이는 선지자의 용기와 그의 열성을 의미한다. 그는 이 예언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경청하기를 원하였다. 이 엄숙한 제의에 참석하고 있던 자는 소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예언은 여로보암이나 백성을 향해 외쳐진 것이 아니라 제단을 향하여 포고되었다. 우상에 미쳐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가 먹은 자들보다 제단의 돌들이 먼저 듣고 복종할 터였다. 단을 향해 경고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주조자나 경배자를 다 위협하셨다. 그들에게는 단이 자기들의 영혼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생명없고 죄없는 단에 달라 붙으면 우리가 어떻게 피하겠는가?” 하고 결론을 내릴 것이었다. 제단에 대해 예언된 것은 때가 이르면 요시아라는 이름의 한 통치자가 다윗가에서 나와 우상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이 제단 위에 바치고 또 죽은 자의 뼈를 그 위에서 불사름으로써 이 제단을 더럽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2절). 여로보암이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그는 이 제단을 신성시하였으나 그 신성성은 오욕을 입게 될 것이다. 우상 숭배는 존속하지 못할 것이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토록 지속할 것이다.

2. 그는 산당 제사장을 세웠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제물이 되고 이 제단 위에서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제사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유의 제사로 되는 경우 결과적으로 그 제사를 드리는 자 역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노는 그들 위에 머물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노가 발해지지 않는다.

3. 이 일은 다윗 집의 한 자손에 의하여 성취될 것이다. 여로보암과 그의 나라는 다윗 가문을 업신여기고 배반하였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든든하게 서 있으리라고 믿었던 바로 그 제단을 훼파할만큼 다윗가는 많은 세력을 회복하리라는 것이다. 현재는 하나님과 왕에게 대한 경외심을 다 버리고 있는 자들이 승리를 만끽하고 있지만 결국 정의와 진리는 세상사와 거룩한 일에 있어서 우세하게 될 것이었다.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은 약 356년 뒤에 가서였으나 이 예언이 곧 바로 있을 확실한 일로 선포되는 것은 하나님께는 천년도 하루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 이름을 명명하는 것보다 불확실하고 임의적인 것은 없는 터에 요시아 탄생 300여년 전에 그 이름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께는 미래의 어떤 일도 숨겨져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예지의 책에는 이름들이 있으며(빌 4:3), 천국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는 이 제단을 신성시하였으나 그 신성성은 오욕을 입게 될 것이다. 우상 숭배는 존속하지 못할 것이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토록 지속할 것이다.그는 산당 제사장을 세웠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제물이 되고 이 제단 위에서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제사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유의 제사로 되는 경우 결과적으로 그 제사를 드리는 자 역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노는 그들 위에 머물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노가 발해지지 않는다.이 일은 다윗 집의 한 자손에 의하여 성취될 것이다. 여로보암과 그의 나라는 다윗 가문을 업신여기고 배반하였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든든하게 서 있으리라고 믿었던 바로 그 제단을 훼파할만큼 다윗가는 많은 세력을 회복하리라는 것이다. 현재는 하나님과 왕에게 대한 경외심을 다 버리고 있는 자들이 승리를 만끽하고 있지만 결국 정의와 진리는 세상사와 거룩한 일에 있어서 우세하게 될 것이었다.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은 약 356년 뒤에 가서였으나 이 예언이 곧 바로 있을 확실한 일로 선포되는 것은 하나님께는 천년도 하루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 이름을 명명하는 것보다 불확실하고 임의적인 것은 없는 터에 요시아 탄생 300여년 전에 그 이름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께는 미래의 어떤 일도 숨겨져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예지의 책에는 이름들이 있으며(빌 4:3), 천국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Ⅲ. 이 예고의 진정성을 확신시키기 위해 제단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진동으로 산산조각이 나며 그 희생의 재가 흩날리게 되리라는 예조가 나오는데(3절) 이 일은 즉시 일어났다(5절). 1. 이것은 그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하나님은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신다(막 16:20).

2.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상에 대한 제사를 노여워하신다는 증좌였다. 성별되어야 할 제단이 가증한 것으로 될 때 그 제물이 어찌 열납될 수 있겠는가?

3. 마음이 돌보다 더 굳어서 여호와의 말씀으로도 쪼개지지 않는 백성에게 이것은 하나의 수치가 되었다.

4. 이것은 요시아에 의하여 예언이 성취될 때 어떻게 되리라는 것에 대한 표본이었다. 지금은 단이 갈라졌으나 그 때는 파괴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하나님은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신다(막 16:20).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상에 대한 제사를 노여워하신다는 증좌였다. 성별되어야 할 제단이 가증한 것으로 될 때 그 제물이 어찌 열납될 수 있겠는가?마음이 돌보다 더 굳어서 여호와의 말씀으로도 쪼개지지 않는 백성에게 이것은 하나의 수치가 되었다.이것은 요시아에 의하여 예언이 성취될 때 어떻게 되리라는 것에 대한 표본이었다. 지금은 단이 갈라졌으나 그 때는 파괴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Ⅳ.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을 잡거나 치려고 손을 내밀자 그 손은 말라 버렸다(4절). 그는 당연히 그 전언에 놀라 벌벌 떨어야 했는데도 자기가 경고받은 진노를 무시하고 그 경고를 전해 준 은혜를 경멸하여 그 사자를 공격하였다. 죄인을 책망해 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미워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네게 해를 입히려 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그런 것을 무릅쓰고라도 위탁받은 것을 고수해야 한다. 그들을 부리시는 분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며 인간의 분노를 막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손을 마르게 함으로써 여로보암의 분노를 제거시키셨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선지자를 해칠 수도 없었고 마음대로 거두어 들일 수도 없었다. 그가 송아지에게 분향하기 위하여 손을 내밀었을 때는 그 손이 마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를 치려고 손을 뻗치자 그는 스스로 낮추기까지 그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선지자들에게 대하여 “그들을 손대지 말라, 그들을 해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다. 악인의 모든 악중 선지자를 치려는 흉계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은 없다. 이것은 여로보암에게는 그 죄에 보응하는 형벌이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원수들이 악한 목적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을 구사하신다. 여로보암은 자기 손을 거두어 들이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보고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죄인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사 그들로 죄악에 손을 내밀게 하신다면 그들은 회개로서도 그 손을 다시 거두어 들일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심판이며 본문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훨씬 더 두려운 심판이 된다. Ⅴ. 급작스레 말라 버렸던 손도 그가 순복하자 돌연히 나아 버린다(6절). 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전되어야 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교만하던 마음도 자기 뼈와 살을 건드리는 이것에는 꺾이고 만다. 그는 이제 도움을 요청한다. 1. 자기의 송아지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으로부터 도움을 구하고 있다. 상처를 입히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손 이외의 그 어떤 손도 성하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 자신의 제사나 분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방금 협박하고 죽이려 했던 선지자의 기도와 도고에 의한 도움을 구한다. 자기의 송아지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으로부터 도움을 구하고 있다. 상처를 입히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손 이외의 그 어떤 손도 성하게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그 자신의 제사나 분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방금 협박하고 죽이려 했던 선지자의 기도와 도고에 의한 도움을 구한다. 설교를 증오하는 자들이 신실한 목사의 기도를 기뻐하게 될 때가 올 수도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고 여로보암은 말하고 있다. “너는 그에게 발언권을 가지고 있으니 나를 위하여 그 점을 이용해 다오” 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관찰할 것은 그가 자기 죄의 사유와 자기 심령이 변화를 위해 선지자의 기도를 희구한 게 아니라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해 주기” 만 바랐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로도 모세가 하나님께 구하여 이 죄가 아니라 이 죽음만을 자기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출 10:17).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악을 선으로 갚는다. 그는 여로보암의 무능한 악의를 비난하거나 그의 굴복을 뻐기지 아니하고 즉각 그를 위해 하나님께 호소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다(마 5:10, 44). 그러나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자들만이 이 축복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 선지자가 이와 같이 용서하는 심령을 스스로 내보임으로써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을 들으시고 심판을 철회하심으로써 선지자를 보다 영예롭게 하셨으며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하여 회개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다른 기적으로써 그의 마른 손을 치유하셨던 것이다. 이는 그가 심판으로는 꺾이지 않더라도 자비에는 녹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장에는 그가 심판과 자비에 감동이 되는 듯이 보였으나 그 감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Ⅵ. 여기에는 여로보암의 친절한 초대에 대한 선지자의 거절이 나오는데 우리는 다음 사실을 살펴야 한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저주받을 우상 숭배와 하나님께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또 흑암의 일에 관계하지 말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자기의 사자에게 벧엘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금지시키셨다(9절). 우리가 악인에게서 전염되거나 죄인의 어두운 행사를 격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자리에 앉는 일을 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저주받을 우상 숭배와 하나님께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또 흑암의 일에 관계하지 말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자기의 사자에게 벧엘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금지시키셨다(9절). 우리가 악인에게서 전염되거나 죄인의 어두운 행사를 격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자리에 앉는 일을 금하신다. 선지자는 왔던 길로 도로 가서는 안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in tr ansitu 즉 지나가는 길에 그 말을 전달해야 하였다. 그는 일부러 보낸 것 같은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그들은 그런 은총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는 아덴에서 바울이 지나다가 그들의 위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한 것처럼 도중에 분을 느껴 들린 자같이 보여야 했다(행 17:16, 23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으로 자기의 선지자를 시험하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에스겔이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한지 않은지를 시험하려고 하셨다(겔 2:8). 2. 여로보암은 자기 손의 회복에 무척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하였다거나 그 일에 대한 감사로 예루살렘의 제단에 제물을 보냈다는 기사는 읽을 수 없으나 그가 선지자에게 기꺼이 사의를 표명하고 그의 기도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읽을 수 있다(7절). 은혜가 없는 사람도 자기 신체에 대하여 베풀어 준 혜택을 인해서는 선한 목사에게 감사할 줄 안다.

3. 선지자는 굶주리고 피곤하였으며 아마 돈도 떨어졌을 테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기에게 제의된 향응과 보수를 거절하였다. 선지자는 자기가 그 제의를 수락하면 왕이 깨달음을 얻은 차제에 그와 더 많은 담화를 나누게 되어 그를 효과적으로 회개시킬 수 있는 기화가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신실하고 주의 깊은 심부름꾼답게 자기 일을 마치자 곧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금지된 한 가지 음식조차 참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부인의 가르침을 거의 배우지 못한 자들이다. 여로보암은 자기 손의 회복에 무척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하였다거나 그 일에 대한 감사로 예루살렘의 제단에 제물을 보냈다는 기사는 읽을 수 없으나 그가 선지자에게 기꺼이 사의를 표명하고 그의 기도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읽을 수 있다(7절). 은혜가 없는 사람도 자기 신체에 대하여 베풀어 준 혜택을 인해서는 선한 목사에게 감사할 줄 안다.선지자는 굶주리고 피곤하였으며 아마 돈도 떨어졌을 테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기에게 제의된 향응과 보수를 거절하였다. 선지자는 자기가 그 제의를 수락하면 왕이 깨달음을 얻은 차제에 그와 더 많은 담화를 나누게 되어 그를 효과적으로 회개시킬 수 있는 기화가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신실하고 주의 깊은 심부름꾼답게 자기 일을 마치자 곧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금지된 한 가지 음식조차 참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부인의 가르침을 거의 배우지 못한 자들이다.

13:11 타락한 선지자(열왕기 상 13:11-22) 하나님의 사람은 왕이 자기에게 상을 내릴듯한 뜻을 비췄지만 왕의 초대를 터놓고 단호히 뿌리쳤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받은 명령과 역행하는, 늙은 선지자의 설득에 넘어가서 그와 함께 돌아가 벧엘에서 식사를 함께 하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식사가 그에게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였는지 알 수 있다. 경이감을 갖고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늙은 선지자의 악함. 나는 이 늙은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요 악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진실된 선지자와 선량한 사람이 이 늙은 선지자처럼 고의로 거짓말을 하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미룬다고 믿기보다 악한 성품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한 말씀을 억지로 확인했다(32절에 나오듯이)고 믿기가 더 용이한 때문이다. 좋은 나무라면 결코 이와 같이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마 17:7). 그는 아마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사무엘의 한 학교에서 선지자들의 아들들과 교육을 받았으며 거기서 선지자의 칭호를 얻었으나 점차 세속화되어서 예언의 영이 그를 떠나간 듯 싶다. 그가 만일 선한 선지자였다면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를 꾸짖었을 것이며 자기 아들들로 하여금 그의 제단을 받들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1.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데리고 온 데에는 어떤 선한 의도가 개재되어 있었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원기 회복을 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결론짓고 그에게 대한 동정심에서 이렇게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그의 사명에 대해 자기 자식에게서 들은 소문보다 더 상세히 알고 싶은 생각과 그와의 친분을 보다 두터이 하려는 바램에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저간에 일어난 일을 죄다 그에게 알려 주었고 특히 벧엘에서는 먹고 마시는 게 금지되었다는 것까지도 말했으므로-그는 이를 여로보암 앞에서 공공연히 말했으므로-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고 그럼으로써 그를 위태한 지경에 빠뜨리려는 나쁜 의도에서 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참 선지자의 최악의 적이 되어 왔고 흔히는 참된 선지자를 멸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본문에서와 같이 때로는 그들을 타락시키고 의무를 행치 못하도록 유혹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나실인의 타락을 자랑하기 위하여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먹였다(암 2:12).

2.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도로 데려오기 위해 매우 악한 방법을 취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나는 그대와 함께 떡을 먹으러 돌아 갈 수도, 가지도 않겠노라(그의 결심은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하고 있다. 16, 17절)” 고 말했을 때 그는 사악하게도 자기가 그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하늘로부터 받았노라고 빙자하였던 것이다. 그는 선지자로서의 이전 신분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을 기만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그는 이 심부름을 보낸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가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예언에 대한 희롱이었고 극히 참람한 짓이었다. 열왕기 하에서는 이 늙은 선지자를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라고 칭하고 있으나(왕하 23:18), 상당히 뒤에까지 사마리아와 같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왕상 16:24). 그러므로 나는 그가 벧엘 출신의 선지자인데도 그렇게 불리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한 사마리아 선지자들이 나중에 나오는데(렘 23:13) 이 늙은 선지자도 그들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데리고 온 데에는 어떤 선한 의도가 개재되어 있었는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원기 회복을 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결론짓고 그에게 대한 동정심에서 이렇게 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그의 사명에 대해 자기 자식에게서 들은 소문보다 더 상세히 알고 싶은 생각과 그와의 친분을 보다 두터이 하려는 바램에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저간에 일어난 일을 죄다 그에게 알려 주었고 특히 벧엘에서는 먹고 마시는 게 금지되었다는 것까지도 말했으므로-그는 이를 여로보암 앞에서 공공연히 말했으므로-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고 그럼으로써 그를 위태한 지경에 빠뜨리려는 나쁜 의도에서 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참 선지자의 최악의 적이 되어 왔고 흔히는 참된 선지자를 멸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본문에서와 같이 때로는 그들을 타락시키고 의무를 행치 못하도록 유혹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나실인의 타락을 자랑하기 위하여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먹였다(암 2:12).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도로 데려오기 위해 매우 악한 방법을 취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나는 그대와 함께 떡을 먹으러 돌아 갈 수도, 가지도 않겠노라(그의 결심은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하고 있다. 16, 17절)” 고 말했을 때 그는 사악하게도 자기가 그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하늘로부터 받았노라고 빙자하였던 것이다. 그는 선지자로서의 이전 신분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을 기만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그는 이 심부름을 보낸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가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예언에 대한 희롱이었고 극히 참람한 짓이었다. 열왕기 하에서는 이 늙은 선지자를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라고 칭하고 있으나(왕하 23:18), 상당히 뒤에까지 사마리아와 같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왕상 16:24). 그러므로 나는 그가 벧엘 출신의 선지자인데도 그렇게 불리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한 사마리아 선지자들이 나중에 나오는데(렘 23:13) 이 늙은 선지자도 그들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Ⅱ. 이런 기만에 넘어가고 만 선한 선지자의 약함.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갔더라” (19절). 상을 주마고 한 왕의 권유도 일언지하에 물리칠 만큼 결단심이 풍부하던 그도 선지자로 자처하는 자의 교묘한 수작에는 거역할 수가 없었다. 외형적인 유혹보다 신성과 성결을 빙자한 구실로 인해 의무에서 이탈할 우려가 더 많은 게 바로 선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하며(마 7:15) 영을 다 믿지 않을 필요가 없다(요일 4:1). Ⅲ.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조치. 거짓말을 하여 화를 입힌 거짓 선지자는 벌받지 않고 무사히 갔는데 반하여 그 거짓 선지자 때문에 범죄하게 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은 돌연히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에 경악한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할 수가 없다.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고(욥 12:16), 그는 자신의 일을 조금도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 확실히 심판은 오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 때에는 이런 일들이 다시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것이다. 극히 많은 죄를 짓고도 이 세상에서는 거의 고통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때에는 자기 행위대로 받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의 사람에게 전달된 말씀은 이상하였다. 그의 죄가 낭송되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명백한 긴급 명령에 불복종 했다는 것이다(21, 22절). 그것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즉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너는 결코 네 집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곧 시체가 될 것이다. 네 시체는 매장을 위해 네 열조의 묘실이 있는 곳으로 운반되지도 못할 것이다.”

2. 더욱 이상한 것은 그 늙은 선지자가 바로 이 말씀의 전달자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발람에게는 그의 나귀를 통해 말씀하셨고 사울에게는 사무엘의 형상으로 나타난 악신에 의하여 자기 운명을 해독하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도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1) 거짓말하는 선지자를 놀라게 하며 그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직접 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 전언으로 인하여 더욱 감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심령은 너무나 강력한 느낌을 받아 그는 마치 고뇌하는 자처럼 외쳤던 것이다(21절). 하나님의 사람은 얼떨떨한 결에 죄를 지었다. 그가 하찮은 일에 대한 불순종으로 죽어야만 한다면 늙은 선지자 자신은 어떠했던가! 치밀한 날조극에 의하여 천사를 빙자한 거짓말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던 것이다. 그런 자기는 굉장히 더 쓰라린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하였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아마 이것은 그 늙은 선지자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남에게 선포하면서도 스스로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참으로 강심장을 가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속은 선지자에게 보다 큰 굴욕을 주고 저 큰 사기꾼, 즉 마귀에게 청종하는 자들이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하여, 시험하는 자된 마귀에게 복종하는 자는 고문하는 자된 마귀에 의하여 경악하게 될 것이다. 현재는 그가 알랑거리지만 나중에는 그가 덮칠 것이며 지금은 그가 죄 가운데로 끌어 들이지만 후에는 자포자기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라도 하려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전달된 말씀은 이상하였다. 그의 죄가 낭송되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명백한 긴급 명령에 불복종 했다는 것이다(21, 22절). 그것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즉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너는 결코 네 집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곧 시체가 될 것이다. 네 시체는 매장을 위해 네 열조의 묘실이 있는 곳으로 운반되지도 못할 것이다.”더욱 이상한 것은 그 늙은 선지자가 바로 이 말씀의 전달자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발람에게는 그의 나귀를 통해 말씀하셨고 사울에게는 사무엘의 형상으로 나타난 악신에 의하여 자기 운명을 해독하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도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거짓말하는 선지자를 놀라게 하며 그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직접 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 전언으로 인하여 더욱 감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심령은 너무나 강력한 느낌을 받아 그는 마치 고뇌하는 자처럼 외쳤던 것이다(21절). 하나님의 사람은 얼떨떨한 결에 죄를 지었다. 그가 하찮은 일에 대한 불순종으로 죽어야만 한다면 늙은 선지자 자신은 어떠했던가! 치밀한 날조극에 의하여 천사를 빙자한 거짓말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던 것이다. 그런 자기는 굉장히 더 쓰라린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하였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아마 이것은 그 늙은 선지자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남에게 선포하면서도 스스로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참으로 강심장을 가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속은 선지자에게 보다 큰 굴욕을 주고 저 큰 사기꾼, 즉 마귀에게 청종하는 자들이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하여, 시험하는 자된 마귀에게 복종하는 자는 고문하는 자된 마귀에 의하여 경악하게 될 것이다. 현재는 그가 알랑거리지만 나중에는 그가 덮칠 것이며 지금은 그가 죄 가운데로 끌어 들이지만 후에는 자포자기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라도 하려들 것이다.

13:23 여로보암의 계속적인 타락(열왕기 상 13:23-34) Ⅰ. 기만당하여 본의 아니게 불순종하게 된 선지자의 죽음이 나오고 있다. 그를 미혹하였던 늙은 선지자는 그에게 저지른 잘못을 보상하거나 그에게 경고된 불행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라도 주려는 듯이 집에까지 타고 갈 나귀를 그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도중에서 사자가 그를 습격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23, 24절). 그는 배가 고플 때 원기를 도우려고 돌아 갔을 뿐인데도 그로 인해 죽지 않으면 안되었다(삼상 14:43). 그러나 우리는 다음 사실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그의 죄는 중죄였다. 거짓말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됐다고 하여 그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는 결코 없다. 그는 자신이 직접 받은 명령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딴 자가 가지고 온 철회 명령은 그다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또 그 명령의 원인이 계속 발효하고 있는 한 명령이 철회되리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도 없었다. 그것은 그 악한 장소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 늙은 선지자의 정직성을 크게 의심할 만하였다. 그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벧엘에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의 우상 숭배에 대한 증인으로 그를 사용하시는 게 적합치 않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여하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를 구하느라 시간을 지체해야 했고 그렇게 빨리 응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벧엘의 어느 곳에서도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는데 딴 어느 집보다 이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라면 먹어도 안전한 것으로 생각하였단 말인가? 그것은 명령을 개량하겠다는 수작이었고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현명하게 여기는 행위였다. 그는 배고프다는 것을 들어 변명하려고 생각했던가? 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란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단 말인가?

2.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 이로써 다음 사실이 나타난다.

(1)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명백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어느 무엇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해 드린다. 우리의 첫 조상에 대한 하나님의 조처도 실은 작은 일 때문이었다. 금지된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변명하기가 보다 용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노여워하신다. 불순종하는 가운데 보호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의 직업이 신성하고 그 직위가 높으며 비록 하나님께 가깝고 또 하나님께 아무리 훌륭한 봉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이 의로운 심판의 방법으로 여로보암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여로보암은 자기 손이 말랐음에도 잘못을 고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는 십중 팔구 이 일을 악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선지자가 자기 제단에 참견한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거나 차라리 집에나 처박혀 있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고 여로보암은 말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섭리가 그 선지자의 무례함에 대해 처벌을 내렸으며 자기의 마른 손이 할 수 없는 것을 사자가 해치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로서 경고하시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고용되는 모든 자가 자기 목숨을 걸고 명령을 준행하라는 것이다. 그의 죄는 중죄였다. 거짓말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됐다고 하여 그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는 결코 없다. 그는 자신이 직접 받은 명령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딴 자가 가지고 온 철회 명령은 그다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또 그 명령의 원인이 계속 발효하고 있는 한 명령이 철회되리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도 없었다. 그것은 그 악한 장소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 늙은 선지자의 정직성을 크게 의심할 만하였다. 그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벧엘에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성읍의 우상 숭배에 대한 증인으로 그를 사용하시는 게 적합치 않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여하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를 구하느라 시간을 지체해야 했고 그렇게 빨리 응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벧엘의 어느 곳에서도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는데 딴 어느 집보다 이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라면 먹어도 안전한 것으로 생각하였단 말인가? 그것은 명령을 개량하겠다는 수작이었고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현명하게 여기는 행위였다. 그는 배고프다는 것을 들어 변명하려고 생각했던가? 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란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단 말인가?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 이로써 다음 사실이 나타난다.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명백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어느 무엇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해 드린다. 우리의 첫 조상에 대한 하나님의 조처도 실은 작은 일 때문이었다. 금지된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변명하기가 보다 용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노여워하신다. 불순종하는 가운데 보호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의 직업이 신성하고 그 직위가 높으며 비록 하나님께 가깝고 또 하나님께 아무리 훌륭한 봉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면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이 의로운 심판의 방법으로 여로보암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여로보암은 자기 손이 말랐음에도 잘못을 고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는 십중 팔구 이 일을 악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선지자가 자기 제단에 참견한 대가를 톡톡히 받았다거나 차라리 집에나 처박혀 있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고 여로보암은 말했을 것이다. 아니, 그는 섭리가 그 선지자의 무례함에 대해 처벌을 내렸으며 자기의 마른 손이 할 수 없는 것을 사자가 해치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로서 경고하시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고용되는 모든 자가 자기 목숨을 걸고 명령을 준행하라는 것이다. Ⅱ.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는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된다. 이것은 진노하심 가운데서도 기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표상한다. 사자는 그를 조용히 질식사시켰거나 아니면 찢어 죽였을 터인데 그의 시체를 먹지도 않았고 나귀조차 찢지도 않았다(24, 25, 28). 더군다나, 사자는 지나가면서 보는 행인들에게 덤비지도 않았고 늙은 선지자가 그 시체를 거두러 왔을 때 그 노인-그는 충분히 사자를 무서워 할만한 이유가 있었다-에게도 덤벼들지 않았다. 그 사자가 받은 임무는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까지 와야 하지만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하나님의 사람에게 노하셨지만 이렇게 자기의 노를 돌이키시고 그 형벌이 죽음이상 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Ⅲ. 늙은 선지자는 그의 매장을 돌보았다. 늙은 선지자는 이 이례적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는 여호와 곧 자기 주인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그 잘못은 누구에게 있었던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셨다(26절)고 결론지었다. 늙은 선지자로서는 사자를 왜 자기와 자기 집에 보내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속인 선량한 자에게 보내셨는지를 물어 보는 게 어울릴 것이었다. 그는 시체를 떠들었다(29절). 만약 항간에서 떠도는 말에 진실성이 다소라도 있다면 늙은 선지자가 시체에 손을 댔을 때 그 시체에서는 틀림 없이 새로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살인자였고 시체를 매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가 입힌 피해에 대한 보상 치고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던 까닭이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여서 파멸로 몰아 넣었을 때 아마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조소하려는 심산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양심이 녹아져서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울 정도로 되었고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한 요압처럼 자기가 죽인 자의 조상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호라! 나의 형제여” (30절). 거짓말쟁이 늙은 선지자가 편안히 살며 우상 숭배하는 왕은 사치와 권세를 누리며 살고 있는 반면에 그토록 선하고 충실하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그토록 담대하던 선지자가 한 가지 범죄로 흉악범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매우 비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시여! 주의 길은 바다에 있고 주의 첩경은 큰 물에 있나이다” (시 77:19). 우리는 사람을 그 고난으로 판단할 수가 없고 사람이 현재 당하고 있는 형벌로써 그 사람의 죄를 논할 수 없다. 어떤 자는 그 영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육이 멸망을 받는 데 반하여 또 딴 사람들은 그 영혼이 음부에 합당하도록 되기까지 그 육이 제멋대로 행하게 버려 두시는 때문이다. Ⅳ. 늙은 선지자는 자신의 매장에 대한 당부를 자식들에게 하는 데 그것은 그들이 꼭 자기를 하나님의 사람과 같은 묘실에 매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1절).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내 티끌이 그의 티끌과 섞이도록 될 수 있는대로 그의 뼈 가까이에 두라.” 그는 비록 거짓말을 한 선지자였지만 참된 선지자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였다(민 23:10). “내 영혼을 벧엘의 죄인들과 함께 모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모아 두라.”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사람의 뼈가 그 위에서 살라지리라고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이기 때문이었다(32절). 1. 그는 선지자의 예언을 인준하고 있다. 이는 두 증인의 입으로 말을 증참케 하여(마 18:16) 가능하다면 여로보암을 깨우치고 교화시키기 위함이었다(그리고 그 두 증인 중 하나는 사도 바울이 딛 1:12 에서 인용하는 대로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 같은 자이다).

2. 그는 죽은 선지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몸은 비록 땅에 엎드러졌으나 그의 말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 자로서 존경하고 있다. 목사들은 죽는다. 오히려 남보다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존속하며(벧전 1:25) 그들과 함께 죽지 아니한다.

3. 그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사람들의 뼈는 여로보암의 단 위에서 살라지리라고 예언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 뼈를 그의 뼈 가까이에 두라. 그리하면 내 뼈가 흐트러지지 않게 될 것이다” 고 말한다. 이에 따라 그것은 우리가 읽는대로 안전하게 되었다(왕하 23:18). 선한 자들과 교제하면 자고 행하고 살고 죽는 것이 안전하다. 선지자의 묘비명에 대해서는 여기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열왕기 하 23장 17절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거기서 요시야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고 묻고 “왕께서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라는 대답을 듣는다. 따라서 선지자의 묘비는 그의 예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벧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항구적 증거였다. 만일 그가 죽어서 딴 곳에 묻혔더라면 그것은 그다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리아라는 이름은 그 당시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여기서 이스라엘 성읍들이 사마리아 성읍들로 불리우고 있는 것은 늙은 선지자가 어떻게 말했든지간에 영감받은 기자는 자기 당대의 언어로 기록하였던 때문이다. 그는 선지자의 예언을 인준하고 있다. 이는 두 증인의 입으로 말을 증참케 하여(마 18:16) 가능하다면 여로보암을 깨우치고 교화시키기 위함이었다(그리고 그 두 증인 중 하나는 사도 바울이 딛 1:12 에서 인용하는 대로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 같은 자이다).그는 죽은 선지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몸은 비록 땅에 엎드러졌으나 그의 말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 자로서 존경하고 있다. 목사들은 죽는다. 오히려 남보다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존속하며(벧전 1:25) 그들과 함께 죽지 아니한다.그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사람들의 뼈는 여로보암의 단 위에서 살라지리라고 예언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 뼈를 그의 뼈 가까이에 두라. 그리하면 내 뼈가 흐트러지지 않게 될 것이다” 고 말한다. 이에 따라 그것은 우리가 읽는대로 안전하게 되었다(왕하 23:18). 선한 자들과 교제하면 자고 행하고 살고 죽는 것이 안전하다. 선지자의 묘비명에 대해서는 여기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열왕기 하 23장 17절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거기서 요시야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고 묻고 “왕께서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라는 대답을 듣는다. 따라서 선지자의 묘비는 그의 예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벧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항구적 증거였다. 만일 그가 죽어서 딴 곳에 묻혔더라면 그것은 그다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리아라는 이름은 그 당시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여기서 이스라엘 성읍들이 사마리아 성읍들로 불리우고 있는 것은 늙은 선지자가 어떻게 말했든지간에 영감받은 기자는 자기 당대의 언어로 기록하였던 때문이다. Ⅴ. 여로보암의 집요한 우상 숭배(33절). “여로보암은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갈라 놓으신 단의 수리를 감행하려고 하는 자를 찾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그 단위에 제물을 바쳤으며 전보다 한층 대담하게 제사를 지냈다. 이는 전에 자기의 제사를 훼방하던 선지자가 무덤 속에 있었고(계 11:10) 예언이 성취되려면 한참 뒤라야 하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을 개심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었으나 위협도, 예조도, 심판도, 자비도 그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그는 자기 송아지한테 그토록 이상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개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직도 선용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는 자기의 수족으로 만들어 무식하든, 부도덕하든, 어떤 지파 출신이든 상관하지 않고 제사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었다. 즉 처음에는 올무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파멸이 되어 그 집을 지면에서 끊어지게 하였다(34절). 가족의 감소와 동요와 풍지박산은 죄의 결과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여로보암은 송아지가 왕권을 자기 자손에게 확보해 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왕관을 상실하게 하고 자기 가족을 몰살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죄악으로 자신을 부지하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 실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워터타운 한인 침례교회 사랑방

열왕기상 13 장 강해 (여로보암의 죄를 책망하신 하나님)

서론)

오늘 말씀은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를 책망하시는 내용들입니다. 오늘 말씀엔 여로보암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유다의 한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 이 여호와의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가서 그의 죄를 책망합니다 . 그리고 돌아오다가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속임에 넘어가서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떡과 물을 먹은 후에 사자에게 찢겨 죽임을 당합니다 .

본론)

가) 여로보암에 대한 책망

1-10 절을 보면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

이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남 유다의 한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칩니다 . 그 외치는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가 여로보암이 지금 제단에 분향하는 그 제단 위에 그 제사장들을 제물로 바칠 것이며 ,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

참으로 끔찍한 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말씀은 무려 삼백 년 뒤에 일어날 일입니다 . 이 예언의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재앙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

열왕기하 23:15-16 절을 보면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

남 유다 왕 요시야가 모든 산당들을 파괴하며 우상을 부수는 중에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도 헐어버린 것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일들이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오늘 본에서 남 유다의 한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와서 그가 만든 벧엘의 단에서 분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이 선지자를 향하여 손을 펴서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 그의 손이 곧 말라버렸습니다 . 그러자 여로보암 왕이 선지자에게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손이 성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 이에 선지자가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자 그 손이 곧 성하게 되었습니다 . 그때 여로보암 왕은 선지자에게 자기와 함께 가면 후대하겠다고 합니다 .

하지만 그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에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도 가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왕의 집 절반을 준다고 해도 가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하여 왕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 죄와의 철저한 구별이 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

나) 순종엔 시험이 있다

본문 11-19 절을 보면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 그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 저가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 저희가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저가 타고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고 했습니다 .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이날에 그 아들들이 와서 벧엘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행한 모든 일과 그 사람이 여로보암 왕에게 한 일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늙은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선지자를 쫓아갑니다 .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선지자를 만나서 확인하고서는 자기 집으로 가서 떡을 먹자고 제안 합니다 . 그러자 이 선지자는 왕에게 거절한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으로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 그런데 이 늙은 선지자는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고 하며 천사가 “그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자신에게 말 했다고 합니다 . 그러자 그만 유다의 한 선지자는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신 것입니다 . 그런데 이것은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 늙은 선지자가 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을까요 ? 그는 바로 선지자를 시험하는 사명을 가진 선지자였습니다 . 그리하여 교묘한 말로 유다의 선지자를 혼란에 빠트립니다 .

본문 20-22 절입니다 .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여호와의 말씀이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 고로 하나님 말씀은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

23-28 절을 보면 “자기가 데리고 온 ( 유다의 )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 하고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속아 그의 집에 가서 떡과 물을 먹고 마신 하나님의 사람은 나귀를 타고 돌아 가다가 맹수인 사자가 길에서 그를 찢어 죽였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선지자의 시체를 먹지도 않았습니다 . 그 선지자가 타고 간 나귀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 사자가 그냥 그 선지자의 시체 곁에 서 있었음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그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

29-32 절에 보면 늙은 선지자가 그 시체를 나귀에 실어가지고 와서 자기 성읍에서 슬피 울며 장사합니다. 그리고 그 시체를 자기 묘실에 장사하고 자기 아들들에게 자기도 죽으면 그 선지자 곁에 장사하라고 합니다 .

그러면서 32 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 이 늙은 선지자는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

열왕기하 23:17-20 절을 보면 이 사건이 성취된 부분이 다시 나옵니다 .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성읍 사람들이 고하되 왕께서 벧엘의 단에 향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 가로되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 전에 이스라엘 열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단 위에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라고 했습니다 .

. 여호와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되 끝까지 해야 합니다 .

다) 여로보암의 최후

그러면 이 모든 일을 목격한 여로보암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3-34 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고 했습니다 .

여로보암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 손이 말랐다가 회복되고, 제단이 깨어짐을 목격했습니다 . 그리고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땅에서 떡과 물을 먹고 마심으로 사자에게 찢겨 죽은 소식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악한 길에서 주춤하기는 했지만 결국 돌이키지 아니하였습니다 .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 끊어져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

결론)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은혜로 열한 지파의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만들어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함으로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 종교는 결국 자기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이기적인 종교였습니다 . 북한의 김정은 정권도 끊어질 날이 매우 가까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과 건위를 부정하는 자들 , 자기의 왕권을 굳건히 하고자 우상화 정치를 하는 자들은 다 여로보암과 같이 될 것입니다 . 그 가문이 철저히 찢기우고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 살 길은 오직 철저한 회개 뿐입니다 .

010119 편집: 안익선 목사 / 참고 : 창원한결교회

조금씩 성경 알아가며 나도 변하려고 :: 열왕기상 13장.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사람>의 의문사 사건의 전말을 공개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참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이야기를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정리1. 내용 정리]

1.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하여 그가 벧엘에서 여로보암을 만났다.

1) 벧엘에서 분향하던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언하였다.

(1) 훗날 다윗의 집에서 요시야라는 아들이 이 제단 위에 제사장을 제물로 바칠 것이다.

(2) 그날에 대한 징표로 오늘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2) 여로보암 왕은 그 선지자를 잡으려고 손을 폈으나 그 손이 말라 거둘수 없게 됨

3)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처럼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제단에 쏟아짐

4) 여로보암이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신의 손을 다시 온전하게 해달라고 구함/온전해 짐.

5)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예물도 주고, 물과 떡조 주려 했으나 하나님의 사람은 거절함.

2.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함으로 죽게 됨.

1)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가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과 여로보암의 일을 알게 됨

2) 한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가서, 자신을 선지자라고 소개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천사들의 보냄을 받아 온 것으로 거짓말을 한 다음, 그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는 물과 떡을 먹게 함. 그 하나님의 사람을 속아서 물과 떡을 마심.

3) 그 늙은 선지자가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냐고 질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었으니 죽게 되고 그 시체가 조상의 묘실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하심>

4) <하나님의 사람>은 돌아가는 길에서 사자를 만나 죽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그 시체 곁에서 사자도 떠나지 않고, 나귀도 도망하지 않았다.

5) 이 사실을 들은 늙은 선지자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묘실로 옮기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자신이 죽게 되면 이 묘실에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두라고 함.

[정리] 하나님께서는 억울한 것 같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에게 진노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벧엘의 제단과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다.

3. 여로보암은 이 일 후에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1)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다.

2)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었다.

[정리2. 내용의 재구성]

여러보암이 벧엘과 단에 제단을 만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 그의 죄에 대한 질책을 하고, 앞으로 돌이킴이 없다면 훗날 이 제단과 함께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주려고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의 제단으로 갔고, 마침 그곳에 여로보암이 와 있었다. 그 사람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했다. 여로보암은 그의 말을 우습게 알고 그를 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명령하려던 손이 말라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여로보암은 마음을 겸손케 하여 그 사람에게 손을 온전케 해달라고 부탁함으로 회복되었다. 여로보암은 그 사람에게 예물도 주고 잘 대접하려고 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거절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문제는 이 소식을 들은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였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늙은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람을 쫓아갔고, 그에게 거짓말(하나님의 천사가 시켰다는 거짓말을 의도적으로)을 해서는 그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를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도 전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된 <하나님의 사람>은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된다. 이런 억울한 일을 계획한 늙은 선지자는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한다. 그리고 자기의 묘실에 안장한다.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벧엘과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 위에 반드시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과 여로보암은 이 사건을 통해서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을 행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멸망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성경에서 미래에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은, 지금 돌이키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하는 예언(주로 심판에 대한)은 단순히 기계적인 예언(변할 수 없는)은 아닌듯 하다. 좀 더 정확하게 하게 표현한다면 심판이 임하고 징계가 임할 것이라는 예언은, 지금 돌이키고 회개하라는 마지막 경고이면서 동시에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대표적인 경우는 요나서에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일 것이다. 심판을 예언하셨지만, 그들이 그 경고를 듣고 회개하자 그들은 심판으로 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하신 <심판에 대한 예언>도 그와 같은 차원의 예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회개할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려 했고(4절) 그 경고를 받고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일반 백성 중에 제사장을 삼는 일을 자행했다.(33절) 그렇다면 여로보암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기회는 잃게 된 것이다. 결국 여로보암의 왕위는 끊어지게 될 것이 분명해 진다.

누군가를 극단적인 상황에서 살리려 할 때, 우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해야 한다. 성공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수단이요 그것말고는 다른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 방법을 쓸 수 있는 시기란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살려고 하는 동안) <죽음과 심판>을 말해야 한다. 그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은 희망이 없으며, 정말 죽음과 심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듣는다면 그는 살아날 것이다. 그가 살아났다고 해서 그 심판의 예언이 틀린 것은 아니다. 원래 그 예언이라는 것은 그를 살리려고 한 예언이며, 정말 돌이키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예언이기에 그렇다.

2. 거짓말에 속은 <하나님의 사람>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그는 용기를 가지고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어떤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 만일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면 그는 늙은 선지자의 말에 순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까지 잘못으로 여기지는 말자. 늙은 선지자도 왜 그와 같은 일을 했는지 의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스스로에게 무슨 유익이 있다고 그 사람을 찾아가 거짓말까지 한 것인가? 단순한 시기심인가? 그렇지 않다. 그 하나님의 사람이 죽고 난 후 그 시신을 수습하고 자신의 묘실에까지 넣고 애도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 메시지를 주기 위한 사건으로 봐야 할 것이다. 억울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이 심판을 모면할 수 없었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은 여로보암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당해도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하나님의 사람과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역할이 좀 이상해 보이는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정황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는 매우 강력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모두 계시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다. 여로보암도 그렇고 <하나님의 사람>도 그렇고 <벧엘의 늙은 선지자>도 그렇다. 누구를 위한 계시인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계시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죄에서 돌이키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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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을 죽인 늙은 선지자(왕상 13)

성경에 나오는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이 열왕기상 13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과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분열 왕국 시대 초기입니다.

B.C. 931년경에 일어난 일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스라엘 열 지파의 청원을

무자비하게 거절하면서

북 이스라엘 왕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여로보암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왕상 11:26~40).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왕상 11:38)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위에 대한 걱정으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벧엘과

영토의 북단인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절하게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민심이 향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왕상 12:25~29).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왕상 12:30)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였습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산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여호와의 절기가 아닌 임의로 만든 날을 절기로 삼았습니다(왕상 12:31-33).

엘리의 두 아들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한 것처럼

여로보암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제사의 규례를 모두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13장은 “보라!”로 시작됩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부르심을 입고 여로보암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죄를 꾸짖으면서

남 유다 왕국에 다윗의 자손으로 요시야라는 왕이 나올 것인데

그가 이 모든 패역하고 타락한 제사장들을 응징할 것이라 예언합니다(왕상 13:1~2).

그리고 이 예언이 확실할 것에 대한 징조로

제단이 갈라지고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졌는데,

이를 막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손을 펴서 말하던

여로보암의 손이 말라버리게 됩니다(13:3-5).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간청하여

손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구하고

여호와의 은혜로 여로보암은 손이 다시 성하게 됩니다(13:6).

왕은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람에게 예물을 주기 원했지만(7절)

하나님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13:8~9)

열왕기상 13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 늙은 선지자, 여로보암의 이야기의 가장 큰 핵심은

여기에 밑줄 친 내용입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이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죄의 길로 되돌아간 여로보암을 책망하기 위해 왔고

자기 자신도 말씀에 순종하여 다른 길로 가고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13:10).

13장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의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왕상 13:33-34)

자신의 잘못된 그 길로 되돌아갔던 여로보암은 멸망의 수순을 밟습니다.

벧엘에 살고 있는 한 늙은 선지자 이야기가 뜬금없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가던 길로 되돌아가게 했을 때

사자에게 찢겨 죽임을 당하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떠나 자신의 죄악된 길로 되돌아간 자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이며,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object lesson)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 뜻을 어떻게 분별했는지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아주 분명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왕상 13:18)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과 정 반대의 계시를

이 늙은 선지자에게 하셨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임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악한 의도로 속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후에 하나님의 사람이 사자에게 찢겨 죽었을 때,

그는 시체를 들어 성읍으로 가져와 그를 위해 슬피 울고

장사한 후 나중에 자신도 그 옆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왕상 13:29~31).

악한 의도가 아니었다면 왜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이 하시지도 않은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잘 대접해주기 원했을 지도 모릅니다.

혹은 하나님의 사람이 선포한 무서운 저주,

벧엘에 있는 제단과 사마리아 성읍의 모든 산당에 대한 말들이

자신의 호의와 섬김으로 무효화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후에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후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왕상 13:32)

고 말한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에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없었고, 계시도 없었으며,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지도 않았고,

환상을 보거나 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기를…”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히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온 늙은 선지자에게

이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말씀은 자신이 데리고 온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왕상 13:21~22)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는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나귀를 타고 가는 길에 사자를 만나

사자에게 찢겨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왕상 13:23~28).

사자는 배고팠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귀는 건드리지 않았고 죽은 사람을 먹지도 않고

시체 옆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에 불순종한 이유로

심판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죄의 길로 되돌아가면 죽임을 당한다는 분명한 메시지가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늙은 선지자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거리가 먼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표현을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분명히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내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분별했습니다.

마치 늙은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 말씀, 음성, 환상, 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기록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면

그것은 늙은 선지자가 한 것과 똑같은 “속임”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한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말씀을 계시하셨으며

그 본래 의미를 벗어나 성경을 내가 원하는 방식과 모양으로

해석하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뜻, 감동의 메시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히 이 늙은 선지자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려간다, 올라간다, 멀리 간다”등의 단어로

선교지를 결정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하거나

원래 성경의 기록된 의미를 벗어나 특정 단어나 구절만 가져와서

하나님이 그것으로 감동케 하시어 특정 메시지를 주셨다고 말하는

모든 노력들은 결국 이 늙은 선지자의 오류를 벗어날 수 없는

참으로 위험한 행위입니다.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을 때

그 위험한 발언은 하나님의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말씀을 받았다”는 발언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해를 끼칩니다.

첫째로, 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관심을 돌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늙은 선지자가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경험, 감동, 체험을 앞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마치 지금 실시간으로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것같이 표현하는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이미 기록된 분명하신 뜻에서 관심을 돌리게 만듭니다.

만약 지금 이 시간 나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뜻과 계획을 말씀해주신다면

수 천년 전에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시하신 내용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낡고 오래된 이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새로운 뜻, 감동, 직접적인 계시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록된 말씀의 본래 의미를 찾고 순종하려는 노력에서

멀어진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단지 성경에 써 있는 글자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감동과 신비로운 계시 과정을 통해

직접적인 음성과 뜻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본래 의미와 뜻과는 관계 없이 말입니다.

둘째로, 죄를 짓게 합니다.

늙은 선지자는 신성모독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지도 않은 말을 하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무서운 죄입니다.

율법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신 18:22).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이 하시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씀을 받았다”는 발언은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엄청난 죄입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들이나 하는 신성모독의 죄입니다.

구약시대였으면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 죄입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0.01%라도 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늙은 선지자의 죄는 하나님의 사람이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다”고 말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은 본인 스스로 짓는 신성모독의 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를 죄로 인도합니다. 실족(cause to sin)하게 만듭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표현을 오래 들었던 사람은

자신에게 왜 하나님이 음성으로 감동으로 말씀하시지 않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뭔가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분별합니다.

직접 계시를 받는 사람을 영적으로 더 뛰어나고 신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적용하고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그것이 더 영적으로 훌륭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며 희망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표현들을 쓰게 만듭니다.

그게 더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사모하고 추구하게 만듭니다.

돌로 쳐서 죽여야 했던 죄를 사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넷째, 죄의 결과(징계)를 맛보게 합니다.

창세기부터 오늘 날까지 죄가 그 결실을 맺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였을 때,

하나님 앞에 회개했고 용서를 받았지만,

그 결과 가족 안에서 환난(압살롬, 암논, 다말)을,

그리고 온 국가의 환난을 죄의 결실로 맛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분명하신 말씀의 뜻에서 돌이켜

늙은 선지자가 받았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좇아 행했고,

그 결과 사자에게 찢겨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계시를 받았고 특별한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를 고스란히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행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신성모독의 죄를 짓고 다른 성도를 그 죄로 인도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말씀의 원래 쓰여진 의미와 전혀 관계없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의 뜻은 100%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원래 가지고 계셨던 의도와 다른 의미로

새롭게 말씀을 조명해서 우리에게 주신다면

성령은 더 이상 진리의 영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 아닙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하신 말씀이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분명하고 명백하게 밝히신 그분의 말씀에서 돌이키지 말아야 했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자신이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천사를 통해서,

기존의 하나님의 뜻에서는 거리가 먼 하나님의 계시를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사람이 좇았을 때

그는 말씀을 거절한 대가로 목숨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의로 인도하고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충분합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말씀을 받았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이 그렇게 나에게 말씀을 주셨다”고 확신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드시 검증 되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먼 이야기라면

왜 “하나님께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서운 신성모독의 죄며

다른 성도를 그 신성모독의 죄로 이끌어가는 무서운 행위인지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내 주위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기 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성도를 대상으로 사기 죄를 짓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이 늙은 선지자와 그의 손에 죽은 하나님의 사람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스크랩] 열왕기상 (13 : 1~34) 주석

열왕기상 13장

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ㅇ하나님의 사람 – ‘하나님의 사람'(이쉬 하엘로힘)이란 ‘선

지자'(나비)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나비’와 ‘이쉬 하엘로

힘’간에는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으니 곧 전자가 ‘선지자의 소명’을 강조하는 단어라

면 후자는 선지자가 수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는 단어라 하겠다

(H.Austel, R.D.Patterson). 아무튼 이 ‘하나님의 사람’이란 용어는 대개 두 가지경우

에 사용되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익명(匿名)의 대상을 지

칭하는 경우(삼상 2:27; 대하 25:7). (2)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신 33:1; 왕상 17:18; 대하 8:14 등).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는 열왕기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특징을 지닌다(12:22; 20:28; 황하 1:9; 4:7; 5:8;

6:6; 8:2 등). 한편 이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하여선 유다 출신의 선지자란

사실 이외에는 달리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런데도 학자에 따라선 선지자 잇도(대하

9:29)나(Josephus, Antip, VIII) 스마야(대하 12:15)일 것으로 추정한다(Tertullian).

그러나 잇도나 스마야가 비교적 오랫동안 활약한 선지자들임에 반해 이 ‘하나님의 사

람’은 본장에 등장, 잠시 활동하다 죽고 말았으니(20-24절) 온당치 못한 주장들이다

(Lange, Pulpit Commentary).

ㅇ여호의의 말씀으로 인하여 – 공동 번역은 이를 ‘야훼의 말씀을 전할 임무를 띠고’

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인하여’에 해당하는 원어 ‘비’는 ‘안에'(in)

란 뜻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여

기서도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가

었을 때 그 말씀을 받아 대언(代言)하며 선포하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ㅇ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 이처럼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키 위해 벧엘에까지 여행하였다는 것은 유감이 아

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북왕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참선지자들이 없었

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벧엘에 살던 늙은 선지자마

저 진리를 증거하는 대신 거짓을 일삼았던 점(11-19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ㅇ여로보암이 … 분향하는지라 –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절기인 8월 15일을 맞이

하여 벧엘에서 친히 제의(祭儀)를 집전한 것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

은 12:32 주석을 참조하라.

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ㅇ예조(豫兆) – ‘예조'(모페트)는 ‘이적’ (출 4:21; 대상 16:12; 시

105:5,6)으로도 번역되긴 하나 여기서는 전조(前兆), 즉 앞일을 미리 나타내 보이는

조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이 조짐은 다만 그 앞일을 지시하는 기능으로 한정된

다. 즉 본문에서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현상(5절)은 훗날 요시야의 숙정(肅

正)을 미리 알리는 조짐으로서 기능하고있다(왕하 23:15-20). 그러므로 이는 예언자의

선포 내용에 권위를 더해 주는 부수 현상(附隧現像)일 따름이다. 즉 ‘예조’란 어디까

나 그 이적 자체의 경이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고(2절) 그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이적을 보

이신 것은, 당시 백성들의 신앙 상태가 매우 퇴락되었음을 시사하는 단적인 예이다

(출 4:21; 대상 16:12,13; 시 105:5,6). 특히 여로보암은 자신의 신체에 발생한 경고

의 이적을 직접 체험하고서도 잠깐 놀랐을 뿐(4절) 곧 완패(頑悖)한 심령으로 되돌아

갔으며, 결국에는 그의 온 집이 멸절당하는 화를 당하고 말았다(33,34절; 15:27-30).

ㅇ이는 여호와의 말씀히신 예조라 –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예조(3,5절)와 예언(2절)

의 관계에 있어 그 강조점이 역전(逆轉)된 듯한 느낌이 있다. 즉 예조 자체가 여

호와의 말씀 내용이요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동 번역은 본절을 ‘그 말이 야

훼(여호와)께 받은 것임을 보여 주는 한 표적’으로 풀이하여 그 의미 관계를 잘 보여

준다(Living Bible, this proof that his message was from the Lord).

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ㅇ여로보암 왕이 … 들을 때에 –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의 극적 구조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즉 여로보암이 자신의 정책적 성공을 도모하기 위한 종교

행사를 거행하는 중간에(1절; 12:25-33) 홀연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임했다는 점이

다. 이는 곧 훗날 벧사살 왕의 잔치 자리에 손가락이 나타나 심판의 글자를 쓴 내용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있다(단 5:1-9, 17-28). 즉 축제, 잔치 등의 요소가 심판, 파멸

과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절정의 순간에 돌연 그에 대한 심판이 들

려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돌발성(突發性)은 심판 선고가 주는 충격을

훨씬 강하게 만들고 있다. 즉 여로보암은 막 분향하던 참에 들려온 심판 선포에 소스

라쳐 놀람과 분노의 당혹한 숨결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ㅇ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 여로보암은 자신의 종교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

되어 마침내 거국적인 종교 행사를 가지게 된 마당에 갑작스런 선지자의 출현과 모

욕적 발언이 있자 극도로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손을 들어 신복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그순간 손이 말라버렸다.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

미암은 마비 현상이었던 것 같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하나님께

서는 모든 권능의 근원이 당신께 있음을 입중하였으며, 그 권능으로 말미암은 심판을

미리 경고하셨다(욥 12:13; 37:23).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수행하는 자를 늘

보호하고 계신다(시 17:8). 따라서 대적들의 어떠한 핍박도 주의 종들을 상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단 6:22; 행 16:26).

ㅇ말라 – ‘말라’에 해당하는 ‘야베쉬’는 ‘시들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이

는 식물이 수분이 없어 메마르는 모양을 가리킨다(욥 18:16; 시 102:11; 사 19:7; 렘

12:4; 겔 17:9). 그러나 이 ‘야베쉬’는 또한 ‘심판’을 의미한다. 땅이 마르고 가뭄이

드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이다(사 15:6; 19:5-7; 렘 12:4; 50:38).

5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ㅇ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 여기서 ‘재’는 희생(犧牲) 제물인 짐승을 태우고 난 뒤

남은 재를 가리킨다. 그런데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규례에 따르면 이러한 재는 제사장

이 긁어모아 제단 동편 진밖 재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가그곳에다 버리도록 되어있다

(레 1:16; 6:10,11). 그런데 본절에서 재가 제단에 쏟아졌다는것은 곧 하나님께서 여

로보암의 희생 제사를 열납치 않으셨음과 그 제사와 제단이 부정(不淨)하다는 사실

을 의미한다(Lahge,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P.204).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 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ㅇ네 하나님 여호와 –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my God)으로 부르지 아니하

고 ‘네 하나님'(your God)으로 말한 사실이 주목을 끈다. 이에 대하여선 학자들이 대

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불법한 여로보암이 감히 자기 하나님으

로 부를 엄두를 못냈다는 주장(Matthew Henry, Wordsworth). (2) 이는 다만 ‘너를 보

내신 그분께’라는 정도의 의미라는 주장 (Bahr, Hammond). 그런데 여로보암의 이후

행적과 그 심령의 완악함을 볼 때 첫번째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33,34절). 따라서 위

의 견해 중 후자의 설명이 보다 적절하다고 하겠다(Pulpit Commentary).

ㅇ은혜를 구하여 – ‘은혜를 구하여'(힐라 에트페네)는 문자대로

는 ‘얼굴을 어루만지다’는 뜻이다. 즉 이는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려고 ‘얼굴’

(프네)을 드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려 달라는 간청이

다.

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ㅇ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제의를 하

게 된 이유는 회유(懷柔)에 초점을 두고 설명되어야 한다. 즉 자신의 왕권을 수호키

위해 여호와 신앙의 규례마저 무시한 여로보암(12:27-33)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한 하나님의 능력은 가슴 섬뜩한 일이었다(3-6절). 즉 이는 그의 왕권에 대한 백

성들의 의심을 살만한 것으로서, 자칫 국내적 소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었

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의 소리가 신적 권능이 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필

요가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그를 뇌물로 회유시키려 했던 것이다(Bahr).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ㅇ왕과 …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 고대 근동 지방에 있어서 집으로의 초대와 식

사는 우호 및 친교의 표시이다(창 13:1-8; 19:1-3). 따라서 본절은 우상 숭배자들과의

여하한 교제도 나누지 않겠다는 뜻으로서,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백

성들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우

상 숭배자 혹은 불경건한 자들과는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으며(요 4:9),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교제를 금할 대상으로서 탐람하는 자, 우상 숭배자,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討索)하는 자, 분쟁을 조성하는 자 등을 꼽은 바 있다(롬 16:17; 고전 5:11; 살

후 3:6,14; 딤후 3:5; 약 4:4; 요이 10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ㅇ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명령이 내려진 까닭은

귀로의 도중에 여하한 이유로든 벧엘 사람들과 더블어 지체됨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Keil & Delitzsch).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들어간 것은 오직 경고를

발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하한 사귐이나 지연이라도 이 경고의 심각성에

있어서는 감소되기 마련이다(Matthew Henry). 그런데 이 모든 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

님의 사람이 실수한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즉 그는 벧엘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

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식사 초대에 응하고 만 것이다(18,19절). 향편 본문에서 왔

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벧엘에

들어올 때 취한 길을 나갈 때는 취하지 않는다는 뜻(10절). (2) 일단 진행한 통로를

여하한 이유로든 돌이키지 않는다는 뜻(16,17절).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ㅇ이에 다른 길로 가고 –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람이 성공적으로 자기 소임을 다하

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한편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 20km 지점으로 남왕국 유다와

의 번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12:29 주석 참조. 이로 보아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벧엘까지 온 것이 그리 먼

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사명은 홀연히 벧엘에 나타나 경고를 던지고는

지체없이 사라지는 데있었다.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ㅇ늙은 선지자 – 이 선지자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대개 부정적이

다. (1) 자신의 아들들로 하여금 여로보암이 세운 절기 행사(12:32,33)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는 점. (2) 여로보암 치하에서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를 구하는 자들'(대하 11:16)이 대거 남왕국의 예루살렘으로 남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는 벧엘에 남아 있었다는 점. (3) 받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거

짓말한 점(18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늙은 선지자는 이념적으로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

에 동의하고 있던 인물일 것이다.

ㅇ이날에 … 고한 말씀도 … 아비에게 고한지라 – 이처럼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은

아비에게 그날의 사건을 낱낱이 고하였다. 즉 하나님의 사람의 저주의 내용과 예조

(2-5절) 및 하나님의 사람이 취해야할 행동 지침(8,9절)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모

든 것을 늙은 선지자가 들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취한 다음 행동을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그는 아들들의 얘기를 듣고서는 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보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을 것이다(13,14절).

12 그 아비가 저희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ㅇ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 이러한 물음은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속박되는

금기 사항(9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미 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사람을 꾀일 요량(料量)이 서 있었던 것이다(15-19절).

13 저가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저가 타고

ㅇ나귀에 안장(鞍裝)을 지우라 – 도보로 귀로에 오른 하나님의 사람(10절)을 신속히

쫓아가 만나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늙은 선지자의 이러한 신속함과

단호함은 본문의 앞 부분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보여준 것과 비슷하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는 본문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어딘가 느슨하고 풀어진 인상을 준다(14,19

절). 한편 늙은 선지자가 이렇듯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보겠다는 열의를 보인 이유에

대하여선 다음 서너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1) 자신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은

자책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최선책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2) 자신

이 처한 답답한 상황을 호소하고,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3)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이적을 행한 선지자를 만나보고자 하는 순수한 열의에

서. 한편 ‘나귀’는 고대 근둥 지방에 있어서 보편적인 승용(乘用) 동물이었다(삿 1:

14; 10:4; 12:4; 삼상 25:20; 삼하 17:23; 왕하 4:24).

14 하나님의 사람의 뒤를 좇아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뇨 대답하되 그러하다

ㅇ상수리나무 – 원문에는 ‘하엘라’, 즉 ‘ 그 상수리나무’로 되어있다. 따

라서 이 상수리나무는 어느 특정 장소의 잘알려진 나무였거나 아니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커서 현저하게 눈에 띄는 것이었을 걸로 추측된다(Hammond). 한편 상수리나

무(oak)는 크고 단단한 재질을 가진, 높이 20-25m가량의 나무이다. 성경에서 이 나무

는 종종 ‘힘’, ‘위엄’, ‘장수’ 따위를 상징하였다.

ㅇ앉은 것을 보고 – 커다란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다리를 쉰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잘 알려진 장소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가진 사명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어딘가 석연찮다. 저주와 혐오의 장소인

벧엘에서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것 역시 그의 사명에 포함된 것이다(8,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서의 성공에 방심한 탓일까 유혹의 가능성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

다. 이것은 경고의 냉혹성을 보여 주어야 할 그의 사명에 아무래도 걸맞지 않는

것이다.

ㅇ대답하되 그러하다 –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그 솔직함과 순진함에서 늙은

예언자의 노회(老獪)함(8절)과 비교된다. 즉 그는 타인이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5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ㅇ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 이것은 가히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정면 도

전이라 할 수 있다. 즉 벧엘의 노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지켜야 할 금기에 정면으

로 위배되는 사항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피곤한 중이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앞서 보인 직절(直節)을 쉽게 포기할 리는 없다(16,17절). 따라서 늙은 선지

자는 다음 단계의 회유를 준비해야 했다.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ㅇ이곳에서 – 이로 미루어 하나님의 사람은 아직 벧엘 경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

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누구와든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한

이유는, 협오스런 금송아지 숭배가 행해지는 장소(12:32,33)에 대한 경고를 나타내기

위함이다(1-5절). 그런데 아직까지 그가 벧엘 경내를 벗어나지 않고 상수리나무 아래

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14절)은 어딘가 부주의와 방심의 인상을 준다.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이 장면에서 이미 잘못이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Bahr 등).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ㅇ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준행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첫 믿음을 지키는 문제, 거기에 따라 신앙을 흐트러뜨리는 나태

함의 유혹만큼 끈질긴 것은 없다. 본절의 선지자가 받았던 유혹, 이는 현대를 살아가

는 모든 자들이 당면한 밥(물질)의 문제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유휵을 물리친 그

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마 4:3,4) 이겨낼 수 있다.

18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ㅇ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 앞서의 정면 도전(15절)이 저항을 받자 늙은 선지자

가 취한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사람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같은 선지자의 부류에 속함을 밝힌다. 사실 누구든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경계 의식을 낮추고 동료 의식을 갖기 쉽다. 그런데 늙은 선지자의

자기 신분 표명은 무엇보다도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

다. 즉 ‘선지자'(나비)란 말에 담긴 뜻 그대로 그는 자신이 ‘대변인’,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선

그것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이었다.

ㅇ천사가…내게 이르기를 – 여기서 ‘천사'( , 말라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

언(傳言)하는 사자(使者)를 가리킨다(창 22:11,15; 31:11; 민 22:32; 삿 13:3,16등).

그런데 혹자는 천사가 통보해 주는 말씀의 권위가 개개인의 마음에 확신시켜 주는 하

나님의 주관적 말씀보다 더 높은 것일 거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람이 선뜻 벧엘 선지자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정이

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앞서 받은 계시와 벧엘 선지자의 말 간에

상충되는 내용이 있음을 깨닫고서는 심사 숙고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야 했으나 그

러하지 아니하였으니 잘못이 아닐 수 없다.

ㅇ속임이라 – ‘속임이라’에 해당하는 ‘키헤쉬’는 ‘가장하다’는 뜻이다. 그런

데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한다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 형태이다. 한편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때에도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시험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 바 있다(마 4

:1-11).

19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ㅇ이에 – 즉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하는 바람에’라는 뜻이다. 비록 하

나님의 사람이 얼른 벧엘 경내를 벗어나지 않고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휴식한 것은 실

수라 하더라도, 실상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된 주된 원인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본문은 순진 무구한 유다의 선지자와 거짓말하는 벧엘의 선지자를 뚜렷이 대비

시켜 준다.

20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ㅇ저희가 상(床) 앞에 앉았을 때에 – 본장이 전해 주는 이야기의 특징은 언제나 어

떤 사건의 진행 중에 이에 대한 부정(No!)의 말씀이 들려 온다는 점이다. 4절 주석 참

조. 본절 역시 이러한 특징을 보여 준다. 즉 벧엘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이 식사를

채 끝마치기도전(곧 금지된 교제 행위를 완료하기 전)에 이에 대한 심판의 선고가 들

려 오고 있는 것이다.

ㅇ여호와의 말씀이…선지지에게 임하니 – 본장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극

적 요소는 반전(反轉)에 있다. 즉 앞서 여로보암에게 징계를 선포했던 자(2절)가 지금

은 도리어 징계를 선포받게 된다(21,22절). 그것도 자기를 대접하겠다고 초대한 거짓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21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ㅇ외쳐 가로되 – ‘외쳐’에 해당하는 ‘카라’는 그 자체로 이미 어떠한 메시

지의 선포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메시지를 받는 자의 어떤 응답을 ‘불

러내는'(call out)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카라’는 앞서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

암에 대해 했던 행위이다(2절).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카라’를 받는다.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다음 사항을 생

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일꾼들은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히 3:14; 계 2:10).

솔로몬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는 전무 후무한 지혜를 소유하였으나 훗날 영적 방만

상태에 빠져 귀중한 은사를 간수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호된 진노를 받았다

(11:3-13). 반면에 사도 바울은 구원에의 확신 가운데서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었음

에도 불구하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좇아가노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빌 3

:13,14). (2)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게끔 하는 것은 자신의 능(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이다(고전 15:10). 따라서 주의 일꾼된 자들은 스스로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겸

허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향다. (3) 하나님의 공의는 지극히 엄정하다. 즉 하

나님한 때의 업적을 핑계삼아 방만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으시는 것이

다.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ㅇ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墓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열조의 묘실, 즉 가족의

무덤에 묻히지 못함은 곧 객사(客死)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우리말로 하면 ‘고향의

선산(先山)에 묻히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도 고향과 친척으로부

터 멀리 떨어져 객사한다는 것은 큰 비극이었다. 어쨌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금

기 사항(8,9절)을 어긴 결과 노선지자의 예언대로 객사하여 타관 사람의 묘실에 장

사되고 만다(30절).

ㅇ묘실 – ‘묘실'(케베르)은 ‘매장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우리말에서 ‘무

덤’이 ‘묻다’에서 온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묘지는 대개 천연 동굴

이나 인공 동굴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시체에 닿으면 부정하다는 믿음 때문에 뵤지

는 보통 성읍이나 마을 바깥에 위치하였다(레 21:1; 민 6:6; 19:13). 그런데 동굴을

묘지로 사용하는 관습은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정착 이후 가나안인들에게서 배운 것

이라 한다(Reed).

23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ㅇ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 한글 개역 성경의 이러한 번역은 좀 애매한 표현이

다. 만일 이 말대로 이해한다면 본절은 ‘자기(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데리고 온 선지

자(하나님의 사람)’를 가리키는 셈이 된다. 그러나 본장은 일관되게 ‘선지자’라는 용

어를 오직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만이 예외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여러학자들의 문법적 분석과 그 결론도 본절이 20,26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Bahr 등). 그렇다면 이 말은 개역 성경과는 달리 ‘그(하나님의 사

람)를 데려온 선지자(벧엘의 늙은 선지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ㅇ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지금까지 줄곧 도보로 다

녔었다(1,10절). 그런 그에게 이제 나귀 한 마리가 주어졌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

를 지닌다. (1) 이유야 여하튼, 앞서 왕의 선물을 거절한 그가 벧엘에서 결국 선물 하

나를 받은 셈이다(7절). (2)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귀를 내준 것

은 친절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자기로 인해 지체된 데 대한 보상 행위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행위에는 시간의 지연으로 인해 생긴 저주(22절)를 시간의 단축으로 해독

(解毒)해 보려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추측컨대 이러한 인위적인 제재(除災) 경향은

이 노(老) 종교가의 특징인 것 같다.

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ㅇ사자 – 사자는 성경 시대의 팔레스틴에 흔한 맹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벧엘의 산

간 지대와 요단 계곡의 숲은 사자의 서식처 였다(왕하 2:24; 렘 49:19; 슥 11:3). 하

지만 이처럼 번성했던 사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13세기경 므깃도(Megiddo)

부근의 레드자(Ledja)에서 죽임당한 후 팔레스틴에서는 멸종하고 말았다.

ㅇ만나 – ‘만나’에 해당하는 ‘마차’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이는 ‘우연히

맞닥뜨리다’보다는 좀더 능동적으로 ‘구하다가 마침내 따라잡다’ 또는 ‘찾다가 끝내

발견하다’는 의미를 지닌다(신 4:29; 잠 1:28; 사 55:6; 렘 29:13 등). 14,28절에서의

늙은 선지자의 행동이 바로 이 ‘찾아가 발견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의 사자 역시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가’ 덮친 것이다.

ㅇ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성은 본

장면이 지닌 예외성(例外性)에서 드러난다. 보통, 사자라는 맹수는 주리지 않는 한 함

부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드문 동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한 사자는 그

를 죽여만 놓고 그 시체를 먹거나 어디로 물어가지 않았다. 더구나 희한한 것은 나귀

조차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사자 역시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는 점

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러한 요소들이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적 목적에 생각이 미치

게끔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 p. 205).

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와서 말한지라

ㅇ지나가는 사람들이…보고 – 이스라엘의 행인들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유다 선지자의 시체와 그 특이한 죽음 현장을 목격하고서, 늙은 선지자의 성읍에서 뿐

만 아니라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것을 화제 거리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

나님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된 원인을 알고 그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왜

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벧엘인과 더불어 음식을 저버리고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는 자신들에게 임할 징벌은 실로 엄청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찢어 죽였도다 하고

ㅇ선지자가 듣고 – 행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벤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21,22절)이

실현된 데 대한 경의감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한 동정심과 죄책감 등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부랴부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는 그 일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

듯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선포된 말씀 또한 그대로 성취되리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

었을 것이다(32절).

ㅇ어긴 – ‘어긴'(마라)은 ‘쓰게 하다’, ‘반역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곧

불순종과 배반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정을 쓰리게 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동사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귀환 도중에 겪은 불행(24절)을 확연히 조명해 주는 의미 해석이 들

어 있다. 즉 그는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같은 불행을 만난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0,21절 주석을 참조하라.

불이시매 – ‘붙이시매'(나탄)는 ‘위임하다’, ‘허락하다’는 뜻이다. 곧 하나

님께서 자신의 주권적 목적을 위해서 어떤 대리물의 행동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이러

한 동사 사용에서 사자 습격 사건(24,25절)을 바라보는 늙은 선지자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시각이다.

27 이에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저희가

안장을 지우매

ㅇ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 이는 13절과 동일한 표현이며 동일한 신속함이다. 그러나

이제 늙은 선지자의 내심은 그때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즉 앞서와는 달리 이제 그

는 전체사건에 일정하게 작용하는 한 의지(意志)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

시 말해 노련한 종교가로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술수로서는 도저히 가리울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벧엘

제단의 어용 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벧엘 제단에 대하여 절대적인

부정(absolutey No!)의 선고(1-5절)를 내리셨다는 것이다. 한편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발람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Montgomery, 민 22:1-24:25).

28 저가 가서 본즉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섰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ㅇ시체(屍體) – ‘시체'(네벧라)는 ‘시들다'(나벧)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이 동사에는 시들은 잎사귀나 말라버린 초목의 이미지가 실려 있다. 이처

럼 생명의 시듦이나 말라버림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하는데 사용되거니와 그 자체로

도 하나님의 심판이다. 4절 주석 참조.

ㅇ길에 버린 바 되었고 – 여타 민족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시체가 제대로 매장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은 큰 수치의 표시이다(삼하 2:10이하; 삼상

31:11-13 등). 그리고 이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신 28:62;

렘 7:23; 26:23; 사 5:25).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이 길에 널브러져 있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심판받은 시체가 벧엘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 성읍에 수치와 부정(不淨)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하다(신 21

: 1-9). 한편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해진 이러한 징벌은 일견 너무 가혹한 처사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은 개별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벧엘 제단에 대한 하나님의 극한 분

노와 혐오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1-5절).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혐오에 비추

어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저지른 실수는 결코 경미(輕微)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비록 동정의 여지는 있지만, 그가 벧엘로 되돌아와 식사를 함께 한 것

(15-19절)은 그 성읍에 내린 경고의 엄중함을 격감시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는 그의 시체가 벧엘에 버리우는 죽임을 당하게 하셔서라도 경고의 준엄함을 손상받

지 않게 하신 것이다.

ㅇ나귀와 사자는…찢지도 아니하였더라 – 나귀와 사자가 이때까지 기인한 연출을 계

속하고 있었던 까닭이 분명해진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이를 보전(保全)해 줄 인물의 도착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벧엘의 노선

지자가 도착하자 이것으로 그 동물들의 소임은 끝난 것이다. 24절 주석 참조.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ㅇ떠들어 – ‘떠들어'(나사)는 ‘들다’, ‘메다’는 뜻이다. 즉 늙은 선지자는

시신을 들쳐 메어 나귀에 실은 것이다.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연로한

선지자가 손수 치루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사죄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반영한다. 26절 주석 참조.

ㅇ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 늙은 선지자가 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벧엘로 들였

는지 까닭이 분명치 않다. 가장 가능성있는 추측은 하나님의 사람의 묘를 벧엘에 둠으

로써 그 성읍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와 교훈의 표시로 남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벧엘의 노(老) 종교가는 회오(悔悟)를 통해 전체 사건의 의미를 깊이 자각했을 뿐

만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선 하나님편에 선 적극적인 봉사를 한 셈이다.

30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ㅇ그 시체를…나의 형제여 하니라 – 본절에는 세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 즉 (1)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늙은 선지자 자신의 묘에 장사한 것, (2) 애곡, (3) ‘오호라

나의 형제여’라는 호칭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일단 히브리인들의 장례식에 관습적으

로 따르는 요소로서 볼 수 있다(렘 22:18). 그러나 관습적이라 해서 이 일을 무덤덤히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혹자는 시신을 남의 땅, 남의 무덤에 묻은 것은

잔인한 처사라고 주장한다(Hall). 그러나 실상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을 자기 무덤에

안장한 늙은 선지자의 행동은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시이다

(Hammond, 창 23:6; 룻 1:17). 그러기에 신약에서 아리 마대 사람 요셉도 예수님을 자

신의 묘에 장사했다(마 27:57-60).

ㅇ오호라 나의 형제여 – 히브리인들의 장례 절차에 있어서도 애곡(哀哭)은 필수요소

이다. 그런데 이때 애곡할 의무가 있는자는 가까운 친척들이었으며(창 23:2; 삼하

11:26), 여기에 구경꾼들이 가담하여 같이 울거나(삼상 25:1; 삼하 1:11) 직업적으로

만가를 부르며 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대하 35:25; 렘 9:16-19; 암 5:16). 한편

벧엘 선지자는 사자(死者)에 대한 깊은 조의(弔意)의 표시로서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

을 포함하여 모을 수 있는 인원을 총동원하여 애곡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KJV, RSV,

그리고 NIV는 본절의 ‘슬피울며’를 ‘그들이 애곡하여'(they mourned)로 번역하였던 것

이다.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ㅇ내가 죽거든…장사하되 – 앞절과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

람을 ‘친척’으로 예우하여 장례지낸 것이라 한다(Bahr). 그러나 본절은 친척 이상의

무엇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늙은 선지자의 유언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과 한 묘실에

‘합장'(合葬)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부부 사이에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창조 25:7-10).

ㅇ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 이 역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 표시’

에 다름 아니다(Bahr 등). 그리고 이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참선지자임을 벧

엘 선지자가 시인하고 또 이념적 동의를 표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 유언 덕분에 결

과적으로 훗날 벧엘 선지자 자신의 주검도 안전하게 보존 되었다. 즉 약 300년 후 요

시야 왕이 우상 숭배자들의 뼈들을 거두어 불사를 때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묘실은 손

대지 않았던 것이다(왕하 23:16-18). 이와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이러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유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벧엘 선지자가 하나

님의 사람의 예언이 필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음을 볼 때 이는 전혀 타당성 없는 주장

만은 아니다(32절).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ㅇ성읍 – ‘사마리아’란 지명은 여로보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

다. 이는 그때로부터 약 50년 뒤에 새로 생긴 지명이다. 즉 오므리가 사마리아 산을

사성읍을 건축한 후 그곳을 북왕국의 수도로 결정하면서 새로 정한 명칭인 것이다

(16:24). 따라서 이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정확한 말로 보기 어려우며,

후대 기록자가 자기당대의 용어를 구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Keil, H.J. Austel, R.D.

Patterson). 즉 본절에서 열왕기 기자는 벧엘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 말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 기록 당시의 언어로 표현하였다 하겠다. 다시말해

사마리아는 오므리 왕 이후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으므로 사마리아에 대한 경고는 곧

북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경고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 – 2절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은 본

절에서 그 대상 범위가 좀더 넓게 잡혀있다. 이러한 증폭은 후대의 상황이 반영, 첨

가된 것이다. 즉 2절은 막연하게 어떠한 산당을 말하고 있으나 본절은 ‘사마리아 성읍

들의 모든 산당’으로 명료하게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

의적(自意的) 첨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후대의 상황이 적용된 기록임은 분명

하다.

33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ㅇ이 일 후에도…돌이키지 아니하고 – 본장에서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는 결국 본

장 전체의 구도상 여로보암의 완악함을 가일층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즉 그렇게

엄중한 경고를 받고도 여로보암은 타락과 배교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편 분열 왕국 시대의 첫부분에 해당하는 본장이 이처럼 여로보암의 완악성을 강조하

는 이유가 있다. 즉 분열 왕국 시대의 남왕국 유다에는 그래도 비교적 하나님을 경외

하는 왕들이 나타나곤 했다. 본서 서론 도표, ‘남왕국 유다의 열왕들’ 참조. 그리고

이러한 왕들이 등장할 때마다 여호와 신앙은 주기적으로 부흥했다(Schultz). 그러기에

열강의 틈새에서도 남왕국의 존속 연한은 북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길었다(북왕국

멸망은 B.C. 722년, 남왕국 멸망은 B.C. 568년).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결국 남북 왕

국 각각의 신앙 상태와 결부된다. 즉 비록 전체적으로 쇠락해가는 진행 방향이긴 했어

도 남왕국의 역사는 간간(間間)이 부흥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의

배후에는 다윗이라는 이상적 군왕이 서 있었던 것이다(11:9-13; 삼하 7:8-16). 하지만

이에 반해 북왕국의 왕들은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몰두함으로서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모면치 못한다. 그런데 여로보암이야말로 북왕국에 이러한 우상 숭배의 풍조를 뿌

리내린 장본인이다. 말하자면 후대의 왕들은 그가 조성한 토양에서 그의 선례를 본받

아 우상숭배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 사가(史家)들의 신앙적 관점에서 북왕

국 우상 숭배의 원인균(原因菌)인 여로보암의 완악함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특히 본절의 ‘이 일 후에도…’ 부분은 바로 그러한 초점이 모아진 곳이다.

보통 백성 – 비단 레위 지파 출신 뿐 아니라 일반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3 주석을 참조하라.

ㅇ삼았으므로 – ‘삼았으므로’에 해당하는 ‘밀레에트 야도’는

문자대로는 ‘손을 채우다’이다. 이 말은 제사장직 수여를 의미하는 전문 용어이다

(Keil). 한편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출 28:1-4)를 무시한 여로보

암의 이러한 정책은 북왕국 내에 진정한 여호와 종교가 발붙일 여유를 없애려는 것이

었다. 그러기에 신앙의 자유와 참예배를 갈구하는 자들은 부득이 유다를 이주하지 않

을 수 없었다(대하 11:13-17). 12:31 주석 참조.

34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ㅇ이 일이…죄가 되어 – ‘이 일’이란 앞에서 언급된 여로보암의 모든 죄악된 행위를

총칭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즉 이는 (1) 금송아지 숭배(12:28,29) (2)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음(12:31; 13:33) (3)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함(12:32,33)등을

의미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그러한 소행을 계속했다는

것이 본절에서 지적하는 요점이다.

ㅇ멸망케 되니라 – ‘멸망케 되니라'(솨마드)는 ‘끝내다’, ‘완전히 잡아 꺾

다’는 뜻이다. 이 말은 완전히 멸망되어 자취도 남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실제로 훗

날 여로보암 왕조는 2대로 그치고 멸절되고 만다. 즉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즉위 2

년만에 살해당하면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것이다(15:25-30).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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