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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 성경 | [성경이야기] 최고의 하나님 09 | 야곱의 축복 267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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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창 27:1-40) < 성구 명상 < 성경 < 신학과 신앙 ...

야곱 개인이 아니라 미래의 후손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 여러 번에 걸쳐 이 점을 분명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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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jlogos.org

Date Published: 12/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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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9장, 야곱의 축복2-담장을 넘은 요셉의 복 – 다음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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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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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 – 너는 담장 넘어로 뻗은 나무(창49:22)의 의미와 …

실제로 번역은 조금 더 세분화하면 3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크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봅니다. ​. 1) 요셉은 들나귀다(들망아지). 먼저 개역성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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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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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

하지만 성경에서 야곱이 축복을 받는 과정은 한마디로 야비함 그 자체이다. 형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서 아버지까지 속여서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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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 창 49:22-26절 – 주일 말씀 및 설교 영상

그렇다면 야곱이 자신의 선조보다 더 우월한 복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인가를 성경을 통하여 확인해야 합니다. 거부 혹은 매우 풍부함이라는 단어를 찾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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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야곱의 축복받는 요셉(7) – 한국기독신문

야곱의 요셉에 대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복을 포함하고 있는 축복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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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 설교 – [20181231] 야곱의 축복 (창 35:9-15)

여러분은 성경의 여러 인물 가운데 누가 가장 복된 인물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야곱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만큼 자기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 이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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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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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8장 야곱의 축복 – Fruitfulife

창세기 48장 야곱의 축복 : 은 야곱이 병에 걸려 죽을 때가 가까웠을 때 요셉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한 축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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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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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구 목사】 야곱의 축복(창25:26-29) – 본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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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야기] 최고의 하나님 09 | 야곱의 축복
[성경이야기] 최고의 하나님 09 | 야곱의 축복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야곱의 축복 성경

  • Author: 한성차세대_하키우키 TV
  • Views: 조회수 471회
  • Likes: 좋아요 10개
  • Date Published: 2021. 7.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kHRLVPqYeM

야곱의 축복(창 27:1-40)

복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이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는 신명기 28:6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누가복음 6:28인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더하면 복으로 시작해 복으로 끝나는 기독교가 되고 맙니다.

창세기 27:1-40 또한 축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에는 리브가에게 초점을 맞추고 야곱이 어떻게 장자 축복을 받아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야곱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가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과 그의 내면의 움직임을 살펴보겠습니다.

형의 옷을 걸친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어머니 리브가가 요리한 염소고기를 들고 아버지 앞에 섭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가문의 영적 축복을 청하려고 아버지 앞에 선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이 간절히 받고 싶어 했던 축복입니다. 에서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채 늘 갈급했던 세계입니다. 야곱이 갈급했던 대상 앞에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릅니다.

“내 아버지여!”는 야곱이 한 말 중에서 거짓말이 아닌 유일한 말입니다. 이어진 말들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이삭이 그에게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신분을 에서로 둔갑시키고, 염소고기를 사냥 고기로 둔갑시켜 축복을 청한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20)라고 두 번째로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가면서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쉽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야곱은 목적 달성을 위해 십계명 중 제3계명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를 어긴 첫 번째 성경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을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하나님’입니다. 이는 야곱이 아직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만나지 못했음을 드러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삭은 자기 앞에 있는 아들의 목소리가 에서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자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21)라고 말합니다. 그는 야곱의 손을 만져보고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22)라고 중얼거립니다. 야곱의 매끈한 손과 목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감아 놓은 어머니의 위장술 덕으로 에서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이삭은 의심스러워서 한 번 더 묻습니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24) 이렇게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질문 앞에서 야곱은 흔들리지 않고 “그러하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거짓말하는 야곱의 속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의심하는 아버지 앞에서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하늘이 벼락을 내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느릿느릿 음식을 먹는 아버지를 보면서 야곱의 마음은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에서가 들이닥치면 어떻게 하나 연신 장막 입구를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거의 발각당할 뻔했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고 이삭 앞에서 물러나자마자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던 것입니다(30).

눈먼 이삭은 야곱을 에서라고 믿고 축복을 베풉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9).

야곱은 아버지에게서 가슴 벅찬 축복을 받아냅니다. 다산과 부 그리고 성공과 권한에 대한 약속을 부여받습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움켜쥔 자’라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장자의 유업을 움켜쥔 것입니다. 이 축복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3대 족장 이름에 에서가 아닌 야곱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성경은 얼마나 자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지 모릅니다.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야곱의 이름이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마 1:2)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야곱에게 준 축복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의 입장에선 야곱이 아니라 맏아들 에서를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사냥꾼을 축복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한다는 내용은 농부를 향한 축복입니다. 에서는 들판을 뛰어다니는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천막에 머무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부지불식간에 야곱을 축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들려 주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기가 저지른 범죄의 대가로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를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권한을 빼앗았다는 죄의식 속에서 20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야곱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복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속임수를 써서 축복을 받아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릇된 방법을 취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닙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문제 있는 가정, 분열된 가정, 달리 말해 비신앙적인 가정에도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건강하고 조화를 이룬 가정이 아닙니다. 야곱과 에서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싸웠고, 이삭과 리브가는 편애하는 자식을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입니다.

속임수는 야곱 집안을 늘 따라다니던 죄였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어떻게 남을 속이는지 보고 자랐습니다. 야곱이 청년으로 성장할 즈음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 가족 모두가 블레셋 지방으로 이주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야곱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가리켜 자기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창 26:1-11). 알고 보면 이삭의 뻔뻔한 행위는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역시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갔을 때 아내인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사라에게도 자기를 위해 그렇게 해달라고 강요하였습니다(12:1-10). 그런 잘못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똑같은 잘못을 아비멜렉을 만났을 때 반복했습니다.

야곱의 어머니도 만만치 않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반은 자신의 딸 라헬에 대한 조카 야곱의 사랑을 이용하여 14년 동안이나 노동 착취를 했습니다. 더구나 조카인 야곱에게 둘째 딸 라헬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막상 결혼 당일에는 첫째 딸 레아를 들여보냈습니다(창 29:21-28).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리브가가 남편을 속이는 행위는 야곱의 집안에 계속 따라다니던 죄의 모습입니다. 그 죄악은 야곱의 자식들에게도 전달됩니다. 야곱의 아들 열 명은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먹은 뒤 짐승이 동생을 잡아먹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37:25-35). 뿐만 아니라 이들은 여동생이 강간당했을 때,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 디나와 세겜 왕자의 결혼을 승낙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움직이지 못하자 그 틈을 이용해 칼을 들고 달려가 모조리 찔러 죽였습니다(34:1-29).

이런 집안에서 유독 정직한 사람이 에서입니다. 성경 본문 어디에도 에서가 거짓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축복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진실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야곱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축복은 현세적인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축복은 현세적 축복과는 거리가 먼 영적 축복이었습니다. 이 점은 에서와 야곱의 인생을 비교해 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축복을 받지 못했지만, 물질적으로 비참하게 살았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는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야곱보다 더 많은 세상을 얻었습니다. 400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휘하에 있었고, 에돔이라는 부족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서 축복을 받아냈지만 고통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축복의 내용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보수로 착취당했고, 귀향길에 만난, 하나님으로 밝혀진 남자와의 씨름에서 환도뼈가 부러져 평생 장애를 지녀야 했으며,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귀향길에 잃고 그 시신을 길목에 묻어야 했습니다. 또 난폭하고 무분별한 자식들로 인해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자식들이 세겜 남자들을 대량 학살하는 바람에 주변 가나안 족속들의 복수를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장남 르우벤이 그의 첩이었던 실바를 건드리는 불륜을 저질렀는가 하면, 10명의 아들들이 작당을 해서 그의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을 죽이려 하다가 상인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년기에는 혹독한 흉년으로 인해 어린 손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했으며, 또 다시 정든 고향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바로에게 그가 하던 말 그대로 모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축복의 면류관을 받았지만 그것은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었습니다.

야곱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된 것은 그가 받은 축복이 남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 개인이 아니라 미래의 후손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서 여러 번에 걸쳐 이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야곱이 받은 복은 남을 위한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업의 올바른 도구가 되기 위해 야곱은 일련의 시험들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사 55:13). 우리 인생에 놓인 갖가지 상처와 아픔 그리고 장애물들이 바뀌어 풍성한 열매가 된다는 신비한 약속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일 것입니다. ‘고난이 축복’, ‘고난 받는 것이 은혜’라는 믿음의 고백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의 고백일 것입니다.

거짓으로 점철된 야곱과 그의 가족의 모습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하찮게 보시지 않고, 깎고 가다듬어 세상을 위한 축복의 도구로 만드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우리 인생에 닥친 고난을 통해 드러납니다.

창세기 49장 22~26절, 담장을 넘은 요셉의 복

<본문 요약>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의 출발이 되는 열두 아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창49″1~27). 축복 받은 아들과 책망 받은 아들이 나눠지지만, 책망의 형태를 띤 축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창49:28).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 명하기를 그치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창49:29~33).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창49:22)

샘 곁의 무성한 가지를 떠올릴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연관 지을 수 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3)

샘 곁에 자란 나무의 특징은 잔가지가 많아 담을 넘을 정도로 풍성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버전은 이 구절에 대해, “…샘 옆의 나무가 많은 가지인데 그것의 작은 가지들이 담을 넘는 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곧 잔가지처럼 자손이 번성할 것이며 샘 곁에 자라는 가지처럼 세상의 경제와 문화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향력이란 먼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담장을 넘을 수 없습니다.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어 세상의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난을 통하여 깨어지고 다듬어 져서 새롭게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거저 얻는 축복 없고 거저 주는 축복도 없습니다. 축복을 줄 수 있을 만큼 준비된 사람이 축복을 흘려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활 쏘는 자가 학대하며 쏠지라도>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창49:23~24)

활 쏘는 자가 학대한 것 처럼 요셉의 인생은 고난이 연속이었습니다.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가운데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실직적 13년의 고난의 시간 동안 아픔을 참으며 인내해야 했지만, 한번도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 더욱 의지하였습니다. 이렇게 준비되어진 요셉은 마치 활 쏘는 자가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쏠 지라도 더욱 굳세고 강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항상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 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 이라…” (창49:25)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모든 것,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우심을 힘입는다면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요셉의 인생에 한결같이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그를 도우셨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도우셨고, 총리가 된 후에도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도우시는 삶은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 축복의 삶이 됩니다. 그 이유는 그 상황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도우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삶을 견고히 지탱해 주기 때문입니다.

<마르지 않는 샘의 축복>

위로 하늘의 복 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 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창49:25)

“위로 하늘의 복”처럼 풍성한 비가 땅을 적시고 “아래로 깊은 샘의 복”처럼 깊은 우물을 가득 채웁니다. 곧 마르지 않는 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내팽겨 치고 세상을 쫒지 마십시오. 직장이나 사업, 자녀의 학업이나 성공을 위해 달려가지 마십시오. 마르지 않는 샘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말씀 밖에 없는데, 세상의 말라 비틀어지는 잠깐의 소욕을 따라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가장 깊고 오묘한 주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깊히 묵상하고 따라가는 것 만큼 깊고 달콤한 것은 없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처에서, 가정과 자녀에게, 어떤 장소에서도 깊은 주의 말씀 가운데 지팡이를 삼을 수 있다면 이것이 진정한 요셉이 받은 축복이 될 것입니다.

요셉이 받은 축복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진정한 영향력이었습니다. 담장 넘어 뻗은 가지가 풍성하여 지듯 자신 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축복을 물려 주었고, 활 쏘는 자가 공격하듯 억울함과 모함을 받는 고난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좋은 위치에 올라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깨어지고 부서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고난은 나를 변화 시켜 축복을 흘려 보낼 수 있는 준비된 사람으로 이끌 것입니다. 요셉이 받은 담장을 넘는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삶에 가득 넘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샬롬샬롬.

– 카페지기 조혈래 선교사 http://cafe.daum.net/moigi –

출처 : 두손♥모아

글쓴이 : 한결같은 원글보기 : 한결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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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 – 너는 담장 넘어로 뻗은 나무(창49:22)의 의미와 번역에 대한 문제

실제로 번역은 조금 더 세분화하면 3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크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봅니다.

1) 요셉은 들나귀다(들망아지).

먼저 개역성경처럼, 무성한 ‘가지’라고 하지 않고, 망아지라고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먼저 문맥상으로 볼 때, 49장 전체에 나타나는 야곱의 축복에 대해서, 앞 절까지는 지파들을 모두 ‘동물’에 비유했는데, 여기서 요셉에 대해서만 동물이 아닌 ‘식물’로 비유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아보입니다. 그리고 본래 ‘아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벤>이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 ‘가지’ 라는 말을 뜻하는 경우가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요셉을 무성한 ‘가지’로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후문맥인 23절에서는 대적자들이 활을 쏘면서 공격하는데, 나뭇가지를 향해 활을 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고로 ‘가지’라는 말이 쉽게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번역이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무성한” 을 뜻하는 낱말은 <포라트>인데, 이 포라트는 <파라 פָּרָה>의 분사형으로서, 열매를 맺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포라트>를 <파라>의 분사형으로 보지 않고, <페레>의 여성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פרה 가 아니라 פרא로 보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파라의 분사형 포라트가 아니라 페레의 분사형 포라트로 봅니다)

<페레>는 열매맺다가 아니라,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마엘을 상징했던 “들나귀”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한글 새번역은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들나귀새끼”, 즉 “들망아지”로 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는데,

<파라>를 ‘열매를 맺다’ 라는 동사로 보지 않고, ‘숫소’를 의미하는 명사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뜻이 됩니다.

‘요셉은 수송아지이다. 샘 곁의 수송아지이다.’

구약학자 왈튼은 이렇게 송아지로 번역하는데, 그는 후반절에 나타나는 “담”(wall)도 ‘담’을 의미하는 <슈르>로 읽지 않고, 황소를 의미하는 <쇼르>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담을 넘어온다고 번역하지 않고, “황소에게 간다” 라고 번역합니다.

요약하면,

‘요셉은 수송아지이다. 샘 곁의 수송아지이다. 송아지들이 황소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뜻이 됩니다.

야곱의 축복

‘야곱의 축복’이라는 CCM이 있다. 내용은 아주 긍정적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야곱이 축복을 받는 과정은 한마디로 야비함 그 자체이다. 형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서 아버지까지 속여서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은 일면 에서가 그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탓이기도 하니 공과를 따지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그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또 다른 신을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렴을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는다는 것은 고상하게 보이지만 결국 육신의 형편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처한 위치가 반대이긴 하지만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돈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하는 것이나, 부자가 되는 것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나 돈이 척도인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또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목회자(도무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도 마찬가지다. 그 가르침이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 같은 것에 관한 것이라면 같은 궤도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수도하는 것에 있어서 돈이나 욕심을 절제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역시 같은 것이다. 모든 기준이 다 보이는 것을 본질로 하는 안목과 가치관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지 않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하는 이와, 그것이 많아지면 축복이라 여기는 이들 간의 어리석은 의견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한 축복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기 원한다.>는 것과 <만민이 너를 섬기며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잘 보면 보는 관점에 따라 부자가 되게 하시고, 또 큰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보일 수도 있다. 당시는 농경 및 유목 시대니 곡식과 포도가 잘 되는 것이 그렇고, 모든 사람이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야곱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양과 소가 많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에서가 더 부요했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서 수고하여 얻은 것도 형에게 다 보내기도 했고, 또 곡식이 풍성하길 바란 축복을 받은 이가 말년에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고 그 아들의 은혜를 입긴 했지만 애굽 왕에게 경배하고 애굽에 빌붙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 한 마디로 이삭이 한 축복, 형에게 목숨을 빼앗길 위험을 무릅쓰고 받은 축복은 어디로 갔는지, 정말 그 축복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곡식과 포도주>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성찬이다. 곡식은 떡이고요 빵이며, 포도주 역시 성찬의 그 포도주기 때문이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의 소산인 곡식과 포도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내어 놓는 곡식과 포도주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야곱의 축복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풍성함 그것이 바로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인 것이다. 곡식과 포도주가 그렇다면 모든 만민이 야곱을 섬길 것이라는 것 역시 이 땅의 사람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돈과 명예와 같은 것에 관함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하여 모든 사람이 야곱을 섬길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곱은 그 축복,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축복을 받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축복을 받기 위하여 자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하여 자신이 감당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행한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든 야비함에 대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가 그에게 가하는 모든 일을 다 감당했다는 것이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14년간 고생한 것도 그렇고, 이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형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추구함에 따르는 희생에 대하여 감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을 따지는 이들에게 ‘신앙 없다.’고 심판하고, 외면하고 가족이라도 등지는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모습은 적어도 야곱의 축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축복’이라는 CCM을 부르는 그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야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야비하고 형을 속였던 모든 것에 대하여 그 삶으로 감당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하나 밖에 없는 육신을 신앙생활에, 교회 생활에 투자함으로 생기는 육신의 삶의 부담은 외면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권 당첨시켜주듯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젊은 날 어떤 학생 하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정말로 수고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착했지만 신앙적으로 야곱과 같은 야비함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의 신앙관은 남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거저 얹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는 식에 가까웠다. 그런 그의 모습을 모든 교인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찬양하기만 했다. 신앙이란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거저먹는 것과 같은 것에 있어서 그에 합당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야곱의 모습인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 그것을 외면하고 자신의 그런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모습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감동을 얻지 못하는 본 모습이다

야곱의 축복은 기본적으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풍성해지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풍성해 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표현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있어서 장자(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명분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이시기 위하여 그 육신을 십자가에 허락하심과 같이 야곱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보이신 하나님의 의에 축복을 받기 위하여 자신이 취한 모든 것에 관하여 자신의 육신의 수고를 감당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실 때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하신 말로 죽으심을 감당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야곱을 축복을 찬양하고 그것을 자신의 축복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시험을 이기심과 같이 야곱의 축복이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함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한 야곱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자신이 취한 모든 일에 대하여 값을 요구하는 세상의 모든 요구에 자신이 가진 눈에 보이는 것, 곧 육신의 삶으로 그것을 감당해 내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고 그것이 야곱의 축복이다. 육신은 그러라고 주신 것이다.

야곱의 축복 창 49:22-26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의 축복으로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26절 말씀입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 오리로다 이 구절에서 ‘이 축복이’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축복은 야곱이 요셉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복인데 이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복이 자신의 부여조 즉 조상들 보다 나아서라고 하는데 나아서라는 말은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야곱이 받은 축복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받은 복보다 더 우월한 것인가 하는 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볼 때 25절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봅니다. 하늘의 복들과 아래로 깊은 샘물의 복들 젖먹이는 복들과 짐승의 태의 복들 즉 세상적이며 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자신의 선조보다 더 우월한 복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인가를 성경을 통하여 확인해야 합니다. 거부 혹은 매우 풍부함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창 13:2절에 아브람의 경우에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 매오드라는 부사가 나오는데 대단히 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대단히 부유했던 사람입니다. 이삭의 경우 창 26:13절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여기서는 이삭의 경우에는 아브라함 보다 더합니다.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도 히브리어 매오드 라는 대단히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야곱의 경우를 찾아 보았습니다. 야곱의 경우에 거부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창 31:1절로 여기서 거부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증명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라반의 아들들의 시기 섞인 표현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원문의 의미는 이같이 풍부해 졌다는 의미이지 거부라는 의미가 압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물질적 부유함이나 세상적 부유함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비교가 못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복들을 물질적이나 세상적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나 하나님에 대한 앎,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과 깊은 관계입니다. 이것 만큼은 아무도 야곱을 따라 올 수가 없습니다. 그의 험악한 인생을 통하여 그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에 찾아오시며 간섭하시며 만들어 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사는 줄 알고 살아왔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능력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헛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인생의 고비하마 만난 하나님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만이 인생의 주인이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 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복들이 나의 조상들의 복들 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 이 의미입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24절과 25절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하나님을 이렇게 수많은 수식어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야곱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요셉아 너는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석이시란다. 그분은 목자처럼 자신의 양들을 돌보시는 세밀한 분이란다. 너를 도우시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 때문에 너는 힘을 잃지 않을 것이야 야곱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그분을 경험한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전능자 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각기 다른 단어입니다. 전능자의 손에서 전능자는 ‘아비르’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능력이라는 뜻으로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입니다. 뒤의 전능자로 말미암나니에서 전능자는 샤다이 입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어휘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그가 경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이 풍성한 이름과 그분의 사역에 대하여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복들입니다. 복이라고 하면 물질적인 것이나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주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깨달음 그분에 대한 이해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수 많은 복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며 가장 귀하며 가장 소중하며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얼마나 더 하나님을 깊이 아는가 하는 싸움이며 그것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렇기에 매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인물탐구] 야곱의 축복받는 요셉(7)

야곱은 애굽에 내려가 여생의 마지막을 보내다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마지막으로 그 아들들을 불러 모이게 하고 그들 각자의 미래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요셉에 대하여는 축복의 예언을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이며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예언했는데, 이는 요셉에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나옴을 의미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이스라엘 열두지파 중에서도 리더십을 지닌 지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활 쏘는 자가 요셉을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요셉이 어려운 위기에 처했으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그 자손을 도우실 것이요, 복을 주시되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 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 임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야곱의 요셉에 대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복을 포함하고 있는 축복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 언약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에게 임한 임마누엘의 축복으로서 모든 성도가 추구하여야 할 궁극적인 축복의 내용입니다.

요셉은 그 신앙과 인격에 있어서 흠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외에 요셉과 같이 완벽한 인격과 신앙의 소유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신앙과 성품은 모든 성도의 본보기가 됩니다.

요셉은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만나게 되었을 때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었습니다. 이와 같이 눈물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순수함을 나타냅니다. 요셉의 순수한 마음은 그의 소년기의 행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요셉은 순수하였기에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아뢰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온다는 계산을 했다면 그는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의와 불의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보여주신 계시를 형제들에게 고함으로써 시기와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계시의 내용이 형들보다 자신이 높아져서 형들이 자신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와 같은 계시를 발설하여 어려움을 자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요셉은 계시의 내용을 형들에게 말하여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기까지의 미움을 샀습니다. 요셉은 오랜 기간 동안 인생 풍파를 많이 겪었음에도 그와 같은 순수한마음을 잃지 아니하고 동생을 보았을 때 울음을 참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수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순수하고 풍성한 감정으로 신앙을 표현하게 됩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은 풍부한 감정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많은 시를 지어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최성구 목사】 야곱의 축복(창25:26-29)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그의 행위를 따라 받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아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복을 받으려면 복을 받을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가정에서 일어난 작은 일이 사회와 그 나라와 세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본문에 에서와 야곱이 한 가정에서 어떻게 자라났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리브가가 결혼한 지 20년 만에 낳은 아이들은 쌍둥이였습니다. 쌍둥이 중에 먼저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에서이고 나중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야곱이라 지었습니다.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는 먼저 태어난 아이가 그 피부 빛이 붉고 또 털이 많아서였습니다. 이후 그 아이는 태어날 때처럼, 그리고 이름처럼 거칠고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있어서 ‘발꿈치를 붙잡은 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이름을 가진 야곱 역시 태어날 때처럼, 그 이름처럼 남을 이용하는 사람,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라도 똑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에서와 야곱이 어떻게 자라났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음으로 장막에 거주하니.”라 하여 <표준새번역성경>은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서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 되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다”고 번역 했습니다. 즉 에서는 사냥에 능숙한 사람으로 주로 야외에서 생활하는 활동적인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에서는 남자답고 활달하며 영웅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 모험심이 강하한 성향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내성적이며 소심하며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에서는 남자다운 사람이고 야곱은 여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배에서 한 날에 태어난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은 서로가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고 나옵니다. 아버지인 이삭은 다소 여성적이고 소심한 야곱보다는 씩씩하고 활동적일 뿐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냥해 오는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개성이 뚜렷한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들은 그 부모의 편애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는데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말하기를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이 죽과 함께 일어난 일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를 뒤바꾸어버리는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성경학자 카일과 델리치에 의하면 장자권은 네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장자는 유산 상속에 있어서 동생보다 배를 더 받도록 하나님의 법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신21:16,17절에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자기의 소유에서 장자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장자는 모든 형제와 부족을 거느리는 권세, 즉 지배권을 소유했습니다. 세 번째로 아브라함 집안의 장자는 가나안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약속을 이어 받았습니다, 네 번째로 장자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를 누리는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신 것에서 나타납니다.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다 빼앗겨 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 어떤 이익도 없는 장자의 명분보다 지치고 배고픈 판에 죽 한 그릇 먹는 것이 더 중하다는 생각을 한 에서에게 야곱은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33).” 야곱이 한 번 던져본 말에 에서는 걸려들었고, 그것을 놓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맹세까지 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33).” 동생에게 맹세까지 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에서가 먹었고 마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갔습니다’ 에서의 행동은 아무 생각 없이 매우 급하게 음식을 퍼 먹고 일어나 나가버린 것을 말합니다. 즉, 에서는 눈앞에 있는 음식에 마음을 뺏겨 정신없이 음식을 먹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를 성경은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경홀히 여겼다는 말은 ‘업신여기고 ‘경멸하며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다이아 반지의 가치를 모르고,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모르듯이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는 경솔한 행동을 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므로 죄를 지어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는데 에서는 장자가 받을 모든 축복을 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경솔한 짓을 했습니다. 히12:6에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에서를 ‘망령된 자’ 란 ‘속된 자’ ‘불경건한 자’ 란 뜻으로 속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축복을 버린 자라는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떡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어 버렸습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팔아먹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이로 인해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 아버지의 축복, 가문을 이어가는 제사장적 축복, 재산 상속권 등을 모두 잃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 아버지의 축복, 제사장적 축복권, 재산 상속권을 모두 받았습니다. 에서는 한그릇 팥죽을 위해 영육간의 모든 축복을 버렸고,야곱은 팥죽으로 영육간의 모든 축복권을 소유하였습니다.

Esau and Jacob . c. 1696. Oil on canvas. 97,5 x 182,5 cm. Museo Nacional del Prado

우리도 물질로 하나님의 복을 바꿔 먹지 말아야 합니다. 돈으로 하나님의 복을 팔아먹지 말아야 합니다. 먹고 산다고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하고, 주일을 범하면 안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육신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보이는 물질과 바꿔서는 안 됩니다. 맏아들 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물려주시는 장자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꿔먹고 장자의 복을 내 버렸습니다. 에서는 이삭의 장자로 축복을 받을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 에서가 장자인 이상 자신이 그 장자권을 뺏을 수 없다는 것과 설사 뺏을 수 있다고 해도 아버지가 형을 지지하고 있어서 쉽지 않다는 것, 거기다가 형이 육체적으로도 더 강하다는 것, 그래서 차남인 자신은 그 모든 것 가운데 하나도 가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분노하고 또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축복이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다 같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복입니다. 어리석은 아들 에서는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약속된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저 버렸습니다. 에서는 신령한 것을 육적인 것과 바꾸어 먹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우리는 에서처럼 어리석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상속받을 특권이 있었습니다. 장자권, 축복권, 아버지 계승권, 제사장권을 이어받을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특권과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습니다. 우리도 물질을 위해 믿음과 하나님의 복을 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복을 세속적인 것과 바꾸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되겠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무시하여 큰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소중함을 알아야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큰 아들 에서 대신에 작은 아들 야곱이 축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두 국민은 쌍둥이인 두아들이 두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형제가 두 민족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형제가 다른 형제보다 더 강하게 되고 에서 즉 장남이 야곱 즉 어린 자 섬기리라는 것입니다. 큰 에서가 어린 야곱을 위해 ‘봉사하고 받듣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에서의 후손이 야곱의 후손의 지배 아래 있게 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후에 에서의 후손 에돔은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의 속국이 됩니다. 한 마디로 큰 아들 에서가 작은 아들 야곱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엄마 리브가는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이삭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계획이 작은 아들 야곱에게 이루어지기 위해 은밀히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아버지의 복을 받게 하려고 준비를 하였습니다. 즉 남편 이삭의 축복을 작은 아들 야곱이 받도록 준비를 하였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의견대로 작은 아들 야곱은 변장을 하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특별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러 들어갔습니다. 야곱은 복을 받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변장한 야곱에게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이는 사랑의 인사를 하라는 말입니다. 존경을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그 옷의 향취를 맡고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갖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삭이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누구인지를 확인하였습니다. 이삭은 아들의 향기를 맡고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여서 아들의 옷에서 나는 가나안의 흙 내음을 맡고 그 땅에서 아들이 잘 되기를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슬이란 팔레스틴은 물이 귀해 이슬이 내려야 식물이 됩니다. 이슬은 농사에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의 이슬은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땅의 기름짐은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기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풍성한 곡식은 농사가 잘되어 풍년들기를 축복했습니다. 포도주는 팔레스타인은 물이 귀해 포도즙을 음료수로 사용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아들 야곱에게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하도록 축복하였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란 야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근방의 여러 족속들을 지배하라고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말은 야곱이 형 에서에게도 주가 되고 세상의 통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축복대로 야곱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준비한 리브가

에서는 어리석은 자로 눈앞의 물질만 보았고 먹기를 탐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과 아버지의 축복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그는 장자권을 잃고 아무런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잘못된 책임은 에서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축복 아버지의 축복을 귀히 여겼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내가 받을 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자녀들을 축복하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복되게 살 수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부모님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형통하고 잘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모든 일들이 우연히 되는 것은 없습니다. 시계 바퀴가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일정한 질서를 따라 돌아가는 것과 같이 인간의 역사도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에 따라 운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축복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장자권을 귀하게 여긴 야곱처럼 하늘의 신령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와 축복을 귀하게 여겨서 장자의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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