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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앞 광장 | 20190310 ‘수문 앞 광장의 영적 원리’ 화양교회 최상훈 담임목사 3분 설교 11026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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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느헤미야 8:1-5
최상훈 목사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교회개척, 피난민학교, 빈민촌 고아원사역 개척(7년)
♦알라스카 에스키모 선교센타 설립, 최초의 한국감리교회 개척등(7년)
♦화양교회 부임하여 3년만에 청년들만 25명에서 출석 300여명으로 성장.
♦시간마다 탁월한 설교와 선교지에서의 생생한 경험으로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대공원역 5번출구 바로 앞 화양교회
네이버에서 화양교회를 검색하세요
www.hwayang.org
건대근처교회, 세종대근처교회
주일예배 1부 7:30, 2부 9시, 3부 11시,
젊은이예배(청년부예배) 2시

수문 앞 광장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수문 앞 광장 부흥회 (느 8:1-18)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cjob)

수문이라 함은 물과 관계있는 성문으로 기혼샘 앞에 있는 문입니다. … 실로암 못과 기혼 샘을 끼고 있는 수문 앞 광장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수문 앞 광장은 …

+ 여기에 표시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3/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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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앞 광장으로 모이라! (느8:1-9) – 다음블로그

수문 앞 광장으로 모이라! (느8:1-9) ◇본문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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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15/2021

View: 6181

느8장 1-12 수문 앞 광장의 부흥 -권오진 – 네이버 블로그

1절에 보면 그때 상황을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일제히 라는 말의 히브리어 뜻은 <마치 한 사람처럼>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3/2022

View: 2526

수문 앞 광장 모임 (느 8:2-12) – 기멀전

수문 앞 광장 모임 (느 8:2-12) 포로기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완성했다. 스룹바벨의 성전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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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6/8/2022

View: 5015

만남의광장 > Feature > 성전순례_수문 앞 광장 (2008년 10월호)

수문앞 광장은 성정의 동문과 성벽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수문이 성벽 아래를 관통하는 지점으로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42,360명, 4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두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old.champyungan.com

Date Published: 5/4/2021

View: 1821

수문 앞 광장의 부흥 – 유로룩스한인교회

수문 앞 광장의 부흥. Published by 관리자 on February 9, 2014 February 9, 2014. 느헤미야 8:1-6. Audio Player.

+ 더 읽기

Source: www.euroluxchurch.org

Date Published: 9/10/2021

View: 4357

Top 48 수문 앞 광장 Quick Answer – Áo Dài Thanh Mai

수문 앞 광장 · 느8장 1-12 수문 앞 광장의 부흥 -권오진 : 네이버 블로그 · 수문 앞 광장 모임 (느 8:2-12) – 목회자료 – 기독교 멀티미디어 사역자 …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aodaithanhmai.com.vn

Date Published: 7/11/2022

View: 4704

느헤미야 8:3 KLB – Bible.com

그 곳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그것을 읽어 주었으며 백성들은 모두 귀를 기울이고 주의 깊게 들었다.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0/13/2021

View: 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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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0 '수문 앞 광장의 영적 원리' 화양교회 최상훈 담임목사 3분 설교
20190310 ‘수문 앞 광장의 영적 원리’ 화양교회 최상훈 담임목사 3분 설교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수문 앞 광장

  • Author: ANOINTING 화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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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3. 1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lyEW_HfUl1Q

수문 앞 광장으로 모이라! (느8:1-9)

수문 앞 광장으로 모이라!

(느8:1-9)

◆본문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 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 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7.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서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벌써 종강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지요?

어느 덧 한 학기를 마치고 종강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 학기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여름수련회가 시작되네요.

우리는 다음 주에는 안성수양관에서 열리는 여름 수련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에스라가 성전 재건의 책이라면, 느혜미야서는 성벽 재건의 책입니다.

느헤미야서는 페르시아 왕의 참모였던 느혜미야가 BC444년 잠시 왕의 허락을 얻어

42,360명의 동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 성벽을 52일 만에 재건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성벽 재건 후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영적 부흥이었습니다.

이에 에스라와 느혜미야(9절)는 백성들이 영적 부흥을 위한 성회를 열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칠월 초하루에’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팔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성회를 연 것입니다.

수문 앞 광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남동쪽 문 앞의 광장으로 곧 기드론 골자기 기혼 샘 옆의 광장입니다.

당시 이 광장은 성회 뿐만아니라 재판과 공회가 열리던 성읍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벽 건축 후 개최된 성회 장면이 생생히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회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부흥을 이루게 됩니다.

마침 우리는 다음 주 여름 수련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배경으로 ‘수련회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왜 우리가 여름수련회에 모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그러면 왜 우리는 여름수련회로 모여야 할까요?

▶첫째; 특별한 ‘ 말씀의 장소 ’ 이기 때문입니다(6절).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 수문 앞 광장에 정기적으로 모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3대절 기에는 30세 이상 모든 남자들이 모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나팔절(민간력 7월 1일)입니다.

나팔절은 열흘 후에 있을 대속죄일(7월 10일)을 준비하는 절기로,

백성들이 자신과 민족의 죄를 자복하며 근신하는 기간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집회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집회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2장의 오순절 집회였습니다.

그 집회의 강사는 예수님의 대표제자 베드로였습니다.

그 오순절 집회에서 선포된 말씀으로 하루에만 수 천명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또 여러 말(말씀)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0-41)’

저는 2000년 여름 수련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수원과학대 새내기 박양근형제가 처음으로 수련회가 참석했습니다.

기독교 집회가 익숙지 않아 첫날에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둘째 날 포기를 선언하고 귀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가지장들이 겨우 설득해서 마지막 날까지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 이 형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형제는 그 후 정말 열심히 캠퍼스 사역을 주도했습니다.

지금은 맏가지로 태권도장 관장이 되어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회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럼 이제 1절에서 3절예 반복되는 단어 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바로 <율법책>입니다.

‘모세의 율법책 을 가져오기 를 청하매 ’(1 절 )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 을 가지고 (2 절 )’

‘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 에 귀를 기울였는데 (3 절 )’

오늘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예배에 성경책을 가져 오지 않는 신자들이 많은데 참 안타깝습니다.

이번 수련회에는 성격 책을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본문 1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백성들이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백성들은 오늘날처럼 ‘율법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성회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끔 집회를 마치고 온 지체들에게 묻습니다. ‘어떤 시간에 가장 은혜 받았어?’

적지 않은 지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찬양 시간입니다.’

물론 찬양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지만 <말씀의 기초>가 없는 찬양이나 기도는 감정에 속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은 집회나 성회를 마치고 집에 가면 마치 거품이 꺼지듯이 푹 꺼져 버립니다.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진정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과 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유의해서 읽겠습니다.

<제사장 에스라>(3절)를 <학사 에스라>(2절)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으로서 율법학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백성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3-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3.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에스라가 모든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 책을 책을 펼 때 ’ 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당시 집회는 오전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3절).

요즘과 비교하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당시 집회는 음향시설이 잘 되어있지 않아 육성으로 전달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갈급함이 컸기 때문에 아마 시간 가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 반증이 바로 6절입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다구요? 그렇습니다. ‘아멘! 아멘!’했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수련회에 참석하면 집회시간에 가능한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아멘! 반응하기를 당부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름 수련회를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갈급한 심령으로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여름 수련회는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이 있는 장소’입니다.

성회의 매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멘!’으로 반응하기를 바랍니다.

결국 시간 시간마다 주시는 말씀이 여러분을 변화시킬 줄 믿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여름수련회로 모여야 할까요?

▶둘째; ‘ 회개의 장소 ‘ 이기 때문입니다(9절)

본문 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

백성들은 말씀을 듣는 가운데 모두가 울었습니다(9절)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회에는 이렇게 회개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잠깐 느8-9장의 구성을 보겠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1-12 절은 나팔절 집회 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13-18절은 초막절(성력 7월 15-21 일주일간)을 준수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9장 1-5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또 다시 모여 회개의 성회를 열었습니다.

느9:1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3.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여기서 1절의 ‘그 달 스무나흗 날’은 초막절 이틀 후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이렇게 한 달 내내 민족적 성회를 자주 열 수 있을까요?

이것이 부흥하는 민족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성회를 사모하고 ,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약 행2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바로 ‘찔림’(37)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죄가 들러날 때 일어납니다.

회개는 성령의 찔림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반응이 나타납니다.

…’ ‘우리가 어찌 할꼬!’(38)입니다.

이것은 바로 집회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본문도 마찬 가지 그런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성회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성회에는 이처럼 반드시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회는 우리의 영적 크리닝(spiritual cleaning)의 장소입니다.

특별히 공동체의 죄를 함께 회개해야 합니다.

다음은 제가 지난 주 올렸던 칼럼입니다.

리민수칼럼2879 “더 이상 교회’를 위태롭게 하지 마십시오!”

<앞부분 생략>

물론 그 분이 ‘어떤 말’을 했을 때에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의 ‘망언’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한국교회와 복음에 ‘악영향’을 미친 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분이 ‘목사’인지 ‘정치인 인지’ 도대체 구분이 안 된다.

적어도 목사가 정치 사회적 발언을 할 때는 그 파장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가 정치 사회적 발언을 하거나 ‘항거’를 할 때는

오랜 시간 기도한 후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교계의 원로들을 찾아 의견을 수렴해서 신중히 발언해야 한다.

지금 일부 교계의 지도자들(?)이라는 분들이 한국교회를 망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도들이 ‘호박씨 까듯’ 전도하면 목회자들은 한 번에 쏟아 버리는 현실이 정말 화가 난다.

한국교회의 이런 불미스러운 일들을 보면 사사 시대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사 시대도 지금처럼 주의 종들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었다.

나도 부족하고 흠 많은 목사지만 그래도 ‘두려움’은 남아 있다.

나는 전목사님께 이런 충언을 드리고 싶다.

-‘정치’하지 마시고 ‘목회’에 전념 하십시오.

목사님 때문에 오히려 한국교회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현상’은 ‘그것 이상’이 아닐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현상’은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습니다.

한 민족이 영적 심판을 받을 때는 그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백성이 타락하기 시작하여 목회자에 이르는 과정과

목회자들의 타락이 성도들의 타락을 이끄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보편적인 과정이지만 후자의 경우가 바로 남유다를 멸망에 이르게 한 아하스와 므낫세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역대하 28:22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어려울)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했다고 했습니다.

왕하21:9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

오늘 우리 시대를 보면 왜 사사시대가 떠오르면서 불길한 예감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사시대는 백성들로부터 대제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타락했던 시기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부터 잎사귀까지 모두가 병들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만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영적 위기’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심각한 영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사야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무릎 꿇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나의 죄와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 조상과 민족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지금은 이렇게 자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번 여름 수련회는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앞에 무릎을 드려 죄를 자복해야 할 ‘회개의 장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여름수련회로 모여야 할까요?

▶셋째; ‘ 결단의 장소 ’ 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BC444 년경 일 입니다.

이보다 12 년 전에도 바로 이 장소에서 집회 가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당시에는 에스라가 포로민들을 이끌고 2차 귀환을 했습니다.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재건 된지 거의 60년이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에스라가 귀국해 보니 기막힌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여인과 통혼하여 가정을 이룬 백성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일에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스9:2-3)‘

정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에스라는 전 백성들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에스라10장)

7.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성전 앞 광장)으로 모이라>

8.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

9.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10.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의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결단했습니다.

12.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아멘!

제 개인적으로도 수련회는 제 인생을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 가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 1학년 때인 1977년 겨울 금식사경회 에스더서 말씀을 듣고

캠퍼스 복음화의 비전을 받았고

대학 4학년 때인 1980년 8월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민족 대성회를 통해 민족 복음화의 비전을 받았습니다.

제가 대학 4학년 되는 여름의 일입니다.

그 집회는 연인원 100만 성도가 모였던 민족적 집회였습니다.

엄청난 무더위였지만 폭염보다 더 뜨거운 집회였습니다.

이렇듯 수련회는 저에게 제 일생의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진 곳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비상한 시국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전쟁보다 더 끔찍한 시대입니다.

부모 학대로 숨지는 어린이가 한 해 38명이라고 합니다.

요즘 하루가 머다하고 동반자살 뉴스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여러 경제지표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 만큼 불경기 인데다가 정책적 시행착오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걱정은 청년들의 고용 부진에 따르는 여러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바로 지금이 믿음의 청년들이 해야 할 일이 기도 입니다.

바로 이럴 때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난관이 와도 믿음을 잃지 않겠다-는 신앙의 결기를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어떤 풍파가 몰려와도 흔들림 없는 지체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의 깊이와 뿌리가 없는 사람은

머지않아 세상 속에서 세상에 동화되고 멸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그 차이는 하나입니다.

바로 <신앙의 영적 내공>입니다.

‘영적 내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훈련을 통해 축적되어진 ‘영적 견실함’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또한 영적 내공은 그 어떤 난관 앞에서도 ‘후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이런 영적 내공은 꼭 신앙의 연륜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골리앗을 맞섰던 다윗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름수련회는 바로 신앙의 내공을 키우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다양한 강사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과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비춰 보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인생의 목표와 진로가 결정되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할 것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인생의 노정을 새롭게 ‘결단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름수련회로 모여야 할 세 번 째 이유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왜 여름수련회로 모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았습니다.

우리가 여름수련회에 참석해야 할 이유는

▶첫째; 특별한 ‘ 말씀의 장소 ’ 이기 때문이며,

▶둘째; ‘ 회개의 장소 ‘ 이기 때문이며,

▶셋째; ‘ 결단의 장소 ’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번 여름 수련회에 참석해야 할까요?

첫째, 무엇보다 ‘사모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둘째, 집회 중에는 ‘온전히 말씀을 집중하고 경청’해야 합니다.

셋째, 영적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 즉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먼저 ‘모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마다 부르셨습니다.

○스바냐 2장 1-2절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러할지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음 주 월요일에는 오늘 우리의 수문 앞 광장인 안성수양관으로 모이십시오.

그곳은 우리에게 야곱의 벧엘이 될 것입니다(창35:3).

그곳은 우리에게 사무엘의 미스바가 될 것입니다(삼상7:1-14) .

그곳은 우리에게 엘리야의 갈멜산상이 될 것입니다(삼상18:42).

그곳은 우리에게 예루살렘의 수문 앞 광장이 될 것입니다(느8:1).

올 6월의 안성은 뜨거울 것입니다.

그곳은 전국에서 모인 청년대학생들의 기도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주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단비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성령이 하늘 가르며, 땅을 흔들며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곳에서 놀라운 경험을 할 줄 믿습니다.

사모함으로 준비하는 지혜로운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8장 1-12 수문 앞 광장의 부흥 -권오진

느8장 1-12

수문 앞 광장의 부흥

권오진 목사 2013.01.28.

정동교회 [대구시 지산1동] http://www.jdong.co.kr/

1907년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1907년 부흥의 역사로 한국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07년에 우리 한국교회는 다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습니다. 지금도 <부흥>이란 찬양을 부르고 있지만, 2007년도에는 엄청나게 많이 불렀습니다. 한 번 다시 불러볼까요?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불렀듯이 2007년도에도 간절하게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부흥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부흥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교회에는 어려운 소식들이 전해졌고, 부흥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은 부흥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부흥은 사람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도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오늘 함께 성구로 교독한 하박국 3장 2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흥이 없는 성도, 부흥이 없는 교회, 부흥이 없는 한국교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2457년 전(주전 444년) 이스라엘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난 부흥>의 현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과 우리 교회에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Ⅰ 첫째로 <수문 앞 광장의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1절을 여러분 보십시오. 한 목소리로 다시 읽어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쉽게 말하면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백성이 말씀을 들려달라고 요청한 이 날이 언제라고 하고 있습니까? <일곱째 달(1절)>이라고 합니다.

<일곱째 달 초 하루(2절)>라고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이 날은 나팔절로서, 히브리 달력으로는 “정월 초하루”를 말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달이고 첫 날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는 정월 초하루 구정에 주로 무슨 일을 합니까? 설날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거나, 고스톱을 하거나 가족들 간에 친교 하는 것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도 지금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느헤미야 총독의 인솔함을 받아 예루살렘에 귀한해서 52일이란 짧은 기간 동안 그동안 두 차례나 귀한한 지도자와 백성들이 하지 못한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는 일을 완성해냈습니다. 그러니 지금 백성들이 이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했으니, 이제 좀 쉬면서 인생을 즐기자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성벽을 건축했으니, 성대하게 찬치나 벌이자고 이야기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나자 그들은 수문 앞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1절에 보면 그때 상황을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일제히 라는 말의 히브리어 뜻은 <마치 한 사람처럼>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백성들이 스스로,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수문 앞 광장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 때 모인 사람의 수를 약 3만에서 5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모인 사람들의 계층을 2절에 소개합니다.

2절에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남자, 여자,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 모였습니다. 말 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백성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특별히 부흥회 강사로 <학사 에스라>를 지명하여 그에게 율법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러분 에스라가 어떤 사람이기에 그에게 말씀을 읽어달라고 했을까요?

에스라는 주전 458년, 바벨론에서 2차로 귀환할 때 귀환을 책임진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이었고, 아론의 16대손이었습니다.

<학사(學士)> 란 말은 ‘기록하는 사람, 서기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 시절,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성경학자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한’사람 이었고,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충분히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100년이 넘는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바벨론과 페르시아 문화와 지식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유대인들의 생활을 지배했던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율법은 무시되거나 가볍게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그런 형편에서도 계속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부흥을 일으킬 지도자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부흥강사로 학사 에스라를 요청했고, 이에 응답한 에스라가 드디어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3절에 보세요.

3절에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새벽부터 정오까지> 여명이 밝아오는 오전 6시부터, 해가 중천에 떠 있는 12시까지, 장장 6시간을 말씀을 낭독했고, 그 낭독한 말씀을 강해하였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설교시간 30분만 되어도 지루하고, 부흥회를 할 때는 설교 시간이 한 시간이 넘으면 지루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그곳 수 문 앞 광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6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을 나눈 결과를 보세요.

말씀을 받는 그들의 자세를 보면

5-6절에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5절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앉아서 듣고 일어나서 기도하는데, 얼마나 말씀을 기대했으면 <말씀이 전해질 때 일어나서 들었습니다. 그 하나만 해도 그들이 얼마나 말씀에 존경을 표했고, 말씀을 기대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에는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아멘 아멘>하면서 화답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아멘. 아멘. / 그렇게 되어 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했을까요?

마치 시편 기자가 말씀에 대해 사모한 것과 같습니다. 시편 119:131에 보면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새해 첫날 말씀을 이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백성들과, 이미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가 끝난 학사 에스라가 만나는 순간, 거기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비밀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부흥을 위해서는 2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신앙인으로서 <진짜 부흥>을 원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성들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일의 시작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때 /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할 때 / 새로운 한 달을 시작 할 때 /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때 /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 / 이사를 가거나 이민을 갔을 때 / 새로운 곳에 들어갔을 때 /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 새로운 결단을 내리려 할 때> 말씀으로 시작하고 싶습니까?

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전으로 나오면서 <말씀에 대한 진짜 기대감이 있습니까?> 이런 말씀에 대한 기대감이 없으면 신앙의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10장에 보면 이탈리아 부대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 베드로 사도를 초청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고넬료와 친척과 친구들의 마음을 성경에는 <베드로 앞에 있으면서 마치 하나님 앞에 있는 듯>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가정이 비록 이방인의 가정이었지만 부흥을 경험하는 가정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부흥은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에 임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장소에서 말씀을 들어도 <사모하는 심령>에게는 꿀 같은 말씀이 전해질 것이고, 반대로 사모하지 않는 심령은 <잠이 오고, 지루한 말씀> 될 것입니다.

지금도 부흥이 있으려면

두 번째로,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몫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말씀을 듣는 자,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제대로만 준비하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교회에 <이런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과 제가 말씀을 전하고 들을 때, 준비된 자로서 전하고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Ⅱ. 둘째로, 수문 앞 광장에는 <심령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9절에 보세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듣기만 하는데 사람들이 울다니 …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영혼이 참으로 메말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들으면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을 듣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쏟아져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이 나를 울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나의 마음을 찔렀다는 말입니다. 내 영혼 전체에 하나님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흘리는 눈물은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1) 첫째는 그들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었고, <두려움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동안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나라를 잃고 오랜 세월동안 포로생활을 하며 수치를 겪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지난날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회개하는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2) 둘째로 이들의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에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3) 끝으로 그들의 눈물은 <새로운 결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옛날처럼 범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눈물을 설명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의 경험이 있는 분들은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듣는 가운데 <가슴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 뜨거움이 내가 견딜만한 뜨거움이 아니라 내가 견디지 못할 강력한 뜨거움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한 분들의 경우에는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찬송을 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씩 기도회를 하는 가운데 누가 <엉엉 울어도> 여러분 이상하게 그 분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그분을 터치하시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도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합니다. 모인 군중 남녀노소 구별 없이 3-5만의 사람들이 다 울었던 것입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날인데, 그 첫날에 통곡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지도층의 사람들이 울지 말라고 말립니다.

9절 하반절에 “…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고 울지 말라 하고”

10절 하반절에 “이 날은 우리 중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 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얼마나 울었으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여러분! 요즈음은 잘 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시장에 대장간이 있었습니다. 대장장이가 <호미를 만들고, 낫을 만들고, 여러 연장을 만듭니다.> 대장장이가 그것을 만들 때에는, 벌겋게 달아 오른 쇳덩이를 해머로 두들겨 가면서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질 때,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질 때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 하면 <심령의 부흥, 심령의 뜨거움>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령의 뜨거움이 없으면 예배도, 찬송도, 헌신도, 봉사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에게 이런 심령의 부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Ⅲ. 말씀에 순종하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13절 이하의 말씀에는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여호수아 이후부터 지금까지 거1,000년 동안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초막절을 지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들은 말씀으로 끝나지 않고, <순종하는 삶>으로 변하는 진정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수문 앞 광장의 부흥>의 모습을 보면서 –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한국교회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잘 살게 된 것 같고, 걱정이 없는 것 같고, 부흥도 된 것 같은데,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부흥이 시급한 현실>입니다. 이대로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백성들처럼

“하나님, 우리 심령이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망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심령에 은혜의 단비를 주옵소서.”라고 갈급한 심령으로 부르짖으며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부흥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부흥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서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수문 앞 광장 모임 (느 8:2-12)

수문 앞 광장 모임 (느 8:2-12)

포로기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완성했다. 스룹바벨의 성전도 완성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성읍에 거주한 지 일곱 째달 초하루에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 집회를 열었다. 이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모임은 에스라가 주도한 것이 아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인 모임이고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도록 청한 집회였다. 여기에 청한 받은 에스라도 수문 앞 광장에 모인 회중들, 알아 들을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율법책을 읽었다. 율법책을 읽기 위해 학사 에스라는 나무로 지은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좌우에 13명의 사람들이 섰다. 율법책을 들고 선 에스라가 백성들 목전에서 책을 펼 때 모든 백성들은 어떻게 했는가?

1. 모든 백성들은 일어섰다. (느8:5)

느8:5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일어선다는 것은 존경의 표시다. 말씀이 낭독되면 그 낭독되는 말씀을 감히 앉아서 들을 수 없다는 겸손의 표시다. 말씀이 그 만큼 삶 속에서 소중하고 귀하다는 표시다. 우리는 예배로 모일 시 말씀 낭독을 한다. 성경봉독 담당자가 성경을 읽을 때 틀리게 읽는다. 빼 먹고 읽는다. 성경봉독자가 준비하지도 않을뿐더러 주일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회중은 성경을 읽을 때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일어서지도 않는다. 이는 우리가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도 모르게, 정말 모르게 오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봉독자는 예배에 빠져서는 안된다. 회중은 또한 말씀에 대한 존중으로 일어서야 옳다.

느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라고 쓰여 있다. 이는 새벽은 아침 6시로 볼 때 최소한 6시간은 일어서서 봉독되는 말씀을 들었다는 뜻이다. 말씀에 대한 목마름, 말씀에 대한 섬김이 6시간 일어서게 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관례적으로 헨델의 메시야가 연주되면 다 일어난다. 그렇다면 말씀의 귀함, 말씀의 보배로움을 확신하는 자는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왕의 말씀이 아니고 왕의 왕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2. 모든 백성들은 화답하였다. (느8:6)

느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말씀을 낭독하는 에스라가 말씀의 주인공되신 말씀의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송축할 때 백성들의 화답은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수문 앞 광장 집회에 모인 모든 백성들은 말씀이 살 길이고 민족의 부흥의 길이고 가정이 살 길임을 체득하고 있었다. 포로기의 고통, 왜 나라가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버렸는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흩어져 이산의 고통을 안고 지냈는가? 말씀을 업신여기고 선지자의 말에 불순종한 죄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율법을 회복시키고 율법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철저히 자성한 모든 백성은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과 말씀의 하나님을 사모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손을 들었다. 손을 드는 것은 헌신의 표다. 말씀에 대한 환영의 표다. 손을 드는 것은 항복의 표다. 축복의 표다. 이것보다 적절한 말씀을 향한 화답이 어디있는가? 말씀이 우리의 꿈이다.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의 힘이라는 화답인 것이다.

또 수문 앞 과장에 모인 백성들은 입으로 “아멘 아멘”하였다. 아멘이란 “네”라는 동의 표시다. 확실히 그렇게, 나도 말씀처럼 한다는 표다. 고후1:20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 번 아멘이 아닌 거듭 거듭 아멘이다. 말씀을 목마른 가슴으로 빨아들이는 고백이다. 우리 미래의 길, 우리 국가의 길, 우리 가정의 길, 길이 되는 말씀을 소홀히 했던 목마름이 담겨 아멘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몸을 굽히는 경배를 하였다. 최고의 화답이다. 말씀에 대한 이런 화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성도들이 모임을 가질 때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할 때 화답이 살아있어야 한다.

남북의 창을 통해 가끔 평양의 모습에 나타난 김일성, 김정일을 보라. 손을 들고 박수치고 열렬히 환호하고 통곡까지 한다. 사람에게도 저렇게 할 수 있다면 저 뜨거운 박수와 열광하는 화답이 사실 위대하신 말씀을 향해 올려져야 한다. 말씀을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기에 말씀에 화답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다. 우리에겐 열광이 아니라 화답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

3. 모든 백성들은 깨닫게 되었다. (느8:7~8)

느8:7을 보면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 등 레위 사람들이 율법을 깨우친다. 느8:8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말씀을 읽어주는 것, 들려주는 것 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말씀의 해석이란 신학적 잣대가 필요하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의 시대에 이끌어오는 의미 발견이 해석학에서 주어진다. 말씀을 통으로 보지 못하면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미경으로 보기 전 망원경으로 보아야 한다. 즉 나무를 보기 전 숲을 먼저 보아야 한다. 그래야 일관성 있는 해석을 할 수 있다. 말씀 해석의 길을 잃지 않는다.

오늘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랍비들이 그 율법의 뜻을 해석해 줄 때 백성들은 깨닫게 되었다. 깨닫는다는 것은 마음이 설득되었다는 뜻이다. 잘못 알고 편견되이 알고 있던 무지가 그 껍질을 벗어던지고 사고의 전환이 들어왔다는 뜻이다. 깨달아야 한다. 말씀이 지니고 있는 메시지를 잘 받고 그렇게 결단하도록 깨달아야 한다. 수문 앞 광장 집회는 모든 백성들을 바로 서게 했다. 잘못된 것, 버려야 할 것, 게으르고 안일한 것, 붙잡아야 할 것을 깨닫게 하였다. 정말로 집중해야 하고 열심을 내고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였다.

4. 모든 백성들은 울었다. (느8:9)

느8:9을 보면 백성이 운다.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운다. 그때 느헤미야와 에스라, 레위인들이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깨닫게 되는 이 모임은 기쁨의 날, 거룩한 날이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깨달음을 가진 백성들은 울 수 밖에 없었다. 울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회한의 눈물, 또 하나는 위로와 감동에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 그것이다. 여하튼 울음이란 만들어 낼 수 없고 짐짓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 운다는 것은 은혜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혀 본 자는 이 울음의 의미를 수긍한다. 울음 없는 기도, 울음 없는 예배, 울음 없는 결심은 추상적일 수 있다. 울음이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인 것 같으나 영혼이 순수하게 되는 과정이다. 모든 백성이 울었다.

모든 백성이 보여준 수문 앞 광장 모임은 말씀으로 무장하는 거룩한 집회였다. 무엇을 위해 모이는가? 갈멜산 백성들의 모임은 신앙 확립을 위한 영적 전쟁의 모임이었고 미스바 산지의 모임은 회복과 평화를 위한 주께로 돌아가는 모임이었다. 수문 앞 광장 모임은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율법을 회복하는 길이 사는 길, 잘 되는 길임을 확신한 백성들의 자발적 모임이었다. 선지자들이 초청하는 모임이 아니었다. 사사가 제안한 모임도 아니었다. 모든 백성들이 오직 말씀을 듣고 싶어 여는 모임이요, 집회였다. 이런 모임이 성도들의 영적 탐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상업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가 있어서는 안된다.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는 모임, 말씀 해석을 들으려는 모임, 말씀이 우리의 꿈이기에, 삶의 비전이기에 모여서 말씀을 함께 읽어나가는 모임,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가 만들어져야 한다.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이 말씀 집회를 민족의 살 길이라고 믿고 수문 앞 광장 모임을 가졌다. 이 시대도 민족과 교회의 성도의 가정을 살리는 길은 말씀 중심의 삶에 달려 있다. 지금 다 무너지는 소리 밖에 없다. 교회마저도 무너진다는 소리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교육계, 경제계, 체육계, 법조계 등 다 무너진다고 하는데 교회도 요동한다. 하지만 말씀을 위한 수문 앞 광장 집회가 재현된다면 이 시대에 우리 가정에, 내 영성 생활에 말씀을 존중하고 말씀을 세우는 모임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다. 다 무너져도 말씀이 세워진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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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3 그 곳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그것을 읽어 주었으며 백성들은 모두 귀를 기울이고 주의 깊게 들었다. | 현대인의 성경 (KLB) | 지금 성경 앱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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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수문 앞 광장의 눈물 – 평촌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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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8장 1-12 수문 앞 광장의 부흥 -권오진

느8장 1-12 수문 앞 광장의 부흥 권오진 목사 2013.01.28. 정동교회 [대구시 지산1동] http://www.jdong.co.kr/ 1907년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1907년 부흥의 역사로 한국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07년에 우리 한국교회는 다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란 찬양을 부르고 있지만, 2007년도에는 엄청나게 많이 불렀습니다. 한 번 다시 불러볼까요?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불렀듯이 2007년도에도 간절하게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부흥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부흥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교회에는 어려운 소식들이 전해졌고, 부흥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은 부흥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부흥은 사람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도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오늘 함께 성구로 교독한 하박국 3장 2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흥이 없는 성도, 부흥이 없는 교회, 부흥이 없는 한국교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2457년 전(주전 444년) 이스라엘 의 현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과 우리 교회에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Ⅰ 첫째로 은 1절을 여러분 보십시오. 한 목소리로 다시 읽어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쉽게 말하면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백성이 말씀을 들려달라고 요청한 이 날이 언제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라고 합니다. 라고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이 날은 나팔절로서, 히브리 달력으로는 “정월 초하루”를 말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달이고 첫 날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는 정월 초하루 구정에 주로 무슨 일을 합니까? 설날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거나, 고스톱을 하거나 가족들 간에 친교 하는 것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도 지금 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느헤미야 총독의 인솔함을 받아 예루살렘에 귀한해서 52일이란 짧은 기간 동안 그동안 두 차례나 귀한한 지도자와 백성들이 하지 못한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는 일을 완성해냈습니다. 그러니 지금 백성들이 이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했으니, 이제 좀 쉬면서 인생을 즐기자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성벽을 건축했으니, 성대하게 찬치나 벌이자고 이야기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나자 그들은 수문 앞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1절에 보면 그때 상황을 모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일제히 라는 말의 히브리어 뜻은 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백성들이 스스로,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수문 앞 광장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 때 모인 사람의 수를 약 3만에서 5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모인 사람들의 계층을 2절에 소개합니다. 2절에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이 모였습니다. 말 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백성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특별히 부흥회 강사로 를 지명하여 그에게 율법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러분 에스라가 어떤 사람이기에 그에게 말씀을 읽어달라고 했을까요? 에스라는 주전 458년, 바벨론에서 2차로 귀환할 때 귀환을 책임진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이었고, 아론의 16대손이었습니다. 란 말은 ‘기록하는 사람, 서기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 시절,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성경학자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한’사람 이었고,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충분히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100년이 넘는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바벨론과 페르시아 문화와 지식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유대인들의 생활을 지배했던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율법은 무시되거나 가볍게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그런 형편에서도 계속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부흥을 일으킬 지도자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부흥강사로 학사 에스라를 요청했고, 이에 응답한 에스라가 드디어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3절에 보세요. 3절에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여명이 밝아오는 오전 6시부터, 해가 중천에 떠 있는 12시까지, 장장 6시간을 말씀을 낭독했고, 그 낭독한 말씀을 강해하였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설교시간 30분만 되어도 지루하고, 부흥회를 할 때는 설교 시간이 한 시간이 넘으면 지루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그곳 수 문 앞 광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6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을 나눈 결과를 보세요. 말씀을 받는 그들의 자세를 보면 5-6절에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5절에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앉아서 듣고 일어나서 기도하는데, 얼마나 말씀을 기대했으면 6절에는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하면서 화답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라고 했을까요? 마치 시편 기자가 말씀에 대해 사모한 것과 같습니다. 시편 119:131에 보면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새해 첫날 말씀을 이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백성들과, 이미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가 끝난 학사 에스라가 만나는 순간, 거기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비밀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신앙인으로서 을 원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성들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일의 시작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시작하고 싶습니까? 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전으로 나오면서 이런 말씀에 대한 기대감이 없으면 신앙의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10장에 보면 이탈리아 부대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 베드로 사도를 초청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고넬료와 친척과 친구들의 마음을 성경에는 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가정이 비록 이방인의 가정이었지만 부흥을 경험하는 가정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부흥은 에 임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장소에서 말씀을 들어도 에게는 꿀 같은 말씀이 전해질 것이고, 반대로 사모하지 않는 심령은 될 것입니다. 지금도 부흥이 있으려면 두 번째로,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이것은 목회자의 몫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말씀을 듣는 자,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제대로만 준비하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교회에 그러기 위해 여러분과 제가 말씀을 전하고 들을 때, 준비된 자로서 전하고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Ⅱ. 둘째로, 수문 앞 광장에는 이 일어났습니다. 9절에 보세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듣기만 하는데 사람들이 울다니 …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영혼이 참으로 메말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들으면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말씀을 듣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쏟아져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흘리는 눈물은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1) 첫째는 그들의 눈물은 이었고, 이었습니다. 그 동안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나라를 잃고 오랜 세월동안 포로생활을 하며 수치를 겪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지난날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회개하는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2) 둘째로 이들의 눈물은 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에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3) 끝으로 그들의 눈물은 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옛날처럼 범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눈물을 설명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의 경험이 있는 분들은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 뜨거움이 내가 견딜만한 뜨거움이 아니라 내가 견디지 못할 강력한 뜨거움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한 분들의 경우에는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찬송을 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씩 기도회를 하는 가운데 누가 여러분 이상하게 그 분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그분을 터치하시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도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합니다. 모인 군중 남녀노소 구별 없이 3-5만의 사람들이 다 울었던 것입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 첫 날인데, 그 첫날에 통곡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지도층의 사람들이 울지 말라고 말립니다. 9절 하반절에 “…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고 울지 말라 하고” 10절 하반절에 “이 날은 우리 중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 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얼마나 울었으면 이렇게 말했을까요? 여러분! 요즈음은 잘 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시장에 대장간이 있었습니다. 대장장이가 대장장이가 그것을 만들 때에는, 벌겋게 달아 오른 쇳덩이를 해머로 두들겨 가면서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질 때,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질 때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 하면 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령의 뜨거움이 없으면 예배도, 찬송도, 헌신도, 봉사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에게 이런 심령의 부흥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Ⅲ. 말씀에 순종하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13절 이하의 말씀에는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여호수아 이후부터 지금까지 거1,000년 동안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초막절을 지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들은 말씀으로 끝나지 않고, 으로 변하는 진정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의 모습을 보면서 –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한국교회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잘 살게 된 것 같고, 걱정이 없는 것 같고, 부흥도 된 것 같은데,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입니다. 이대로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백성들처럼 “하나님, 우리 심령이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망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심령에 은혜의 단비를 주옵소서.”라고 갈급한 심령으로 부르짖으며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부흥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부흥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서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수문 앞 광장 모임 (느 8:2-12)

수문 앞 광장 모임 (느 8:2-12) 포로기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완성했다. 스룹바벨의 성전도 완성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성읍에 거주한 지 일곱 째달 초하루에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 집회를 열었다. 이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모임은 에스라가 주도한 것이 아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인 모임이고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도록 청한 집회였다. 여기에 청한 받은 에스라도 수문 앞 광장에 모인 회중들, 알아 들을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율법책을 읽었다. 율법책을 읽기 위해 학사 에스라는 나무로 지은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좌우에 13명의 사람들이 섰다. 율법책을 들고 선 에스라가 백성들 목전에서 책을 펼 때 모든 백성들은 어떻게 했는가? 1. 모든 백성들은 일어섰다. (느8:5) 느8:5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일어선다는 것은 존경의 표시다. 말씀이 낭독되면 그 낭독되는 말씀을 감히 앉아서 들을 수 없다는 겸손의 표시다. 말씀이 그 만큼 삶 속에서 소중하고 귀하다는 표시다. 우리는 예배로 모일 시 말씀 낭독을 한다. 성경봉독 담당자가 성경을 읽을 때 틀리게 읽는다. 빼 먹고 읽는다. 성경봉독자가 준비하지도 않을뿐더러 주일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회중은 성경을 읽을 때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일어서지도 않는다. 이는 우리가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도 모르게, 정말 모르게 오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봉독자는 예배에 빠져서는 안된다. 회중은 또한 말씀에 대한 존중으로 일어서야 옳다. 느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라고 쓰여 있다. 이는 새벽은 아침 6시로 볼 때 최소한 6시간은 일어서서 봉독되는 말씀을 들었다는 뜻이다. 말씀에 대한 목마름, 말씀에 대한 섬김이 6시간 일어서게 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관례적으로 헨델의 메시야가 연주되면 다 일어난다. 그렇다면 말씀의 귀함, 말씀의 보배로움을 확신하는 자는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왕의 말씀이 아니고 왕의 왕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2. 모든 백성들은 화답하였다. (느8:6) 느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말씀을 낭독하는 에스라가 말씀의 주인공되신 말씀의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송축할 때 백성들의 화답은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수문 앞 광장 집회에 모인 모든 백성들은 말씀이 살 길이고 민족의 부흥의 길이고 가정이 살 길임을 체득하고 있었다. 포로기의 고통, 왜 나라가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버렸는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흩어져 이산의 고통을 안고 지냈는가? 말씀을 업신여기고 선지자의 말에 불순종한 죄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율법을 회복시키고 율법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철저히 자성한 모든 백성은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과 말씀의 하나님을 사모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손을 들었다. 손을 드는 것은 헌신의 표다. 말씀에 대한 환영의 표다. 손을 드는 것은 항복의 표다. 축복의 표다. 이것보다 적절한 말씀을 향한 화답이 어디있는가? 말씀이 우리의 꿈이다.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의 힘이라는 화답인 것이다. 또 수문 앞 과장에 모인 백성들은 입으로 “아멘 아멘”하였다. 아멘이란 “네”라는 동의 표시다. 확실히 그렇게, 나도 말씀처럼 한다는 표다. 고후1:20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 번 아멘이 아닌 거듭 거듭 아멘이다. 말씀을 목마른 가슴으로 빨아들이는 고백이다. 우리 미래의 길, 우리 국가의 길, 우리 가정의 길, 길이 되는 말씀을 소홀히 했던 목마름이 담겨 아멘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몸을 굽히는 경배를 하였다. 최고의 화답이다. 말씀에 대한 이런 화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성도들이 모임을 가질 때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할 때 화답이 살아있어야 한다. 남북의 창을 통해 가끔 평양의 모습에 나타난 김일성, 김정일을 보라. 손을 들고 박수치고 열렬히 환호하고 통곡까지 한다. 사람에게도 저렇게 할 수 있다면 저 뜨거운 박수와 열광하는 화답이 사실 위대하신 말씀을 향해 올려져야 한다. 말씀을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기에 말씀에 화답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다. 우리에겐 열광이 아니라 화답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 3. 모든 백성들은 깨닫게 되었다. (느8:7~8) 느8:7을 보면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 등 레위 사람들이 율법을 깨우친다. 느8:8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말씀을 읽어주는 것, 들려주는 것 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말씀의 해석이란 신학적 잣대가 필요하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의 시대에 이끌어오는 의미 발견이 해석학에서 주어진다. 말씀을 통으로 보지 못하면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미경으로 보기 전 망원경으로 보아야 한다. 즉 나무를 보기 전 숲을 먼저 보아야 한다. 그래야 일관성 있는 해석을 할 수 있다. 말씀 해석의 길을 잃지 않는다. 오늘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랍비들이 그 율법의 뜻을 해석해 줄 때 백성들은 깨닫게 되었다. 깨닫는다는 것은 마음이 설득되었다는 뜻이다. 잘못 알고 편견되이 알고 있던 무지가 그 껍질을 벗어던지고 사고의 전환이 들어왔다는 뜻이다. 깨달아야 한다. 말씀이 지니고 있는 메시지를 잘 받고 그렇게 결단하도록 깨달아야 한다. 수문 앞 광장 집회는 모든 백성들을 바로 서게 했다. 잘못된 것, 버려야 할 것, 게으르고 안일한 것, 붙잡아야 할 것을 깨닫게 하였다. 정말로 집중해야 하고 열심을 내고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였다. 4. 모든 백성들은 울었다. (느8:9) 느8:9을 보면 백성이 운다.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운다. 그때 느헤미야와 에스라, 레위인들이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깨닫게 되는 이 모임은 기쁨의 날, 거룩한 날이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깨달음을 가진 백성들은 울 수 밖에 없었다. 울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회한의 눈물, 또 하나는 위로와 감동에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 그것이다. 여하튼 울음이란 만들어 낼 수 없고 짐짓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 운다는 것은 은혜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혀 본 자는 이 울음의 의미를 수긍한다. 울음 없는 기도, 울음 없는 예배, 울음 없는 결심은 추상적일 수 있다. 울음이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인 것 같으나 영혼이 순수하게 되는 과정이다. 모든 백성이 울었다. 모든 백성이 보여준 수문 앞 광장 모임은 말씀으로 무장하는 거룩한 집회였다. 무엇을 위해 모이는가? 갈멜산 백성들의 모임은 신앙 확립을 위한 영적 전쟁의 모임이었고 미스바 산지의 모임은 회복과 평화를 위한 주께로 돌아가는 모임이었다. 수문 앞 광장 모임은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율법을 회복하는 길이 사는 길, 잘 되는 길임을 확신한 백성들의 자발적 모임이었다. 선지자들이 초청하는 모임이 아니었다. 사사가 제안한 모임도 아니었다. 모든 백성들이 오직 말씀을 듣고 싶어 여는 모임이요, 집회였다. 이런 모임이 성도들의 영적 탐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상업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가 있어서는 안된다.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는 모임, 말씀 해석을 들으려는 모임, 말씀이 우리의 꿈이기에, 삶의 비전이기에 모여서 말씀을 함께 읽어나가는 모임,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가 만들어져야 한다.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이 말씀 집회를 민족의 살 길이라고 믿고 수문 앞 광장 모임을 가졌다. 이 시대도 민족과 교회의 성도의 가정을 살리는 길은 말씀 중심의 삶에 달려 있다. 지금 다 무너지는 소리 밖에 없다. 교회마저도 무너진다는 소리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교육계, 경제계, 체육계, 법조계 등 다 무너진다고 하는데 교회도 요동한다. 하지만 말씀을 위한 수문 앞 광장 집회가 재현된다면 이 시대에 우리 가정에, 내 영성 생활에 말씀을 존중하고 말씀을 세우는 모임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다. 다 무너져도 말씀이 세워진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

[1.20] 수문 앞 광장의 눈물

수문 앞 광장의 눈물 구약성서에는 거대한 건축이야기가 세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처음은 에 나오는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의 상징은 그 높이를 ‘하늘에 닿게’하는 데 있었습니다.(창11:4) 그래서 바벨탑은 인간교만의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두 번째는 솔로몬 왕이 건축한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이었습니다.(왕상6-7장) 솔로몬 성전과 왕궁의 상징은 웅장함과 화려함이었으며, 그것은 인간욕망과 교만의 또 다른 상징이었습니다. 세 번째 건축은 총독 스룹바벨이 중심이 되어 이끈 제2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건축들 뒤에는 주제 하나가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건축 뒤에 스며든 공허(emptiness)였습니다. 바벨탑 이후 인간은 언어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분열하고 이별하는 저주의 역사로 이어 졌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세운 예루살렘 제2성전이 봉헌되는 날, 수소 100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큰 제사와 축제의 날(스6:16-22)에 부족 간의 불신과 저주 그리고 살육은 이스라엘 민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건축 이후에 스며든 공허라는 아이러니! 그것은 건축은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여기! 건축이 끝난 자리! 공허가 깊게 드리운 팔레스타인에는 총독 느헤미야가 등장합니다. 그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지원을 받아서 예루살렘에 가서 총독의 지위를 가지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52일 만에 중건하는 작업을 완수합니다. 이러한 느헤미야의 모습은 리더십의 모델입니다. 느헤미야는 공감의 능력을 가졌습니다.(느1:4)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정확한 타이밍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위임과 분담의 능력이 있었습니다.(느3장) 적대자를 다루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였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건축했으나 마음의 성전은 여전히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는 갑자기 많은 백성들이 모여 들었습니다.(느8:1) 그것은 그 어떤 정치적모임도, 사회적 집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전 봉헌 이후(주전 515년), 예루살렘 성벽 봉헌 이후(주전 445년) 그리고 총독 느헤미야가 지금 과감히 펼치고 있는 선한 정치 그 이후에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공허! 텅 빈 영혼! 갈급함! 그 것 때문이었습니다. 에는 한 편의 거대한 민족적 회개와 예배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수문 광장에서 펼쳐지는 이 예배 드라마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제사장 겸 율법사인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느8:1-3) 그것은 요란한 축제나 제사가 아니라 율법 말씀을 읽고 또 경청하는 소박한 행위가 전부였습니다. ‘말씀’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왕하 22:8-20)이후 백여 년 만에 하나님의 말씀과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하나님의 오심이었습니다. 지치고 쓰러진 백성들이 말씀을 통해 오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호흡하는 생명의 순간들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복원하고 봉헌하고, 성벽을 완공하고 또 봉헌하고, 선한 정치를 맛보는 기쁨, 그러나 그곳에 여전히 깊게 드리운 공허와 좌절! 텅 빈 영혼! 갈급함 속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친히 그들을 찾아오고 계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고’ 이스라엘 영혼 깊은 곳에 친히 말씀하시고 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pre-text’(말씀이전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의 두 번째 사건은 말씀과의 만남을 통한 백성들의 응답이었습니다. 성경은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고 표현합니다.(8:9) 말씀 앞에서 모두가 운 것입니다. 그들의 눈을 적신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의 응답의 표현이었습니다. 눈물은 회심(metanoia)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지금 민족적 회개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눈물 속에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 이후 1000년 만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 눈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하는 눈물이며, 그 눈물은 ‘출애굽’사건을 기억하는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기억하는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느9:12) 가난한 자를 돌보는 희년을 기억하는 눈물이었으며(10:33),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세우는 눈물이었습니다.(9:38) 눈물은 눈물이로되, 역사적 책임으로 이어지는 감사와 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민족을 변화시킨 민족적 회개(metanoia)였습니다. 수문광장에 모여든 백성들! 오늘 우리가 그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성전 이후, 성벽 이후, 정치 이후 말씀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존재의 근원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눈물로 응답했습니다. 눈물은 민족을 다시 태어나게 하였으며, 역사를 바꾸어가는 민족적 에너지 일 수 있었습니다. 수문광장! 이곳이 오늘의 한국교회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수문광장의 눈물! 이것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눈물이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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