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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 하신 하나님 | [어노인팅] 신실하신 하나님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99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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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0515 어노인팅 목요예배 중]●예배인도: 전은주 전도사 ● 촬영/편집: www.c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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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신 하나님/손영진 – 벅스

… 기쁜 나 누리겠네 경배하며 주의 얼굴 구할때 신실하신 주님 찬양해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주 나의 주 하나님은 신실하신 주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 폭풍속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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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usic.bugs.co.kr

Date Published: 1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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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보좌앞에나아가(신실하신하나님)(악보/영상/가사)

주님보좌앞에나아가(신실하신하나님).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참된 안식과 기쁨 나 누리겠네 경배하며 주의 얼굴 구할 때 신실하신 주님 찬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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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orshipleader.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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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신 하나님 – 말씀침례교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특히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은 시험받는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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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v1611.net

Date Published: 1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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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 다음블로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시편105편 1- 45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약속은 철저한 이행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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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4/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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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신하나님 Instagram posts (photos and videos)

Explore Instagram posts for tag #신실하신하나님 – Picuki.com. …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유일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명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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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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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노인팅] 신실하신 하나님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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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신실 하신 하나님

  • Author: AnointingMusic\u0026Min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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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4.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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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신 하나님/손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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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보좌앞에나아가(신실하신하나님)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참된 안식과 기쁨 나 누리겠네

경배하며 주의 얼굴 구할 때

신실하신 주님 찬양해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

폭풍속에 내 등불 내 노래시라

주의 날개 아래서 내맘 쉬리니

신실하신 주님 찬양해

평화내려 주신 하나님

나로 고통 받는자를 위로하게 하소서

나의 평생에 주의 사랑을 전하리

신실하신 주님 찬양해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주

나의 주 하나님은 신실하신 주님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알자 씨리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복음 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잊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 없이 살아갑니다. 사람이 기억력이 나빠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남의 집 전화 번호나 사람 이름, 날짜 등은 기억력이 나쁘면 잊어버리지만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을 기억력이 나빠서 잊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결코 지성(知性)의 문제나 머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 생생한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명령과 법도와 법규를 지키지 아니함으로써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할지어다. ](신8:11).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듣기만 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듣기만 하면 잊기 쉽지만 듣고 나서 행해 본 사람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자주 반복해서 행하는 일은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 오직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가 거울로 자기의 본래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니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보고 떠나가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곧 잊어버리거니와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그 일을 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일에서 복을 받으리라. ](약1:22~25). 듣고 행할 때 주님을 잊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법규를 듣고 행하지 않음으로 주 하나님을 잊어 버렸습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주님을 잊어버립니다. [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그분께서는 너를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신8:14). 교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교만은 진리의 지식과 믿음을 지우는 지우개입니다. 교만은 저 하늘의 마귀를 지옥으로 끌어내릴 만큼 무거운 추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주님을 잊게 됩니다. [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네 능력의 반석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초목들을 심고 낯선 가지들과 함께 그것을 세우며 ](사17:10). 마음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은 쉽게 잊혀집니다. 중요하지 않는 말들, 중요하지 않는 사건들,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은 금방 잊어 먹습니다. 이 역시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귀하게 생각하고, 두려운 존재요, 사랑의 대상으로 합당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을 때 누구라도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으면 하나님은 잊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에 마음속에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 내 아들아, 내 법을 잊지 말고 네 마음으로 하여금 내 명령들을 지키게 할지어다. ](잠3:1), [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그것을 잊지 말며 내 입의 말들에서 벗어나지 말라. ](잠4:5)고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마치 마음의 빈 공간은 결코 비어 있지 않고 다른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듯이, 하나님을 잊을 때 그 자리는 우상이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도 신경 쓰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잊은 백성들에게는 엄중한 심판과 재앙의 저주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멸망합니다. [ 네가 만일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걸으며 그들에게 경배하면 내가 이 날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니라. ](신8:19).

하나님을 잊었을 때 그들은 원수에게 넘겨졌습니다. [ 그들이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었을 때에 그분께서 그들을 하솔의 군대 대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팔아 넘기셨더니 그들이 너희 조상들과 싸우매 ](삼상12:9).

하나님을 잊을 때 모든 소망은 다 사라집니다. [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모든 자의 행로도 다 그와 같으며 위선자의 소망은 사라지리니 ](욥8:13).

하나님을 잊어버린 민족들은 사악한 민족들과 동격입니다. 종착역도 같습니다. [ 사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돌아가며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리하리니 ](시9:17).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은 하나님이 갈기갈기 찢으십니다. [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아, 이제 너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할지어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갈기갈기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으리라. ](시50:22).

이런 이유로 저는 사도 바울, 베드로, 유다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이 비록 이것들을 알고, 현재의 진리에 굳게 서 있을지라도 항상 이것들을 기억나게 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자]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늘 첫 시간에 택한 하나님의 성품은 신실함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다양하고 많은 성품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역자, 주의 종들로서 배워야 할 성품은 단연 신실함(faithfulness)입니다.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으신 분, 언제나 동일하신 분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실 때에만 하나님의 언약이 서 있을 것이며, 주님의 약속이 약속으로 우리의 소망으로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불변하시고 신실하신 분이 아니라면 많은 약속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확신을 가질 때에만 평안 가운데 살 수 있고, 미래의 삶을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신실함은 자신이 한 약속에 대한 충실성으로 드러납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지 못하신다면 능력이 없는 것도 될 수 있지만 신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무한한 지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한 가지 성품은 다른 모든 성품과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긍휼이란 성품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공의로우시고, 어떤 때는 사랑을 베푸시고, 어떤 때는 이런 성품이 주로 드러나시고 때가 되면 다른 성품으로 기울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므로 모든 순간에 모든 때에 거룩하심과 긍휼이 공존하시며, 공의와 사랑이 함께 하십니다.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한 가지 방향으로 쉽게 너무 기울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른 성품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본질, 본래의 성품에 거슬러 행동하실 수 없으시며, 거룩하심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시고 사랑에 조금도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으시며, 긍휼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고, 공의를 약화시키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은 욕망이나 공포나 연약함, 시련이나 외부의 유혹으로 인해, 내적인 충격이나 동기의 상실, 목표가 바뀌는 계획 수정 등으로 인해 무엇이든지 바뀔 수 있고,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의욕적으로 했던 일들에 대한 흥미의 상실 역시 우리의 신실함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신실하지 못합니다.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릅니다. 감정의 상태는 하루에 수 백 번, 수 천 번 더 변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바람에 이는 지푸라기보다 더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르기를, [ 대부분의 사람이 저마다 자기의 선함을 외치거늘 누가 신실한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요? ](잠20:6)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를 다녀 보면 신실한 목회자, 신실한 교인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저마다 자신이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시간의 증명(time tested)을 받은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며,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 ](약1:17). 주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오,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12에 말씀하시기를, [ 주께서 의복처럼 그것들을 접으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동일하시고 주의 연대(年代)는 끊어지지 아니하리이다, 하시되 ](히1:12)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13:8)고 말합니다.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실하심의 핵심입니다.

역사를 통해 교회나 성도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한 가지 속성을 다른 성품들보다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우위에 둠으로써 다른 성품을 배제하거나 아래에 둠으로써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강조하는 교회들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란 점을 무시하거나 거의 부인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엄청난 강조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원리 원칙 외에 어떤 조그마한 틈도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나 불쌍히 여기심과 같은 주님의 속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맙니다. 반대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연민과 동정, 불쌍히 여기심에 대해서만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공의로움에 대해 약화시키거나 손상을 가하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 자신이 아는 특성들을 강조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다른 성품들에 대해서 고쳐 보려고 생각하거나 진리에 대한 바른 견해를 반박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위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시각과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고 제한하는 그런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부분적으로 자신이 아는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방식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관념, 왜곡된 지식은 그것을 지니고 있는 성도와 교회를 기울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기울어질 때 그와 함께 교회와 예배의 수준도 기울어지며, 신앙의 순수성은 약화됩니다. 이는 어떤 교회도 성도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성품들을 있는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놀랍고도 경이롭습니다. [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주] 네 하나님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신실한 하나님이시니라. 그분께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되 ](신7:9).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특히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은 시험받는 자, 염려하는 자, 두려워하는 자, 실망하는 자들이 모두 힘을 얻고,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염려와 두려움에 빠진 성도들을 도우실 때 자신의 신실하심을 드러내 보이시고, 그 믿음을 회복해 주심으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그분의 어떠하심을 알아 나갈수록 자신의 문제는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 오 [주]여, 주의 긍휼은 하늘들에 있고 주의 신실하심은 구름들에까지 닿았으며 ](시36: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지식이 새로울수록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약속의 말씀들 역시 신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신실함이 아닙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자신이 약속하신 말씀을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지킨다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시편 89편을 보십시오. [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강하신 이가 누구리이까? 주를 둘러싼 주의 신실하심에 견줄 것이 무엇이리이까? ](시89:8). 사람들은 하늘과 땅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늘과 땅은 변합니다. 그러나 주의 신실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천년만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도 주를 둘러싼 주의 신실하심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지키시고, 성취하시는데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단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들의 성취를 보면서 주님의 신실하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수천 년간 변함없이 뜨는 아침해나, 밤에 뜨는 달보다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은 더욱더 신실합니다. [ 달같이, 하늘에 있는 신실한 증인같이 영원히 굳게 세워지리로다, 하셨도다. 셀라. ](시89:37).

사람들은 약속을 쉽게 하고도 잘 지키지 않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자신이 지상 천국을 만들 것처럼 많은 것들을 약속합니다. 결혼을 앞둔 청춘 남녀는 서로를 위해 살 것을 굳게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런 약속들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공허한지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실하심은 자신의 약속의 말씀들에 대해서 단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하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어찌 그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지 아니하리요? 어찌 그 이르신 말씀을 실행하시지 아니하리요? ](민23:19).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어떤 말씀도 이루지 않으실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일반인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위대한 약속들을 주셨는데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이 약속들은 너무나 크고 위대한 약속들이라 이 약속들만 붙들고도 이 생을 항해하는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첫째,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 [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 ](빌4:19). 이 생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약속보다 더 위대한 약속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신 동시에 연약한 우리를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떤 성도라도 능력 있는 일들을 할 수 있으며, 위대한 일을 계획하고 성취할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십니다. [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 ](빌1:6).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시작하셨고,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현재의 나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이미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넷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하노라. ](히13:6). 나의 조력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도움은 어디서도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섯째, 넘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9:8). 우리는 궁핍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심으로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궁상맞게 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잔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부어 주십니까? 남에게 주라고, 베푸는 삶을 살라고 부어 주십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 이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政使)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능히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할 것임이니라. ](롬8:38-39).

일곱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이 약속은 우리의 삶의 모든 파편들을 주님께서 모으셔서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여덟째, 모든 시험을 감당합니다. 우리가 능력 있고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시험을 이깁니다. [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 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이상 말한 여덟 가지 약속들은 너무나 크고 존귀한 약속들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 약속들을 모두 이루십니다. [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 ](딤후2:13). 우리는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고, 주님께서 이루시지 않는 것들이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 오 [주]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으므로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정하신 계획들은 신실과 진리이니이다. ](사25:1).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신실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받아서 표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신실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 또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너희는 [주]를 두려워하며 신실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이와 같이 행할지니라. ](대하19:9). 우리는 자기 사정에 따라서, 이해 득실에 따라서, 감정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하는 그런 조변석개(朝變夕改)형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릇 하나님의 종들의 공통점은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나 능력이나 힘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모세는 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란 평을 받았습니다. [ 내 종 모세와는 그리하지 아니하나니 그는 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니라. ](민12:7). 다니엘은 너무나 신실하여 아무도 그의 허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 그때에 총리들과 통치자들이 왕국에 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기회를 찾고자 하였으되 아무 기회도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신실하므로 그에게서 아무 실수나 허물도 찾아볼 수 없었음이더라. ](단6:4). 사도 바울은 신실한 자였습니다. [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음이니 ](딤전1:12). 이는 대언자들이나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일컬어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랑하는 자여, 네가 형제들에게나 낯선 자들에게나 무엇을 행하든지 신실하게 행하니 ](요삼1:5). 가이오는 신실한 형제였고, 사도 요한은 그에게 쓴 편지는 요한삼서란 성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서신을 쓴 후 실루아노를 통해 보내었는데 그는 신실한 형제였습니다. [ 내가 너희의 신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루아노 편에 간단히 써서 권면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가 이 은혜 안에 서 있느니라 .](벧전5:12). 신실한 형제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디모데는 신실한 형제였습니다. [ 이런 까닭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주} 안에서 신실한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나니 내가 모든 곳,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가 너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길들을 기억나게 하리라. ](고전4:17). 오네시모 역시 신실한 형제였습니다. [ 신실하고 사랑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 속한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에서 일어난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골4:9).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도망을 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실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있던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주인에게로 돌아감으로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란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의 양심은 깨끗해지고, 순수하고 정직해야 하며 더불어 갖추어야 할 한 가지 성품은 신실함입니다.

[또 한 너희가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요, ](골1:7). 에바브로 디도는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두기고 역시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 두기고가 내 모든 형편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주} 안에서 신실한 사역자요, 동료 종이라. ](골4:7).

신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지 않으면 주의 사역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목사, 교사, 선교사뿐만 아니라 집사의 자격 요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실함입니다. [ 이와 같이 집사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딤전3:11). 맑은 정신을 가지고 모든 일에 신실한 자가 집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으며, 이렇게 집사의 직분을 잘 수행하면 그는 큰 영광이 있습니다. [ 이는 집사의 직분을 잘 수행한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지위를 얻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에서 큰 담대함을 얻기 때문이니라. ](딤전3:13). 신실함이 없는 사람들은 수치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에게 사역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의 종은 무릇 신실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성공할 만한 자질, 지식,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점수를 주지만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들에게 점수를 부여하십니다. 주님은 신실한 종들에게 특권을 베푸십니다. 신실한 종에게는 보상이 큽니다. 주님은 적은 것에 신실한 종에게 많은 것을 맡겨 다스리게 하시고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많은 것을 맡겨 다스리게 하리니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25:21, 23). 주님은 신실한 자들에게 일을 주십니다. 주님이 사람을 쓰는 원칙은 능력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쓰실 때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학력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가진 재력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인사 원칙, 기준은 언제나 신실함입니다. 이는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인사 원칙입니다. [ 지극히 적은 것에 신실한 자는 많은 것에도 신실하고 지극히 적은 것에 불의한 자는 많은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16:10). 말씀을 보십시오. [ 그러므로 너희가 만일 불의한 맘몬에 신실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한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신실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16:11-12). 요약하면 “지극히 적은 것에 신실하라. 불의한 맘몬에도 신실하라. 남의 것에도 신실하라.”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기셨습니다.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함입니다. [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 또한 청지기들에게 요구할 것은 신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고전4:1-2). 하나님은 지혜롭고 신실한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종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넘쳐나지마 주님이 맡길만한 청지기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신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재주가 많고, 머리가 잘 돌아가고, 대인 관계가 좋아도 신실함이 없으면 그는 주님이 찾으시는 청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 {주}께서 이르시되,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 주인으로부터 그 집 사람들을 넘겨받아 다스리며 제 때에 그들 몫의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눅12:42).

우리는 복음의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주인의 뜻대로 권위를 위임받아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챙겨 먹으면 안됩니다. [ 이는 내가 자원하여 이것을 행하면 보상(報償)을 얻으려니와 자원하여 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청지기직을 내가 맡았기 때문이라. ](고전9:17). 복음 전파자는 복음의 청지기이고, 목자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 이는 감독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결코 책망 받을 것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 /그런즉/ 그는 자기 뜻대로 하지 아니하며 쉽게 화내지 아니하며 자기를 술에 내어 주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에 빠지지 아니하며 ](딛1:7).

여러분 역시 모두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맡은 청지기, 복음을 맡은 청지기,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청지기입니다. [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그 은사를 써서 섬기라. ](벧전4:10). “신실한 청지기, 지혜로운 청지기, 선한 청지기”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로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하나님께서 그 청지기직을 회수해서 다른 신실한 사람을 찾아 맡겨 버리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배운 말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전수의 원칙은 “신실한 사람들”을 찾아 맡기는 것입니다. [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2:2). 우리는 신실한 종으로서, 신실한 대사로서, 신실한 증인으로서 신실한 청지기로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역을 계속해야 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신실하다 뜻 (feat. 신실하신 하나님)

교회를 다니다 보면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종종 들어볼 수 있는데요. 정확히 신실하다는 어떤 뜻을 지니고 있을까요? 오늘은 신실하다 뜻, 신실하신 하나님 의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 신실하다 뜻

신실하다의 품사는 형용사로, ‘믿음직하고 착실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실하다는 한자 ‘신실’과 ‘-하다’가 결합한 형용사로,

신실의 한자는 각각 信(믿을 신), 實(열매 실)을 사용합니다.

2. 신실하신 하나님 의미

(예) 신실하신 하나님

교회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믿음직하고 착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 믿을 만한 분이고, 게으르지 않은 성실한 존재 ‘라는 의미로 해당 표현을 쓰는 것이지요.

(예) 신실하신 약속

믿음직하고 착실한 약속이란 의미는,

더 쉽게 말하면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음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지켜지는 약속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3. 신실하다 예문

– 그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매우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 사위가 될 사람이 신실해 보여 흡족하다.

– 내 친구는 신실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 내가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의 신실한 태도에 정직원으로 고용하기로 마음먹었다.

– 철수는 신실해서 지각하는 법이 없다.

– 이번에 입사한 신입은 신실하면서도 똑똑하기까지 하다.

– 청소년 유망주로 시작해 오랜 선수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실해 보였다.

– 우리 엄마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4. 신실하다 부사형

– 신실히

< 신실히 뜻>

믿음직하고 착실히.

(예) 이번에 고용한 가사도우미는 맡은 일을 신실히 잘하는 것 같다.

(예) 그는 작은 심부름도 신실히 잘해주었다.

5. 신실하다 비슷한 말

– 순순하다(恂恂하다)

< 순순하다 뜻 >

믿음직하고 거짓이 없다.

마무리

오늘은 신실하다 뜻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는데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성훈 목회자의 설교와 글

주 제: 신실하신 하나님

본 문: 창 48장 15절~16절

설교자: 조 성 훈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신실하셨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께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일년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신가 하고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은 참으로 험난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형의 축복을 빼앗고, 그 때문에 형을 피해 멀리 달아나기도 하였으며, 라반의 집에서 아내를 얻기 위해 수년을 일했고, 나중에는 네 명의 아내가 서로 시기하고 싸움으로 야곱을 힘들게 하는 등의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 비록 그가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그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늘 신실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삶도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고 감사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전 생애 동안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이를 지키셨으며, 그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삶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지만, 아브라함의 삶 역시 순탄하거나 행복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 장막을 치면서 생활하는 나그네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에굽으로 내려갔을 때,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는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아내를 찾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눈동자처럼 지키셨고, 그가 살아가는 동안 그의 목자가 되어 그를 인도하셨으며, 함께 하셨고, 그를 지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처럼 변함이 없으신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온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에게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다윗의 삶

다윗 역시 그의 삶을 돌아보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103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8-14)”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될까요?” 라고 물어보았을 때, 주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가나안 족속에게는 400년 넘게 인내를 보여주셨고,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2000년이 넘게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에 따라 갚지 않으심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벌하셨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운 분이신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할 때,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불쌍히 여기며,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 이것이 바로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밖에 우리는 여러 성경에서, 또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지나간 일년을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볼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흔적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모님의 마음보다도 훨씬 더 크고 너그러우며,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를 일일이 다 기억하시고, 이해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는 양의 모든 것을 아는데, 양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보호해야하는지, 어디로 인도해야할지를 모두 압니다. 양과 같은 우리 인생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술과 마약, 음행 등의 온갖 죄악에 빠져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탄식 속에 약탈당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 방어력이 전혀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영혼의 목자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좋은 목자를 만나게 되었습니까? 우리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목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과 주님의 신실하심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수차례 고백했습니다. 그의 서신서들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찬양이 많이 나옵니다. 서신서를 쓰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과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높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특권을 누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편안한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드온이 그랬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군대의 침략으로 몰래 숨어서 타작을 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압박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하고 반문 했습니다. 이고백이 많은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란 편안한 만사형통의 삶이 아닙니다. 선진들의 삶을 보십시오. 다윗의 경우 양을 먹이는 목자로서의 고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울에게 쫓겨 피난을 다니며 수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요셉 역시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에 팔려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실한 믿은 선진들은 고난 가운데 주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자녀로 인한 고통과 사회적, 경제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 했습니다. 실로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란 편안한 삶만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고난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김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 까지 그 일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감사 할 것은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대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면 우리 중에 살아 남아있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은혜로 죄사함을 받는 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이라고 야곱은 말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 데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하나님이 보호 하시지 않는 나면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건강히 잠자리에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 음식을 먹는 것 입는 것 – 매일을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살며 교회 가운데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자비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생의 끝에 서서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저 자신을 돌아볼 때 제가 구원 받은 것이나 그 이후의 삶에 있어 곁길로 간적도 있고 돌아온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함께하심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장래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항상 함께 하실 것 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들도 인생의 끝에서 자녀들을 모아놓고 유언할 때 야곱처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나를 인도하시고 공급하시고 보호 하셨다. 그리고 천국 소망을 갖게 하셨다.” 고 하실 것입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뿐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아보듯 하나님은 이 순간에도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이 얼마 놀라운 일입니까?

결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납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우리를 보시고 구원하시러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이런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우리주님께 나오셔서 그분을 주님으로 구세주로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은 나의 구주 하나님이십니다! 저의 삶을 주관 해 주세요! 제 길을 인도 하여 주세요! 저도 사랑받게 하여 주세요! 그렇게 고백하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면 주님은 여러분의 목자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미 구원 받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주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기억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바울의 권면처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 하고 범사에 감사합시다.

우림과돔밈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시편105편 1- 45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약속은 철저한 이행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는 이해관계에 따라 어제의 혈맹이 오늘의 적으로 돌변합니다. 또한 정치인들의 선거전 공약(公約)은 일단 당선이 되면 공약(空約)으로 바뀌는 것이 당연시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사귄 친구라 해도 신경을 쓰며 빠짐없이 살펴보아야 손해나 사기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다릅니다. 이 약속에는 담보도 없고 손해나 계약의 불이행을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귀한 아들이 그의 흘린 피로 맺어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귀중한 약속은 우리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대하6:14)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느1:5)

“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여”(느9:32)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단9:4)

본 시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시고 이삭과 야곱에게 확인하신 언약, 곧 가나안 땅을 그들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을 역사 속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이행하시는가를 서술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이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 그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삶은 곧 관계입니다. 가정생활은 부부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직장생활은 직장의 고용인과 피 고용인 그리고 나와 내게 맡겨진 과제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교회생활 혹은 신앙생활의 본질도 결국 관계의 문제라 할수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 교회의 지체된 성도의 관계야말로 교회생활의 질을 결정하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관계의 신실성을 테스트하는 시금석은 약속의 문제에 대한 관점과 그 이행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해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약속(promise)이라는 말을 좀 더 성경적으로 사용한다면 언약(covenant)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어떤 언약은 무조건적이며 어떤 언약은 조건적이기도 합니다. 무조건적인 언약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조건적인 언약들은 그의 기대를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무조건적인 언약들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기억하셨음을 회고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각해 보면 출애굽의 은혜도 가나안의 기업을 허락하심도 일방적인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오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구원의 은혜도 조건 없는 선물이며, 천국의 소망도 조건을 초월한 그의 언약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보다 조건적인 언약들에 대한 우리 편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의 책임은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약속한 일들에 대하여 신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이 모습만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 신실한 자녀의 본분을 다하는 길입니다.

(1-7절) 이스라엘 민족의 여명기에 그 민족을 위해 행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진술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감사하는 찬양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 시의 목적은 단순한 역사의 서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섭리하시고, 성취하신 하나님의 행사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내용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곧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빛이 빛을 좋아하듯이 거룩함을 지향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할 수 있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원토록 찬양할 수 있습니다. 거룩을 가장하여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분이 거룩한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결코 즐거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을 가장한 삶속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할 힘도 그분의 얼굴을 구할 의지도 없습니다.

본문 1- 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본 절에서 시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함으로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인정할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하시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찾는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하늘 나라에 새로이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 저곳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다가 선반위에 많은 보따리들이 쌓여 있는 큰 방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며 옆에 있던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저 많은 보따리들은 다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천사는 “이 보따리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셨으나 사람들이 결코 구하지 않고 찾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했던 그분의 능력과 축복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실로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데, 정작 우리는 구하지 않음으로 그 능력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8-23절) 이스라엘의 여명기인 초기 역사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선택한 족속과 친히 언약을 맺으시되 천대에 이르는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8절). 천대에 걸쳐 명령하셨다는 것은 곧 한계가 없는 기한으로 영원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맺으신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도 쪼갠 제물 위를 하나님께서 직접 통과하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당신이 택하신 후손에게 계속 전승될 약속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의식을 통해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 언약은 이삭에게로, 그리고 야곱에게로 이어졌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을 종의 신분으로 삼으시고 앞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17절).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하게 준행하셨음을 찬양하는 구절입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7:9)

본문 17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결과를 보기 전에는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손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던 그 순간에,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생활하던 그때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던 그때에, 누가 과연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을 7년 간의 기근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요셉을 미리 애굽 땅으로 보내어 기근에 대비하게 하고, 야곱의 가정을 비옥한 토지 고센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수년이 지난 후에야 밝혀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한 자들의 죄마저도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이용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죄를 지은 당사자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의 악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무너지는 예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들의 죄까지 이용하셔서 선을 이끌어내십니다.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은 현재의 환경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까지 미리 바라보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린 사건을 야곱의 편애에 의한 형제간의 갈등의 결과로만 해석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17절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출발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눈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모함같고, 그것이 죽을 일 같지만 결국 우리를 당신의 섭리 가운데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며 계획이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자격을 갖게 됩니다.

(24-45절)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애굽의 역사에는 모세와 아론과 여호수아가 선택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역사에 개입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설득시키시고, 훈련시키셔서 당신의 일군 삼으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역사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일하실 수도 있으시지만 언제나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군들을 선택하셔서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크고 작은 일을 맡기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설득시키시고, 훈련시키실 때 겸손히 응답하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스스로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대신 그 일을 능숙하게 하고 있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는 함정입니다. 순간마다 우리의 영이 깨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깨어있는 영성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하는 한날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스라엘이 떠나자 그들을 두려워했던 애굽은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구름과 불로 인도하시며, 하늘에서 양식을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광야에서 약속을 성취하심(37-42절)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빈손이 아닌 은과 금을 갖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강하게 붙드셨으며,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하셨습니다. 양식을 구하는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마실 물을 내어 먹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와 개입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행하신 일들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광야로 이끄실 때 그들의 필요 또한 이미 알고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기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광야와 같은 시기를 경험했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본문 40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수세식 화장실과 욕조와 샤워 시설 정도는 요즘 필수품목이지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유럽의 일부 왕후장상이 아니면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는 왕이나 비빈들까지도 궁궐 후원에다 차일을 쳐놓고 하늘을 지붕삼아 목욕을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옛날 어떤 특권계층의 사람도 누리지 못했던 영화를 누리고 사는 셈입니다. 밟기만 하면 붕붕 날아갈 듯 치달리는 승용차를 감히 옛날의 진시황인들 상상했겠습니까? 자동으로 부채질을 해주는 선풍기 하며, 그것도 모자라 요즘 널리 보급된 에어컨이 여름 더위를 무색케 합니다.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성경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전 5: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한즉 메추라기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탐욕이 인간의 최대 비극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는 길은 절대만족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감(43-45절)

이스라엘 백성은 즐겁게 노래하며 광야를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땅은 열방들이 살았던 땅이요, 열방의 백성이 수고해 가꾼 소유입니다. 그 땅을 이스라엘이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이는 열방이 애써 일궈 놓은 땅을 빼앗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축복으로, 은혜로 공급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열방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언약으로 맺어진 백성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나야 했던 죄악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유는 이전의 열방처럼 죄악을 따르지 말고, 율례와 법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합니까? 이 내용을 기록해 놓고 오늘 이 시대에 이 내용을 읽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깨우쳐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십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그것은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든지 말든지, 불가능하게 보이든지 말든지,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면 틀림없이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방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여 우리가 더 깊이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한 번 자녀로 삼아놓으셨고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면 이 관계를 다시는 파기하지 아니하시는 이 관계를 영원토록 유지시켜 나가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계속해서 잘못 행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비록 그들을 이방에 넘겨 무서운 징계의 시간을 허락하시면서까지라도 끝내 그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셨던 것은,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비록 좀 연약하고 부족해서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에게 또 어떤 고난과 징계의 형편에 몰아 넣으실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복된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통해서 좀 불안한 신앙생활을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가시면서라도 완성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굳게 확신하고 그 하나님의 위로와 그 하나님의 치유를 우리가 순간순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돌아보면, 정말 우리 자신을 어느 곳에 맡길만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너무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영접한 우리 하나님은 우리 자신 전체를 전폭적으로 그 분에게 위탁해도 전혀 변덕 없이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영원토록 책임져 주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굳게 믿고, 오늘도 나가면서 소망이 넘치는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최선을 다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궁무진하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무리 엄청난 약속을 해 주셨어도 그것이 내가 지키지 않으면 나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밥상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았어도 그 음식을 먹어야 내 몸에 영양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은 지켜질 때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게 되면 효력이 상실되는 것뿐만 아니라 몇 갑절 더 큰 재앙과 환난, 고통이 오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신28:15)

과학자들이 건강한 쥐 한 마리를 항아리에 집어넣고 햇빛이 비치지 않도록 완전히 뚜껑을 덮고,다른 항아리에도 쥐 한 마리를 집어넣고 햇빛이 비치도록 조그만 구멍을 뚫어놓고 비교해 보았는데, 햇빛이 조금도 비치지 않는 캄캄한 항아리 속에 들어간 쥐는 3분을 못 견디고 죽었지만 햇빛이 비치도록 구멍을 뚫어 놓은 항아리의 쥐는 무려 36시간이 지나도 안 죽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캄캄한 항아리의 쥐가 3분 만에 죽은 것은 체력 때문이 아니라 절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캄캄한 절망에 처했기 때문에 3분 만에 죽은 것입니다.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은 추억으로 살지만 지혜롭고 복된 사람은 꿈과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꿈과 희망이 있으면 고난과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는 성도는 참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우리 하나님은 꿈과 소망의 하나님이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무능하고 연약한 사람을 찾아오시어 꿈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데라의 아들(수 24:2)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르를 떠나 하란에서 머물던 어느 날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놀라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때의 아브람의 삶은 영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아브람은 세상 풍조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였으며(엡 2:1~3) 75세로 자식을 낳지 못한 소망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을 찾아오시어 아브람이 상상도 못했던 약속을 주셨으니 이것은 은혜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이 세상 사람들이 찾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권세가와 재력가와 능력 있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의 집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고 만나려고 애를 쓸까요?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야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무엇이든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인을 찾아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시고(마 11:28~30),모든 죄의 짐을 다 담당해 주시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친히 찾아가 만나 주시고 축복하신 사람들이 누구인지 성경을 보십시오! 베델의 야곱, 호렙 산의 모세, 빈 배와 베드로,세리 마태,무지한 핍박자 사울, 베데스다 연못가 38년 된 환자,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글로바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은 이들을 찾아 오셔서 만나주시고 상상도 못할 꿈을 갖도록 도와 주셨으니, 오늘도 성령하나님이 임하시면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행 2:16~19)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자식은 바로 하나님의 상급이요 기업이요 축복이었습니다.(시 127:3) 자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요 꿈도 소망도 없는 인생인 것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은 자식이 없는 아브람을 찾아 오셔서 그 소원을 아시고 꿈을 주셨습니다.(창 12:2)

둘째, 은혜의 하나님은 꿈을 주실 뿐만 아니라 꿈을 성취시켜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내가, 내가”라고 하셨으니,약속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약속을 성취시켜 주시는 분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람의 삶에는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시고 보살펴 주시고 책임져 주시며 함께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아브람은 마침내 언약을 성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언제나 언약을 이루어가도록 임마누엘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택하여 애굽으로 보내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구름기둥,불기둥으로 동행하셨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 절망 중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꿈을 주시면서(겔 36:37~38)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고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아버지이신지요?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셋째,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고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뮐러는 “믿음은 사람이나 환경이나 그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다”라고 믿음을 정의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나 순종으로 증거되며,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가장 올바른 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75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꿈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올인 하였으니 모든 기업을 정리하고 고향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믿음으로 출발 하였습니다. 어느 것으로 어떻게 가야한다고 구체적인 여정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믿음의 발걸음을 출발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마침내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꿈을 주시는 하나님은 마지막 결과를 말씀하지만,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을 믿음으로 살면 내일까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또 내일을 믿음으로 살면 모레도 책임지시고 날마다 믿음으로 살면 영원히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오늘도 마음에 품고 나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서 신령한 축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기도: 오 언약의 하나님,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게 하소서. 우리로 주를 닮아 언약에 신실한 종으로 한 평생을 살게 하소서. 주님은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며, 저는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릅니다. 언제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이루시는 주님을 높이 찬양하며 즐거이 주님께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각 개인의 인생 역사를 이제까지 이끄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오늘도 찬송하게 하옵소서. 만족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택하신 백성에게 신실하신 하나님

시 50:10

신실하지 못한 태도는 오늘날과 같은 사악한 시대에 가장 흔한 죄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의 말은 극도로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계약서와 같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또한 부부들 사이에서도 불륜을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신성한 결혼 서약을 저버리는 일이 마치 낡은 옷을 벗어 던지듯 쉽게 이루어진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진리를 전하겠다고 엄숙히 맹세한 사람들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진리를 공격하고 부인하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독자들이나 저자인 나도 이 두려운 죄로부터 안심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측면에서 그리스도께 불충실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빛과 특권을 무시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따라서 이 참담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항상 모든 일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축복이자 희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신 7:9).

신실함은 하나님의 존재에 반드시 필요하다. 이 속성이 없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시다면 그분의 본성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신다는 것인데,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主)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신실함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시 89:8)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신실함으로 옷을 입으셨다. 또한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가리켜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라고 표현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시 36:5)라고 노래했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은 인간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에 관한 것은 무엇이나 지극히 위대하고 광대하고 불가해하다. 하나님은 잊으시거나 실패하시거나 머뭇거리시거나 헛된 말을 일삼는 법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이나 예언을 충실히 지키시며, 일단 약속을 하시거나 심판을 선언하시면 반드시 그대로 이루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人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따라서 신자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2,23)라고 소리 높여 찬양해야 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하는 구절이 많다. 하나님은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신 뒤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라고 말씀하셨다. 매년 새로 시작되는 한 해는 하나님이 하신 이 약속의 신실함을 증언한다.

또한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13-16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수세기가 흘렀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의 벽돌 굽는 가마 사이에서 고통 중에 신음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옛 약속을 잊으셨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다음 성경 구절을 읽어보자.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41).

또한 이사야는 오래전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라고 예언했다. 그로부터 다시 수세기가 흐른 뒤에 바울 사도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그분의 약속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과의 관계에서 충실하시다. 그분은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누구든지 실망하지 않는다. 성경은 도처에서 이 귀한 진리를 명백히 증언한다. 그 이유는 선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분의 완전한 속성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이다. 이 속성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분의 속성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 사실을 믿고 행동하는 것은 서로 별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귀한 약속’을 많이 주셨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이 그 약속들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약속하신 말씀을 모두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을까? 과연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히 10:23)라는 말씀을 마음속으로 굳게 확신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는 믿음

누구의 삶에나 쉽지 않은 상황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신자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살다 보면 우리의 믿음이 큰 시련에 직면하고, 눈물이 우리의 눈을 흐릿하게 적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흔적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때가 찾아온다.

그런 때면 세상의 온갖 소음이 우리의 귀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이 없다는 사탄의 속삭임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세미하고 사랑스러운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소중히 여기던 계획도 좌절되고, 의지했던 친구들도 우리를 실망시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 된 신자들도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께 충실하려고 노력했건만 어두운 구름이 몰려와 그분을 가린다.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고난의 섭리와 은혜로운 약속을 조화시키기가 어려운 정도를 뛰어넘어 아예 불가능하다. 비틀거리는 영혼이여, 노곤한 순례자여,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라는 말씀에서 은혜를 구하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와 그분의 사랑의 약속을 조화시키기 어려울지라도 잠잠히 기다리며 인도의 빛을 구하라. 그러면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7)라는 말씀대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시어 새로운 깨달음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거나 속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 30:18).

연약한 이성으로 주님을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은혜를 신뢰하라.

주님은 찌푸린 표정의 섭리 뒤에

미소 띤 얼굴을 감추고 계신다.

너희 두려워하는 성도들이여, 새로운 용기를 내라.

그대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구름은

자비를 가득 머금고 머지않아

그대의 머리 위에 축복을 쏟아내리라.

– 영국 시인 윌리엄 코퍼의 시

구원과 징계를 성실히 베푸시는 하나님

“주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시 119:138).

하나님은 최상의 것만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최악의 것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타락으로 인한 참상을 솔직하게 보여주시며, 죄가 몰고 온 끔찍한 결과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그분은 언제나 악을 극도로 미워하시는 마음을 숨기지 않으시고 악을 성실히 징벌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소멸하는 불”(히 12:29)이라고 경고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은혜로운 약속에 충실하실 뿐 아니라 심판의 경고에 대해서도 똑같이 충실하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런 엄숙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개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로와 고라와 아간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지 않으면 영원한 불못의 형벌이 우리의 운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1.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을 보존하는 일에 신실하시다

바울 사도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라고 말했다. 그 바로 앞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선택받은 백성을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것이라는 약속이 발견된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성도의 견인(堅忍)’(성도는 끝까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교리)에 대한 바울 사도의 확신은 믿음을 지키겠다는 신자들의 결심이나 능력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진실성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성자(聖子)에게 선택하신 백성을 기업으로 주시고, 그들을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어 영광 가운데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

2.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을 징계하는 일에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일은 물론, 은혜를 거두시는 일에도 똑같이 신실하시다. 그분은 기쁨을 주기도 하시고 슬픔을 주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가 편안할 때나 엄한 징계 아래 고통을 받을 때나 늘 변함이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단지 말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징계의 회초리로 우리를 때리실 때도 변함없이 신실하시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불평보다는 도리어 감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신다. “주의 몸(성만찬)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고전 11:29,30)라는 말씀이 이러한 원리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주님께 매를 맞을 때는 다니엘처럼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단 9:7 참조).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라고 말했다. 고난과 시련은 영원한 언약에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할 뿐 아니라 그러한 사랑이 겉으로 표현된 것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 중에도 신실하실 뿐 아니라 고난으로 징계를 베푸시는 데도 신실하시다. 다음 성경 말씀을 읽어보자.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시 89:32,33).

징계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양립하는 것은 물론, 그것의 표현이자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적 사랑’(히브리어로는 ‘헤세드’, 언약에 기초한 신실한 사랑) 때문에 필요할 때 징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호 5:15)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고난은 성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3.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신실하시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여기에서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는”(살전 5:23) 성도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이름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롬 8:30) 목적에도 충실하시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기이한 빛으로 인도하시고, 그 후로 끝까지 그들의 구원을 충실히 보전하심으로써 그들을 향한 영원한 사랑을 드러내신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딤후 2:19)라고 말했다. 우리는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확신했던 바울 사도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해할 때

이 복된 진리,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해하면 걱정근심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다. 걱정근심이 가득한 마음,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앞날에 대한 짙은 불안감 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징후이다.

선택하신 백성을 처음부터 줄곧 보살펴오신 하나님은 말년에도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과거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우리 모두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욥 5:19)라는 말씀을 굳게 붙잡자.

또한 이 복된 진리를 이해하면 불평을 그칠 수 있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잘 알고 계신다. 이 진리를 붙잡으면 무례한 불평을 그칠 수 있다. 징계와 시련을 당할 때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고, 그분의 지혜와 정의를 인정하며, 그분의 꾸짖음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리고 이 복된 진리를 이해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강해진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善)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19)라고 말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일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굳게 의지하면, 머지않아 그분의 섭리에 만족하며 “하나님이 만사를 선히 행하신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창46장)

오늘은 창세기 46장을 통하여 ‘신실하신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7세기 영구 설교가 작가인 Johm Bunyan은 복음 때문에 핍박 받고 12년간의 감옥생활 중에 천로역정(Pilfrim’s Progress)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주제는 4가지입니다.

1. 이 땅은 장망성이라고 합니다. 곧 망할 이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엡2:2-3).

망할 이 세상과 짝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강한 세상의 문화에 유혹받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의욕을 상실시킵니다. 기계문명을 통하여 자녀들의 사고력을 마비시킵니다. 이 흑암문화를 물리쳐 주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할 일입니다.

2. 망하지 않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와 같습니다.

4. 하나님 자녀가 가는 길 골목마다 사단이 방해하고 유혹하기에 말씀의 검, 곧 언약으로 물리치고 일심, 전심, 지속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고 있는 가운데 2014년 10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힘듭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면 인생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1. 4족장의 인생길

4족장의 인생길을 묵상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아브라함

① 영적배경이 황무한 우상의 배경속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된 현장을 예비하시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이다” 라고 칭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의 배경이 안 좋아아도 하나님이 언약하시면 어느날 하나님의 증거가 드러날 줄 믿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가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창12:1-3)

② 변화되지 않은 영적상태로 자기체질, 자기기준으로 여전히 살아갔습니다.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왔지만 의식주 문제가 닥쳐 왔습니다. 문제앞에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기 방법대로 이방나라 애굽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교회 나왔지만 하나님 말씀 밖에 있다면 물 떠난 물고기와 같습니다. 물 떠난 물고기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죽은 자와 마찬가지 입니다. 힘이 없기에 살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철저한 개인 주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남편된 아브라함을 자기가 살기 위하여 자기 아내를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장치 않으면 모두가 다 철저한 개인주의로 살아갑니다.

③ 여호와께서 그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니리셨습니다(창12:18).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마므리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창13:18).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318명의 가병이 있을 정도의 대부가 되었습니다(창14:14). 하나님께 집중해야 유일성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복음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나를 헌신하는 것입니다.

④ 무자한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창16:12)

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창22장). 하나님은 숫양을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2) 이삭

번제몰로 드려진 이삭의 인생은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는 인생이었습니다. 1년 농사로 100년의 응답을 허락하셨습니다(창26:12) . 아브라함의 믿음의 확증 속에 그의 아들 이삭이 100년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복음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3) 야곱

간사하고 거짓말하며 인간 수단으로 살아가는 야곱을 변화 시켜 12지파의 아버지로 세우신 하나님

4) 요셉

많은 어려움이 왔었지만 언약을 굳게 붙잡고 원망, 불평 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갔습니다. 최고의 승리자 세계 복음화의 주역자가 되었습니다.

2. 희생제자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

예배를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1) 야곱이 애곱으로 가다가 브엘세바에서 이삭의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창46:1).

① 프로스쿠네오

‘절하다’,’ 꿇어 엎드리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절대항복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믿음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② 예배의 성공자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자,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자, 하나님의 언약에 붙잡힌 자 입니다.

2) 신실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창46:2-4)

①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②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라

③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분명한 이정표

④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분명한 목표

⑤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분명한 미래

3. 여호와 닛시요 이레의 신실하신 하나님

1) 여호와 닛시-인생의 승리

창46: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2)여호와 이레

애굽인이 싫어 하는 목축업으로 고센땅에 분리시킵니다. 하나님이 분별한 자를 분리 시키는 것입니다.

[결론]

1. 5 확신

1) 구원의 확신

2) 승리의 확신

3) 인도의 확신

4) 기도응답의 확신

5) 사죄의 확신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가는 참 목적이 우리의 Mission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3. 신실하신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 인생

자신앞에 진실하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변화된 증인으로 서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한 시대의 전도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부르시고 축복하십니다.

언약 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누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시89:1-18)

본 시편의 큰 주제는 위기에 처한 다윗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다윗의 언약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다윗에게 확실한 은혜를 예고하셨습니다. ꁾ삼하7:8-16(8-9, 16)

시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견고하고 영원하기 때문에, 시인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결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1-4절에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5-18절에서, 이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사람의 진실한 응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기도 시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기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폭풍우가 불어오던 날 밤, 주일 저녁 예배를 위해서 교회에 들어서던 목사님은 텅 비어 있는 교회당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조금 있으면 오겠지!’ 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대여섯 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이없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밀실로 들어갔습니다. “많은 성도가 모이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목사님이 교회에 가 보니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신이 나서 ‘우리 모두 찬송을 부릅시다.’라고 하면서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한참 열심히 부르는데, 문득 피아노 반주 소리도, 찬송 소리도 들리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오직 어린 한 소녀의 찬송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잠을 깨었습니다. 그때서야, 목사님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과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배하는 사람의 숫자에 있어서는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요한복음4:23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어떤 것임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을 통해 밝히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어떠한지 살펴봅시다.

본문1-4절을 봅시다.

시인이 먼저 초두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노래하는 것은 아주 합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향하시는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불변합니다. 그래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행하십니다.

ꁾ민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 찬양의 제목입니다. 즉, 우리에게 약속하신 언약과 그 약속을 시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 시117:1-2)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본문에서처럼,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은밀한 섭리하심을 ‘씨가 자라는 비유’와 ‘누룩 비유’등을 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ꁾ마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막4:26-27,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처럼 비록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시인은 여기서 우리 자신이 먼저 해야 할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1절을 보십시오.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이는, 단순히 ‘입으로 선포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알게 하겠다.” 즉,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깨달아 납득하여,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도록 실행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에서 따르는 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합니다. 비록 현실이 위기 상황이고 고통과 좌절감이 엄습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생활은 계속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하는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대대에 자녀와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본문5-13절을 봅시다.

시인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섬김과 찬양의 대상이지 인간의 판단이나 비교의 대상이 아님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찬양 받으실 하나님은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피조물 중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권능의 主이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목을 업으로 하고 있는 유대인에게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기 때문에 위태로운 일을 만날 때나, 대적들을 만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험에서 건지시고 지키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 Almight>라고 불렀습니다. (<엘 샤다이>는 ‘山地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많다. 즉, 유목 생활을 하던 시대의 유목민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이다. )

ꁾ창17:1,7(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출6:2-3(모세 시대에 나타나신 하나님)

본 시편의 상황으로 보아, 당시에 주어진 형편이 힘들고 어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어 주실 것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의 상황이 좋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시인에게 가장 호소력이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천사나 인간이나, 위대한 자연조차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아래에서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1) 창조의 손입니다.

ꁾ11절, “하늘이 주의 것이요 … 세계와 그 중에서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오늘날,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도 능력의 천사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인간과 같이 어떤 것도 스스로 창조할 수 없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참된 능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있습니다.

2) 능력의 손입니다.

ꁾ10절, “주께서 라합을 …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라합’이란? 이스라엘을 대적하며 괴롭혔던 애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겸손하고 온유한 자, 그리고 상처 입은 자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입니다. 그러나, 강퍅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가장 두렵고 강력한 심판의 손입니다.

3) 구원의 손입니다.

ꁾ13절, 하나님의 오른 손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능력의 손이 높이 들렸다’ 함은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본문14-18절을 봅시다.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본 시의 배경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어두운 상황입니다. 즉, 유다 왕국이 멸망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즐거운 소리’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신약의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환경은 비록 암울하지만, 다윗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대를 결코 끊어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즉, 다윗의 언약을 체험으로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혹은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15하-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 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 우리는 이 말씀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성도는 환경과 여건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당면한 현실이 어떠하더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주의 얼굴 빛, 즉 imago Dei의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17절),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롬12:12의 말씀처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뢰하며,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높여 주십니다.

ꁾ본문16-18절, 벧전5:6-7

여러분이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십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주를 찬양하며 기뻐하며 높이시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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