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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주석 | [하루 한 장] 누가복음9장_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123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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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14 (화) [하루 한 장]“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눅9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누가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사자로
각 성과 촌에 두루 보내시면서
여행을 위한 준비물들을 하나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보내신 이가
그들의 삶을 책임지고 보장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알도록
깨닫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이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이 친히 책임을 물을 것을
약속하는 말씀까지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이 필요한
구원의 대상으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의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짜 삶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부산 성민교회 분홍목사의 설교 영상들을 통해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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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주석 – Daum 카페

누가복음 제 9장 =====9:1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 이 제자들은 5:3-11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처 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어 6:12-16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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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흗날에 살아나야 한다.” 우리말성경,22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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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982-누가복음 09장 · 1)우리는 자기부정과 인내에 익숙해져야 한다(23절). 또한 안일과 욕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 2)우리는 어떤 세속적인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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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 장 – 문제와 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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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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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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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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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8688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누가복음 제 9장. =====9:1 … 또한 누가는 마가복음에 있는 ‘권세'(* … 분봉왕 헤롯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3:1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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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누가복음 9장을 하나로 묶는 소재를 굳이 찾아내자면 ‘제자’가 될 것이다. 물론 헬라 원문의 경우는 아니지만 한글개역성경의 누가복음 총 24장 가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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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누가복음9장_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루 한 장] 누가복음9장_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복음 9장 주석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5,2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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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ozWbp785dM

누가복음 9장 주석

누가복음 제 9장

=====9:1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 이 제자들은 5:3-11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처

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어 6:12-16에서 그 선택이 완료된 인물들이다. 예수께서 열

둘을 부르신 것은 열 두 지파에 의해 상징되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비되는 새 이스

라엘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Hendriksen). 한편 누가는 마가의 ‘부르다'(*

, 프로스칼레오)라는 표현(막 6:7) 대신 ‘불러 모으다'(* ,

슁칼레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8:51에 있었던 잠깐 동안의 헤어짐과의

논리적 일관성을 고려한 누가의 세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귀신…능력과 권세 – 마태와(마 10:1) 마가는(막 6:7)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모든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마태와 마가는 귀신의 악함에 초점을 두고 누가는 ‘모든 종류’의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또한 누가는 마가복음에 있는 ‘권세'(*

, 엑수시아)에 능력(* , 뒤나미스)을 첨가하고 있는데, 전

자는 합법적 권리나 권위를 나타내며 후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이 예수 당시와 초대 교

회에도 있었던 마술사(행 19:13)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

다.

=====9:2

하나님의 나라…보내시며 – 마태에 의하면(마 9:36)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동

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

라고 하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두 가지 책무를 부여받고서 파송되었다. (1)제자들

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과 인격 속에 현존함과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이기도 했다(마 6:10).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뜻을 백성

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편협한 민족주의적 희망

으로인해 곡해(曲解)하고는 있었으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왕권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4:15;마 18:1;20:21;막 11:10;15:43;14:15). 하나

님 나라의 개념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막 1:15의 주제 강해 ‘하나님의 나라개념’을 참

조하라. (2)제자들은 병을 고쳐주어야 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영적인 일

이라면 병을 고치는 것은 육적인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바 육적인 문제의 해결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짐에 주목해야 한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이 영혼의 구원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질병 치유가 단순히 영혼의 문제로 이끌어 가는 수

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병을 고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서 ‘전파하고'(* , 케뤼쎄인)와 ‘고치는’

(* , 이아스다이)이 대등 접속사 ‘카이'(* )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한편 제자들이 해야할 이 두가지 과제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는 일은 다름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인데(11절;마 9:35), 이는 제

자들이 해야하는 일이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계승할 사도로 서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9:3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 – 예수께서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도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 하나 세부적인 항목

까지 열거하고 있다. (1)지팡이(* , 라브도스)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점에 대해서는 마태도(마 10:10) 동일하게 보도하고 있으나 마가는(막 6:8) 지팡이

는 허용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ㄱ)마가는 왕하 4:29에 나오는 게하시의 경우처럼 지팡이를 스승의 권위에 대

한 상징으로 파악했다는 견해(Schurmann). 그러나 게하시의 경우에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스승의 지팡이를 사용했다. 따라서 만약 게하시의 경우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려

면 제자들 모두가 스승인 예수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야 한다. (ㄴ)누가는 지팡이나

슬리퍼나 허리띠를 띠고 성전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는 랍비적

규율을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Manson). (ㄷ)발음은 비슷하나 뜻은 서로 다른 아람어가

혼동되었다는 견해. 즉 ‘…외에’라는 뜻의 ‘ella'(엘라)와 ‘그리고…도 아닌’의 의

미를 가진 ‘wla'(웰라)를 혼동한데서 생긴 차이이다. 이 설명은 헬라어 성경 원문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ㄹ)두 복음서 기자가 서

로 다른 지팡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 즉 마가는 길을 걸을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누가는 맹수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팡이를 각각 염두에 두었

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복음서가 모두 여행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인 ‘라브도스’를 사

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충분한 해명이 못된다. 결국 이런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설명은 아직 없다 하겠다. (2)가방(* , 페라)을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가방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는 가방일 수도 있고 동

냥 주머니일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주머니가 동냥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

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 여행 도중에 축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여행 필수품을 담는 가방이라면 아무것도 의지할만한 물건을 소유하지 말

라는 의미에서 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빵(* , 아르토스)도 가지고 가

지 못했다. (4)돈(* , 아르귀리온)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스스로 필수품을 자급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5)마

지막으로 두 벌 옷(* , 키톤)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 옷은 속옷으로 거

의 발에까지 닿으며 소매가 달려있었다(Hendriksen). 한편 마가복음에는(막 6:9) 신발

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해 누가는 신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고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여

행에 필요한 일체의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일을함에 있어서 현실적 여건이나 물질에 의지하지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

지하라는 신앙을 가르쳐주며, 동시에 사사로운 재산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

하고 따르라는 예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18:18-27). 22:35에 의하면 실제로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전도하러 다녔지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9:4

어느 집에…떠나라 – 여행 준비에 관한 말씀에 이어 이번에는 유숙(留宿)하는 방

법을 일러주신다. 물론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머물라는 말은 아니며 말씀을 받아 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마 10:11). 그러나 한 번 숙소를 정했으

면 그 마을을 떠날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지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대

접을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주의

교훈집으로 알려지고 있는 ‘디다케'(Dedache)에는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거짓 선지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는데, 본문은 제자들이 거짓 선지자들 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 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9:5

발에서…떨어버려 –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는 경우에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고

이스라엘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지역에서 묻은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들어

간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별(聖別)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이 이러한 행위

를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선민과 이방인의 진정한 구분은 메

시지를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2)더 나아가 발의 먼지

를 떠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

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이자 증거가 된다. (3)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받

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 둠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

하게 되었을 때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행 13:50,51에 의하면 바울

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주의 일을 하는 도중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당하였을 때도 이런 행동을 했었다.

=====9:6

나가 각 촌에 – ‘나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르콘토'(* )는

‘디에르 코마이'(* )의 미완료과거 중간태로서 제자들의 선교 활동

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촌'(* , 코마스)이라는 단어

에 대해서 그룬트만(Grundmann)같은 학자는 예수가 읍내들을 돌아다니신데 비해 제자

들은 촌락들을 돌아다닌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8:1에 의하면 예수께서도 ‘성’ 뿐만

아니라 ‘촌’에도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처처에 복음을…병을 고치더라 – ‘처처에’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쿠'(*

)는 ‘그들이 가는곳 어디서나’의 뜻으로, 제자들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

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등 예수의 사역을 열심히 대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바

야흐로 제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9:7

분봉왕 헤롯 – 이는 헤롯이 왕(王)이 아니라 영주(領主)였음을 뜻한다. 그는

B.C.4-A.D. 39까지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었는데 그 지역은 예수의 사역이 펼쳐

진 중심지였다. 분봉왕 헤롯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3:1주석 참조.

이 모든 일 – 이 문구의 헬라어 표현은 ‘타 기노메나 판타'(*

)로 문법 구조상 현재 중간태 분사임을 알수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생

하고 있는 모든일을 말한다. ‘이 모든 일’이란 일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일으키셨던 갖

가지의 이적들과 선포이겠지만 누가는 이 표현을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에 이어 서술

함으로써 제자들의 역할도 예수의 소문이 널리퍼져 헤롯의 귀에까지 들려지게 되는데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시사한다.

심히 당황하여 – 이 말은 부정의 접두사 ‘디아'(* )와 ‘길’을 뜻하는 ‘포로

스'(* )의 합성어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헤

롯도 당황하여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표현이 문법상 미

완료 과거 능동태인 점을 감안할 때 헤롯의 당황과 불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

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이…살아났다고도 하며 – 마태나(마 14:2) 마가(막 6:14)는 헤롯이 예수의 소

식을 듣자 곧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의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와 마

가는 예수에 관한 헤롯의 최종적인 확신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고 누가는 무엇이 헤롯

으로 하여금 이 최종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를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즉 먼저는

세례 요한이 살아난 인물이 바로 예수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지

자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한 자신의 좋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하여(3:19,20;마

14:3-11;막 6:17-28) 즉시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이 예수

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구약적 부활 사상이

담겨져 있음(신 32:39;삼상 2:6;욥 19:25-27)을 엿보게 한다.

=====9:8

혹은 엘리야가…혹은 옛 선지자…함이라 –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하게된 배경에는

말 4:5의 말씀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종말을 알리는 ‘종말적 예언

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와의 연관성은 세례 요한에

게 그가 적용된다(1:17;마 11:14). 예수는 단지 종말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성

취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 대한 세번째 견해는, 옛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살아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들은 정

확하게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것이지만 예수의 사역이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에

게 선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퍼져나갔음을 알수 있다.

=====9:9

이 사람이 누군고…보고자 하더라 – 헤롯은 예수께 대한 다른 두 가지 견해에 대

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세례 요한에 관한 견해에 집착하며 고민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의로운 세례 요한을 터무니 없이 죽인 일에 대해서 늘 양심의

가책을 겪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마 14:3-11; 막 6:17-28). 여기서 “-자 하더라”는 표

현 ‘에제테이'(* )는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헤롯이 계속해서 예수를 보고자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13:31에 의하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자 한것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죄 없는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악의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예수를 희롱하며 예수가 처형되는 일에 적극적인 방조자

내지는 동조자(同調者)로서의 역할을 했다(23:8,11).

=====9:10

사도들이 돌아와…고한대 – 제자들이 사역한 기간이나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일들

은 분명히 명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시에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사역의 기간과 다시 모이는 장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서 ‘고한

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게산토'(* )는 “경과를 끝까지 이야

기한다”는 의미로서 제자들이 행한 모든 일들을 예수께 상세히 보고하였음을 가리킨

다.

벳새다 – 이 지명의 뜻은 ‘고기 잡는집’인데 정확한 명칭은 ‘벳새다 율리아스'(Be-

thsaida Julias)로 빌립왕이 건설하여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

서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인 이곳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하다(요 1:44). 예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간것은 제자들이 먼 선교여행에서 돌아왔고 더구나

예수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

문이다(막 6:31). 말하자면 피곤하고 시장한 제자들에게 쉼을 주고자 하는 예수의 자

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따로’ 사적인 만남

을 갖고자했음을 부각시키는 인상을 주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선교 여

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주고 동시에 제자들이 했던 일들에 대한 의

미를 설명해 주면서 그들을 온전한 사도로 교육시키는 기회로도 삼고자 했을 것이다.

=====9:11

무리가…따라 왔거늘 –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마가에 의하면(막

6:32,33)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예수와 그의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알아 본 많은 사람들이 배가 상륙할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

가는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보다는 예수께 많은 사람들

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강조점을 두려는 듯하다.

영접하사…고치시더라 – 제자들 하고만 있고자 했던 예수의 계획은 모여든 무리들

로 인해 일단 좌절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을 떠나간 것은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

니라 제자들과 별도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영접했다 해

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영접했다’는 표현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목자없

는 양 같이 보인 불쌍한 무리들을 따뜻이 그리고 흔쾌하게 맞아주신 예수의 온정을 느

끼게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두 가지 하셨는데 하나는 하

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는 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에 걸린 자

를 고쳐주는 일이다. 특히 ‘이야기 하시며'(* , 엘랄레이)와 ‘고치시더라’

(* , 이아토)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상당한

시간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9:12

날이 저물어 가매 –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병고치는 능력에

완전히 마음이 붙들려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듯하다.

먹을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시티스몬'(* )은 ‘곡

식’을 뜻하는 ‘시티온'(* )에서 유래한 동사 ‘에피시티조 마이'(*

, ‘스스로 양식을 공급하다’)에서 나온 단어로 특히 고대 헬라어에

서 ‘여행중의 양식’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제자들이 무리들의 묵을 곳

과 먹을것을 염려하는 모습은 예수의 생각에 비교한다면 믿음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

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이었다는 점에

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9:13

너희가 먹을 것을…없삽나이다 – 예수는 제자들이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불

리먹일 수 있는 아무런 물질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

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령을 하신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

해 볼 수 있다. (1)본문에서는 ‘너희가'(* , 휘메이스)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데, 이것은 무리들의 배고픔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책임의식을 가

지고 해결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계승해야할 사도로서, 예

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전적인 책임의식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백

성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2)예수께서는 선교여행 중 지녔던 권세

와 능력에 대해 망각한 채 극히 평범하고 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제자들을 깨우쳐

주고 책망하는 의미로 그런 주문을 하셨다. (3)제자들은 선교여행 중 아무 것도 소유

하지 않았으나 주리지않고 헐벗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

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것에 대해

서 필요에 따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적인 동

시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명령은 엘리

사가 그의 사환에게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라고 명령한 것을 연상시킨다(왕

하 4:42-44). 이에 대해 제자들은 자기들이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함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본문의 기록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가 두 마리 뿐이니 이것은 단 한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양이다. (2)지금의 장소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음식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수가 없다.

(3)설령 사람을 보내어 200데나리온 어치의 음식을 사온다 한들 어림없이 부족하다(요

6:7). 특히 마가(막 6:37)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당치도 않다는 듯 빈정대

는 말투로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비교적 진지한 태도로 대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9:14

남자가 한 오천 명 – 남자 장정만 오천명 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한다면 그

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될 것이다.

떼를 지어 – 마가는 이 표현을 라틴어의 ‘심포지움’ 즉 ‘향연’과 같은 의미의 ‘쉼

포시아'(* )를 사용하는데(막 6:39) 비해 누가는 이 표현을 ‘클리시아

스'(* )라는 단어로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정찬에 참석하기 위해 모

여드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것으로서, 마샬(Marshall)같은 학자는 이것이

초대 교회의 만찬을 반영해 준다고 한다.

한 오십 명씩 앉히라 – 여기서도 누가는 독특하게 ‘한'(* , 호세이)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누가는 의사와 역사가로서 숫자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비교, 막 6:40). 몇 명 단위로 앉혔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

서는 전승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여기서는 단지 무리를 일정한 단위

로 세분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리를 세

분화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9:15

제자들이…다 앉힌 후 – 제자들이 예수의 지시에 아무런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역시 음식이 어디서 올것

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9:16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공관복음서 모두가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문구(文句)이

다. 여기서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식사 관습과 일치한다. ‘축사

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오'(* )는 ‘찬양하다’, ‘축복하다’,

‘감사하다’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것은 하나님의 이

적적인 능력을 요청한 것이 아니며 단지 평범한 감사의 식사 기도로 보아야한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는 삶을 사신 예수께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

으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한 별도의 간구가 필요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어…놓게하시니 – ‘주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두'(* )는 ‘디도

미'(* )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예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었음을 가리킨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의 손에서 제자들을 경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

되었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어떤 기적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우리는 ‘주어'(* , 에디두)라는 미완료 동사에서 예수의

손에서 떡이 끝없이 계속해서 떼어져 나가는 기적적인 증가가 있었음을 암시받을 뿐이

다.

=====9: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배불리 먹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다. 이는 예수의 능력의 완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

서는 육신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 보다는 신령한 영의 양식으로 무리를 먹이는

일에 궁극적 목적을 두셨다. 이는 예수의 능력에 매료(魅了)되어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도한 요한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요 6:14,15,26,27)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 –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은데 그치지 않고 남은 양이 무려

열 두 바구니가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들이라 명하시는

데(요 6:12), 이것은 음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외에도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예수의 이적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다음에

또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켜 해결해 주시리라는 기대는 갖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구니'(* , 코피노이)는 군인들이 장비나 급식을 담아 짊어지고 다니

는 기구 또는 여행자들이 음식과 필수품을 가지고 다니는 기구를 가리킨다. 처음의 시

작은 바구니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는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 앞에 바쳐졌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음에 주목하라. 제자들은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안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겨우 한 아이의 식사에 적합할 만큼

의 적은 것으로 큰 일을 하신 것이다.

=====9:18

따로 기도하실 때에 – 누가는 막 6:45-8:26의 내용을 생략한 채 오병 이어의 기적

에 이어 바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으로 넘어가기 위해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인 ‘…할때에’라는 ‘엔토'(* )구문으로 단락을 전환시키고 있다. 마태나 마가

에 의하면(마 16:13;막 8:27) 이 장소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이었다. 가이사랴 빌립

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90km 떨어진 헤르몬 산 근처의 성읍으로 특히 우상 숭배로

유명하다. 토착민들은 바알신을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pan)의 신당

을 지어 섬겼으며 헤롯은 황제 아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런 우상 숭배의 지역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나

의 아이러니(irony)라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는 이러한 단락 전환에 있어서 그 서두를

예수께서 기도 중에 있는 사실로 시작하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전개될 것임

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누가의 복음서 기록에 있어서 예수의 기도는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3:21;6:12;9:28).

무리가…누구라고 하느냐 – 무리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못들

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물으신 듯하다. 예수께서 지

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리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었으며, 그는 이미

무리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요 6:14,15,26).

=====9:19

세례 요한…엘리야…선지자…살아났다 – 제자들의 답변은 7,8절에서 헤롯이 들

었던 소문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특별성은 보았으나 그가 단순히 특

별한 선지자 이상의 존재 즉 메시야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했다.

=====9: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은 무

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수많은 이적적

권능들을 나타내 보이셨다(8:22-25,26-35,41-56;9:10-17). 이 모든 일들은 첫째, 그에

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며, 둘째,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게하려는 간접적인 교육의 일환이었다. 이제 예수는 제자들이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의 이해를 갖게되었을 것이라고 보아 이런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한편 이 물음은 모

든 신앙인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요청이기도 하다. 즉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어떻게 경험하는가하는 질문이다.

베드로가…그리스도시니이다 – 질문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나 역시 제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기록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간에 표현상의 차

이를 나타낸다.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로 마

가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로, 요한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되

어 있어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 호 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을 받은자’ 즉 메시야를 뜻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1)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곧 성경에 예언된 바 하나님의 뜻을 성

취시킨 인물임을 말한다(민 24:17). (2)또한 이 고백은 예수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

으로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시인한 것이다(요 10:30;요일

4:2).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지금까지 의문시 되어 왔던 예수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

으나 마태복음에는(마 16:17-19) 훌륭한 고백을 한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칭찬과 약속

이 언급되며, 그 본문은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하여 교회의 머

리가 된다는 근거로도 사용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보라.

=====9:21

경계하사…명하시고 – ‘경계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티마오'(*

)인데 이 말은 ‘보통 꾸짖다'(4:35)라는 뜻을 가지나 여기서는 ‘당부하다’ 또

는 ‘심각하게 말하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명령하다'(*

, 파랑겔로)를 첨가하여 매우 강도 높은 함구령임을 부각시겼다.

예수께서 이렇게 메시야로서의 정체를 강력하게 숨기려 한것은 (1)유대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오랜 역사의 억압과 수탈을 당해 오

면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열렬히 대망했다. 따라서 예수가 메시

야시라는 소문이 퍼져나갈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자로 세우려고

들었을 것이다(요 6:14,15). (2)예수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라는

소문이 퍼질 경우 너무나 빨리 그에게 정치적 위협이 다가올 수 있고 그럴 경우 예수

의 지상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3:31).

=====9:22

인자가…하리라 – 본절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차례의 수난 예고 가운데 첫번째

것으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바로 이어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

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즉 예수는 민족적 정치적 메시야로서 유대의 주권을 회복하

여 그들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 주는 임무를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

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는 임무를 띠고 오신 분이다. 본절의 수난 예고는 예수

에게 네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해주는데 (1)먼저 수난을 당하신다. 이 고난의 배경

에는 사 53:4,11의 예언이 있다. (2)버림을 받으신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아포도키

마조'(* )는 ‘거부하다’, ‘쓸모 없다고 선언하다’는 뜻으로 공

무원 지망생을 면밀히 조사하고 심사한 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경우나 열등한 화

폐를 검사하여 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이 예수를 거부하

고 배척할 것을 말해준다. (3)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4)죽은 후 제 삼 일에 살아나실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일어나다’는 표현을 능동태 ‘아나스테나이'(*

)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수동태 ‘에게르데나이'(* )를

사용하여 ‘일으킴을 받는다'(be raised)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과 삶에

하나님의 권능이 개입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동사

‘데이'(* )는 당위의 뜻인 바, 예수의 수난이 필연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밝

혀준다(사 53장; 요 3:16;롬 8:32).

인자 – 여기서 인자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5:24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장로들'(* , 프레스뷔테

로스)은 지방의 하급 법원에서 재판관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람들로 지방의 공회를 구

성하였다(7:3;20:1;22:52). ‘대제사장들'(* , 아르키에류스)은 1년

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과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권한이

있다. 본래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종신적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고 총독들에 의해 임시로 교체되는 관행이 생기면서부터 그 권위가 많이 실추되

었다.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된 것은 대제사장을 지냈던 사람들까지 포함

해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기관들'(* , 그람마튜스)은 ‘랍

비’, ‘율법사’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대부분 바리새인으로서 각각 공공기관 또

는 사설 단체에 속하여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에 힘썼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나열되고 있는데 실제로 이 그룹들은 유대 최고의 권력기관

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무리들이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모두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지고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기관이었

다. 유대민족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백성들을 옳바른 종교적인 삶으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차단시키는 역할을 선도적으로 하게된다는 것은

비극적인 유대인의 역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9:23

자기를 부인하고…십자가를 지고 – 예수의 길이 분명하였듯이(22절) 이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야함을 말해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누구에

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의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기란 실로

어렵다. 첫째로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자기 부정이란 자신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자기 십가가를 져야한다. 십자가는 로

마시대의 형벌 중 가장 잔혹한것으로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세째로 이러한 자기부

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지속성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려면 일시적 결심으로만은 부족하며 일관된 신앙 훈련이 요구된다.

=====9:24

목숨을…잃을 것이요 – 자기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

아의 범주 속에 파묻혀 일신상(一身上)의 부귀 영화만을 위하여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

자는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잃게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을 거부하

는 자는 교회에 핍박과 순교의 시련이 올 때 육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최후의 심판 때 진정한 생명을 잃게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요 12:25).

나를 위하여…구원하리라 – 마가복음에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하여 ‘복음’

을 첨가하고 있으나 누가는 그것을 삭제하여 예수께 대한 헌신에 초점을 집중 시킨다.

진리를 위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기꺼이 포기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잃음이 아니요 얻음이라는 이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의 참 제

자라 할 수 있다.

=====9:25

온 천하를…유익하리요 –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의 문제를 가르친다.

세상이 제공하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누려본다 한들 자기의 영

혼과 본성을 잃게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기위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의 가치를 소모한

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온 천하를 잃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마지막에 결

코 잃어버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계 2:10).

=====9:26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적극적 의미에서는 복음 증거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

적 반응을 의식(意識)하지 말라는 당부이며, 소극적 의미에서는 박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 승천후 교회에 핍박이 닥쳐올 때

예수께서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 무기력해 보이며 기독교인들의 삶이 실패자의 모습처

럼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자도…부끄러워 하리라 –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재림이 최초로 언급되고있다. 누

가는 마태나(마 16:27), 마가(막 8:38)와 달리 ‘자기와 천사의 영광’을 첨가하여 “자

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이라는 삼중(三重)의 영광 형식으로 표현함으로

써 재림주로 오실 예수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은 사람들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마 16:27)에 주목하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히 12:2) 종말 때의 심판주로 재림하시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을 부끄러워 하여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은 혹 세상을 얻었을지 몰

라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수치스러운 종국을 맞게 될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믿

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롬 1:16).

=====9:27

여기 섰는…있느니라 – 26절에서 예수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심판을 확인

하였다면 본절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이 약속되고 있다. 본절에서 먼

저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섰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보게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해답

을 얻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쉽지 않다. (1)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예수의 변모를 목격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 (2)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오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견해, (3)오순절

이후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 (4)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다. 이 중 세번째 견해가 유력하다고 본다.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 누가는 마태(마 17:1)나 마가(막 9:2)와 달리 이 연결구를 첨

가하여 앞에서 하신 말씀과 이제 시작되는 이야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과 이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본 사건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죽

은 딸을 살리시는 사건(8:51)에서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결단시에도(마

26:37;막 14:33) 예수를 따로 수행했던 제자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드로는 훗날 여

기서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벧후 1:17,18에 증언하기도 했다.

기도 하시러 산에 –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산행(山行)의 목적을

밝힌다. 전통적으로 이 산에 대해서는 ‘헤르몬 산’, ‘메론 산’, ‘다볼산’이라는 추측

들이 있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누가에게 있어

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이며 앞으로 일

어날 놀라운 계시의 사건도 ‘기도’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9:29

기도하실 때에…나더라 –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는 문자적으로 ‘그 얼굴의 모습

이 달라졌다’이다. 마태에 의하면(마 17:2)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한다. 이

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4:11;계 1:16;10:1). 한편 누가는 ‘변형되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메테모르포데'(마 17:2;막 9:2)가 헬라적 사고방식을 따

른 신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마 28:3;막 16:5;행 1:10;계 3:4,5;7:14). 이것 역시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준

다. 또한 ‘광채가 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사스트랖톤'(*

)인데 이 말은 ‘밖으로’ 또는 ‘앞으로’를 뜻하는 ‘엑스'(* )와 ‘빛이 번쩍나다’를

뜻하는 ‘아스트랖토'(* )의 합성어로 예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

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결국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

모는 (1)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35절) 확

증해 주며 (2)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22, 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

는 점(빌 2:8-11)을 암시하며 또한 (3)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과(롬

8:34) 다시금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간접적이나마 보여주는 것이

다.

=====9:30

모세와 엘리야 –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이자

예언의 대표자이다. 또한 모세는 과거에 시내산에서(출 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왕상 19:8)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

시야를 예언하였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다(말 4:5). 엘리

야는 산채로 승천하였고(왕하 2:11), 모세도 특이한 방식으로 소천당하여 그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신 34:6). 이제 이들이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결국 모세와 엘

리야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마 5:17,18).

=====9:31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

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 )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

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

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

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

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9:32

곤하여 졸다가 – 본절 역시 누가만의 기록으로 예수와 두 구약인물이 예루살렘에서

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기도함으로써 하늘의 계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신데 반해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

에 곯아 떨어짐으로써 포착했어야 될 중요한 계시를 놓쳤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곡해

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한다(33절).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연출되는

데, 그 때에도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는데 반해 제

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실수를 범하며 결국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

결과를 초래했다(22:42-46).

아주 깨어…보더니 –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깨어난다. 아마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 때문에 깨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예수와 두 인물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예수의 영광에 두 사람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을 능가하는 존재임을 간접 시사한

다.

=====9:33

<변회산>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이 제단은 하늘로부터 온 두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바램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수난 예

고와(22절)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31절)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리

스도의 제자로서 겪어야하는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하기를 도모하는

비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초막 셋을 짓되 – 이 초막은 숙곳에서 장막절에 사용했던 것(출 13:20)과 같이 나

뭇잎이나 기타 일시적인 재료로 지은 움막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텐트나 장막을

가리킨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상적인 영광의 임재를 계속해서 느끼

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초막 셋’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다른 두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적 무지를 반영한다.

=====9:34

구름 – 구름은 미래에 다시오실 인자와 관련되기도 하고(단 7:13) 성도들을 하늘로

들려 올리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며(계 11:12), 신 구약 중간시대 문학에서는 메시야의

도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였다(위경 2 Baruch 53:1-12;4 Ezra 13:3). 구

름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경우이다(출

16:10;19:9;24:15-18;33:9). 특히 출 24:15-18에는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병행구를 찾아

볼 수 있다. 예수와 두 인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이어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말미암

아 상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저희를 덮는지라 –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예수와 두인물 그리고 3제자 모두(Schurmann), (2)모세와 엘리야만

(Greijdanus, Williams), (3)예수와 모세, 엘리야(Godet, Knox, Marshall). 이 중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무서워하더니 – 신적인 권능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

끼기 마련인데 이는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 때문이다(8:25;24:4,5).

=====9:35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

이기에 그만큼 이 선언은 엄숙하고 확정적이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들려왔던 음성과도 비슷하다(3:22).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예수 이해

는 이제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더이상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요

한에 의하면 수난 주간에도 한번 더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요 12:28).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사역의 시작과 절정기와 마지막에 주어진 것이며 이것

은 그 사역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마태

(마 17:5)나 마가(막 9:7)와 달리 ‘사랑하는’을 생략하고 ‘택함을 받은 자’를 첨가하

고 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과 아

울러 예수의 권위의 출처가 초월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저의 말을 들으라 – 이 명령은 신 18:15의 반영으로 이제 예수의 정체(正體)가 분

명히 드러난 이상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의 말을 들으려 하

지 않거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이 명령은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 선택 여하에 따른 필연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하여

튼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순종에 있으며 예수께서 제시하는 사역의 목적과 방

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라는 것이다(마 16:21-23).

=====9:36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 누가는 상황이 끝나는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마 17:6-8 비교).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만’ 남아 있음이

‘오직’이란 뜻의 ‘모노스'(* )로 강조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

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 뿐이다. 그만큼 예수는 탁월하신 분이라

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 때에는…아니하니라 –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잠정적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

을 말하는데 아마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말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듯하다(마 17:9;

막 9:9).

=====9:37

이튿날 – 누가만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에 의하면 변화산의 영광

이 밤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태나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엘리야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17:10-13;막 9:11-13) 누

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한채 바로 무리들과의 만남을 서술한다. 이 무리들 중에는 베드

로, 요한, 야고보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고(40절), 막 9:14에 의하면 서기관들도 있

었다고 한다.

=====9:38

내 외아들이니이다 – 무리들이 예수를 기다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딱한 사정에 대

하여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은 8:40,41에 있는 야이로의 외딸을 살리신 사건과 유사하

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외아들’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당하는

고통의 극심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고통이 극심한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릴 때(7:12)나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릴

때도(8:41) 마찬가지였다. 한편 누가는 아버지의 간청을 묘사함에 있어서 마가(막

9:22)의 ‘불쌍히 여기다'(* , 스플랑크니조마이)를 ‘돌아보

다'(* , 에피블렙사이)로 대치시키고 있는데 이 단어는 ‘위로’를 뜻

하는 ‘에피'(* )와 ‘보다’를 뜻하는 ‘블레포'(* )의 합성어로 환자를

정밀하게 검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이다. 의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9:39

귀신이 저를 잡아 – 마태는 이 아이가 간질병에 걸렸다 하고(마 17:15), 마가는 벙

어리 귀신에 들렸다고 하나(막 9:17) 누가는 간략하게 귀신에 붙잡혔다고만 서술하고

있다. 누가로서는 이 사건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확증을 받은 ‘아들’과 아들

의 사역을 방해하는 핵심 세력인 ‘귀신’과의 싸움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졸지에…떠나 가나이다 – 이런 증세는 의학적으로 규명할 때 간질병의 증세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 간질병 배후(背後)에는 귀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

의 공통된 진술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의 문제는 간질병과 예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귀신과 예수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9:40

제자들…능히 못하더이다 – 결국 서기관들을 포함한 무리들의 변론 주제가(막

9:14) 제자들의 무능력에 관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신적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동안 예수와 함께 있던 세 제자는 잠을 자고(32절), 아래

에 있던 제자들은 귀신에 붙잡힌 아이를 구하지 못해 무리들로부터 실망을 사고 서기

관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인 바, 이는 제자들의 아둔함을 잘 보여준

다. 본래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온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능히 예수를 대신하여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권능을 받았고 그 권능으로 능히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6

절). 그렇다면 제자들의 능력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

이 없었기 때문이다.

=====9:41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이 꾸중은 믿음 없는 제자들과 거기 모인 모든 무리

들에게 하신 것임에 분명하다. 한 아이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과 다른 입

장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한 아이의 고통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을 발

동시켜 이적(異蹟) 자체를 즐기려는 무리들에게 적합한 책망인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패역한 무리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너희를 참으리요 – 본절에 나타난 ‘믿음이 없는’, ‘패역한’ 등의

표현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들을(신 32:5,20) 반

영하며, 본문의 말씀은 더이상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패역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들을 품안에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를 연상시킨다(사 46:4).

이제 예수의 지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의 종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제자

들은 여전히 믿음의 결핍을 노출시켰고 거짓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무리들은 점점

더 패역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예수의 격한 감정은 ‘호'(* )라는 탄식어가

잘 나타내 준다.

=====9:42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 ‘올때에’는 문자적으로 ‘아직 저가 오고있는 동안’

의 의미로 아직 소년이 예수 앞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부터 귀신이 도발을 시작했음을

뜻한다(비교, 막 9:20). ‘거꾸러뜨리고'(* , 엘렉센 아우톤)

는 전투나 레슬링에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타격을 가하는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아이의 발작이 귀신의 공격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귀신이 예수의 사역

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에서 감행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더러운 귀신을…낫게하사 – 귀신의 격렬한 도발 행위는 예수의 꾸짖음 앞에서 무

기력하게 멈춰졌고 결과적으로 아이는 괴롭힘당했던 모든 질병들로부터 치유를 받았

다. 한편 마가(막 9:22-24)는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을 갖게 되는 이야기를 전해 줌으

로써 신앙적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그 부분을 생략하여 예수의 놀라운

치유 능력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 조금전의 엄한 꾸짖음(41절)과 달리 이번에는 부드러운 사

랑과 자비로운 행위로 아이를 아비에게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런 행위는

7:15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질적 성품이 사랑임을 나타내 준다.

=====9:43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확인은 예수의 귀신 축사를 통해 분명히 증명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사건 속에서

예수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하게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행위를 보면서 그의 정체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수준까지 이

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제껏 겪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9: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 사람들이 예수의 행함을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예

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다시 한번 수난 예고를 하고 있다. 이 수난 예고는 22절에 이

어 두번째에 해당하며 여기서는 ‘너희'(* , 휘메이스)가 강조적으로 쓰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다른 사람들이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기적들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든지 제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 들어야 한다는 것이

다. ‘이 말들’이란 계속 이어지는 ‘수난 예고’를 가리킨다.

인자가…넘기우리라 –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수난 예고는 누가복음 전체에 기록

되어 있는 네 번의 수난예고 가운데 두번째 것이다(9:22,44;18:31-34;22:21-23). 여기

서 ‘넘기우다'(* , 파라디도스다이)는 수동태의 표현은 가룟

유다에 의한 배반을 예고하며 ‘사람들’은 22절에 언급된 바 있는 산헤드린(Sanhedrin)

을 가리킨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배반 이면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었음이 전제되

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마태(마 17:23)나, 마가(막 17:31)와 달리

누가는 여기서 ‘부활’에 관해서는 언급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9:45

알지 못하였나니 – 제자들은 두 번에 걸쳐 주어진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

하였다. 제자들은 첫째,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變貌)를 목격하고 이어서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

던 까닭에, 둘째 수동태의 ‘히나'(* )절에 의해 확인되는 바 제자들의 몰 이해

배후에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

고 있다. 이러한 ‘숨김’에 대한 진술은 본서에만 나오며, 일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제자들이 무지한 상태일 수 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여기서 누가가 더 중요하게 말하고

자하는 것은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에로의 길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갖게 될 성서

적 지식과 부활의 빛에서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Marshall).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것에 대해 묻

기조차 두려워 하였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

고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23-27절에 기록된 바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스스로 사도로서 사역할 수 있

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9:46

누가 크냐 – 마가복음에서(막 9:33)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이르는 노중(路中)에 논

쟁을 벌였으며 가버나움에 이르러 예수의 추궁이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서술을 생략한 채 문제의 쟁점만을 취급한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한 것이었다(마 18:1). 여기서 변론(* , 디알로

기스모스)은 ‘논쟁’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음

을 시사한다. 불과 일주일 쯤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을 가르치셨고(23,24절), 조

금 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수난을 제차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44절) 제자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결국 메시야가 일으켜 세

울 왕국에서 누가 높은 요직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때 제자들

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아(ego)를 버리지 못하고

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찬 제자들로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할 수 없

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9:47

예수께서…아시고 – 제자들은 예수 몰래 자기들 끼리 논쟁을 벌였으나 예수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다툼을 이미 알고 계셨다.

어린아이 하나를…세우시고 – 누가는 마태나(마 18:3,4), 마가(막 9:35)가 기록하

고 있는 ‘큰 자’에 대한 결론적 서언을 생략한 채 바로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장면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9:48

내 이름으로…영접함이요 – 예수께서 제자들의 사고 방식을 교정시켜주기 위해 간

접적인 방식으로 교훈을 베푸신다. 먼저 ‘내이름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명예

나 지위가 예수께 완전히 종속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모든 제자들의 이름은 예수라

는 이름 앞에 따로 드러날 수 없으며 모든 영광이 예수의 이름에 돌려져야 함을 뜻한

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은 예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라고 하여(막

9:37) 어린이 일반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데 비해 누가는 ‘이 어린아이’라고 하여 바

로 제자들 앞에 서 있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실제로

어린아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

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나를 영접하면…영접함이라 –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예수를 영접하면 그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이 논리는 성도들의 대인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열

쇠가 된다.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생들을 자연 모습대로 대할 때에는 누구나 환멸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과 주님의 피로 새로 태

어난 생명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헌신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 –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역설적 진리는 23-25절에서 말씀하

신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역설적 진리와 갖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며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위의 대가로 지위나 명예를 얻어 보려는 욕망을 버린 사람이다. 한편

본문에서 ‘가장 낮은 자’와 대비되는 개념을 ‘가장 큰 자’가 아니라 단순히 ‘큰 자’라

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데는 비교 우위의 개념이 적용되

지만 높아지는 데에는 비교 우위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9:49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다.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같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단의 일원이 아

니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였다. 여기서 제자들이 취한 행동은 그들만이 예

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베풀 수 있는 제한된 자격을 가졌다는 자의식(自意識)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1, 2) 아울러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실패에 대

한(40절) 열등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9:50

금하지 말라…위하는 자니라 – 그 사람은 예수에게서 특별히 권위를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예수께 대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1:23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

는 자니라”는 말씀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바의 요지는 이러하다.

익명(匿名)의 귀신 추방자는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의 참경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

고 그가 확신하는 바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의 행

위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했던 일을(6, 42절) 한 것이므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하는

자인 셈이다. 이것은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하는 일

의 내용과 지향점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9:51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 여기서 ‘승천'(* , 아날렘프세오

스)은 ‘위로’를 뜻하는 ‘아나'(* )와 ‘올리다’의 의미를 갖는 ‘렙시스'(*

)의 합성어로 ‘들어 올라감’이란 뜻이다(24:51). 여기서는 ‘죽음'(31절) 대신 ‘승

천’이 언급됨으로써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차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플레로오'(*

)는 본래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승천을 성취할 시

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런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었음과 예

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심을 분명히 밝혀준다.

예루살렘을…굳게 결심하시고 – 갈릴리로부터 예수의 최종 종착지인 예루살렘에로

의 대전환이 언급되고 있다. 승천은 곧 수난과 죽음을 전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그

일이 일어날 장소인 예루살렘에로의 행로를 굳은 결심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굳게 결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어귀는 ‘…로 얼굴을 향하다’는 셈어적인 표현

으로 굳게 마음을 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곧 죽음을 뜻한다 하

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는 죽음을 향한 결단을

하신 것이다(22:42;요 10:11).

=====9:52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

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

(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

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

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

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9:53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

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

은 예루살렘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

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

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

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

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

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

=====9:54

야고보와 요한이…원하시나이까 –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

(Sons of Thunder, NIV)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는데(막 3:17), 그 까닭은 본절에서 보

는대로 그들의 성격이 매우 급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들은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하

나의 보복 조처를 제안하는데 그 내용은 아하시야 왕 당시 엘리야를 모욕했던 자들에

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들을 사른 사건(왕하 1:10-12)을 반영한다. 어쨌든 제자들

은 복음이나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였으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을 구원하며 잃어버린

자들을 건지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19:10;요 3:17;12:47)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9:55

꾸짖으시고 – 구체적인 내용없이 간략하게 언급된 ‘꾸짖으시고’는 제자들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일축하셨음을 말해준다. 제자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의해 보복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구약적 대응방식 즉 ‘이에는 이로 눈에

는 눈으로’를 거절하시고 도리어 꾸짖고 있다. 제자들은 엘리야의 방식 즉 ‘보복의 방

식’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사랑의 방식을 말씀하심으로써 엘리야를 능가하는 분

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여기 나타난 예수의 태도는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저항

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에 대한 하나의 복선(伏線)이라 할 수 있다.

=====9:56

다른 촌으로 – 누가는 지리에 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고 단지 다른 곳으로갔다

고만 하여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한 사실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예루살

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방해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보복적 행동을 취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는 먼 길로 돌아가는 비효율적 방식을 택하셨고 폭력이 아닌 평화의 길을 택하셨다.

그것이야 말로 참된 삶의 방식,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이러한 예수의 방

법을 따를 때 모든 난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 한편 학자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간 ‘다른 촌’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추측하는데, (1)사마리아에 있는 다른 마을

(Klostermann, Zahn, Plummer), (2)사마리아로부터 다시 돌아간 갈릴리의 어느 촌

(Bruce, Gilmour, Farrar), (3)베레아 접경의 촌 등이 그것이며 이중 어느 견해가 정

확한지 단정 지을수 없으나 9절과 10:10과 17:11의 본문을 참고할 때 세번째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9:57

혹이…좇으리이다 – 여기서 ‘혹이’는 불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헬라어 부정 대명사

‘티스’의 번역이다. 누가는 이렇게 불특정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나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서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마 8:19).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22절 주석 참조)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그가 단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갖

겠다는 뜻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를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

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의 어떤 점을 보고 그를 따르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모습

의 제자상을 가지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계속 이

어지는 예수의 답변(58절)의 빛에서 볼 때 아마 이 지원자는 예수의 권능(마 8:16)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 능력 이전에 가

난함의 의미를 알고 지원했어야 했고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은 자기 부

인(自己否認)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 했어야 했다.

=====9:58

여우도…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암시성이 깊은 예수의 대답은 이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

을 뜻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의. 식. 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

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

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이다(23절).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9:59

부친을 장사하게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

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장례의 의무는 율

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보통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사제들도 그들의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다(레 21:1-3). 그 만큼 장례를 치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밖에

연고자(緣故者)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

된 사랑의 행위로 여겨졌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

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다.

=====9:60

죽은 자들로…장사하게 – 이말은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에 해석하여 적용하기가

매우 난해하여 여러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었던 본문이다. (1)아람어를 잘못 번역한 것

이다(Black). (2)본문의 표현은 역설적인 것으로 장례지내는 일은 반드시 치러지고야

말리라는 의미이다(Manson, Sayings of Jesus, p.73). (3)이 표현은 비유대인 계열에

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을 보편적인 행위 규범으로 해석하여 주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

려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될 것이다. 본문의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

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하라”는 뜻으로 세상 일은 세상 사람

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한다. 즉 성도들이 예수를 좇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 순위를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으로 콘첼만(Conzelmann) 같은

학자는 본문에서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전이를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요 그러한

예수 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준다.

=====9:61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왕상 19:20). 그러나 뒤이은 예수의

대답을(62절) 통해 유추하건대,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으

며 작별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질 경우에는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많았

을 것이다.

=====9:62

손에 쟁기를…돌아보는 자 – 농경문화의 산물인 이 격언적 표현은 B.C. 80년의 헤

시오드(Hesiod; 그리스의 교훈 시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전통

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격언적 문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하는 교훈

의 소재로 삼으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 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다.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합당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데토스'(* )는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의 의미를 갖는

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 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자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헬라어 누가복음 9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반응형

슁칼레사메노스 데 투스 도데카 에도켄 아우토이스 뒤나민 카이 엨수시안 에피 판타 타 다이모니아 카이 노수스 데라퓨에인

개역개정,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새번역,1 예수께서 그 열둘을 한 자리에 불러놓으시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주시고,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으시고 모든 귀신들을 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 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영어NIV,1 When Jesus had called the Twelve together, he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to drive out all demons and to cure diseases,

영어NASB,1 And He called the twelve together, and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over all the demons and to heal diseases.

영어MSG,1 Jesus now called the Twelve and gave them authority and power to deal with all the demons and cure diseases.

영어NRSV,1 Then Jesus called the twelve together and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over all demons and to cure diseases,

헬라어신약Stephanos,1 συγκαλεσαμενος δε τους δωδεκα μαθητας αυτου εδωκεν αυτοις δυναμιν και εξουσιαν επι παντα τα δαιμονια και νοσους θεραπευειν

라틴어Vulgate,1 convocatis autem duodecim apostolis dedit illis virtutem et potestatem super omnia daemonia et ut languores curarent

히브리어Modern,1 ויקרא אל שנים העשר ויתן להם גבורה ושלטן על כל השדים ולרפא חליים׃

성 경: [눅9: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 이 제자들은 5:3-11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처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어 6:12-16에서 그 선택이 완료된 인물들이다. 예수께서 열둘을 부르신 것은 열 두 지파에 의해 상징되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비되는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Hendriksen). 한편 누가는 마가의 ‘부르다'(*, 프로스칼레오)라는 표현(막 6:7) 대신 ‘불러 모으다'(*, 슁칼레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8:51에 있었던 잠깐 동안의 헤어짐과의 논리적 일관성을 고려한 누가의 세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 모든 귀신…능력과 권세 – 마태와(마 10:1) 마가는(막 6:7)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모든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마태와 마가는 귀신의 악함에 초점을 두고 누가는 ‘모든 종류’의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또한 누가는 마가복음에 있는 ‘권세'(*, 엑수시아)에 능력(*, 뒤나미스)을 첨가하고 있는데, 전자는 합법적 권리나 권위를 나타내며 후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이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에도 있었던 마술사(행 19:13)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카이 아페스테일렌 아우투스 케뤼쎄인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카이 이아스다이 투스 아스데네이스

개역개정,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새번역,2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게 하시려고 그들을 내보내시며

우리말성경,2 그리고 그들을 내보내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라고 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영어NIV,2 and he sent them out to preach the kingdom of God and to heal the sick.

영어NASB,2 And He sent them out to proclaim the kingdom of God and to perform healing.

영어MSG,2 He commissioned them to preach the news of God’s kingdom and heal the sick.

영어NRSV,2 and he sent them out to proclaim the kingdom of God and to heal.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απεστειλεν αυτους κηρυσσειν την βασιλειαν του θεου και ιασθαι τους ασθενουντας

라틴어Vulgate,2 et misit illos praedicare regnum Dei et sanare infirmos

히브리어Modern,2 וישלחם לקרא את מלכות האלהים ולרפא את החלים׃

성 경: [눅9: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하나님의 나라…보내시며 – 마태에 의하면(마 9:36)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동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하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두 가지 책무를 부여받고서 파송되었다. (1)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과 인격 속에 현존함과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이기도 했다(마 6:10).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뜻을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편협한 민족주의적 희망으로 인해 곡해(曲解)하고는 있었으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왕권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4:15;마 18:1;20:21;막 11:10;15:43;14:15).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막 1:15의 주제 강해 ‘하나님의 나라개념’을 참조하라. (2)제자들은 병을 고쳐주어야 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면 병을 고치는 것은 육적인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바 육적인 문제의 해결도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짐에 주목해야 한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이 영혼의 구원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질병 치유가 단순히 영혼의 문제로 이끌어 가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병을 고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서 ‘전파하고'(*, 케뤼쎄인)와 ‘고치는'(*, 이아스다이)이 대등 접속사 ‘카이'(*)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한편 제자들이 해야할 이 두가지 과제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는 일은 다름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인데(11절;마 9:35), 이는 제자들이 해야하는 일이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계승할 사도로 서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카이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메덴 아이레테 에이스 텐 호돈 메테 랍돈 메테 페란 메테 아르톤 메테 아르귀리온 메테 아나 뒤오 키토나스 에케인

개역개정,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새번역,3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떠나는 데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고, 속옷도 두 벌씩은 가지고 가지 말아라.

우리말성경,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지팡이도 가방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가지고 가지 말라.

가톨릭성경,3 그들에게 이르셨다. “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영어NIV,3 He told them: “Take nothing for the journey–no staff, no bag, no bread, no money, no extra tunic.

영어NASB,3 And He said to them, “Take nothing for your journey, neither a staff, nor a bag, nor bread, nor money; and do not even have two tunics apiece.

영어MSG,3 He said, “Don’t load yourselves up with equipment.

영어NRSV,3 He said to them, “Take nothing for your journey, no staff, nor bag, nor bread, nor money–not even an extra tunic.

헬라어신약Stephanos,3 και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μηδεν αιρετε εις την οδον μητε ραβδους μητε πηραν μητε αρτον μητε αργυριον μητε ανα δυο χιτωνας εχειν

라틴어Vulgate,3 et ait ad illos nihil tuleritis in via neque virgam neque peram neque panem neque pecuniam neque duas tunicas habeatis

히브리어Modern,3 ויאמר להם אל תקחו מאומה לדרך לא מטות ולא תרמיל ולא לחם ולא כסף ואל יהיה לאיש מכם שתי כתנות׃

성 경: [눅9: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 – 예수께서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도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 하나 세부적인 항목까지 열거하고 있다. (1)지팡이(*, 라브도스)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점에 대해서는 마태도(마 10:10) 동일하게 보도하고 있으나 마가는(막 6:8) 지팡이는 허용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ㄱ)마가는 왕하 4:29에 나오는 게하시의 경우처럼 지팡이를 스승의 권위에 대한 상징으로 파악했다는 견해(Schurmann). 그러나 게하시의 경우에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스승의 지팡이를 사용했다. 따라서 만약 게하시의 경우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려면 제자들 모두가 스승인 예수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야 한다. (ㄴ)누가는 지팡이나 슬리퍼나 허리띠를 띠고 성전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는 랍비적 규율을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Manson). (ㄷ)발음은 비슷하나 뜻은 서로 다른 아람어가 혼동되었다는 견해. 즉 ‘…외에’라는 뜻의 ‘ella'(엘라)와 ‘그리고…도 아닌’의 의미를 가진 ‘wla'(웰라)를 혼동한데서 생긴 차이이다. 이 설명은 헬라어 성경 원문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ㄹ)두 복음서 기자가 서로 다른 지팡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 즉 마가는 길을 걸을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누가는 맹수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팡이를 각각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복음서가 모두 여행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인 ‘라브도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충분한 해명이 못된다. 결국 이런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설명은 아직 없다 하겠다. (2)가방(*, 페라)을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가방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는 가방일 수도 있고 동냥 주머니일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주머니가 동냥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 여행 도중에 축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한 것이라고볼 수 있고, 여행 필수품을 담는 가방이라면 아무것도 의지할만한 물건을 소유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빵(*, 아르토스)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4)돈(*, 아르귀리온)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스스로 필수품을 자급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5)마지막으로 두 벌 옷(*, 키톤)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 옷은 속옷으로 거의 발에까지 닿으며 소매가 달려있었다(Hendriksen). 한편 마가복음에는(막 6:9) 신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해 누가는 신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고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여행에 필요한 일체의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현실적 여건이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신앙을 가르쳐주며, 동시에 사사로운 재산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라는 예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18:18-27). 22:35에 의하면 실제로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전도하러 다녔지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카이 에이스 헨 안 오이키안 에이셀데테 에케이 메네테 카이 에케이덴 엨세르케스데

개역개정,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새번역,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머물다가, 거기에서 떠나거라.

우리말성경,4 어느 집에 들어가든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으라.

가톨릭성경,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영어NIV,4 Whatever house you enter, stay there until you leave that town.

영어NASB,4 “Whatever house you enter, stay there until you leave that city.

영어MSG,4 Keep it simple; you are the equipment. And no luxury inns–get a modest place and be content there until you leave.

영어NRSV,4 Whatever house you enter, stay there, and leave from there.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εις ην αν οικιαν εισελθητε εκει μενετε και εκειθεν εξερχεσθε

라틴어Vulgate,4 et in quamcumque domum intraveritis ibi manete et inde ne exeatis

히브리어Modern,4 והבית אשר תבאו בו שם שבו לכם ומשם צאו׃

성 경: [눅9: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어느 집에…떠나라 – 여행 준비에 관한 말씀에 이어 이번에는 유숙(留宿)하는 방법을 일러주신다. 물론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머물라는 말은 아니며 말씀을 받아 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마 10:11). 그러나 한 번 숙소를 정했으면 그 마을을 떠날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지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주의 교훈집으로 알려지고 있는 ‘디다케'(Dedache)에는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는데, 본문은 제자들이 거짓 선지자들 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 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카이 호소이 안 메 데콘타이 휘마스 엨세르코메노이 아포 테스 폴레오스 에케이네스 톤 코니오르톤 나포 톤 포돈 휘몬 아포티나쎄테 에이스 마르튀리온 엪 아우투스

개역개정,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새번역,5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려서, 그들을 거스르는 증거물로 삼아라.”

우리말성경,5 만약 너희를 맞아 주지 않으면 그 마을을 떠날 때 그들을 거스르는 증거물로 발에 붙은 먼지를 떨어 버리라.”

가톨릭성경,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영어NIV,5 If people do not welcome you, shake the dust off your feet when you leave their town, as a testimony against them.”

영어NASB,5 “And as for those who do not receive you, as you go out from that city, shake the dust off your feet as a testimony against them.”

영어MSG,5 If you’re not welcomed, leave town. Don’t make a scene. Shrug your shoulders and move on.”

영어NRSV,5 Wherever they do not welcome you, as you are leaving that town shake the dust off your feet as a testimony against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οσοι αν μη δεξωνται υμας εξερχομενοι απο της πολεως εκεινης και τον κονιορτον απο των ποδων υμων αποτιναξατε εις μαρτυριον επ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5 et quicumque non receperint vos exeuntes de civitate illa etiam pulverem pedum vestrorum excutite in testimonium supra illos

히브리어Modern,5 וכל אשר לא יקבלו אתכם צאו מן העיר ההיא ונערו את העפר מעל רגליכם לעדות בהם׃

성 경: [눅9: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발에서…떨어버려 –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는 경우에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고 이스라엘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지역에서 묻은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들어간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별(聖別)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이 이러한 행위를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선민과 이방인의 진정한 구분은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2)더 나아가 발의 먼지를 떠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이자 증거가 된다. (3)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 둠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행 13:50,51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주의 일을 하는 도중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당하였을 때도 이런 행동을 했었다.

엨세르코메노이 데 디에르콘토 카타 타스 코마스 유앙겔리조메노이 카이 데라퓨온테스 판타쿠

개역개정,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새번역,6 제자들은 나가서,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우리말성경,6 제자들은 나가서 여러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사람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가톨릭성경,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영어NIV,6 So they set out and went from village to village, preaching the gospel and healing people everywhere.

영어NASB,6 Departing, they began going throughout the villages, preaching the gospel and healing everywhere.

영어MSG,6 Commissioned, they left. They traveled from town to town telling the latest news of God, the Message, and curing people everywhere they went.

영어NRSV,6 They departed and went through the villages, bringing the good news and curing diseases everywhere.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ξερχομενοι δε διηρχοντο κατα τας κωμας ευαγγελιζομενοι και θεραπευοντες πανταχου

라틴어Vulgate,6 egressi autem circumibant per castella evangelizantes et curantes ubique

히브리어Modern,6 ויצאו ויעברו בכפרים מבשרים את הבשורה ומרפאים בכל מקום׃

성 경: [눅9: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나가 각 촌에 – ‘나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르콘토'(*)는 ‘디에르 코마이'(*)의 미완료과거 중간태로서 제자들의 선교 활동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촌'(*, 코마스)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그룬트만(Grundmann)같은 학자는 예수가 읍내들을 돌아다니신데 비해 제자들은 촌락들을 돌아다닌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8:1에 의하면 예수께서도 ‘성’ 뿐만아니라 ‘촌’에도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 처처에 복음을…병을 고치더라 – ‘처처에’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쿠'(*)는 ‘그들이 가는곳 어디서나’의 뜻으로, 제자들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등 예수의 사역을 열심히 대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바야흐로 제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에쿠센 데 헤로데스 호 테트라아르케스 타 기노메나 판타 카이 디에포레이 디아 토 레게스다이 휘포 티논 호티 요안네스 에게르데 에크 네크론

개역개정,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새번역,7 ㉠분봉왕 헤롯은 이 모든 일을 듣고서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 ㉠그, ‘테트라아르케스’. 지위와 권위가 왕보다 밑에 있었음

우리말성경,7 분봉왕 헤롯은 이 모든 일을 듣고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났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7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영어NIV,7 Now Herod the tetrarch heard about all that was going on. And he was perplexed, because some were saying that John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영어NASB,7 Now Herod the tetrarch heard of all that was happening; and he was greatly perplexed, because it was said by some that John had risen from the dead,

영어MSG,7 Herod, the ruler, heard of these goings on and didn’t know what to think. There were people saying John had come back from the dead,

영어NRSV,7 Now Herod the ruler heard about all that had taken place, and he was perplexed, because it was said by some that John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7 ηκουσεν δε ηρωδης ο τετραρχης τα γινομενα υπ αυτου παντα και διηπορει δια το λεγεσθαι υπο τινων οτι ιωαννης εγηγερται εκ νεκρων

라틴어Vulgate,7 audivit autem Herodes tetrarcha omnia quae fiebant ab eo et haesitabat eo quod diceretur

히브리어Modern,7 וישמע הורדוס שר הרבע את כל אשר נעשה על ידו ותפעם רוחו כי יש אשר אמרו יוחנן קם מן המתים׃

성 경: [눅9: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 분봉왕 헤롯 – 이는 헤롯이 왕(王)이 아니라 영주(領主)였음을 뜻한다. 그는 B.C.4-A.D. 39까지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었는데 그 지역은 예수의 사역이 펼쳐진 중심지였다. 분봉왕 헤롯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3:1주석 참조.

󰃨 이 모든 일 – 이 문구의 헬라어 표현은 ‘타 기노메나 판타'(*)로 문법 구조상 현재 중간태 분사임을 알수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생하고 있는 모든 일을 말한다. ‘이 모든 일’이란 일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일으키셨던 갖가지의 이적들과 선포이겠지만 누가는 이 표현을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에 이어 서술함으로써 제자들의 역할도 예수의 소문이 널리퍼져 헤롯의 귀에까지 들려지게 되는데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시사한다. 심히 당황하여 – 이 말은 부정의 접두사 ‘디아'(*)와 ‘길’을 뜻하는 ‘포로스'(*)의 합성어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헤롯도 당황하여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표현이 문법상 미완료 과거 능동태인 점을 감안할 때 헤롯의 당황과 불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요한이…살아났다고도 하며 – 마태나(마 14:2) 마가(막 6:14)는 헤롯이 예수의 소식을 듣자 곧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의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에 관한 헤롯의 최종적인 확신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고 누가는 무엇이 헤롯으로 하여금 이 최종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를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즉 먼저는 세례 요한이 살아난 인물이 바로 예수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지자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한 자신의 좋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하여(3:19,20;마14:3-11;막 6:17-28) 즉시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이 예수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구약적 부활 사상이 담겨져 있음(신 32:39;삼상 2:6;욥 19:25-27)을 엿보게 한다.

휘포 티논 데 호티 엘리아스 에파네 알론 데 호티 프로페테스 티스 톤 아르카이온 아네스테

개역개정,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새번역,8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말성경,8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옛 예언자 중 하나가 되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8 더러는 “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영어NIV,8 others that Elijah had appeared, and still others that one of the prophets of long ago had come back to life.

영어NASB,8 and by some that Elijah had appeared, and by others that one of the prophets of old had risen again.

영어MSG,8 others that Elijah had appeared, still others that some prophet of long ago had shown up.

영어NRSV,8 by some that Elijah had appeared, and by others that one of the ancient prophets had arisen.

헬라어신약Stephanos,8 υπο τινων δε οτι ηλιας εφανη αλλων δε οτι προφητης εις των αρχαιων ανεστη

라틴어Vulgate,8 a quibusdam quia Iohannes surrexit a mortuis a quibusdam vero quia Helias apparuit ab aliis autem quia propheta unus de antiquis surrexit

히브리어Modern,8 ויש שאמרו אליהו נראה ואחרים אמרו נביא קם מן הקדמונים׃

성 경: [눅9: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 혹은 엘리야가…혹은 옛 선지자…함이라 –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하게된 배경에는 말 4:5의 말씀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종말을 알리는 ‘종말적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와의 연관성은 세례 요한에게 그가 적용된다(1:17;마 11:14). 예수는 단지 종말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성취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 대한 세번째 견해는, 옛선지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살아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들은 정확하게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만 예수의 사역이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에게 선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퍼져나갔음을 알수 있다.

에이펜 데 헤로데스 요안넨 에고 아페케팔리사 티스 데 에스틴 후토스 페리 후 아쿠오 토이아우타 카이 에제테이 이데인 아우톤

개역개정,9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새번역,9 그러나 헤롯은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어 죽였는데, 내게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예수를 만나고 싶어하였다.

우리말성경,9 그러자 헤롯은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는데 이런 소문이 들리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예수를 만나고자 했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영어NIV,9 But Herod said, “I beheaded John. Who, then, is this I hear such things about?” And he tried to see him.

영어NASB,9 Herod said, “I myself had John beheaded; but who is this man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영어MSG,9 Herod said, “But I killed John–took off his head. So who is this that I keep hearing about?” Curious, he looked for a chance to see him in action.

영어NRSV,9 Herod said, “John I beheaded; but who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tried to se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ειπεν ο ηρωδης ιωαννην εγω απεκεφαλισα τις δε εστιν ουτος περι ου εγω ακουω τοιαυτα και εζητει ιδει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9 et ait Herodes Iohannem ego decollavi quis autem est iste de quo audio ego talia et quaerebat videre eum

히브리어Modern,9 ויאמר הורדוס הן אנכי נשאתי את ראש יוחנן מעליו ומי אפוא הוא אשר אני שמע עליו כזאת ויבקש לראותו׃

성 경: [눅9: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 이 사람이 누군고…보고자 하더라 – 헤롯은 예수께 대한 다른 두 가지 견해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세례 요한에 관한 견해에 집착하며 고민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의로운 세례 요한을 터무니 없이 죽인 일에 대해서 늘 양심의 가책을 겪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마 14:3-11; 막 6:17-28). 여기서 “…자 하더라”는 표현 ‘에제테이'(*)는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헤롯이 계속해서 예수를 보고자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13:31에 의하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자 한것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죄 없는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악의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날 수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예수를 희롱하며 예수가 처형되는 일에 적극적인 방조자내지는 동조자(同調者)로서의 역할을 했다(23:8,11).

카이 휘포스트렢산테스 호이 아포스톨로이 디에게산토 아우토 호사 에포이에산 ㅏ이 파랄라본 아우투스 휘페코레센 캍 이디안 에이스 폴린 칼루메넨 베드사이다

개역개정,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새번역,10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을 예수께 이야기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따로 벳새다라고 하는 고을로 물러가셨다.

우리말성경,10 사도들이 돌아와 예수께 자기들이 한 일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벳새다라는 마을로 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벳사이다라는 고을로 물러가셨다.

영어NIV,10 When the apostles returned, they reported to Jesus what they had done. Then he took them with him and they withdrew by themselves to a town called Bethsaida,

영어NASB,10 When the apostles returned, they gave an account to Him of all that they had done. Taking them with Him, He withdrew by Himself to a city called Bethsaida.

영어MSG,10 The apostles returned and reported on what they had done. Jesus took them away, off by themselves, near the town called Bethsaida.

영어NRSV,10 On their return the apostles told Jesus all they had done. He took them with him and withdrew privately to a city called Bethsaida.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ι υποστρεψαντες οι αποστολοι διηγησαντο αυτω οσα εποιησαν και παραλαβων αυτους υπεχωρησεν κατ ιδιαν εις τοπον ερημον πολεως καλουμενης βηθσαιδα

라틴어Vulgate,10 et reversi apostoli narraverunt illi quaecumque fecerunt et adsumptis illis secessit seorsum in locum desertum qui est Bethsaida

히브리어Modern,10 וישובו השליחים ויספרו לו את כל אשר עשו ויקחם אליו ויסר לבדד אל מקום חרב אשר לעיר הנקראה בית צידה׃

성 경: [눅9:1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사도들이 돌아와…고한대 – 제자들이 사역한 기간이나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일들은 분명히 명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시에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사역의 기간과 다시 모이는 장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서 ‘고한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게산토'(*)는 “경과를 끝까지 이야기한다”는 의미로서 제자들이 행한 모든 일들을 예수께 상세히 보고하였음을 가리킨다.

󰃨 벳새다 – 이 지명의 뜻은 ‘고기 잡는 집’인데 정확한 명칭은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 빌립왕이 건설하여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인 이곳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하다(요 1:44). 예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간것은 제자들이 먼 선교여행에서 돌아왔고 더구나 예수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막 6:31). 말하자면 피곤하고 시장한 제자들에게 쉼을 주고자 하는 예수의 자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따로’ 사적인 만남을 갖고자 했음을 부각시키는 인상을 주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주고 동시에 제자들이 했던 일들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주면서 그들을 온전한 사도로 교육시키는 기회로도 삼고자 했을 것이다.

호이 데 오클로이 그논테스 에콜루데산 아우토 카이 아포뎈사메노스 아우투스 엘랄레이 아우토이스 페리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카이 투스 크레이안 에콘타스 데라페이아스 이아토

개역개정,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새번역,11 그러나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우리말성경,11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채고 예수를 따라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11 그러나 군중은 그것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영어NIV,11 but the crowds learned about it and followed him. He welcomed them and spoke to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and healed those who needed healing.

영어NASB,11 But the crowds were aware of this and followed Him; and welcoming them, He began speaking to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and curing those who had need of healing.

영어MSG,11 But the crowds got wind of it and followed. Jesus graciously welcomed them and talked to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Those who needed healing, he healed.

영어NRSV,11 When the crowds found out about it, they followed him; and he welcomed them, and spoke to them about the kingdom of God, and healed those who needed to be cured.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ι δε οχλοι γνοντες ηκολουθησαν αυτω και δεξαμενος αυτους ελαλει αυτοις περι της βασιλειας του θεου και τους χρειαν εχοντας θεραπειας ιατο

라틴어Vulgate,11 quod cum cognovissent turbae secutae sunt illum et excepit illos et loquebatur illis de regno Dei et eos qui cura indigebant sanabat

히브리어Modern,11 והמון העם כאשר ידעו את זאת הלכו אחריו ויקבלם וידבר אליהם על מלכות האלהים וירפא את הצריכים לרפואה׃

성 경: [눅9:1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무리가…따라 왔거늘 –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마가에 의하면(막6:32,33)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예수와 그의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알아 본 많은 사람들이 배가 상륙할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는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보다는 예수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강조점을 두려는 듯하다.

󰃨 영접하사…고치시더라 – 제자들 하고만 있고자 했던 예수의 계획은 모여든 무리들로 인해 일단 좌절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을 떠나간 것은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제자들과 별도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영접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영접했다’는 표현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목자없는 양 같이 보인 불쌍한 무리들을 따뜻이 그리고 흔쾌하게 맞아주신 예수의 온정을 느끼게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두 가지 하셨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는 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에 걸린 자를 고쳐주는 일이다. 특히 ‘이야기 하시며'(*, 엘랄레이)와 ‘고치시더라'(*, 이아토)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상당한 시간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헤 데 헤메라 에릌사토 클리네인 프로셀돈테스 데 호이 도데카 에이판 아우토 아폴뤼손 톤 오클론 히나 포류덴테스 에이스 타스 퀴클로 코마스 카이 아그루스 카탈뤼소신 카이 휴로신 에피스티스몬 호티 호데 엔 에레모 토포 에스멘

개역개정,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새번역,12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우리말성경,12 날이 저물자 열두 제자가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우리가 외딴 곳에 와 있으니 사람들을 보내 주변 마을과 농가로 가서 잠잘 곳을 찾고 먹을 것을 얻게 하십시오.”

가톨릭성경,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영어NIV,12 Late in the afternoon the Twelve came to him and said, “Send the crowd away so they can go to the surrounding villages and countryside and find food and lodging, because we are in a remote place here.”

영어NASB,12 Now the day was ending, and the twelve came and said to Him, “Send the crowd away, that they may go into the surrounding villages and countryside and find lodging and get something to eat; for here we are in a desolate place.”

영어MSG,12 As the day declined, the Twelve said, “Dismiss the crowd so they can go to the farms or villages around here and get a room for the night and a bite to eat. We’re out in the middle of nowhere.”

영어NRSV,12 The day was drawing to a close, and the twelve came to him and said, “Send the crowd away, so that they may go into the surrounding villages and countryside, to lodge and get provisions; for we are here in a deserted plac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η δε ημερα ηρξατο κλινειν προσελθοντες δε οι δωδεκα ειπον αυτω απολυσον τον οχλον ινα απελθοντες εις τας κυκλω κωμας και τους αγρους καταλυσωσιν και ευρωσιν επισιτισμον οτι ωδε εν ερημω τοπω εσμεν

라틴어Vulgate,12 dies autem coeperat declinare et accedentes duodecim dixerunt illi dimitte turbas ut euntes in castella villasque quae circa sunt devertant et inveniant escas quia hic in loco deserto sumus

히브리어Modern,12 והיום רפה לערב ושנים העשר קרבו ויאמרו אליו שלח נא את העם וילכו אל הכפרים והחצרים אשר סביבותינו ללון שם ולמצא מזון כי פה אנחנו במקום חרבה׃

성 경: [눅9:1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날이 저물어 가매 –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병고치는 능력에 완전히 마음이 붙들려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듯하다.

󰃨 먹을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시티스몬'(*)은 ‘곡식’을 뜻하는 ‘시티온'(*)에서 유래한 동사 ‘에피시티조 마이'(*, ‘스스로 양식을 공급하다’)에서 나온 단어로 특히 고대 헬라어에서 ‘여행중의 양식’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제자들이 무리들의 묵을 곳과 먹을것을 염려하는 모습은 예수의 생각에 비교한다면 믿음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이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에이펜 데 프로스 아우투스 도테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파게인 호이 데 에이펜 우크 에이신 헤민 플레이온 에 아르토이 펜테 카이 이크뒤에스 뒤오 에이 메티 포류덴테스 헤메이스 아고라소멘 에이스 판타 톤 라온 투톤 브로마타

개역개정,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새번역,13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말성경,13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저희가 가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가서 먹을 것을 사 와야 합니다.”

가톨릭성경,13 예수님께서 “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3 He replied, “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They answered, “We have only five loaves of bread and two fish–unless we go and buy food for all this crowd.”

영어NASB,13 But He said to them, “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And they said, “We have no more than five loaves and two fish, unless perhaps we go and buy food for all these people.”

영어MSG,13 “You feed them,” Jesus said. They said, “We couldn’t scrape up more than five loaves of bread and a couple of fish–unless, of course, you want us to go to town ourselves and buy food for everybody.”

영어NRSV,13 But he said to them, “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They said, “We have no more than five loaves and two fish–unless we are to go and buy food for all thes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3 ειπεν δε προς αυτους δοτε αυτοις υμεις φαγειν οι δε ειπον ουκ εισιν ημιν πλειον η πεντε αρτοι και δυο ιχθυες ει μητι πορευθεντες ημεις αγορασωμεν εις παντα τον λαον τουτον βρωματα

라틴어Vulgate,13 ait autem ad illos vos date illis manducare at illi dixerunt non sunt nobis plus quam quinque panes et duo pisces nisi forte nos eamus et emamus in omnem hanc turbam escas

히브리어Modern,13 ויאמר אליהם תנו אתם להם לאכל ויאמרו אין לנו כי אם חמשת ככרות לחם ודגים שנים בלתי אם נלך ונקנה אכל לכל העם הזה׃

성 경: [눅9:1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너희가 먹을 것을…없삽나이다 – 예수는 제자들이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아무런 물질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령을 하신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본문에서는 ‘너희가'(*, 휘메이스)에 강조점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무리들의 배고픔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해결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계승해야할 사도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전적인 책임의식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2)예수께서는 선교여행 중 지녔던 권세와 능력에 대해 망각한 채 극히 평범하고 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제자들을 깨우쳐주고 책망하는 의미로 그런 주문을 하셨다. (3)제자들은 선교여행 중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주리지않고 헐벗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것에 대해서 필요에 따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적인 동시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명령은 엘리사가 그의 사환에게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라고 명령한 것을 연상시킨다(왕하 4:42-44). 이에 대해 제자들은 자기들이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함을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본문의 기록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가 두 마리 뿐이니 이것은 단 한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양이다. (2)지금의 장소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음식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수가 없다. (3)설령 사람을 보내어 200데나리온 어치의 음식을 사온다 한들 어림없이 부족하다(요6:7). 특히 마가(막 6:37)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당치도 않다는 듯 빈정대는 말투로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비교적 진지한 태도로 대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에산 가르 호세이 안드레스 펜타키스킬리오이 에이펜 데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카타클리나테 아우투스 클리시아스 호세이 아나 펜테콘타

개역개정,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새번역,14 거기에는 남자만도 약 오천 명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하여라.”

우리말성경,14 그곳에는 남자만 5,000명 정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50명씩 둘러앉게 하라.”

가톨릭성경,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영어NIV,14 (About five thousand men were there.) But he said to his disciples, “Have them sit down in groups of about fifty each.”

영어NASB,14 (For there were about five thousand men.) And He said to His disciples, “Have them sit down to eat in groups of about fifty each.”

영어MSG,14 (There were more than five thousand people in the crowd.) But he went ahead and directed his disciples, “Sit them down in groups of about fifty.”

영어NRSV,14 For there were about five thousand men. And he said to his disciples, “Make them sit down in groups of about fifty each.”

헬라어신약Stephanos,14 ησαν γαρ ωσει ανδρες πεντακισχιλιοι ειπεν δε προς τους μαθητας αυτου κατακλινατε αυτους κλισιας ανα πεντηκοντα

라틴어Vulgate,14 erant autem fere viri quinque milia ait autem ad discipulos suos facite illos discumbere per convivia quinquagenos

히브리어Modern,14 כי היו כחמשת אלפי איש ויאמר אל תלמידיו הושיבו אתם שורות שורות חמשים בשורה׃

성 경: [눅9:1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남자가 한 오천 명 – 남자 장정만 오천명 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한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될 것이다.

󰃨 떼를 지어 – 마가는 이 표현을 라틴어의 ‘심포지움’ 즉 ‘향연’과 같은 의미의 ‘쉼포시아'(*)를 사용하는데(막 6:39) 비해 누가는 이 표현을 ‘클리시아스'(*)라는 단어로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정찬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것으로서, 마샬(Marshall)같은 학자는 이것이 초대 교회의 만찬을 반영해 준다고 한다.

󰃨 한 오십 명씩 앉히라 – 여기서도 누가는 독특하게 ‘한'(*, 호세이)이라는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누가는 의사와 역사가로서 숫자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비교, 막 6:40). 몇 명 단위로 앉혔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서는 전승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여기서는 단지 무리를 일정한 단위로 세분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리를 세분화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카이에포이에산 후토스 카이 카테클리난 하판타스

개역개정,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새번역,15 제자들이 그대로 하여, 모두 다 앉게 하였다.

우리말성경,15 제자들은 그대로 사람들을 모두 앉혔습니다.

가톨릭성경,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영어NIV,15 The disciples did so, and everybody sat down.

영어NASB,15 They did so, and had them all sit down.

영어MSG,15 They did what he said, and soon had everyone seated.

영어NRSV,15 They did so and made them all sit dow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ποιησαν ουτως και ανεκλιναν απαντας

라틴어Vulgate,15 et ita fecerunt et discumbere fecerunt omnes

히브리어Modern,15 ויעשו כן ויושיבו את כלם׃

성 경: [눅9:1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제자들이…다 앉힌 후 – 제자들이 예수의 지시에 아무런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역시 음식이 어디서 올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본 데 투스 펜테 아르투스 카이 투스 뒤오 잌뒤아스 아나블렢사스 에이스 톤 우라논 율로게센 아우투스 카이 카테클레센 카이 에디두 토이스 마데타이스 파라데이나이 토 오클로

개역개정,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새번역,16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우리말성경,16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 앞에 갖다 놓게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영어NIV,16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gave thanks and broke them. Then he gave them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people.

영어NASB,16 Then He took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blessed them, and broke them, and kept giving them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people.

영어MSG,16 He took the five loaves and two fish, lifted his face to heaven in prayer, blessed, broke, and gave the bread and fish to the disciples to hand out to the crowd.

영어NRSV,16 And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he looked up to heaven, and blessed and broke them,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crowd.

헬라어신약Stephanos,16 λαβων δε τους πεντε αρτους και τους δυο ιχθυας αναβλεψας εις τον ουρανον ευλογησεν αυτους και κατεκλασεν και εδιδου τοις μαθηταις παρατιθεναι τω οχλω

라틴어Vulgate,16 acceptis autem quinque panibus et duobus piscibus respexit in caelum et benedixit illis et fregit et distribuit discipulis suis ut ponerent ante turbas

히브리어Modern,16 ויקח את חמשת ככרות הלחם ואת שני הדגים וישא עיניו השמימה ויברך עליהם ויפרס ויתן לתלמידיו לשום לפני העם׃

성 경: [눅9:1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공관복음서 모두가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문구(文句)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식사 관습과 일치한다. ‘축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오'(*)는 ‘찬양하다’, ‘축복하다’, ‘감사하다’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것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을 요청한 것이 아니며 단지 평범한 감사의 식사 기도로 보아야 한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는 삶을 사신 예수께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으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한 별도의 간구가 필요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 주어…놓게하시니 – ‘주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두'(*)는 ‘디도미'(*)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예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었음을 가리킨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의 손에서 제자들을 경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어떤 기적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우리는 ‘주어'(*, 에디두)라는 미완료 동사에서 예수의 손에서 떡이 끝없이 계속해서 떼어져 나가는 기적적인 증가가 있었음을 암시받을 뿐이다.

카이 에파곤 카이 에코르타스데산 판테스 카이 에르데 토 페리쓔산 아우토이스 클라스마톤 코피노이 도데카

개역개정,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새번역,17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우리말성경,17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 보니 12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가톨릭성경,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영어NIV,17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and the disciples picked up twelve basketfuls of broken pieces that were left over.

영어NASB,17 And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and the broken pieces which they had left over were picked up, twelve baskets full.

영어MSG,17 After the people had all eaten their fill, twelve baskets of leftovers were gathered up.

영어NRSV,17 And all ate and were filled. What was left over was gathered up, twelve baskets of broken pieces.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εφαγον και εχορτασθησαν παντες και ηρθη το περισσευσαν αυτοις κλασματων κοφινοι δωδεκα

라틴어Vulgate,17 et manducaverunt omnes et saturati sunt et sublatum est quod superfuit illis fragmentorum cofini duodecim

히브리어Modern,17 ויאכלו כלם וישבעו וישאו מן הפתותים הנותרים להם שנים עשר סלים׃

성 경: [눅9:1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먹고 다 배불렀더라 –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배불리 먹지 못한 자는 하나도없다. 이는 예수의 능력의 완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육신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 보다는 신령한 영의 양식으로 무리를 먹이는 일에 궁극적 목적을 두셨다. 이는 예수의 능력에 매료(魅了)되어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도한 요한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요 6:14,15,26,27)

󰃨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 –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은데 그치지 않고 남은 양이 무려 열 두 바구니가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들이라 명하시는데(요 6:12), 이것은 음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외에도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예수의 이적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다음에 또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켜 해결해 주시리라는 기대는 갖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구니'(*, 코피노이)는 군인들이 장비나 급식을 담아 짊어지고 다니는 기구 또는 여행자들이 음식과 필수품을 가지고 다니는 기구를 가리킨다. 처음의 시작은 바구니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는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 앞에 바쳐졌을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음에 주목하라. 제자들은이백 데나리온으로도 안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겨우 한 아이의 식사에 적합할 만큼의 적은 것으로 큰 일을 하신 것이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에이나이 아우톤 프로슈코메논 카타 모나스 쉬네산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카이 에페로테센 아우투스 레곤 티나 메 레구신 호이 오클로이 에이나이

개역개정,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새번역,18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실 때에, 제자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말성경,18 한번은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가톨릭성경,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영어NIV,18 Once when Jesus was praying in private and his disciples were with him, he asked them, “Who do the crowds say I am?”

영어NASB,18 And it happened that while He was praying alone, the disciples were with Him, and He questioned them, saying, “Who do the people say that I am?”

영어MSG,18 One time when Jesus was off praying by himself, his disciples nearby, he asked them, “What are the crowds saying about me, about who I am?”

영어NRSV,18 Once when Jesus was praying alone, with only the disciples near him, he asked them, “Who do the crowds say that I am?”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ειναι αυτον προσευχομενον καταμονας συνησαν αυτω οι μαθηται και επηρωτησεν αυτους λεγων τινα με λεγουσιν οι οχλοι ειναι

라틴어Vulgate,18 et factum est cum solus esset orans erant cum illo et discipuli et interrogavit illos dicens quem me dicunt esse turbae

히브리어Modern,18 ויהי הוא מתפלל לבדד ויאספו אליו תלמידיו וישאל אתם לאמר מה אמרים עלי המון העם מי אני׃

성 경: [눅9:1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따로 기도하실 때에 – 누가는 막 6:45-8:26의 내용을 생략한 채 오병 이어의 기적에 이어 바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으로 넘어가기 위해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할때에’라는 ‘엔토'(*)구문으로 단락을 전환시키고 있다. 마태나 마가에 의하면(마 16:13;막 8:27) 이 장소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이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90km 떨어진 헤르몬 산 근처의 성읍으로 특히 우상 숭배로 유명하다. 토착민들은 바알신을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pan)의 신당을 지어 섬겼으며 헤롯은 황제 아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런 우상 숭배의 지역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irony)라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는 이러한 단락 전환에 있어서 그 서두를 예수께서 기도 중에 있는 사실로 시작하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누가의 복음서 기록에 있어서 예수의 기도는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3:21;6:12;9:28).

󰃨 무리가…누구라고 하느냐 – 무리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못들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물으신 듯하다. 예수께서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리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었으며, 그는 이미 무리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요 6:14,15,26).

호이 데 아포크리덴테스 에이판 요안넨 톤 밮티스텐 알로이 데 엘리안 알로이 데 호티 프로페테스 티스 톤 아르카이온 아네스테

개역개정,19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새번역,19 그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또는 ‘침례자’

우리말성경,19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옛 예언자 중 한 사람이 되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 침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영어NIV,19 They replied, “Some say John the Baptist; others say Elijah; and still others, that one of the prophets of long ago has come back to life.”

영어NASB,19 They answered and said, “John the Baptist, and others say Elijah; but others, that one of the prophets of old has risen again.”

영어MSG,19 They said, “John the Baptizer. Others say Elijah. Still others say that one of the prophets from long ago has come back.”

영어NRSV,19 They answered, “John the Baptist; but others, Elijah; and still others, that one of the ancient prophets has arisen.”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ι δε αποκριθεντες ειπον ιωαννην τον βαπτιστην αλλοι δε ηλιαν αλλοι δε οτι προφητης τις των αρχαιων ανεστη

라틴어Vulgate,19 at illi responderunt et dixerunt Iohannem Baptistam alii autem Heliam alii quia propheta unus de prioribus surrexit

히브리어Modern,19 ויענו ויאמרו יוחנן המטביל ואחרים אמרים אליהו ואחרים אמרים נביא קם מן הקדמונים׃

성 경: [눅9:1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세례 요한…엘리야…선지자…살아났다 – 제자들의 답변은 7,8절에서 헤롯이 들었던 소문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특별성은 보았으나 그가 단순히 특별한 선지자 이상의 존재 즉 메시야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했다.

에이펜 데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이 페트로스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톤 크리스톤 투 데우

개역개정,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새번역,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 ㉢히브리어로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주신 분’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다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20 그러자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십니다.”

가톨릭성경,20 예수님께서 다시,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영어NIV,20 “But what about you?” he asked. “Who do you say I am?” Peter answered, “The Christ of God.”

영어NASB,20 And He said to them,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And Peter answered and said, ” The Christ of God.”

영어MSG,20 He then asked, “And you–what are you saying about me? Who am I?” Peter answered, “The Messiah of God.”

영어NRSV,20 He said to them,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Peter answered, “The Messiah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0 ειπεν δε αυτοις υμεις δε τινα με λεγετε ειναι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πετρος ειπεν τον χριστον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20 dixit autem illis vos autem quem me esse dicitis respondens Simon Petrus dixit Christum Dei

히브리어Modern,20 ויאמר אליהם ואתם מה אתם אמרים מי אני ויען פטרוס ויאמר משיח האלהים אתה׃

성 경: [눅9:2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은 무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수많은 이적적 권능들을 나타내 보이셨다(8:22-25,26-35, 41-56; 9:10-17). 이 모든 일들은 첫째,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며, 둘째,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하려는 간접적인 교육의 일환이었다. 이제 예수는 제자들이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게되었을 것이라고 보아 이런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한편 이 물음은 모든 신앙인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요청이기도 하다. 즉 다른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어떻게 경험하는가하는 질문이다.

󰃨 베드로가…그리스도시니이다 – 질문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나 역시 제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기록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간에 표현상의 차이를 나타낸다.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로 마가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로, 요한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되어 있어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호 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를 뜻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1)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곧 성경에 예언된 바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킨 인물임을 말한다(민 24:17). (2)또한 이 고백은 예수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시인한 것이다(요 10:30;요일4:2).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지금까지 의문시 되어 왔던 예수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마태복음에는(마 16:17-19) 훌륭한 고백을 한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칭찬과 약속이 언급되며, 그 본문은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하여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근거로도 사용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보라.

호 데 에피티메사스 아우토이스 파렝게일렌 메데니 레게인 투토

개역개정,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새번역,21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셔서,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시고,

우리말성경,21 예수께서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하며

가톨릭성경,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영어NIV,21 Jesus strictly warned them not to tell this to anyone.

영어NASB,21 But He warned them and instructed them not to tell this to anyone,

영어MSG,21 Jesus then warned them to keep it quiet. They were to tell no one what Peter had said.

영어NRSV,21 He sternly ordered and commanded them not to tell anyone,

헬라어신약Stephanos,21 ο δε επιτιμησας αυτοις παρηγγειλεν μηδενι ειπειν τουτο

라틴어Vulgate,21 at ille increpans illos praecepit ne cui dicerent hoc

히브리어Modern,21 ויצו אתם בגערה לבלתי הגיד לאיש את הדבר הזה׃

성 경: [눅9:2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경계하사…명하시고 – ‘경계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티마오'(*)인데 이 말은 ‘보통 꾸짖다'(4:35)라는 뜻을 가지나 여기서는 ‘당부하다’ 또는 ‘심각하게 말하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명령하다'(*, 파랑겔로)를 첨가하여 매우 강도 높은 함구령임을 부각시겼다. 예수께서 이렇게 메시야로서의 정체를 강력하게 숨기려 한것은 (1)유대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오랜 역사의 억압과 수탈을 당해 오면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열렬히 대망했다. 따라서 예수가 메시야시라는 소문이 퍼져나갈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자로 세우려고 들었을 것이다(요 6:14,15). (2)예수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라는 소문이 퍼질 경우 너무나 빨리 그에게 정치적 위협이 다가올 수 있고 그럴 경우 예수의 지상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3:31).

에이폰 호티 데이 톤 휘온 투 안드로푸 폴라 파데인 카이 아포도키마스데나이 아포 톤 프레스뷔테론 카이 아르키에레온 카이 그람마테온 카이 아포크탄데나이 카이 테 트리테 헤메라 에게르데나이

개역개정,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새번역,22 말씀하셨다.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흗날에 살아나야 한다.”

우리말성경,22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받아 끝내 죽임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영어NIV,22 And he said,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chief priests and teachers of the law, and he must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to life.”

영어NASB,22 saying, ”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and chief priests and scribes, and be killed and be raised up on the third day.”

영어MSG,22 He went on, “It is necessary that the Son of Man proceed to an ordeal of suffering, be tried and found guilty by the religious leaders, high priests, and religion scholars,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up alive.”

영어NRSV,22 saying, “The Son of Man must undergo great suffering,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chief priests, and scribes, and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ιπων οτι δει 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που πολλα παθειν και αποδοκιμασθηναι απο των πρεσβυτερων και αρχιερεων και γραμματεων και αποκτανθηναι και τη τριτη ημερα εγερθηναι

라틴어Vulgate,22 dicens quia oportet Filium hominis multa pati et reprobari a senioribus et principibus sacerdotum et scribis et occidi et tertia die resurgere

히브리어Modern,22 ויאמר מן הצרך הוא אשר בן האדם יענה הרבה וימאס מן הזקנים והכהנים הגדולים והסופרים ויהרג וביום השלישי קום יקום׃

성 경: [눅9:2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인자가…하리라 – 본절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차례의 수난 예고 가운데 첫번째 것으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바로 이어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즉 예수는 민족적 정치적 메시야로서 유대의 주권을 회복하여 그들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 주는 임무를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는 임무를 띠고 오신 분이다. 본절의 수난 예고는 예수에게 네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해주는데 (1)먼저 수난을 당하신다. 이 고난의 배경에는 사 53:4,11의 예언이 있다. (2)버림을 받으신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아포도키마조'(*)는 ‘거부하다’, ‘쓸모 없다고 선언하다’는 뜻으로 공무원 지망생을 면밀히 조사하고 심사한 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경우나 열등한 화폐를 검사하여 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이 예수를 거부하고 배척할 것을 말해준다. (3)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4)죽은 후 제 삼 일에 살아나실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일어나다’는 표현을 능동태 ‘아나스테나이'(*)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수동태 ‘에게르데나이'(*)를 사용하여 ‘일으킴을 받는다'(be raised)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과 삶에 하나님의 권능이 개입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동사’데이'(*)는 당위의 뜻인 바, 예수의 수난이 필연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밝혀준다(사 53장; 요 3:16;롬 8:32).

󰃨 인자 – 여기서 인자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5:24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장로들'(*, 프레스뷔테로스)은 지방의 하급 법원에서 재판관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람들로 지방의 공회를 구성하였다(7:3;20:1;22:52). ‘대제사장들'(*, 아르키에류스)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과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권한이있다. 본래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종신적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고 총독들에 의해 임시로 교체되는 관행이 생기면서부터 그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된 것은 대제사장을 지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기관들'(*, 그람마튜스)은 ‘랍비’, ‘율법사’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대부분 바리새인으로서 각각 공공기관 또는 사설 단체에 속하여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에 힘썼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나열되고 있는데 실제로 이 그룹들은 유대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무리들이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모두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지고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기관이었다. 유대 민족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백성들을 옳바른 종교적인 삶으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차단시키는 역할을 선도적으로 하게된다는 것은 비극적인 유대인의 역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엘레겐 데 프로스 판타스 에이 티스 델레이 오피소 무 에르케스다이 아르네사스도 헤아우톤 카이 아라토 톤 스타우론 아우투 칻 헤메란 카이 아몰루데이토 모이

개역개정,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새번역,23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우리말성경,23 그러고는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가톨릭성경,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영어NIV,23 Then he said to them all: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영어NASB,23 And He was saying to them all, “If anyone wishes to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영어MSG,23 Then he told them what they could expect for themselves: “Anyone who intends to come with me has to let me lead. You’re not in the driver’s seat–I am. Don’t run from suffering; embrace it. Follow me and I’ll show you how.

영어NRSV,23 Then he said to them all, “If any want to become my followers, let them deny themselves and take up their cross daily and follow m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ελεγεν δε προς παντας ει τις θελει οπισω μου ελθειν απαρνησασθω εαυτον και αρατω τον σταυρον αυτου καθ ημεραν και ακολουθειτω μοι

라틴어Vulgate,23 dicebat autem ad omnes si quis vult post me venire abneget se ipsum et tollat crucem suam cotidie et sequatur me

히브리어Modern,23 ואל כלם אמר איש כי יחפץ ללכת אחרי יכחש בנפשו ויום יום ישא את צלבו והלך אחרי׃

성 경: [눅9:2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자기를 부인하고…십자가를 지고 – 예수의 길이 분명하였듯이(22절) 이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야함을 말해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의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기란 실로 어렵다. 첫째로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자기 부정이란 자신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자기 십가가를 져야한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의 형벌 중 가장 잔혹한것으로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세째로 이러한 자기 부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지속성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성장하려면 일시적 결심으로만은 부족하며 일관된 신앙 훈련이 요구된다.

호스 가르 안 델레 텐 프쉬켄 아우투 소사이 아폴레세이 아우텐 호스 드 안 아폴레세 텐 프쉬켄 아우투 헤네켄 에무 후토스 소세이 아우텐

개역개정,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새번역,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말성경,24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은 구하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영어NIV,24 For whoever want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e will save it.

영어NASB,24 “For whoever wishe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he is the one who will save it.

영어MSG,24 Self-help is no help at all. Self-sacrifice is the way, my way, to finding yourself, your true self.

영어NRSV,24 For those who want to save their life will lose it, and those who lose their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

헬라어신약Stephanos,24 ος γαρ αν θελη την ψυχην αυτου σωσαι απολεσει αυτην ος δ αν απολεση την ψυχην αυτου ενεκεν εμου ουτος σωσει αυτην

라틴어Vulgate,24 qui enim voluerit animam suam salvam facere perdet illam nam qui perdiderit animam suam propter me salvam faciet illam

히브리어Modern,24 כי כל אשר יחפץ להושיע את נפשו תאבד נפשו ממנו וכל אשר יאבד את נפשו למעני הוא יושיענה׃

성 경: [눅9:2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목숨을…잃을 것이요 – 자기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아의 범주 속에 파묻혀 일신상(一身上)의 부귀 영화만을 위하여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자는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잃게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자는 교회에 핍박과 순교의 시련이 올 때 육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최후의 심판 때 진정한 생명을 잃게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요 12:25).

󰃨 나를 위하여…구원하리라 – 마가복음에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하여 ‘복음’을 첨가하고 있으나 누가는 그것을 삭제하여 예수께 대한 헌신에 초점을 집중 시킨다. 진리를 위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기꺼이 포기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잃음이 아니요 얻음이라는 이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의 참 제자라 할 수 있다.

티 가르 오펠레이타이 안드로포스 케르데사스 톤 코스몬 홀론 헤아우톤 데 아폴레사스 에 제미오데이스

개역개정,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새번역,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우리말성경,25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긴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가톨릭성경,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영어NIV,25 What good is it for a man to gain the whole world, and yet lose or forfeit his very self?

영어NASB,25 “For what is a man profited if he gains the whole world, and loses or forfeits himself?

영어MSG,25 What good would it do to get everything you want and lose you, the real you?

영어NRSV,25 What does it profit them if they gain the whole world, but lose or forfeit themselves?

헬라어신약Stephanos,25 τι γαρ ωφελειται ανθρωπος κερδησας τον κοσμον ολον εαυτον δε απολεσας η ζημιωθεις

라틴어Vulgate,25 quid enim proficit homo si lucretur universum mundum se autem ipsum perdat et detrimentum sui faciat

히브리어Modern,25 כי מה יועיל האדם כי יקנה את כל העולם ואבד והשחית את נפשו׃

성 경: [눅9:2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온 천하를…유익하리요 –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의 문제를 가르친다. 세상이 제공하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누려본다 한들 자기의 영혼과 본성을 잃게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기위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의 가치를 소모한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온 천하를 잃게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마지막에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계 2:10).

호스 가르 안 에파이스퀸데 메 카이 투스 에무스 로구스 투톤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에파이스퀸데세타이 호탄 엘데 엔 테 돜세 아우투 카이 투 파트로스 카이 톤 하기온 앙겔론

개역개정,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새번역,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우리말성경,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 가운데 올 때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영어NIV,26 If anyone is ashamed of me and my words, the Son of Man will be ashamed of him when he comes in his glory and in the glory of the Father and of the holy angels.

영어NASB,26 “For whoever is ashamed of Me and My words, the Son of Man will be ashamed of him when He comes in His glory, and the glory of the Father and of the holy angels.

영어MSG,26 If any of you is embarrassed with me and the way I’m leading you, know that the Son of Man will be far more embarrassed with you when he arrives in all his splendor in company with the Father and the holy angels. This isn’t, you realize, pie in the sky by and by.

영어NRSV,26 Those who are ashamed of me and of my words, of them the Son of Man will be ashamed when he comes in his glory and the glory of the Father and of the holy angels.

헬라어신약Stephanos,26 ος γαρ αν επαισχυνθη με και τους εμους λογους τουτον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επαισχυνθησεται οταν ελθη εν τη δοξη αυτου και του πατρος και των αγιων αγγελων

라틴어Vulgate,26 nam qui me erubuerit et meos sermones hunc Filius hominis erubescet cum venerit in maiestate sua et Patris et sanctorum angelorum

히브리어Modern,26 כי כל אשר הייתי אני ודברי לו לחרפה הוא יהיה לחרפה לבן האדם כאשר יבא בכבודו ובכבוד האב והמלאכים הקדושים׃

성 경: [눅9:2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적극적 의미에서는 복음 증거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을 의식(意識)하지 말라는 당부이며, 소극적 의미에서는 박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 승천후 교회에 핍박이 닥쳐올 때예수께서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 무기력해 보이며 기독교인들의 삶이 실패자의 모습처럼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인자도…부끄러워 하리라 –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재림이 최초로 언급되고있다. 누가는 마태나(마 16:27), 마가(막 8:38)와 달리 ‘자기와 천사의 영광’을 첨가하여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이라는 삼중(三重)의 영광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재림주로 오실 예수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은 사람들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마 16:27)에 주목하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히 12:2) 종말 때의 심판주로 재림하시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을 부끄러워 하여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은 혹 세상을 얻었을지 몰라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수치스러운 종국을 맞게 될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롬 1:16).

레고 데 휘민 알레도스 에이신 티네스 톤 아우투 헤스테코톤 호이 우 메 규손타이 다나투 헤오스 안 이도신 텐 바실레이안 투 데우

개역개정,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새번역,27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

우리말성경,2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영어NIV,27 I tell you the truth, some who are standing here will not taste death before they see the kingdom of God.”

영어NASB,27 “But I say to you truthfully, there are some of thos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until they see the kingdom of God.”

영어MSG,27 Some who have taken their stand right here are going to see it happen, see with their own eyes the kingdom of God.”

영어NRSV,27 But truly I tell you, there are some standing here who will not taste death before they see the kingdom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7 λεγω δε υμιν αληθως εισιν τινες των ωδε εστηκοτων οι ου μη γευσονται θανατου εως αν ιδωσιν την βασιλειαν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27 dico autem vobis vere sunt aliqui hic stantes qui non gustabunt mortem donec videant regnum Dei

히브리어Modern,27 ובאמת אני אמר לכם יש מן העמדים פה אשר לא יטעמו מות עד כי יראו את מלכות האלהים׃

성 경: [눅9:2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여기 섰는…있느니라 – 26절에서 예수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심판을 확인하였다면 본절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이 약속되고 있다. 본절에서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섰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보게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해답을 얻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쉽지 않다. (1)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예수의 변모를 목격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 (2)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오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견해, (3)오순절이후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 (4)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다. 이 중 세번째 견해가 유력하다고 본다.

에게네토 데 메타 투스 로구스 투투스 호세이 헤메라이 옼토 카이 파랄라본 페트론 카이 요안넨 카이 야코본 아네베 에이스 토 오로스 프로슠사스다이

개역개정,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새번역,28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우리말성경,28 이런 말씀을 하신 뒤 8일쯤 지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28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영어NIV,28 About eight days after Jesus said this, he took Peter, John and James with him and went up onto a mountain to pray.

영어NASB,28 Some eight days after these sayings, He took along Peter and John and James, and went up on the mountain to pray.

영어MSG,28 About eight days after saying this, he climbed the mountain to pray, taking Peter, John, and James along.

영어NRSV,28 Now about eight days after these sayings Jesus took with him Peter and John and James, and went up on the mountain to pray.

헬라어신약Stephanos,28 εγενετο δε μετα τους λογους τουτους ωσει ημεραι οκτω και παραλαβων τον πετρον και ιωαννην και ιακωβον ανεβη εις το ορος προσευξασθαι

라틴어Vulgate,28 factum est autem post haec verba fere dies octo et adsumpsit Petrum et Iohannem et Iacobum et ascendit in montem ut oraret

히브리어Modern,28 ויהי כשמנה ימים אחרי הדברים האלה ויקח אליו את פטרוס ואת יוחנן ואת יעקב ויעל אל ההר להתפלל שם׃

성 경: [눅9:2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이 말씀을 하신 후 – 누가는 마태(마 17:1)나 마가(막 9:2)와 달리 이 연결구를 첨가하여 앞에서 하신 말씀과 이제 시작되는 이야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과 이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본 사건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사건(8:51)에서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결단시에도(마26:37;막 14:33) 예수를 따로 수행했던 제자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드로는 훗날 여기서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벧후 1:17,18에 증언하기도 했다.

󰃨 기도하시러 산에 –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산행(山行)의 목적을 밝힌다. 전통적으로 이 산에 대해서는 ‘헤르몬 산’, ‘메론 산’, ‘다볼산’이라는 추측들이 있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누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이며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계시의 사건도 ‘기도’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프로슈케스다이 아우톤 토 에이도스 투 프로소푸 아우투 헤테론 카이 호 히마티스모스 아우투 류코스 엨사스트랖톤

개역개정,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새번역,29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우리말성경,29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동안 얼굴 모습이 변하셨고 옷이 하얗게 빛났습니다.

가톨릭성경,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영어NIV,29 As he was praying, the appearance of his face changed, and his clothes became as bright as a flash of lightning.

영어NASB,29 And while He was praying, the appearance of His face became different, and His clothing became white and gleaming.

영어MSG,29 While he was in prayer, the appearance of his face changed and his clothes became blinding white.

영어NRSV,29 And while he was praying, the appearance of his face changed, and his clothes became dazzling white.

헬라어신약Stephanos,29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προσευχεσθαι αυτον το ειδος του προσωπου αυτου ετερον και ο ιματισμος αυτου λευκος εξαστραπτων

라틴어Vulgate,29 et factum est dum oraret species vultus eius altera et vestitus eius albus refulgens

히브리어Modern,29 ויהי בהתפללו נשתנה מראה פניו ולבושו הלבין והבריק׃

성 경: [눅9:2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기도하실 때에…나더라 –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는 문자적으로 ‘그 얼굴의 모습이 달라졌다’이다. 마태에 의하면(마 17:2)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한다. 이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4:11;계 1:16;10:1). 한편 누가는 ‘변형되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메테모르포데'(마 17:2;막 9:2)가 헬라적 사고방식을 따른 신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마 28:3;막 16:5;행 1:10;계 3:4,5;7:14). 이것 역시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준다. 또한 ‘광채가 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사스트랖톤'(*)인데 이 말은 ‘밖으로’ 또는 ‘앞으로’를 뜻하는 ‘엑스'(*)와 ‘빛이 번쩍나다’를 뜻하는 ‘아스트랖토'(*)의 합성어로 예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결국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모는 (1)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35절) 확증해 주며 (2)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22, 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는 점(빌 2:8-11)을 암시하며 또한 (3)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과(롬8:34) 다시금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간접적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카이 이두 안드레스 뒤오 쉬넬랄룬 아우토 호이티네스 에산 모위세스 카이 엘리아스

개역개정,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새번역,30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우리말성경,30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가톨릭성경,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어NIV,30 Two men, Moses and Elijah,

영어NASB,30 And behold, two men were talking with Him; and they were Moses and Elijah,

영어MSG,30 At once two men were there talking with him. They turned out to be Moses and Elijah–

영어NRSV,30 Suddenly they saw two men, Moses and Elijah, talking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ιδου ανδρες δυο συνελαλουν αυτω οιτινες ησαν μωσης και ηλιας

라틴어Vulgate,30 et ecce duo viri loquebantur cum illo erant autem Moses et Helias

히브리어Modern,30 והנה שני אנשים מדברים אתו והמה משה ואליהו׃

성 경: [눅9:3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모세와 엘리야 –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이자 예언의 대표자이다. 또한 모세는 과거에 시내산에서(출 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왕상 19:8)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다(말 4:5). 엘리야는 산채로 승천하였고(왕하 2:11), 모세도 특이한 방식으로 소천당하여 그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신 34:6). 이제 이들이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결국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마 5:17,18).

호이 오프덴테스 엔 돜세 엘레곤 텐 엨소돈 아우투 헨 에멜렌 플레룬 엔 예루살렘

개역개정,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새번역,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 ㉤’세상에서 떠나가심’ 곧 ‘죽으심’

우리말성경,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분의 떠나가심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영어NIV,31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영어NASB,31 who, appearing in glory, were speaking of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accomplish at Jerusalem.

영어MSG,31 and what a glorious appearance they made! They talked over his exodus, the one Jesus was about to complete in Jerusalem.

영어NRSV,31 They appeared in glory and were speaking of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accomplish at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31 οι οφθεντες εν δοξη ελεγον την εξοδον αυτου ην εμελλεν πληρουν εν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31 visi in maiestate et dicebant excessum eius quem conpleturus erat in Hierusalem

히브리어Modern,31 אשר נראו בכבוד והגידו את אחריתו אשר ימלאנה בירושלים׃

성 경: [눅9:3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오 데 페트로스 카이 호이 쉰 아우토 에산 베바레메노이 휲노 디아그레고레산테스 데 에이돈 텐 돜산 아우투 카이 투스 뒤오 안드라스 투스 쉬네스토타스 아우토

개역개정,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새번역,32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의 영광을 보고, 또 그와 함께 서 있는 그 두 사람을 보았다.

우리말성경,32 베드로와 그 일행이 잠을 이기지 못해 졸다가 완전히 깨서 예수의 영광과 그분 곁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톨릭성경,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영어NIV,32 Peter and his companions were very sleepy, but when they became fully awake, they saw his glory and the two men standing with him.

영어NASB,32 Now Peter and his companions had been overcome with sleep; but when they were fully awake, they saw His glory and the two men standing with Him.

영어MSG,32 Meanwhile, Peter and those with him were slumped over in sleep. When they came to, rubbing their eyes, they saw Jesus in his glory and the two men standing with him.

영어NRSV,32 Now Peter and his companions were weighed down with sleep; but since they had stayed awake, they saw his glory and the two men who stood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2 ο δε πετρος και οι συν αυτω ησαν βεβαρημενοι υπνω διαγρηγορησαντες δε ειδον την δοξαν αυτου και τους δυο ανδρας τους συνεστωτας αυτω

라틴어Vulgate,32 Petrus vero et qui cum illo gravati erant somno et evigilantes viderunt maiestatem eius et duos viros qui stabant cum illo

히브리어Modern,32 ויהיו פטרוס ואשר אתו נרדמים ובהקיצם ראו את כבודו ואת שני האנשים העמדים עליו׃

성 경: [눅9:3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곤하여 졸다가 – 본절 역시 누가만의 기록으로 예수와 두 구약인물이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기도함으로써 하늘의 계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신데 반해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곯아 떨어짐으로써 포착했어야 될 중요한 계시를 놓쳤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곡해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한다(33절).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연출되는데, 그 때에도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는데 반해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실수를 범하며 결국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결과를 초래했다(22:42-46).

󰃨 아주 깨어…보더니 –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깨어난다. 아마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 때문에 깨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예수와 두 인물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예수의 영광에 두 사람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을 능가하는 존재임을 간접 시사한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디아코리제스다이 아우투스 앞 아우투 에이펜 호 페트로스 프로스 톤 예순 에피스타타 칼론 에스틴 헤마스 호데 에이나이 카이 포이에소멘 스케나스 트레이스 미안 소이 카이 미안 모위세이 카이 미안 엘리아 메 에이도스 호 레게이

개역개정,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새번역,33 그 두 사람이 예수에게서 막 떠나가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

우리말성경,33 두 사람이 예수를 떠나려고 하자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우리가 초막 세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선생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세우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영어NIV,33 As the men were leaving Jesus, Peter said to him, “Master,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put up three shelters–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He did not know what he was saying.)

영어NASB,33 And as these were leaving Him, Peter said to Jesus, “Master,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make three tabernacles: one for You, and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not realizing what he was saying.

영어MSG,33 When Moses and Elijah had left, Peter said to Jesus, “Master, this is a great moment! Let’s build three memorials: 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He blurted this out without thinking.

영어NRSV,33 Just as they were leaving him, Peter said to Jesus, “Master,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let us make three dwellings, 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not knowing what he said.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διαχωριζεσθαι αυτους απ αυτου ειπεν ο πετρος προς τον ιησουν επιστατα καλον εστιν ημας ωδε ειναι και ποιησωμεν σκηνας τρεις μιαν σοι και μωσει μιαν και μιαν ηλια μη ειδως ο λεγει

라틴어Vulgate,33 et factum est cum discederent ab illo ait Petrus ad Iesum praeceptor bonum est nos hic esse et faciamus tria tabernacula unum tibi et unum Mosi et unum Heliae nesciens quid diceret

히브리어Modern,33 ויהי בהפרדם ממנו ויאמר פטרוס אל ישוע מורה טוב היותנו פה נעשה נא שלש סכות לך אחת ולמשה אחת ולאליהו אחת ולא ידע מה דבר׃

성 경: [눅9:3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이 제단은 하늘로부터 온 두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바램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수난 예고와(22절)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31절)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겪어야하는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하기를 도모하는 비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초막 셋을 짓되 – 이 초막은 숙곳에서 장막절에 사용했던 것(출 13:20)과 같이 나뭇잎이나 기타 일시적인 재료로 지은 움막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텐트나 장막을 가리킨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상적인 영광의 임재를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초막 셋’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다른 두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적 무지를 반영한다.

타우타 데 아우투 레곤토스 에게네토 네펠레 카이 에페스키아젠 아우투스 에포베데산 데 엔 토 에이셀데인 아우투스 에이스 텐 네펠렌

개역개정,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새번역,34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 세 사람을 휩쌌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그, ‘그들을’

우리말성경,34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구름이 나와서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가톨릭성경,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영어NIV,34 While he was speaking, a cloud appeared and enveloped them, and they were afraid as they entered the cloud.

영어NASB,34 While he was saying this, a cloud formed and began to overshadow them; and they were afraid as they entered the cloud.

영어MSG,34 While he was babbling on like this, a light-radiant cloud enveloped them. As they found themselves buried in the cloud, they became deeply aware of God.

영어NRSV,34 While he was saying this, a cloud came and overshadowed them; and they were terrified as they entered the cloud.

헬라어신약Stephanos,34 ταυτα δε αυτου λεγοντος εγενετο νεφελη και επεσκιασεν αυτους εφοβηθησαν δε εν τω εκεινους εισελθειν εις την νεφελην

라틴어Vulgate,34 haec autem illo loquente facta est nubes et obumbravit eos et timuerunt intrantibus illis in nubem

히브리어Modern,34 הוא מדבר כזאת והנה ענן סכך עליהם וכבואם בענן נבעתו׃

성 경: [눅9:3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구름 – 구름은 미래에 다시오실 인자와 관련되기도 하고(단 7:13) 성도들을 하늘로 들려 올리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며(계 11:12), 신 구약 중간시대 문학에서는 메시야의 도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였다(위경 2 Baruch 53:1-12;4 Ezra 13:3). 구름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경우이다(출16:10;19:9;24:15-18;33:9). 특히 출 24:15-18에는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병행구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와 두 인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이어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말미암아 상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 저희를 덮는지라 –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예수와 두 인물 그리고 3제자 모두(Schurmann), (2)모세와 엘리야만(Greijdanus, Williams), (3)예수와 모세, 엘리야(Godet, Knox, Marshall). 이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 무서워하더니 – 신적인 권능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이는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 때문이다(8:25;24:4,5).

카이 포네 에게네토 에크 테스 네펠레스 레구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에클렐레그메노스 아우투 아쿠에테

개역개정,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새번역,35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우리말성경,35 그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그의 말을 들어라!”

가톨릭성경,35 이어 구름 속에서 “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영어NIV,35 A voice came from the cloud, saying, “This is my Son, whom I have chosen; listen to him.”

영어NASB,35 Then a voice came out of the cloud, saying, “This is My Son, My Chosen One; listen to Him!”

영어MSG,35 Then there was a voice out of the cloud: “This is my Son, the Chosen! Listen to him.”

영어NRSV,35 Then from the cloud came a voice that said, “This is my Son, my Chosen; listen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φωνη εγενετο εκ της νεφελης λεγουσα ουτος εστιν ο υιος μου ο αγαπητος αυτου ακουετε

라틴어Vulgate,35 et vox facta est de nube dicens hic est Filius meus electus ipsum audite

히브리어Modern,35 ויצא קול מן הענן אמר זה בני ידידי אליו תשמעון׃

성 경: [눅9:3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이기에 그만큼 이 선언은 엄숙하고 확정적이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때 들려왔던 음성과도 비슷하다(3:22).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예수 이해는 이제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더이상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수난 주간에도 한번 더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요 12:28).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사역의 시작과 절정기와 마지막에 주어진 것이며 이것은 그 사역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마태(마 17:5)나 마가(막 9:7)와 달리 ‘사랑하는’을 생략하고 ‘택함을 받은 자’를 첨가하고 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과 아울러 예수의 권위의 출처가 초월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 저의 말을 들으라 – 이 명령은 신 18:15의 반영으로 이제 예수의 정체(正體)가 분명히 드러난 이상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이 명령은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것이고 그 선택 여하에 따른 필연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하여튼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순종에 있으며 예수께서 제시하는 사역의 목적과 방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라는 것이다(마 16:21-23).

카이 엔 토 게네스다이 텐 포넨 휴레데 예수스 모노스 카이 아우토이 에시게산 카이 우데니 아펭게일란 엔 에케이나스 타이스 헤메라이스 우덴 혼 헤오라칸

개역개정,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새번역,36 그 소리가 끝났을 때에, 예수만이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그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우리말성경,36 그 소리가 사라지고 그들이 보니 예수만 홀로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영어NIV,36 When the voice had spoken, they found that Jesus was alone. The disciples kept this to themselves, and told no one at that time what they had seen.

영어NASB,36 And when the voice had spoken, Jesus was found alone. And they kept silent, and reported to no one in those days any of the things which they had seen.

영어MSG,36 When the sound of the voice died away, they saw Jesus there alone. They were speechless. And they continued speechless, said not one thing to anyone during those days of what they had seen.

영어NRSV,36 When the voice had spoken, Jesus was found alone. And they kept silent and in those days told no one any of the things they had seen.

헬라어신약Stephanos,36 και εν τω γενεσθαι την φωνην ευρεθη ο ιησους μονος και αυτοι εσιγησαν και ουδενι απηγγειλαν εν εκειναις ταις ημεραις ουδεν ων εωρακασιν

라틴어Vulgate,36 et dum fieret vox inventus est Iesus solus et ipsi tacuerunt et nemini dixerunt in illis diebus quicquam ex his quae viderant

히브리어Modern,36 ובהיות הקול נשאר ישוע לבדו והמה החשו ולא הגידו דבר לאיש בימים ההם מכל אשר ראו׃

성 경: [눅9:3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 누가는 상황이 끝나는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마 17:6-8 비교).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만’ 남아 있음이 ‘오직’이란 뜻의 ‘모노스'(*)로 강조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 뿐이다. 그만큼 예수는 탁월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 그 때에는…아니하니라 –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잠정적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을 말하는데 아마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말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듯하다(마 17:9;막 9:9).

에게네토 데 테 헼세스 헤메라 카텔돈톤 아우톤 아포 투 오루스 쉬넨테센 아우토 오클로스 폴뤼스

개역개정,37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새번역,37 다음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니, 큰 무리가 예수를 맞이하였다.

우리말성경,37 이튿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맞았습니다.

가톨릭성경,37 다음 날 그들이 산에서 내려가니 많은 군중이 그분께 마주 왔다.

영어NIV,37 The next day, when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a large crowd met him.

영어NASB,37 On the next day, when they came down from the mountain, a large crowd met Him.

영어MSG,37 When they came down off the mountain the next day, a big crowd was there to meet them.

영어NRSV,37 On the next day, when they had come down from the mountain, a great crowd met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7 εγενετο δε εν τη εξης ημερα κατελθοντων αυτων απο του ορους συνηντησεν αυτω οχλος πολυς

라틴어Vulgate,37 factum est autem in sequenti die descendentibus illis de monte occurrit illi turba multa

히브리어Modern,37 ויהי ממחרת ברדתם מן ההר ויצא עם רב לקראתו׃

성 경: [눅9:3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이튿날 – 누가만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에 의하면 변화산의 영광이 밤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태나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엘리야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17:10-13;막 9:11-13) 누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한채 바로 무리들과의 만남을 서술한다. 이 무리들 중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고(40절), 막 9:14에 의하면 서기관들도 있었다고 한다.

카이 이두 아네르 아포 투 오클루 에보에센 레곤 디다스칼레 데오마이 수 에피블렢사이 에피 톤 휘온 무 호티 모노게네스 모이 에스틴

개역개정,38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새번역,38 그런데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소리를 크게 내서 말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보아주십시오. 그 아이는 내 외아들입니다.

우리말성경,38 그 무리 중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부탁입니다. 제 아들 좀 봐 주십시오. 제게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입니다.

가톨릭성경,38 그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남자가 부르짖었다. “ 스승님, 청하건대 부디 제 아들을 보아 주십시오. 저의 외아들입니다.

영어NIV,38 A man in the crowd called out, “Teacher, I beg you to look at my son, for he is my only child.

영어NASB,38 And a man from the crowd shouted, saying, “Teacher, I beg You to look at my son, for he is my only boy,

영어MSG,38 A man called from out of the crowd, “Please, please, Teacher, take a look at my son. He’s my only child.

영어NRSV,38 Just then a man from the crowd shouted, “Teacher, I beg you to look at my son; he is my only child.

헬라어신약Stephanos,38 και ιδου ανηρ απο του οχλου ανεβοησεν λεγων διδασκαλε δεομαι σου επιβλεψον επι τον υιον μου οτι μονογενης εστιν μοι

라틴어Vulgate,38 et ecce vir de turba exclamavit dicens magister obsecro te respice in filium meum quia unicus est mihi

히브리어Modern,38 והנה איש אחד מן העם צעק לאמר אנא רבי פנה נא אל בני כי יחיד הוא לי׃

성 경: [눅9:3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내 외아들이니이다 – 무리들이 예수를 기다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딱한 사정에 대하여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은 8:40,41에 있는 야이로의 외딸을 살리신 사건과 유사하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외아들’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당하는 고통의 극심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고통이 극심한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릴 때(7:12)나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릴때도(8:41) 마찬가지였다. 한편 누가는 아버지의 간청을 묘사함에 있어서 마가(막9:22)의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를 ‘돌아보다'(*, 에피블렙사이)로 대치시키고 있는데 이 단어는 ‘위로’를 뜻하는 ‘에피'(*)와 ‘보다’를 뜻하는 ‘블레포'(*)의 합성어로 환자를 정밀하게 검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이다. 의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카이 이두 프뉴마 람바네이 아우톤 카이 엨사이프네스 크라제이 카이 스파라쎄이 아우톤 메타 아프루 카이 모기스 아포코레이 앞 아우투 쉰트리본 아우톤

개역개정,39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새번역,39 귀신이 그 아이를 사로잡으면,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또 귀신은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물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말성경,39 그런데 귀신이 이 아이를 사로잡아 갑자기 소리를 지르게 하고 아이에게 발작을 일으켜 입에 거품을 물게도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가톨릭성경,39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영은 아이를 뒤흔들어 거품을 물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온통 상처를 입히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어NIV,39 A spirit seizes him and he suddenly screams; it throws him into convulsions so that he foams at the mouth. It scarcely ever leaves him and is destroying him.

영어NASB,39 and a spirit seizes him, and he suddenly screams, and it throws him into a convulsion with foaming at the mouth; and only with difficulty does it leave him, mauling him as it leaves.

영어MSG,39 Often a spirit seizes him. Suddenly he’s screaming, thrown into convulsions, his mouth foaming. And then it beats him black and blue before it leaves.

영어NRSV,39 Suddenly a spirit seizes him, and all at once he shrieks. It convulses him until he foams at the mouth; it mauls him and will scarcely leav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9 και ιδου πνευμα λαμβανει αυτον και εξαιφνης κραζει και σπαρασσει αυτον μετα αφρου και μογις αποχωρει απ αυτου συντριβο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39 et ecce spiritus adprehendit illum et subito clamat et elidit et dissipat eum cum spuma et vix discedit dilanians eum

히브리어Modern,39 והנה רוח אחז בו ופתאם הוא מצעק והרוח מרוצץ אתו בהוריד רירו ומקשה לסור ממנו ובסורו ידכא אתו׃

성 경: [눅9:3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귀신이 저를 잡아 – 마태는 이 아이가 간질병에 걸렸다 하고(마 17:15), 마가는 벙어리 귀신에 들렸다고 하나(막 9:17) 누가는 간략하게 귀신에 붙잡혔다고만 서술하고있다. 누가로서는 이 사건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확증을 받은 ‘아들’과 아들의 사역을 방해하는 핵심 세력인 ‘귀신’과의 싸움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 졸지에…떠나 가나이다 – 이런 증세는 의학적으로 규명할 때 간질병의 증세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 간질병 배후(背後)에는 귀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의 공통된 진술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의 문제는 간질병과 예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귀신과 예수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카이 에데에덴 톤 마데톤 수 히나 에크발로신 아우토 카이 우크 에뒤네데산

개역개정,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새번역,40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청하였으나, 그들은 해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말성경,40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들은 해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40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영어NIV,40 I begged your disciples to drive it out, but they could not.”

영어NASB,40 “I begged Your disciples to cast it out, and they could not.”

영어MSG,40 I asked your disciples to deliver him but they couldn’t.”

영어NRSV,40 I begged your disciples to cast it out, but they could not.”

헬라어신약Stephanos,40 και εδεηθην των μαθητων σου ινα εκβαλλωσιν αυτο και ουκ ηδυνηθησαν

라틴어Vulgate,40 et rogavi discipulos tuos ut eicerent illum et non potuerunt

히브리어Modern,40 ואבקש מתלמידיך לגרשו ולא יכלו׃

성 경: [눅9:4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제자들…능히 못하더이다 – 결국 서기관들을 포함한 무리들의 변론 주제가(막9:14) 제자들의 무능력에 관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신적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동안 예수와 함께 있던 세 제자는 잠을 자고(32절), 아래에 있던 제자들은 귀신에 붙잡힌 아이를 구하지 못해 무리들로부터 실망을 사고 서기관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인 바, 이는 제자들의 아둔함을 잘 보여준다. 본래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온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능히 예수를 대신하여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권능을 받았고 그 권능으로 능히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6절). 그렇다면 제자들의 능력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예수스 에이펜 오 게네아 아피스토스 카이 디에스트람메네 헤오스 포테 에소마이 프로스 휘마스 카이 아넼소마이 휘몬 프로사가게 호데 톤 휘온 수

개역개정,4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새번역,4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우리말성경,41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참아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가톨릭성경,41 그러자 예수님께서, “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네 아들을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이르셨다.

영어NIV,41 “O unbelieving and perverse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and put up with you? Bring your son here.”

영어NASB,41 And Jesus answered and said, “You unbelieving and perverted generation, how long shall I be with you and put up with you? Bring your son here.”

영어MSG,41 Jesus said, “What a generation! No sense of God! No focus to your lives! How many times do I have to go over these things? How much longer do I have to put up with this? Bring your son here.”

영어NRSV,41 Jesus answered, “You faithless and perverse generation, how much longer must I be with you and bear with you? Bring your son here.”

헬라어신약Stephanos,41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ιησους ειπεν ω γενεα απιστος και διεστραμμενη εως ποτε εσομαι προς υμας και ανεξομαι υμων προσαγαγε ωδε τον υιον σου

라틴어Vulgate,41 respondens autem Iesus dixit o generatio infidelis et perversa usquequo ero apud vos et patiar vos adduc huc filium tuum

히브리어Modern,41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הוי דור חסר אמונה ופתלתל עד מתי אהיה עמכם ואסבל אתכם הבא הנה את בנך׃

성 경: [눅9:4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이 꾸중은 믿음 없는 제자들과 거기 모인 모든 무리들에게 하신 것임에 분명하다. 한 아이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한 아이의 고통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을 발동시켜 이적(異蹟) 자체를 즐기려는 무리들에게 적합한 책망인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패역한 무리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내가 얼마나…너희를 참으리요 – 본절에 나타난 ‘믿음이 없는’, ‘패역한’ 등의 표현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들을(신 32:5,20) 반영하며, 본문의 말씀은 더이상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패역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들을 품안에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를 연상시킨다(사 46:4). 이제 예수의 지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의 종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의 결핍을 노출시켰고 거짓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무리들은 점점더 패역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예수의 격한 감정은 ‘호'(*)라는 탄식어가 잘 나타내 준다.

에티 데 프로세르코메누 아우투 에르렠센 아우톤 토 다이모니온 카이 쉬네스파랔센 에페티메센 데 호 예수스 토 프뉴마티 토 아카다르토 카이 이아사토 톤 파이다 카이 아페도켄 아우톤 토 파트리 아우투

개역개정,42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새번역,42 아이가 예수께로 오는 도중에도, 귀신이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 ㉧그, ‘더러운’

우리말성경,42 그 아이가 오는 중에도 귀신은 아이의 몸을 바닥에 내던지며 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며 그 아이를 고쳐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셨습니다.

가톨릭성경,42 아이가 다가오는 동안에도 마귀는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뒤흔들어 댔다. 예수님께서는 그 더러운 영을 꾸짖어 아이를 고쳐 주시고 나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영어NIV,42 Even while the boy was coming, the demon threw him to the ground in a convulsion. But Jesus rebuked the evil spirit, healed the boy and gave him back to his father.

영어NASB,42 While he was still approaching, the demon slammed him to the ground and threw him into a convulsion. But Jesus rebuked the unclean spirit, and healed the boy and gave him back to his father.

영어MSG,42 While he was coming, the demon slammed him to the ground and threw him into convulsions. Jesus stepped in, ordered the vile spirit gone, healed the boy, and handed him back to his father.

영어NRSV,42 While he was coming, the demon dashed him to the ground in convulsions. But Jesus rebuked the unclean spirit, healed the boy, and gave him back to his father.

헬라어신약Stephanos,42 ετι δε προσερχομενου αυτου ερρηξεν αυτον το δαιμονιον και συνεσπαραξεν επετιμησεν δε ο ιησους τω πνευματι τω ακαθαρτω και ιασατο τον παιδα και απεδωκεν αυτον τω πατρ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42 et cum accederet elisit illum daemonium et dissipavit

히브리어Modern,42 ויהי אך הקריב לבוא וירעצהו השד וירוצצהו וישוע גער ברוח הטמא וירפא את הנער וישיבהו לאביו׃

성 경: [눅9:4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 ‘올때에’는 문자적으로 ‘아직 저가 오고있는 동안’의 의미로 아직 소년이 예수 앞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부터 귀신이 도발을 시작했음을 뜻한다(비교, 막 9:20). ‘거꾸러뜨리고'(*, 엘렉센 아우톤)는 전투나 레슬링에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타격을 가하는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아이의 발작이 귀신의 공격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귀신이 예수의 사역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에서 감행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 더러운 귀신을…낫게하사 – 귀신의 격렬한 도발 행위는 예수의 꾸짖음 앞에서 무기력하게 멈춰졌고 결과적으로 아이는 괴롭힘당했던 모든 질병들로부터 치유를 받았다. 한편 마가(막 9:22-24)는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을 갖게 되는 이야기를 전해 줌으로써 신앙적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그 부분을 생략하여 예수의 놀라운치유 능력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 조금전의 엄한 꾸짖음(41절)과 달리 이번에는 부드러운 사랑과 자비로운 행위로 아이를 아비에게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런 행위는 7:15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질적 성품이 사랑임을 나타내 준다.

엨세플레손토 데 판테스 에피 테 메갈레이오테티 투 데우 판톤 데 다우마존톤 에피 파신 호이스 에포이에이 에이펜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개역개정,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새번역,43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다. 사람들이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서 감탄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그, ‘위대하심’

우리말성경,43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모두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에 다들 놀라서 감탄하고 있을 때 그분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3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다.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영어NIV,43 And they were all amazed at the greatness of God. While everyone was marveling at all that Jesus did, he said to his disciples,

영어NASB,43 And they were all amazed at the greatness of God. But while everyone was marveling at all that He was doing, He said to His disciples,

영어MSG,43 They all shook their heads in wonder, astonished at God’s greatness, God’s majestic greatness. While they continued to stand around exclaiming over all the things he was doing, Jesus said to his disciples,

영어NRSV,43 And all were astounded at the greatness of God. While everyone was amazed at all that he was doing, he said to his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43 εξεπλησσοντο δε παντες επι τη μεγαλειοτητι του θεου παντων δε θαυμαζοντων επι πασιν οις εποιησεν ο ιησους ειπεν προς τους μαθητα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43 et increpavit Iesus spiritum inmundum et sanavit puerum et reddidit illum patri eius

히브리어Modern,43 וישתוממו כלם על גדלת האלהים ויהי בתמהם כלם על כל אשר עשה ויאמר ישוע אל תלמידיו׃

성 경: [눅9:4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확인은 예수의 귀신 축사를 통해 분명히 증명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사건 속에서 예수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하게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행위를 보면서 그의 정체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제껏 겪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데스데 휘메이스 에이스 타 오타 휘몬 투스 로구스 투투스 호 가르 휘오스 투 안드로푸 멜레이 파라디도스다이 에이스 케이라스 안드로폰

개역개정,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새번역,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인자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다.”

우리말성경,44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유의해 들으라. 인자가 배반을 당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가톨릭성경,44 “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영어NIV,44 “Listen carefully to what I am about to tell you: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betrayed into the hands of men.”

영어NASB,44 “Let these words sink into your ears; for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men.”

영어MSG,44 “Treasure and ponder each of these next words: The Son of Man is about to be betrayed into human hands.”

영어NRSV,44 “Let these words sink into your ears: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betrayed into human hands.”

헬라어신약Stephanos,44 θεσθε υμεις εις τα ωτα υμων τους λογους τουτους ο γαρ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μελλει παραδιδοσθαι εις χειρας ανθρωπων

라틴어Vulgate,44 stupebant autem omnes in magnitudine Dei omnibusque mirantibus in omnibus quae faciebat dixit ad discipulos suos ponite vos in cordibus vestris sermones istos Filius enim hominis futurum est ut tradatur in manus hominum

히브리어Modern,44 שימו אתם באזניכם את הדברים האלה כי עתיד בן האדם להמסר בידי בני האדם׃

성 경: [눅9:4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번째 예고]

󰃨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 사람들이 예수의 행함을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다시 한번 수난 예고를 하고 있다. 이 수난 예고는 22절에 이어 두번째에 해당하며 여기서는 ‘너희'(*, 휘메이스)가 강조적으로 쓰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다른 사람들이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기적들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든지 제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들’이란 계속 이어지는 ‘수난 예고’를 가리킨다.

󰃨 인자가…넘기우리라 –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수난 예고는 누가복음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네 번의 수난예고 가운데 두번째 것이다(9:22,44; 18:31-34;22:21-23). 여기서 ‘넘기우다'(*, 파라디도스다이)는 수동태의 표현은 가룟유다에 의한 배반을 예고하며 ‘사람들’은 22절에 언급된 바 있는 산헤드린(Sanhedrin)을 가리킨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배반 이면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었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마태(마 17:23)나, 마가(막 17:31)와 달리 누가는 여기서 ‘부활’에 관해서는 언급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이 데 에그노운 토 레마 투토 카이 엔 파라케칼륌메논 앞 아우톤 힌나 메 아이스돈타이 아우토 카이 에포분토 에로테사이 아우톤 페리 투 레마토스 투투

개역개정,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새번역,4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그 뜻이 숨겨져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그에게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우리말성경,4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그 뜻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예수께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가톨릭성경,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영어NIV,45 But they did not understand what this meant. It was hidden from them, so that they did not grasp it, and they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it.

영어NASB,45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tatement, and it was concealed from them so that they would not perceive it; and they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this statement.

영어MSG,45 They didn’t get what he was saying. It was like he was speaking a foreign language and they couldn’t make heads or tails of it. But they were embarrassed to ask him what he meant.

영어NRSV,45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aying; its meaning was concealed from them, so that they could not perceive it. And they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this saying.

헬라어신약Stephanos,45 οι δε ηγνοουν το ρημα τουτο και ην παρακεκαλυμμενον απ αυτων ινα μη αισθωνται αυτο και εφοβουντο ερωτησαι αυτον περι του ρηματος τουτου

라틴어Vulgate,45 at illi ignorabant verbum istud et erat velatum ante eos ut non sentirent illud et timebant interrogare eum de hoc verbo

히브리어Modern,45 והמה לא הבינו את המאמר הזה ונעלם הוא מדעתם וייראו לשאל אתו על המאמר הזה׃

성 경: [눅9:4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번째 예고]

󰃨 알지 못하였나니 – 제자들은 두 번에 걸쳐 주어진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은 첫째,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變貌)를 목격하고 이어서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까닭에, 둘째 수동태의 ‘히나'(*)절에 의해 확인되는 바 제자들의 몰이해 배후에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숨김’에 대한 진술은 본서에만 나오며, 일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제자들이 무지한 상태일 수 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여기서 누가가 더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에로의 길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갖게 될 성서적 지식과 부활의 빛에서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Marshall).

󰃨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것에 대해 묻기조차 두려워 하였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23-27절에 기록된 바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스스로 사도로서 사역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에이셀덴 데 디알로기스모스 엔 아우토이스 토 티스 안 에이에 메이존 아우톤

개역개정,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새번역,46 제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

우리말성경,46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성경,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영어NIV,46 An argument started among the disciples as to which of them would be the greatest.

영어NASB,46 An argument started among them as to which of them might be the greatest.

영어MSG,46 They started arguing over which of them would be most famous.

영어NRSV,46 An argument arose among them as to which one of them was the greatest.

헬라어신약Stephanos,46 εισηλθεν δε διαλογισμος εν αυτοις το τις αν ειη μειζω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46 intravit autem cogitatio in eos quis eorum maior esset

히브리어Modern,46 ויעל על לבבם לחשוב מי הוא הגדול בהם׃

성 경: [눅9:4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누가 크냐 – 마가복음에서(막 9:33)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이르는 노중(路中)에 논쟁을 벌였으며 가버나움에 이르러 예수의 추궁이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서술을 생략한 채 문제의 쟁점만을 취급한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한 것이었다(마 18:1). 여기서 변론(*, 디알로기스모스)은 ‘논쟁’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음을 시사한다. 불과 일주일 쯤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을 가르치셨고(23,24절), 조금 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수난을 제차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44절) 제자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결국 메시야가 일으켜 세울 왕국에서 누가 높은 요직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때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아(ego)를 버리지 못하고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찬 제자들로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호 데 예수스 에이도스 톤 디알로기스몬 테스 카르디아스 아우톤 에필라보메노스 파이디온 에스테센 아우토 파르 헤아우토

개역개정,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새번역,47 예수께서 그들 마음 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우리말성경,47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다 아시고 한 어린아이를 데려와 곁에 세우며

가톨릭성경,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영어NIV,47 Jesus, knowing their thoughts, took a little child and had him stand beside him.

영어NASB,47 But Jesus, knowing what they were thinking in their heart, took a child and stood him by His side,

영어MSG,47 When Jesus realized how much this mattered to them, he brought a child to his side.

영어NRSV,47 But Jesus, aware of their inner thoughts, took a little child and put it by his side,

헬라어신약Stephanos,47 ο δε ιησους ιδων τον διαλογισμον της καρδιας αυτων επιλαβομενος παιδιου εστησεν αυτο παρ εαυτω

라틴어Vulgate,47 at Iesus videns cogitationes cordis illorum adprehendens puerum statuit eum secus se

히브리어Modern,47 וירא ישוע את מחשבת לבם ויקח ילד ויעמידהו אצלו׃

성 경: [눅9:4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예수께서…아시고 – 제자들은 예수 몰래 자기들 끼리 논쟁을 벌였으나 예수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다툼을 이미 알고 계셨다.

󰃨 어린아이 하나를…세우시고 – 누가는 마태나(마 18:3,4), 마가(막 9:35)가 기록하고 있는 ‘큰 자’에 대한 결론적 서언을 생략한 채 바로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장면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스 에안 뎈세타이 투토 토 파이디온 에피 토 오노마티 무 에메 데케타이 카이 호스 안 에메 뎈세타이 데케타이 톤 아포스테일란타 메 호 가르 미크로테로스 엔 파신 휘민 휘파르콘 후토스 에스틴 메가스

개역개정,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새번역,48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우리말성경,48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가톨릭성경,48 그들에게 이르셨다. “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사람이다.”

영어NIV,48 Then he said to them, “Whoever welcomes this little child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the one who sent me. For he who is least among you all–he is the greatest.”

영어NASB,48 and said to them, “Whoever receives this child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Him who sent Me; for the one who is least among all of you, this is the one who is great.”

영어MSG,48 “Whoever accepts this child as if the child were me, accepts me,” he said. “And whoever accepts me, accepts the One who sent me. You become great by accepting, not asserting. Your spirit, not your size, makes the difference.”

영어NRSV,48 and said to them, “Whoever welcomes this child in my name welcomes me, and whoever welcomes me welcomes the one who sent me; for the least among all of you is the greatest.”

헬라어신약Stephanos,48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ος εαν δεξηται τουτο το παιδιον επι τω ονοματι μου εμε δεχεται και ος εαν εμε δεξηται δεχεται τον αποστειλαντα με ο γαρ μικροτερος εν πασιν υμιν υπαρχων ουτος εσται μεγας

라틴어Vulgate,48 et ait illis quicumque susceperit puerum istum in nomine meo me recipit et quicumque me recipit recipit eum qui me misit nam qui minor est inter omnes vos hic maior est

히브리어Modern,48 ויאמר אליהם כל אשר יקבל את הילד הזה לשמי אותי הוא מקבל וכל אשר יקבל אותי הוא מקבל את אשר שלחני כי הקטן בכלכם הוא יהיה הגדול׃

성 경: [눅9:4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내 이름으로…영접함이요 – 예수께서 제자들의 사고 방식을 교정시켜 주기 위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교훈을 베푸신다. 먼저 ‘내 이름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명예나 지위가 예수께 완전히 종속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모든 제자들의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 앞에 따로 드러날 수 없으며 모든 영광이 예수의 이름에 돌려져야 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은 예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라고 하여(막9:37) 어린이 일반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데 비해 누가는 ‘이 어린아이’라고 하여 바로 제자들 앞에 서 있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실제로 어린아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 나를 영접하면…영접함이라 –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예수를 영접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이 논리는 성도들의 대인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된다.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생들을 자연 모습대로 대할 때에는 누구나 환멸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과 주님의 피로 새로 태어난 생명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헌신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 –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역설적 진리는 23-25절에서 말씀하신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역설적 진리와 갖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큰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며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위의 대가로 지위나 명예를 얻어 보려는 욕망을 버린 사람이다. 한편 본문에서 ‘가장 낮은 자’와 대비되는 개념을 ‘가장 큰 자’가 아니라 단순히 ‘큰 자’라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데는 비교 우위의 개념이 적용되지만 높아지는 데에는 비교 우위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요안네스 에이펜 에피스타타 에이도멘 티나 엔 토 오노마티 수 에크발론타 다이모니아 카이 에콜뤼오멘 아우톤 호티 우크 아콜루데이 멛 헤몬

개역개정,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새번역,49 요한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우리말성경,49 요한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을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못하게 막았습니다.”

가톨릭성경,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영어NIV,49 “Master,” said John, “we saw a man driv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ried to stop him, because he is not one of us.”

영어NASB,49 John answered and said, “Master, we saw someone cast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ried to prevent him because he does not follow along with us.”

영어MSG,49 John spoke up, “Master, we saw a man using your name to expel demons and we stopped him because he wasn’t of our group.”

영어NRSV,49 John answered, “Master, we saw someone casting out demons in your name, and we tried to stop him, because he does not follow with us.”

헬라어신약Stephanos,49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ιωαννης ειπεν επιστατα ειδομεν τινα επι τω ονοματι σου εκβαλλοντα τα δαιμονια και εκωλυσαμεν αυτον οτι ουκ ακολουθει μεθ ημων

라틴어Vulgate,49 respondens autem Iohannes dixit praeceptor vidimus quendam in nomine tuo eicientem daemonia et prohibuimus eum quia non sequitur nobiscum

히브리어Modern,49 ויען יוחנן ויאמר מורה ראינו איש מגרש שדים בשמך ונכלא אותו יען איננו הולך עמנו׃

성 경: [눅9:4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다.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같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단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였다. 여기서 제자들이 취한 행동은 그들만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베풀 수 있는 제한된 자격을 가졌다는 자의식(自意識)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1, 2) 아울러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실패에 대한(40절) 열등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에이펜 데 프로스 아우톤 호 예수스 메 콜뤼에테 호스 가르 우크 에스틴 칻 휘몬 휘페르 휘몬 에스틴

개역개정,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새번역,5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말성경,5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막지 마라. 누구든지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위하는 사람이다.”

가톨릭성경,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영어NIV,50 “Do not stop him,” Jesus said, “for whoever is not against you is for you.”

영어NASB,50 But Jesus said to him, “Do not hinder him; for he who is not against you is for you.”

영어MSG,50 Jesus said, “Don’t stop him. If he’s not an enemy, he’s an ally.”

영어NRSV,50 But Jesus said to him, “Do not stop him; for whoever is not against you is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50 και ειπεν προς αυτον ο ιησους μη κωλυετε ος γαρ ουκ εστιν καθ ημων υπερ ημων εστιν

라틴어Vulgate,50 et ait ad illum Iesus nolite prohibere qui enim non est adversum vos pro vobis est

히브리어Modern,50 ויאמר ישוע אליו אל תכלאו כי כל אשר איננו נגדנו בעדנו הוא׃

성 경: [눅9:5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금하지 말라…위하는 자니라 – 그 사람은 예수에게서 특별히 권위를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예수께 대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1:23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는 말씀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바의 요지는 이러하다. 익명(匿名)의 귀신 추방자는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의 참경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고 그가 확신하는 바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의 행위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했던 일을(6, 42절) 한 것이므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하는 자인 셈이다. 이것은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하는 일의 내용과 지향점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에게네토 데 엔 토 쉼플레루스다이 타스 헤메라스 테스 아날렘프세오스 아우투 카이 아우토스 토 프로소폰 에스테리센 투 포류에스다이 에이스 예루살렘

개역개정,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새번역,51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우리말성경,51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가 가까이 오자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영어NIV,51 As the time approached for him to be taken up to heaven, Jesus resolutely set out for Jerusalem.

영어NASB,51 When the days were approaching for His ascension, He was determined to go to Jerusalem;

영어MSG,51 When it came close to the time for his Ascension, he gathered up his courage and steeled himself for the journey to Jerusalem.

영어NRSV,51 When the days drew near for him to be taken up, he set his face to go to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51 εγενετο δε εν τω συμπληρουσθαι τας ημερας της αναληψεως αυτου και αυτος το προσωπον αυτου εστηριξεν του πορευεσθαι εις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51 factum est autem dum conplerentur dies adsumptionis eius et ipse faciem suam firmavit ut iret Hierusalem

히브리어Modern,51 ויהי כמלאת ימי העלותו והוא שם את פניו ללכת ירושלים׃

성 경: [눅9:5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 여기서 ‘승천'(*, 아날렘프세오스)은 ‘위로’를 뜻하는 ‘아나'(*)와 ‘올리다’의 의미를 갖는 ‘렙시스'(*)의 합성어로 ‘들어 올라감’이란 뜻이다(24:51). 여기서는 ‘죽음'(31절) 대신 ‘승천’이 언급됨으로써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차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플레로오'(*)는 본래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승천을 성취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었음과 예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심을 분명히 밝혀준다.

󰃨 예루살렘을…굳게 결심하시고 – 갈릴리로부터 예수의 최종 종착지인 예루살렘에로의 대전환이 언급되고 있다. 승천은 곧 수난과 죽음을 전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그일이 일어날 장소인 예루살렘에로의 행로를 굳은 결심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굳게 결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어귀는 ‘…로 얼굴을 향하다’는 셈어적인 표현으로 굳게 마음을 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곧 죽음을 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는 죽음을 향한 결단을 하신 것이다(22:42;요 10:11).

카이 아페스테일렌 앙겔루스 프로 프로소푸 아우투 카이 포류덴테스 에이셀돈 에이스 코멘 사마리톤 호스 헤토이마사이 아우토

개역개정,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새번역,52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우리말성경,52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미리 앞서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가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가톨릭성경,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영어NIV,52 And he sent messengers on ahead, who went into a Samaritan village to get things ready for him;

영어NASB,52 and He sent messengers on ahead of Him, and they went and entered a village of the Samaritans to make arrangements for Him.

영어MSG,52 He sent messengers on ahead. They came to a Samaritan village to make arrangements for his hospitality.

영어NRSV,52 And he sent messengers ahead of him. On their way they entered a village of the Samaritans to make ready for him;

헬라어신약Stephanos,52 και απεστειλεν αγγελους προ προσωπου αυτου και πορευθεντες εισηλθον εις κωμην σαμαρειτων ωστε ετοιμασαι αυτω

라틴어Vulgate,52 et misit nuntios ante conspectum suum et euntes intraverunt in civitatem Samaritanorum ut pararent illi

히브리어Modern,52 וישלח מלאכים לפניו וילכו ויבאו אל אחד מכפרי השמרונים להכין לו׃

성 경: [눅9:5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카이 우크 에뎈산토 아우톤 호티 토 프로소폰 아우투 엔 포류오메논 에이스 예루살렘

개역개정,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새번역,53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말성경,53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예수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영어NIV,53 but the people there did not welcome him, because he was heading for Jerusalem.

영어NASB,53 But they did not receive Him, because He was traveling toward Jerusalem.

영어MSG,53 But when the Samaritans learned that his destination was Jerusalem, they refused hospitality.

영어NRSV,53 but they did not receive him, because his face was set toward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53 και ουκ εδεξαντο αυτον οτι το προσωπον αυτου ην πορευομενον εις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53 et non receperunt eum quia facies eius erat euntis Hierusalem

히브리어Modern,53 ולא קבלהו על אשר היו פניו הלכים ירושלים׃

성 경: [눅9:5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

이돈테스 데 호이 마데타이 야코보스 카이 요안네스 에이판 퀴리에 델

[스크랩] 누가복음 9장 주석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마17:4

매튜헨리주석982-누가복음 09장

누가복음 09장

Ⅰ. 제자들의 사명과 헤롯의 공포 9:1-9

1.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택하신 방법(1-6)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두루 여행을 다니셨다. 그러나 그는 한 번에 한 곳에만 있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제자들을 내어 보내셨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확고히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기적을 행할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1,2절). 그는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어’ 귀신들의 소유를 빼앗고 그들을 내쫓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주었고, 그러한 일들을 하도록 그들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하였으며 그들의 호의를 얻게 하였다. 이것이 곧 제자들의 임무였다. 이 일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1) 이 임무의 수행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지시하신 일은 무엇인가? (1) 그들은 외모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가야 하며 옷을 바꿔 입어서도 새 신을 신어서도 안 된다. (2) 그들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며 그들의 친구들의 돈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친절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라고 하셨다. (3) 그들은 자기들을 받아들인 자들이 그들을 지겨워 하지나 않을까 해서 숙소를 옮겨서도 안 된다. 즉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야 한다(4절). 사람들이 그들의 있는 곳을 알 수 있도록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고, 그들에게 익숙해 진 자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이었다. (4) 그들은 권위를 가져야 되며,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고 그들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경고의 말을 해야 한다(5절). 만약 너희를 영접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 버려라. 그리고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2)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엇을 하였나(6절). 그들은 주의 곁을 떠나갔다. 그들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각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제자들의 행할 일은 그들의 주가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써 영혼과 육체에 대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

2. 제자들의 복음 전파를 전해들은 헤롯의 놀라움(7-9)

우리는 여기서 헤롯이 이 일을 듣고 당황하고 고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진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메시야라는 놀랍고도 확실한 증거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기적들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적을 행할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리고 이 일은 다른 어떠한 일보다도 그리스도의 명성을 널리 퍼뜨렸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었다'(행 4:13). 각 촌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놀랐다.

(1)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주 예수님을 존귀한 자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고 옛 선지자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다.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7,8절).

(2) 헤롯의 마음에 큰 고민이 생겼다. 그리스도가 행한 이 모든 일을 듣고 헤롯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하였다. “어찌 하여야 할까?” 헤롯이 말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 사람은 누군고.” “그는 요한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요한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하여 왔는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점점 더 당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헤롯은 그를 보고자 하였다(9절). 그런데 왜 가서 그를 만나지 않았을까? 헤롯은 그리스도를 보고자 하였으나, 법정에서 만나기 전에 그를 보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Ⅱ. 제자들이 돌아온 일과 오천 명을 먹이신 일 9:10-17

(1) 제자들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예수께 고하였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10절).

(2) 그들은 잠깐 동안 은거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나 가셨다. 우리의 남종과 여종을 쉬게 하라고 명하셨던 그리스도는 그의 종에게도 쉬게 하셨다. 지극히 공적인 자리에 있는 자들은, 육체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명상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워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하여 때때로 은밀하게 은거해야 한다.

(3)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리스도는 그들을 영접하셨다. 그리스도는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무리들이 그를 따라왔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셨다(11절).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열성을 품은 자들이 그 열성으로 인하여 다소 무례를 범한다 해도 용납받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용납받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랬으며 우리 또한 이러한 자들을 허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때 아니게 찾아왔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와서 구하는 것을 주셨다. 곧 그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셨다. 그리고 병든자를 고치셨다.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질병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셨으므로 치유를 필요로 하는 그의 백성들을 치료해 주신다. 우리에게 있어서 때때로 육체의 편안을 위한 치유 보다는 영혼의 유익을 위한 질병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알고 계셨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종이므로, 그는 성도들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4) 그리스도는 그를 따라온 무리를 충분히 먹이셨다. 곧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오천 명을 먹이셨다. 이 기사는 앞에서 두 번 나왔는데, 여기서 다시 대하게 된다. 우리 구주의 기적들 중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것은 오로지 이 사건뿐이다. 이 기사를 세밀히 살펴 보자.

(1) 열심히 그리스도를 쫓아 임무를 행하며 그러기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기도, 그러내기도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다. 그는 그를 두려워하고 충실하게 섬기며 어떠한 선한 것을 바라는 자들을 방관하지 않으신다. (2) 우리 주 예수님은 아낌없이 주시는 관대한 분이시다. 그의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했지만, 그리스도는 “아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데까지 주어서 그들이 자유로이 먹도록 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그의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할 것’을 가르치셨다. 적게 가진 자들은 적은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것이 바로 그것을 많게 하는 방법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치유하실 뿐 아니라 음식이 필요한 자에게 음식도 주신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질병으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구해 주실 뿐 아니라 영혼을 살찌게 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힘을 주신다. (4) 그리스도의 모든 선물은 정해진 격식에 따라 받아들여져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14절)고 말하고 계시다. (5) 우리는 우리에게 안락을 주는 것들(음식, 등등)을 받을 때 하늘을 우러러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셨으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받고 그것들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지하며 또한 그 축복을 간구한다. (6) 그리스도의 축복은 작은 것을 크게 만든다. (7) 그리스도가 먹인 자들은 ‘다 배가 불렀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실 수 있을 만큼 부요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먹고 남을 정도로 풍부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궁핍하지 않다.

Ⅲ.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예고 9:18-27

우리는 본문에서 다른 복음서들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특수한 상황을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가 ‘따로 기도 했다’는 것과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 그리스도의 물음이 시작된다(18절).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과 그의 아버지와 그리고 제자들과 대화하시기 위해서 은밀하게 따로 계실 필요를 느끼셨다. 따로 계실 때 그리스도는 기도하셨다. 기도하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따로 있을 때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는’ 제자들이 같이 기도하고자 ‘주와 함께’ 있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우리도 우리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또한 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이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담화하셨다.

(1) 그리스도는 자신에 관하여 질문하셨다.

1)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는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그들이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들었던 예수에 대한 여러 추측들을 말했다. 사역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보다 자주 그리고 친밀하게 대화를 할 때 더욱 그들의 상황에 알맞게 가르치고 책망하며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의사도 환자와 많이 대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환자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을 잘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가 죽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였다. 또한 엘리야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옛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2)제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하라고 명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가 부활하신 후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완전히 증거되자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성전이 울리도록 외쳤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그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직 증거가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은 감추어져야 했다.

(2)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믿게 되었고 또한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다(22절).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직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놀라운 사건이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3) 그리스도는 자신 때문에 제자들이 받을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1)우리는 자기부정과 인내에 익숙해져야 한다(23절). 또한 안일과 욕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에 빠지면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나 궁핍, 피곤 등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무를 행하는 동안 자주 십자가를 대하게 된다. 그러한 십자가를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것을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며 그것에 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우리는 어떤 세속적인 일보다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행복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숙고해 보자. ①자기 멋대로의 생활이나 재산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혹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말할 수 없는 상실자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24절). 훨씬 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신의 영혼을 잃을 것이다. ②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잃는다면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③온 천하를 얻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결코 그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의 끝없는 상실과 파멸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25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부, 명예, 즐거움 등을 획득했다고 생각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여 영원히 자기를 잃고 마침내 파멸해 버린다면 그렇듯 세상적으로 얻은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가장 두려운 일은 자기 영혼의 상실이라고 되어 있으며, 여기 본문에서는 그것을 자기를 잃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영혼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시사해 준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잘됨과 못됨에 따라 우리 자신도 잘되거나 못 되거나 하는 것이다. 영혼이 저 세상에서 비참한 상태에 있다면 몸도 편안할 수 없다. 그러나 몸이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과 억압을 받아도 영혼은 행복할 수 있다.

3)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며(26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자는, 최후의 심판 날에 그를 위해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때, 그리스도가 그렇게 비겁하고 속되며 비열한 자를 인정하시기를 부끄러워 할 것이며 ‘그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내게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할 때 기꺼이 함께 수난을 받는 자들 그리고 그들만이 그가 통치할 때 그와 더불어 통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현재 수치를 당하고 있는 그 자신과 그의 따르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가 재림할 때의 영광의 찬란함을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를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귀절이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날 영광 중에 오실 복된 예수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우리는 그가 그렇게 오시리라는 것을 믿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말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격려하지 위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다(27절). “여기 섰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능력으로 현 세대에 임할 것이다.” 성령이 확산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을 때, 그리고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 즉 그들은 이방나라가 파괴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목격하였다.

Ⅳ. 예수님의 변모 9:28-36

본문은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한 기사이다. 그리스도의 변모는 얼마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그의 영광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결과적으로 그를 위해 고난당하면서 결코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의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와 있다.

(1) 그런데 본문에는 상황이 위의 두 복음서의 것과는 다르게 언급되어 있다. 두 복음서에는 이 말씀을 하신 지 6일 후로 되어 있는데, 누가 복음에는 말씀하신 후 8일쯤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 날은 말씀하신 후 일곱 밤 다시 말해서 만 엿새가 지난 후인 여덟째 날이었다.

(2) 본문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덧붙여져 설명되고 있다.

1)본문을 보면 그리스도가 이 영광을 기도할 때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28절). 그리고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었다'(29절). 그리스도는 겸비해져서 기도하였을 때 이렇게 존귀하게 되셨다. 그리스도는 그를 위하여 준비되고 약속된 은혜를 스스로 구하여 받으셔야 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려 하셨으며 우리도 또한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자 하셨다. 이것이 바로 변모되고 변화되는 일이다.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지혜와 은혜 그리고 기쁨을 얻게 되며, 그로인해 얼굴에 광채가 날 것이다.

2)누가는 변형되었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마태와 마가는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어구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어구로 표현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즉, 빛이 비치는 것처럼 환했다. 그리하여 그는 빛으로 온 몸을 치장하고 옷을 해 입은 것처럼 보였다.

3)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계시므로, 그들도 예수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난 것이다.

4)여기서 그리스도와 구약의 두 선지자가 나눈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그들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의 떠남 곧 죽음을 이야기 하였다. ①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문에서는 그의 퇴거, 나감, 세상을 떠나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도의 죽음은 출애굽, 즉 이 세상이라는 애굽에서의 떠남이요 속박의 집으로부터의 해방이다. ②그리스도는 죽어야만 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결정되었으므로 변경될 수 없었다. ③그는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했다. ④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가 수난을 받고 그 후에 영광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것을 알리기 위하여 이와 같이 이야기했다(참조. 눅24:26,27). ⑤우리 주 예수께서는 변화하신 후에도 그의 죽음과 수난에 관해 기꺼이 이야기하셨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영원한 도성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5)본문에서 우리는, 전에 없었던 일, 즉 제자들이 조는 모습을 볼 수 있다(32절). 아마도 죄된 무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졸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기도할 때 그들은 그의 기도에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계속 잠자고 있었으므로 이 놀라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볼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있을 때 잠자고 있었다. 이들은 후에 그리스도가 고뇌할 때에도 똑같이 잠을 잤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주님의 영광과 고뇌보다 더 관심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뇌 중에 그들은 깨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생동력 있게 되기 위하여 소생시키는 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가. 얼마 후 그들은 정신을 차려 모든 영광의 장면들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벧후 1:18). 우리는 지금 그들 중 한 사람이 쓴 기사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6)본문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날 때 베들로가 이렇게 말한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게 하소서. 이와 같이 우리는 축복을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알게 된다. 그리고 축복이 떠난 후에야 그것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갈망하고 구한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말하였다.

7)그들은 뒤덮인 구름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구름 속으로 들어 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 하더니(34절). 이 구름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표시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안전하게 구름 속을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8)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대한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사는 마태복음의 기사만큼 자세하지 않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35절). 여기에는 마태복음과 베드로서에 있는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귀절이 없지만, 그것은 ‘택함을 받은 자니’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끝으로,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그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들은 당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시기가 있는가 하면 침묵을 지켜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때가 차야 아름답고 쓸모있게 된다.

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 9:37-42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기사는 그리스도의 변모와 변모 후 그리스도와 제자들과의 대화에 이어서 곧바로 나온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튿날 산에서 내려온’ 다음에 있었던 일로 되어 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들은 ‘산에서 내려왔으며’ 그 때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아셨다. (1) 그리스도가 돌아오자 큰 무리가 그를 맞기 위해 나아왔다.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듯이 이 날도 큰 무리가 그를 맞았다. (2)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도와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것이 그의 요청이었다. 그리스도의 동정적인 보살핌은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해 놓기에 족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는 내 외아들이니다’라고 호소하였다. 많은 자녀에게서 받는 위안으로 무마시킬 수도 있지만, 외아들뿐일 때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3) 그 아이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39절). 그는 ‘그를 잡고 있는’ 귀신의 지배하에 있었다. 발작이 시작되면 그는 ‘졸지에 부르짖었으며’ 그의 비명은 그의 온화한 아버지의 심정을 찔렀다. 이 악한 귀신은 그를 괴롭혔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였다. 사단은 자기가 들어간 곳에 얼마나 해를 입히는가! 반대로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는 자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4) 제자들의 신앙은 불완전하였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지배할 능력을 주었지만, 그들은 이 사악한 영을 내쫒지 못하였다(40절). 그들은 능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거니와 마땅히 해야 할 기도로써 자신을 단련시키지도 않았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책망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 (5) 그리스도가 이 아이에게 행한 치유는 매우 효과적이었다(42절).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할 수 없는 일도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귀신은 그 아이를 산산조각이라도 낼 것처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그 아이를 낫게 했으며, 귀신이 그에게 입힌 손상을 보상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아이를 그 아비에게 도로 주셨다. 우리 자녀가 질병에서 회복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되돌아온 것으로,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들을 돌려 받는 것은 위안이 되는 일이다. “자 이 아이를 데려가라. 그리고 감사해라.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해 양육하라. 왜냐하면 이 아이는 나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유념하여 부모들은 그리스도의 손에서 자녀들을 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손에 넘겨주어야 한다.

Ⅵ. 그리스도의 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변론 9:43-50

1. 그리스도의 기적이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준 영향(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그들의 놀라움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들 각자가 모두 놀랐다. 각자가 놀란 원인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놀랐다. 그의 행하는 모든 일에는 특이하고도 놀랄 만한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2. 그리스도가 다가올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하신 예고(43-45)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여기에는 다른 복음기자들이 기록한 “그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특이한 점이 몇가지 있다.

(1) 여기 본문의 귀절은 바로 앞에 있었던 사건, 즉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찬양한 일과 관계가 있다.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43절).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세속적인 권위와 권세로 다스릴 현세적인 왕국에 대해 강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전능하신 힘으로 그 일을 쉽게 이루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의 손에 넘기워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질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시게 되었다. (2) 그리스도는 근엄하게 말문을 여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내가 말한 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라”. 시리아어와 아랍어로는 “이 말을 너희 심령에 담아두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머리와 심령에 담아두지 않는다면 유익이 없다. (3) 제자들은 말할 수 없이 어리석었다. 마가복음은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말씀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도 제자들은 실제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어떤 다른 뜻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잘못을 깨달으려고도 또한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는 ‘저희가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고 부언되어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상하여 너무 슬퍼하지 않도록 그 말씀이 자비로써 숨겨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가장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심(45-48)

이 귀절은 앞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다시 본문에서 대하게 되었다.

(1) 명예에 대한 야망, 그리고 우위에 대한 자리다툼은 걸핏하면 우리 주 예수의 제자들에게 찾아드는 죄였다. 그들은 그토록 극복해야 하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했던 부패에 물들게 되었다(46절). 이 세상에서 크고자 하는 자들은 높은 자리를 노린다. 그러나 그들을 높혀 주는 것은 없다. 이러한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유혹과 고통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작아지는 것, 가장 작아지는 것,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아지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은 그러한 고통과 유혹을 받지 않는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완전히 알고 계시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47절). 그에게 있어 생각은 말이고 속삭임은 큰 외침이다.

(3)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묵묵히 겸손해짐으로써 얻게 될 명예를 구하고 끊임없이 치솟는 야망에 의해서 얻어질 명예는 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다(47절). 왜냐하면 그는 항상 어린아이들을 애정과 친절로 대하셨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어린아이의 품성처럼 겸손하고 조용하고 평온하라고 하셨다. 만일 그렇게 됨으로써 유익을 끼칠 수만 있다면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즐거워하라. (2) 이것이 바로 높아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케 하셨다. 그들(제자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자들이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그의 이름으로 그들을 영접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도 사랑을 받게 하고자 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48절).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그들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보다 더 큰 명예가 어디 있겠는가?

4.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편협됨을 책망하심(49,50)

그리스도는 그를 존경하고 섬겼던 한 사람을 실망시킨 데 대해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그 사람은 제자들의 동료는 아니었지만, 우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었으며, 진실한 태도로 믿고 기도하면서 그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쫒은 자였다. 제자들은 그를 비난하고 견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기도하고 전파하는 일을 못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행한 일을 꾸짖으셨다. 금하지 말라(50절). “오히려 그를 격려해 주라. 그도 너희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느니라. 그는 똑같은 길에서 너희와 동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똑같은 목적지에서 너희와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다. 그러니 그를 격려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친구는 적고, 적은 많으므로 우리는 친구를 잃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은, 비록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 인정받게 될 것이다.

Ⅶ. 제자들의 그릇된 열심 9:51-56

이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비신자들을 죽이고 싶어 한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독단과 박해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예루살렘행을 결심하심(51)

속죄와 구원을 위해 고난받을 때가 되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준비하시고 결심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우리 주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때는 정해져 있었다. 예수께서도 그 때를 잘 알고 계셨다. 그는 모든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분주하게 일하셨다. 그는 자기의 죽음과 고난이 다가왔음을 알고, 그것들을 통해 뒤따라올 영광을 바라보셨다. 그 때가 되면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우심을’ 받게 될 것이다(딤전 3:16).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해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죽음은 올리움을 받는 것이요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가올 기쁨을 예상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단념하지 않으시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그는 기쁨을 가지고 용기있게 그곳에 가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의롭다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영광도 받을 것이며, 수치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올리우심을 받을’ 것임을 아셨으므로 실망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으셨다. 이 일을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2.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들의 무례함(52,53)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예의를 지켰다. 그는 쉴 곳을 정하고 자기와 제자들이 쉴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사자들을 앞서 보내셨다(52절). 그는 그들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도록 몇 사람을 보냐 준비하게 하셨다.

(2)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 무례하게 대했다(53절).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들의 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였다. 만일 그들이 예수를 영접했다면 그는 가장 큰 축복을 베푸셨을 것이지만, 그들은 예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과 사라미아인들 간의 논쟁은 예배 장소에 관한 것이었다. 즉 예루살렘이냐 시갈 근처의 그리심 산이냐 하는 문제였다(눅 4:20). 그들 사이의 반목이 극심하였으므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했으며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였다(요 4:9). 사마리아인들은 특히 세상에 잘 알려진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의 전도여행때 그에게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예의를 베풀지 않았던 것이다.

3. 이러한 모욕에 대해 야곱과 요한이 분개함(54)

이 두 제자는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소돔의 저주를 내리도록 그리스도께 청했다.

(1) 여기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 칭찬할 만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능력에 대한 큰 확신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말로써 하늘에서 물을 내려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말을 우리가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2) 그들의 선생님의 명예를 위해 열심이었다. 가는 곳에서 마다 선을 베풀었고 환영을 받았던 그들의 선생에게 하찮은 사마리아인들이 마음대로 통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의 선의를 따랐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4) 그들에 앞서 간 선지자들의 예를 언급하였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할까요”라고 물었다(개역 한글 성경에는 이 말이 없다-역주). 그들은 이러한 전례가 오늘의 행위를 정당화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도 훌륭한 사람들의 본보기를 잘못 적용하기가 쉽다.

(2) 그들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지만, 잘못된 점이 더 많았다. (1) 우리 주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처럼 모욕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모욕을 끝까지 참으셨다. (2) 사마리아 사람들에게서는 더 좋은 대우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마 10:5)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던 다른 사람보다 나쁜 것은 아니다. (3) 그 말을에서 단지 몇 사람만이 그리스도에게 무례하게 대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가 그 마을에 가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나와서 그를 환영했을 것이다. (4) 그들의 선생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늘로서 불을 좇아 내리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리스도가 보아너게 (우리의 아들 막 3:17)라고 불렀던 제자들이었다. 그 이름처럼 그들은 행동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 역시 빛의 아들이 아닌가? (5) 엘리야의 예는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율법의 두려움을 알리도록 보내졌지만,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은혜의 법이다. 그토록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는 여기에 전혀 맞지 않는다.

4. 그리스도가 야고보와 요한을 책망하심(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몹시 사랑하는 만큼 꾸짖고 벌하신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해 열심히라는 미명하에 그들에게 어울리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을 했을 때 그렇게 하신다.

(1)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준다. “너희는 너희에게 어떠한 영이 있는지 모른다” (1) “너희는 너희 주님에 대한 열성이라는 구실 속에 감추어진 자만, 분노, 원한이 얼마나 많은 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선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부패가 숨어 있다. 아니 그것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2) “너희는 선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무엇인지 확실히 배워야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하늘로부터 불이 아닌 은혜가 그들에게 내려오기를 구하라고 배우지 않았느냐? 너희는 사랑 자유 은혜의 법 아래 있다.” 그것은 땅에는 평화요 사람에게는 축복이다라는 선포 속에 잘 나타나 있다.

(2) 그리스도는 그의 종교의 일반적인 뜻과 취지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56절).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개역 한글 성경에는 난외에 기록되어 있음-역주).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한 종교를 불과 검으로가 아니라 사랑과 친절,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끌고 애정을 느끼게 하는 모든 방법으로 전파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처럼 천벌과 파괴의 기적으로가 아니라 치유의 기적을 행함으로써 전파하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적의를 제거하고 그것을 마음에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러 오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도 구하러 오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으며, 인간적인 유대나 사랑의 끈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라고 가르치셨다.

5. 그리스도가 이 마을을 떠나가심(56)

그리스도는 그들의 무례함을 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용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다른 촌으로 가셨다. 즉 그다지 완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례히 행동하다면 우리는 복수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대우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Ⅷ. 주님을 따르려는 세 부류의 사람들 9:57-62

본문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 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즉각적으로 따르고자 나서는 자이다. 그는 너무 성급한 나머지 생각도 하지 말고 앞일을 내다보지도 못하는 것 같다.

1)그는 그리스도에게 큰 약속을 하였다(57절). 길 가실 때에 혹이 어찌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결심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어디로 가들지 그를 따라간다.

2)그리스도는 그에게 필요한 주의를 주었다. 즉 그를 따르는 자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큰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는 머리 둘곳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①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주 비천한 상태로 계셨다. 그는 훌륭한 왕자들이 으레껏 가지고 있는 장식품을 물론 여우나 공중의 새에게 있는 것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그는 모든 것을 만드셨지만 자기를 위한 거처, 즉 머리 둘 곳은 만들지 않으셨다. 본문에서 그는 자신을 인자, 곧 육과 피를 가진 아담의 아들로 부르고 계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도 낮아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로써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이 세상에 대한 거룩한 경멸과 저 세상에 대한 계속적인 소망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비천해져서 가난한 그의 백성들에게 가난을 견디기 쉽게 해주셨으며 정당화 해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에 당연히 만족해야 한다. ②이 말은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야 될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보다 더 중시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아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춥고 불편하게 되며 푸대접을 받고 모욕을 당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을 염두해 두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 일에 복종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돌아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는 이와 반대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실망하지 않는다.

(2)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하루만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다(59절).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먼저 이 사람을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가 부르셨던 이 사람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나중에는 복종했던 것 같다. 원하는 것도 그가 아니고 행하는 것도 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불러주시는 것이다.

1)그의 변명: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나에게는 집에 늙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나를 필요로 합니다. 가서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보살피게 하옵소서. 그러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유혹을 볼 수 있다. ①일반적으로 제자직을 수행할 때 우리는 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그 일을 미해결인 채로 내버려 두게 된다. ②우리의 의무로 알고 있는 일을 연기하라는 유혹을 받게 되어 그 일을 어떤 다른 때로 연기한다.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신앙적인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시간에 속음으로써 모든 시간에 속게 되는 것이다. ③우리는 우리 친척에 대한 의무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것같이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의의 나라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하고 염두에 두어야 한다.

2)그리스도의 대답: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60절).

“너에겐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다.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나 사역자들에게 몰인정하게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가족 하나하나에 대하여 친절하게 대하고 선을 베풀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데 대한 변명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자들인 사랑하는 가족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멀어지도록 방해한다면, 차라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을 정도로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일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

(3) 본문에는 기꺼이 주를 따르고자 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친구들과 잠깐만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1)그는 간청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61절). 이 말을 “가서 가사를 정리하게 하소서”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보자. ①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서글프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로 생각하였다. 그 일이 그에게는 마치 죽으러 가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는 그들과 계속해서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큰 위안과 축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②그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철저하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적인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가족과 친척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그를 주저하게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작별인사를 한 번 했었을 것이다. 떠나기가 싫어서 다시 한 번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집에서 편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③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그의 계획이 유혹받도록 하는 데에 자진해서 뛰어들고 있다. 집에 편히 있는 자들에게 가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그의 결심을 바꾸게 할 정도로 강한 유혹을 받게끔 자신을 유도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집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들을 떠나지 말라고 간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그들을 유혹하는 것들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2)그리스도는 그의 간청을 듣고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62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렇게 되면 쟁기질을 잘못하여 쟁기질한 땅에 씨를 뿌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따르고자 하면서도 세상적인 생활을 되돌아 보고 그것을 갈망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만일 네가 무성의하게 쟁기질을 한다면 너는 하나님 나라의 좋은 씨를 뿌리기에 적합한 땅이 되지 못한다.” 쟁기질은 씨를 뿌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묵혀진 땅을 경작하는 법을 모르는 자들은 씨뿌리는 일에 적합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쟁기를 잡고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고 그 일을 그만 둘 생각을 하게 된다. 뒤를 돌아보다가는 후퇴하게 되며 후퇴는 곧 파멸이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였다가 뒤돌아보는 자들은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9 Christ sent his twelve disciples abroad, who by this time were able to teach others what they had received from the Lord.

They must not be anxious to commend themselves to people’s esteem by outward appearance.

They must go as they were.

The Lord Jesus is the fountain of power and authority, to whom all creatures must, in one way or another, be subject; and if he goes with the word of his ministers in power, to deliver sinners from Satan’s bondage, they may be sure that he will care for their wants.

When truth and love thus go together, and yet the message of God is rejected and despised, it leaves men without excuse, and turns to a testimony against them.

Herod’s guilty conscience was ready to conclude that John was risen from the dead.

He desired to see Jesus; and why did he not go and see him? Probably, because he thought it below him, or because he wished not to have any more reprovers of sin.

Delaying it now, his heart was hardened, and when he did see Jesus, he was as much prejudiced against him as others, #Lu 23:11|.

#10-17 The people followed Jesus, and though they came unseasonably, yet he gave them what they came for.

He spake unto them of the kingdom of God.

He healed those who had need of healing.

And with five loaves of bread and two fishes, Christ fed five thousand men.

He will not see those that fear him, and serve him faithfully, want any good thing.

When we receive creature-comforts, we must acknowledge that we receive them from God, and that we are unworthy to receive them; that we owe them all, and all the comfort we have in them, to the mediation of Christ, by whom the curse is taken away.

The blessing of Christ will make a little go a great way.

He fills every hungry soul, abundantly satisfies it with the goodness of his house.

Here were fragments taken up: in our Father’s house there is bread enough, and to spare.

We are not straitened, nor stinted in Christ.

#18-27 It is an unspeakable comfort that our Lord Jesus is God’s Anointed; this signifies that he was both appointed to be the Messiah, and qualified for it.

Jesus discourses concerning his own sufferings and death.

And so far must his disciples be from thinking how to prevent his sufferings, that they must prepare for their own.

We often meet with crosses in the way of duty; and though we must not pull them upon our own heads, yet, when they are laid for us, we must take them up, and carry them after Christ.

It is well or ill with us, according as it is well or ill with our souls.

The body cannot be happy, if the soul be miserable in the other world; but the soul may be happy, though the body is greatly afflicted and oppressed in this world.

We must never be ashamed of Christ and his gospel.

#28-36 Christ’s transfiguration was a specimen of that glory in which he will come to judge the world; and was an encouragement to his disciples to suffer for him.

Prayer is a transfiguring, transforming duty, which makes the face to shine.

Our Lord Jesus, even in his transfiguration, was willing to speak concerning his death and sufferings.

In our greatest glories on earth, let us remember that in this world we have no continuing city.

What need we have to pray to God for quickening grace, to make us lively! Yet that the disciples might be witnesses of this sign from heaven, after awhile they became awake, so that they were able to give a full account of what passed.

But those know not what they say, that talk of making tabernacles on earth for glorified saints in heaven.

#37-42 How deplorable the case of this child! He was under the power of an evil spirit.

Disease of that nature are more frightful than such as arise merely from natural causes.

What mischief Satan does where he gets possession! But happy those that have access to Christ! He can do that for us which his disciples cannot.

A word from Christ healed the child; and when our children recover from sickness, it is comfortable to receive them as healed by the hand of Christ.

#43-50 This prediction of Christ’s sufferings was plain enough, but the disciples would not understand it, because it agreed not with their notions.

A little child is the emblem by which Christ teaches us simplicity and humility.

What greater honour can any man attain to in this world, than to be received by men as a messenger of God and Christ; and to have God and Christ own themselves received and welcomed in him! If ever any society of Christians in this world, had reason to silence those not of their own communion, the twelve disciples at this time had; yet Christ warned them not to do the like again.

Those may be found faithful followers of Christ, and may be accepted of him, who do not follow with us.

#51-56 The disciples did not consider that the conduct of the Samaritans was rather the effect of national prejudices and bigotry, than of enmity to the word and worship of God; and through they refused to receive Christ and his disciples, they did not ill use or injure them, so that the case was widely different from that of Ahaziah and Elijah.

Nor were they aware that the gospel dispensation was to be marked by miracles of mercy.

But above all, they were ignorant of the prevailing motives of their own hearts, which were pride and carnal ambition.

Of this our Lord warned them.

It is easy for us to say, Come, see our zeal for the Lord! and to think we are very faithful in his cause, when we are seeking our own objects, and even doing harm instead of good to others.

#57-62 Here is one that is forward to follow Christ, but seems to have been hasty and rash, and not to have counted the cost.

If we mean to follow Christ, we must lay aside the thoughts of great things in the world.

Let us not try to join the profession of Christianity, with seeking after worldly advantages.

Here is another that seems resolved to follow Christ, but he begs a short delay.

To this man Christ first gave the call; he said to him, Follow me.

Religion teaches us to be kind and good, to show piety at home, and to requite our parents; but we must not make these an excuse for neglecting our duty to God.

Here is another that is willing to follow Christ, but he must have a little time to talk with his friends about it, and to set in order his household affairs, and give directions concerning them.

He seemed to have worldly concerns more upon his heart than he ought to have, and he was willing to enter into a temptation leading him from his purpose of following Christ.

No one can do any business in a proper manner, if he is attending to other things.

Those who begin with the work of God, must resolve to go on, or they will make nothing of it.

Looking back, leads to drawing back, and drawing back is to perdition.

He only that endures to the end shall be sa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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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57-62절 주해 레포트

소개글 총신 성경해석학 심상법 교수 과제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번역

2. 구조분석

3. 양식 이해

4. 배경 이해

5. 언어학적인 이해

6. 해석학적 이해

Ⅲ. 결론

< 참고 문헌 >

본문내용 Ⅰ. 서론

누가복음 9장을 하나로 묶는 소재를 굳이 찾아내자면 ‘제자’가 될 것이다. 물론 헬라 원문의 경우는 아니지만 한글개역성경의 누가복음 총 24장 가운데 ‘제자’라는 단어가 11회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9장이다. 예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여 자신의 사역을 대리하게 하는 일화로 시작한 9장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제자도로 마감한다.

제자가 되기 위한 댓가라는 주제는 예수께서 즐겨 사용했다. 이는 주로 3권의 공관복음서에서 주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 나타난 세 사람은 관연 그들이 진정으로 그 일을 감당하려고 하는 지를 시험받았다. “제가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예수님을 첫째로 두는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함에 있다. 이 본문 말씀은 그것이 선한 의도나 처음에 갖는 열광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만 보고 전진해야한다. 제자 되는 것은 이른바 문화생활의 일부 정도로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 남으면 약간 신경을 쓰는 취미 생활이 아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예수의 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뜻한다. 여차하다 보면 예수가 그러했듯 들짐승이나 날것들보다 못한 노숙자 신세가 될 수도 있다(57-58절). 물론 잠자리가 없다는 것은 보장된 정착에서 오는 삶의 안일을 포기해야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역을 위한 생활의 수단도 없을 것이라 짐작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생활의 기본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6:33). 하지만 생활의 보장을 위해 제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착오다. 노숙자의 처지가 되어도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로 제자의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에게 죽은 지를 장사 지내는 것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치러야할 종교적 의무로 여겨졌다. 율법 공부도 이보다는 긴급하지 않다.

주의 자비와 나 스스로의 결정, 누가복음 9장 51절-62절 주석해설 새벽기도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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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매일성경 큐티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신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알았지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이신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고, 제자가 되려던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의 형편과 상황을 우선 처리하고서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말합니다.

1. 누가복음 9장 51절-56절, 예수님의 자비하심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요단강을 따라 있는 요단계곡을 통과하거나 지중해변의 해안길(Via Maris)를 지나가기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을 이용하십니다.

예전에는 족장의 길이라고도 불리었던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이 길은,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하고 남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어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정체성에 대한 논란과 함께 서로간의 다툼이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4,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실제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주지 근처를 지나는 유대인 순례자들을 방해하거나 때로는 다치게 하는 일들까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마저도 배척하며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야고보와 요한은 마을을 불태우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불을 내리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꾸짖으시며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반드시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를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용서와 자비는 중요한 미덕이지만 제자들은 이러한 미덕들을 자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꾸짖으심과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고수하는 믿음의 방법만이 옳다고 지나치게 확신함으로 인하여 다른 이들을 배척하거나 분쟁의 원인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여 역사해 오셨습니다. 각각의 상황과 시대적인 현실을 고려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섭리하시고 계획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독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만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며 타인이 무조건 틀렸다고 비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을 근거로 다른 이들을 인정하고 받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자신과 전쟁 중인 남부군들 중에 일부를 용서하고 석방하자, 주변의 참모들은 적들을 다시 돌려 보내면 또다시 총부리를 우리를 향해 겨눌 것이라며 염려하였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내가 그들을 내 친구로 만들었을 때, 나의 적을 무너뜨린 것과 같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품어 안을 수 있어야 함을 사마리아를 통과하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2. 누가복음 9장 57절-61절, 우선순위를 결정하라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남자, 당신을 따르기 위해 먼저 계산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거짓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할 높은 수준의 희생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편안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길 위의 삶일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주를 따르는 길이 멀고 험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단하고 가야만 합니다.

두번째 남자, 나중에 따르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고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도록 내버려 두고 지금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병에 걸린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의 말의 정확한 의미는,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때 주님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정을 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들이 항상 있으며, 복음 전파를 위한 헌신은 바로 지금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순간을 놓친다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남자는 주님을 따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작정하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은 여전히 다른 것들을 바라보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실제로 좋은 감정을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합니다. 즉, 행동으로 옳기지 않고 가장 적절한 때를 놓쳐 버린다면, 두번 다시 그 순간을 맞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그 생각이 드는 그 순간에 편지를 쓰지 않고 미루면 결국에는 편지를 못 쓰게 되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움직이고 생각이 들 때 즉시 행동으로 옮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누가복음 9장 62절,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일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좋았던 옛날을 생각하고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함을 강조하십니다.

먼저 해야만 하는 우선순위가 있으며,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순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쟁기를 잡고 밭을 일구는 순간에는, 집에서 누워 있던 이전의 편한 시절을 생각하지 말고, 현재의 일에 충실하라고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결단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선택하라”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성도들은 믿음 생활을 하는 가운데, 무엇이 우선적인 일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 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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