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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복음 7 장 주석 | 한홍 목사 설교 –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다 145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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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채널]새로운교회
설교 본문 ::누가복음 7장 18~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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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 주석 – 누가복음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누가복음 제 7장 =====7:1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 이 구절에서의 두 동사 ‘듣다’와 ‘행하다’는 47절에 언 급된 세 동사와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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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9/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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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누가복음 7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이 말은 미끼를 놓은 덫에 어떤 목표물이 걸려 결국 죽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사단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져 죄를 범하고 결국은 영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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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10/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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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7장 주석 – 네이버 블로그

누가복음7장. ​. 7:1-10.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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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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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7장 – HANGL NOCR

7:1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누가복음 7:1-10) 백부장의 종의 치유에 관한 기사는 여기에 언급된 것과 마태복음 기사(8:5 이하)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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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8/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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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 7장 주석

누가복음 7장. 7:1-10 백부장 하인 고침 7:11-17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림 7:18-23 세례 요한의 질문 7:24-35 요한을 칭찬하심 7:36-39 한 여자가 예수께 향유를 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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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ntiochministry.tistory.com

Date Published: 4/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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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

<누가복음 7장 흐름정리>. 백부장 하인의 치료 기사는 주님의 구원 사역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될 것을 암시한다. 실제 이 같은 일은 오순절 성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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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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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 설교말씀] 가난한 자를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

내가 너의 모든 원죄와 자 범죄를 갚아주었으니 더 이상 죄와 사망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통곡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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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 (누가복음 7장 36-50절) – 이한규 목사

매주 월요일은 전날의 주일설교를 일부 발췌해서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로 보내는 날입니다. 오늘은 어제 주일설교의 약 60%를 발췌해서 보냅니다. 주일설교 100% 원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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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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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 진짜 은혜 받은 증거는 이런 것이다.

7장. 진짜 은혜 받은 증거는 이런 것이다. (찬 452) 1.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사건과(1~10)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신 사건(11~17)은 주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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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church.net

Date Published: 2/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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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 옛신앙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 또 누가복음 11,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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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8/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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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 목사 설교 -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다
한홍 목사 설교 –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7 장 주석

  • Author: C채널방송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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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5. 6. 2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5-f4HPr4tI

누가복음 7장 주석

누가복음 제 7장

=====7:1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 이 구절에서의 두 동사 ‘듣다’와 ‘행하다’는 47절에 언

급된 세 동사와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의 일

대일 만남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말씀을 듣는 일도 행하는 일도 제대로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경우에 설령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흔한

윤리적 교훈 중의 하나정도로 여길 따름이며 그 속에 내포된 생명력있는 진리를 깨우

치지 못하므로 실천적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 할 수 있다.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 마태는 ‘모래 위에’라고 한다(마

7:26). 모래가 흙보다 더 나쁜 상태를 나타내긴 하지만 흙이라고 그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이 주초 없이 지어졌다는 점에서는 둘 다 곧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탁류가 부딪히매…파괴됨이 심하니라 – 탁류가 흘러 내릴 때 ‘반석 위에 지은 집’

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져 내릴 것임에 분명

하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로서 환난과 시련은 모든 사람에

게 임할 것이며 그때 믿음이 없고 견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환난과 시련에 멸망하고

말 것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탁류’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여러 시련과 궁

극적으로 맞게 될 마지막 시험을 의미한다(고전 3:11-15).

=====7:2

백부장 – 본래 백부장이란 백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를 말한다. 요세푸스

(Josephus)에 의하면 본문에 언급된 백부장의 군대는 여러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로 구

성되었고 헤롯 안디바의 봉급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 폴리비우스(Polybius)는 백부

장의 지위에 대해서 말하기를 지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군대에서 가장 우수

한 사람이 백부장의 지위에 선택되었다고 진술한다. 따라서 이 직책에 있는 사람에게

는 분명히 성실성과 지도력을 겸비한 인격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소개된

백부장들이 모두 인격자였다는 것과 일치한다(23:47;행 10:22;22:26;23:17;24:23). 이

백부장이 반드시 이방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께 보

내었던 것(3절)과 예수의 말씀(9절)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사랑하는 종 – 마태는 ‘아들’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파이스'(* , ‘하

인’)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마 8:6) 누가는 분명히 ‘둘로스'(* ,’종’)

라고 표현한다. 이 단어는 ‘종’ 또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생명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없고 주인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종과 상

전이라는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장로를 손수 찾아가

예수께 부탁을 올릴것을 간구한 사실은 이 백부장의 종에 대한 강한 애정을 반영한다.

아울러 이 종이 그의 상전인 이 백부장을 얼마나 성심 성의껏 섬기며 봉사했는가를 반

증하기도 한다.

=====7:3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 마태는 ‘백부장이 나아와’라고 말한다(마 8:5). 반면

여기에는 백부장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낸 것으로 말한

다. 이것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태는 요약적인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

면에 누가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유대인의 장로들을 택한 이유는 자신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와 잘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셔서…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 ‘구원하시기를'(* , 디아소세)이

란 폭풍같은 상황 속에서도 안전하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에는 그

종의 생명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는 의

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백부장이 구원을 요청하는것은 예수께서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구원하여 건강하게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에 백부장

의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 죄인으로 여긴터라 감히 예

수께 직접 나아가 간구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7:4

이에…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리며 그들과

의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서 간주했다. 특히나 자신의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인들

과의 접촉은 더더욱 기피했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장로들이

이 백부장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보건대 이 백부장이 평

소 유대인들에게 베푼 선행이 엄청났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장로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위해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한

예수께 가서도 간절히 간청하였다. ‘간절히’란 원어상으로 보건대 서두름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시간에 쫓기는 상태에서 열렬히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

로 이는 장로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부장의 종을 위해 시간을 다투어 예수께 열심

히 간청한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구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파레칼룬'(*

)은 미완료형으로서 간구하기를 시작한 후 계속하였다는 의미이다. 따

라서 장로들의 간구가 단순히 한 두 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응답이 있을 때

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7:5

저가 – 이 구절은 앞에서 장로들이 백부장을 ‘합당하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한다.

원래는 ‘가르'(* , ‘왜냐하면’)가 들어 있으나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저

가'(* , 아우토스)는 문법적으로 ‘그 자신이’란 의미다. 따라서 이 말은 회

당을 짓는데 있어서 그가 완전히 그 자신의 재산으로 지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당시 로마 군관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하고 백성을 압제하여

재물을 탈취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유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이들

을 위해 회당을 지어 주었으며 또 유대인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따라서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그의 종을 살려주어도 될 만한 자격과 가치가 그에게 충분히

있음을 예수께 강조하였다.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회당을 지었는지 아

니면 당시의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서 지도자로서 회당을 지어 희사(喜捨)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태도로 보아 일단의 신앙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7:6

주여 – 이는 단순한 호칭의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9절) 신앙 고백

적 측면까지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 백부장은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큰

거리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비록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위대하

신 능력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치 못할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한 신앙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

다. 또한 그는 예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굳이 몸소 집을

방문해 주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7:7

말씀만 하사 – 이를 직역하면 ‘한 마디 말씀만 하시면’이다. 그는 예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

위의 외적 증거를 넘어선 것이었다. 백부장은 종으로 하여금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도

록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사실 그의 믿음대로 예

수는 한 마디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11-16절)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

다(8:22-25). 예수의 말씀은 태초에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었다(창 1:1-31).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2절에서는 ‘종'(둘로스)으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하

인'(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스’는 ‘아들’을 지칭하기도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는 장로들과는 달리 백부장이 그 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

종을 아들과 같이 여겼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백부장은 아들과 같은 하인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예수께 간절히 간청하였던 것이다.

=====7:8

저도 – 원문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있어서 백부장이 예수께서 말씀으

로만 그 종을 치료하시리라고 생각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드러낸다.

남의…사람이요 – 백부장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부하를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남의 수하(under

authority, NIV)에 있음을 먼저 드러내는 겸손함을 취하고 있다.

이더러…하나이다 – 백부장은 자신의 군대 생활의 경험을 예로 들어 실제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지금까지 명령만 하면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그 명령에 따라

원하는 것이 그대로 실행되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도 어떤 권위

로 말씀만하시면 그것이 능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백부

장은 유대교에 익숙하였던 관계로, 하나님의 명령에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순종했던

천군 천사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왕하 6:17;시 34:7;68:17;103:

20;마 26:53). 어쨌든 군대의 상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신적권위를 가진 예

수와 연약한 인생인 자신이 영적상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며, 권위 아

래에 있는 자신이 그 수하 사람들을 복종케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신적 권세를 가진 예

수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는 하늘과 땅에 속한

권세를 지닌 주권자이시다(요 17:2).

=====7:9

예수께서…기이히 여겨 – 예수께서 이상히 여기신 것은 오직 두 번 기록되었는데

한 번은 믿음이 있음을 보신 후였고, 또 한 번은 믿음이 없음을 보신 후였다(막 6:6).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실 정도로 백부장의 믿음이 위대했던 것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다

시피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1)그의 겸손함(humility)이다. (2)

예수의 말씀의 권능을 확신한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요 4:50에서도 발견된다.

(3)예수의 신적인 신분에 관한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그의

겸손함이나 말씀의 권능 확신 등에 대한 기본적인 근거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탄이 아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미 믿음을 찾으셨기 때문이다(5:20;마 8:2,3). 예수께서 놀

라신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능가하는 위대한 믿음

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 중에 쓰인 부사 ‘우데'(* )는

‘…조차도…않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성경을 늘상 접하며 여호와 신

앙에 삶의 기반을 두는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방인만한 믿음

을 가진 이가 아직 유대인 중에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시는 예수의 책망을 떠올

리게 한다. 아울러 이는 선민들조차 갖지 못한 귀한 믿음을 이방인 백부장이 지녔던

사실을 한층 강조해 준다.

=====7:10

집으로 돌아가…강건하여졌더라 – 마태는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께서 아무 말

씀도하지 않고 다만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건강해진 것

을 보았다고 한다. 이는 치료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종이 죽음의 문

턱에까지 이를 정도로 심각했던 중풍병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처럼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적적 치료 행위를 통해서 예수의 메

시야성은 밝히 드러났으며 아울러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을 향하는데

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11

나인이란 성 – ‘나인'(Nain)은 ‘즐거움’이란 뜻이며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

타난다. 이 성의 위치는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넴(Shunem) 지방과

모레 언덕(the Hill of Moreh) 사이의 작은 헬몬산(little Hermon)의 비탈에 위치하고

가버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40k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성에서 엔돌(Endor)

방향으로는 약 10분쯤 거리에 묘지가 있다. 한편 ‘나인’ 성은 오늘날까지 ‘네인’

(Nein)으로 불리우는 작은 마을로 현존한다. 그 당시 이곳으로 올라가자면 좁은 급경

사로 이루어진 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길 양편에는 무덤같은 굴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 지점 부근에서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 행렬(葬禮行列)

과 마주치셨다. 아마 그 지역의 사람들은 엘리사가 행했던 기적을 회상하고 있었을지

도 모르는 일이다(왕하 4:8-37).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 이 성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벽에 나 있는 큰

문을 통해 들어갔다. 보통 성문 근처는 성 주민들의 집회 장소로서 정규적인 화합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당일에 장례

를 치르었다. 그리고 묘지는 보통 성 밖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지금 성문

근처에서 모였던 장례 행렬이 성 밖의 묘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때 예수의 일행은 성문

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례시에 두 명 이상의

피리부는 사람과 한 명 이상의 호곡(號哭)할 여자를 고용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

서 ‘사람들’이란 단순히 시체를 직접 운구(運柩)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곡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까지 포함된 것이다.

이는 그 어미의…과부라 – 여인이 과부라는 사실은 그 가정의 비참한 경제 생활을

입증한다. 1세기 당시에 여자가 자기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

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마지막 소망이었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상심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 성의 주민들은 그전에도 이미 이 여인을

위해 죽은 사람을 한번 운반해 주었을 것이다. 그 죽은 사람은 물론 이 과부의 남편이

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을 장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요’, ‘과부라’라는 말은 이 여인의 참담한 심경을 더욱 강조하며

잘 묘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성의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에 동참했다는

것은 그 동네 사람들이 과부에게 참된 동정을 표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7:13

주께서(* , 호 퀴리오스) – 여기 사용된 ‘주'(主)라는 칭호는 예수께

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있는 ‘생명의 주’이심을 나타낸다.

과부를 보시고 – 본문은 예수께 그 상황을 알리거나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께서 스스로 비통해하는 여인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내고 계신다.

불쌍히 여기사(* , 스플랑크니조마이) – 예수께서 이적

을 행하실 때 그 원동력은 사랑과 동정이었다(마 14:14;15:32;20:34). 이 헬라어 ‘스

플랑크니조마이’의 원래 뜻은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뜻한다. 즉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께서는 속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의미다. 그

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께서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얼마나 큰 동정과 사랑을 보내셨는

가를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긍휼은 본 이적의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적적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했으나, 본문의 경

우처럼 믿음의 유무를 보기 전에 고통당하는 인생에 대한 긍휼의 동기에서 먼저 은혜

를 베푸신 경우도 종종 있었다(마 15:32;20:34;막 1:34;8:2). 그리고 이는 곧 죄많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이다. 하

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요 원수된 상태였을 때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으시게끔 하

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 지으신 것이다.

울지말라(* , 메 클라이에) – 현재 명령법으로 ‘울음을 그치라’는 뜻

이다. ‘울다’는 동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클라이오'(* )와 ‘다크뤼오'(*

)이다. 전자는 ‘흐느껴 우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

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부는 지금 독자의 죽음에 슬퍼하고 비통해 하면서 매우

흐느끼며 울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7:14

가까이 오사…대시니 –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레 22:4;민 19:11). 왜냐하면 죽음은 곧 죄의 결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의 법으로 이 율법을 초월하셨다. 여기서 ‘관'(* , 소

로스)은 호머(Homer)의 글에서 나타난 바대로 원래 죽은자의 유골이나 재를 넣어 두는

항아리를 의미했으나 나중에 시체를 넣는 함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

면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손수건이나 수다리움(sudarium)으로 덮어서 뚜껑이

없는 관에 넣었다(Josephus).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체에 대한 고정 관념에도 불

구하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셨음은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과부

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의 사랑이 이런 율법의 문자적 이해를 뛰어넘었음을 뜻한다.

일어나라 – 예수께서는 지금 죽어 있는 청년에게 마치 그가 듣고 순종할 수 있는

것처럼, 즉 지금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듯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는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나타나는 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8:54;

요 11:43). 성경의 몇몇 인물들이 죽은자를 살렸던 경험이 있지만(왕상 17:21;왕하

4:35;행 9:40;20:10)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그러한 이적을 행했다. 그

러나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직접 사용하시어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 이

는 예수께서 음부의 열쇠를 지니고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단적 실례이다(롬 8:2;고후 1:10;딤후 1:10).

=====7:15

죽었던 자가…하거늘 – 누가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로 ‘일어 앉고

말도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종말론적인 한 암시를 볼 수가

있다. 즉 세상 끝날 성도의 부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을 것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를 보게 된다.

예수께서…주신대 – 그 과부를 향한 예수의 사랑과 동정이 얼마나 크셨는지 분명

히 나타난다. 이러한 행동은 왕상 17:23의 엘리야의 그것과 유사하다. 예수는 소생한

청년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대신 그 불쌍한 여인을 잘 봉양하도록 당부하셨을 것

이다. 이제 이 과부에게는 더 이상의 비애와 고통이 없고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과 자

비로우신 예수를 만난 희열로 가득했을 것이다.

=====7: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 누가는 또다시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5:26;18:43;23:47). 무리들은 이 이적이 하나님의 권세로 이루어진줄을 믿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영광을 돌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독사존’

(* )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예수의 크신 권능에 압도당한 무리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을 나타낸다.

큰 선지자가…일어나셨다 – 전에는 보지 못한 큰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를

한 위대한 선지자로 보았고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께 대

한 이 칭호가 비록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그 무리들이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최대의 경칭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서 선지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직

접적인 동기는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가 행한 일(왕상 17:21;왕하

4:35)과 같은 일을 행하신 데 있었을 것이다. 무리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약

4세기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

각했으나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

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로마의 압

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당시

부터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관

은 현세적이며 또한 민족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데에 큰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돌아보셨다 하더라 – 이 말은 구약에서 여러 번 나오며(룻 1:6;삼상

2:21) 축복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고 또한 심판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 원

래 ‘돌아 보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의사가 왕진하여 환자를 치료할 때 쓰는 동사

‘에피스켑토마이'(* )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이 오랜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 이 큰 선지자를 통해 다시 그들을 방문하여 상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러(말 4:2)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7: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결과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바 곧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관련된 소문이다(Meyer).

당시에 백성들이 순수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

에는 아직까지 그들의 믿음이 너무 어렸으므로 그들은 예수의 놀라운 치유 이적을 목

격하고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이것은 유대 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

땅 전체, 즉 실질적인 팔레스틴을 말한다(1:5). 물론 유대 지방이 예루살렘을 중심으

로 한 남방 지역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 보통 ‘온 유대’라고 했을 때는 팔레스틴 전역

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인 성’은 갈릴리에 속한 자그마한 마을이었으나 죽

은 자를 소생시키신 예수의 위대한 권능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각처로 퍼져 나갔다.

=====7:18

요한의 제자들이…고하니 – 마 9:14;요 3:26 등으로 비추어 보건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따른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를 위시한 열 두 제자들처럼 철

저하게 예수를 따르지는 못했으며 세례 요한의 제자 출신이라는 생각을 늘 지니고 있

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들이 감옥 밖에서 되어가는 일들, 특히 예

수의 활동에 대해 세례 요한에게 수시로 알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 그 당시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

아와 저지른 불륜의 관계를 책망하고 또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다가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헤롯은 자신의 부정에 대한 요한

의 책망을 괘씸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많은 백성들이 그의 교훈과 회개의 세례에 동조

하며 따르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의 정치적인 위상(位相)에 도전이 된

다고 판단하여 그를 투옥하게 되었다(3:18-20). 이로 인해 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외부의 소식을 들으며 예수의 활동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요한은 자신

의 사명이 곧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행

적에 대한 관심이 그 누구보다 컸다 하겠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 ‘오실 그이’는 메시야를 의미하는데 이 칭호는 시

40:7;118:26;단 7:13등에서 유래한다. 원문에 의하면 ‘당신'(* , 쉬)이 강조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요한은 감옥에 있는 동안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

다. 즉 요한은 예수께서 진정 메시야라면 빨리 어둠의 세력을 멸하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요한은 옥에 그대로 머물렀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대적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에 요한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정말 메시야인지를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실 때 성령을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깨달았다(마 3:13-17).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이 예

수께 나아가는 것을 보고서도 제지하기는 커녕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며 오히려 예수께로 적극적으로 인도하였다(요 3:30). 따라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 요한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하여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그

가 메시야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오랜 옥

살이에 지쳐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 의심이 일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즉 요한은 유대

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헤롯과 같은 악한 세력을 제거

하여 이스라엘에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줄 메시야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요한의 제자 파송이 예수의 권능과 명성을 시기하는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게 하여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기도 한다(Clavin,

Jerome). 어쨌든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그가 참수형을 당하는 그 순

간까지 그의 사역에 충실했다. 그가 옥중에서 예수의 메시야성을 오해하거나 의심했었

다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그를 인정하셨으며 그의 사역을 극찬하셨다.

=====7: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하더이다 하니 – 요한의 보냄을 받은 두 명의 제자가 예수

께 나아가 요한의 지시대로 질문하였다. 여기 사용된 의문형은 화제에 주목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용법은 신.구약을 걸쳐 많이 사용되고 있다(창 32:27;33:5;삼상

24:16;요 1:19,25;4:11,12;6:5 등).

=====7:21

예수께서…많이 고치시며 –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이유는 먼저 그들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한 대가나 칭송을 받으려하신

적이 없으며 어떤 특별한 조건을 제시하기 이전에 병마에 신음하는 인생에 대한 연민

자체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아울러 이런 치료 행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곳에서는 애곡하는 것이나 질병이나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암시가 들어 있고 따라서 이러한 치료 행위에 나타나는 그의 이적적 권능을 통해 그가

메시야임을 증거하시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7:22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병고치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의 질문에 대답

하신 것으로 보인다. 마태는 현재 시제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으로 말하는데(마

11:4) 여기서는 부정 과거형으로 말한다(NIV역은 완료형으로 번역되었다). 누가가 여

기에서 과거형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의 병고치는 일과 지금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

신 시차를 분명히 하려는 정밀한 표현으로 보인다.

요한에게 고하되…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예수께서는 여기서 구약의 예언을 인용

하여 말씀하신다(사 35:5,6;61:1). 이 여섯가지 표적들은 모두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이적으로 유대인들이 구하는 것들이었다(고전 1:22). 따라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

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는 것을 피하고 이와 같은 표적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신이 메

시야임을 확증하신 것이다. 본절과 관계된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다.

+——————————–+———————+———————–+

| 내 용 | 예 언 | 성 취 |

+——————————–+———————+———————–+

| 소경이 보며 | 사 29:18;35:5 | 마 15:31;막 10:46-52 |

+——————————–+———————+———————–|

| 앉은뱅이가 걸으며 | 사 35:6;61:1 | 마 15:31;행 3:6 |

+——————————–+———————+———————–+

| 문둥이가 치유되며 | 사 61:1 | 17:14;마 8:3 |

+——————————–+———————+———————–+

| 귀머거리가 들으며 | 사 29:18;35:5 | 막 7:34,35;9:25-27 |

+——————————–+———————+———————–+

| 죽은 자가 살아나며 | | 14,15;8:54;요 11:43,44|

+——————————–+———————+———————–+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 사 61:1 | 4:18 |

+——————————–+———————+———————–+

=====7:23

누구든지…아니하는 자는 – ‘실족하다'(* , 스칸달리조)는 동

사는 ‘걸어 넘어뜨리다’, ‘함정에 빠뜨리다’는 뜻이다. 이 말은 미끼를 놓은 덫에 어

떤 목표물이 걸려 결국 죽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사단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져 죄를 범하고 결국은 영혼이 사망에 이르고 마는 결과를 나타낸다. 그런

뜻에서 이 말은 신약에서 ‘죄를 범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므로 본 구절의

의미는 그 누구든지 자신을 오해하거나 정죄하여 거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

다. 반면에 예수를 생명의 주로 바로 알고 받아들이면 복이 있다는 말이다.

복 – 여기에서 ‘복’은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거나 육적(肉的)인 복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원한 축복을 뜻한다. 한편 본절이 직

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 바, 세례 요한을 위시한 그 제자들이 예

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여 예수를 무작정 배척하거나 경

원(敬遠)시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복음에 귀 기울이라는 경계와 당부의 말씀으

로도 이해된다.

=====7:24

무리에게…말씀하시되 –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이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

여 요한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이는 주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강한 경고의 어조로 말

씀하셨을 때 무리들이 듣고 요한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주께

서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차지하는 요한의 중요한 위치를 분명히 주지시키기 위해 스스

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요한을 증거하셨다.

너희가 무엇을…나갔더냐 –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를 외칠때 많은

무리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였다(3:2-14).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모

르고 또 그의 설교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모였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요한이 어떠한 인물이며 그가 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는지 가르쳐 주셨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이 질문과 바로 다음의 질문(25절)은 자연스럽게 부정적

인 답변으로 이끄는 풍자성이 강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흔한 갈대를 보기위해

굳이 험한 광야로까지 나갈 필요는 없겠기 때문이다. 유대 광야에서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흔하고 하잘것없는 갈대처럼 요한이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하신다. 당시 유대 땅에는 일신의 부귀와 안락을 위해 마치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이

리저리 흔들리며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 양심마저 팔아 넘겨버리는 배도자(背道者)들과

매국노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예수는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여론이나 세상의 유혹에

동요되지 않고 거룩한 소명에 충실한 사람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의 강직성은

헤롯과의 충돌 사건을 통해 뚜렷이 드러났다. 당시 헤롯의 악행은 묵시적으로 방관될

뿐 누구 한 사람 감히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

라 이 범죄를 공공연하게 책망하다가 결국 옥에 갇힌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7:25

그러면(* , 알라) – 화제를 새로운 초점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너

희가 갈대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미이다(R.C.H. Lenski).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 ‘부드러운 옷’이란 곱고 감촉이 부드러운 값비싼 옷

을 가리킨다. 그러나 요한은 거칠고 값싼 약대 털옷을 입었음으로(막 1:6) 이와는 강

한 대조를 이룬다. 당시 대다수의 서민들은 로마의 식민지의 상황에서 수탈과 착취로

인해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녔음에 비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은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매우 값비싸고 화려한 옷들을 걸치고 다녔다.

보라…자는 – ‘사치하게 지내는’이란 원어상으로 ‘건강을 해치다’, ‘쇠약해지다’

는 의미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결국 건강을 해치기까지 흥청거

린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고관 대작들이 호의 호식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핍절해 감을 암시한다.

그러나 요한은 황폐한 곳에서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으며 어려운 삶을 살았다. 만일 세

례 요한이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귀에 달콤한 말만 골라 들려주었더라면 근사

한 옷과 음식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궁의 회유 따위에 넘어

가거나 무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치부까지도 과감히 책망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

요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었다.

왕궁에 있느니라 – 헤롯의 왕궁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마캐루스(Machaerus) 요

새에서 낡고 거친 외투를 입은 가련한 죄수로서 있다.

=====7:26

그러면 너희가…나갔더냐 – 예수께서는 요한의 위대함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무리

들에게 두 가지 풍자적 질문을 자문 자답 형식으로 던지셨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질

문은 요한이 선지자 혹은 그보다 탁월한 자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서곡으로 볼 수

있다.

선지자냐 – 이 말은 선지자를 본다는 것은 ‘보려고 나갔더냐’는 의미이며 ‘선지자

를 그와 인격적인 접촉을 얻기 위하여, 즉 그의 말과 그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여 세례

를 받으려고 한다’는 의미이다(R.C.H.Lenski). 한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책망

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2)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이다. (3)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사실들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4)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취해야 될 행동에 대한 정보를 주기

위함이다. (5)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나 예언자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6)

장차 메시야를 통해 절정에 이를 위대한 구속 역사의 맥을 잇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관건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느냐는 것인데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

씀이 임했다(3:2). 따라서 요한은 분명히 선지자였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 원문대로 번역하면 ‘선지자 이상의 어떤 자'(*

, 페리쏘테론 프로페투)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

그 어떤 선지자보다 탁월한 이유는 (1)그의 활동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

다. 그 단적 예로 사 40:3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말 4

:5에 예언된 ‘선지 엘리야’란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2)그의 사역의 위대성 때

문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직접

그 메시야를 보고 그를 증거하며 또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위대한 선구자였다(27절).

=====7:27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말 3:1에 예언된 말씀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셨다. 완

료형 ‘게그랖타이'(* )는 ‘지금도 기록되어 있다'(has been

written)는 의미이다

보라 내가…보내노니 – 주님께서 이 예언을 인용하실 때에 구약의 원문 그대로 하

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여 인용하셨음에 유의하자. 그것은 여기에 인용된 ‘네

앞에'(* , 프로 프로소푸 수,)란 말이 히브리어 원어에

는 ‘내 앞에'(* , 레파나이)로 되어 있고 70인역에도 ‘내 앞에'(*

, 프로 프로소푸 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주

님께서 이처럼 ‘내 앞에’란 말을 ‘네 앞에’로 바꾸어 사용하신 이유는 자신이 친히 하

나님되심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자기 계시(self-revelation)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서 예수는 ‘하나님 앞에’를 ‘메시야 앞에’로 해석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메시야이신 자

신이 일체(一體)인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요한은 메시야의 직접적인 선구자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해

야할 사람이었다. 원문에는 목적을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 )가 쓰여서 사자

의 역할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함으로 메시야의 출현을 명백히 선포

하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회개를 외치며 사람들

에게 세례를 베풀었다(3:7-14;마 3:2). 또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겸손히

말하면서 구속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다.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 말라기의 예언이 세례 요한과 메시야이신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언하는 말씀이다.

=====7:28

여자가 낳은 자 중에 – 인간의 죄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강조한다(시

51:5). 요한은 비록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

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볼 때 그만큼 위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저보다 크니라 –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결코 요한의 위대

함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비록 위대한 선지자보다도 큰 자라 하여도

그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비교할 때는 상대적로 작은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증거하는 등 사역면에서

구약에 속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탁월하였지만,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여전히 옛 언약이 속한 옛 세대(the Old Dispensation)의 사람이었고 신약의 예비 단

계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신약에 속한 성도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계시

를 밝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 신약의 성도는 예수의 십자

가와 부활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이해하며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되어 기록된 계시의

완결서를 늘 묵상할 수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성도의 심령속에 내주하사 영

적 안목을 뜨게 하며 삶의 바른길로 인도해 주신다(딤후 1:14). 한편 이 구절을 하나

님 나라에서 요한을 배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면 13:28(마 8:11)의 내용과 상반된다.

따라서 예수의 의도는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요한의

활동 이후에 온 시대의 변화에 중요성을 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 모든 백성들이란 말 안에는 당연히 세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리들이 따로 구별되어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그 당시 일종의 사

회적 계급의 한 부류로서 마치 별개의 족속처럼 취급될 정도로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

미움과 배척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12,13;5:27-30). 이들이 미움과 배척을 받은

것은 로마 제국의 앞잡이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과중

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두워들인 세금을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여분의

세금은 자기들의 몫으로 착복하였다. 랍비 문헌에는 이 세리들이 강도와 동일하게 분

류되어 나타나고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죄인들’로 언급된다(5:30;7:34;마 9:10;11:19;

막 2:15). 이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로마 압제자들에게 아부하여 자기 동

족을 희생시켜 치부(致富)하고자 하는 변절자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 3:12 주석 참조. 누가가 ‘요한의 세례’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통용된 관례에 의한 표현법이다(20:4;행 18:25;19:3). 요한의 세례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1)메시야적 내지는 종말론적 예비 교육의 측면이다. 세례 요

한은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장차 메

시야를 통해 시행될 성령 세례의 예비 단계로서 물 세례를 시행하였다(마 3:11). (2)

세례 받는자의 생활 변화의 측면이다. 당시 대부분 유대인들은 단지 혈통상으로 아브

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자긍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들이 메시야를 통

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와 구체적 삶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

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베풀었다(마 3:7-9).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 이 말의 의미는 무리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달아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라고 선언했다는 뜻이다.

=====7:30

율법사 – ‘율법사’에 해당하는 ‘노미코스'(* )는 ‘서기관'(*

, 그람마튜스)과 동의어로 쓰였다(5:21;10:25;11:45,46,52,53;14:3;마

22:35). 이 말은 마 22:35를 제외하고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말인데 이는 누가가

‘그람마튜스’라는 말보다 ‘노미코스’라는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쉽게 이해하리라는 생

각에서 사용했을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 예수의 말씀에 대한 상반된 두 반응이 나타난

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있다고 자랑하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

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반면, 세리들과

같이 외견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율법사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

연구에 헌신한 사람들이어서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나 그속에 감

추어진 근본적인 메시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율법

의 조항들 자체였기 때문이다.

=====7:31

이 세대의 사람 – 류만(Luhrman)에 의하면 ‘세대'(* , 게네아)란 이스라

엘 전체보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세대’라는 말 속에 바리

새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을지언정 그 말이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

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절한 당시의 세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마 11:20-24;13:53-58 참조). 이 말 속에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 때문에 받

게 될 하나님의 진노가 암시되어 있다.

=====7:32

춤추지 않고…울지 아니하였다 – 예수께서는 아무런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평

일날 장터에서 놀이를 하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 대해 묘사하신다. 아이들은 결혼식 놀

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져 결혼식 놀이에서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또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한 편이 장례 흉내를

내어 슬피 울며 곡을 하면 다른 편도 그 곡(哭) 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가슴을 치게 된

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놀이가 잘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

은 한 쪽 아이들이 상대편의 행동을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이 아이들은

불평했고 서로가 서로를 나무랬다. 이처럼 서로 뜻을 같이 하여 그 놀이에 흥을 돋우

면서 재미를 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는 아이들처럼 그 당시 유

대인들도 자기 의(義)를 내세우며 세례 요한과 예수를 경멸하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공의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세리

나 기타 죄인 취급받는 자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우셨다는 이유로 예수를 죄인 중의

하나로 몰아붙였다.

=====7:33

원문에는 ‘왜냐하면'(* , 가르)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은 앞절에서 말씀하

신 아이들의 비유가 이 세대를 적절히 묘사하는 이유를 제시해 준다. 예수께서는 이

구절과 다음 절을 통해서 요한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아이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떡도 먹지…마시지 아니하매 – 마태는 떡과 포도주를 말하지 않는다(마 11:18).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떡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고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었다(눅

1:15;막 1:6). 또한 그는 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나실인처럼 포도주나 독주

를 마시지 아니하고(민 6:2-4) 광야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였다.

너희 말이…들렸다 하더니 – 유대인들은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에 대해서 비난했

다. 왜냐하면 요한이 자신들의 사악한 잔치와 사치한 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자

신들을 책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요한을 가리켜 귀신들렸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앞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장터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따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싸움에까지 이르는 것

처럼 이 세대 사람들도 그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7:34

인자는…먹고 마시매 – 예수께서는 요한이 하는 것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

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자유로이 교제하셨다. 이는 예

수께서 말씀하신 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없다'(막

2:19)고 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어떤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

라 자유로운 가운데서 진리의 본질과 참된 생명의 도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예수의 사

역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세리들과도 상종(相從)하신 것을 보면 예수는 인위적인 형

식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온정을 베푸셨다(5

:27-32).

보라 먹기를…즐기는 사람이요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처럼 율

법적인 금식을 하지 않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폭언을 일삼았다. 요

한에 대해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하여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오히

려 이제는 예수를 향하여 그 반대 이유를 들어 비난한다. 그들이 비난한 대로 만일 예

수께서 탐식가요 술주정꾼이셨다면 율법의 기준대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의

항목에 속했다(신 21:20,21).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은 곧 예수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그를 이단자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I. Howard Marshall).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 이러한 비난은 특별히 세리 마태의 집에서 베푼 잔

치 때에 예수께서 참여하신 사실과 관련된다(5:27-32). 예수는 세리 마태의 경우 외에

도 사회적, 종교적으로 소외당한 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관심은 특

히 잃은 양(15:1-7), 잃은 드라크마(15:8-10), 돌아온 탕자(15:11-32)등의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7:35

지혜 – 구약성경에서는 곧잘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표현한다. 특히 잠언의 경우는

지혜에 관해 많은 언급을 하며 특별한 강조를 하고 있다(잠 1:20;8:22-31). 그리고 특

별히 사 9:6과 11:2는 메시야를 지혜와 긴밀하게 연관시킨다. 여기서 ‘지혜’란 곧 그

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고전 1:23,30). 성경은 지혜의 출처를 하나님께로 부터 찾는

다. 욥기의 저자는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욥 28:12)라고 답하였

다. 그리고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갈파하였다

(잠 1:7).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조언을 구할 때 그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서 지혜를 얻게 되는것이며, 이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특별히 성령과 관계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통

해 얻게되는 것으로 묘사된다(행 6:3;고전 2:6;12:8;엡 1:17;골 1:9;3:16;약

1:5;3:15-17).

자기의…옳다 함을 얻느니라 – 마태는 ‘그 행한 일로…’라고 묘사했다(마

11:19). 여기서 ‘자녀’란 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가

리킨다(롬 9:7,8). 그리고 ‘옳다 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카이오데'(*

)는 ‘바르게 선포되다’, ‘옳음이 밝혀지다’는 뜻이며 원문상으로 이 말은 문

두에 나와서 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의 의미는 쉽게 설명하면 이러하다. 그리스도와

그 복음이 대적들에 의해 곡해되고 비난 받으며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핍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씀대로 살려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며 그들에 의해 세계 만방에 선포되고 옳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

다.

=====7:36

한 바리새인이 –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적대시하던 터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식사를 초대하였던 이례적

(異例的)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40절)이

었으나 그의 신상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유대에서의 ‘시몬’은 매우 보편적인

이름이었다.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대한 일은 일견 용

기있는 태도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안식일 규례와 같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으

로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초대는 하였으나 냉랭한 자세로 손

님을 맞이하였다(44-46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한 이유가 예수

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은 아닌듯하다. 그가 예수를 믿지 않으며 선지자로

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39절)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 바리새인은 병자를

고치기도하며 또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몰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을 수

도 있고 또 그에게 ‘큰 선지자’적인(17절) 능력이 있는가 알아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아울러 군중들에게 추앙받는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함으로 자신도 추앙받고 싶었을지

도 모른다. 나아가 예수께 대해 고소할 빙거(憑據)를 찾기 위해 초대했으리라는 추측

도 배제할 수 없다. 누가는 이 구절 외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초대한 예를 두 곳에

서 들고 있다(11:37;14:1).

=====7:37

죄인인 한 여자 – 이 여자를 창기(娼妓)로 보는 견해(Meyer, Bruce)도 있으나 성경

에서는 그녀가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하여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는지 전혀 언

급이없다. 아마도 이 여인은 한 때 나쁜 길에 빠졌었고 그녀의 타락이 공공연히 알려

지게 되어 그 이후로 그녀는 죄인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비록 죄인으로 취급

받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들어온 예수의 소문에 희망을 갖고 그를 찾게 되었다. 그가

들었던 소문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임에 틀림없

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매우 귀중한 향유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향유담은 옥합 – 이 옥합은 향유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둥근 그릇으로 손잡이가 없

었다. 그리고 그릇 속에 든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부분을 깨뜨려야만 했다. 이

러한 옥합은 매우 값진 품목이었다고 하며(Pliney) 그 속에 든 향유도 값진 것이었다.

이런 류의 고급 향류나 값비싼 화장수는 보통 로마의 부유한 여인들이 주로 사용했으

며 구하기도 어렵고 매우 귀했기 때문에 매우 가치있는 재산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향유는 그 여인이 특별한 목적으로 구입하였을 것이다. 한편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적

선을 구하는 거지들은 초청을 받지 않고도 잔치에 들어가 음식 부스러기들을 얻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여인도 그러한 비천한 무리들 틈에 섞여 있었을 것이다.

=====7:38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 그녀는 예수의 발 곁에 서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는

그녀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자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

고 아울러 예수의 인격 자체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그녀

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머리털로 씻고 – 여인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삶에 근본적

인 변화를 가져다 주신 예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께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를 풀어 눈물로 예수

의 발을 닦았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일

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

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수치를 무릅쓰고 감격과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여인의 왕관이라고 할 머리털로써 예수의 먼지 묻은 발을 닦는

모습에서 그녀의 철저한 겸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예수를 초대해 놓고서 발 씻을 물

조차 제대로 준비해 주지 않은 바리새인의 뻔뻔함과 대조된다.

그 발에 입맞추고 – 이는 가장 헌신적인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동이며 특히 헬라

어 원문상 ‘카테필레이’라는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는데(* , ‘입맞추

고’) 이것은 반복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인바, 예수께서 들어 오신 후 계속해서

예수의 입을 맞췄다는 의미이다(Robertson).

향유를 부으니 – 대체로 존경의 표시로 향유를 부을 때는 머리에 붓는 것이 관례였

으나 이 여인은 이례적으로 발에 부었다. 그녀는 예수의 발에 접근하는 것조차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바로 눈물의 회개와 벅찬 감격의

봉헌(奉獻)이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신앙의 행동을 몇가지

살필 수가 있다. (1)복음을 듣고 알아야 한다(37절, 알고). (2)예수께 나아가 죄를 자

복하고 회개하여야 한다(예수의 뒤로…서서 울며). (3)전폭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

(자기 머리털로 씻고). (4)철저하게 순종하여야 한다(그발에 입맞추고). (5)최선의 봉

사를 해야 한다(향유를 부으니). 이러한 신앙의 행동이 있을 때 우리는 늘 구원의 감

격 속에서 살 수 있다.

=====7:39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 시몬은 여인의 도유(塗油) 행동을 보고서 한편으로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 또 한편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던 것같다. 그가 못마땅한 투로

혼자 중얼거린 것은 죄인인 한 여인이 식탁으로 접근한 사실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

다. 그리고 그가 은근히 기뻐한 것은 예수께 대한 그의 의혹을 정당화할 만한 단서를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라면 당연히 발 앞에 무릎 꿇

은 여인이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녀를 물리쳤을 것이었다. 따라서 죄인의 신

분에 있는 사람이 몸에 손대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는 바리새인의 눈에 똑같이 천박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 바리새인은 과연 예수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선지

자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지하였다(5:32). 한편 원문의 가정법 형식은 사

실이 아님을 단정짓는 표현이다.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바리새인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중에 이러한 생

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이미 그 생각을 알고 계셨다. 바리새인은 마음속에

예수께서는 선지자도 아니며 그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도 모르는 형편없은 사람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는 이미 그 여인의 영적 상태를 간파하여 그녀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50절)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시고 그에게 논박하신다.

이러한 예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은 그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증거의 일례가 된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 여기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이라

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교만하고 사악함을 실책하시는 투로 말씀하시

지만 그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하는 마

음으로 그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신다.

=====7:41

빚진 자가 둘이 있어 – 예수께서는 종종 하나님께 빚진 자들에 관해서 언급하셨다

(17:10;마 6:12;18:23-35). 그런데 마 6:12의 경우에는 죄가 구체적으로 빚과 동일시

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빚의 탕감 여부가 죄 용서 문제와 동일시된다. 예수께

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빚의 예화를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진 인간의 빚은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할지라도 그 빚을

상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 탕감(蕩減)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상응되는 의무를 부과해 주며 이 일을 행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 내용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마 6:12).

데나리온 –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오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명이 오백 일을 벌어야 하는 돈이

었다.

=====7:42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 ‘탕감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카리사토'(*

)는 ‘무효로 주다’, ‘취소하다’는 뜻의 ‘카리조마이’의 부정 과거형이다.

이는 탕감의 행위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 )이다. 따라서 본 비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

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값없이 주어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떠한 노력과 선행으로써 구원에 이르

려고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역시 값없이 만드는 것이다. 성도의 선행은 거저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이른바 성령의 열매이지(엡 2:8,9) 구원의 조건인 것은 아니다.

=====7:43

시몬이 대답하여…받은 자니이다 – 예수의 질문은 평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몬은 매우 주의깊게 대답

했다. 아마 그는 예수의 놀라운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자신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목전에 일어난 상황으로 말

미암은 불쾌감과 흉한 속마음을 표출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네 판단이 옳다 – 예수는 시몬의 악한 마음을 정면으로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판단

을 ‘옳다’고 하신다. 이는 시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무지를 스스로 깨닫고 부끄러

운 상황을 직시하게끔 하시기 위함이다.

=====7:44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먼저 그를

상석에 앉게 하고 손님의 손과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준비하는 것이 통례였다(창

18:4;19:2;24:32;삿 19:21 참조). 그러나 시몬은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 그러

한 통례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했다.

이 여자는…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 예수께서는 시몬으로부터 아무런 대접도 받지

못하셨으나 여인으로부터는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받으셨다.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고

는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의 헌신과 향유를 붓는 재물의 헌신은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 자세를 시사한다.

=====7:45

너는 내게…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 입맞춤은 자연스러운 영접

인사였다(창 29:13;45:15;삼하 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예수께 대해 이런 예

를 갖추지 않았다. 예수는 주인으로부터 당연히 받게되어 있던 환영의 입맞춤도 받지

못한 반면 여인으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셨다. ‘그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이 여

인이 과거의 어두운 세월을 예수께 묵언(黙言)으로 토로하는 중에 복받치는 감격과 희

열을 경험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존경하

는 손님에게만 특별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걸어다닌 사람의 머리

에 기름을 붓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감람유’는 다량 생산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누구나 손님에게는 머리에 이 기름을 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일조차도 행

치 않았다. 반면에 그 여인은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다. ‘머리’와 ‘발’

그리고 ‘감람유’와 ‘향유’는 극명한 대조를 더해준다.

=====7:47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 여기서 ‘많은'(* , 폴라이)이란 강조하

기 의한 말인데 ‘모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그녀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해도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사하여졌다'(* , 아

페온타이)는 완료형 동사로 모든 죄를 사함받아 지금은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

이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 이 구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카톨릭

학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사랑, 즉 여인이 행한 사랑의 행위 때문에 용서를

얻게 된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행위

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언뜻 보기에 여기 사용된 접속사 ‘호티'(* , ‘이는’)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해석으로부터 카톨릭의 공

덕설(ontritio caritate formata) 같은 교리가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접속사 ‘호티’는 그녀의 죄가 사해진

‘이유’나 ‘근거’를 나타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체 비유와 50절이 보여주는 바

와같이 그녀의 죄가 참으로 용서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증거’를 나타내

고 있는것이다. 사랑이 용서의 이유나 원인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줌으로 죄가 사해졌

다는 것을 ‘입증’한다(Lenski). 둘째, 성경 전체의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해석

은 억측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오직 은혜로 내려진 것이다(엡

2:8,9). 셋째, 그러한 해석은 예수께서 비유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요점(42절 참조)

과 상치된다. 비유의 요점은 두 채무자가 그들의 빚을 은혜에 의하여 탕감받았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그녀의 사랑은 용서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Bengel,

Meyer, Farrar, Ellicott 등)로 봐야 한다.

=====7:48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면서 처음에

말씀(47절)하셨던 것처럼 ‘저의 많은 죄’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죄’라고 하신다. 이

것은 시몬이나 그녀가 모두 죄를 용서받아야 할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또한 그

여인이 사함받은 죄란 어떤 특별한 범죄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지은 모

든 죄와 근원적인 죄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죄사함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하신 이유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

함이었음과 아울러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가진 선입견을 바꾸어 놓으시려

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녀를 소문난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49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 앞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에도 이와 같은 반발이

있었다(5:21). 그때 바리새인들은 죄 사하는 권세로 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를 신성 모

독자로 정죄하였다. 여기서도 이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죄사함을 얻은 여인과는 대조적

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하는 것을 보면서 ‘참

람’하다는 생각을 나타내었다.

=====7:50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이는 47절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 쐐기를 박는 구

절로서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원

하였다'(* , 세소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여인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

미 구원에 이른 상태였던 것을 보여 준다. 다만 예수께서는 이미 확보된 구원을 공공

연하게 선언하신 것이다(8:48 주석 참조).

평안히 가라 – 이는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다. 이러한 유대인의 작별

인사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대의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통적인 표현이나(삿

18:6;삼상 1:17;삼하 15:9;왕상 22:17) 이 구절에서는 더욱 깊은 뜻을 나타낸다. 왜냐

하면 지금은 이 여인이 예수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확증받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

수께서는 이제 멸시받던 죄인인 그녀에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

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명령형은 평안 상태의 항구성(恒

久性),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속적인 평안을 시사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를(사 9:6)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다 이러한 영속적이고도 참된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행 2:28;엡 6:23;몬 1:20 ;

히 9:22).

헬라어 누가복음 7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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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이데 에플레로센 판타 타 레마타 아우투 에이스 타스 아코아스 투 라우 에이셀덴 에이스 카파르나움

개역개정,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새번역,1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뒤에,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마치고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영어NIV,1 When Jesus had finished saying all this in the hearing of the people, he entered Capernaum.

영어NASB,1 When He had completed all His discourse in the hearing of the people, He went to Capernaum.

영어MSG,1 When he finished speaking to the people, he entered Capernaum.

영어NRSV,1 After Jesus had finished all his sayings in the hearing of the people, he entered Capernaum.

헬라어신약Stephanos,1 επει δε επληρωσεν παντα τα ρηματα αυτου εις τας ακοας του λαου εισηλθεν εις καπερναουμ

라틴어Vulgate,1 cum autem implesset omnia verba sua in aures plebis intravit Capharnaum

히브리어Modern,1 ויהי אחרי כלותו לדבר את כל דבריו באזני העם ויבא אל כפר נחום׃

성 경: [눅7: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예수께서…마치신 후에 – ‘모든 말씀’은 앞장에서 행하신 평지 수훈(平地垂訓)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서두의 말씀을 단순히 앞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말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마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로센'(*)은 ‘성취한’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반면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전환될 때 마태복음에서 주로 사용된 헬라어는 문자 그대로 ‘마치다’는 뜻인’텔레오'(*)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은 성취되었고 성취되어 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성취되어 갈 것이다.

󰃨 가버나움 – 갈릴리 바다 북서안의 성읍으로 ‘나훔의 동리’라는 뜻의 히브리어 음역이다. 이 가버나움이라는 말은 ‘나훔’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지만 선지자 ‘나훔’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이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 그의 선교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 였으며 예수의 공생애의 중심지였다(5:23,31-37;마 8:5-13;17:24-27;막 1:21-28;2:1-12;요4:46-54;6:16-59).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마음이 강포하고 완악하여 예수의 복음 전파에 무감각하고 또 그들의 죄를 회개치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진노(震怒)를 사고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당했다(10:15;마 11:23).

에카톤타르콘 데 티노스 둘로스 카코스 에콘 에멜렌 텔류탄 호스 엔 아우토 엔티모스

개역개정,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새번역,2 어떤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종이었다.

우리말성경,2 그곳에는 백부장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신임하는 종 하나가 병이 들어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2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영어NIV,2 There a centurion’s servant, whom his master valued highly, was sick and about to die.

영어NASB,2 And a centurion’s slave, who was highly regarded by him, was sick and about to die.

영어MSG,2 A Roman captain there had a servant who was on his deathbed. He prized him highly and didn’t want to lose him.

영어NRSV,2 A centurion there had a slave whom he valued highly, and who was ill and close to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2 εκατονταρχου δε τινος δουλος κακως εχων ημελλεν τελευταν ος ην αυτω εντιμος

라틴어Vulgate,2 centurionis autem cuiusdam servus male habens erat moriturus qui illi erat pretiosus

히브리어Modern,2 ועבד לאחד משרי המאות חלה למות והוא יקר לו מאד׃

성 경: [눅7: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백부장 – 본래 백부장이란 백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를 말한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본문에 언급된 백부장의 군대는 여러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로 구성되었고 헤롯 안디바의 봉급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 폴리비우스(Polybius)는 백부장의 지위에 대해서 말하기를 지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군대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 백부장의 지위에 선택되었다고 진술한다. 따라서 이 직책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성실성과 지도력을 겸비한 인격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소개된 백부장들이 모두 인격자였다는 것과 일치한다(23:47;행 10:22;22:26;23:17;24:23). 이 백부장이 반드시 이방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께 보내었던 것(3절)과 예수의 말씀(9절)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 사랑하는 종 – 마태는 ‘아들’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파이스'(*, ‘하인’)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마 8:6) 누가는 분명히 ‘둘로스'(*,’종’)라고 표현한다. 이 단어는 ‘종’ 또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생명에 대한 결정권이자신에게 없고 주인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종과 상전이라는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장로를 손수 찾아가 예수께 부탁을 올릴 것을 간구한 사실은 이 백부장의 종에 대한 강한 애정을 반영한다. 아울러 이 종이 그의 상전인 이 백부장을 얼마나 성심 성의껏 섬기며 봉사했는가를 반증하기도 한다.

아쿠사스 데 페리 투 예수 아페스테일렌 프로스 아우톤 프레스뷔테루스 톤 유다이온 에로톤 아우톤 호포스 엘돈 디아소세 톤 둘론 아우투

개역개정,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새번역,3 그 백부장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그에게 청하기를, 와서 자기 종을 낫게 해달라고 하였다.

우리말성경,3 백부장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장로들을 예수께 보내 자기 종을 낫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톨릭성경,3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영어NIV,3 The centurion heard of Jesus and sent some elders of the Jews to him, asking him to come and heal his servant.

영어NASB,3 When he heard about Jesus, he sent some Jewish elders asking Him to come and save the life of his slave.

영어MSG,3 When he heard Jesus was back, he sent leaders from the Jewish community asking him to come and heal his servant.

영어NRSV,3 When he heard about Jesus, he sent some Jewish elders to him, asking him to come and heal his slave.

헬라어신약Stephanos,3 ακουσας δε περι του ιησου απεστειλεν προς αυτον πρεσβυτερους των ιουδαιων ερωτων αυτον οπως ελθων διασωση τον δουλ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3 et cum audisset de Iesu misit ad eum seniores Iudaeorum rogans eum ut veniret et salvaret servum eius

히브리어Modern,3 וישמע את שמע ישוע וישלח אליו מזקני היהודים וישאל מאתו לבוא ולהושיע את עבדו׃

성 경: [눅7: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 마태는 ‘백부장이 나아와’라고 말한다(마 8:5). 반면 여기에는 백부장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낸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태는 요약적인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유대인의 장로들을 택한 이유는 자신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와 잘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오셔서…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 ‘구원하시기를'(*, 디아소세)이란 폭풍같은 상황 속에서도 안전하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에는 그종의 생명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백부장이 구원을 요청하는것은 예수께서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구원하여 건강하게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에 백부장의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 죄인으로 여긴터라 감히 예수께 직접 나아가 간구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호이 데 파라게노메노이 프로스 톤 예순 파레칼룬 아우톤 스푸다이오스 레곤테스 호티 앜시오스 에스틴 호 파렠세 투토

개역개정,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새번역,4 그들이 예수께로 와서, 간곡히 탄원하기를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말성경,4 장로들이 예수께 와서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이 사람은 선생님이 그렇게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가톨릭성경,4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영어NIV,4 When they came to Jesus, they pleaded earnestly with him, “This man deserves to have you do this,

영어NASB,4 When they came to Jesus, they earnestly implored Him, saying, “He is worthy for You to grant this to him;

영어MSG,4 They came to Jesus and urged him to do it, saying, “He deserves this.

영어NRSV,4 When they came to Jesus, they appealed to him earnestly, saying, “He is worthy of having you do this for him,

헬라어신약Stephanos,4 οι δε παραγενομενοι προς τον ιησουν παρεκαλουν αυτον σπουδαιως λεγοντες οτι αξιος εστιν ω παρεξει τουτο

라틴어Vulgate,4 at illi cum venissent ad Iesum rogabant eum sollicite dicentes ei quia dignus est ut hoc illi praestes

히브리어Modern,4 ויבאו אל ישוע ויתחננו לו מאד ויאמרו ראוי הוא אשר תעשה בקשתו׃

성 경: [눅7: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이에…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리며 그들과의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서 간주했다. 특히나 자신의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인들과의 접촉은 더더욱 기피했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장로들이이 백부장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보건대 이 백부장이 평소 유대인들에게 베푼 선행이 엄청났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장로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위해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한 예수께 가서도 간절히 간청하였다. ‘간절히’란 원어상으로 보건대 서두름을 의미하는말에서 나왔는데 시간에 쫓기는 상태에서 열렬히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는 장로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부장의 종을 위해 시간을 다투어 예수께 열심히 간청한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구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파레칼룬'(*)은 미완료형으로서 간구하기를 시작한 후 계속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장로들의 간구가 단순히 한 두 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아가파 가르 토 에드노스 헤몬 카이 텐 쉬나고겐 아우토스 오코도메센 헤민

개역개정,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새번역,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하였다.

우리말성경,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영어NIV,5 because he loves our nation and has built our synagogue.”

영어NASB,5 for he loves our nation and it was he who built us our synagogue.”

영어MSG,5 He loves our people. He even built our meeting place.”

영어NRSV,5 for he loves our people, and it is he who built our synagogue for us.”

헬라어신약Stephanos,5 αγαπα γαρ το εθνος ημων και την συναγωγην αυτος ωκοδομησεν ημιν

라틴어Vulgate,5 diligit enim gentem nostram et synagogam ipse aedificavit nobis

히브리어Modern,5 כי אהב עמנו הוא והוא בנה לנו את בית הכנסת׃

성 경: [눅7: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저가 – 이 구절은 앞에서 장로들이 백부장을 ‘합당하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한다. 원래는 ‘가르'(*, ‘왜냐하면’)가 들어 있으나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저가'(*, 아우토스)는 문법적으로 ‘그 자신이’란 의미다. 따라서 이 말은 회당을 짓는데 있어서 그가 완전히 그 자신의 재산으로 지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당시 로마 군관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하고 백성을 압제하여 재물을 탈취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유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 주었으며 또 유대인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따라서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그의 종을 살려주어도 될 만한 자격과 가치가 그에게 충분히 있음을 예수께 강조하였다.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회당을 지었는지 아니면 당시의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서 지도자로서 회당을 지어 희사(喜捨)했는지 알 수없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태도로 보아 일단의 신앙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호 데 예수스 에포류에토 쉰 아우토이스 헤데 데 우우투 우 마크란 아페콘토스 아포 테스 아이키아스 에펨프센 퓔루스 호 에카톤타르케스 레곤 아우토 퀴리에 메 스퀼루 우 가르 히카노스 에이미 히나 휘포 텐 스테겐 무 에이셀데스

개역개정,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새번역,6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께 이렇게 아뢰게 하였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말성경,6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 예수께 이렇게 아뢰도록 했습니다. “주여, 더 수고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주를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6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영어NIV,6 So Jesus went with them. He was not far from the house when the centurion sent friends to say to him: “Lord, don’t trouble yourself, for I do not deserve to have you come under my roof.

영어NASB,6 Now Jesus started on His way with them; and when He was not far from the house, the centurion sent friends, saying to Him, “Lord, do not trouble Yourself further, for I am not worthy for You to come under my roof;

영어MSG,6 Jesus went with them. When he was still quite far from the house, the captain sent friends to tell him, “Master, you don’t have to go to all this trouble. I’m not that good a person, you know. I’d be embarrassed for you to come to my house,

영어NRSV,6 And Jesus went with them, but when he was not far from the house, the centurion sent friends to say to him, “Lord, do not trouble yourself, for I am not worthy to have you come under my roof;

헬라어신약Stephanos,6 ο δε ιησους επορευετο συν αυτοις ηδη δε αυτου ου μακραν απεχοντος απο της οικιας επεμψεν προς αυτον ο εκατονταρχος φιλους λεγων αυτω κυριε μη σκυλλου ου γαρ ειμι ικανος ινα υπο την στεγην μου εισελθης

라틴어Vulgate,6 Iesus autem ibat cum illis et cum iam non longe esset a domo misit ad eum centurio amicos dicens Domine noli vexari non enim dignus sum ut sub tectum meum intres

히브리어Modern,6 וילך אתם ישוע ויהי כאשר קרב אל הבית וישלח אליו שר המאה על ידי רעיו לאמר לו בי אדני אל נא תטריח את עצמך כי אינני כדי שתבוא בצל קורתי׃

성 경: [눅7: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주여 – 이는 단순한 호칭의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9절) 신앙 고백적 측면까지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 백부장은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큰거리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비록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위대하신 능력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치 못할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한 신앙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또한 그는 예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굳이 몸소 집을 방문해 주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디오 우데 에마우톤 엨시오사 프로스 세 엘데인 알라 에이페 로고 카이 이아데토 호 파이스 무

개역개정,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새번역,7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우리말성경,7 그래서 제가 직접 주께 나아갈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7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영어NIV,7 That is why I did not even consider myself worthy to come to you. But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영어NASB,7 for this reason I did not even consider myself worthy to come to You, but just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영어MSG,7 even embarrassed to come to you in person. Just give the order and my servant will get well.

영어NRSV,7 therefore I did not presume to come to you. But only speak the word, and let my servant be healed.

헬라어신약Stephanos,7 διο ουδε εμαυτον ηξιωσα προς σε ελθειν αλλα ειπε λογω και ιαθησεται ο παις μου

라틴어Vulgate,7 propter quod et me ipsum non sum dignum arbitratus ut venirem ad te sed dic verbo et sanabitur puer meus

히브리어Modern,7 ובעבור זאת גם את עצמי לא חשבתי ראוי לבוא אליך אך דבר נא דבר וירפא נערי׃

성 경: [눅7: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말씀만 하사 – 이를 직역하면 ‘한 마디 말씀만 하시면’이다. 그는 예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위의 외적 증거를 넘어선 것이었다. 백부장은 종으로 하여금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사실 그의 믿음대로 예수는 한 마디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11-16절)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다(8:22-25). 예수의 말씀은 태초에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었다(창 1:1-31).

󰃨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2절에서는 ‘종'(둘로스)으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하인'(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스’는 ‘아들’을 지칭하기도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장로들과는 달리 백부장이 그 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종을 아들과 같이 여겼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백부장은 아들과 같은 하인이 죽어가는것을 볼 수가 없어서 예수께 간절히 간청하였던 것이다.

카이 가르 에고 안드로포스 에이미 휘포 엨수시안 타쏘메노스 에콘 휲 에마우톤 스트라티오타스 카이 레고 투토 포류데티 카이 포류에타이 카이 알로 에르쿠 카이 에르케타이 카이 토 둘로 무 포이에손 투토 카이 포이에이

개역개정,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새번역,8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우리말성경,8 저도 상관 아래 있으면서, 제 아래도 부하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부하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며 하인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가톨릭성경,8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영어NIV,8 For I myself am a man under authority, with soldiers under me. I tell this one, ‘Go,’ and he goes; and that one, ‘Come,’ and he comes. I say to my servant, ‘Do this,’ and he does it.”

영어NASB,8 “For I also am a man placed under authority, with soldiers under me; and I say to this one, ‘Go!’ and he goes, and to another, ‘Come!’ and he comes, and to my slave, ‘Do this!’ and he does it.”

영어MSG,8 I’m a man under orders; I also give orders. I tell one soldier, ‘Go,’ and he goes; another, ‘Come,’ and he comes; my slave, ‘Do this,’ and he does it.”

영어NRSV,8 For I also am a man set under authority, with soldiers under me; and I say to one, ‘Go,’ and he goes, and to another, ‘Come,’ and he comes, and to my slave, ‘Do this,’ and the slave does it.”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γαρ εγω ανθρωπος ειμι υπο εξουσιαν τασσομενος εχων υπ εμαυτον στρατιωτας και λεγω τουτω πορευθητι και πορευεται και αλλω ερχου και ερχεται και τω δουλω μου ποιησον τουτο και ποιει

라틴어Vulgate,8 nam et ego homo sum sub potestate constitutus habens sub me milites et dico huic vade et vadit et alio veni et venit et servo meo fac hoc et facit

히브리어Modern,8 כי גם אנכי איש נתון תחת השלטון יש תחת ידי אנשי צבא ואמרתי לזה לך והלך ולזה בוא ובא ולעבדי עשה זאת ועשה׃

성 경: [눅7: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저도 – 원문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백부장이 예수께서 말씀으로만 그 종을 치료하시리라고 생각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드러낸다.

󰃨 남의…사람이요 – 백부장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부하를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남의 수하(underauthority, NIV)에 있음을 먼저 드러내는 겸손함을 취하고 있다.

󰃨 이더러…하나이다 – 백부장은 자신의 군대 생활의 경험을 예로 들어 실제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지금까지 명령만 하면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그 명령에 따라 원하는 것이 그대로 실행되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도 어떤 권위로 말씀만하시면 그것이 능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백부장은 유대교에 익숙하였던 관계로, 하나님의 명령에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순종했던 천군 천사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왕하 6:17;시 34:7;68:17;103:20;마 26:53). 어쨌든 군대의 상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신적권위를 가진 예수와 연약한 인생인 자신이 영적상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며, 권위 아래에 있는 자신이 그 수하 사람들을 복종케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신적 권세를 가진 예수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는 하늘과 땅에 속한 권세를 지닌 주권자이시다(요 17:2).

아쿠사스 데 타우타 호 예수스 에다우마센 아우톤 카이 스트라페이스 토 아쿨루둔티 아우토 오클로 에이펜 레고 휘민 우데 엔 토 이스라엘 토사우텐 피스틴 휴론

개역개정,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새번역,9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기시어, 돌아서서,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말성경,9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듣고 백부장을 놀랍게 여겨 돌아서서 따라오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스라엘에서도 이렇게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가톨릭성경,9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영어NIV,9 When Jesus heard this, he was amazed at him, and turning to the crowd following him, he said, “I tell you, I have not found such great faith even in Israel.”

영어NASB,9 Now when Jesus heard this, He marveled at him, and turned and said to the crowd that was following Him, “I say to you, not even in Israel have I found such great faith.”

영어MSG,9 Taken aback, Jesus addressed the accompanying crowd: “I’ve yet to come across this kind of simple trust anywhere in Israel, the very people who are supposed to know about God and how he works.”

영어NRSV,9 When Jesus heard this he was amazed at him, and turning to the crowd that followed him, he said, “I tell you, not even in Israel have I found such faith.”

헬라어신약Stephanos,9 ακουσας δε ταυτα ο ιησους εθαυμασεν αυτον και στραφεις τω ακολουθουντι αυτω οχλω ειπεν λεγω υμιν ουδε εν τω ισραηλ τοσαυτην πιστιν ευρον

라틴어Vulgate,9 quo audito Iesus miratus est et conversus sequentibus se turbis dixit amen dico vobis nec in Israhel tantam fidem inveni

히브리어Modern,9 וישמע ישוע את דבריו ויתמה עליו ויפן ויאמר אל ההמון ההלך אחריו אמר אני לכם גם בישראל לא מצאתי אמונה גדולה כזאת׃

성 경: [눅7: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예수께서…기이히 여겨 – 예수께서 이상히 여기신 것은 오직 두 번 기록되었는데 한 번은 믿음이 있음을 보신 후였고, 또 한 번은 믿음이 없음을 보신 후였다(막 6:6).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실 정도로 백부장의 믿음이 위대했던 것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1)그의 겸손함(humility)이다. (2)예수의 말씀의 권능을 확신한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요 4:50에서도 발견된다. (3)예수의 신적인 신분에 관한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그의 겸손함이나 말씀의 권능 확신 등에 대한 기본적인 근거라 할 수 있다.

󰃨 이스라엘…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미 믿음을 찾으셨기 때문이다(5:20;마 8:2,3). 예수께서 놀라신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능가하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 중에 쓰인 부사 ‘우데'(*)는’…조차도…않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성경을 늘상 접하며 여호와 신앙에 삶의 기반을 두는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방인만한 믿음을 가진 이가 아직 유대인 중에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시는 예수의 책망을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이는 선민들조차 갖지 못한 귀한 믿음을 이방인 백부장이 지녔던 사실을 한층 강조해 준다.

카이 휘포스트렢산테스 에이스 톤 오이콘 호이 펨프덴테스 휴론 톤 둘론 휘기아이논타

개역개정,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새번역,10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보니, 종은 나아 있었다.

우리말성경,10 백부장이 보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그 종이 벌써 나아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0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영어NIV,10 Then the men who had been sent returned to the house and found the servant well.

영어NASB,10 When those who had been sent returned to the house, they found the slave in good health.

영어MSG,10 When the messengers got back home, they found the servant up and well.

영어NRSV,10 When those who had been sent returned to the house, they found the slave in good health.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ι υποστρεψαντες οι πεμφθεντες εις τον οικον ευρον τον ασθενουντα δουλον υγιαινοντα

라틴어Vulgate,10 et reversi qui missi fuerant domum invenerunt servum qui languerat sanum

히브리어Modern,10 וישובו השלוחים אל הבית וימצאו את העבד החלה והוא נרפא׃

성 경: [눅7:1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집으로 돌아가…강건하여졌더라 – 마태는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다만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건강해진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는 치료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종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를 정도로 심각했던 중풍병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처럼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적적 치료 행위를 통해서 예수의 메시야성은 밝히 드러났으며 아울러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을 향하는데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엨세스 에포류데 에이스 폴린 칼루메넨 나인 카이 쉬네포류온토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카이 오클로스 폴뤼스

개역개정,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새번역,11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다음 날’

우리말성경,11 그 후에 예수께서는 곧 나인이라는 마을로 가셨습니다. 제자들과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가톨릭성경,11 바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영어NIV,11 Soon afterward, Jesus went to a town called Nain, and his disciples and a large crowd went along with him.

영어NASB,11 Soon afterwards He went to a city called Nain; and His disciples were going along with Him, accompanied by a large crowd.

영어MSG,11 Not long after that, Jesus went to the village Nain. His disciples were with him, along with quite a large crowd.

영어NRSV,11 Soon afterwards he went to a town called Nain, and his disciples and a large crowd went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η εξης επορευετο εις πολιν καλουμενην ναιν και συνεπορευοντο αυτω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ικανοι και οχλος πολυς

라틴어Vulgate,11 et factum est deinceps ibat in civitatem quae vocatur Naim et ibant cum illo discipuli eius et turba copiosa

히브리어Modern,11 ויהי ממחרת וילך אל עיר ושמה נעים ורבים מתלמידיו הלכים אתו והמון עם רב׃

성 경: [눅7:1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나인이란 성 – ‘나인'(Nain)은 ‘즐거움’이란 뜻이며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난다. 이 성의 위치는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넴(Shunem) 지방과 모레 언덕(the Hill of Moreh) 사이의 작은 헬몬산(little Hermon)의 비탈에 위치하고 가버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40k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성에서 엔돌(Endor) 방향으로는 약 10분쯤 거리에 묘지가 있다. 한편 ‘나인’ 성은 오늘날까지 ‘네인'(Nein)으로 불리우는 작은 마을로 현존한다. 그 당시 이곳으로 올라가자면 좁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길 양편에는 무덤같은 굴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 지점 부근에서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 행렬(葬禮行列)과 마주치셨다. 아마 그 지역의 사람들은 엘리사가 행했던 기적을 회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왕하 4:8-37).

호스 데 엥기센 테 퓔레 테스 폴레오스 카이 이두 엨세코미제토 테드네코스 모노게네스 휘오스 테 메트리 아우투 카이 아우테 엔 케라 카이 오클로스 테스 폴레오스 히카노스 엔 쉰 아우테

개역개정,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새번역,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말성경,12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죽은 사람 한 명을 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 여인과 함께 상여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영어NIV,12 As he approached the town gate, a dead person was being carried out–the only son of his mother, and she was a widow. And a large crowd from the town was with her.

영어NASB,12 Now as He approached the gate of the city, a dead man was being carried out, the only son of his mother, and she was a widow; and a sizeable crowd from the city was with her.

영어MSG,12 As they approached the village gate, they met a funeral procession–a woman’s only son was being carried out for burial. And the mother was a widow.

영어NRSV,12 As he approached the gate of the town, a man who had died was being carried out. He was his mother’s only son, and she was a widow; and with her was a large crowd from the town.

헬라어신약Stephanos,12 ως δε ηγγισεν τη πυλη της πολεως και ιδου εξεκομιζετο τεθνηκως υιος μονογενης τη μητρι αυτου και αυτη ην χηρα και οχλος της πολεως ικανος συν αυτη

라틴어Vulgate,12 cum autem adpropinquaret portae civitatis et ecce defunctus efferebatur filius unicus matri suae et haec vidua erat et turba civitatis multa cum illa

히브리어Modern,12 הוא קרב אל שער העיר והנה מוציאים מת בן יחיד לאמו והיא אלמנה ועמה רבים מעם העיר׃

성 경: [눅7:1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 이 성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벽에 나 있는 큰 문을 통해 들어갔다. 보통 성문 근처는 성 주민들의 집회 장소로서 정규적인 화합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르었다. 그리고 묘지는 보통 성 밖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지금 성문근처에서 모였던 장례 행렬이 성 밖의 묘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때 예수의 일행은 성문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 사람들이 –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례시에 두 명 이상의 피리부는 사람과 한 명 이상의 호곡(號哭)할 여자를 고용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들’이란 단순히 시체를 직접 운구(運柩)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곡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까지 포함된 것이다.

󰃨 이는 그 어미의…과부라 – 여인이 과부라는 사실은 그 가정의 비참한 경제 생활을 입증한다. 1세기 당시에 여자가 자기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마지막 소망이었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상심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 성의 주민들은 그전에도 이미 이 여인을 위해 죽은 사람을 한번 운반해 주었을 것이다. 그 죽은 사람은 물론 이 과부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을 장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요’, ‘과부라’라는 말은 이 여인의 참담한 심경을 더욱 강조하며 잘 묘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성의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에 동참했다는 것은 그 동네 사람들이 과부에게 참된 동정을 표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카이 이돈 아우텐 호 퀴리오스 에스플랑크니스데 엪 아우테 카이 에이펜 아우테 메 클라이에

개역개정,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새번역,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우리말성경,13 주께서 그 여인을 보고 불쌍히 여기며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마라.”

가톨릭성경,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영어NIV,13 When the Lord saw her, his heart went out to her and he said, “Don’t cry.”

영어NASB,13 When the Lord saw her, He felt compassion for her, and said to her, “Do not weep.”

영어MSG,13 When Jesus saw her, his heart broke. He said to her, “Don’t cry.”

영어NRSV,13 When the Lord saw her, he had compassion for her and said to her, “Do not weep.”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ιδων αυτην ο κυριος εσπλαγχνισθη επ αυτη και ειπεν αυτη μη κλαιε

라틴어Vulgate,13 quam cum vidisset Dominus misericordia motus super ea dixit illi noli flere

히브리어Modern,13 וכראות אתה האדון נכמרו רחמיו עליה ויאמר לה אל תבכי׃

성 경: [눅7:1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주께서(*, 호 퀴리오스) – 여기 사용된 ‘주'(主)라는 칭호는 예수께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있는 ‘생명의 주’이심을 나타낸다.

󰃨 과부를 보시고 – 본문은 예수께 그 상황을 알리거나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께서 스스로 비통해하는 여인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내고 계신다.

󰃨 불쌍히 여기사(*, 스플랑크니조마이) –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그 원동력은 사랑과 동정이었다(마 14:14;15:32;20:34). 이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의 원래 뜻은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뜻한다. 즉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께서는 속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께서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얼마나 큰 동정과 사랑을 보내셨는가를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긍휼은 본 이적의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적적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했으나, 본문의 경우처럼 믿음의 유무를 보기 전에 고통당하는 인생에 대한 긍휼의 동기에서 먼저 은혜를 베푸신 경우도 종종 있었다(마 15:32;20:34;막 1:34;8:2). 그리고 이는 곧 죄많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요 원수된 상태였을 때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으시게끔 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 지으신 것이다.

󰃨 울지 말라(*, 메 클라이에) – 현재 명령법으로 ‘울음을 그치라’는 뜻이다. ‘울다’는 동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클라이오'(*)와 ‘다크뤼오'(*)이다. 전자는 ‘흐느껴 우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부는 지금 독자의 죽음에 슬퍼하고 비통해 하면서 매우흐느끼며 울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카이 프로셀돈 헾사토 테스 소루 호이 데 바스타존테스 에스테산 카이 에이펜 네아니스케 소이 레고 에게르데티

개역개정,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새번역,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우리말성경,14 그러고는 다가가 관을 만지셨습니다. 관을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가톨릭성경,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영어NIV,14 Then he went up and touched the coffin, and those carrying it stood still. He said, “Young man, I say to you, get up!”

영어NASB,14 And He came up and touched the coffin; and the bearers came to a halt. And He said, “Young man, I say to you, arise!”

영어MSG,14 Then he went over and touched the coffin. The pallbearers stopped. He said, “Young man, I tell you: Get up.”

영어NRSV,14 Then he came forward and touched the bier, and the bearers stood still. And he said, “Young man, I say to you, ris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προσελθων ηψατο της σορου οι δε βασταζοντες εστησαν και ειπεν νεανισκε σοι λεγω εγερθητι

라틴어Vulgate,14 et accessit et tetigit loculum hii autem qui portabant steterunt et ait adulescens tibi dico surge

히브리어Modern,14 ויגש ויגע בארון והנשאים עמדו ויאמר עלם אמר אני אליך קומה׃

성 경: [눅7:1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가까이 오사…대시니 –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레 22:4;민 19:11). 왜냐하면 죽음은 곧 죄의 결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의 법으로 이 율법을 초월하셨다. 여기서 ‘관'(*, 소로스)은 호머(Homer)의 글에서 나타난 바대로 원래 죽은자의 유골이나 재를 넣어 두는 항아리를 의미했으나 나중에 시체를 넣는 함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손수건이나 수다리움(sudarium)으로 덮어서 뚜껑이 없는 관에 넣었다(Josephus).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체에 대한 고정 관념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셨음은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의 사랑이 이런 율법의 문자적 이해를 뛰어넘었음을 뜻한다.

󰃨 일어나라 – 예수께서는 지금 죽어 있는 청년에게 마치 그가 듣고 순종할 수 있는 것처럼, 즉 지금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듯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는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나타나는 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8:54;요 11:43). 성경의 몇몇 인물들이 죽은 자를 살렸던 경험이 있지만(왕상 17:21;왕하4:35;행 9:40;20:10)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그러한 이적을 행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직접 사용하시어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예수께서 음부의 열쇠를 지니고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단적 실례이다(롬 8:2;고후 1:10;딤후 1:10).

카이 아네카디센 호 네크로스 카이 에릌사토 랄레인 카이 에도켄 아우톤 테 메트리 아우투

개역개정,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새번역,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우리말성경,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셨습니다.

가톨릭성경,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영어NIV,15 The dead man sat up and began to talk, and Jesus gave him back to his mother.

영어NASB,15 The dead man sat up and began to speak. And Jesus gave him back to his mother.

영어MSG,15 The dead son sat up and began talking. Jesus presented him to his mother.

영어NRSV,15 The dead man sat up and began to speak, and Jesus gave him to his m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ανεκαθισεν ο νεκρος και ηρξατο λαλειν και εδωκεν αυτον τη μητρ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5 et resedit qui erat mortuus et coepit loqui et dedit illum matri suae

히브리어Modern,15 ויתעודד המת ויחל לדבר ויתנהו לאמו׃

성 경: [눅7:1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죽었던 자가…하거늘 – 누가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로 ‘일어 앉고 말도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종말론적인 한 암시를 볼 수가 있다. 즉 세상 끝날 성도의 부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을 것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를 보게 된다.

󰃨 예수께서…주신대 – 그 과부를 향한 예수의 사랑과 동정이 얼마나 크셨는지 분명히 나타난다. 이러한 행동은 왕상 17:23의 엘리야의 그것과 유사하다. 예수는 소생한 청년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대신 그 불쌍한 여인을 잘 봉양하도록 당부하셨을 것이다. 이제 이 과부에게는 더 이상의 비애와 고통이 없고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과 자비로우신 예수를 만난 희열로 가득했을 것이다.

엘라벤 데 포보스 판타스 카이 에돜사존 톤 데온 레곤테스 호티 프로페테스 메가스 에게르데 엔 헤민 카이 호티 에페스켚사토 호 데오스 톤 라온 아우투

개역개정,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새번역,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우리말성경,16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가득 차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했습니다. “위대한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봐 주셨다.”

가톨릭성경,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6 They were all filled with awe and praised God. “A great prophet has appeared among us,” they said. “God has come to help his people.”

영어NASB,16 Fear gripped them all, and they began glorifying God, saying, “A great prophet has arisen among us!” and, “God has visited His people!”

영어MSG,16 They all realized they were in a place of holy mystery, that God was at work among them. They were quietly worshipful–and then noisily grateful, calling out among themselves, “God is back, looking to the needs of his people!”

영어NRSV,16 Fear seized all of them; and they glorified God, saying, “A great prophet has risen among us!” and “God has looked favorably on his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λαβεν δε φοβος απαντας και εδοξαζον τον θεον λεγοντες οτι προφητης μεγας εγηγερται εν ημιν και οτι επεσκεψατο ο θεος τον λα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16 accepit autem omnes timor et magnificabant Deum dicentes quia propheta magnus surrexit in nobis et quia Deus visitavit plebem suam

히브리어Modern,16 ותאחז כלם רעדה וישבחו את האלהים ויאמרו כי נביא גדול קם בקרבנו וכי פקד האלהים את עמו׃

성 경: [눅7:1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 누가는 또다시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5:26;18:43;23:47). 무리들은 이 이적이 하나님의 권세로 이루어진줄을 믿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영광을 돌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독사존'(*)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예수의 크신 권능에 압도당한 무리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을 나타낸다.

󰃨 큰 선지자가…일어나셨다 – 전에는 보지 못한 큰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를 한 위대한 선지자로 보았고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께 대한 이 칭호가 비록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그 무리들이 사람에게 붙일 수있는 최대의 경칭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서 선지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직접적인 동기는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가 행한 일(왕상 17:21;왕하4:35)과 같은 일을 행하신 데 있었을 것이다. 무리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약4세기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으나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당시부터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관은 현세적이며 또한 민족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데에 큰 문제가 있었다.

󰃨 하나님께서…돌아보셨다 하더라 – 이 말은 구약에서 여러 번 나오며(룻 1:6;삼상2:21) 축복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고 또한 심판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 원래 ‘돌아보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의사가 왕진하여 환자를 치료할 때 쓰는 동사 ‘에피스켑토마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이 오랜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 이 큰 선지자를 통해 다시 그들을 방문하여 상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러(말 4:2)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카이 엨셀덴 호 로고스 후토스 엔 홀레 테 유다이아 페리 아우투 카이 파세 테 페리코로

개역개정,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새번역,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우리말성경,17 예수에 대한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변 지역에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가톨릭성경,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영어NIV,17 This news about Jesus spread throughout Judea and the surrounding country.

영어NASB,17 This report concerning Him went out all over Judea and in all the surrounding district.

영어MSG,17 The news of Jesus spread all through the country.

영어NRSV,17 This word about him spread throughout Judea and all the surrounding country.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εξηλθεν ο λογος ουτος εν ολη τη ιουδαια περι αυτου και εν παση τη περιχωρω

라틴어Vulgate,17 et exiit hic sermo in universam Iudaeam de eo et omnem circa regionem

히브리어Modern,17 ויצא הדבר הזה בכל יהודה ובכל הככר׃

성 경: [눅7:1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결과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바 곧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관련된 소문이다(Meyer). 당시에 백성들이 순수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에는 아직까지 그들의 믿음이 너무 어렸으므로 그들은 예수의 놀라운 치유 이적을 목격하고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이것은 유대 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땅 전체, 즉 실질적인 팔레스틴을 말한다(1:5). 물론 유대 지방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방 지역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 보통 ‘온 유대’라고 했을 때는 팔레스틴 전역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인 성’은 갈릴리에 속한 자그마한 마을이었으나 죽은 자를 소생시키신 예수의 위대한 권능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각처로 퍼져 나갔다.

카이 아펭게일란 요안네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페리 판톤 투톤 카이 프로스칼레사메노스 뒤오 티나스 톤 마데톤 아우투 호 요안네스

개역개정,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새번역,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은 자기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우리말성경,18 요한의 제자들이 모든 소식을 요한에게 알렸습니다. 요한은 제자들 중 두 사람을 불러

가톨릭성경,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전하였다. 그러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영어NIV,18 John’s disciples told him about all these things. Calling two of them,

영어NASB,18 The disciples of John reported to him about all these things.

영어MSG,18 John’s disciples reported back to him the news of all these events taking place.

영어NRSV,18 The disciples of John reported all these things to him. So John summoned two of his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απηγγειλαν ιωαννη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περι παντων τουτων

라틴어Vulgate,18 et nuntiaverunt Iohanni discipuli eius de omnibus his

히브리어Modern,18 ותלמידי יוחנן הגידו לו את כל אלה׃

성 경: [눅7:1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요한의 제자들이…고하니 – 마 9:14;요 3:26 등으로 비추어 보건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따른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를 위시한 열 두 제자들처럼 철저하게 예수를 따르지는 못했으며 세례 요한의 제자 출신이라는 생각을 늘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들이 감옥 밖에서 되어가는 일들, 특히 예수의 활동에 대해 세례 요한에게 수시로 알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에펨프센 프로스 톤 퀴리온 레곤 쉬 에이 호 에르코메노스 헤 알론 프로스도코멘

개역개정,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새번역,19 주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우리말성경,19 주께 보내며 “선생님께서 오실 그분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어보게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9 주님께 보내며,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영어NIV,19 he sent them to the Lord to ask, “Are you the one who wa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영어NASB,19 Summoning two of his disciples, John sent them to the Lord, saying, “Are You the Expected One, or do we look for someone else?”

영어MSG,19 He sent two of them to the Master to ask the question, “Are you the One we’ve been expecting, or are we still waiting?”

영어NRSV,19 and sent them to the Lord to ask,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are we to wait for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προσκαλεσαμενος δυο τινας των μαθητων αυτου ο ιωαννης επεμψεν προς τον ιησουν λεγων συ ει ο ερχομενος η αλλον προσδοκωμεν

라틴어Vulgate,19 et convocavit duos de discipulis suis Iohannes et misit ad Dominum dicens tu es qui venturus es an alium expectamus

히브리어Modern,19 ויקרא אליו יוחנן שנים מתלמידיו וישלחם אל ישוע לאמר לו האתה הוא הבא אם נחכה לאחר׃

성 경: [눅7:1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 그 당시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저지른 불륜의 관계를 책망하고 또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다가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헤롯은 자신의 부정에 대한 요한의 책망을 괘씸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많은 백성들이 그의 교훈과 회개의 세례에 동조하며 따르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의 정치적인 위상(位相)에 도전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를 투옥하게 되었다(3:18-20). 이로 인해 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통해 외부의 소식을 들으며 예수의 활동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곧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행적에 대한 관심이 그 누구보다 컸다 하겠다.

󰃨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 ‘오실 그이’는 메시야를 의미하는데 이 칭호는 시40:7;118:26;단 7:13등에서 유래한다. 원문에 의하면 ‘당신'(*, 쉬)이 강조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요한은 감옥에 있는 동안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즉 요한은 예수께서 진정 메시야라면 빨리 어둠의 세력을 멸하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요한은 옥에 그대로 머물렀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대적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에 요한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정말 메시야인지를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실 때 성령을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깨달았다(마 3:13-17).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보고서도 제지하기는 커녕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며 오히려 예수께로 적극적으로 인도하였다(요 3:30). 따라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 요한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하여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그가 메시야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오랜 옥살이에 지쳐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 의심이 일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즉 요한은 유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헤롯과 같은 악한 세력을 제거하여 이스라엘에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줄 메시야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요한의 제자 파송이 예수의 권능과 명성을 시기하는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직접 듣게 하여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기도 한다(Clavin,Jerome). 어쨌든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그가 참수형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그의 사역에 충실했다. 그가 옥중에서 예수의 메시야성을 오해하거나 의심했었다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그를 인정하셨으며 그의 사역을 극찬하셨다.

파라게노메노이 데 프로스 아우톤 호이 안드레스 에이판 요안네스 호 밮티스테스 아페스테일렌 헤마스 프로스 세 레곤 쉬 에이 호 에르코메노스 에 알론 프로스도코멘

개역개정,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새번역,20 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 ㉡또는 ‘침례자’

우리말성경,20 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오실 그분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가톨릭성경,20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 침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영어NIV,20 When the men came to Jesus, they said, “John the Baptist sent us to you to ask, ‘Are you the one who was to come, or should we expect someone else?'”

영어NASB,20 When the men came to Him, they said, “John the Baptist has sent us to You, to ask, ‘Are You the Expected One, or do we look for someone else?'”

영어MSG,20 The men showed up before Jesus and said, “John the Baptizer sent us to ask you, ‘Are you the One we’ve been expecting, or are we still waiting?'”

영어NRSV,20 When the men had come to him, they said, “John the Baptist has sent us to you to ask,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are we to wait for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20 παραγενομενοι δε προς αυτον οι ανδρες ειπον ιωαννης ο βαπτιστης απεσταλκεν ημας προς σε λεγων συ ει ο ερχομενος η αλλον προσδοκωμεν

라틴어Vulgate,20 cum autem venissent ad eum viri dixerunt Iohannes Baptista misit nos ad te dicens tu es qui venturus es an alium expectamus

히브리어Modern,20 ויבאו אליו האנשים ויאמרו יוחנן המטביל שלחנו אליך לאמר האתה הוא הבא אם נחכה לאחר׃

성 경: [눅7:2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하더이다 하니 – 요한의 보냄을 받은 두 명의 제자가 예수께 나아가 요한의 지시대로 질문하였다. 여기 사용된 의문형은 화제에 주목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용법은 신.구약을 걸쳐 많이 사용되고 있다(창 32:27;33:5;삼상24:16;요 1:19,25;4:11,12;6:5 등).

엔 에케이네 테 호라 에데라퓨센 폴루스 아포 노손 카이 마스티곤 카이 프뉴마톤 포네론 카이 튀플로이스 폴로이스 에카리사토 블레페인

개역개정,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새번역,21 그 때에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고쳐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우리말성경,21 바로 그때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고쳐 주시고 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2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영어NIV,21 At that very time Jesus cured many who had diseases, sicknesses and evil spirits, and gave sight to many who were blind.

영어NASB,21 At that very time He cured many people of diseases and afflictions and evil spirits; and He gave sight to many who were blind.

영어MSG,21 In the next two or three hours Jesus healed many from diseases, distress, and evil spirits. To many of the blind he gave the gift of sight.

영어NRSV,21 Jesus had just then cured many people of diseases, plagues, and evil spirits, and had given sight to many who were blind.

헬라어신약Stephanos,21 εν αυτη δε τη ωρα εθεραπευσεν πολλους απο νοσων και μαστιγων και πνευματων πονηρων και τυφλοις πολλοις εχαρισατο το βλεπειν

라틴어Vulgate,21 in ipsa autem hora curavit multos a languoribus et plagis et spiritibus malis et caecis multis donavit visum

히브리어Modern,21 בעת ההיא רפא רבים מחליים ומנגעים ומרוחות רעות ולעורים רבים נתן ראות עינים׃

성 경: [눅7:2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예수께서…많이 고치시며 –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이유는 먼저 그들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한 대가나 칭송을 받으려 하신 적이 없으며 어떤 특별한 조건을 제시하기 이전에 병마에 신음하는 인생에 대한 연민자체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아울러 이런 치료 행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곳에서는 애곡하는 것이나 질병이나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암시가 들어 있고 따라서 이러한 치료 행위에 나타나는 그의 이적적 권능을 통해 그가 메시야임을 증거하시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아우토이스 포류덴테스 아팡게일라테 요안네 하 에이데테 카이 에쿠사테 튀플로이 아나블레푸신 콜로이 페리파투신 레프로이 카다리존타이 카이 코포이 아쿠우신 네크로이 에게이론타이 프토코이 유앙겔리존타이

개역개정,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새번역,2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 ㉢온갖 악성 피부병을 뜻하는 말

우리말성경,22 예수께서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돌아가서 너희가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를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

가톨릭성경,2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영어NIV,22 So he replied to the messengers, “Go back and report to John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The blind receive sight, the lame walk, those who have leprosy are cur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and the good news is preached to the poor.

영어NASB,22 And He answered and said to them, “Go and report to John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the BLIND RECEIVE SIGHT,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an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up, the POOR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영어MSG,22 Then he gave his answer: “Go back and tell John what you have just seen and heard: The blind see, The lame walk, Lepers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The wretched of the earth have God’s salvation hospitality extended to them.

영어NRSV,22 And he answered them, “Go and tell John what you have seen and heard: the blind receive their sight, the lame walk, the lepers are cleansed, the deaf hear, the dead are raised, the poor have good news brought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22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ο ιησους ειπεν αυτοις πορευθεντες απαγγειλατε ιωαννη α ειδετε και ηκουσατε οτι τυφλοι αναβλεπουσιν χωλοι περιπατουσιν λεπροι καθαριζονται κωφοι ακουουσιν νεκροι εγειρονται πτωχοι ευαγγελιζονται

라틴어Vulgate,22 et respondens dixit illis euntes nuntiate Iohanni quae vidistis et audistis quia caeci vident claudi ambulant leprosi mundantur surdi audiunt mortui resurgunt pauperes evangelizantur

히브리어Modern,22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להם לכו והגידו ליוחנן את אשר ראיתם ואשר שמעתם כי עורים ראים ופסחים מתהלכים ומצרעים מטהרים וחרשים שומעים ומתים קמים ועניים מתבשרים׃

성 경: [눅7:2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병고치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것으로 보인다. 마태는 현재 시제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으로 말하는데(마11:4) 여기서는 부정 과거형으로 말한다(NIV역은 완료형으로 번역되었다). 누가가 여기에서 과거형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의 병고치는 일과 지금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시차를 분명히 하려는 정밀한 표현으로 보인다.

󰃨 요한에게 고하되…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예수께서는 여기서 구약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사 35:5,6;61:1). 이 여섯가지 표적들은 모두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이적으로 유대인들이 구하는 것들이었다(고전 1:22). 따라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는 것을 피하고 이와 같은 표적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임을 확증하신 것이다. 본절과 관계된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다.

+——————————–+———————+———-+

| 내 용 | 예 언 | 성 취 |

+——————————–+———————+———–+

| 소경이 보며 | 사 29:18;35:5 | 마 15:31;막 10:46-52 |

+——————————–+———————+———–|

| 앉은뱅이가 걸으며 | 사 35:6;61:1 | 마 15:31;행 3:6 |

+——————————–+———————+————

| 문둥이가 치유되며 | 사 61:1 | 17:14;마 8:3 |

+——————————–+———————+————

| 귀머거리가 들으며 | 사 29:18;35:5 | 막 7:34,35;9:25-27 |

+——————————–+———————+————

| 죽은 자가 살아나며 | | 14,15;8:54;요 11:43,44 |

+——————————–+———————+————+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 사 61:1 | 4:18 |

+——————————–+———————+————

카이 마카리오스 에스틴 호스 에안 메 스칸달리스데 엔 에모이

개역개정,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새번역,23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그, ‘의심을 품지 않는’

우리말성경,23 나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가톨릭성경,23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영어NIV,23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fall away on account of me.”

영어NASB,23 “Blessed is he who does not take offense at Me.”

영어MSG,23 “Is this what you were expecting? Then count yourselves fortunate!”

영어NRSV,23 And blessed is anyone who takes no offense at m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μακαριος εστιν ος εαν μη σκανδαλισθη εν εμοι

라틴어Vulgate,23 et beatus est quicumque non fuerit scandalizatus in me

히브리어Modern,23 ואשרי אשר לא יכשל בי׃

성 경: [눅7:2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누구든지…아니하는 자는 – ‘실족하다'(*, 스칸달리조)는 동사는 ‘걸어 넘어뜨리다’, ‘함정에 빠뜨리다’는 뜻이다. 이 말은 미끼를 놓은 덫에 어떤 목표물이 걸려 결국 죽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사단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져 죄를 범하고 결국은 영혼이 사망에 이르고 마는 결과를 나타낸다. 그런 뜻에서 이 말은 신약에서 ‘죄를 범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므로 본 구절의 의미는 그 누구든지 자신을 오해하거나 정죄하여 거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예수를 생명의 주로 바로 알고 받아들이면 복이 있다는 말이다.

󰃨 복 – 여기에서 ‘복’은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거나 육적(肉的)인 복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원한 축복을 뜻한다. 한편 본절이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 바, 세례 요한을 위시한 그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여 예수를 무작정 배척하거나 경원(敬遠)시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복음에 귀 기울이라는 경계와 당부의 말씀으로도 이해된다.

아펠돈톤 데 톤 앙겔론 요안누 에릌사토 레게인 프로스 투스 오클루스 페리 요안누 티 엨셀다테 에이스 텐 에레몬 데아사스다이 칼라몬 휘포 아네무 살류오메논

개역개정,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새번역,24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떠난 뒤에, 예수께서 요한에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우리말성경,24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떠나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가톨릭성경,24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영어NIV,24 After John’s messengers left, Jesus began to speak to the crowd about John: “What did you go out into the desert to see? A reed swayed by the wind?

영어NASB,24 When the messengers of John had left, He began to speak to the crowds about John, “What did you go out into the wilderness to see? A reed shaken by the wind?

영어MSG,24 After John’s messengers left to make their report, Jesus said more about John to the crowd of people. “What did you expect when you went out to see him in the wild? A weekend camper?

영어NRSV,24 When John’s messengers had gone, Jesus began to speak to the crowds about John: “What did you go out into the wilderness to look at? A reed shaken by the wind?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πελθοντων δε των αγγελων ιωαννου ηρξατο λεγειν προς τους οχλους περι ιωαννου τι εξεληλυθατε εις την ερημον θεασασθαι καλαμον υπο ανεμου σαλευομενον

라틴어Vulgate,24 et cum discessissent nuntii Iohannis coepit dicere de Iohanne ad turbas quid existis in desertum videre harundinem vento moveri

히브리어Modern,24 ויהי כאשר הלכו להם שלוחי יוחנן ויחל לדבר אל המון העם על אדות יוחנן ויאמר מה זה יצאתם המדברה לראות הקנה אשר ינוע ברוח׃

성 경: [눅7:2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무리에게…말씀하시되 –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이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 요한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이는 주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강한 경고의 어조로 말씀하셨을 때 무리들이 듣고 요한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주께서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차지하는 요한의 중요한 위치를 분명히 주지시키기 위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요한을 증거하셨다.

󰃨 너희가 무엇을…나갔더냐 –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를 외칠때 많은 무리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였다(3:2-14).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그의 설교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모였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요한이 어떠한 인물이며 그가 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는지 가르쳐 주셨다.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이 질문과 바로 다음의 질문(25절)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답변으로 이끄는 풍자성이 강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흔한 갈대를 보기위해 굳이 험한 광야로까지 나갈 필요는 없겠기 때문이다. 유대 광야에서 어디서든지 볼 수있는 흔하고 하잘 것없는 갈대처럼 요한이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당시 유대 땅에는 일신의 부귀와 안락을 위해 마치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 양심마저 팔아 넘겨버리는 배도자(背道者)들과 매국노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예수는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여론이나 세상의 유혹에 동요되지 않고 거룩한 소명에 충실한 사람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의 강직성은 헤롯과의 충돌 사건을 통해 뚜렷이 드러났다. 당시 헤롯의 악행은 묵시적으로 방관될뿐 누구 한 사람 감히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이 범죄를 공공연하게 책망하다가 결국 옥에 갇힌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알라 티 엨셀다테 이데인 안드로톤 엔 말라코이스 히마티오이스 엠피에스메논 이두 호이 엔 하마티스모 엔돜소 카이 트뤼페 휘파르콘테스 엔 토이스 바실레이오이스 에이신

개역개정,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새번역,25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우리말성경,25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냐? 아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에 빠져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가톨릭성경,25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영어NIV,25 If no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man dressed in fine clothes? No, those who wear expensive clothes and indulge in luxury are in palaces.

영어NASB,25 “Bu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man dressed in soft clothing? Those who are splendidly clothed and live in luxury are found in royal palaces!

영어MSG,25 Hardly. What then? A sheik in silk pajamas? Not in the wilderness, not by a long shot.

영어NRSV,25 What then did you go out to see? Someone dressed in soft robes? Look, those who put on fine clothing and live in luxury are in royal palaces.

헬라어신약Stephanos,25 αλλα τι εξεληλυθατε ιδειν ανθρωπον εν μαλακοις ιματιοις ημφιεσμενον ιδου οι εν ιματισμω ενδοξω και τρυφη υπαρχοντες εν τοις βασιλειοις εισιν

라틴어Vulgate,25 sed quid existis videre hominem mollibus vestimentis indutum ecce qui in veste pretiosa sunt et deliciis in domibus regum sunt

히브리어Modern,25 ואם לא מה זה יצאתם לראות האיש לבוש בגדי עדנים הנה המלבשים בגדי תפארת והמענגים בחצרות המלכים המה׃

성 경: [눅7:2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그러면(*, 알라) – 화제를 새로운 초점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너희가 갈대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미이다(R.C.H. Lenski).

󰃨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 ‘부드러운 옷’이란 곱고 감촉이 부드러운 값비싼 옷을 가리킨다. 그러나 요한은 거칠고 값싼 약대 털옷을 입었음으로(막 1:6) 이와는 강한 대조를 이룬다. 당시 대다수의 서민들은 로마의 식민지의 상황에서 수탈과 착취로 인해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녔음에 비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은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매우 값비싸고 화려한 옷들을 걸치고 다녔다.

󰃨 보라…자는 – ‘사치하게 지내는’이란 원어상으로 ‘건강을 해치다’, ‘쇠약해지다’는 의미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결국 건강을 해치기까지 흥청거린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고관 대작들이 호의 호식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핍절해 감을 암시한다. 그러나 요한은 황폐한 곳에서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으며 어려운 삶을 살았다. 만일 세례 요한이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귀에 달콤한 말만 골라 들려주었더라면 근사한 옷과 음식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궁의 회유 따위에 넘어가거나 무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치부까지도 과감히 책망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요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었다.

󰃨 왕궁에 있느니라 – 헤롯의 왕궁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마캐루스(Machaerus) 요새에서 낡고 거친 외투를 입은 가련한 죄수로서 있다.

알라 티 엨셀다테 이데인 프로페텐 나이 레고 휘민 카이 페리쏘테론 프로페투

개역개정,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새번역,26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우리말성경,26 그러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가톨릭성경,26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영어NIV,26 Bu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prophet? Yes, I tell you, and more than a prophet.

영어NASB,26 “But what did you go out to see? A prophet? Yes, I say to you, and one who is more than a prophet.

영어MSG,26 What then? A messenger from God? That’s right, a messenger! Probably the greatest messenger you’ll ever hear.

영어NRSV,26 What then did you go out to see? A prophet? Yes, I tell you, and more than a prophet.

헬라어신약Stephanos,26 αλλα τι εξεληλυθατε ιδειν προφητην ναι λεγω υμιν και περισσοτερον προφητου

라틴어Vulgate,26 sed quid existis videre prophetam utique dico vobis et plus quam prophetam

히브리어Modern,26 ועתה מה זה יצאתם לראות אם לראות איש נביא הן אני אמר לכם כי אף גדול הוא מנביא׃

성 경: [눅7:2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그러면 너희가…나갔더냐 – 예수께서는 요한의 위대함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무리들에게 두 가지 풍자적 질문을 자문 자답 형식으로 던지셨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질문은 요한이 선지자 혹은 그보다 탁월한 자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서곡으로 볼 수있다.

󰃨 선지자냐 – 이 말은 선지자를 본다는 것은 ‘보려고 나갔더냐’는 의미이며 ‘선지자를 그와 인격적인 접촉을 얻기 위하여, 즉 그의 말과 그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는 의미이다(R.C.H.Lenski). 한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2)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이다. (3)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사실들을 계시하기 위함이다.(4)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취해야 될 행동에 대한 정보를 주기위함이다. (5)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나 예언자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6)장차 메시야를 통해 절정에 이를 위대한 구속 역사의 맥을 잇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관건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느냐는 것인데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3:2). 따라서 요한은 분명히 선지자였다.

󰃨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 원문대로 번역하면 ‘선지자 이상의 어떤 자'(*, 페리쏘테론 프로페투)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그 어떤 선지자보다 탁월한 이유는 (1)그의 활동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적 예로 사 40:3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말 4:5에 예언된 ‘선지 엘리야’란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2)그의 사역의 위대성 때문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직접 그 메시야를 보고 그를 증거하며 또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위대한 선구자였다(27절).

후토스 에스틴 페리 후 게그랖타이 이두 아포스텔로 톤 앙겔론 무 프로 프로소푸 수 호스 카타스큐아세이 텐 호돈 수 엠프로스덴 수

개역개정,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새번역,27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 ㉤말 3:1

우리말성경,27 이 사람에 대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됐다.‘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네 앞서 준비할 것이다’ 말3:1

가톨릭성경,27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영어NIV,27 This is the one about whom it is written: “‘I will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

영어NASB,27 “This is the one about whom it is written, ‘BEHOLD, I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

영어MSG,27 He is the messenger Malachi announced when he wrote, I’m sending my messenger on ahead To make the road smooth for you.

영어NRSV,27 This is the one about whom it is written, ‘See, I am sending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befor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7 ουτος εστιν περι ου γεγραπται ιδου εγω αποστελλω τον αγγελον μου προ προσωπου σου ος κατασκευασει την οδον σου εμπροσθεν σου

라틴어Vulgate,27 hic est de quo scriptum est ecce mitto angelum meum ante faciem tuam qui praeparabit viam tuam ante te

히브리어Modern,27 זה הוא אשר כתוב עליו הנני שלח מלאכי לפניך ופנה דרכך לפניך׃

성 경: [눅7:2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말 3:1에 예언된 말씀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셨다. 완료형 ‘게그랖타이'(*)는 ‘지금도 기록되어 있다'(has beenwritten)는 의미이다.

󰃨 보라 내가…보내노니 – 주님께서 이 예언을 인용하실 때에 구약의 원문 그대로 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여 인용하셨음에 유의하자. 그것은 여기에 인용된 ‘네 앞에'(*, 프로 프로소푸 수,)란 말이 히브리어 원어에는 ‘내 앞에'(*, 레파나이)로 되어 있고 70인역에도 ‘내 앞에'(*, 프로 프로소푸 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주님께서 이처럼 ‘내 앞에’란 말을 ‘네 앞에’로 바꾸어 사용하신 이유는 자신이 친히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자기 계시(self-revelation)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하나님 앞에’를 ‘메시야 앞에’로 해석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메시야이신 자신이 일체(一體)인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요한은 메시야의 직접적인 선구자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해야 할 사람이었다. 원문에는 목적을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가 쓰여서 사자의 역할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함으로 메시야의 출현을 명백히 선포하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회개를 외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3:7-14;마 3:2). 또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겸손히 말하면서 구속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다.

󰃨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 말라기의 예언이 세례 요한과 메시야이신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언하는 말씀이다.

레고 휘민 메이존 엔 겐네토이스 귀나이콘 요안누 우데이스 에스틴 호 데 미크로테로스 엔 테 바실레이아 투 데우 메이존 아우투 에스틴

개역개정,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새번역,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 ㉥또는 ‘침례자’

우리말성경,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가톨릭성경,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영어NIV,28 I tell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is no one greater than John; yet the on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God is greater than he.”

영어NASB,28 “I say to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is no one greater than John; yet h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God is greater than he.”

영어MSG,28 “Let me lay it out for you as plainly as I can: No one in history surpasses John the Baptizer, but in the kingdom he prepared you for, the lowliest person is ahead of him.

영어NRSV,28 I tell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no one is greater than John; yet the least in the kingdom of God is greater than he.”

헬라어신약Stephanos,28 λεγω γαρ υμιν μειζων εν γεννητοις γυναικων προφητης ιωαννου του βαπτιστου ουδεις εστιν ο δε μικροτερος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μειζων αυτου εστιν

라틴어Vulgate,28 dico enim vobis maior inter natos mulierum propheta Iohanne Baptista nemo est qui autem minor est in regno Dei maior est illo

히브리어Modern,28 כי אמר אני לכם אין איש בילודי אשה גדול מיוחנן המטביל אך הקטן במלכות האלהים גדול הוא ממנו׃

성 경: [눅7:2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여자가 낳은 자 중에 – 인간의 죄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강조한다(시51:5). 요한은 비록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볼 때 그만큼 위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 하나님의 나라에서는…저보다 크니라 –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결코 요한의 위대함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비록 위대한 선지자보다도 큰 자라 하여도 그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비교할 때는 상대적로 작은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증거하는 등 사역면에서 구약에 속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탁월하였지만,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여전히 옛 언약이 속한 옛 세대(the Old Dispensation)의 사람이었고 신약의 예비 단계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신약에 속한 성도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 신약의 성도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이해하며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되어 기록된 계시의 완결서를 늘 묵상할 수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성도의 심령속에 내주하사 영적 안목을 뜨게 하며 삶의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딤후 1:14). 한편 이 구절을 하나님 나라에서 요한을 배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면 13:28(마 8:11)의 내용과 상반된다. 따라서 예수의 의도는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요한의 활동 이후에 온 시대의 변화에 중요성을 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카이 파스 호 라오스 아쿠사스 카이 호이 텔로나이 에디카이오산 톤 데노 밮티스덴테스 토 밮티스마 요안누

개역개정,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새번역,29 (모든 백성과 심지어는 세리들까지도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옳으심을 드러냈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29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과 심지어는 세리들도 요한의 세례를 받았고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임을 드러냈습니다.

가톨릭성경,29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침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영어NIV,29 (All the people, even the tax collectors, when they heard Jesus’ words, acknowledged that God’s way was right, because they had been baptized by John.

영어NASB,29 When all the people and the tax collectors heard this, they acknowledged God’s justice, having been baptized with the baptism of John.

영어MSG,29 The ordinary and disreputable people who heard John, by being baptized by him into the kingdom, are the clearest evidence;

영어NRSV,29 (And all the people who heard this, including the tax collectors, acknowledged the justice of God, because they had been baptized with John’s baptism.

헬라어신약Stephanos,29 και πας ο λαος ακουσας και οι τελωναι εδικαιωσαν τον θεον βαπτισθεντες το βαπτισμα ιωαννου

라틴어Vulgate,29 et omnis populus audiens et publicani iustificaverunt Deum baptizati baptismo Iohannis

히브리어Modern,29 וכל העם והמכסים כשמעם הצדיקו את האלהים ויטבלו בטבילת יוחנן׃

성 경: [눅7:2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 모든 백성들이란 말 안에는 당연히 세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리들이 따로 구별되어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그 당시 일종의 사회적 계급의 한 부류로서 마치 별개의 족속처럼 취급될 정도로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미움과 배척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12,13;5:27-30). 이들이 미움과 배척을 받은 것은 로마 제국의 앞잡이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두워들인 세금을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여분의 세금은 자기들의 몫으로 착복하였다. 랍비 문헌에는 이 세리들이 강도와 동일하게 분류되어 나타나고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죄인들’로 언급된다(5:30;7:34;마 9:10;11:19;막 2:15). 이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로마 압제자들에게 아부하여 자기 동족을 희생시켜 치부(致富)하고자 하는 변절자인 것으로 생각했다.

󰃨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 3:12 주석 참조. 누가가 ‘요한의 세례’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통용된 관례에 의한 표현법이다(20:4;행 18:25;19:3). 요한의 세례는 두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1)메시야적 내지는 종말론적 예비 교육의 측면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장차 메시야를 통해 시행될 성령 세례의 예비 단계로서 물 세례를 시행하였다(마 3:11). (2)세례 받는자의 생활 변화의 측면이다. 당시 대부분 유대인들은 단지 혈통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자긍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들이 메시야를 통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와 구체적 삶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베풀었다(마 3:7-9).

󰃨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 이 말의 의미는 무리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달아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라고 선언했다는 뜻이다.

호이 데 파리사이오이 카이 호이 노미코이 텐 불렌 투 데우 에데테산 에이스 헤아우투스 메 밮티스덴테스 휲 아우투

개역개정,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새번역,30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음으로써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물리쳤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30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고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물리쳤습니다.)

가톨릭성경,30 그러나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영어NIV,30 But the Pharisees and experts in the law rejected God’s purpose for themselves, because they had not been baptized by John.)

영어NASB,30 But the Pharisees and the lawyers rejected God’s purpose for themselves, not having been baptized by John.

영어MSG,30 the Pharisees and religious officials would have nothing to do with such a baptism, wouldn’t think of giving up their place in line to their inferiors.

영어NRSV,30 But by refusing to be baptized by him, the Pharisees and the lawyers rejected God’s purpose for themselves.)

헬라어신약Stephanos,30 οι δε φαρισαιοι και οι νομικοι την βουλην του θεου ηθετησαν εις εαυτους μη βαπτισθεντες υπ αυτου

라틴어Vulgate,30 Pharisaei autem et legis periti consilium Dei spreverunt in semet ipsos non baptizati ab eo

히브리어Modern,30 אך הפרושים ובעלי התורה נאצו את עצת האלהים על נפשם ולא נטבלו על ידו׃

성 경: [눅7:3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율법사 – ‘율법사’에 해당하는 ‘노미코스'(*)는 ‘서기관'(*, 그람마튜스)과 동의어로 쓰였다(5:21;10:25;11:45,46,52,53;14:3;마22:35). 이 말은 마 22:35를 제외하고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말인데 이는 누가가 ‘그람마튜스’라는 말보다 ‘노미코스’라는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쉽게 이해하리라는 생각에서 사용했을 것이다.

󰃨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 예수의 말씀에 대한 상반된 두 반응이 나타난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있다고 자랑하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반면, 세리들과 같이 외견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율법사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 연구에 헌신한 사람들이어서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나 그 속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메시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율법의 조항들 자체였기 때문이다.

티니 운 호모이오소 투스 안드로푸스 테스 게네아스 타우테스 카이 티니 에이신 호모이오이

개역개정,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새번역,31 “그러니, 이 세대 사람을 무엇에 비길까?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우리말성경,31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들은 무엇과 같을까?

가톨릭성경,31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영어NIV,31 “To what, then, can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영어NASB,31 “To what then shall I compare the men of this generation, and what are they like?

영어MSG,31 “How can I account for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영어NRSV,31 “To what then wi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and what are they like?

헬라어신약Stephanos,31 ειπεν δε ο κυριος τινι ουν ομοιωσω τους ανθρωπους της γενεας ταυτης και τινι εισιν ομοιοι

라틴어Vulgate,31 cui ergo similes dicam homines generationis huius et cui similes sunt

히브리어Modern,31 ויאמר האדון עתה אל מי אדמה את אנשי הדור הזה ואל מי הם דמים׃

성 경: [눅7:3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이 세대의 사람 – 류만(Luhrman)에 의하면 ‘세대'(*, 게네아)란 이스라엘 전체보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세대’라는 말 속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을지언정 그 말이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절한 당시의 세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마 11:20-24;13:53-58 참조). 이 말 속에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 때문에 받게 될 하나님의 진노가 암시되어 있다.

호모이오이 에이신 파이디오이스 토이스 엔 아고라 카데메노이스 카이 프로스포누신 알렐로이스 하 레게이 에윌레사멘 휘민 카이 우크 오르케사스데 에드레네사멘 카이 우크 에클라우사테

개역개정,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새번역,32 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

우리말성경,32 그들은 시장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너희를 위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가톨릭성경,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영어NIV,32 They are like children sitting in the marketplace and calling out to each 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and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and you did not cry.’

영어NASB,32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 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and they say, ‘We played the flute for you, and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and you did not weep.’

영어MSG,32 They’re like spoiled children complaining to their parents, ‘We wanted to skip rope and you were always too tired; we wanted to talk but you were always too busy.’

영어NRSV,32 They are like children sitting in the marketplace and calling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and you did not dance; we wailed, and you did not weep.’

헬라어신약Stephanos,32 ομοιοι εισιν παιδιοις τοις εν αγορα καθημενοις και προσφωνουσιν αλληλοις και λεγουσιν ηυλησαμεν υμιν και ουκ ωρχησασθε εθρηνησαμεν υμιν και ουκ εκλαυσατε

라틴어Vulgate,32 similes sunt pueris sedentibus in foro et loquentibus ad invicem et dicentibus cantavimus vobis tibiis et non saltastis lamentavimus et non plorastis

히브리어Modern,32 דמים הם לילדים הישבים בשוק וקראים זה אל זה ואמרים חללנו לכם בחלילים ולא רקדתם קוננו לכם קינה ולא בכיתם׃

성 경: [눅7:3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춤추지 않고…울지 아니하였다 – 예수께서는 아무런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평일날 장터에서 놀이를 하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 대해 묘사하신다. 아이들은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져 결혼식 놀이에서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또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한 편이 장례 흉내를 내어 슬피 울며 곡을 하면 다른 편도 그 곡(哭) 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가슴을 치게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놀이가 잘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쪽 아이들이 상대편의 행동을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이 아이들은 불평했고 서로가 서로를 나무랬다. 이처럼 서로 뜻을 같이 하여 그 놀이에 흥을 돋우면서 재미를 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는 아이들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도 자기 의(義)를 내세우며 세례 요한과 예수를 경멸하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공의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세리나 기타 죄인 취급받는 자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우셨다는 이유로 예수를 죄인 중의 하나로 몰아붙였다.

엘렐뤼덴 가르 요안네스 호 밮티스테스 메 에스디온 아르톤 메테 피논 오이논 카이 레게테 다이모니온 에케이

개역개정,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새번역,33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너희가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 ㉨또는 ‘침례자’

우리말성경,33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자 너희는 ‘저 사람이 귀신 들렸다’라고 하며

가톨릭성경,33 사실 침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영어NIV,33 For John the Baptist came neither eating bread nor drinking wine, and you say, ‘He has a demon.’

영어NASB,33 “For John the Baptist has come eating no bread and drinking no wine, and you say, ‘He has a demon!’

영어MSG,33 John the Baptizer came fasting and you called him crazy.

영어NRSV,33 For John the Baptist has come eating no bread and drinking no wine, and you say, ‘He has a demon’;

헬라어신약Stephanos,33 εληλυθεν γαρ ιωαννης ο βαπτιστης μητε αρτον εσθιων μητε οινον πινων και λεγετε δαιμονιον εχει

라틴어Vulgate,33 venit enim Iohannes Baptista neque manducans panem neque bibens vinum et dicitis daemonium habet

히브리어Modern,33 כי בא יוחנן המטביל לחם לא אכל ויין לא שתה ואמרתם שד בו׃

성 경: [눅7:3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원문에는 ‘왜냐하면'(*, 가르)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은 앞절에서 말씀하신 아이들의 비유가 이 세대를 적절히 묘사하는 이유를 제시해 준다. 예수께서는 이 구절과 다음 절을 통해서 요한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아이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 떡도 먹지…마시지 아니하매 – 마태는 떡과 포도주를 말하지 않는다(마 11:18).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떡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고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었다(눅1:15;막 1:6). 또한 그는 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나실인처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민 6:2-4) 광야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였다.

󰃨 너희 말이…들렸다 하더니 – 유대인들은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에 대해서 비난했다. 왜냐하면 요한이 자신들의 사악한 잔치와 사치한 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책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요한을 가리켜 귀신들렸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앞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장터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따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싸움에까지 이르는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도 그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엘렐뤼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에스디온 카이 피논 카이 레게테 이두 안드로포스 파고스 카이 오이노포테스 필로스 텔로논 카이 하마르톨론

개역개정,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새번역,34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너희가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우리말성경,34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 너희가 말하기를 ‘보라. 저 사람은 먹보에다 술꾼으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말한다.

가톨릭성경,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영어NIV,34 The Son of Man came eating and drinking, and you say, ‘Here is a glutto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

영어NASB,34 “The Son of Man has come eating and drinking, and you say, ‘Behold, a gluttonous ma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영어MSG,34 The Son of Man came feasting and you called him a lush.

영어NRSV,34 the Son of Man has come eating and drinking, and you say, ‘Look, a glutton and a drunkar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헬라어신약Stephanos,34 εληλυθεν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εσθιων και πινων και λεγετε ιδου ανθρωπος φαγος και οινοποτης τελωνων φιλος και αμαρτωλων

라틴어Vulgate,34 venit Filius hominis manducans et bibens et dicitis ecce homo devorator et bibens vinum amicus publicanorum et peccatorum

히브리어Modern,34 ובא בן האדם והוא אכל ושתה ואמרתם הנה זולל וסבא ורע למוכסים ולחטאים׃

성 경: [눅7:3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인자는…먹고 마시매 – 예수께서는 요한이 하는 것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자유로이 교제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없다'(막2:19)고 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어떤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가운데서 진리의 본질과 참된 생명의 도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예수의 사역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세리들과도 상종(相從)하신 것을 보면 예수는 인위적인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온정을 베푸셨다(5:27-32).

󰃨 보라 먹기를…즐기는 사람이요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처럼 율법적인 금식을 하지 않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폭언을 일삼았다. 요한에 대해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 하여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오히려 이제는 예수를 향하여 그 반대 이유를 들어 비난한다. 그들이 비난한 대로 만일 예수께서 탐식가요 술주정꾼이셨다면 율법의 기준대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의 항목에 속했다(신 21:20,21).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은 곧 예수를 정죄할뿐만 아니라 그를 이단자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I. Howard Marshall).

󰃨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 이러한 비난은 특별히 세리 마태의 집에서 베푼 잔치 때에 예수께서 참여하신 사실과 관련된다(5:27-32). 예수는 세리 마태의 경우 외에도 사회적, 종교적으로 소외당한 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관심은 특히 잃은 양(15:1-7), 잃은 드라크마(15:8-10), 돌아온 탕자(15:11-32)등의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카이 에디카이오데 헤 소피아 아포 판톤 톤 테크논 아우테스

개역개정,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새번역,35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냈다.” / ㉩또는 ‘하나님의 지혜’ 또는 ‘하나님’

우리말성경,35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인증하는 법이다.”

가톨릭성경,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영어NIV,35 But wisdom is proved right by all her children.”

영어NASB,35 “Yet wisdom is vindicated by all her children.”

영어MSG,35 Opinion polls don’t count for much, do they? The proof of the pudding is in the eating.”

영어NRSV,35 Nevertheless, wisdom is vindicated by all her children.”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εδικαιωθη η σοφια απο των τεκνων αυτης παντων

라틴어Vulgate,35 et iustificata est sapientia ab omnibus filiis suis

히브리어Modern,35 ותצדק החכמה על ידי כל בניה׃

성 경: [눅7:3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지혜 – 구약성경에서는 곧잘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표현한다. 특히 잠언의 경우는 지혜에 관해 많은 언급을 하며 특별한 강조를 하고 있다(잠 1:20;8:22-31). 그리고 특별히 사 9:6과 11:2는 메시야를 지혜와 긴밀하게 연관시킨다. 여기서 ‘지혜’란 곧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고전 1:23,30). 성경은 지혜의 출처를 하나님께로 부터 찾는다. 욥기의 저자는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욥 28:12)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갈파하였다(잠 1:7).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조언을 구할 때 그간구에 대한 응답으로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며, 이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수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특별히 성령과 관계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게되는 것으로 묘사된다(행 6:3;고전 2:6;12:8;엡 1:17;골 1:9;3:16;약1:5;3:15-17).

󰃨 자기의…옳다 함을 얻느니라 – 마태는 ‘그 행한 일로…’라고 묘사했다(마11:19). 여기서 ‘자녀’란 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롬 9:7,8). 그리고 ‘옳다 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카이오데'(*)는 ‘바르게 선포되다’, ‘옳음이 밝혀지다’는 뜻이며 원문상으로 이 말은 문두에 나와서 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의 의미는 쉽게 설명하면 이러하다. 그리스도와그 복음이 대적들에 의해 곡해되고 비난 받으며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핍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씀대로 살려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큰위로와 기쁨이 되며 그들에 의해 세계 만방에 선포되고 옳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에로타 데 티스 아우톤 톤 파리사이온 히나 파게 멭 아우투 카이 에이셀돈 에이스 톤 오이콘 투 파리사이우 카테클리데

개역개정,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새번역,36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청하여,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상에 앉으셨다.

우리말성경,36 한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 식탁에 기대어 앉으셨습니다.

가톨릭성경,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영어NIV,36 Now one of the Pharisees invited Jesus to have dinner with him, so he went to the Pharisee’s house and reclined at the table.

영어NASB,36 Now one of the Pharisees was requesting Him to dine with him, and He entered the Pharisee’s house and reclined at the table.

영어MSG,36 One of the Pharisees asked him over for a meal. He went to the Pharisee’s house and sat down at the dinner table.

영어NRSV,36 One of the Pharisees asked Jesus to eat with him, and he went into the Pharisee’s house and took his place at the table.

헬라어신약Stephanos,36 ηρωτα δε τις αυτον των φαρισαιων ινα φαγη μετ αυτου και εισελθων εις την οικιαν του φαρισαιου ανεκλιθη

라틴어Vulgate,36 rogabat autem illum quidam de Pharisaeis ut manducaret cum illo et ingressus domum Pharisaei discubuit

히브리어Modern,36 ויבקש ממנו אחד מן הפרושים לאכל אתו לחם ויבא אל בית הפרוש ויסב׃

성 경: [눅7:3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한 바리새인이 –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적대시하던 터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식사를 초대하였던 이례적(異例的)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40절)이었으나 그의 신상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유대에서의 ‘시몬’은 매우 보편적인 이름이었다.

󰃨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대한 일은 일견 용기있는 태도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안식일 규례와 같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초대는 하였으나 냉랭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였다(44-46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한 이유가 예수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은 아닌듯하다. 그가 예수를 믿지 않으며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39절)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 바리새인은 병자를고치기도하며 또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몰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또 그에게 ‘큰 선지자’적인(17절) 능력이 있는가 알아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아울러 군중들에게 추앙받는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함으로 자신도 추앙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예수께 대해 고소할 빙거(憑據)를 찾기 위해 초대했으리라는 추측도 배제할 수 없다. 누가는 이 구절 외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초대한 예를 두 곳에서 들고 있다(11:37;14:1).

카이 이두 귀네 헤티스 엔 엔 테 폴레이 하마르톨로스 카이 에피그누사 호티 카타케이타이 엔 테 오이키아 투 파리사이우 코미사사 알라바스트론 뮈루

개역개정,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새번역,37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숫고 계신 것을 알고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우리말성경,37 그 마을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는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

가톨릭성경,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영어NIV,37 When a woman who had lived a sinful life in that town learned that Jesus was eating at the Pharisee’s house, she brought an alabaster jar of perfume,

영어NASB,37 And there was a woman in the city who was a sinner; and when she learned that He was reclining at the table in the Pharisee’s house, she brought an alabaster vial of perfume,

영어MSG,37 Just then a woman of the village, the town harlot, having learned that Jesus was a guest in the home of the Pharisee, came with a bottle of very expensive perfume

영어NRSV,37 And a woman in the city, who was a sinner, having learned that he was eating in the Pharisee’s house, brought an alabaster jar of ointment.

헬라어신약Stephanos,37 και ιδου γυνη εν τη πολει ητις ην αμαρτωλος επιγνουσα οτι ανακειται εν τη οικια του φαρισαιου κομισασα αλαβαστρον μυρου

라틴어Vulgate,37 et ecce mulier quae erat in civitate peccatrix ut cognovit quod accubuit in domo Pharisaei adtulit alabastrum unguenti

히브리어Modern,37 והנה אשה אחת בעיר והיא חטאת שמעה כי הוא מסב בית הפרוש ותבא פך שמן המור׃

성 경: [눅7:3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죄인인 한 여자 – 이 여자를 창기(娼妓)로 보는 견해(Meyer, Bruce)도 있으나 성경에서는 그녀가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하여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아마도 이 여인은 한 때 나쁜 길에 빠졌었고 그녀의 타락이 공공연히 알려지게 되어 그 이후로 그녀는 죄인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비록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들어온 예수의 소문에 희망을 갖고 그를 찾게 되었다. 그가 들었던 소문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매우 귀중한 향유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 향유담은 옥합 – 이 옥합은 향유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둥근 그릇으로 손잡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릇 속에 든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부분을 깨뜨려야만 했다. 이러한 옥합은 매우 값진 품목이었다고 하며(Pliney) 그 속에 든 향유도 값진 것이었다. 이런 류의 고급 향류나 값비싼 화장수는 보통 로마의 부유한 여인들이 주로 사용했으며 구하기도 어렵고 매우 귀했기 때문에 매우 가치있는 재산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향유는 그 여인이 특별한 목적으로 구입하였을 것이다. 한편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적선을 구하는 거지들은 초청을 받지 않고도 잔치에 들어가 음식 부스러기들을 얻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여인도 그러한 비천한 무리들 틈에 섞여 있었을 것이다.

카이 스타사 오피소 파라 투스 포다스 아우투 클라이우사 토이스 다크뤼신 에릌사토 브레케인 투스 포다스 아우투 카이 타이스 드맄신 테스 케팔레스 아우테스 엨세마쎈 카이 카테필레이 투스 포다스 아우투 카이 엘레이펜 토 뮈로

개역개정,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새번역,38 예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우리말성경,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그 발에 자신의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었습니다.

가톨릭성경,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영어NIV,38 and as she stood behind him at his feet weeping, she began to wet his feet with her tears. Then she wiped them with her hair, kissed them and poured perfume on them.

영어NASB,38 and standing behind Him at His feet, weeping, she began to wet His feet with her tears, and kept wiping them with the hair of her head, and kissing His feet and anointing them with the perfume.

영어MSG,38 and stood at his feet, weeping, raining tears on his feet. Letting down her hair, she dried his feet, kissed them, and anointed them with the perfume.

영어NRSV,38 She stood behind him at his feet, weeping, and began to bathe his feet with her tears and to dry them with her hair. Then she continued kissing his feet and anointing them with the ointment.

헬라어신약Stephanos,38 και στασα παρα τους ποδας αυτου οπισω κλαιουσα ηρξατο βρεχειν τους ποδας αυτου τοις δακρυσιν και ταις θριξιν της κεφαλης αυτης εξεμασσεν και κατεφιλει τους ποδας αυτου και ηλειφεν τω μυρω

라틴어Vulgate,38 et stans retro secus pedes eius lacrimis coepit rigare pedes eius et capillis capitis sui tergebat et osculabatur pedes eius et unguento unguebat

히브리어Modern,38 ותעמד לרגליו מאחריו ותבך ותחל להרטיב את רגליו בדמעות ותנגב אתן בשערות ראשה ותשק את רגליו ותמשח אתן בשמן׃

성 경: [눅7:3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 그녀는 예수의 발 곁에 서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는 그녀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자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아울러 예수의 인격 자체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자기 머리털로 씻고 – 여인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신 예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께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를 풀어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았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일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수치를 무릅쓰고 감격과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여인의 왕관이라고 할 머리털로써 예수의 먼지 묻은 발을 닦는모습에서 그녀의 철저한 겸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예수를 초대해 놓고서 발 씻을 물조차 제대로 준비해 주지 않은 바리새인의 뻔뻔함과 대조된다.

󰃨 그 발에 입맞추고 – 이는 가장 헌신적인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동이며 특히 헬라어 원문상 ‘카테필레이’라는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는데(*, ‘입맞추고’) 이것은 반복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인바, 예수께서 들어 오신 후 계속해서 예수의 입을 맞췄다는 의미이다(Robertson).

󰃨 향유를 부으니 – 대체로 존경의 표시로 향유를 부을 때는 머리에 붓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 여인은 이례적으로 발에 부었다. 그녀는 예수의 발에 접근하는 것조차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바로 눈물의 회개와 벅찬 감격의 봉헌(奉獻)이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신앙의 행동을 몇가지 살필 수가 있다. (1)복음을 듣고 알아야 한다(37절, 알고). (2)예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한다(예수의 뒤로…서서 울며). (3)전폭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자기 머리털로 씻고). (4)철저하게 순종하여야 한다(그발에 입맞추고). (5)최선의 봉사를 해야 한다(향유를 부으니). 이러한 신앙의 행동이 있을 때 우리는 늘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 수 있다.

이돈 데 호 파리사이오스 호 칼레사스 아우톤 에이펜 엔 헤아우토 레곤 후토스 에이 엔 프로페테스 에기노스켄 안 티스 카이 포타페 헤 귀네 헤티스 헾테타이 아우투 호티 하마르톨로스 에스틴

개역개정,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새번역,39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우리말성경,39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속으로 말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며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저 여자는 죄인이 아닌가!’

가톨릭성경,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영어NIV,39 When the Pharisee who had invited him saw this, he said to himself,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o is touching him and what kind of woman she is–that she is a sinner.”

영어NASB,39 Now when the Pharisee who had invited Him saw this, he said to himself,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o and what sort of person this woman is who is touching Him, that she is a sinner.”

영어MSG,39 When the Pharisee who had invited him saw this, he said to himself, “If this man was the prophet I thought he was, he would have known what kind of woman this is who is falling all over him.”

영어NRSV,39 Now when the Pharisee who had invited him saw it, he said to himself,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have known who and what kind of woman this is who is touching him–that she is a sinner.”

헬라어신약Stephanos,39 ιδων δε ο φαρισαιος ο καλεσας αυτον ειπεν εν εαυτω λεγων ουτος ει ην προφητης εγινωσκεν αν τις και ποταπη η γυνη ητις απτεται αυτου οτι αμαρτωλος εστιν

라틴어Vulgate,39 videns autem Pharisaeus qui vocaverat eum ait intra se dicens hic si esset propheta sciret utique quae et qualis mulier quae tangit eum quia peccatrix est

히브리어Modern,39 וירא הפרוש הקרא אתו ויאמר בלבו אלו היה זה נביא כי עתה ידע ידע מי היא זאת ואי זו היא הנגעת בו כי אשה חטאת היא׃

성 경: [눅7:3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 시몬은 여인의 도유(塗油) 행동을 보고서 한편으로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 또 한편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던 것같다. 그가 못마땅한 투로 혼자 중얼거린 것은 죄인인 한 여인이 식탁으로 접근한 사실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은근히 기뻐한 것은 예수께 대한 그의 의혹을 정당화할 만한 단서를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라면 당연히 발 앞에 무릎 꿇은 여인이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녀를 물리쳤을 것이었다. 따라서 죄인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몸에 손대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는 바리새인의 눈에 똑같이 천박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 바리새인은 과연 예수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선지자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지하였다(5:32). 한편 원문의 가정법 형식은 사실이 아님을 단정짓는 표현이다.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예수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톤 시몬 에코 소이 티 에이페인 호 데 디다스칼레 에이페 페신

개역개정,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새번역,4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말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말성경,4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가톨릭성경,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영어NIV,40 Jesus answered him, “Simon, I have something to tell you.” “Tell me, teacher,” he said.

영어NASB,40 And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Simon, I have something to say to you.” And he replied, “Say it, Teacher.”

영어MSG,40 Jesus said to him, “Simon, I have something to tell you.” “Oh? Tell me.”

영어NRSV,40 Jesus spoke up and said to him, “Simon, I have something to say to you.” “Teacher,” he replied, “Speak.”

헬라어신약Stephanos,40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ο ιησους ειπεν προς αυτον σιμων εχω σοι τι ειπειν ο δε φησιν διδασκαλε ειπε

라틴어Vulgate,40 et respondens Iesus dixit ad illum Simon habeo tibi aliquid dicere at ille ait magister dic

히브리어Modern,40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ו שמעון דבר לי אליך ויאמר רבי דבר׃

성 경: [눅7:4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바리새인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중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이미 그 생각을 알고 계셨다. 바리새인은 마음 속에 예수께서는 선지자도 아니며 그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도 모르는 형편없은 사람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는 이미 그 여인의 영적 상태를 간파하여 그녀에게 구원을 베푸시고(50절)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시고 그에게 논박하신다. 이러한 예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은 그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증거의 일례가 된다.

󰃨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 여기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교만하고 사악함을 실책하시는 투로 말씀하시지만 그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신다.

뒤오 크레오페일레타이 에산 다니스테 티니 호 헤이스 오페일렌 데나리아 펜타코시아 호 데 헤테로스 펜테콘타

개역개정,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새번역,41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우리말성경,41 “어떤 채권자에게 빚을 진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또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을 빚졌다.

가톨릭성경,41 “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영어NIV,41 “Two men owed money to a certain moneylender. One owed him five hundred denarii, and the other fifty.

영어NASB,41 “A moneylender had two debtors: one owed five hundred denarii, and the other fifty.

영어MSG,41 “Two men were in debt to a banker. One owed five hundred silver pieces, the other fifty.

영어NRSV,41 “A certain creditor had two debtors; one owed five hundred denarii, and the other fifty.

헬라어신약Stephanos,41 δυο χρεωφειλεται ησαν δανειστη τινι ο εις ωφειλεν δηναρια πεντακοσια ο δε ετερος πεντηκοντα

라틴어Vulgate,41 duo debitores erant cuidam feneratori unus debebat denarios quingentos alius quinquaginta

히브리어Modern,41 שני חיבים היו לנשה אחד האחד חיב לו דינרים חמש מאות והשני דינרים חמשים׃

성 경: [눅7:4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빚진 자가 둘이 있어 – 예수께서는 종종 하나님께 빚진 자들에 관해서 언급하셨다(17:10;마 6:12;18:23-35). 그런데 마 6:12의 경우에는 죄가 구체적으로 빚과 동일시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빚의 탕감 여부가 죄 용서 문제와 동일시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빚의 예화를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진 인간의 빚은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할지라도 그 빚을 상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탕감(蕩減)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상응되는 의무를 부과해 주며 이 일을 행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 내용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마 6:12).

󰃨 데나리온 –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오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명이 오백 일을 벌어야 하는 돈이었다.

메 에콘톤 아우톤 아포두나이 암포테로이스 에카리사토 티스 운 아우톤 플레이온 아가페세이 아우톤

개역개정,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새번역,42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없애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우리말성경,42 두 사람 다 빚 갚을 돈이 없어 채권자가 두 사람의 빚을 모두 없애 주었다. 그러면 두 사람 중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가톨릭성경,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영어NIV,42 Neither of them had the money to pay him back, so he canceled the debts of both. Now which of them will love him more?”

영어NASB,42 “When they were unable to repay, he graciously forgave them both. So which of them will love him more?”

영어MSG,42 Neither of them could pay up, and so the banker canceled both debts. Which of the two would be more grateful?”

영어NRSV,42 When they could not pay, he canceled the debts for both of them. Now which of them will love him more?”

헬라어신약Stephanos,42 μη εχοντων δε αυτων αποδουναι αμφοτεροις εχαρισατο τις ουν αυτων ειπε πλειον αυτον αγαπησει

라틴어Vulgate,42 non habentibus illis unde redderent donavit utrisque quis ergo eum plus diliget

히브리어Modern,42 ויהי באשר לא השיגה ידם לשלם וישמט את שניהם ועתה אמר נא מי משניהם ירבה לאהבה אתו׃

성 경: [눅7:4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 ‘탕감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카리사토'(*)는 ‘무효로 주다’, ‘취소하다’는 뜻의 ‘카리조마이’의 부정 과거형이다. 이는 탕감의 행위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이다. 따라서 본 비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값없이 주어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그 은혜를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떠한 노력과 선행으로써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역시 값없이 만드는 것이다. 성도의 선행은 거저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이른바 성령의 열매이지(엡 2:8,9) 구원의 조건인 것은 아니다.

아포크리데이스 시몬 에이펜 휘폴람바노 호티 호 토 플레이온 에카리사토 호 데 에이펜 아우토 오르도스 에크리나스

개역개정,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새번역,43 시몬이 대답하였다. “더 많이 빚을 없애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판단이 옳다.”

우리말성경,43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더 많은 빚을 면제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판단이 옳다.”

가톨릭성경,43 시몬이 “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영어NIV,43 Simon replied, “I suppose the one who had the bigger debt canceled.” “You have judged correctly,” Jesus said.

영어NASB,43 Simon answered and said, “I suppose the one whom he forgave more.”And He said to him, “You have judged correctly.”

영어MSG,43 Simon answered, “I suppose the one who was forgiven the most.” “That’s right,” said Jesus.

영어NRSV,43 Simon answered, “I suppose the one for whom he canceled the greater debt.” And Jesus said to him, “You have judged rightly.”

헬라어신약Stephanos,43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σιμων ειπεν υπολαμβανω οτι ω το πλειον εχαρισατο ο δε ειπεν αυτω ορθως εκρινας

라틴어Vulgate,43 respondens Simon dixit aestimo quia is cui plus donavit at ille dixit ei recte iudicasti

히브리어Modern,43 ויען שמעון ויאמר אחשב כי האיש ההוא אשר הרבה להשמיט לו ויאמר אליו כן שפטת׃

성 경: [눅7:4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시몬이 대답하여…받은 자니이다 – 예수의 질문은 평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몬은 매우 주의깊게 대답했다. 아마 그는 예수의 놀라운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자신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목전에 일어난 상황으로 말미암은 불쾌감과 흉한 속마음을 표출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 네 판단이 옳다 – 예수는 시몬의 악한 마음을 정면으로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판단을 ‘옳다’고 하신다. 이는 시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무지를 스스로 깨닫고 부끄러운 상황을 직시하게끔 하시기 위함이다.

카이 스트라페이스 프로스 텐 귀나이카 토 시모니 에페 블레페이스 타우텐 텐 귀나이카 에이셀돈 수 에이스 텐 오이키안 휘도르 모이 에피 포다스 우크 에도카스 하우테 데 토이스 다크뤼신 에브렠센 무 투스 포다스 카이 타이스 드맄신 아우테스 엨세맠센

개역개정,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새번역,44 그런 다음에, 그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우리말성경,44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돌아보고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보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가톨릭성경,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영어NIV,44 Then he turned toward the woman and said to Simon, “Do you see this woman? I came into your house. You did not give me any water for my feet, but she wet my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영어NASB,44 Turning toward the woman, He said to Simon, “Do you see this woman? I entered your house; you gave Me no water for My feet, but she has wet My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영어MSG,44 Then turning to the woman, but speaking to Simon, he said, “Do you see this woman? I came to your home; you provided no water for my feet, but she rained tears on my feet and dried them with her hair.

영어NRSV,44 Then turning toward the woman, he said to Simon, “Do you see this woman? I entered your house; you gave me no water for my feet, but she has bathed my feet with her tears and dried them with her hair.

헬라어신약Stephanos,44 και στραφεις προς την γυναικα τω σιμωνι εφη βλεπεις ταυτην την γυναικα εισηλθον σου εις την οικιαν υδωρ επι τους ποδας μου ουκ εδωκας αυτη δε τοις δακρυσιν εβρεξεν μου τους ποδας και ταις θριξιν της κεφαλης αυτης εξεμαξεν

라틴어Vulgate,44 et conversus ad mulierem dixit Simoni vides hanc mulierem intravi in domum tuam aquam pedibus meis non dedisti haec autem lacrimis rigavit pedes meos et capillis suis tersit

히브리어Modern,44 ויפן אל האשה ויאמר אל שמעון הראית את האשה הזאת הנה באתי אל ביתך ומים על רגלי לא נתת והיא הרטיבה את רגלי בדמעות ותנגב בשערותיה׃

성 경: [눅7:4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먼저 그를 상석에 앉게 하고 손님의 손과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준비하는 것이 통례였다(창18:4;19:2;24:32;삿 19:21 참조). 그러나 시몬은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 그러한 통례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했다.

󰃨 이 여자는…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 예수께서는 시몬으로부터 아무런 대접도 받지 못하셨으나 여인으로부터는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받으셨다.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고는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의 헌신과 향유를 붓는 재물의 헌신은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 자세를 시사한다.

필레마 모이 우크 에도카스 하우테 데 앞 헤스 에이셀돈 우 디엘리펜 카타필루사 무 투스 포다스

개역개정,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새번역,45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말성경,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내 발에 입 맞추고 있다.

가톨릭성경,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영어NIV,45 You did not give me a kiss, but this woman, from the time I entered, has not stopped kissing my feet.

영어NASB,45 “You gave Me no kiss; but she, since the time I came in, has not ceased to kiss My feet.

영어MSG,45 You gave me no greeting, but from the time I arrived she hasn’t quit kissing my feet.

영어NRSV,45 You gave me no kiss, but from the time I came in she has not stopped kissing my feet.

헬라어신약Stephanos,45 φιλημα μοι ουκ εδωκας αυτη δε αφ ης εισηλθον ου διελιπεν καταφιλουσα μου τους ποδας

라틴어Vulgate,45 osculum mihi non dedisti haec autem ex quo intravit non cessavit osculari pedes meos

히브리어Modern,45 נשיקה לא נשקתני והיא מאז באתי לא חדלה מנשק את רגלי׃

성 경: [눅7:4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너는 내게…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 입맞춤은 자연스러운 영접 인사였다(창 29:13;45:15;삼하 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예수께 대해 이런 예를 갖추지 않았다. 예수는 주인으로부터 당연히 받게되어 있던 환영의 입맞춤도 받지못한 반면 여인으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셨다. ‘그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이 여인이 과거의 어두운 세월을 예수께 묵언(黙言)으로 토로하는 중에 복받치는 감격과 희열을 경험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엘라이오 텐 케팔렌 무 우크 엘레잎사스 하우테 데 뮈로 엘레잎센 투스 포다스 무

개역개정,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새번역,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우리말성경,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 발에 향유를 부어 주었다.

가톨릭성경,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영어NIV,46 You did not put oil on my head, but she has poured perfume on my feet.

영어NASB,46 “You did not anoint My head with oil, but she anointed My feet with perfume.

영어MSG,46 You provided nothing for freshening up, but she has soothed my feet with perfume.

영어NRSV,46 You did not anoint my head with oil, but she has anointed my feet with ointment.

헬라어신약Stephanos,46 ελαιω την κεφαλην μου ουκ ηλειψας αυτη δε μυρω ηλειψεν μου τους ποδας

라틴어Vulgate,46 oleo caput meum non unxisti haec autem unguento unxit pedes meos

히브리어Modern,46 בשמן לא משחת את ראשי והיא בשמן המור משחה את רגלי׃

성 경: [눅7:4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존경하는 손님에게만 특별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걸어다닌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감람유’는 다량 생산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누구나 손님에게는 머리에 이 기름을 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일조차도 행치 않았다. 반면에 그 여인은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다. ‘머리’와 ‘발’ 그리고 ‘감람유’와 ‘향유’는 극명한 대조를 더해준다.

후 카린 레고 소이 아페온타이 하이 하마르티아이 아우테스 하이 폴라이 호티 에가페센 폴뤼 호 데 올리곤 아피에타이 올리곤 아가파

개역개정,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새번역,4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우리말성경,4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이 여인이 나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가톨릭성경,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영어NIV,47 Therefore, I tell you,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has been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영어NASB,47 “For this reason I say to you, her sins, which are many, have been forgiven, 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is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영어MSG,47 Impressive, isn’t it? She was forgiven many, many sins, and so she is very, very grateful. If the forgiveness is minimal, the gratitude is minimal.”

영어NRSV,47 Therefore, I tell you, her sins, which were many, have been forgiven; hence she has shown great love. But the one to whom little is forgiven, loves little.”

헬라어신약Stephanos,47 ου χαριν λεγω σοι αφεωνται αι αμαρτιαι αυτης αι πολλαι οτι ηγαπησεν πολυ ω δε ολιγον αφιεται ολιγον αγαπα

라틴어Vulgate,47 propter quod dico tibi remittentur ei peccata multa quoniam dilexit multum cui autem minus dimittitur minus diligit

히브리어Modern,47 לכן אני אמר אליך נסלחו לה חטאתיה הרבות כי הרבה אהבה ואשר נסלח לו מעט הוא אהב מעט׃

성 경: [눅7:4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 여기서 ‘많은'(*, 폴라이)이란 강조하기 의한 말인데 ‘모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그녀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해도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사하여졌다'(*, 아페온타이)는 완료형 동사로 모든 죄를 사함받아 지금은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 이 구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카톨릭 학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사랑, 즉 여인이 행한 사랑의 행위 때문에 용서를 얻게 된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언뜻 보기에 여기 사용된 접속사 ‘호티'(*, ‘이는’)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해석으로부터 카톨릭의 공덕설(ontritio caritate formata) 같은 교리가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가지 이유때문에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접속사 ‘호티’는 그녀의 죄가 사해진 ‘이유’나 ‘근거’를 나타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체 비유와 50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녀의 죄가 참으로 용서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증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용서의 이유나 원인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줌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Lenski). 둘째, 성경 전체의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해석은 억측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죄사함을 얻을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오직 은혜로 내려진 것이다(엡2:8,9). 셋째, 그러한 해석은 예수께서 비유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요점(42절 참조)과 상치된다. 비유의 요점은 두 채무자가 그들의 빚을 은혜에 의하여 탕감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그녀의 사랑은 용서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Bengel,Meyer, Farrar, Ellicott 등)로 봐야 한다.

에이펜 데 아우테 아페온타이 수 하이 하마르티아이

개역개정,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새번역,48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우리말성경,48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들이 용서받았다.”

가톨릭성경,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영어NIV,48 Then Jesus said to her, “Your sins are forgiven.”

영어NASB,48 Then He said to her, “Your sins have been forgiven.”

영어MSG,48 Then he spoke to her: “I forgive your sins.”

영어NRSV,48 Then he said to her, “Your sins are forgiven.”

헬라어신약Stephanos,48 ειπεν δε αυτη αφεωνται σου αι αμαρτιαι

라틴어Vulgate,48 dixit autem ad illam remittuntur tibi peccata

히브리어Modern,48 ויאמר אליה נסלחו לך חטאתיך׃

성 경: [눅7:4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면서 처음에 말씀(47절)하셨던 것처럼 ‘저의 많은 죄’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죄’라고 하신다. 이것은 시몬이나 그녀가 모두 죄를 용서받아야 할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또한 그 여인이 사함받은 죄란 어떤 특별한 범죄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와 근원적인 죄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죄사함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하신 이유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음과 아울러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가진 선입견을 바꾸어 놓으시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녀를 소문난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 에릌산토 호이 쉬나나케이메노이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 티스 후토스 에스틴 호스 카이 하마르티아스 아피에신

개역개정,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새번역,49 그러자 상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리기를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도 용서하여 준다는 말인가?” 하였다.

우리말성경,49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죄까지도 용서한다는 것인가?”

가톨릭성경,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49 The other guests began to say among themselves, “Who is this who even forgives sins?”

영어NASB,49 Those who were reclining at the table with Him began to say to themselves, “Who is this man who even forgives sins?”

영어MSG,49 That set the dinner guests talking behind his back: “Who does he think he is, forgiving sins!”

영어NRSV,49 But those who were at the table with him began to say among themselves, “Who is this who even forgives sins?”

헬라어신약Stephanos,49 και ηρξαντο οι συνανακειμενοι λεγειν εν εαυτοις τις ουτος εστιν ος και αμαρτιας αφιησιν

라틴어Vulgate,49 et coeperunt qui simul accumbebant dicere intra se quis est hic qui etiam peccata dimittit

히브리어Modern,49 ויחלו המסבים עמו לאמר בלבם מי הוא זה אשר גם יסלח חטאים׃

성 경: [눅7:4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 앞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에도 이와 같은 반발이 있었다(5:21). 그때 바리새인들은 죄 사하는 권세로 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를 신성 모독자로 정죄하였다. 여기서도 이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죄사함을 얻은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하는 것을 보면서 ‘참람’하다는 생각을 나타내었다.

에이펜 데 프로스 텐 귀나이카 헤 피스티스 수 세소켄 세 포류우 에이스 에이레넨

개역개정,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새번역,5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우리말성경,50 예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안히 가거라.”

가톨릭성경,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영어NIV,50 Jesus said to the woman,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영어NASB,50 And He said to the woman,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영어MSG,50 He ignored them and said to the woman,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영어NRSV,50 And he said to the woman,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헬라어신약Stephanos,50 ειπεν δε προς την γυναικα η πιστις σου σεσωκεν σε πορευου εις ειρηνην

라틴어Vulgate,50 dixit autem ad mulierem fides tua te salvam fecit vade in pace

히브리어Modern,50 ויאמר אל האשה אמונתך הושיעה לך לכי לשלום׃

성 경: [눅7:5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이는 47절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 쐐기를 박는 구절로서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원하였다'(*, 세소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여인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미 구원에 이른 상태였던 것을 보여 준다. 다만 예수께서는 이미 확보된 구원을 공공연하게 선언하신 것이다(8:48 주석 참조).

󰃨 평안히 가라 – 이는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다. 이러한 유대인의 작별인사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대의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통적인 표현이나(삿18:6;삼상 1:17;삼하 15:9;왕상 22:17) 이 구절에서는 더욱 깊은 뜻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지금은 이 여인이 예수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확증받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멸시받던 죄인인 그녀에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명령형은 평안 상태의 항구성(恒久性),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누리게되는 영속적인 평안을 시사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를(사 9:6)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다 이러한 영속적이고도 참된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행 2:28;엡 6:23;몬 1:20 ;히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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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7장 주석

누가복음7장

7:1-10.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본문은 믿음에 대하여 교훈 해 주고 있다. 어떤 백부장이 있었다. 그에게 사랑하는 종이 있었는데 그 종이 지금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백부장은 종을 고쳐주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하였지만 종의 병은 점점 더 심각해 갔다. 이때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주님께 보내어 자기 종을 고쳐 주시기를 청했다. 주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시기 위하여 그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백부장은 또 다른 친구들을 보내어 주님께서 자기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므로 계신 곳에서 말씀해 주심으로 종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구했다. 주님은 이와 같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함께 있는 자들에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이 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는 말은 “이렇게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큰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주님께서 감동하실 수 있는 큰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 그 믿음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구원의 주님께 나가는 믿음이다. 우리가 주님께 나가고자 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장애들이 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가고 있을 때 그들 앞에 여러 장애물들이 있었던 것과 같다. 그들 앞에는 홍해, 광야, 아말렉, 요단 등이 가로 놓여 있었고 이런 것들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들이었다. 백부장은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주님께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인이다.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인이 이스라엘 사람을 찾아가 무엇을 부탁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로마인이 찾아오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비록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에 정치적으로 지배당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변함없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로서 자신들에게 로마는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이처럼 로마인과 이스라엘인 사이에는 넘지 못할 민족적 장벽이 놓여 있었다. 백부장은 이 장벽을 넘지 못하고는 주님께 나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 처음 주님께 나가고자 자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장애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삶(믿음의삶)에 대한 두려움, 낮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 그들에게 자신이 알려지는 것 등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고 가족들의 반대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들이 이와 같은 외적인 장애들을 넘는다 할지라도 또 다시 내적인 장애들을 직면할 수도 있다. 영적인 무관심이나 또는 나태함 등은 주님께 나가고자 할 때 내적으로 부딪치는 또 하나의 장애가 된다. 믿음은 이와 같은 장애들을 극복하고 앞으로 주님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행위들로 표현 된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바로가 출애굽을 반대해도 홍해와 광야가 가로 놓여 있더라도 약속의 땅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갔듯이 구원의 주님을 향하여 앞으로 나갈 때 길이 열린다. 주님은 믿음으로 나가는 자에게 언제나 앞길을 열어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백부장이 가지고 있던 믿음은 주님의 주권에 대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었다. 그는 주님께 종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었고 그런 능력을 사용하는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믿었다. 주님께서 그들의 간청에 따라 그 집을 향하고 계실 때 백부장은 또 다른 친구들을 주님께 보내어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7:6,7)”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이방인으로서 감히 유대인인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실 수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는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주님께 청했다. 백부장의 이 같은 말은 주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지 않으실지라도 말씀만 해 주신다면 종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이 고백이야말로 백부장이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주님은 이와 같은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7:9)” 이 말씀은 마땅히 주님을 구주(메시아)로 신뢰하여야 할 이스라엘이 이방인인 백부장만큼도 주님을 신뢰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시며 책망하신 말씀이다.

또한 백부장의 믿음은 절대적인 의탁으로 나타났다.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은 그 배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해야한다. 그렇게 하여야 안심하고 항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주님께 종을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고 그 문제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7:7,8)” 백부장의 이와 같은 의탁에는 주님께서 종을 고쳐 주실 것이라는 깊은 신뢰가 있었다. 그러므로 백부장은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자는 언제나 평강을 누린다. 주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저가 주를 의뢰함이라(사26:3)” 쉼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는 믿음 안에서 쉼을 얻는다.

주님은 백부장을 통하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다. 주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신뢰하고 그 믿음으로 모든 장애를 뛰어 넘으며 주님께로 나가는 믿음, 주님에게 구원할 힘이 있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그리고 주님께 간구 한 것을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 이와 같은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큰 믿음이다.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셨고 그가 구한 대로 종의 병을 고쳐 주셨다.

7:11-17.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주님께서 나인성으로 가실 때, 길에서 장례 행렬을 만났다. 죽은 자는 나인성에 살고 있는 한 과부의 독자였다. 주님은 과부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 청년의 시신이 있는 관으로 가까이 가사 그곳에 손을 얹으시고 죽은 청년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내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죽었던 청년이 살아났다. 본문은 이 모습에 대하여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7:15)”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무리들은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이처럼 주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여기 나인성은 가버나움에서 하룻길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엘리사가 수넵여인의 아들을 살린 수넵 지방과 모레 언덕(The Hill of Moreh)을 사이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기적에 대하여 낯선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며 엘리사의 기적을 회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개인이나 한 공동체가 믿음의 유산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언제든지 또 다른 믿음을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의 환경을 마련해 준다. 나인성에 이와 같은 믿음의 환경이 마련된 것은 믿음의 사람 수넵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공동체가 믿음의 사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로 인하여 그 시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도 믿음의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 공동체가 자신들의 환경을 믿음의 환경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여기 나인성에서 일어난 기적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심정을 가장 잘 묘사해 주고 있다. 본문을 보며 우리의 심상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장례 행렬일 것이다. 장례 선두에서 직업적으로 곡하는 자들은 독자를 잃어버린 과부의 슬픔을 더해 주었을 것이다. 이 슬픈 장면(場面)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파고드는 것은 이 슬픔이 단순히 한 과부의 슬픔으로만 생각되지 않는 것은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마치 장례 행렬을 통하여 묘사되는 슬픔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은 과부의 슬픔을 깊이 동정하시고 그에게 “울리 말라”고 위로해 주셨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주셨다. 이 짧고 단순한 이야기는 장례 행렬로 묘사 할 수 있는 인간의 슬픈 삶의 여정에 대하여 주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주님은 이처럼 슬픈 삶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대하여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계시다. 그리고 이 동정심은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참여하게 하여 우리를 슬픔으로부터 구원해 주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시는 원천이 된다. 선지자 스바냐는 이런 주님의 긍휼하심을 가장 아름다운 시적인 언어로 이렇게 묘사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시는 말씀은 주님의 우리에게 대한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나갈 때 그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은 구원을 바라는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들 가운데 가장 합당한 태도일 것이다.

7:18-23.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주님은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7:23)”라고 말씀 하셨다. 여기 “실족하다”라는 말은 “함정에 빠지다” “덫에 걸려 넘어지다”는 뜻이며, 주님으로 인하여 실족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실족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실족할 때가 있지만 다른 어떤 것으로 인한 실족함보다 신앙 문제로 인한 영적 실족함이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다.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오는 실족함은 신앙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신앙의 문제로 인하여 오는 실족함은 쉽게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해야 한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도 신앙의 문제로 인하여 실족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소식을 통하여 들은 주님의 모습은 세례 요한이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모습과 달랐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물음은 “주님! 당신이 참으로 세상에 오실 구주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의미다. 주님은 세례 요한의 물음에 대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7:22)”라고 말씀 해 주시며, 또한 그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은 주님으로 인하여 실족해 있었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 사람들에게 구주를 맞이하도록 준비시켰고, 또한 세상에 처음으로 주님을 구주로 소개한 자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세례요한을 여인이 낳은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세례요한이 지금 주님으로 인하여 실족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은 영적 문제로 인하여 오는 실족함은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성숙한 사람에게도 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줄로 생각하고 있을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우리를 영적으로 실족하게 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오해다. 세례 요한은 영적인 사람이었으나 주님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이 주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주님을 정치적인 해방자로서, 이스라엘을 모든 압제자들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실 분으로 알았다. 그러나 소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들었을 때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주님과는 다른 분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주님이 참으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인지 의심하게 되었고, 자신의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그 사실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주님이 성경에서 계시해 주고 있는 주님과 다를 때 우리는 영적으로 실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에서 이와 같은 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아람의 나만은 나병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었을 때 그의 종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를 찾아가면 자신의 병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야를 찾아갔다. 그는 아람의 관리라는 신분으로 찾아가면 크게 환영을 받을 수 있고 특별히 준비한 거룩한 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병을 치유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 엘리야를 찾아갔을 때 그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와서 맞이해 주지도 않았고, 치유를 위하여 특별한 의식도 베풀어주지도 않았다. 선지자는 다만 그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말 해 주었을 뿐이었다. 나만이 엘리야에게 기대했던 것과 실제로 엘리야가 그를 위해 해 준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나만은 실족했다. 그는 선지자 엘리야에 대하여 대단히 분노했고 다시 아람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는 지혜로운 신하의 권고로 인하여 선지자의 말에 따라서 요단에 가서 몸을 씻음으로 나병으로부터 치료함을 받았다. 여기 중요한 것은 나만이 자기 생각을 버리고 선지자의 말을 따랐을 때 그가 치유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만의 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 대부분도 주님을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함으로 영적으로 실족한다.

주님은 영적으로 실족한 세례요한에게 자신을 바르게 계시해 주심으로 그의 실족함으로부터 구원해 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주님을 바르게 아는 것만이 영적 실족함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부지런히 배우고 주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새롭게 할 때 영적 실족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24-35. “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주님을 떠나갔을 때 주님은 무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7:25,26)”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무리에게 광야에 나갔던 목적을 물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메시지를 다시 찾도록 하셨다.

그들이 잃어버린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례요한이 전한 메시지였다. 그들은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 광야에 나갔지만, 자신들이 어째서 그곳에 왔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다시 돌아왔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기 위하여 광야로 나갔다면 선지자가 증언한 메시야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세례요한이 전한 메시야에 대하여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주님은 계속하여 그들에게 만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또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다면 그들의 수고는 헛될 뿐이라고 말씀 해 주셨다. 이스라엘의 무리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광야에 갔다면 그것은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광야에는 세레요한이 전하는 메시지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광야에 갔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그들의 몸은 광야에 나갔지만 그곳에 간 목적을 상실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무리에게 또 한 번 광야에 나갔던 이유를 물으시고 그들이 잃어버린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은 환경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영적이며 삶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모든 시대 사람에게 큰 도전이 된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광야에 갔지만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의 시대에도 예배에 참여하여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봉헌하고, 말씀을 듣지만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스라엘의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린 모든 시대를 향하여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주님은 무리에게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7:28)”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자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이것보다 영광스런 일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다. 즉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들 가운데 가장 큰 자였지만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가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는 것은 그도 세상에 사는 동안 유한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세상과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도 세상에 존재하는 제한을 받지 않는다. 즉 우리가 세상에서는 극히 작은 자로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큰 자로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주님은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메시야이신 자신의 메시지조차 거부하고 있는 이 세대에 대하여 장터에서 놀고 있는 철없는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셨다. 아이들은 장터에서 잔치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 가운데 한 편은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피리를 불었다. 이때 다른 한편에 있는 아이들은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잔치놀이가 이루어 질 수 있었는데 춤을 추어야 할 아이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춤을 추지 않는다. 이렇게 할 때 잔치 놀이는 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제 장례놀이를 한다. 한편의 아이들은 죽음의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서 애곡 하였다. 그러나 다른 편의 아이들은 가슴을 치지 않는다. 이처럼 다른 편의 아이들이 놀이에 적절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음으로 결국은 이 놀이도 깨어졌다.

주님은 이와 같이 동일한 내용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 두 개의 비유는 바로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하여 반응하는 무리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주님 자신의 메시지에 대하여 반응하고 있는 무리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실제로 세례요한이 와서 금욕적인 방법을 취하며 무리들에게 메시야를 영접하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메시지를 전했을 때 사람들은 귀신들렸다고 말하며 그의 메시지를 거절했다. 그러나 주님은 세례요한과는 반대로 소외된 자들을 찾아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는데 사람들은 이런 주님에 대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주님의 메시지를 거절했다. 그러나 무리가 거절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하락해 주신 가장 귀한 은혜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게 하였는가? 그들의 자아였다. 죄로 인하여 부패해진 자아는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직 육적인 안락함만을 찾는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이라면 금욕적이든 은혜로운 것이든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거절한 것은 그의 메시지가 금욕적인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 아니고 영적인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거절한 요구가 단순히 금욕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면 은혜로운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한 주님의 메시지는 환영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한 것은 영적인 것에 있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금욕적 방식으로 영적인 것을 전한 메시지도 그리고 은혜로운 방식으로 영적인 것을 전한 주님의 메시지도 모두 거부한 것이다. 여기 중요한 교훈은 세상이 주님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방법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고 영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앙의 표현은 시대마다 다양하게 나타났다. 장로교적인 신앙 형식이 그 시대의 주류가 되었던 적이 있었고 오순절교적인 신앙의 형식이 그 시대의 주류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어떤 형식으로 신앙을 표현하든지 그것이 영적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세속적인 사람들은 어떤 신앙의 형식이든지 영적인 것을 요구한다면 거부한다. 이런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분별을 할 수 있도록 이끌 어 줄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7:35)”고 말씀하셨다. 문맥의 흐름에 비춰볼 때 여기 지혜란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세례요한의 메시지와 주님의 메시지는 모두 여기 지혜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런 메시지들은 전달하는 형식이 어떠하든지 반드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한다. 비록 세례요한이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하는 금욕적인 형식을 취할지라도 그 메시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여 메시야를 영접하도록 인도하고 또한 주님의 메시지가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은혜로운 형식을 취할지라도 그 메시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은혜 가운데 살도록 인도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것과 영적이지 않을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 인도한다. 즉 영적인 것은 그 형식이 어떠하든지 반드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육적인 것은 그 형식이 어떠하든지 사람들을 부패한 곳으로 나가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행위가 영적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위하여 그 결과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서도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고 말씀하신 것이다.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본문은 한 바리새인이 주님을 초청하였을 때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형식적인 신앙과 참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시고 이와 같은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다.

우리의 주님에 대한 신앙은 형식적이거나 또는 참된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은 형식적이거나 또는 참되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신앙이 한번 형식적이거나 참되다면 언제까지나 그런 상태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언제나 우리의 신앙은 이 두 사이를 오고 갈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항상 참되고 진실한 신앙이다. 주님은 본문에서 두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신앙의 양면성을 보여 주시고 그것을 거울삼아 참된 신앙으로 성장해 가기를 요청하신다. 형식적인 신앙과 참된 신앙의 모습은 각각 어떠한가?

우리는 바리새인의 모습 속에서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리새인은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구주로서 존경하여 초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주님을 초청해 놓고도 이스라엘 가정에서 손님을 영접할 때 행하였던 가장 일반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손님을 맞이할 때 세 가지 관습에 따랐다. 하나는 손님에게 발을 씻을 물을 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유목민들로서 거친 땅을 샌들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집에 들어올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발을 씻을 물이었다. 그러므로 손님에게 물을 제공한다는 것은 손님을 맞이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예의였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에게 입맞춤으로 존경을 표했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었다. 이와 같은 관습이 그 나라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예(禮)였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주님을 손님으로 초청하였지만 이러한 예들 중 한 가지도 행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얼마나 주님을 무시하였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주님을 존경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태도는 당시 모든 바리새인이 주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가 일반 사람들과 “분리된 자” “구별된 자”를 의미하고 있다.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이 헬라화 될 때 그것에 반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성을 지키려고 했던 자들로서 스스로 구별된 자라고 생각했고 그들만이 이스라엘의 참된 공동체로 생각했다. 그들은 율법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지키려 했고 그것으로 인하여 항상 자신들을 거룩한 존재로 생각했다. 이와 같은 의식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기준(義)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했고 자신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특권의식을 갖게 했다. 이런 특권 의식은 주님을 구주로 보지 못하게 하였고 주님을 초청해 놓고도 초청한 손님에 합당한 대접을 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러면 어쩌서 바리새인은 주님을 초청하였는가? 어쩌면 그는 잘 알려진 선생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고자 했거나 아니면 당시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으로부터 흠잡을 것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님을 이와 같이 대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지만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무시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주님을 초청하였을 때 주님은 바리새인이 어떤 사람인지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청에 응하셨다. 이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초청했을 때 주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구주로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은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바리새인과 같이 주님을 무시하며 산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매일의 삶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님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하루 생활 가운데 주님과 얼마나 함께 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거나 결정할 때 그 분의 말씀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이처럼 하루의 삶을 돌아볼 때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무시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할 때만 바리새인처럼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뿐이다. 주님은 바리새인의 모습을 통하여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행위를 돌이킴으로 참된 신앙에 이르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한 사람을 통하여 바리새인과는 다른 신앙의 모습을 본다. 바리새인이 주님을 초청했을 때 그 자리에는 초청 받지 않은 한 여인이 있었다. 그는 바리새인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죄인으로 알려진 여인이다. 그가 무슨 잘못으로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알려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본문에는 그를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주님을 찾아갔다. 우리는 당시 주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가정의 분위기를 상상해 볼 때 이 여인이 그곳으로 주님을 찾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바리새인의 집에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의 친구들만 초대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조차도 그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하물며 동네에서 죄를 지은 자로 알려진 한 여인이 초대 받지도 못한 그곳에 갔다고 생각해 보라. 그 집에 초대 받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멸시를 받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그 집에 갔다. 참된 신앙은 이와 같이 주님에 대한 열정으로 나타난다. 어떤 어려움과 장애가 있더라도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고 나간다. 그러므로 여인의 행동은 그 자체가 믿음이었고 그 여인의 이와 같은 행동은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또한 이 여인에게는 주님에 대한 감동이 있었다. 성경은 이 여인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죄를 지은 자라는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었지만 주님을 만나 자유함을 얻은 자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려도 주님의 크신 은혜를 갚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여인에게는 이처럼 은혜에 대한 감동이 있다. 이 감동이 여인으로 하여금 주님을 위하여 소중한 옥합을 깨뜨리게 한 것이다.

우리는 더 귀한 진주를 얻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소유를 팔수는 있지만 보다 못한 것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옥합을 깨트린다는 것은 주님의 주님 되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020. 9. 5.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7장

7:1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누가복음 7:1-10) 백부장의 종의 치유에 관한 기사는 여기에 언급된 것과 마태복음 기사(8:5 이하)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그리스도께 왔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그가 처음에는 장로 몇 사람을 그리스도께 보냈고(3절), 나중에는 벗들을 몇 사람 보냈다고 되어 있다(6절). 그러나 Quod facimus per alium, id ipsum facere judicamur ─ 즉, 우리가 딴 사람을 통해 하면 우리가 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법칙이다. 백부장은 자기 대리인을 통해 하는 일을 자기가 한다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사람이 자기 변호사를 통해 재산을 소유를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백부장은 결국 몸소 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을 것이다(마 8:13). 본문은 이 기적이 우리 주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셨을 때(1절) 행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하셨다. 누구라도 그에게 와서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노라”(요 18:20). 이제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말씀을 가르칠 권세가 있음을 확실히 증거 하시기 위해 말씀의 고치는 능력과 효능에 대해 명명백백한 증거를 제시하시고 있다. 병을 명하여 물리칠 정도로 자연계에서 당당한 주권을 소유하신 분을 은혜의 나라에서도 혈과 육에서 거슬리는 의무를 부과하고 최고의 형벌로 그 의무의 준수를 명할 수 있는 주권을 소유하신다. 이 기적은 가버나움에서 행해졌다. 그리스도의 크신 일들은 대개 이 곳에서 시행되었다(마 11:23). Ⅰ. 백부장의 병든 종은 그 주인이 사랑하는 자였다(2절). 그 종이 근면과 신실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이나 자기 소유를 위해서 하듯 자기 주인과 그 이익을 위해 분명한 관심을 가짐으로써 주인의 존중과 사랑을 입게 된 것은 그 종의 칭찬할 만한 점이었다. 종들은 자기 주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도록 연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좋은 종을 두게 되었을 때 그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았던 것은 그 주인의 칭찬할 만한 점이었다. 거만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주인들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극히 훌륭한 종들에게 욕질하거나 때리거나 잔인하게 대하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한 은총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마땅히 그 종들에게 인자해야 하며 친절해야 하며, 그들의 복리와 위안을 위해 애써야 한다. Ⅱ. 그 주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자 그에게 출원하기로 했다(3절). 주인들은 자기 종이 병들게 되면 그들을 각별히 돌보아야 하며 그대로 버려 두어서는 아니 된다. 이 백부장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기 종을 고쳐 주시기를 청했다. 우리는 지금 신실하고도 열성적인 기도로써 천국에 계신 그리스도께 의뢰할 수 있다. 또 우리 가족 중에 병든 자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의사이기 때문이다. Ⅲ. 백부장은 유대인의 장로 몇을 그리스도께 보냈다. 그래서 그들로 사정을 설명하고 그에게 간청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백부장은 자기가 직접 올 수도 있었지만 자기는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이었으므로 그러는 것보다 유대인 장로를 보내는 것이 그리스도께 더 큰 경의를 표하는 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이시기 때문에 이방인인 자기와 담소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유대인들을 보냈다. 그는 유대인이 천국의 총애를 받는 백성임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권세 있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한 것은 신분이 높은 사자를 통해 그리스도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발락은 발람에게 장로들(또는 귀족)을 보내었다. Ⅳ. 유대인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진심으로 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바로(우리 성서:간절히) 구하였다”(4절). 그들은 백부장 자신은 들먹이려 하지 않은 것을 들어 그를 변호하면서 간청했다. 그들은 ” 이 일을 해 주어도 될 자격이 이 사람에게는 있나이다”고 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그가 이 일을 위해 해 주셔야 할만큼 가치가 있는 자”란 말이다. 어떤 이방인이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인정된다면 그는 확실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자였다. 백부장은 “내가 주의 방문조차 받을 자격이 없나이다”(마 8:8)고 말했다. 그러나 유대인 장로들은 그가 치료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이 겸손한 자는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잠 29:23).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칭찬하지 말라(잠 27:2). 그런데 그들이 특별히 주장한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진심으로 유대 민족과 종교가 잘 되기를 비는 자라는 것이다(5절). 그들은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도 그 이방인 백부장에게 대한 편견을 제거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로마인이었고 군대의 장교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 사실을 언급한다. 1. 그는 유대 백성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자라는 것.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이방인으로서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자는 드물었다. 그는 아마도 구약 성서를 읽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백성보다 하늘의 총애를 더 받는 민족으로서 유대 민족을 아주 존중하는 마음이 들기 쉬웠을 것이다. 정복자와 권세자들 조차 피정복자와 자기들이 다스리는 자들에게 대해 호의를 품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2. 그는 그들의 예배에 대해 호감을 품었다는 것. “그는 그들을 위하여 가버나움에 새 회당을 지었다.” 그는 그들의 회당이 퇴락하였거나 백성을 다 수용하기에는 좁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새 회당을 지어 준 것이다. 이로써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경외심과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신 유일의 참 하나님이시란 자기 신앙을 입증한 셈이다. 또 그는 다리우스왕처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기도로 이득을 얻고 하는(스 6:10) 바램을 나타내었다. 이 백부장은 자비로 회당을 건축하였고 아마 그 곳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게으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건축에 동원했을 것이다. 경건한 예배를 위한 집회소의 건축은 매우 선한 사업이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대한 사랑의 표시이다. 그런 종류의 선한 역사를 하는 이들은 배나 존경할 만한 자이다(딤전 5:17). 그는 유대 백성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자라는 것.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이방인으로서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자는 드물었다. 그는 아마도 구약 성서를 읽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백성보다 하늘의 총애를 더 받는 민족으로서 유대 민족을 아주 존중하는 마음이 들기 쉬웠을 것이다. 정복자와 권세자들 조차 피정복자와 자기들이 다스리는 자들에게 대해 호의를 품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자.그는 그들의 예배에 대해 호감을 품었다는 것. “그는 그들을 위하여 가버나움에 새 회당을 지었다.” 그는 그들의 회당이 퇴락하였거나 백성을 다 수용하기에는 좁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새 회당을 지어 준 것이다. 이로써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경외심과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신 유일의 참 하나님이시란 자기 신앙을 입증한 셈이다. 또 그는 다리우스왕처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기도로 이득을 얻고 하는(스 6:10) 바램을 나타내었다. 이 백부장은 자비로 회당을 건축하였고 아마 그 곳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게으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건축에 동원했을 것이다. 경건한 예배를 위한 집회소의 건축은 매우 선한 사업이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대한 사랑의 표시이다. 그런 종류의 선한 역사를 하는 이들은 배나 존경할 만한 자이다(딤전 5:17). 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백부장에게 아주 기꺼이 자비를 베풀려고 하셨다. 예수는 그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곧 그들과 함께 가셨다(6절). “그는 홀로 유대인의 구세주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구세주는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구주도 되시느니라”(롬 3:29). 백부장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7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자기의 방문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셨다.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Ⅵ. 백부장은 그리스도께서 황송하게도 자기 집에 오신다고 듣자, 또 다시 자기의 겸손과 믿음에 대한 증거를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이 성도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접근으로 더 활기를 띄게 된다. 이에 그리스도가 그 집으로부터 멀지 아니하고 백부장이 그 기별을 받았을 때 그는 그의 영접을 위해 집안을 정돈하기는커녕 친구들을 보내어 참신한 표현으로 그를 맞이하게 한다. 1. 그의 겸손한 표현. “주여, 수고치 마옵소서. 나는 이방인이기에 그런 영광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 말은 그가 권세가의 신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낮게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신분은 이 세상에서 초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그를 높이 생가하고 있음을 아울러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그리스도가 비록 사람들 중에서는 멸시받고 배척받으셨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를 존귀하게 할 줄은 알았던 것이다.

2. 그의 믿음의 표현. “주여 수고치 마옵소서. 그러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주는 내 집에 들어오시지 않고서도 저 전능하신 권능으로써 내 하인을 낫게 하실 수 있나이다. 주의 권능으로써는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게 없나이다(욥 42:2).” 이 백부장은 나아만의 망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한테로 나아와 서서 상처 위에 손을 흔들고 그래서 자기를 고쳐 주리라고 공상하였던 것이다(왕하 5:11). 백부장은 자기 직업에서 한 가지 비유를 인용하여 이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기 수하의 어느 병졸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어느 병사든 심부름을 보낼 수 있다. 그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쉽사리 질병을 명하사 물러가게 하실 수 있으시며 자기의 그 하인을 치유하라는 사명을 천사에게 주어서 보내실 수 있다고 믿고 있다(8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행동을 완전히 지배하신다. 그는 원하신다면 자연의 운행도 바꾸실 수 있으시며, 자연의 혼란도 바로 잡으실 수 있고 인체의 생리적 붕괴도 고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가 그에게 추어졌기 때문이다(마 28:18). 그의 겸손한 표현. “주여, 수고치 마옵소서. 나는 이방인이기에 그런 영광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 말은 그가 권세가의 신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낮게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신분은 이 세상에서 초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그를 높이 생가하고 있음을 아울러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그리스도가 비록 사람들 중에서는 멸시받고 배척받으셨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를 존귀하게 할 줄은 알았던 것이다.그의 믿음의 표현. “주여 수고치 마옵소서. 그러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입니다. 주는 내 집에 들어오시지 않고서도 저 전능하신 권능으로써 내 하인을 낫게 하실 수 있나이다. 주의 권능으로써는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게 없나이다(욥 42:2).” 이 백부장은 나아만의 망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한테로 나아와 서서 상처 위에 손을 흔들고 그래서 자기를 고쳐 주리라고 공상하였던 것이다(왕하 5:11). 백부장은 자기 직업에서 한 가지 비유를 인용하여 이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기 수하의 어느 병졸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어느 병사든 심부름을 보낼 수 있다. 그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쉽사리 질병을 명하사 물러가게 하실 수 있으시며 자기의 그 하인을 치유하라는 사명을 천사에게 주어서 보내실 수 있다고 믿고 있다(8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행동을 완전히 지배하신다. 그는 원하신다면 자연의 운행도 바꾸실 수 있으시며, 자연의 혼란도 바로 잡으실 수 있고 인체의 생리적 붕괴도 고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가 그에게 추어졌기 때문이다(마 28:18). Ⅶ. 우리 주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면서 아주 기뻐하시고 더욱이 그가 이방인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다. 백부장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영예롭게 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 믿음을 얼마나 존귀하게 하셨는지 살펴보자(9절). 그는 놀란 자처럼 돌이키사 자기를 쫓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이따금씩 그들 앞에 제시되는 믿음의 큰 본보기를 관찰하게 하시고 주목하게 하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특히 직업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만큼 열심히 따르지 않는 자들 중에서 그런 큰 믿음의 소유자가 발견될 때는 그렇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키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강한 믿음을 통하여 약하고 동요되는 우리 믿음을 부끄러워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Ⅷ. 치료는 즉각적으로 완전히 실행되었다(10절).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사명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 보니 종은 이미 강건해지고 병색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한 종들의 고생하는 사정을 인식하실 것이며, 즉시 구원할 준비가 되어 있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롬 2:11; 엡 6:9; 골 3:25).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이라고 하여 자기 은혜의 혜택으로부터 제외시키지도 않으신다. 이것은 복음이 선포될 때 유대인보다 이방인에게서 발견될 보다 큰 믿음의 표본이었다.

7:11 나인성의 과부 (누가복음 7:11-18)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사를 읽게 된다. 그 과부의 아들은 죽어서 장사하기 위해 운구되고 있던 중이었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가 살아났다”(마 11:5)고 하신 대답 중에 이것을 얼핏 기록하였다. 다음 사실을 눈여겨 살피자. Ⅰ. 이 기적은 언제 어디서 행해졌는가? 그 시기는 그가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신 그 다음 날이었다(우리 성서:그 후에). 그리스도께서 선을 행하고 계셨다. 그는 하루인들 놓쳤다고 불평할 만한 이유가 없으셨다. 그 기적은 나인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성 또는 읍의 성문에서 행해졌다. 그 성은 가버나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소이었다. 그 성은 아마 나이스(Nais)라고 불리우는 성과 동일한 성일 것이다. 제롬(Jerome)은 이 지명을 언급하고 있다. Ⅱ. 이 기적의 목격자는 누구였는가? 이 기적은 가장 잘 입증된 셈이다. 왜냐하면 성문 안이나 성문 근처에서 두 무리가 마주쳤는데 이 기적은 그 두 군중의 목전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한 무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와 백성들이었고(11절) 또 한 무리는 젊은이의 장례식에 참석한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었다(12절). 이와 같이 그 자리에는 이 기적의 진실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숫자가 있었다. 이 기적은 병치유보다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에 대한 증명을 보다 크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자연의 어떤 능력이나 수단으로도 죽은 자를 살리 수는 없기 때문이다. Ⅲ.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 기적을 행하셨는가? 1. 생명을 되찾은 사람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생애의 시작에 요절한 젊은이였다. 그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사람은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진다(욥 14:2). 그 청년이 정말로 죽었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할 수 있었다. 이 일에 공모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성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관에 든 그 청년을 만나기까지는 그를 보지도 못하셨다. 그는 성으로부터 운구되고 있었다. 유대인의 매장지는 성 밖에 있었고,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이 젊은이는 그 어머니의 독자였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녀는 자기 노년의 지팡이로서 그에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한 갈대로 나타났다. 아무리 좋은 상태에 있는 자라도 다 상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고난은 얼마나 무수하며 다양하고 비참한가 ? 세상은 얼마나 말할 수 없는 눈물의 골짜기인가 ! 세상은 곡하는 장소(Bochim)이다. 우리는 자기 외아들에 대한 이 불쌍한 어머니의 슬픔은 매우 깊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독자를 잃은 슬픔은 최대의 슬픔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슥 12:10). 그 슬픔은 그녀가 과부였다는 점에서 더 깊었다. 아들의 죽음은 설상가상이었으며, 그녀의 위안의 완전한 끝장이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나오면서 그녀의 손실을 위안하고 그녀를 위로하고자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소생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긍휼심과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로써 그는 이 두 가지에 대한 견본을 보이시려고 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구속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일이다.

(1) 고난받는 자에게 대한 그의 긍휼심이 얼마나 따스한지 살펴보자(13절). 주께서는 묘지까지 아들을 따라가는 그 가련한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이 일에서 과부를 위해 어떻게 해주십사 하는 요청을 받지 않으셨다. 몇 마디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 일 조차 요구받지 않으셨던 것이다 .ex mero motu ─ 즉 순전히 그의 인자한 본성에서 그는 그 여자 때문에 아픔을 느끼셨다. 사정은 딱하였다. 그는 연민의 마음으로 이 일을 보셨다. 그의 눈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그는 그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해 하는 자에게, 불쌍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왕왕 그의 인자하신 축복으로 영접하신다(시 59:10)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자기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구원과 구속 역사를 떠맡으셨다(사 63:9). 이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자비와 그의 무한한 긍휼하심에 대해 얼마나 뜨거운 생각을 불어넣어 주는지 모른다. 우리가 어떤 슬픔에 잠겨 있는 때에라도 이것은 우리에게 여간 위로가 되는 게 아니다. 과부들은 슬픔 가운데에서라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역경 중에 있는 자기들의 영혼을 아신다는 데에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 딴 사람은 이런 자의 슬픔을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러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울지 말라고 하셨다. 그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 외의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제시할 수는 없었다. 죽은 아들을 위해 울지 말 것은 그는 곧 “산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 과부에게만 특유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자에게도 울지 않아야 할 공통된 이유가 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들의 터무니없이 과도한 슬픔에 대해 동등한 힘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다시 살아날 것이며, 영광 중에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살전 4:13). “그 자식을 위해 애곡하는 라헬은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으며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렘 31:17).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때에 그리스도의 불쌍히 여기심을 생각하고 우리의 격정을 억제하며 진정하자.

(2) 그의 명령은 죽음조차 이긴다는 것을 살피자. “그는 가까이 오사 그 시체가 들어 있던(또는 올려져 있던)관에 손을 대셨다.” 그는 그렇게 하셔도 오염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행동으로써 관을 멘 자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말 것을 시사하셨다. 그는 죽은 청년에게 하실 말씀이 있었다. “그를 건져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노라”(욥 33:24). 그러자 관을 멘 자들은 정지했다. 그것은 아마 관을 어깨로부터 땅에 내려놓고 만일 관이 닫혀 있었다면 그 뚜껑을 열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는 권세를 가지고 죽음에서 놓여나게 하는 자답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엄숙히 말씀하셨을 것이다. 청년은 죽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자였다(허물과 죄 안에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시는 것은 추호도 엉터리가 아니었다. 청년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이 그의 말씀에 수반하였던 때문이다. 모든 사람 특히 청년에게 대한 복음의 부르심은 “일어나라. 죽은 자 중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과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지배는 그 말씀의 즉효로 증명되었다(15절). “죽었던 자가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스도께서 청년에게 생명을 넣어 주셨을 때 청년이 일어나 앉음으로써 그 사실을 나타나게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를 얻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그 청년이 살아났다는 또 한 가지의 증거는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실 때마다 그는 기도와 찬미로 입술을 열어 주신다. 생명을 되찾은 사람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생애의 시작에 요절한 젊은이였다. 그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사람은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진다(욥 14:2). 그 청년이 정말로 죽었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할 수 있었다. 이 일에 공모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성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관에 든 그 청년을 만나기까지는 그를 보지도 못하셨다. 그는 성으로부터 운구되고 있었다. 유대인의 매장지는 성 밖에 있었고,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이 젊은이는 그 어머니의 독자였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녀는 자기 노년의 지팡이로서 그에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한 갈대로 나타났다. 아무리 좋은 상태에 있는 자라도 다 상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고난은 얼마나 무수하며 다양하고 비참한가 ? 세상은 얼마나 말할 수 없는 눈물의 골짜기인가 ! 세상은 곡하는 장소(Bochim)이다. 우리는 자기 외아들에 대한 이 불쌍한 어머니의 슬픔은 매우 깊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독자를 잃은 슬픔은 최대의 슬픔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슥 12:10). 그 슬픔은 그녀가 과부였다는 점에서 더 깊었다. 아들의 죽음은 설상가상이었으며, 그녀의 위안의 완전한 끝장이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나오면서 그녀의 손실을 위안하고 그녀를 위로하고자 하였다.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소생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긍휼심과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로써 그는 이 두 가지에 대한 견본을 보이시려고 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구속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일이다.고난받는 자에게 대한 그의 긍휼심이 얼마나 따스한지 살펴보자(13절). 주께서는 묘지까지 아들을 따라가는 그 가련한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이 일에서 과부를 위해 어떻게 해주십사 하는 요청을 받지 않으셨다. 몇 마디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 일 조차 요구받지 않으셨던 것이다 .ex mero motu ─ 즉 순전히 그의 인자한 본성에서 그는 그 여자 때문에 아픔을 느끼셨다. 사정은 딱하였다. 그는 연민의 마음으로 이 일을 보셨다. 그의 눈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그는 그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해 하는 자에게, 불쌍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왕왕 그의 인자하신 축복으로 영접하신다(시 59:10)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자기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구원과 구속 역사를 떠맡으셨다(사 63:9). 이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자비와 그의 무한한 긍휼하심에 대해 얼마나 뜨거운 생각을 불어넣어 주는지 모른다. 우리가 어떤 슬픔에 잠겨 있는 때에라도 이것은 우리에게 여간 위로가 되는 게 아니다. 과부들은 슬픔 가운데에서라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역경 중에 있는 자기들의 영혼을 아신다는 데에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 딴 사람은 이런 자의 슬픔을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러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울지 말라고 하셨다. 그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 외의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제시할 수는 없었다. 죽은 아들을 위해 울지 말 것은 그는 곧 “산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 과부에게만 특유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자에게도 울지 않아야 할 공통된 이유가 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들의 터무니없이 과도한 슬픔에 대해 동등한 힘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다시 살아날 것이며, 영광 중에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살전 4:13). “그 자식을 위해 애곡하는 라헬은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으며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렘 31:17).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때에 그리스도의 불쌍히 여기심을 생각하고 우리의 격정을 억제하며 진정하자.그의 명령은 죽음조차 이긴다는 것을 살피자. “그는 가까이 오사 그 시체가 들어 있던(또는 올려져 있던)관에 손을 대셨다.” 그는 그렇게 하셔도 오염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행동으로써 관을 멘 자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말 것을 시사하셨다. 그는 죽은 청년에게 하실 말씀이 있었다. “그를 건져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노라”(욥 33:24). 그러자 관을 멘 자들은 정지했다. 그것은 아마 관을 어깨로부터 땅에 내려놓고 만일 관이 닫혀 있었다면 그 뚜껑을 열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는 권세를 가지고 죽음에서 놓여나게 하는 자답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엄숙히 말씀하셨을 것이다. 청년은 죽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자였다(허물과 죄 안에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시는 것은 추호도 엉터리가 아니었다. 청년에게 생명을 주는 능력이 그의 말씀에 수반하였던 때문이다. 모든 사람 특히 청년에게 대한 복음의 부르심은 “일어나라. 죽은 자 중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과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지배는 그 말씀의 즉효로 증명되었다(15절). “죽었던 자가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스도께서 청년에게 생명을 넣어 주셨을 때 청년이 일어나 앉음으로써 그 사실을 나타나게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를 얻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그 청년이 살아났다는 또 한 가지의 증거는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실 때마다 그는 기도와 찬미로 입술을 열어 주신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청년에게 자기 제자들처럼 자기와 함께 가야 한다는 의무를 지우지 않으신다. 그는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셨으나, 자기를 섬기라고도 아니하셨다(비록 그 청년의 목숨까지도 살려 주신 은인이었지만). 더군다나 그는 기념물이나 전시품으로서 그에게 따라다니라고 하여 명예를 얻고자 하지도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어미에게 내어 주사 자기 어머니를 시중하는 효자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자비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 과부에게는 이 기적이 큰 자비의 행위였다. 이제 그 여인은 위로를 받았다. 그 위로는 여인이 고통 당한 시간에 비례하였다. 아니 그 고통보다 한층 더 많은 위로였다. 그 여인은 이제 자기 아들을 하늘의 특별한 총아로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가 죽지 않았을 때보다 더 큰 즐거움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Ⅳ. 그 기적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다.” 죽었던 자가 한 사람의 명령으로 대로상의 관에서 살아나는 것을 보는 순간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들은 이 기적을 보고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여호와와 그의 크심뿐만 아니라 여호와와 그의 인자하심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들이 이 일에서 얻은 결론은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셨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오랫동안 대망 하던 큰 선지자였다. “이와 같이 죽은 장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그는 신적 영감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하던 대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려고 이분을 통해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눅 1:68 참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이것은 참으로 죽음에서 살아나는 일이 될 터였다. 죽었던 영혼이 복음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영적 생명을 얻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또 그 일을 자기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방문으로 간주해야 한다. 1. 이 기적에 관한 소문은 전국에 퍼졌다(17절). “예수께 대한 이 소문 곧 그가 큰 선지자라는 소문은 명성의 날개를 타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온 유대와 사방이라고 할 수 있는 온 갈릴리에 두루 퍼졌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은 거의 대다수가 들었지만 그를 믿고 그에게 헌신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많은 사람이 복음에 대한 소문은 들으나 그 영혼으로 복음의 냄새와 맛을 향유하지는 않는다.

2. 구체적으로는 이 소문이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 주의 깊게 전달되었다(18절).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요한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였으니 이는 비록 그는 묶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메여 있지 않다(딤후 2:9)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는 일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적에 관한 소문은 전국에 퍼졌다(17절). “예수께 대한 이 소문 곧 그가 큰 선지자라는 소문은 명성의 날개를 타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온 유대와 사방이라고 할 수 있는 온 갈릴리에 두루 퍼졌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은 거의 대다수가 들었지만 그를 믿고 그에게 헌신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많은 사람이 복음에 대한 소문은 들으나 그 영혼으로 복음의 냄새와 맛을 향유하지는 않는다.구체적으로는 이 소문이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 주의 깊게 전달되었다(18절).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요한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였으니 이는 비록 그는 묶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메여 있지 않다(딤후 2:9)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는 일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7:19 예수께 보낸 세례 요한의 메시지 (누가복음 7:19-35) 세례 요한에게 관한 이 모든 담화는 요한이 사람을 보내서 예수가 메시야인지 아닌지 물은 데서 발생하였다. 우리는 본문의 기사를 역시 마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마 11:2-19) Ⅰ. 여기에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 보낸 메시지와 그리스도가 요한에게 내린 답변이 나온다. 다음을 관찰하자. 1. 우리가 그리스도께 관해 물어봐야 할 큰 일은 그가 죄인을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의 여부이다(19, 20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즉 기름 부으신 구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확실히 믿는다. 이 예수가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라면 우리는 그를 영접하고 딴 이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 메시야에게 대한 대망을 품고 그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2. 세례 요한 자신의 신앙 내지는 적어도 그 제자들의 신앙은 이 일에 대한 확증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때까지 아직 자신이 참 그리스도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자기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다. 그가 그리스도라는 증명은 그의 부활로 완성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 유대 교회의 유력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그 조상 다윗의 왕좌에 앉힐 기미가 보이는 이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세라든가 장엄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그의 주변에서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권력과 위엄 속에서 출현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오실 메시야가 당신이오이까?”하고 물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가 아니더라도 딴 누구를 기다리라고 자기들에게 지시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3. 예수께서는 자신의 칭찬과 자신의 정체에 대한 판정과 증명을 자기의 행한 일에 다 맡겨 버리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다. 마침 그 시에 그는 많은 기적적 치료를 행하셨다. “마침 그 시”란 말은 아마 그들이 예수와 단 한 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하셨는가 ! 예수께서는 신체적인 질병과 고통을 많이 고치셨고 악귀들린 자, 정신적으로 광증이나 우울증에 빠진 자들도 많이 고치셨으며 많은 소경도 보게 하였다. 그는 많은 치료를 베푸셨으므로 속임수로 의심할 만한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자 예수께서는 그들더러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들은 것을 고하라고 명하셨다.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들도, 일반 백성이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많으랴?”고 말했듯이(요 7:31), 쉽사리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본 이 기적들은 예수의 사명에 대한 확증인 동시에 설명이기도 했다. 메시야가 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을 치료하고 흑암에 앉은 자에게 빚과 광명을 주며 악령을 억제하고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수께서 백성의 신체에다 바로 이 일들을 행하고 계심을 본다. 그러므로 너희는 바로 이 사람이 백성의 영혼에다 그런 일을 행하려 오신 분이라고 결론짓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너희는 다른 이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연계의 이런 기적에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는 은혜계의 기적까지 첨가시키신다(22절). 그들이 알기로는 이 일은 메시야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란 가난한(또는 겸비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사 61:1),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생명(또는 영혼)을 구하게 하려고(시 72:13)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너희는 메시야의 특성과 그가 오시는 그 의도에 보다 완전히 부합된 다른 이를 기다릴 수 있을지 없을지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4. 예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라는 증거가 이토록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자기에게 편견을 품을 우려가 있다는 암시를 그들에게 주신다(23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23절). 현세에서는 우리는 심리(審理)와 유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상태라면 충분한 변론과 이의 제기가 있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진리의 탐구에 정직하고 무사공평하며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진리를 확증시켜 줄 만한 충분한 변론이 있듯이, 부주의하고 세상적이며 육욕적인 자에게 진리를 흐리게 하기에 충분한 반대도 있는 것이다. 나사렛에서 받으신 교육이라든가 그의 갈릴리 거주라든가 비천한 그의 가족과 친척들, 그의 빈궁, 보잘 것 없는 추종자들 등등, 이런 것들은 많은 자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으로도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지혜롭고 겸손하고 마음씨 고운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거침돌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다는 표시이다. 그런 자는 참으로 복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관해 물어봐야 할 큰 일은 그가 죄인을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의 여부이다(19, 20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즉 기름 부으신 구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확실히 믿는다. 이 예수가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라면 우리는 그를 영접하고 딴 이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 메시야에게 대한 대망을 품고 그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세례 요한 자신의 신앙 내지는 적어도 그 제자들의 신앙은 이 일에 대한 확증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때까지 아직 자신이 참 그리스도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자기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다. 그가 그리스도라는 증명은 그의 부활로 완성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 유대 교회의 유력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그 조상 다윗의 왕좌에 앉힐 기미가 보이는 이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세라든가 장엄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그의 주변에서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권력과 위엄 속에서 출현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오실 메시야가 당신이오이까?”하고 물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가 아니더라도 딴 누구를 기다리라고 자기들에게 지시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예수께서는 자신의 칭찬과 자신의 정체에 대한 판정과 증명을 자기의 행한 일에 다 맡겨 버리셨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다. 마침 그 시에 그는 많은 기적적 치료를 행하셨다. “마침 그 시”란 말은 아마 그들이 예수와 단 한 시간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하셨는가 ! 예수께서는 신체적인 질병과 고통을 많이 고치셨고 악귀들린 자, 정신적으로 광증이나 우울증에 빠진 자들도 많이 고치셨으며 많은 소경도 보게 하였다. 그는 많은 치료를 베푸셨으므로 속임수로 의심할 만한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자 예수께서는 그들더러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들은 것을 고하라고 명하셨다.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들도, 일반 백성이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많으랴?”고 말했듯이(요 7:31), 쉽사리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본 이 기적들은 예수의 사명에 대한 확증인 동시에 설명이기도 했다. 메시야가 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을 치료하고 흑암에 앉은 자에게 빚과 광명을 주며 악령을 억제하고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수께서 백성의 신체에다 바로 이 일들을 행하고 계심을 본다. 그러므로 너희는 바로 이 사람이 백성의 영혼에다 그런 일을 행하려 오신 분이라고 결론짓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너희는 다른 이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연계의 이런 기적에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는 은혜계의 기적까지 첨가시키신다(22절). 그들이 알기로는 이 일은 메시야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란 가난한(또는 겸비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사 61:1),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생명(또는 영혼)을 구하게 하려고(시 72:13)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너희는 메시야의 특성과 그가 오시는 그 의도에 보다 완전히 부합된 다른 이를 기다릴 수 있을지 없을지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예수께서는 자기가 메시야라는 증거가 이토록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자기에게 편견을 품을 우려가 있다는 암시를 그들에게 주신다(23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23절). 현세에서는 우리는 심리(審理)와 유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상태라면 충분한 변론과 이의 제기가 있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진리의 탐구에 정직하고 무사공평하며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진리를 확증시켜 줄 만한 충분한 변론이 있듯이, 부주의하고 세상적이며 육욕적인 자에게 진리를 흐리게 하기에 충분한 반대도 있는 것이다. 나사렛에서 받으신 교육이라든가 그의 갈릴리 거주라든가 비천한 그의 가족과 친척들, 그의 빈궁, 보잘 것 없는 추종자들 등등, 이런 것들은 많은 자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으로도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지혜롭고 겸손하고 마음씨 고운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거침돌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다는 표시이다. 그런 자는 참으로 복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Ⅱ.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대해 던지신 극찬이 나온다. 요한의 사자들이 있을 때에는 찬사를 늘어놓지 않으시다가 그들이 떠난 후에(24절) 칭찬을 아끼시지 않으신 것은 백성들에게 요한의 사역으로 그들이 이익을 누렸고 그의 투옥으로 그 혜택을 상실하게 됐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제 자기들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었는지 깊이 생각해야 했다. 그토록 많은 말과 그토록 크고도 전반적인 놀라움을 불러 일으켰던 그는 과연 누구였는지 그들은 이제 고찰해야 했다. 그리스도가 “자 !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1. 그는 확고부동하고 “시종일관한” 자였고 끈기 있고 지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먼저 이쪽으로,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바뀌는 그런 갈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갈대처럼 변덕스럽지 아니하고 반석처럼 견고하였다. 만일 그가 갈대처럼 헤롯에게 굴복하고 궁중의 환심을 샀더라면 그는 그곳의 총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 중 어느 것에도 동요되지 않았다”(흠정역, 행 20:24).

2. 그는 견줄 데 없는 “자기 부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금욕과 세상 멸시의 큰 표본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도 아니었다(25절). 반대로 그는 광야에서 지냈으며 의욕과 식생활은 그것에 준하였다. 그는 신체를 장식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 몸을 억제하고 복종시켰다.

3. 그는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그의 사명과 지시를 받았다. 그가 받은 사명은 인간에게 속하거나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제사장이었지만 아무도 그점을 주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지자로서의 영광이 그의 제사장 된 존귀를 가리웠던 때문이다. 아니,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다(26절). 그는 선지자보다 훨씬 나은 자였고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으니, 구약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멀리 있는 자로 말했지만 요한은 그를 문밖에 계신 분으로 말했던 때문이다.

4. 그는 메시야의 향도관이자 선구자였고 그 자신도 구약에 예언된 인물이었다. “보라. 내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내리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할 것이다”(말 3:1).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보내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알리셔서 백성들로 그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시기 위해 그의 사자를 보내셨던 것이다. 세속적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현세적 군왕의 특성을 띠고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였다. 만일 메시야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었다면 그의 사자도 화려한 장군의 차림이나 기치를 든 전령의 호화스런 모습으로 나타났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앞서 보내진 사자가 마음과 생활의 회개 그리고 개선을 선포하면서 나타났다는 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영적 성질에 대한 충분하고도 분명한 전조가 된다. 이와 같이 맞아들인 그 나라는 확실히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5. 이런 점에서 그는 너무나 위대하여 실로 그보다 더 큰 선지자는 없었다. 선지자들은 여자가 넣은 자 중에 지극히 큰 자였고 왕궁 귀족보다 더 존귀한 자였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자”였다. 세례 요한이 전파와 세례에 착수했을 때 그 나라는 얼마나 귀중한 자가 그 안에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28절). 주께로 말미암아 그의 일에 “숙달되고 신실하도록” 자비를 얻은 복음의 사역자는 지극히 작은 자였다. 복음의 사도들이나 복음을 처음 전파한 이들은 극히 초라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훌륭한 통지 가운데 고용된 자들이기에 세례 요한보다 명예로운 직분을 맡은 자였다. 어린양을 따르는 자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자기보다 앞서 간 극히 큰 자를 훨씬 능가한다. 그러므로 복음 시대에 살고 있는 자는 책임질 일이 더욱 더 많다. 그는 확고부동하고 “시종일관한” 자였고 끈기 있고 지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먼저 이쪽으로, 그 다음에는 저쪽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바뀌는 그런 갈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갈대처럼 변덕스럽지 아니하고 반석처럼 견고하였다. 만일 그가 갈대처럼 헤롯에게 굴복하고 궁중의 환심을 샀더라면 그는 그곳의 총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 중 어느 것에도 동요되지 않았다”(흠정역, 행 20:24).그는 견줄 데 없는 “자기 부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금욕과 세상 멸시의 큰 표본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도 아니었다(25절). 반대로 그는 광야에서 지냈으며 의욕과 식생활은 그것에 준하였다. 그는 신체를 장식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 몸을 억제하고 복종시켰다.그는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그의 사명과 지시를 받았다. 그가 받은 사명은 인간에게 속하거나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제사장이었지만 아무도 그점을 주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지자로서의 영광이 그의 제사장 된 존귀를 가리웠던 때문이다. 아니,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다(26절). 그는 선지자보다 훨씬 나은 자였고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으니, 구약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멀리 있는 자로 말했지만 요한은 그를 문밖에 계신 분으로 말했던 때문이다.그는 메시야의 향도관이자 선구자였고 그 자신도 구약에 예언된 인물이었다. “보라. 내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내리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할 것이다”(말 3:1).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보내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알리셔서 백성들로 그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시기 위해 그의 사자를 보내셨던 것이다. 세속적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현세적 군왕의 특성을 띠고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였다. 만일 메시야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었다면 그의 사자도 화려한 장군의 차림이나 기치를 든 전령의 호화스런 모습으로 나타났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앞서 보내진 사자가 마음과 생활의 회개 그리고 개선을 선포하면서 나타났다는 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영적 성질에 대한 충분하고도 분명한 전조가 된다. 이와 같이 맞아들인 그 나라는 확실히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이런 점에서 그는 너무나 위대하여 실로 그보다 더 큰 선지자는 없었다. 선지자들은 여자가 넣은 자 중에 지극히 큰 자였고 왕궁 귀족보다 더 존귀한 자였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큰 자”였다. 세례 요한이 전파와 세례에 착수했을 때 그 나라는 얼마나 귀중한 자가 그 안에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28절). 주께로 말미암아 그의 일에 “숙달되고 신실하도록” 자비를 얻은 복음의 사역자는 지극히 작은 자였다. 복음의 사도들이나 복음을 처음 전파한 이들은 극히 초라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훌륭한 통지 가운데 고용된 자들이기에 세례 요한보다 명예로운 직분을 맡은 자였다. 어린양을 따르는 자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자기보다 앞서 간 극히 큰 자를 훨씬 능가한다. 그러므로 복음 시대에 살고 있는 자는 책임질 일이 더욱 더 많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 지당한 힐난을 하신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사역이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역사하심에도 불구하고 감화를 받지 않은 세대였다. 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선포하고 세례를 주는 동안에 어떤 경멸을 받았는지 설명하신다.

(1) 요한에게 존경을 나타내 자들은 평민층에 불과했다. 상류계급의 인사들의 눈에는 이들 하층민이 요한에게 명예라기보다 수치로 비쳤다(29절). 백성은 참으로 속된 무리로서 그들에게 대해서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라고 하였다.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품행이 나쁘거나 부도덕한 자로 간주되었으므로 세평이 좋지 않은 자였다. 이런 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들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서 영광스런 기념비적 존재가 되긴 했으나 세상 사람의 눈에 요한을 큰 자로 비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와 개심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 같은 자를 메시야의 사자로 임명하신 하나님의 행위와 지혜를 의롭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로써 그것이 최상의 방법이란 것을 나타내었다. 그 일이 남들에게는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기들에게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2) 교회와 국가의 큰 자들, 곧 요한에게 이 세상적인 신망을 다소 보내려 했던 그 정중한 정치가들은 요한에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온갖 굴욕을 퍼부었다. 실로 그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지만 “그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다”(30절). 경건한 신앙과 기도로 명성이 자자하던 바리새인들과, 학식 특히 성서에 대한 지식으로 유명하던 율법사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헛되이 받았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들 사자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친절한 의도를 지니셨고 그로써 그들의 구원을 도모하셨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의도에 응하였더라면 그것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 됐을 것이고 또 영원히 자기들을 위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하였고, 그것에 응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 스스로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멸망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메시야의 왕국에 적합하도록 해 줄 규율을 거절함으로써 자기들에게 주려고 의도된 이익을 그르쳤고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상실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문에 빗장을 걸었고, 스스로를 메시야의 나라에 차단시켜 버렸다. 그들은 자신을 그 나라에서 배제 시켰을 뿐더러 남까지도 방해하고 가로막았다.

2. 그는 그 세대 사람들의 이상한 패역성을 설명하신다. 그들은 요한이나 예수께 험담을 퍼부었고 편견을 품었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취하신 방법을 단지 조롱의 대상으로만 삼았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31절) 이것은 이런 말씀이다. 이들의 불합리성을 충분히 나타내려면 내가 무엇을 생각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같다. 장터의 아이들은 진지한 일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려고 온갖 방법을 다 취해 보신다. 그러나 그들은 장터의 아이들처럼 하나님께서 마치 장난이라도 하고 계시는 듯이 그 모든 조치를 농담으로 일축해버리며 하나의 구경거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많은 자들이 이 때문에 파멸을 당한다. 그들은 결코 자기 영혼의 일에 성실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산헤드린에 앉아 있던 노인들도 단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같을 뿐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놀이에 무심하듯 영원한 평강에 속하는 일에 관심하지 않았다. 눈멀고 경건치 못한 세상의 어리석음과 헛됨은 얼마나 놀라운가 ! 주님께서는 안심하고 있는 그들을 일깨우신다.

(2) 그들은 트집잡을 일을 이모저모로 계속 찾아냈다.

[1] 세례 요한은 과묵하고 근엄한 사람이었으며 고독하게 지낸 적이 많았다. 그는 겸허하고 착실하고 극기하는 자였기에 그런 자로 경모 받아야 마땅했고 사상가나 명상가로서 그의 말은 경청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칭찬이 되어야 할 이런 점이 도리어 그의 비난으로 변해 버렸다. “세례 요한이 와서 남들처럼 자유롭고, 풍성하고 즐겁게 먹고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그가 귀신들렸다고 한다”(33절)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무덤 사이에 거처하던 귀신들린 자만큼 광포하진 않으나 그와 같이 침울하고 귀신 든 자라고 말하였다.

[2] 우기 주 예수께서는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 처신을 하셨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다”(34절). 그는 바리새인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아셨지만 그들에게 가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하셨다. 그는 세리가 자기에게 명예가 되지 않는 줄 아시면서도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이 양자에게 선을 베푸시려는 바램에서 그는 그들과 흉허물없이 사귀셨다. 이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매우 상이한 기질과 성미를 소유할 수도 있으며 매우 다른 전도 방식과 생활 방식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선하고 유용하다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심은 그로써 유익하게 하려하심이다(고전 12:4-7 참조).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 모든 모든 딴 사람의 표준으로 내세워서는 안되며 자기들과 꼭 같이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 했고 그리스도는 그를 칭찬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 반대였다. 그러나 이 두 분의 공동의 적은 이 두 분을 다 비난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 하여 그를 미친 자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먹고 마신다고 하여 예수님을 그 품행이 타락된 자로 몰아쳤던 것이다. 그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예수를 혹평하였다. 악의를 품은 자는 결코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 악인들의 원한을 살펴 보라. 그들은 복음의 전파자와 고백자들이라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극히 나쁘게 해석하지 않는가 ! 그들은 이로써 복음과 복음 전파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남은 무리의 구원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35절). 지혜에 몰두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은 “지혜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혜의 안내와 통치에 복종하게 될 것이며, 자기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취하는 방법으로서도 지혜를 옳다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 방법이 그들에게는 유효할 것이며 이로써 그 방법이 잘 선택됐다는 것도 나타날 것이다. 지혜의 자녀들은 이 점에 있어서 전부가 다 이의 없다. 그들은 모두가 다 지혜의 하나님께 취하시는 은혜의 방법에 만족하며 일부 사람들에게 조소를 당한다고 하여 그것을 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선포하고 세례를 주는 동안에 어떤 경멸을 받았는지 설명하신다.요한에게 존경을 나타내 자들은 평민층에 불과했다. 상류계급의 인사들의 눈에는 이들 하층민이 요한에게 명예라기보다 수치로 비쳤다(29절). 백성은 참으로 속된 무리로서 그들에게 대해서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라고 하였다.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품행이 나쁘거나 부도덕한 자로 간주되었으므로 세평이 좋지 않은 자였다. 이런 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들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서 영광스런 기념비적 존재가 되긴 했으나 세상 사람의 눈에 요한을 큰 자로 비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와 개심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 같은 자를 메시야의 사자로 임명하신 하나님의 행위와 지혜를 의롭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로써 그것이 최상의 방법이란 것을 나타내었다. 그 일이 남들에게는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기들에게는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교회와 국가의 큰 자들, 곧 요한에게 이 세상적인 신망을 다소 보내려 했던 그 정중한 정치가들은 요한에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온갖 굴욕을 퍼부었다. 실로 그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지만 “그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다”(30절). 경건한 신앙과 기도로 명성이 자자하던 바리새인들과, 학식 특히 성서에 대한 지식으로 유명하던 율법사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헛되이 받았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들 사자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친절한 의도를 지니셨고 그로써 그들의 구원을 도모하셨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의도에 응하였더라면 그것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 됐을 것이고 또 영원히 자기들을 위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하였고, 그것에 응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 스스로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멸망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메시야의 왕국에 적합하도록 해 줄 규율을 거절함으로써 자기들에게 주려고 의도된 이익을 그르쳤고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상실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문에 빗장을 걸었고, 스스로를 메시야의 나라에 차단시켜 버렸다. 그들은 자신을 그 나라에서 배제 시켰을 뿐더러 남까지도 방해하고 가로막았다.그는 그 세대 사람들의 이상한 패역성을 설명하신다. 그들은 요한이나 예수께 험담을 퍼부었고 편견을 품었다.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취하신 방법을 단지 조롱의 대상으로만 삼았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31절) 이것은 이런 말씀이다. 이들의 불합리성을 충분히 나타내려면 내가 무엇을 생각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같다. 장터의 아이들은 진지한 일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려고 온갖 방법을 다 취해 보신다. 그러나 그들은 장터의 아이들처럼 하나님께서 마치 장난이라도 하고 계시는 듯이 그 모든 조치를 농담으로 일축해버리며 하나의 구경거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많은 자들이 이 때문에 파멸을 당한다. 그들은 결코 자기 영혼의 일에 성실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산헤드린에 앉아 있던 노인들도 단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같을 뿐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놀이에 무심하듯 영원한 평강에 속하는 일에 관심하지 않았다. 눈멀고 경건치 못한 세상의 어리석음과 헛됨은 얼마나 놀라운가 ! 주님께서는 안심하고 있는 그들을 일깨우신다.그들은 트집잡을 일을 이모저모로 계속 찾아냈다.세례 요한은 과묵하고 근엄한 사람이었으며 고독하게 지낸 적이 많았다. 그는 겸허하고 착실하고 극기하는 자였기에 그런 자로 경모 받아야 마땅했고 사상가나 명상가로서 그의 말은 경청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칭찬이 되어야 할 이런 점이 도리어 그의 비난으로 변해 버렸다. “세례 요한이 와서 남들처럼 자유롭고, 풍성하고 즐겁게 먹고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그가 귀신들렸다고 한다”(33절)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무덤 사이에 거처하던 귀신들린 자만큼 광포하진 않으나 그와 같이 침울하고 귀신 든 자라고 말하였다.우기 주 예수께서는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 처신을 하셨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셨다”(34절). 그는 바리새인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아셨지만 그들에게 가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하셨다. 그는 세리가 자기에게 명예가 되지 않는 줄 아시면서도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이 양자에게 선을 베푸시려는 바램에서 그는 그들과 흉허물없이 사귀셨다. 이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매우 상이한 기질과 성미를 소유할 수도 있으며 매우 다른 전도 방식과 생활 방식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선하고 유용하다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심은 그로써 유익하게 하려하심이다(고전 12:4-7 참조).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 모든 모든 딴 사람의 표준으로 내세워서는 안되며 자기들과 꼭 같이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 했고 그리스도는 그를 칭찬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 반대였다. 그러나 이 두 분의 공동의 적은 이 두 분을 다 비난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 하여 그를 미친 자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먹고 마신다고 하여 예수님을 그 품행이 타락된 자로 몰아쳤던 것이다. 그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예수를 혹평하였다. 악의를 품은 자는 결코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 악인들의 원한을 살펴 보라. 그들은 복음의 전파자와 고백자들이라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극히 나쁘게 해석하지 않는가 ! 그들은 이로써 복음과 복음 전파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는 것이다.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남은 무리의 구원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35절). 지혜에 몰두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은 “지혜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혜의 안내와 통치에 복종하게 될 것이며, 자기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취하는 방법으로서도 지혜를 옳다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 방법이 그들에게는 유효할 것이며 이로써 그 방법이 잘 선택됐다는 것도 나타날 것이다. 지혜의 자녀들은 이 점에 있어서 전부가 다 이의 없다. 그들은 모두가 다 지혜의 하나님께 취하시는 은혜의 방법에 만족하며 일부 사람들에게 조소를 당한다고 하여 그것을 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7:36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 (누가복음 7:36-50) 이 기사의 내용이 언제 어디서 발생한 일인지는 미상이다. 누가복음 기자는 그 서술에 있어 딴 복음서 기자들보다 시간적 순서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 기사는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받으심에 즈음하여 나오는데 이것은 그가 그들과 함께 교제하신 것이 오직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이며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라는 걸 나타낸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가까이에 용납하신 자들은 개선되었거나 그럴 가망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께 이토록 큰사랑을 나타내 보인 이 여인이 누구였는지는 나오지 않으나 흔히는 막달라 마리아라고들 한다. 그러나 본인은 그럴만한 근거를 성서 안에서 찾아보지 못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눅 8:2; 막 16:9).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한 바리새인이 그리스도께 정중한 환대를 베풀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롭게도 그 대접을 받아들이셨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셨다”(36절).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이유는 그런 귀빈을 자기 식탁에 모시면 그의 명예가 될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와 동석하면 자기와 자기 가족과 친구들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인하려 들지 않았던 때문이다(39절). 그러나 우리의 주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를 응락하시고 그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려는 소망에서 세리들과 자유롭게 동석하셨듯이 바리새인들과도 꼭 같이 자유롭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 대해 편견을 품은 자들을 가르치고 설득하기에 충분한 지혜와 은혜가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이 그런 자들과의 교제에 과감히 진입할 수 있다. Ⅱ. 그리스도가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불쌍한 죄인이 회개하면서 그에게 큰 경의를 표하였다. 그 동네에는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인은 이방인이었고 창기였으며 불명예스런 여인이었다. 아마 그런 여인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한 인생 행로에서 돌이킨 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왔다. 그녀는 다른 식으로 감사드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발을 씻기고 약간의 향유를 그 발에 부었다. 그녀는 그럴 목적으로 이 향유를 갖고 왔던 것이다. 당시 식탁에 앉는 방식은 발을 부분적으로 뒤에다 놓는 식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를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그의 뒤로 와서 여종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여종의 직분은 손님의 발을 씻기고(삼상 25:41). 향유를 준비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선한 여인이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1. 죄에 대한 그녀의 깊은 희오. 그 여인은 그리스도 뒤에서 울며 서 있었다. 그 여인의 눈은 죄의 입구와 출구였었으나 이제는 눈물의 근원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다. 그 얼굴은 과거에는 아마 화장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전에는 예쁘게 닿아 단장을 했던 그녀의 머리털이 이제는 수건으로 되었다. 우리는 그녀가 전에는 죄 때문에 슬퍼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올 기회를 얻게 되자 그 상처의 출현은 새로운 것이었으며 그녀의 슬픔도 새로운 것이었다. 침회자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오는 모든 순간에 저들의 경건한 근심과 죄악에 대한 수치감을 새로이 한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그 때에는 그가 평화를 회복하게 된다(겔 16:63).

2. 주 예수께 대한 그녀의 강한 애정. 그녀의 사랑이 많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주목하신 점이었다(42, 47절). 그녀가 그의 발을 씻긴 것은 극히 보잘 것 없는 직분이라도 주님만 영예롭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승복하겠다는 표시였다. 아니, 그녀는 그리스도의 발을 눈물 곧 기쁨의 눈물로 그의 발을 닦았다. 그녀는 자기가 구세주에게 그토록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도취경에 빠져있었다. 그분은 그녀 자신의 영혼이 사랑하던 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 입맞춤하기에 너무나 무가치한 자처럼 그의 발에 입맞추었다. 사랑하는 자는 입맞춤을 열망한다(아 1:2). 그것은 애정의 입맞춤인 동시에 경모의 입맞춤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의 명예에만 완전히 몰두하는 자답게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겼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의 발을 씻길 물이 나올 것이며 그녀의 머리털은 그의 발을 닦는 수건이 될 터였다. 그녀는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으니 이로써 그가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임을 인정한 셈이다. 그녀가 그의 발에 기름을 부은 것은 즐거움의 기름으로(히 1:9) 그의 머리에 부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라면 누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죄에 대한 그녀의 깊은 희오. 그 여인은 그리스도 뒤에서 울며 서 있었다. 그 여인의 눈은 죄의 입구와 출구였었으나 이제는 눈물의 근원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다. 그 얼굴은 과거에는 아마 화장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전에는 예쁘게 닿아 단장을 했던 그녀의 머리털이 이제는 수건으로 되었다. 우리는 그녀가 전에는 죄 때문에 슬퍼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올 기회를 얻게 되자 그 상처의 출현은 새로운 것이었으며 그녀의 슬픔도 새로운 것이었다. 침회자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오는 모든 순간에 저들의 경건한 근심과 죄악에 대한 수치감을 새로이 한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그 때에는 그가 평화를 회복하게 된다(겔 16:63).주 예수께 대한 그녀의 강한 애정. 그녀의 사랑이 많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주목하신 점이었다(42, 47절). 그녀가 그의 발을 씻긴 것은 극히 보잘 것 없는 직분이라도 주님만 영예롭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승복하겠다는 표시였다. 아니, 그녀는 그리스도의 발을 눈물 곧 기쁨의 눈물로 그의 발을 닦았다. 그녀는 자기가 구세주에게 그토록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도취경에 빠져있었다. 그분은 그녀 자신의 영혼이 사랑하던 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입술에 입맞춤하기에 너무나 무가치한 자처럼 그의 발에 입맞추었다. 사랑하는 자는 입맞춤을 열망한다(아 1:2). 그것은 애정의 입맞춤인 동시에 경모의 입맞춤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의 명예에만 완전히 몰두하는 자답게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겼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의 발을 씻길 물이 나올 것이며 그녀의 머리털은 그의 발을 닦는 수건이 될 터였다. 그녀는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으니 이로써 그가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임을 인정한 셈이다. 그녀가 그의 발에 기름을 부은 것은 즐거움의 기름으로(히 1:9) 그의 머리에 부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라면 누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Ⅲ.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께서 이 불쌍한 회개자가 표한 경의를 용납하셨다고 하여 그에게 못마땅한 생각을 품었다. “그 바리새인은 (자기 생각을 그리스도께서 아신다는 걸 거의 생각지 못하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인이 죄인이요, 이방인 여인이며 소문이 좋지 못한 여자인 줄 알 만큼 지식이 많고 따라서 그토록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걸 용납하지 않을 만큼 성결하였으리라”고 하였다. “그런 품성을 가진 자가 선지자라 할 수 있는가? 그의 마음은 그걸 보고도 동요치 않는가?” 하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교만하고 편협한 정신의 소유자는 타인도 자기들처럼 거만하고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을 살피자. 만일 그녀가 시몬 자신을 만졌다면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행한 일로 그녀를 옳다고 인정하시며 그녀의 행위를 용납한 자신도 의롭게 여기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는 것을 아시고 그에 대한 답을 주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40절). 그리스도께서는 시몬의 식탁에서 친절한 접대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잘못이 있음을 보시자 그를 책망하셨고 그의 죄를 용납하시고자 아니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반대하실 일이 있는 자에게 이르실 말이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영이 꾸짖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몬은 기꺼이 그에게 귀를 기울이려 한다.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예수를 선지자라고 믿을 수 없었다(그는 선지자만큼 엄하고 정확하지 못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생님이란 칭호를 예수께 바칠 수 있었다. 그는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으면서 주가 이르신 일은 행치 않는 자들 중에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 바리새인에게 답변하는 가운데 이렇게 이치를 따져 설득하신다. 즉 이 여인이 죄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녀는 사함 받은 죄인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회개를 전제로 한다. 그녀가 그리스도께 행한 것은 구주께 대한 큰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녀의 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은 것이다. 그토록 큰 죄인이었던 그녀가 사함을 얻었다면 딴 사람들보다 구주를 더 사랑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녀는 남들보다 자기 사랑에 대해 더 큰 증거를 보여야 했던 것이다. 만일 이것이 그녀의 사랑의 결실이었고 자기 죄가 용서함을 얻었다는 의식에서 발로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열납하시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었고 바리새인이 그 일에 역정을 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아가서 딴 것도 의도하신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께서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의심하였다. 아니, 그는 사실상 그 점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선지자 이상 가는 존재임을 나타내신다. 그는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께서 회개하여 사함 받은 죄인이 애정과 감사의 고백을 해서 마땅하다. 그의 대답 가운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게 된다. 1. 예수께서는 비유로써 시몬에게 이 여인이 죄사함을 받았을 때 보다 큰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과 보다 큰사랑을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신다(41-43절).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다 게으른 자였는데 하나는 다른 한 사람보다 그에게 열 배나 더 많이 빚을 지고 있었다. 그 빚 진 사람은 아주 마음 가볍게 그 두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고 법에 걸어 고소하지도 않았으며 그들과 그 자식들을 팔도록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고문하는 자에게 내어 주지도 않았다. 그러자 빚진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이 받은 큰 호의를 깨달았다. 그러니 이 중 어느 사람이 그를 가장 사랑하겠는가? 이 얘기가 바로 바리새인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비유였다. 이에 그 바리새인은 “틀림없이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이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바리새인의 판단은 옳았다. 여기서 우리는 빚진 자와 준 자 사이의 도리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탕감을 받고 또 탕감 받기를 희망하는 것과 같이 탕감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1) 빚진 자가 만일 갚을 게 있으면 빚을 준 자에게 그걸 변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모든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할 것이라곤 없으며 자기 소유라고 해도 편안히 누릴 수가 없다.

(2)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서 그 빚진 자로 하여금 부채를 상환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면 빚을 준 자는 그 채무자에게 엄하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냉엄한 법에 의지할 게 아니라 그의 빚을 거저 탕감해 주어야 한다. Summum jus est summa injuria ─ 즉 가혹하게까지 적용되는 법은 정당성을 잃게 된다. 무자비한 채주는 마태복음의 비유(18:23 이하)를 읽고 전율해야 할 것이다. 자비함을 보이지 않는 자들은 자비가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자기 채권자가 자비롭다는 것을 깨달은 빚진 자는 그에게 아주 고마워해야 마땅하다. 그가 달리 보상할 수가 없는 경우라면 그 채권자를 사랑하기도 해야 마땅하다. 일부 성실치 못한 채무자는 자기들 때문에 손해를 입는 채권자에게 고마워 하기는 커녕 원한을 품는다. 채권자가 불평을 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채무자들은 채권자에게 좋은 말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손해를 입는 입장에서 보면 불평할 자유가 있는 법이다. 이 비유는 창조주(Creator) 하나님을 채권자(Creditor)으로 묘사하고 있고(또는 오히려 주 예수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말하는지 모른다. 죄인들은 채무자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배울 수 있다.

[1] 죄는 빚이며 죄인들은 전능자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은 율법의 교훈에 대한 순종의 빚이다. 그걸 갚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죄인으로서 벌을 받기 쉽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물어야 할 임대료를 내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주 여호와의 물품을 써버림으로써 빚진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입힌 피해와 그에게 대한 우리 의무의 불이행을 들어 우리를 고발하신다.

[2] 어떤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남들보다 그 부채가 더 많다. “하나는 오 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하나는 오 십 데나리온을졌다.” 그 바리새인은 빚이 덜한 자였지만 그도 역시 빚진 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빚이 많은 자였다. 하나님은 그에게도 꾸어준 분이었다(눅 18:10, 11 참조). 이 여인은 추문과 악명이 높은 죄인으로서 큰 빚진 자였다. 어떤 죄인들은 그들 스스로 남보다 더 큰 채무자가 되고, 어떤 죄인들은 여러 가지 약화시키는 형편 때문에 남보다 더 큰 채무자가 된다. 즉 이를테면 그들은 극히 노골적으로 괘심한 범죄를 행한 자이며 더 큰 빚과 지식에 대적하여 범죄하고 보다 많은 확신과 경고, 보다 많은 자비와 은총의 방편에 거역하여 죄지은 자들이다.

[3] 우리의 빚이 많든 적든 간에 그것은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초과하고 있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었고 타협할 근거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부채는 막대한데 우리가 지불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은과 금은 우리 빚을 면제하지 못할 것이며, 희생 제물이나 제사로도, 일 천 마리의 수양으로도 그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도 갚지 못할 빚이며, 장래에 회개하고 순종하더라도 갚지 못할 빚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매인 빚이며,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4] 인간의 부채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조건 위에서 탕감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솔직히 불쌍한 죄인을 용서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우리의 불의로 말미암아 파멸을 당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은혜롭고 자비하신 것으로 선포하셨고 기꺼이 탕감해 주시는 분으로 선언하셨다. 그의 아들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위해 사유하심을 갚아주고 사셨으므로 그의 복음은 빛의 탕감을 그들에게 약속하며 그의 성령은 그걸 인치고 보증하시며 그들에게 그 위로를 주신다.

[5] 자기 죄를 사함 받은 자들은 자기를 사유해 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 용서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그를 더욱 더 많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회개하기 전에 더 큰 죄인이었으면 죄인이었을수록 그들은 나중에 더욱 더 훌륭한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연구해야 하며 그들의 마음은 순종하는 데 더욱 많이 경주되어야 한다. 핍박하던 사울이 전도하는 바울로 되었을 때 그는 더욱 수고를 많이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에게 대한 그 바리새인과 죄인의 상이한 태도에다 적용하신다.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선지자로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그를 의인(義認)된 상태에 있는 자로 인정하시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적게 탕감함을 받긴 하였지만 탕감을 받은 자, 용서를 받은 자로 인정하려고 하시려는 듯하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가운데서 실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얼마간 표시한 셈이었지만, 이 불쌍한 여인이 보인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살펴보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 여인은 탕감함을 많이 받은 자이다. 네 판단대로 하자면 이 여인은 너보다 많이 사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런 것으로 나타났다.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44절) 너는 이 여자를 멸시하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 너보다 얼마나 더 친절한 친구인지 잘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내가 네 호의는 받아들이고 이 여인의 호의는 거절해야 하겠느냐?”라는 말씀이다.

(1) “너는 내가 들어 왔을 때 내 발을 씻기기 위해 물대야를 들여오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내가 걸어서 피로하고 발이 더러워졌을 때 네가 물을 떠오라고 하여 내 말을 씻겨 주었더라면 그것은 나를 무척 상쾌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더 많은 일을 하였다. 그녀는 내 발을 눈물로 적셨다. 그 눈물은 내게 대한 애정의 눈물이요,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나에 대한 큰사랑의 표시로 자기 머리털로써 내 발을 씻겼다.”

(2) “너는 내 볼에 입맞추지도 않았으나(이것은 친구에게 대한 진심의 애정어린 표현이다) 저는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함으로써(45절) 겸손하고 따뜻한 사랑을 나타냈다.”

(3) “너는 으례껏 내놓는 보통 기름도 내 머리에 부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옥합에 든 보배로운 향유를 내 발에다 부었다(46절) 그녀는 이토록 너를 능가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열심 있는 기독교인의 종교적 수고와 지출을 두고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진하여 그런 데까지 도달하기를 원치 않으며 값싸고 편안한 종교에 안주하려는 결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험구를 침묵시키셨다. “내가 시몬 네게 이르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이 많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있다. “그러나 저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저의 호의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가 합당치 못한 것은 아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해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러므로 저의 사랑함이 많으니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취지로 보아 그녀의 사랑함이 많았다는 것은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녀가 그걸 위로로 깨달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사랑한다. 그는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너와 같이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네가 하듯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대한 바리새인의 사랑이 너무나 적어 정말 그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 의심할 만하다는 것을 바리새인에게 시사하셨다. 결과적으로 바리새인의 죄는 비교적 적기는 하였으나 그 적은 죄의 사함을 정말 받았는지도 그가 의문시할 만하였다. 우리는 보다 큰 죄인이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자비를 얻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원한을 갖거나 그리스도께 불평하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는 대신에 그들의 본을 보고 자극을 받아 우리들 자신이 참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불안을 일소시키셨다. 그 여인은 아마 그 바리새인의 인정없는 처신에 풀이 꺾였을 것이지만 도망칠 정도로 낙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네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48절). 우리가 죄에 대한 근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많이 표명하면 할수록 우리 죄의 용서하심에 대한 증거를 더욱 분명히 갖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가 우리를 위해 역사 하시는 은혜의 행위를 확실히 믿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됨으로써인 때문이다. 그 여인이 “네 죄 사함을 얻었다”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듣고 해방되었을 때 그 여인은 자기 수고와 비용에 대한 보상을 아주 톡톡히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녀가 다시 죄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예방책이 되었다.

(2) 그 자리에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하신다(49절)고 하시고 죄를 소멸한다고 선언하시데 대해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힐난한 자들이 있었다(마 9: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하신 말씀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그는 이전에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죄사할 권세가 있으시다는 것을 증명하셨고, 따라서 험담에 개의치 않으려고 하셨다. 여기서는 그가 죄를 사하시는 일을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신다. 그것은 그의 기쁨이었다. 그는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와 평안을 말하기를 즐겨하신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50절). 그녀가 자기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죄의 사함에 대한 그녀의 위로를 확증하고 배가 하는 말씀이었다. 죄에 대한 근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이 모든 표현은 믿음의 결과요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온갖 은혜의 믿음은 하나님을 극히 존귀하게 해드리듯, 모든 은혜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는 믿음을 또한 존귀하게 하신다. 자기 믿음이 자기를 구원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평안히 갈 수 있으며, 즐거워하면서 자기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예수께서는 비유로써 시몬에게 이 여인이 죄사함을 받았을 때 보다 큰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과 보다 큰사랑을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신다(41-43절).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다 게으른 자였는데 하나는 다른 한 사람보다 그에게 열 배나 더 많이 빚을 지고 있었다. 그 빚 진 사람은 아주 마음 가볍게 그 두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고 법에 걸어 고소하지도 않았으며 그들과 그 자식들을 팔도록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고문하는 자에게 내어 주지도 않았다. 그러자 빚진 그 두 사람은 자기들이 받은 큰 호의를 깨달았다. 그러니 이 중 어느 사람이 그를 가장 사랑하겠는가? 이 얘기가 바로 바리새인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비유였다. 이에 그 바리새인은 “틀림없이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이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바리새인의 판단은 옳았다. 여기서 우리는 빚진 자와 준 자 사이의 도리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탕감을 받고 또 탕감 받기를 희망하는 것과 같이 탕감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빚진 자가 만일 갚을 게 있으면 빚을 준 자에게 그걸 변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모든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할 것이라곤 없으며 자기 소유라고 해도 편안히 누릴 수가 없다.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가운데서 그 빚진 자로 하여금 부채를 상환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면 빚을 준 자는 그 채무자에게 엄하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냉엄한 법에 의지할 게 아니라 그의 빚을 거저 탕감해 주어야 한다. Summum jus est summa injuria ─ 즉 가혹하게까지 적용되는 법은 정당성을 잃게 된다. 무자비한 채주는 마태복음의 비유(18:23 이하)를 읽고 전율해야 할 것이다. 자비함을 보이지 않는 자들은 자비가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자기 채권자가 자비롭다는 것을 깨달은 빚진 자는 그에게 아주 고마워해야 마땅하다. 그가 달리 보상할 수가 없는 경우라면 그 채권자를 사랑하기도 해야 마땅하다. 일부 성실치 못한 채무자는 자기들 때문에 손해를 입는 채권자에게 고마워 하기는 커녕 원한을 품는다. 채권자가 불평을 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채무자들은 채권자에게 좋은 말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손해를 입는 입장에서 보면 불평할 자유가 있는 법이다. 이 비유는 창조주(Creator) 하나님을 채권자(Creditor)으로 묘사하고 있고(또는 오히려 주 예수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말하는지 모른다. 죄인들은 채무자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배울 수 있다.죄는 빚이며 죄인들은 전능자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은 율법의 교훈에 대한 순종의 빚이다. 그걸 갚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죄인으로서 벌을 받기 쉽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물어야 할 임대료를 내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주 여호와의 물품을 써버림으로써 빚진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입힌 피해와 그에게 대한 우리 의무의 불이행을 들어 우리를 고발하신다.어떤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남들보다 그 부채가 더 많다. “하나는 오 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하나는 오 십 데나리온을졌다.” 그 바리새인은 빚이 덜한 자였지만 그도 역시 빚진 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빚이 많은 자였다. 하나님은 그에게도 꾸어준 분이었다(눅 18:10, 11 참조). 이 여인은 추문과 악명이 높은 죄인으로서 큰 빚진 자였다. 어떤 죄인들은 그들 스스로 남보다 더 큰 채무자가 되고, 어떤 죄인들은 여러 가지 약화시키는 형편 때문에 남보다 더 큰 채무자가 된다. 즉 이를테면 그들은 극히 노골적으로 괘심한 범죄를 행한 자이며 더 큰 빚과 지식에 대적하여 범죄하고 보다 많은 확신과 경고, 보다 많은 자비와 은총의 방편에 거역하여 죄지은 자들이다.우리의 빚이 많든 적든 간에 그것은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초과하고 있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었고 타협할 근거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부채는 막대한데 우리가 지불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은과 금은 우리 빚을 면제하지 못할 것이며, 희생 제물이나 제사로도, 일 천 마리의 수양으로도 그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도 갚지 못할 빚이며, 장래에 회개하고 순종하더라도 갚지 못할 빚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매인 빚이며,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인간의 부채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조건 위에서 탕감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솔직히 불쌍한 죄인을 용서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우리의 불의로 말미암아 파멸을 당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은혜롭고 자비하신 것으로 선포하셨고 기꺼이 탕감해 주시는 분으로 선언하셨다. 그의 아들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위해 사유하심을 갚아주고 사셨으므로 그의 복음은 빛의 탕감을 그들에게 약속하며 그의 성령은 그걸 인치고 보증하시며 그들에게 그 위로를 주신다.자기 죄를 사함 받은 자들은 자기를 사유해 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 용서받으면 받을수록 그들은 그를 더욱 더 많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회개하기 전에 더 큰 죄인이었으면 죄인이었을수록 그들은 나중에 더욱 더 훌륭한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연구해야 하며 그들의 마음은 순종하는 데 더욱 많이 경주되어야 한다. 핍박하던 사울이 전도하는 바울로 되었을 때 그는 더욱 수고를 많이 하였다.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를 자신에게 대한 그 바리새인과 죄인의 상이한 태도에다 적용하신다.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선지자로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그를 의인(義認)된 상태에 있는 자로 인정하시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적게 탕감함을 받긴 하였지만 탕감을 받은 자, 용서를 받은 자로 인정하려고 하시려는 듯하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가운데서 실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얼마간 표시한 셈이었지만, 이 불쌍한 여인이 보인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살펴보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 여인은 탕감함을 많이 받은 자이다. 네 판단대로 하자면 이 여인은 너보다 많이 사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런 것으로 나타났다.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44절) 너는 이 여자를 멸시하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 너보다 얼마나 더 친절한 친구인지 잘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내가 네 호의는 받아들이고 이 여인의 호의는 거절해야 하겠느냐?”라는 말씀이다.”너는 내가 들어 왔을 때 내 발을 씻기기 위해 물대야를 들여오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내가 걸어서 피로하고 발이 더러워졌을 때 네가 물을 떠오라고 하여 내 말을 씻겨 주었더라면 그것은 나를 무척 상쾌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더 많은 일을 하였다. 그녀는 내 발을 눈물로 적셨다. 그 눈물은 내게 대한 애정의 눈물이요,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나에 대한 큰사랑의 표시로 자기 머리털로써 내 발을 씻겼다.””너는 내 볼에 입맞추지도 않았으나(이것은 친구에게 대한 진심의 애정어린 표현이다) 저는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함으로써(45절) 겸손하고 따뜻한 사랑을 나타냈다.””너는 으례껏 내놓는 보통 기름도 내 머리에 부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옥합에 든 보배로운 향유를 내 발에다 부었다(46절) 그녀는 이토록 너를 능가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열심 있는 기독교인의 종교적 수고와 지출을 두고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진하여 그런 데까지 도달하기를 원치 않으며 값싸고 편안한 종교에 안주하려는 결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험구를 침묵시키셨다. “내가 시몬 네게 이르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이 많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있다. “그러나 저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저의 호의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가 합당치 못한 것은 아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해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그러므로 저의 사랑함이 많으니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취지로 보아 그녀의 사랑함이 많았다는 것은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녀가 그걸 위로로 깨달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사랑한다. 그는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너와 같이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네가 하듯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대한 바리새인의 사랑이 너무나 적어 정말 그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 의심할 만하다는 것을 바리새인에게 시사하셨다. 결과적으로 바리새인의 죄는 비교적 적기는 하였으나 그 적은 죄의 사함을 정말 받았는지도 그가 의문시할 만하였다. 우리는 보다 큰 죄인이 회개하여 그리스도께 자비를 얻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원한을 갖거나 그리스도께 불평하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는 대신에 그들의 본을 보고 자극을 받아 우리들 자신이 참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불안을 일소시키셨다. 그 여인은 아마 그 바리새인의 인정없는 처신에 풀이 꺾였을 것이지만 도망칠 정도로 낙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네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48절). 우리가 죄에 대한 근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많이 표명하면 할수록 우리 죄의 용서하심에 대한 증거를 더욱 분명히 갖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가 우리를 위해 역사 하시는 은혜의 행위를 확실히 믿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됨으로써인 때문이다. 그 여인이 “네 죄 사함을 얻었다”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듣고 해방되었을 때 그 여인은 자기 수고와 비용에 대한 보상을 아주 톡톡히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녀가 다시 죄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예방책이 되었다.그 자리에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하신다(49절)고 하시고 죄를 소멸한다고 선언하시데 대해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힐난한 자들이 있었다(마 9: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하신 말씀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그는 이전에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죄사할 권세가 있으시다는 것을 증명하셨고, 따라서 험담에 개의치 않으려고 하셨다. 여기서는 그가 죄를 사하시는 일을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신다. 그것은 그의 기쁨이었다. 그는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와 평안을 말하기를 즐겨하신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50절). 그녀가 자기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죄의 사함에 대한 그녀의 위로를 확증하고 배가 하는 말씀이었다. 죄에 대한 근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이 모든 표현은 믿음의 결과요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온갖 은혜의 믿음은 하나님을 극히 존귀하게 해드리듯, 모든 은혜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는 믿음을 또한 존귀하게 하신다. 자기 믿음이 자기를 구원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평안히 갈 수 있으며, 즐거워하면서 자기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스크랩] 누가복음 7장 주석

누가복음 7장

7:1-10 백부장 하인 고침

7:11-17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림

7:18-23 세례 요한의 질문

7:24-35 요한을 칭찬하심

7:36-39 한 여자가 예수께 향유를 부음

7:40-50 두 빚진 자의 비유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다(마 8:5-13; 요 4:43-54)

(눅 7: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마7:28

(눅 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눅 7: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눅 7: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눅 7: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눅 7: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5:8

(눅 7: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1)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눅15:19

(눅 7: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8:9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막6:6 , 마21:31 , 롬3:1

(눅 7: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다

(눅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눅 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렘6:26 , 슥12:10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눅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눅 7: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마9:26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다(마 11:2-19)

(눅 7: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마11:2

(눅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 7: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2)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눅 7: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눅 7: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

(눅 7: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눅 7: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11:7 , 마3:5

(눅 7: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마3:4

(눅 7: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눅1:76

(눅 7:27) 기록된 바 ㄱ)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사40:3

(눅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눅 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2)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눅 7: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2)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눅 7: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마11:16

(눅 7: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슥8:5 , 막9:36 , 막10:15

(눅 7:33) 2)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눅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 7: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11:19 , 고전1:23 , 고전1:24

한 여자가 예수께 향유를 붓다

(눅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3) 앉으셨을 때에 요12:42

(눅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3)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있는지라(유대인이 음식 먹을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4)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4)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눅8:38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마9:2 , 막2:5

(눅 7: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7:49) 함께 3)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1. 어떤 사본에,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2. 헬, 또는 침례 3. 헬, 기대어 누워 있는지라(유대인이 음식 먹을 때에 가지는 자세) 4. 은전의 명칭

7:1-10 백부장 하인 고침 마8:5-13 , 요4:43-54 비교하라

가버나움 에서 있었던 백부장 하인의 병 고침 사건에 대해서 누가는 이방인에게 관심 있는 저자로서 흥미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누가는 이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2절 백부장 @Ekatontavrcou (헤카톤트알쿠) “백명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의 군대는 백부장(대위) 아래는 십부장(하사)이 있고 위로는 천부장과 패권자가 있었다. 대대는 여섯 중대(백 인대)로 이루어지고 한 군단(a legion)은 10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어떤 백부장 이라고만 소개되어 정확히 이 사람의 신상은 알 수 없으며 주석가들의 추측은 무성하다. (렌스키는 평화로운 시기에 가버나움 에는 로마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장교는 헤롯 안디바 의 용병이었고, 그의 군대는 다 민족 외국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부하를 다루는 입장에서 자신들의 행동이 신중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신약 성경에 소개된 이들은 모두 좋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책임자도 백부장 이었는데 눅23:47 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고 나온다. 그리고 사도행전 10:1 , 22, 21:32, 22,25, 26, 23:17, 23, 24:23, 27:1, 6, 11, 31, 43에도 나타난다.

사랑하는 e[ntimo” (엔티모스) “존경하는, 가치 있는, 덕망 있는”의 뜻이다. 종 마태는 하인 pai'” (파이스) “소자”라고 했지만 누가는 솔직하게 dou’lo” (둘로스) “노예, 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떤 연유로 이 집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종의 신분인 이 하인은 상당히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 분명하다.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누가는 어떤 병인지를 밝히지 않았으나 마태는 중풍병( 마8:6 )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었다고 기록함으로 그의 병이 심각한 상태임을 나타내고 있다.

3-5절 장로 몇을 presbutevrou” (프로스뷔테루스)로 복수형 “장로”를 사용함으로 [장로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장로 들은 백부장의 신상을 이야기했다. 5절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회당을 지었나이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미리부터 백부장은 예수께 보낸 장로 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백부장의 이러한 청에 장로 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백부장이 장로 들을 대신 보냈던 것은 아마도 로마 군인의 신분으로 예수께 다가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중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유대인 장로 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6절 함께 가실새 백부장은 이 집에 거의 도착을 했을 때쯤 다시 친구 들을 보내어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했다. 자신은 이방인 군인이고 예수께서는 메시야 인데 감히 자신이 예수께 나설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덧붙여 설명하기를 8절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라고 고백했다.

7절 말씀만 eijpe; lovgw/ (에이페 로고)은 [말씀으로 명령하소서]이다. 예수께서는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실 때도 모두 명령으로 고치셨다. 이 백부장은 당연히 예수께서 폭풍도 잔잔케 하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신 사건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럼으로 자신의 하인의 병도 예수님의 말씀(명령) 한마디면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 백부장의 믿음을 9절 기이히 여겨 ejqauvmasen (에다우마센) “놀라다”로 기대 밖의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고 하셨다. 마태는 이 부분에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였다. 누가는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명령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10절 강건하여졌더라 uJpostrevyante” (휘가아니논타)인데 “뒤돌리다, 원래대로”란 뜻인데 여기서는 “이미 병이 낳았다”는 말이다. 마5:31 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와 같은 상태이다.

* 이 사건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상세히 관찰해야 한다. 누가는 상황적인 면을 상세히 기록했으며 마태는 병고침에 관한 부분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 차이가 있다. 마태는 백부장이 예수께 직접 온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것은 생략이라고 보이며, 이 부분에서는 누가가 장로 들을 대신 보낸 것을 자세히 다룬 것으로 보인다. 병명을 알려준 것과 마8:13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를 추가한 것은 마태가 더 상세히 다룬다. 7:11-17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림

이 사건은 누가복음에만 언급된 기사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에 세 번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첫 번째 본문이 본 기사이고 두 번째가 “회당장 야이로 의 딸을 살리신 일”( 눅8:41-42 , 49-56), 세 번째는 “나사로를 살리신 일”( 요11:1-44 ) 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리스도가 부활의 주요 그 자신이 생명이심을 확증하는 사건들이다.

누가는 먼저 이 사건의 상황을 조용한 곳에서 몇 명이 보는데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1절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라고 기록함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증인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12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장지로 가던 과부의 독자 상여를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과 상여의 무리들이 마주치게 되었다. 성의 많은 무리가 따른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의 슬픔을 함께 애도하고 죽은 독자나 이 과부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것 같다. 독자를 잃은 과부의 슬픔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이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울지 말라 고 하셨다. 예수는 이미 마음속에서 그를 살리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이유를 몰랐다.

14절 관에 손을 대시니 율법에 의하면 관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것이었다( 레22:4 , 민19:11 ). 그러나 이미 예수께서는 그러한 율법을 초월하고 계신 분이었다.

일어나라 ejgevrqhti (에겔데티)는 말은 죽은 자를 살리실 때 모두 같은 명령을 사용하셨다( 마17:7 , 막5:40 , 눅8:54 , 요11:43 ).

7:18-23 세례 요한의 질문

마11:1-19 , 14:1-21 비교하라

세례요한은 1년도 못되는 짧은 사역의 기간을 보냈는데 그는 갑자기 사형에 처할 위치에 있었고 감옥에서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오실 메시야 가 분명하다면 자신을 구원해 주고 그가 부르짖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에게도 별로 관심이 없고 세상을 심판하실 어떤 의지도 보여주지 않고 계셨다. 자신은 감옥에 있는데 그저 병자들이나 고쳐주고 다니는 그런 예수를 보고 답답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답답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예수께 제자를 보내 질문한다. 누가는 세례요한이 옥중에 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이것은 마태가 밝혔다( 마11:2 ).

19절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는 요한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했지만 흔들리고있는 증거이다. 오실 그이 는 메시야 를 가리키는 것이다( 시40:7 , 시118:26 , 단7:13 ).

21-23절 예수께서는 요한의 질문에 현재 그의 사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말함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소경( 사29:18 , 사35:5 – > 마15:31 , 막10:46-52 ), 앉은뱅이( 사35:6 , 사61:1 – > 마15:31 ), 문둥병 ( 사61:1 – > 마8:3 , 눅17:14 ), 죽은 자와 가난한 자( 사61:1 – > 눅8:54 , 눅4:18 )에게 구원이 베풀어지고 있다.

23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 o}” eja;n mh; skandalisqh’/ ejn ejmoi v(호스 에안메- 스칸달리스데 엔 에모이)는 문맥으로 보아 특정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부정적 관계의 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계속되는 “경고 성이 섞인 축복의”말씀이다.

7:24-35 요한을 칭찬하심

24절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사람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갔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광야에서는 무섭게 불어 치는 바람은 잘 불지만 흔들리는 가늘 바람과 갈대는 없다.

25절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는 예수께서 요한이 왕궁에 있는 대신이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26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고 세례요한에 대해서 증거 하신다.

28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사람에게 있어서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는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그으셨다. 이 말이 자칫 요한 개인의 위치를 축소시키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께서는 요한과 예수 자신(하나님의 것)을 비교하여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훈하기 위한 비교인 것이다.

7:36-39 한 여자가 예수께 향유를 부음

이 부분은 예수께서 시몬 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사건은 십자가 사건 바로 직전에 있었던( 마26:6-13 , 막14:3-9 , 요12:1-8 ) 사건과 유사하다.

(학자들은 같은 사건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다른 사건으로 보는 학자들은 사건의 시기가 전혀 맞지 않는 다는 것이며 이런 일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누가는 모든 사건을 발생한 순서대로만 편집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다른 복음서에 다 기록된 이 사건이 누가복음에는 또 다른 곳에 비슷한 사건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다른 사건들에서도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견해는 언제나 그랬듯이 어느 경우가 옳다는 것에 무게의 중심을 두지 않고 다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고자 함에 있다.)

마가복음의 경우를 참고하라

7:40-50 두 빚진 자의 비유

42절 탕감하여 ejcarivsato (에카리사토) “취소하다, 무효화하다, 용서하다”의 부정 과거형이다.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행하여졌음을 말하고 있다. 원어의 단어는 눅7:21 , 빌2:9 에도 나타나지만 한글성경에는 비슷한 단어로 변역 된 것이 없다. 눅7:42 , 43에는 “탕감”으로 엡4:32 , 골3:13 에는 “용서”로 나온다.

47절 많은 pollai v(폴라이) “수많은, 허다한”의 뜻으로 모두를 내포한다. 아무리 크고 많은 죄라 할지라도 모두 사하여졌도다 ajfivetai (아페온타이) 완료형 동사로 모든 죄가 사해져서 온전한 상태가 되었음을 말한다.

50절 구원하였으니 sevswkevn (세소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받은 상태를 말한다. 향유를 부은 행위에서가 아니라 이미 그의 마음에 구원을 받을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예수께서 이미 확보된 구원을 선언하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 춘천 대우인력

메모 :

누가복음 7장

<누가복음 7장 흐름정리>

백부장 하인의 치료 기사는 주님의 구원 사역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될 것을 암시한다. 실제 이 같은 일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제자들의 전도 활동을 통해 성취되었다. 본 장의 두 번째 이적인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사건은 주님의 은혜로우신 방문이 부각되어 있다. 주의 탄생 기사에서처럼 주님의 오심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었다. 한편, 누가는 침례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반응을 본 장 중간에 언급한 다음 ‘향유 사건’으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서 시몬은 자기 의에 도취된 자를, 여인은 용서받은 죄인을 각각 상징한다. 누구든 스스로 죄 없다 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7장 줄거리>

1. 그리스도가 이방인 백부장에게서 어떤 유대인보다 더 큰 믿음을 발견함.

10. 현장에 있지 않은 백부장의 종을 치유함.

11.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림.

19. 그리스도가 자신의 이적들을 보여 줌으로 요한의 제자들에게 답변함.

24. 요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증거함.

30. 요한의 방식으로도 예수의 방식으로도 설득되지 않는 유대인들을 호되게 꾸짖음.

36.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를 통해 어떻게 그가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지를 보여 준 것은 그들의 죄를 지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믿음과 회개를 근거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임.

<누가복음 7장 도움말>

* 2절 : 백부장.

“100[사람]의 지휘관”을 뜻함. 즉 백인대라고 불리는 로마 군대의 대장. 백인대 병사의 수는 50명에서 100명까지 다양하다. 바로 이 백부장은 아마도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치안을 담당한 일단의 로마 병사들을 관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사 가운데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백부장은 유대인 개종자가 아니었다. 신약에 언급된 백부장들은 모두 훌륭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 3절 :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에 대한 백부장의 지식은 구세주의 놀라운 일들에 대해 들은 소문에 제한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예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 9절 : 기이히 여겨.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족하다고 믿은 백부장의 믿음은 그 자체로서 비범했다. 백부장이 예수를 한 번이라도 보거나 대화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특히 유대인과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믿음을 행사하는 데 더딘 점에 견주어 그의 믿음은 더욱 괄목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백부장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믿음을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 19절 : 주께 보내어.

요한이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에게 보낸 것은, 예수와 개인적인 면담을 통해 신앙이 확고하게 되어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믿음을 북돋우는 기별을 가져오고 요한도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개인적인 기별을 얻으려는 마음에서였다.

* 22절 : 가난한 자.

평범하고 배우지 못한 농부들과 노동자들은 거만한 바리새인들과 유식한 랍비들에게는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대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열린 마음과 단순한 믿음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매력을 느꼈고, 그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인들 중에서 “가난한 자들”은 종종 세상의 재물에도 가난할 뿐 아니라, 권력과 영향력 있는 지위의 사람들에게 억압과 고통을 당했다.

* 37절 : 향유.

팔레스타인에서 보통 “향유”는 감람유에 향신료나 기타 방향제를 첨가해서 만들었다. 마리아의 “향유”는 “매우 값진” 나드였는데, 아마도 이것은 나르도스타퀴스 야타만시의 향기로운 뿌리에서 추출했을 것이다. 이 식물은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에서 자생하며, 고대에 향유와 약품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만약 마리아의 “향유”가 북부 인도의 산지에서 들여온 것이라면, 그것이 “매우 값진” 것으로 여겨졌다고 의아해 할 필요가 없다. 막 14:5에 의하면 그 가치는 대략 300로마 데나리온이다. 이것이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의 300일 임금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군주들에게나 어울리는 그토록 값진 선물은 마리아 개인의 큰 희생을 보여 주었다.

* 38절 : 자기 머리털.

여자가 공중 앞에서 머리털을 풀어 헤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망신거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해 수건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머리털을 풀어 헤친 것이다.

[누가복음 7장 설교말씀] 가난한 자를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눅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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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7장 설교말씀 중에서 가난한 자를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가난한 자를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눅 7 : 11 – 17)

눅 7:11-17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회복하시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어떤 백 부장을 만나게 되는데, 자신의 종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종을 고쳐달라고 백 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때에 주님께서 가고자 했으나 백 부장은 감당하기 어려우니 말씀으로만 하셔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백 부장에게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고 나서 백 부장의 종은 고침을 받았고, 예수님은 그 후에 나인이라는 성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정상에서 벗어난 자체가 가난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질이 부족하여 가난한 것도 있지만 과부도 가난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여자들의 삶은 남자의 그늘에서 보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 아버지의 그늘에 있다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그늘에서 보호를 받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그늘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시대의 여자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나인 성의 과부는 너무나 가난해졌습니다 . 물질적으로도 가난했지만, 이미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일차적으로 가난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의지하여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런 아들마저 어머니보다 먼저 죽게 된 것입니다. 이 과부는 심히 가난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이 보시고,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이 나인 성의 과부와 같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죄악 속에서 살았던 인생입니다. 비정상적인 인생을 살면서 과부와 같은 영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나인 성의 과부의 가난을 치료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의 가난이 치료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영적 진리는 무엇일까요?

첫째,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눅7:11-12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예수님께서는 백 부장의 종을 치료하셔서 질병의 가난에서 회복시켜 주시고 나인 성으로 들어오시고 있습니다. 이때에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데 마침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아들은 과부의 아들로서 독자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들어가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유 없이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인으로 들어가는 주님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나인’은 נעים(나임 5273) 즐거운, 기분 좋은, 아름다운, 자비로운,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의도입니다. 현재 이곳은 심히 가난한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 아주 침울한 상태입니다. 마음이 우울할 수밖에 없고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주님이 들어가시니 침울했던 상황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죽음의 더러웠던 것이 생명의 아름다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직접 찾아가셔서 이렇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게 되고, 과부의 우울한 마음이 완전하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생명의 빛이 임하여 추악한 죽음의 흑암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생명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겔47:8-9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동쪽으로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게 되고 이 물이 죽었던 바다의 물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강물이 가는 곳마다 번성하고 생물이 살아나고 고기가 없었던 곳에 고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는 곳마다 죽었던 생명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인 성의 과부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은 현재 과부로서 아들마저 죽었으니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주님께서는 생수의 복음을 통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영혼과 육신의 고통을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시간 생수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나인 성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과부처럼 인생에서 소망이 없었던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내 영혼에 죄악으로 가득 채워져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메고 나오니’ εκκομιζω(엑코미조 1580) 메고 나오다, 운반해 나오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εκ(에크 1537) ~에서부터 멀리, 라는 뜻과 κομιζω(코미조 2865) 가지다, 얻다, 당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현재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은 죽음을 당하여 생명으로부터 멀리 떠났습니다.

이렇게 죽은 시체를 사람들이 관에 넣고 어깨에 메어 운반하여 장사를 지내려고 예수님 앞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들이 죽은 것은 역사적으로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에서 영원히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들이 죽은 것은 당연한 것이며, 정한 이치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주님이 찾아오심으로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져내주시고 죽음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 그리고 생명을 얻게 하시고 구원을 받아 영원히 가난한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εκκλησια(에클레시아 1577)입니다. 여기에서 ‘에크’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여 죄악에서 불러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처럼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교회로 불러주셔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아래 영상을 보시면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됩니다.

둘째,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눅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하시고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여인에게 울지 말라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사’가 신약 히브리어로 רחם(라함 7356) 은혜, 마음, 자궁, 불쌍히 여김, 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과부를 보시고 아들마저 죽었으니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여인을 보시고, 창자가 타들어 가는듯한 고통으로 불쌍히 여겨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 이 여인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주님이 불쌍히 보시고 더 이상 죄악 가운데 있는 것을 고민하지 말라 하시고 죽음의 가난에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울지 말라’ κλαιω(클라이오 2799) 슬퍼하다, 통곡하다, 눈물 흘리다, 라는 뜻입니다. 과부는 현재 고통 속에 있습니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아들마저 죽고 나니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물만이 고여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슬퍼서 통곡하고 있지만 입으로는 나오지 않고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주님은 아시고 울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두 해결해 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통곡도 하지 말고 주님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울음을 그치고 통곡을 멈추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현재 우리도 영원한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해야 하는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 내가 너의 모든 원죄와 자 범죄를 갚아주었으니 더 이상 죄와 사망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통곡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으로 인하여 해방되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영원한 가난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주님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셋째,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눅7:14-15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고 아들이 누워있는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청년을 향하여 명령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명령하시니 죽었던 자가 관을 뚫고 일어나 앉고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청년아’ 신약 히브리어에 עלם(엘렘 5958) 청년, 젊은이,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לם(알람 5956) 은밀하다, 숨겨지다, 감추어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을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청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감추어 놓으신 복음의 비밀과 생명의 비밀을 나인 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며 은밀한 복음의 계시를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심으로 영원히 죄악 가운데 죽었던 영혼들을 생명으로 살려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것은 아무나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이미 선택되어서 감추어진 자들을 주님께서 밝히 보여주시고 나타내 주셔서 살려주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추어져 있던 자들입니다. 만세전에 선택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살려주시지 않았다면 절대 선택되어있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이 살려주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일어나라’ εγειρω(에게이로 1453) 깨우다, 살아나다, 세우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어있는 과부의 아들에게 명령하셔서 일어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들이 죽음에서 벌떡 일어나 살아나게 되었고 세워짐을 받아 주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이 이 아들을 살리신 것은 과거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죽었던 자를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있는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죽음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주권이며,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살기 위하여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죄의 죽음에서 있다가 구원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나기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아니 죄인이라 할 수도 없고,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 그런데 주님께서 일어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주님이 죽으시고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을 믿은 것도 내 의지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공로라는 것입니다.

넷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눅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자신들 앞에 큰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과부의 아들을 고쳐주심으로 인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선포함으로 죽었던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인 성의 과부가 가난에서 회복되는 사건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들도 이와 같은 죽음의 가난에서 고통스럽게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인이라는 동네는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즐거운 장소이며 동네입니다. 이런 곳에 장사를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났다는 것은 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만세전에 택함 받은 백성들도 결국은 죽어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두가 죽어있었는데 택함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통곡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꾸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시간 내가 나인 성의 과부였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이 찾아오셔서 가난을 회복시켜 주시고 영혼이 영원히 진노받을 만한데도 주님께서 치료해 주셔서 구원의 반열에 올라오게 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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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규의 온새기&월새기

누가복음 7장 36-50절

(36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절)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절)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절)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절)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 (누가복음 7장 36-50절)

(알림) 온새기 월요일말씀과 홈페이지 주일설교의 차이

매주 월요일은 전날의 주일설교를 일부 발췌해서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로 보내는 날입니다.

오늘은 어제 주일설교의 약 60%를 발췌해서 보냅니다.

주일설교 100% 원문을 보기를 원하면 본 홈페이지 ‘주일설교’ 란에서 보시면 됩니다

어느 날, 캐나다에서 백인 교회당을 빌려 예배드리는 한 한인 이민교회가 지역의 한인 노인들을 위한 노인회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때 한인 목사님은 자신이 설교 준비를 하고 백인교회 목사님에게 성경 봉독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소통이 잘못되어 백인 목사님이 성경 봉독 후에 그냥 설교까지 했습니다. 갑자기 통역해야 할 상황이 되어 목사님이 고민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확신을 주셨습니다. “네가 준비한 설교를 그냥 전하라.”통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배짱입니다. 그래서 백인 목사님이 설교하면 목사님은 통역하는 척 하면서 자기가 준비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어르신들이 큰 은혜를 받고 예배 후에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몰랐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예배당을 나서는데 갑자기 문 앞에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유학생이 서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당황해서 물었습니다. “자네 어떻게 된 일인가?” 그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가 뒤에서 목사님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목사님 배짱이 대단하시던데요.”숨긴 것은 언젠가 드러납니다. 충성도 고난의 시험을 당해봐야 그 진위가 드러납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질문하면 자기 시켜달라고 “저요! 저요!”라고 손들지만 그 표시로는 실력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시험을 쳐보면 감춰진 실력이 다 드러나고 그 점수에 따라 진로가 달라집니다. 교회에서도 힘써 충성하면 앞날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주시고(계 22:12),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갈 6:7). 그처럼 진실한 충성과 헌신은 나중에 엄청난 이자가 붙어 열매로 돌아올 것입니다.어느 날, 한 집사가 천국에 간 꿈을 꿨습니다. 그때 한 저택을 천사가 공사하고 있어서 물었습니다. “천사님! 저 집은 누구 집인가요?”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네 담임목사 집이다.” 그러자 그는 “야! 우리 목사님 좋겠네요.”라고 하며 다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천사님! 제 집은 어디에 있나요” 천사가 말했습니다. “네 집은 보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졸랐습니다. “그래도 보고 싶어요. 제발 보여 주세요.”너무 졸라대서 할 수 없이 천사가 그를 한 작은 초가집으로 인도한 후에 말했습니다. “이것이 네 집이다.” 그가 큰 충격을 받고 말했습니다. “천사님! 어떻게 이런 초가집에서 영원히 사나요? 너무 불공평해요. 좋은 곳으로 이사 가게 해주세요.”그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불공평이 진짜 공평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 천국 집은 땅에서 헌신한 대로 지어져서 천국에는 이사가 없다.” 그 이사가 없다는 말이 더 무서워서 그가 눈물로 부탁했습니다. “천사님! 그래도 부끄러워서 도저히 이런 집에서 못살아요. 저를 세상에 다시 보내주시면 충성하다 올 테니 다시 세상에 보내 주세요.” 그렇게 발버둥 치다 꿈에서 깨었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충성했습니다.항상 천국 상급을 꿈꾸며 더욱 충성하십시오. 어떤 분은 주일에 1시간 이상 차를 몰고 와서 예배하고 충성합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어떤 집사님은 큰 식당을 하는데 식당을 하루 닫으면 몇 천만 원을 손해 보지만 그래도 주일에는 꼭 닫습니다. 그러자 다른 6일 동안 손님이 더 몰려와 이틀 전에 예약해야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헌신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사랑은 자기 간까지 빼주면서도 기뻐하게 만듭니다. 역대상 29장을 보면, 다윗이 “주의 전을 위해 내 힘을 다해 드렸다.”고 기뻐합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왕을 따라 바치면서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받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드리면서 그렇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즐겁게 나누게 됩니다. 그 나눔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나눔을 포기하지 마십시오.이번 제주 총회를 위해 우리 교회는 힘써 헌신했습니다. 해외에서 고생하는 목사님과 선교사님들에게 최대한의 안식과 기쁨을 드리려고 좋은 호텔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이런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왜 그렇게 좋은 호텔을 잡았느냐? 그 돈을 절약해서 선교지로 보내지.” 언뜻 보면 굉장히 정의로운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헌신 대상은 전적으로 헌신자의 마음과 가치관과 감동에 따라 정하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유치원을 짓는 것도 소중하지만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선교사님이 오랜만에 고국에 방문했을 때 좋은 잠자리와 식사로 대접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정으로 자기 교회 몸집만 키우는 교회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 문제가 되지만 순수하고 선한 나눔을 남이 왈가왈부하면 안 됩니다.어느 날, 한 사람이 후진양성에 써달라고 대학에 백억 원을 기증하자 누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지금 선교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는데 왜 대학에는 그렇게 거금을 기부하면서 선교지에는 한 푼도 안 보냅니까?” 언뜻 보면 정의로운 말 같지만 사실상 그 말은 그가 할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선교하고 싶다면 조용히 자신의 물질을 선교지로 보내면 됩니다.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에게 가룟 유다가 주도해서 그녀를 비판했습니다. “왜 그 물질을 낭비하느냐?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지.” 언뜻 보면 대단히 정의로운 말 같지만 자기 헌신이 없이 말만 정의롭게 하는 가룟 유다의 정의는 진짜 정의가 아닙니다.본문에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 여인이 주님에게 최선의 헌신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어느 날,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36절).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40절). 왜 그가 예수님을 초청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고 예수님이 위대한 선지자인지 시험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도로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근처에 살던 한 죄인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38절).당시 성별된 존재에게 기름을 부을 때는 머리에 부었는데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선 채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수 없다는 지극한 겸손과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그때 그녀의 모습은 관능적인 모습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신체접촉을 용납했습니다. 사람들의 평판보다는 상처 입은 한 영혼의 회복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접촉을 통해 그녀는 모든 상처와 영혼이 치유되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어린애들은 배가 아플 때 엄마 아빠가 손으로 배를 문질러주면 다 나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의 손길을 경험하며 사랑의 접촉을 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처럼 성도도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해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몸으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과 몸으로 접촉합니까? 영매가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되어주는 것이 예수님과 몸으로 접촉하는 방법입니다.테레사 수녀는 행려병자들의 몸을 씻겨주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예수님과 접촉했습니다. 그때 행려병자들에게 수녀님의 손길은 예수님의 손길이었고, 수녀님에게 행려병자들의 몸은 예수님의 몸이었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닌 몸의 접촉입니다. 그처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사랑하고 섬길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어둔 세상을 어루만지고 그때 예수님도 그 가운데 현존하실 것입니다.이제 능력을 받겠다고 이상한 집회를 쫓아다니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의 손길을 체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능력 있는 주의 종으로부터 안수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몸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주님께 산 제물로 바칠 때 주님은 그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기도는 ‘필요의 표현’과 동시에 ‘마음의 소통’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마음도 토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느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의 소통이 없이 바리새인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시험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다(39절).” 아마 속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 비싼 향유를 왜 낭비하는가? 차라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지.”사람은 누군가 탁월한 헌신을 하면 칭찬보다는 시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헌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이상한 논리들을 구사할 때가 많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 시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런 죄인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저건 어리석은 낭비야! 어디 예수님이 그 죄 많은 여자를 어떻게 대하나 보자!”시몬은 그녀의 현재의 놀라운 헌신은 보지 않고 오직 그녀의 과거의 전력만 보고 정죄했습니다. 정죄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과거의 나쁜 모습으로 규정해버리고 사람의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런 편견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사람을 볼 때 과거의 모습이 아닌 미래의 모습으로 보시고 그 미래의 모습을 성취하도록 사랑으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죄인임을 알았지만 그녀가 나름대로 사랑을 표현하도록 허용하심으로 그녀의 깊은 곳에 숨겨진 순결함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방법입니다.그 예수님의 마음도 모르고 시몬은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면 그녀가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만약 예수님이 그녀의 행동을 그냥 용납하면 진짜 선지자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그런 판단하는 마음을 아시고 주님은 물었습니다. “시몬아!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 있는데 둘의 빚을 탕감해주면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많이 탕감함을 받은 사람입니다.”그 대답을 듣고 주님이 시몬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내 발을 닦았다. 너는 내게 입 맞추지도 않았는데 이 여인은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값싼 감람유도 붓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그것은 이 여인이 더 많은 죄를 탕감 받아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함 받았다.”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누구기에 죄도 사하는가?” 그러나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셨습니다. 얼마나 긍휼이 넘치는 주님입니까? 이제 누군가 연약한 사람을 대할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를 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시몬은 율법은 열심히 지켰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습니다. 요새도 사방에 교회와 교인은 많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적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빚을 진 자로서 그 빚진 사랑을 갚으려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입니다.이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힘써 도우십시오.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 눈이 밝아집니다. 영안이 있기를 원하면 제발 관상기도를 배우러 다니거나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을 쫓아다니는 집회 중독 성도가 되지 마십시오. 그 시간에 차라리 나눔을 힘써 실천할 때 영안이 더 좋아집니다. 사람은 인색함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 영안도 깊어지고 은총과 기쁨의 샘도 넘치게 됩니다.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 많이 드려야 하지만 드릴 주님이 세상에는 안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뜻을 따라 거룩한 일에 드리면 됩니다. 그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드림의 기초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힘 있는 곳이 아닌 힘이 없는 곳에 드리고, 물질이 넘치는 곳이 아닌 물질이 없는 곳에 드리고, 물질을 잘 쓰지 못하는 곳이 아닌 물질을 잘 쓰는 곳에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림만큼 나눔도 중요합니다.지난 총회 직전에 몽골로 선교를 떠나는 한 절친했던 대학 동기동창을 만났습니다. 서울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무슨 감동이 생겼는지 연구소를 떠나 40대 후반에 미국에 가서 남침례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50대 초반에 몽골 국제대학의 생물학과 교수 및 선교사로 떠나는 그 친구를 거의 10년 만에 만났습니다.거의 무일푼으로 무작정 사명을 따라 선교를 떠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물었습니다. “사례는 있어?” 사례는 있지만 한 달 사례가 고작 200불이었습니다. 안타까워서 또 물었습니다. “후원자는 있어?” 그러나 사역 초기여서 후원자도 거의 전무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중고차라도 한 대 후원해주고 싶었지만 총회 재정문제 해결이 시급했기에 아무런 도움이나 약속을 주지 못하고 그냥 몽골로 떠나보냈습니다. 그 친구 이름은 김 영수입니다. 김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김 선교사님이 울란바토르에 도착하던 날, 황량한 공항에서 심한 교통체증을 뚫고 몽골 국제대학 기숙사로 들어갈 때 늦둥이 초등학생 아들이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보던 깨끗한 집들과 푸른 잔디와 잘 정돈된 거리 대신에 갑자기 회색빛 거리와 비포장 인도와 먼지 날리는 중고차들을 보면서 선교하는 아빠를 따라 나선 어린 아들이 얼마나 서러우면 그렇게 울었겠습니까? 그처럼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문화 충격과 가족의 눈물과 상처를 무릅쓰고 선교지로 갔기에 지금까지 복음의 전진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전방 선교사들을 위해 우리의 소중한 물질이 쓰이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겠습니까?은혜는 ‘자기를 위한 보신의 삶’을 ‘남을 위한 헌신의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은 자로서 이제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려고 오셨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한 차원 더 나아가 “예수님이 나를 향해 죽으라고 하신다!”고도 생각하십시오. 부활의 영광이 있기 전에 꼭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죽음과 버림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에 정통해지려면 나눔은 성도의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과목입니다.진짜 은혜는 나누게 만듭니다. 가진 것을 혼자 다 써도 항상 부족할 것 같은데 어떻게 나누며 삽니까? 그래서 은혜가 없으면 나눔은 힘들고 두려운 일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나누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을 만들다가 마침내 기쁘게 나눔을 실천하게 만듭니다. 그처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성경 마가복음 14장에는 본문과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의 선동에 의해 사람들이 분노하며 소리쳤습니다. “왜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지!”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가만둬라! 너희가 왜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그때 비판자들은 사랑을 돈의 가치와 연관시켰지만 옥합을 깨뜨린 그녀는 사랑을 절대가치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알고 전부를 바치는 사람에게 “돈을 낭비했다!”는 말은 얼마나 모독적인 말입니까? 왜 그런 모독적인 언사를 씁니까? 헌신하지 못하는 자격지심과 질투심으로 생기는 내적인 갈등을 눌러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오히려 헌신하는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흔하게 일어납니까?나눌 줄 모르면 잘 나누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니까 대개 “왜 저렇게 물질을 낭비할까?”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는 나눔이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나눔이 낭비로 보이고 아깝게 보이는 것이다. 사랑하면 나눔은 아깝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부모가 등골이 휘도록 자녀를 위해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힘써 나누십시오. 주판알을 튕기면 나눌 수 없습니다. 나눔은 타산을 뛰어넘어야 가능합니다.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유리창 넘어 바깥을 보는 사람’과 ‘유리거울로 자기만 보는 사람’입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비싼 향유를 부었을 때 유리거울로 자기만 보면 그 행위가 낭비로 보이지만 유리창으로 바깥을 보면 그 행위가 헌신으로 보입니다. 이제 유리거울로 자기만 보는 미러(mirror)형 인간이 되지 말고 유리창 너머로 남을 보는 윈도우(window)형 인간이 되십시오. 윈도우 원리로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가 생겨났듯이 창문을 넘는 관심과 나눔이 있어야 놀라운 축복의 세계가 펼쳐집니다.나눔은 기적적인 역사를 일으키는 비결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그 엄청난 로마의 핍박을 이기고 로마를 정복했습니까? 초대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은 초대교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위해 죽을 준비를 완료한 사람들이었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면 기적적인 힘이 나오지만 이기적인 모습에서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 결국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나눌 물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눌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언젠가 우리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결산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살았다고 잘 보고할 수 있도록 이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현실에 대한 집착과 이기주의로 희생도 없이 최소한의 종교행사로 체면을 차렸던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처럼 되지 않게 하소서! 이름 없는 죄인이었지만 주님이 칭찬했던 본문의 여인처럼 저도 힘써 드리고 나누고 베풀게 하소서!”이제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헌신과 충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점검하며 본문의 여인처럼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것을 나누십시오. 그래서 다른 이유가 아닌 오직 주를 사랑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생명과 같은 옥합을 깨뜨리고 나눔의 길에 나서는 거룩한 모험을 감행해보십시오. 그렇게 나누려고 하면 하나님은 신기하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셔서 나눔의 꿈을 멋지게 펼칠 수 있는 물질적인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신앙이 어릴 때는 축복받아야 행복하지만 신앙이 성숙해지면 사랑의 낭비를 해야 행복합니다. 또한 신앙이 어릴 때는 자신의 구원과 축복이 귀하게 느껴지지만 신앙이 성숙해지면 주님의 거룩한 뜻과 사명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기도도 초기 단계에는 복과 문제해결을 주로 구하지만 기도가 성숙해지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사명도 힘써 구하게 됩니다. 예배도 초기 단계에는 한 주 동안 지켜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예배드리지만 예배가 성숙해지면 하나님의 꿈을 품고 나눔을 결단하면서 예배드립니다.믿음과 사랑은 ‘얻으려고 나부대는 것’이 아니라 ‘나누려고 애태우는 것’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더 많이 줄수록 더 행복을 느끼듯이 성도는 사랑의 낭비를 통해 더욱 행복해집니다. 우리 분당 샛별제단은 이제까지도 열심히 나누려고 힘썼지만 더욱 잘 나누는 사랑의 제단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처럼 사랑의 낭비를 통해 내일의 큰 축복과 상급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누가복음 7장. 진짜 은혜 받은 증거는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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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7장. 진짜 은혜 받은 증거는 이런 것이다. (찬 452)

1.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사건과(1~10)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신 사건(11~17)은 주님의 은혜가 백부장 같은 지위에 많은 사람의 신임을 얻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방인이었던 사람에게나, 비참한 삶을 벗어날 길이 없던 과부로서 외아들까지 잃어버린 여인에게나 동일하게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 재산을 기부하여 가버나움에 회당을 지은 백부장은 유대인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유대인의 장로들이 대신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종을 고쳐주시기를 구했다(4). 주님께서 그 집에 도착하실 무렵, 백부장은 다시 벗들을 보내어(종들을 보낸 것이 아니다) 주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시거나 자기가 주님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하면서 말씀만으로 종을 고쳐달라고 청하였다(6~7). 주님께서는 그의 청대로 종을 고치셨고,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그를 칭찬하셨다(9). 주님은 이어 나인성으로 가셨는데, 거기서 과부의 죽은 독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을 보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다. 이 여인은 주님께 간청하지도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그녀의 구하지 않은 소원을 성취해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자격을 갖추거나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히 여기심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주어진다. 인간은 어떤 지위와 권세를 가졌든지 어떤 처지에 놓였든지 다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오늘 내가 바로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다.

2.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아신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그것을 묻게 하였다(18~23). 주님은 당신의 하시는 일들이 이사야 61:1~2의 성취임을 말씀하심으로써 메시아이심을 확인시켜 주신다. 의심과 불신은 다르다. “의심은 마음의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의지의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신 일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의심은 반드시 그 사람이 틀렸다는 표시가 아니라 그가 생각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이다.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요한을 보러 나간 것이었다. 그들은 부드러운 옷 입고 궁궐에 있는 사람이 아닌 약대 털옷을 입은 거친 사람 요한을 보러 갔었다. 그는 선지자였다.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나은 자이고 주님을 직접 보고 소개했다는 점에서 요한보다 나은 선지자는 이전에 없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다 알고 믿는 세대 중에서는 극히 작은 자도 이렇게 의심하는 세례 요한보다 더 나은 은혜를 입고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나 끝까지 세례 받기를 거부했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에 대하여 주님은 피리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도무지 장단을 맞추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셨다(32). 참 지혜는 그 지혜에 복종하여 지혜를 좇는 자들인 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그 옳음이 입증된다(35).

3. 죄인인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36~50) 이것은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바,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했다고 칭찬을 받은 사건과는 다른 사건일 것이다. 주님은 시몬이란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고 이 여인은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묘사된 것으로 보아 아마 창녀였을지 모른다. 이 당혹스러운 사건은 바리새인 시몬과 죄인인 여인을 강렬하게 대조시킨다. 주님은 두 사람의 태도를 비교하심으로써 신앙의 도리를 가르쳐주신다. 주님을 더 사랑한 사람은 여인인데, 그것은 더 많이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믿음이라고 표현하신다(50). 바리새인 시몬은 자기가 주님을 대접하고 있으며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겼겠지만(이런 인식과 자세는 은혜를 부정한다!), 여인은 자기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여겨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 여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물론, 여인 자신도 스스로 자격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겠지만 주님은 이 여인을 높이셨고 칭찬하셨다. 은혜는 이런 자의 것이다.

4. 은혜를 받은 증거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은혜를 받아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바리새인 시몬처럼 자기의 옮음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지 않는다. 자기가 주님을 대접하고 있다거나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드리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사역자들의 위험이 여기 있다. 은혜받은 사람은 겸손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주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지 안다. 그래서 은혜받은 자들은 하나 같이 말이 없다. 백부장은 주님 앞에 설 자격 조차 없는 이방인임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나인성 과부도 한 마디 말이 없다. 죄인인 여자도 그렇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백부장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은 인물이었고, 죄인인 여인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둘 다 은혜를 입었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는가가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 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높이는 교만한 자를 주님은 대적하고 낮추신다. 당신은 은혜 받은 자인가? 당신에게는 은혜 받은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5.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고 대단한 것 처럼 여기지 않도록 은혜를 주옵시고, 백부장이나 은혜를 입은 여인들처럼 저희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은혜 받은 대로 일평생 감사와 감격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누가복음 강해

누가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2월 12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누가복음 서론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5장: 죄인을 부르심 6장: 가르치심 7장: 기적들을 행하심 8장: 기적들을 행하심 9장: 제자의 길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2장: 절대적 신앙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서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휘, 문체 등의 특징 및 동일한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 등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의 ‘우리’라는 부분들(행 16:10-17; 20:5-21:18; 27:1-28:16)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반자이었음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코이네 헬라어에 익숙하였고 어휘가 풍부했다. 1) 이 두 책에는 의학적 용어와 질병이나 병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난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이었던 의사 누가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초대교회의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에는 “바울이 그의 전도 여행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의사 누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세 번째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써 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바울의 동반자인 누가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다” 2) 고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와 터툴리안(160-220년경)도 이 책을 누가의 저작으로 돌렸다. 누가는 헬라인인 듯하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누가를 유대인과 구별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4:10-11, 14). 그러나 그는 구전 자료들과 기록된 자료들을(1:1-4) 성령의 인도 아래 사용했을 것이며 사도들과 기타 증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많은 것을 듣고 확인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을 61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누가복음은 그보다 일찍 아마 주후 58년경 즉 바울이 가이사랴에 투옥되었을 때 즈음에 사도 바울 곁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세 번째 책이다. 복음서들의 목적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이를 통해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20:30-31). 누가는 이 책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데오빌로의 지식을 확실케 하기 위함이라고 썼다(눅 1:1-4).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은 참 믿음의 요소이다. 누가복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 가장 자세히 증거했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많은 언급과 교훈이 나온다.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해 15번 나오는데, 그 중 11번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또 누가복음 11,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은 찬양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넷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동정적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장), 탕자의 비유(15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3) 다섯째로, 누가복음은 여인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여섯째로, 누가복음은 복음서들 중에 가장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일곱째로, 누가복음에는 세계주의적 안목도 나타난다.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묘사되었고(2:32), 그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올라갔으며(3:38), 유대인들을 제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범으로 제시되었다(10:25-37). 4)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4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 . . . 누가복음의 인간 저자는 누가이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며 의사이었고(골 4:14; 딤후 4:11) 사도행전의 저자이었다. 그는 본문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누가는 본서의 내용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NASB, BDAG) 이라는 원어( 페플레로포레메논 프라그마톤 )는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 (KJV) 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누가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이루어진 사실들이며 초대교회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이 지어낸 말들에 근거하지 않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들과 사건들에 근거한다.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한 사역자들이 증거한 바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 중에는 그의 말씀들과 행적들에 관해 글들을 남긴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글들은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자료들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증인들과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참고함으로써 사건들과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으며 그것들을 확증할 수 있었다. 누가는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대략적인 시간 순서를 포함한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당시 어떤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자임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누가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이 귀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누가는 본서의 목적이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가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본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본서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고 확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자. 5-25절,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함 [5-7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 . . .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했던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가랴이며 그 아내도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의인은 없지만(롬 3:11),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의롭게 산 의인들은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법들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어도, 짐승 제사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들을 힘써 지킨 자들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그들을 주목하셨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그 둘의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이런 부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욱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런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어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고,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8-17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 . . .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때에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였는데,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분향단 우편에 섰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자 천사가 말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말은 사가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옛날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노아도 오랫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 생활로 믿음의 단련을 얻었고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본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에게서 잉태되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 후 그에 대해 네 가지 내용을 전하였다. 첫째,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둘째,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셋째, 그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넷째,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당신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오늘날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 . . . 사가랴가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말하자, 천사는 대답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떻게’라는 원어 ( 카타 티 )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이상(異像) 즉 환상을 본 것을 알았다. 그는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 그 직무의 날이 다 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24-25절]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 . . .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말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여인이 자녀를 잉태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그에게 잉태하는 복을 주셨다. 과거에 오랫동안 그들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자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자녀를 잉태케 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시 135:6). 1-25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확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본 증인들의 증언들과 그 글들인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확실함을 깨닫고 그 모든 진리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의롭게 살자.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2).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힘써 행함으로 실제로 의롭게 살자. 셋째로, 의인에게도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부족이었다. 의인에게도 부족과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그의 하시는 일들을 기다리자. 넷째로, 우리는 기도 응답을 믿자. 사가랴의 기도는 간절히 또 아마 오랫동안 올려졌던 것 같은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들으신 바 되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힘써 기도하자.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이었지만, 벙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잘 이해하고 의심하지 말고 다 믿고 또 힘써 행하자. 26-38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26-27절]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 . . .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나타났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이었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일이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 언급한 것(27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잉태되셨음을 증거한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34절) 숫처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순결한 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1절]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 . . . 천사는 마리아에게 들어가 말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전통본문). 5) ”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자, 천사는 말하였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생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 . . . 천사는 또 말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가 어떤 자이며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자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울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34-36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 . .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 포스 )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다. 잉태치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아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성탄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KJV, NASB, NIV) 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 . . .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 헤 둘레 퀴리우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마리아의 말은 그의 겸손과 그의 믿음과 순종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은 아름다웠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자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39-56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 [39-45절]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 . . .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북쪽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있는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팔레스틴의 남쪽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친척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잉태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그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도,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가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 할 주가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주의 모친’이 될 마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여인이 훌륭한 아들을 둔 것도 복이지만,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46-56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 . .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찬송하였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그는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말씀하셨듯이, 그의 긍휼을 기억하셔서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낮고 비천함을 고백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종임을 고백하는 자는 겸손한 자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다. 마리아는 또한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의 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말하며 그의 초월성을 고백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성결성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그의 초월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언급하며 그 긍휼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세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는 그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긍휼을 얻는 길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능력, 특히 공의로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적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셨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그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졌는지!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지식이며(신 32:39), 옛날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가졌던 지식과 믿음이었다(삼상 2:6-7). 또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그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엘리사벳은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 아마 이모쯤 되었던 것 같다. 석 달은 임신한 여자가 입덧을 할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26-5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처녀이었던 마리아(27절) 사내를 알지 못했던(34절)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35절) 하나님의 능력으로(37절)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 그러므로 천사 가브리엘이 증거한 바와 같이, 마리아가 잉태한 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며(32절) 이러므로 마리아에게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다(35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뱃속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을 체험하였다(41절). 또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실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그는 메시아이시다. 천사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했다(31절).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죄인들을 그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천사는 또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며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한다(33절).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예레미야 23:5-6도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구주이시다. 죄인은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셋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38절)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헌신하였다(38절, 45절). 그는 온갖 오해와 비난과 수치, 그리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의 능력과 긍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긍휼과 공의를 고백하며 주께 헌신하자.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57-66절, 세례 요한의 출생과 할례받음 [57-66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 . . .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고 이웃과 친족들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다. 8일이 되자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였는데, 그 모친이 대답하기를,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고 하고 그 부친에게 형용하여[손짓으로]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書板)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니 모두 다 기이히 여겼다. 이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 근처에 사는 자들은 다 두려워했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며 듣는 사람들은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고 말했다.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요한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으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중에서 더 견고해진다. 67-80절, 사가랴의 찬송 [67-71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 . . .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입이 열린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贖良)하시며[구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참된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알고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의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속량(贖良)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가리킨다(렘 23:5-6; 겔 34:23-24; 호 3:5; 사 11:10 등). 뿔은 능력의 상징이다. ‘구원의 뿔’이란 ‘능력의 구주’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가? 사가랴는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이며, 또 사탄의 도구가 된 악의 세력들과 세상 권세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앗수르, 바벨론 등 이웃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이었다. [72-75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구원얻을 영혼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맹세로 그의 긍휼을 나타내셨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불결과 죄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 될 것이다. 또 구원받아 천국 백성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79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아들 요한의 역할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의 역할은 지극히 높으신 자 곧 하나님의 선지자 즉 대언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죄를 각성시키고 그 죄를 버리게 하는 것, 즉 회개하게 하는 사역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고(마 3:2)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눅 3:3). 사가랴는 요한이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할 메시아의 사역을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 스플랑크나 엘레우스 ) [긍휼의 심정]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가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구원은 죄사함의 일이다. 사람이 죄사함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의 복을 얻을 수 없다. 에베소서 1:7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로써 돋는 해( 아나톨레 )[해의 돋음]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돋는 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슬픔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킬 것이다.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자들에게 지식과 의, 기쁨과 생명과 천국의 복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결과는 평강이다. 구원은 평강의 길이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 . . . 아이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려면 심령의 강건함이 필요하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그러한 생활은 속화된 제도적 종교 생활보다 많은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종들이, 배교되고 타협하는 교회들의 풍조에 비교적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더 적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 곧 구주를 주셨음을 찬송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의 원수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원수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며 모든 죄와 불행으로부터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죄사함의 구원이다. 죄사함은 구원의 방법이며 구원 자체이다. 죄가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마 20:28).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구원의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義)도, 조건도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 구원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 구원의 목표는 빛과 평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돋는 해로 오셨다. 그 빛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이며,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다. 이제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길 것이다.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이며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현재의 삶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구원을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자가 되자.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지옥]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의 때문에] 영생이니라.”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1-7절, 예수님의 탄생 [1-5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 . .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온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때이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역사상 옥타비아누스라는 인물이며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다. 총독 구레뇨는 두 번 수리아 총독직을 맡았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주전 10-7년경이고, 두 번째는 주후 6-9년이다. 가이사 황제의 칙령은 구레뇨가 처음 총독이었을 때 내려졌던 것 같다. 6)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마 1:16, 20)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해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약혼]한 [아내](전통본문) 7)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그 여자의 남편’(마 1:19), 마리아를 ‘그의 아내’(마 1:20, 24)라고 표현하였다. 마리아는 임신한 지 여러 달이었다. 그의 태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마 1:18; 눅 1:35).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예언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6-7절]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 . . .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었을 때(마 2:1, 8, 16)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 )는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는 말로 마리아가 예수님 출산 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나타낸다. 전통사본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의 남동생들과 또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를 부당하게 높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천주교회는 이 외에도 마리아가 평생 죄가 없었고 승천하였고 죄인들의 중보자요 기도를 들으시는 자라고 가르치는데 이것들은 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교리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은 심히 비천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구주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 탄생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제물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탄생하신 것이었다. 여기에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 1:14)의 깊은 뜻이 있었다. 8-14절, 천사의 증거와 찬송 [8-10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 . . .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 날 밤, 그 지경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은 주의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의 천사는 역사상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날 밤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곁에 섰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은 그 천사를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주의 천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연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그 천사는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였다. [11-12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 . . . 천사는 말하였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구주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 주’이시다. ‘주’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불행과 죽음에서 건져낼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셨다. 목자들은 가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고 또 표까지 주셔서 그 소식을 믿게 하셨다. 기독교는 많은 표적들로 확증된 진리이다. [13-14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 . . . 홀연히 하늘의 천사들의 큰 무리가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로다](전통본문).” 8)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나 ‘낙원’과 동일하다(고후 12:2-4). 그 곳은 태양계와 은하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구주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또 땅 위에서는 평화와,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은혜와 평화는 구원의 원인과 그 결과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죄로 인해 심령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평안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참된 평안을 얻는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도 상당한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린다.

15-20절, 목자들의 확인 [15-20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 . .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그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다. 그들은 주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였다. 또 그들은 이 아기에 대해 들은 것을 다 알려주었다. 듣는 자들은 다 목자들의 말하는 것을 기이히 여겼으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는 이와 같이 찬송이 있었다.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고 목자들의 찬송도 있었다.

1-20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다윗의 동네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약속하셨었다. 본문은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올라갔다고 말하며(5절) 또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다윗의 동네에서 구주가 나셨다고 말하였다(11절)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약속을 지키신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강보로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 7절,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2절, “너희는 가서 강보에 사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16절, “[목자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께서 외양간에서 탄생하셨고 포대기에 싸여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셨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것도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탄생 때부터 그러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했다(빌 2:5-8).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도 바울은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낮아지심이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주의 천사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하였다(10-11절). 구주께서는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쁘고 복된 일은 없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는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또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하였다(갈 1:4). 또 그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땅에 사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는 일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로다”라고 말하였다(14절).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를 통해 주신 구원의 결과는 평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안이 없는 세상에 평안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은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롬 3:16-17). 그런데 구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11:28). 또 그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요 14:27). 그러므로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살후 3:16). 우리를 죄와 불행과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자. 또 세상이 줄 수 없고 오직 그 분만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자. 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감사하며 다른 이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21절, 할례를 받으심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 . . . 할례할 8일이 되자,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그것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이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로서(창 17:10-11)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또 할례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갈 5:3).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자이시며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서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다. 22-24절, 마리아가 결례의 제사를 드림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 . . .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결례(潔禮)의 날이 찼을 때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결례의 날이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아이의 경우 출산 후 7일과 33일, 합하여 40일이 지난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율법대로 첫 남자아이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경건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케 하셨다. 오늘날도 성경말씀대로 행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가정이 될 것이다.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산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하였다. 그들이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 제물은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우리는 가난해지신 그를 통해 천국의 상속과 하나님 자녀 됨의 회복과 영생의 복을 얻었다. 25-35절, 시므온의 찬송과 예언 [25-27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 .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의 부패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가 있었다. 사람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당시에 우선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런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임함을 의미할 것이다. 천국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보내 주시는 참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그리스도이시며 시므온은 그를 보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아기 예수를 만났다. [28-33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 . . 그때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하였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요셉과 그의 모친(전통본문)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구원’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그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실 것이다(요 1:29). 그는 세상 모든 족속의 구주가 되실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사 42:6; 49:6). [34-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 . . . 시므온은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말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고’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면, 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인간은 참으로 심히 죄악되고 악한 존재이다! 36-38절, 여선지자 안나의 감사 [36-38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 . .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당시 아마 106세쯤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예루살렘에서](전통본문) 9)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9절, 나사렛으로 돌아가심 [39절]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들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도착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 관련하여,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본절(39절)의 중간 즈음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고 저술하며 증거하였다고 보인다. 21-39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주이시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함으로 다 구원을 받자. 또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사함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자.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는 죄사함받은 사실을 감사하며 이제는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경건한 성도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가치를 두고 살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자. 그는 영광의 천국을 떠나 이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마구간에서 출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출생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부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가 난해지셨다(고후 8:9). 우리는 그의 겸비하심을 본받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하자.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 . . . 본문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에 대해 “아기가 자라며 [심령이](전통본문) 10)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튼튼하게 자라셨다. 인간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이 자라셨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은 심령으로 강하여지셨다. 아기 예수님은 몸 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셨다. 아기 예수님의 심령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상태에서 점점 강해지셨다. 셋째로, 아기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라고 보인다.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로고스 )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특히 지혜와 능력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하셨던 것 같다. 넷째로, 아기 예수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그에게는 원죄의 죄성과 연약성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어린 아기들에게도 있는 불만과 저항심 같은 것이 없으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그 위에 계셨다. [41-47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 . . .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혹은 조금 자라서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그는 아기 때부터 경건 훈련을 받으신 셈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그 부모[요셉과 그 모친](전통본문) 11) 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으며 사흘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소년 예수께서는 선생[랍비]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계셨고 듣는 자들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지혜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서 엿보였다. 소년 예수께서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알 수 없으나, 본문은 삼일 후 요셉과 그 모친이 소년 예수를 발견한 것이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고 선생들이 다 소년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47절의 ‘지혜’라는 원어( 쉬네시스 )는 ‘총명’이라는 뜻이며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 소피아 )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소년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48-50절]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 . . 그 부모는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말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아이야’라는 원어( 테크논 )는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보통의 말이다. 또 마리아는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부친이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문(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에는 ‘집’이라는 말( 오이코스 )은 없고 남성 혹은 중성 복수정관사( 토이스 )만 있다. 생략된 명사는 단수명사인 ‘성전’이나 ‘집’보다 복수명사인 ‘일들’( 에르고이스 )이 더 가능하여 보인다. 이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 (KJV) 의 번역대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소년 예수의 증거이다. 소년 예수께서 12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또 그는 12살 때에 벌써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다. 그 후 30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성경 연구와 기도로 그의 사명을 준비하셨을 것이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神性)의 신비, 즉 그의 인성과 그의 신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될 수 있으신지의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고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 . . . 본문은 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니라”고 증거하였다. ‘한가지로’라는 말( 메트 아우톤 )은 ‘그들과 함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그는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시며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섬기셨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원어 12) 는 그가 계속하여 그들에게 순종하셨음을 보인다. 소년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명하였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소년 예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오늘 시대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며, 부모들도 자녀들을 예수님처럼 계명을 순종하는 자로 키워야 한다. [52절]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문은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증거한다.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셨다.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는 영혼의 활동들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40절),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자라셨던 것 같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 속에서 자라셨던 것 같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키가 자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 그의 몸은 어린아이에서 십대의 소년으로, 20대의 청년으로, 그리고 30세의 성인이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죄 없는 인격, 흠과 결함이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이셨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40-52절의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의 신성에 관해,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셨다. 또 그는 열두 살 되셨을 때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는 모친 마리아의 말에 대해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그 모친 마리아도 소년 예수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둘째로, 그의 인성에 관하여, 예수님은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성장하실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계명대로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하자.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제물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을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는 신약성경과 특히 사복음서를 통해 그를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얻기를 바란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본받고 우리 자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자. 우리는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한다. 특히 경건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과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실천함을 통해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운 자들이 되기를 기도하자. 또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고 성경말씀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모범대로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 되어야 한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6절,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 [1-2절]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사역은 명확히 역사적 사실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활동 시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되어 있다.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 되는 해는 주후 28년경일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유대의 총독이었고(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헤롯 안디바스는 예수님 탄생 때의 왕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의 분봉왕(영토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왕)이었다(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그 동생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었고(주전 4년부터 주후 34년까지),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주후 약 27년부터 28년까지).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고(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안나스는 그의 장인으로서(요 18:13) 역시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이 증거한 대로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이나 그 이전에 탄생하셨고 주후 28년 초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 곧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알리시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그것은 영생의 말씀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지자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큰 특권이며 큰 복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될 자는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대의를 파악하고 그 심령이 그 말씀으로 불붙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 곧 광야에서 요한에게 왔다. 광야는 비교적 세속 사회에 때묻거나 물들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조용히 하나님과 많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며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때때로 우리는 광야에서나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광야는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이 좋지 않은 거친 들판이다. 마태의 증거대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간 것은 아마 당시의 제사장 사회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된 사회 환경이나 심지어 부패된 교회 환경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3절]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그는 노방 전도 혹은 야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마태의 증거대로(마 3:5-7), 많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사회각계각층이 죄악되고 사람의 본성과 삶이 죄악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회개는 죄사함을 얻게 한다.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또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고 또 회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명하셨고 사람이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세례’는 회개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물론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의 표시요 고백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는 자는 세례받을 수 있고 또 세례받아야 하며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6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 . 이 일은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와 같았다. 거기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았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것은 왕의 행차시 길을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한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낮추고 불신앙과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깊은 골짜기들을 메우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과 높은 마음을 버리기 전에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될 구원의 복음이다.

세례 요한은 구체적 역사 상황 속에서 일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신화적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그 기초요 그 골격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믿고 확신하자. 기독교의 핵심은 죄사함의 구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요긴한 진리는 죄가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의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며, 죄사함이 이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의 구원이다. 모든 사람은 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죄사함은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진심의 회개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서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과 악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는 자만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7-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7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 . . .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뱀이 사람을 범죄케 한 후,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거절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또 그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책망하셨다(마 23:33). 사도 요한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요일 3:8). 이것은 다 영적인 표현이다. 요한은 또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 엄하고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인류 초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나 후에 소돔 고모라 성의 심판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또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인 한 내용이다.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 . . . 요한은 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그는 회개하는 겉모습만 가지지 말고 참으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다. ‘회개’라는 원어( 메타노이아 )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참 회개는 변화된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불의와 악과 거짓의 삶을 청산하고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참된 회개가 없이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며 우리가 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큰 해가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 없는 구원의 확신은 오히려 그를 멸망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는 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이방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이 주권적 처분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그의 은혜이었다.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 . . . 요한은 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을 나무에, 하나님의 심판을 그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에 비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선한 행위들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미( 에데 )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악인들을 마지막 날 지옥불에 던질 것이다. 지옥은 사탄과 악령들 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10-13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 . . .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대답하였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먹을것과 입을 것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참 회개는 구체적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행위의 변화이다. 남을 돌아보며 없는 자와 나누는 것은 회개의 증거이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자, 그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강제로 징수하지] 말라”고 말했다. 세금받는 자들은 나라에서 정한 세금 외에 더 무엇을 징수치 말고 정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옳고 양심적인 일이다. [14절]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 . . . 군병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 그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거짓되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다. 군인들이 칼의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사람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칼의 힘을 악용하지 않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이 맺을 회개의 열매이다. 이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의와 선함과 진실의 행위들이다. 오늘날 정치가나 법조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사업가나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직, 선함, 진실이 요구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였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의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내 보이어야 한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헛된 확신을 다 버리자. 좋은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실히 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다. 주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바울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했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러해야 한다. 모든 불의와 사악과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성도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구원에 합당하게 성실히 달음질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그 구원에 합당하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었는지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15-17절,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 [15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 . . .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사 제국과 헬라 제국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정치적 불만족과 육신적 질병들과 경제적 가난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자요 구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파하시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육신적 건강까지도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모든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17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 . . .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 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요한과 장차 오실 분은 그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분은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은 분이시다. 특히 그것은 기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운동은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고후 4:7-12). 둘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이시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세례는 단지 죄씻음을 외적으로 표시하고 확증한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실제로 죄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중생(重生)시킨다. ‘성령과 불로’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불은 용광로에서 금을 제련하는 데 사용된다. 성령은 죄인을 깨끗케 하신다(고전 6:11; 딛 3:4-6).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키’는 타작할 때에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기구이다. 그의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는 이 세상의 소유주이시며 또한 심판하실 권한이 있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세우신 자가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는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실 것이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쭉정이, 즉 회개치 않고 순종치 않은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에 대하여 “거기는 [악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8).

18-20절, 옥에 갇힘 [18-20절]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 . . . 요한은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는 말은 악인들의 회개치 않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 요한은 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신적 능력의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잘 도우실 수 있다. 이 능력의 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든든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시키신 분,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분이시다. 오늘도 그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렇게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의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알곡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회개하고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은 확실히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나, 계속 죄 가운데 머무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21-22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21-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 .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죄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심을 나타내신 것뿐이다. 그것은 청년 예수께서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첫걸음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가 세례 받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 간구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볼 수 있는 형체로 내려오셨다. ‘비둘기같이’라는 말은 성령의 순결하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본체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이시지만, 두 분 간의 인격적 구별은 있다. 이제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성령께서 오셨다. 그때 하늘로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함께 나타나셨다. 하늘로서 난 소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후에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한번 더 친히 증거하실 것이다(눅 9:35). 성경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23-38절, 예수님의 족보 [23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예수께서는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셨고 13)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실제상의 사실이 아니고 단지 족보상의 사실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요셉의 부친은 헬리이었다. [24-27절]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아람](전통본문)요, 14)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주신(눅 1:4) 증거의 책에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허용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둘 다 정확한 내용임을 믿는다. 그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추측들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족보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의 어떤 부분을, 같은 사람이 다른 두 이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養子) 제도나, 또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수혼(嫂婚) 제도(신 25:5-6)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여러 주석가들의 15) 추측대로 본장의 족보는 아마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 즉 23절의 ‘헬리’는 요셉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장인이라는 말이다. 랍비들의 글에 마리아를 ‘헬리의 딸’이라고 부른 곳이 있다고 한다. 16)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킨 것은 그가 구약시대에 또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증거하였고(사 11:1, 10; 렘 23:5, 6; 30:9; 33:15; 겔 34:23; 37:24; 호 3:5), 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예언하였다(창 12:2-3; 22:18). 더욱이, 누가는 메시아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하신 선언에서도 나타나 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최초의 메시아 예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인간의 죄의 형벌은 인간이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선언하신 대로 여인의 후손을 보내셨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또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자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신약성도에게 하신 약속들, 즉 예수님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 복된 영원한 생명 등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기뻐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친 음성의 증거 곧 그의 직접적인 증거이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무엇을 증거하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때에 이 중요한 증거를 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대해 친히 하신 증거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인류를 위해 보내주셨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독생자를 죄인들의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귀한 것을, 우리의 외아들을, 아니 우리 자신을 드리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큰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차례이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독특한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분명히 사람이셨다. 그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이다. 그것은 가장 놀라운 신비이며 기적 중에 기적이다. 넷째로,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굳게 믿고 소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1-13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 . . .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고 날 수가 다하므로 주리셨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지만, 인간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후에 일하셨다면, 오늘날 성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과 봉사생활, 특히 전도의 일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며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과 풍조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로 불린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요(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다(엡 2: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3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 . . 마귀는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첫 번째 시험은 떡 시험, 즉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본적 문제이다. 사람은 먹는 것을 위해 일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대부분 먹는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이 기본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 마귀의 이 말에서 우리는 마귀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옳은 개념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신약성경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전능하신 신성이 있으시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서 몹시 배고프셨기 때문에 기적의 정당성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그의 신성을 확증하였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록하기를( 케그랍타이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전통본문) 17) ”고 하셨다.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권위로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는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하셨다. 시편 119:105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됨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 됨을 증거하였다(엡 6:17).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육신적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 존재이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으며 행복을 위해 먹지만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떡은 몸을 위해 필요하나 영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떡은 사람의 죄 문제, 평안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죽음이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을 구하며 받자(엡 5:18). 그래야 신앙생활, 봉사생활을 잘 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자. 오직 그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자.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 . . . 마귀는 또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18)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말하였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그것을 주겠으니 내게 절하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였고(고후 4:4; 엡 2:2), 또 ‘온 세상은 악한 자[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였다(요일 5:19). 또 이 세상의 권세, 부귀, 영광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러나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미혹하였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고(약 4:4), 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이다(요일 2:15).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히 그를 물리치시며 대답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전통본문). 19)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건의 순수성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험은 없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마리아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9-11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 . . 마귀는 또 그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또 하나의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진실한 교훈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겠으나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의 추구, 혹은 과장된 기적 체험의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곳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생각이 무의미할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성경 해석의 건전한 법칙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문법적 해석이고,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고, 셋째는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과 문장 구성과 문맥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해석하는 것이고,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참 저자가 성령이심을 믿는다면,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충돌시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제안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다른 부분의 분명한 말씀에 위반되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그것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실상 기적의 필요성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적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경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자.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그를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였다면, 우리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6:41),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근신하라, 깨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5:8).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충만함을 얻고 성경말씀으로 잘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성경 읽기와 성경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권세와 영광을 얻으려고 사탄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려고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14-30절,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심 [14-15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 . .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화력뿐 아니라, 그의 기적의 행위들을 뜻하는 것 같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긴 것으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또 공적 문제들도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요소이다.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는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셨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곧 고향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습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수주일, 성경 읽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에는 예배실(‘바실리카’라고 부름) 앞부분에 강단(‘베마’라 부름)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19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 . . . 예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받고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이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펼쳐서 읽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원어는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니’라는 뜻이다. 전통본문에는 ‘나를 보내사’라는 말 다음에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며’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20)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 영적 문제는 육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마귀와 죄에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죄의 결과로 외적으로,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병,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께서는 이런 인생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를 그 불행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가운데 없지 않았으나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증거하였고(요 1:17),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고후 6:2). [20-22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 . . . 예수께서 회당에서 그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은 다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주께서는 그 날 회당에서 책을 읽기만 하시고 설명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단지, 그는 앉으신 후 회당에 참석했던 자들이 다 그를 주목하자, ‘이 글( 헤 그라페 )(혹은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하신 메시아, 곧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또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를 좋게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마태복음 13:54 이하에는, 그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칠 때, 사람들은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그들은 그 요셉의 아들이 정말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를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유 없이 그를 의심했고 무시했고 배척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시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57에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믿을 만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의 긍휼을 주권적으로 베푸시되,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버려두시고 이방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의 한 장군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 . . . 회당에 있는 자들은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미움은 살인이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는 권세와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육으로 가난해졌고 상했고 포로되었고 눈멀었고 억눌렸던 인생들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곧 평강과 자유와 기쁨의 구원을 주시는 자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아, 곧 인류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이히 여겼고 마침내 분이 가득하여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의 영광을 도무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영접하며 따르자. 또 오늘날도 성도들은 교회의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들을 그들의 인간적 약점만 보거나 바른 말씀을 싫어하여서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직분과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행하며 따라야 한다. 31-37절,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일 [31-32절]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셔서 안식일에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28-29도,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증거한다. 그의 말씀은 매우 권위가 있으셨다. [33-34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 . .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들을 일으키는 악령이다.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더욱 확산되고 왕성하여진다. 그 사람은 크게 소리질러 말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였다. 귀신 혹은 악령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지는 못하나, 그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35-37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 . . . 예수께서는 꾸짖어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주께서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신 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 대한 진리가 공개적으로 증거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 사실이 아직 공적으로 증거되지 말아야 하였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으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그의 능력과 권세는 확실히 신적 능력과 권세이었다. 이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 38-39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8-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 . .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독신자가 아니고 결혼한 자이었다(고전 9:5).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께 구하자 예수께서는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증거한다(마 8:15; 막 1:31). 주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 열병은 예수께 복종하였다. 그 병은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또 완전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확실히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 즉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생명체가 그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시다. 생물계와 무생물계가 다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한다. 40-41절,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치심 [40-41절]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 . . . 해 질 적에 각종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자를 데리고 나아오니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받는 자나 보는 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그리스도] 21)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마 8:4; 9:30). 그 이유는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고치기 위해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전체적인 문제 곧 죄사함을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기독교는 외적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 기적, 곧 회개와 믿음, 구원, 인간 변화, 새 사람 됨을 전한다.

42-44절, 전도하심 [42-44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말리려 했으나 그는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씀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것은 마귀의 나라와 대조된다. 마귀의 나라는 어두움과 죄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빛과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뜻과 그의 말씀을 지킨다. 자신의 전도 사명을 밝히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22)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를 믿고 구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며,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으며,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심지어 열병에게도 명령하셨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의 능력 곧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셨다. 그는 병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 오늘도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나 좀더 넓게 말한다면 밥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완전한 치료, 곧 구원을 위하여, 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주셨고 그것과 더불어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며 또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자. 5장: 죄인을 부르심 1-11절,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다. [1-2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 . . . 무리가 둘러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하나의 명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그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밤에 고기를 잡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 베드로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 . .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이었다.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형식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은 청중이 되었다. 그 자신도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다.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다. [4-5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 . . . 그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대답하였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증거를 따라 이미 예수님을 알았던 자이었다(요 1:41-42).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몬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 . . .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찢어지다’는 원어( 디에레그뉘토 , 미완료과거)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친구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8-11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 . . . 시몬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였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존칭어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진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영광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다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일 뿐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참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으셨다. 그들은 다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임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참으로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이 허무한 세상임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과 천국이 이 세상과 돈보다 귀함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택하신 영혼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는 그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셨고 배 위에 앉으셔서 가르치셨고 시몬과 그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신기한 고기잡이를 통해 시몬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나 가득차게 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속의 물고기떼를 주장하셔서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그 물고기들이 잠간 동안에 그렇게 많이 잡히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그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깨닫고 믿는 자마다 그를 따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릴 것이다. 12-16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 . .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나병, 한센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였다. 나병 혹은 한센병은 피부를 붓게 하고 모양을 보기 싫게 만들고 피부색이 변하는 병이다. 이 병은 얼굴과 팔과 다리 표면의 신경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피부가 데거나 상처가 나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플레레스 레프라스 )[나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 병은 온몸에 퍼져 몸을 보기 싫게 만들었고 온몸의 감각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에게 나아갔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렀다. 이사야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소원을 말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많은 병고침의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았거나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구원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하였다.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 . .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 그는 마치 그 일 때문에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 같았다. 그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온몸에 나병 환처(患處)가 있는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병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병이 곧 떠났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하나님의 치료만이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14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 . . 예수께서 그를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병고침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셨다. 그의 임무와 사명은 다른 데 있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인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본다. [15-16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 . . .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힘을 얻어야 한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온몸에 나병이 가득한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나병은 곧 깨끗해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나 사명은 병고침이 아니셨다. 그는 불쌍한 나병 환자나 기타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의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주된 임무와 사명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심으로 그의 사명을 수행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목사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능력을 받는 길이다. 17-26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 . . .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고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였다.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求道者)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 노모디다스칼로스 )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 노미코스 )나 ‘서기관’( 그람마튜스 )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물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진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곳에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는 병환자들이 많았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주의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성(神性)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리킨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 . .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보인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고 또한 믿음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 . . .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을 가리킨다. 아니, 거기에 그 병자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아마 그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자의 믿음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수고하였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성경에서 병과 죄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물론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이 근원적으로는 죄에서 왔다. 각종 병도 그러하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병이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병은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로 세상에 있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자들도 많고 병원들도 많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자들도, 병원들도 없을 것이다. [21-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 .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의논한다’는 원어( 디아로기조마이 )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다’는 뜻으로 그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사람의 은밀한 의논까지도 아신다.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이 참람하고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만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23-24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러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인자(人子)는 그의 인성을 보인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사람이신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신적 사역을 하셨다. [25-26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 . .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었다. 또 ‘곧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이 일은 인간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시는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죄사함의 권세를 그가 가지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병의 관련성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건강을 누릴 것이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병 낫기를 기도할 수 있다(약 5:16). 그러나 우리는 병과 죄의 관련성을 알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도 본받자. 그들에게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친구에 대한 사랑, 서로 협력함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27-32절,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심 [27절]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 . . . 예수께서는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이었다. 그가 세관에 앉은 것은 그가 세금을 받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다(삼상 16:11-13). ‘나를 좇으라’는 말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초청이 아니고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사명의 부르심이었다. 주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렇게 부르셨다(마 4:18-22). 주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일꾼들을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위이셨다. 그 부르심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다.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했을 것이다. 여하튼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였다(마 4:20, 22; 눅 5:11).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유여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과 유여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지내며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를 통해 밝히 주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대신하여 그 일을 계승할 것이다.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 . . .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 . .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잘 모를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성도의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의 차원이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교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영적 교제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심히 불경건하고 무지하고 죄악되었을 때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도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다.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인과도 만나야 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해야 한다. 전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죄인들과 만나야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그들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만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여는 빌리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방법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진리에서 탈선한 이단자들이며 그런 이단자들은 회개와 전도의 대상이지 결코 전도 활동의 협력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며, 신약 교회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힘과 물질을 다 사용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귀한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레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세상적 안정과 물질적 여유를 다 포기하였다.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 그것은 가장 큰 보화이다. 우리는 남을 잘못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잘못 비난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인하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33-39절, 금식에 대하여 [33절]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 . . .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왜] 23)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저희’는 문맥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함께 이런 질문을 한 것 같다(마 9:14).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을 본받아서(마 11:18) 또 더욱이 지금 그들의 선생님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성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요 3:29).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가장 기쁜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기쁜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절]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극기(克己)와 자기 부정의 삶이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핍박과 환난의 현실 가운데서 항상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초두에 기록된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16-17). 또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유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 장로들을 장립할 때 금식하였다(행 13:2-3; 14:23). 교회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장립식에 축하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둘 다 보존되리라]. 24) ” 이 두 비유는 새 것이 옛 형식에 적합하지 않음을 보인다.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자기 자신에 비유하셨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들은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 즉 메시아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구약의 내용은 율법이며, 그것은 율법적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들 중 대표적인 것은 성전 제도와 제사 제도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은 복음이며, 그것은 새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옛 생활 방식에 맞지 않고 복음의 새 생활 방식에 맞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려야 했으나,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진심의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뿐이다. 구약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규례들에 비하면, 신약의 형식은 아주 단순하고 영적이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영]에 있고[혹은 ‘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이나 신앙생활의 형식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 . . . 예수께서는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25)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 26) 좋다 함이니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옛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에서도 그렇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에서도 그렇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 21:21-26)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간에는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고 마셨듯이, 오늘날 그를 믿는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누리지 못하지만, 그를 아는 자마다 그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빌 4:4). 우리는 종교적 규례와 의식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신약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의 구조나 신앙 생활의 형식은 구약 교회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것들에 비교하면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진심으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섬기지만, 또 의와 선과 진실 안에서 기쁨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법을 행해야 한다. 6장: 가르치심 1-11절, 안식일 문제 [1-2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 . . . 안식일에[두 번째 첫 안식일에](전통본문) 27)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했다(눅 4:16, 31).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안식일들 말고 두 번째 언급하는 첫 안식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제자들의 행위는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그는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에게 그 떡을 주었고 그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7일이 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 . . .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 그는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품고 분노하며 함께 의논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자.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제7일 토요일 안식일은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그 날에 물건을 사고 팔거나 육신적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2-16절, 사도들을 택하심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 . . . 이 때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열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 밤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에 기도하셨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특히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산은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악되고 부족 투성이인 사람들의 사회는 항상 시끄럽고 복잡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산은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신비한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를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신 그는 참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우리는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빌 4:6, 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13-16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이었다. ‘사도’라는 원어( 아포스톨로스 )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엡 2:20).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사역의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기타 교리들과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서신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13절),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14, 15절). 여기에 사도들의 직무가 나타나 있고 그들을 세우신 주님의 의도도 드러나 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주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고 말하였다(4절).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 진리를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14).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는 일반 성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목사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위해 쓰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은 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반 성도들은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을 존중하며 복종해야 한다(살전 5:12-13; 히 13:17).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요 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요 6:70), 마침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요 13:27)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마 26:15). 어떻게 이런 사람이 열두 제자들 중에 포함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통해 배신의 고통까지 경험하실 것이다. 가룟 유다가 사도들 중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목사들과 장로들 가운데 가룟 유다 같은 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런 자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주께서는 일찍이 거짓 교사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행위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마 7:15-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실생활에서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 자신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실함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언제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종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하겠는가! 또 모든 성도는 기도로 늘 승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많이,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풍성히 거하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주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임을 자신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은 오직 그의 행위들을 통해 분별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종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들을 돕고 그들을 따르며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와 은혜와 평강 가운데 힘있게 잘 진행될 것이다. 17-19절, 병자들을 고치심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추측하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 28)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로 보이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신 후에 되어진 일이라고 보여진다. [17절]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 . .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는데, 그의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교훈을 행하며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8-19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 .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온 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를 만지는 모든 사람이 나았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가 행하신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증거들이다. 20-26절,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2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본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잘 깨닫게 된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육신적 가난과 슬픔이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고린도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으며 우는 자가 웃게 될 때는 언제인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며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복은 더욱 크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 영원히 배부름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23절]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다. 악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였고, 또 그의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고난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할 때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인데,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시대에도 참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주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24-25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 . . . 예수께서는 화가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도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義)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영원히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참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인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들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힘과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움과 고통과 찔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 바울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졌고(고후 6:8), 또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딤후 1:15-18).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병자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것들은 기적들이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선생들의 가르침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현세 중심, 세상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이었다. 주님의 제자는 육신적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또 그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항상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고 실행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27-36절, 원수를 사랑하라 [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 세상에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더러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구약의 율법 레위기 19:18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율법의 말씀보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29-30절]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그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도적질이나 강도질이나 폭력이나 살인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라일(J. C. Ryle)은, 이 말씀은 범죄의 억제를 금하신 것이 아니고 보복 정신을 정죄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29)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고 범죄의 처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다거나 그들의 직분이 부당하다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평화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하신 것이나,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가복음 22:36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심으로 칼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칼을 가지고 사회 정의를 시행함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경우에도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인권을 짓밟지 말고 그를 학대하지 말아야 하며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이 아니고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23:2). 그러나 합법적 전쟁의 경우에도, 먼저 평화를 제안하고 불가피한 폭격 외에는 자제하고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의 행위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양보를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하며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사실, 세상의 악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6:52). 우리는 악한 자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로마서 12:17-21은 이 원리를 잘 교훈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롬 5:6-8, 10).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 명령이 비록 높아 보이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행 7:60).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을 자기 아들로 삼았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잘 참았다.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야 한다.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최선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대인관계에서도,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먼저 잘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32-34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빌린다’는 말은 ‘빌려준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본문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신다. 성도들이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의 교제는 순수한 것이 좋다. [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상이 클 것이다. 그 상은 천국에서의 상을 가리킨다. 천국에서 성도가 받을 상급은 지상에서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에 대한 약속으로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신다. 또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27절부터 36까지의 말씀은 요약하면 서너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악한 자를 선대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남이 우리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남에게 먼저 잘 해주라는 것이다. 셋째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가 없이 빌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본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위요 처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 37-49절, 비판치 말고 선을 행할 것 [37-38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치 말라’는 교훈은 어떤 경우에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안디옥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판단하고 바른 길을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5:20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이 이단을 배격하라고 가르칠 때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전제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교회적 판단을 금하신 것이 아니고 개인적 판단에 대해 하신 것이며(매튜 풀), 그것도 언제든지 비판치 말라는 절대적 금지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남의 말이나 견해나 행위의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게 충고하거나 그를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비판이나 정죄 자체가 악은 아니다.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들 즉 목사나 장로들은 공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교인들을 판단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위치에 있다. 남이 비판을 받을 만하다면, 우리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야고보서 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실상 다 부족이 많은 자이다. 만일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우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둘째로,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어려운 형편도 있다. 특히 우리는 남의 은밀한 마음이나 행위에 대한 동기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고린도전서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셋째로, 우리가 비판치 말아야 할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일들의 경우도 비판치 말아야 한다. 로마서 14:1-5,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또 성경적으로 명백한 잘못인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나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일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단지 개인적으로 은밀히 충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은 또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버리고 남을 용서하고 구제하라고 교훈한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와 구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이신 명확한 뜻이다. 그것은 성도의 중요한 생활 규칙의 하나이다. 특히, ‘준다’는 말씀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주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음을 가리킨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이라는 표현은 밀가루를 되에 가득히 채워 주는 것 같은 풍성한 보상을 묘사하신 것이다. [39-40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소경이’라는 말은 무지한 인도자들을 가리키고, ‘소경을’이라는 말은 무지한 교인들을 가리킨다. 구덩이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와 그로 인한 낭패를 가리킨다. 진리의 바른 지식과 바른 삶이 없이 남을 인도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그가 인도하는 자들도 망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도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런 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도 되지 말아야 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는 말은 선한 뜻에서도, 나쁜 뜻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선한 선생에게서는 선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울수록 좋으나, 악한 선생에게서는 악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우지 않을수록 좋을 것이다. [41-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하고 ‘들보(통나무)’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고친 후에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고친 후에 형제를 권면해야 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지만(잠 27:5), 단지 자신의 큰 결함이 없을 경우에 그러한 책망이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37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교회 문제, 진리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신을 남을 용서하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지식과 실천이 없이 남을 지도하고 권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남의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큰 부족을 깨닫고 고친 자만이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을 고쳐줄 수 있다. 43-49절, 행위의 중요성 [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를 비유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같이가기 때문에, 사람의 인품은 그의 말과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평소 훈련을 통해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하고 선해야 한다. [46-49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전통본문) 30)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진대, 우리는 그의 가르치신 바들을 행하려 해야 할 것이다. 또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환난이나 재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튼튼한 기초 없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다. 그는 환난의 날에 낙심케 될 것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계명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주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중요함을 교훈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선한 말과 행위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또 순종의 행위는 집을 튼튼히 짓는 것과 같다. 평소에 행함이 없는 자는 환난 중에 실패할 것이지만, 행함이 있는 자는 실패치 않고 승리할 것이다. 7장: 기적들을 행하심 1-10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심 [1-3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 . . . 예수께서는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기를 마치신 후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과 시몬의 집에서 중한 열병으로 아파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과 해 질 때 집에 모여든 여러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하였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었다. 그는 물론 로마 사람이었다. ‘사랑하는’이라는 원어( 엔티모스 )는 ‘소중히 여기는’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이다. 충성된 종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병이 들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 종은 결국 고침을 받았다.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다. 물론 그 종도 주인에게 충성했겠지만, 그 주인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이 백부장은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5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 . .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였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두 번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과 사랑이 가는 곳에 돈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돈을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 . . . 예수께서 함께 가실 때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그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고백한 것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네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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