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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복음 11 장 주석 | [하루 한 장] 누가복음11장_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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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16 (목) [하루 한 장]“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눅11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누가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두 차례의 전도여행을
다녀오면서 현장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에게 기도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처럼 기도에
목마를 때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요청하고나서야
비로소 기도의 내용과 자세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고 계십니다
지금 교회에 와서 기도하지 못하고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지 못하는
이 상황가운데서 우리는 과연
기도를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서서히 이 방식의 편리함에 젖어
육신의 편안함을 따르진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를 향합니다
가장 가깝고도 신뢰가 가는 아버지,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그분께
믿는 맘으로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교회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분홍목사의 설교 영상들을 통해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 매일 아침 [하루 한 장]을 카톡으로 받아보길 원하시는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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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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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 주석 – 누가복음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누가복음 제 11장 =====11:1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 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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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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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누가복음 1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 우리말성경,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말씀하셨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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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 11장 주석

[스크랩] 누가복음 11장 주석 …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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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984-누가복음 11장 – 네이버 블로그

우리는 유혹을 받아 죄에 빠지고,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열심히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⑪우리는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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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 기도와 영성 – Godmade

누가복음 11장: 기도와 영성. 1. 1-13절: 기도에 대한 가르침. 앞에서 본 것처럼 누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을 거듭 부각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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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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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 옛신앙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 또 누가복음 11,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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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 설교말씀] 예수님의 기도 생활(눅 11:1) – 알쓸잡

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1장 설교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도 항상 한적한 곳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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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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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누가복음11장_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하루 한 장] 누가복음11장_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11 장 주석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5,1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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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pxHV4CueU94

누가복음 11장 주석

누가복음 제 11장

=====11:1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

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

소 모호한 표현인 ‘한 곳에서’로 이야기의 서두를 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

수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3:21;6:12),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제

자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심을 지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

없다.

요한이…가르쳐 주옵소서 –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서 요청하

는 것은 이 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는 것을 보자 요한이 그

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것이 생각나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다. 당시 어떤 종교 공동체(宗敎共同體)에서 지도자들이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

인 것이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고(Farrar,

Plummer), 또한 일반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였다(행

10:3,9).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워

줄 수 있는 기도를 원했던 것이다(Jeremias).

=====11:2

이렇게 하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 본문을 영원

불변의 기도형으로 생각해서 마치 주문(呪文)을 외듯이 반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될 것이며, 기도가 담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과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

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예

수께서 ‘이것을'(what) 기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how) 기도하라 하신 것에

서도 잘 드러난다.

아버지여 – 이 호칭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사용했던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관

계가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것임을 나타낸다(10:21 주석 참

조). 이제 예수는 제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롭게 갖게되는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

준다(요 20:17;롬 8:14-17). 한편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

지여”(마 6:9)로 되어 있어 형식에 있어서 더 세련되고 완벽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

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 부분은 마태복음과 일치한다(마 6:9). 성경

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표현한 것이니만큼 여기서 ‘이름’은 하나

님 자신을 뜻한다. 결국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원(祈願)이자 경외심에서 기인하는 하나님께 대

한 찬양이기도 하다. 또한 본 구절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높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

겠다는 신앙의 표시이자 하나의 서약이라고 할 수 있다(레 22:32;시 79:9;사

8:13;29:23). 동시에 이 기원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하

여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

(worship)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형편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간구이기도 하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어 지는 것에 상응하는 인간에 대한 축복이다. 이것은 아직 완성

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종말론적 성취를 대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

라가 사단의 통치의 종식(終熄)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 나라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9:1;10:17). 따라서 본문의 말씀도 성도들이 단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

의 뜻이 개인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을 바라며, 또한 실제로 경험

하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로 보아야 한다.

=====11:3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은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용할'(* , 에피우

시온)이라는 형용사의 해석이 난해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되었기 때

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된 범례(凡例)를 참고할 수도 없으며 그 의미도 여러가지로 해

석된다. (1)’내일을 위한’이란 의미. 그러나 문맥상 ‘내일’이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요청하는데 초점이 있는만큼 이 해석은 저녁에 기도하는 경우에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단어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면 ‘내일’은 종말론적 완

성의 때를 가리키며 ‘양식’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을 영적인 양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날'(6:11)은 그 미래의 양식을 ‘오늘’ 허락

해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Liefeld). (2)’필요한’ 또는 ‘충분한’이라는 의

미. 이렇게 되면 본문은 “날마다 충분한 양식을 주옵시고”가 되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예수 당시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공급

받는다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으며(마 20:1-5),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은(출 16:4;신 8:9)

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 육체적인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

=====11:4

용서하오니…사하여 주옵시고 – 여기서 ‘죄'(* , 하마르티아)는 아

람어 ‘호바'(hob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빚’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근거하

건대 ‘죄’란 하나님께 ‘빚’ 또는 ‘부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응분의 대가를 치뤄야 할 ‘채무’를 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바 그것은 나에게 빚진 자

를 탕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빚진 나의 채무를 필연적으로 탕감되도록 하는 담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

은 하나님께 빚의 탕감을 조심스럽게 간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여기서 ‘시험'(* , 페이라스모스)

은 ‘유혹'(temptation, NIV)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

는 성도의 신앙을 꺾으려는 외적인 시련과 죄를 범할 수 있는 내적 유혹을 함축적으로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시험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하는 주체가 하나님

인 것으로 오해의 여지를 남기나 약 1:1-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물론 때로는 그분의 선한 뜻을 펴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

하기도 하지만(4:1-12;욥 1:12) 본문은 성도가 시험에 부딪쳤을 때 굴복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이것은 마 6:13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

다 아멘”이라는 송영구가 있으나 권위있는 마태복음 사본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어 이것이 본래적인(original)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11:5

밤중에…내게 빌리라 – “너희 중에 누가”라는 양식으로 비유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형식이다(11절;12:25;14:28;15:4;17:7). 한 친구가 찾아

온 시각은 ‘밤중’이다. 7절에 의하면 이 시각은 제법 늦은 밤이었다. 왜냐하면 식구들

이 모두 잠 자리에 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친구의 방문이 예의를 벗어나는

것임과 따라서 환영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1:6

여행 중에…먹일 것이 없노라 – 이 친구가 밤중에 떡(bread,NIV)을 얻으러 다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제시된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 즉 낮의

찌는 더위를 고려하건대 밤에 여행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므로 여행하는 친구

가 밤에 찾아 온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마 2:9). 그런데 친구의 방문을 받은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었다. 이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이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조금은 있었으나 당시의 풍습상 손님에게 떡을 부족하게 대접하거나

먹다 남은 떡 조각으로 대접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

다. 아무튼 그는 떡을 필요로하는 여행중의 친구를 위해 가족이 모두 한 방에서 자야

하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분명하다.

=====11:7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 아마 이 주인은 잠이 들었다가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깨

어나 다소 불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의 방문을 환영하는 “친구여”라는 말

을 하지 않는 것이다(Manson). 실질적으로 이 집 주인이 괴롭게 생각했던 것은 떡을

주는 것보다는 첫째는 문이 이미 닫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식구들과 함께 자고 있는

데 일어나 움직이면 식구들이 깨어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염려이다. 첫째 것이 문제

가 되는 까닭은 문을 잠그기 위해 문빗장을 걸었을 텐데 그것을 어두움 속에서 찾아

여는 것은 대단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Easton). 이집은 온 가족이 한 방 한 이부

자리 밑에서 잠을 자는 팔레스틴의 시골 농가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11:8

벗됨을 인하여…강청함을 인하여 – ‘강청'(boldness, NIV)함을 견디지 못해 필요

한 것을 준다. 여기서 ‘강청함'(* , 아나이데이안)은 부정접두어

‘아'(* )와 ‘부끄러움이 없음’을 뜻하는 ‘아이도스'(* )의 합성어로 체면

불구하고 간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는 두가지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요

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 했던 집 주인과 하나님의 쾌히 주심을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려는 것이고(9-13), 둘

째, 응답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끈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함을

가르친다(살전 5:17).

=====11:9

구하라…주실 것이요 – 본문의 ‘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테이테'(*

)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하는 ‘에로토'(* )와는 달리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기도’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된다

(10:13;마 18:19;막 11:24;요 11:22;엡 3:20). 본문의 의미는 ‘받기 위해서는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로 이해할 수도 있고(Lagrange), ‘구하면 확실

히 받을 수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Marshall). 그런데 후자의 의미는 다음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에 본절은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

다. 물론 여기에도 기도할 때 반드시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함

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찾으라…찾을 것이요 – 이 문구의 의미는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

동으로 옮겨야 함을 말해주는 거일 수 있고,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찾으라'(*

, 제테이테)의 성경적 용버버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도 있다(신 4:29;삼하 21:1;호 5:15;행 17:27).

두드리라…열릴 것이니 –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한 예는 랍비들의 가르

침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아스(Jeremias)는 이 장면이 하늘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후 문맥상 다소 거리가 있다.

=====11:10

구하는…열릴 것이니라 – 본절은 앞의 말씀에 대해 재차 강조 하면서 하나님께 드

린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킨다(시 91:15;사 58:9;슥 13:9;

요 15:7).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끈기와 인내보다는 하나님께서 필히 응답해

주신다는 ‘절대 신뢰’와 구한 것은 틀림없이 받는다는 ‘확신’이다.

=====11:11

생선을 달라하면…뱀을 주며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근거를 제시하

는 비유의 말씀이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생선을 주거나 생선이 없다면 적어도 해로운 것을 주지는 않을 것

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주는 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틀림없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응답해 주시되 선한 것으로 주신다

는 사실이다.

=====11:12

알을…전갈을 – 여기서 알은 떡, 마른 생선과 함께 유대지방의 정식으로 알려진

삶은 달걀을 말하며 전갈은 꼬리로 상대를 찔러 무감각하게 만드는 독을 가진 짐승이

다. 이 전갈(全蝎)은 성경에서 악하고 위험한 것의 상징으로 묘사되며(신 8:15;계

9:3,10), 몸을 구부리면 계란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한편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는

‘떡과 돌이’ 한 쌍을 이루며 서술되어 있어(마 7:9) 누가복음과 차이를 보인다.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 여기서 ‘악한'(* , 포네로스)이라는 형용사는

사람과 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3:19;6:45). 혹자는 이 표현이 바리새

파 사람들에게 쓰여졌다는 사례에 근거하여(마 12:34), 여기서도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기도 한다(Marshall). 또한 이 말씀이 인간 일반의 원죄를 지적하는 것이라

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둘 다 정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사 후자의 견해가 옳다

고 하더라도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강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천부께서…성령을 – 누가가 인간이 주는 ‘좋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의 질적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총 가운데 최고의 선물인 성령이기 때

문이다(요 16:7). 성령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전 12:4-11). 실제

로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장 귀한 선물 곧 복음의 물결이 온 세계에

로 확산되어갔다. 한편 마샬(Marshall)의 견해대로 마태의 ‘좋은 것’이라는 표현이 영

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면(롬 10:15;히 9:11;10:1) 누가와 마태는 결국 같은 의미

의 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11:14

한 벙어리 귀신 –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는 귀신 축출에 관한 기사가 없고(막

3:22), 마태복음(마 12:22)에 의하면 이 귀신은 그 사람을 벙어리가 되게 했을 뿐 아

니라 눈까지 멀게 했다. 귀신을 좇아내는 과정은 일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예

수께서 귀신을 쫓아 내고 그 사람이 온전해졌다는 기사(奇事)만 간략하게 서술함으로

써 이어지는 바알세불 논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고 묻는 모습이 나온다(마 12:23).

=====11:15

그 중에 더러는 –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일단의 무리들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되어 있고(마 12:24), 마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다(막 3:22). 서기관의 대다수는 바리새인이었으므로

사실상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일치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 바알세불이 귀신의 왕이라고 불리어지게 된 기원과 ‘바알세

불’이라는 이름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이 다만 여러가지 해

석들이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왕하 1:2에 근거하여 ‘바

알’이 에그론(Ekron)에서 숭배되던 우상인 ‘바알세붑'(Baal-Zebub)으로부터 유래했다

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한편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공동 번역의 ‘베엘제불'(Beelzebull)에서 ‘Beel’은 ‘Baal’ 즉 ‘주’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뒷 부분인 ‘Zebull’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1)

‘집’, ‘높은 곳’을 뜻한다고 보면(왕상 8:13;사 63:15) ‘거주의 주’ 또는 ‘높은 곳의

주’가 된다(Foerster). (2)발음이 유사한 ‘똥’이라는 의미의 Zebel로 보면 ‘똥의 왕’

의 된다(Hendriksen). (3)이를 ‘파리’로 해석하여 ‘파리의 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

(Bengel, Tyndale). 이 가운데 비교적 많이 인용되는 것은 (1)의 설명이다. 아무튼 본

문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유대인들(좁게는 교권자들)이, 예수가 귀신을 좇아낸 사건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정당하게 평가한 것

이 아니라 자기들의 무능력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진리를 매도하려 했던 것이다.

=====11:16

시험하여…표적을 구하니 – 마가는 여기서도 적대자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으

나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12:38). 이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마 12:23), 즉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담당할 자격

이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귀신 축출 사건을 신적 권위

의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 신적 권위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을 만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예수에게 더

무리한 요구를 하여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의도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

성이 농후하다. 이들이 말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a sign from heaven, NIV)에 대

해서는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류의 이적을 요구한 것이라

고 추측할 수 있다(왕상 18:1).

=====11:17

아시고(* , 디아노에마타) – 이는 ‘깊이 생각하다’, ‘구분하

다’의 의미를 갖는 ‘디아노에오'(* )에서 나온 말로 의도나 목적을 간파

하였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분쟁하는…무너지느니라 –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나라나 집은 없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비유 앞에 적대자들의 논리는 산산

이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11:18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 앞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일반 놀리로 이끌어 내었는데

여기서는 그 일반 논리를 특수한 문제에 적용시키고 있다. 나라와 집이 그러하듯이 사

단도 자기들 끼리 싸우면 그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입은 것

이며, 싸움은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만 있을 뿐이다(고후 10:4).

=====11:19

너희 아들들은…재판관이 되리라 – 적대자들의 비방에 대한 예수의 반대 논리는

매우 철저하며 집요하다. 이제는 적대자들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모순을 범하

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귀신 축출 행위(逐出行爲)를

사단의 힘입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일하게 그들의 추종자들의 귀신 축출 행위

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자기들 스스로를 부정하고 악마화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의 재판

관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들'(followers, NIV)로 번역된 ‘휘오스'(* )

는 ‘추종자’, ‘제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며(히 12:5;벧전 5:13), 예수 당

시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행 19:13).

=====11:20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 여기서 ‘손’으로 번역된 ‘다크튈로스'(* )

는 ‘손가락’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며(46절) 이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출 8:19;31:18;신 9:10). 그러나 더 흔하게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출 7:4,5;9:3,15). 한편 마 12:28에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기록되어 있

다. 예수의 삶의 초기부터 성령께서 함께하셨다는 의미에서(3:22;4:1,18) 마태의 서술

도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영’

이 의미상 거의 동일하였다고 할 때(대상 28:12,19) 누가와 마태는 같은 이야기를 하

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적대자들의 비

방은 완전하게 부정되며 예수는 오로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었다는 사실이 선언되었

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임하였느니라 – 예수의 말씀은 단지 적대자들의 비방을 반

박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

서 귀신을 쫓아낸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임재함을 말

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여

기서 “임하였느니라”로 번역된 ‘에프다센'(* )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동사의 의미는 ‘앞서 오다’의 뜻도 있고(살전 4:15), ‘방

금 도착했다’, ‘도달한다’는 뜻도 있다(Lenski). 이 동사의 의미를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곧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 되고 현재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

니지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이 미래

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라면 적어도 그 순간 하나님의 권세가 사단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배가 시

작되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취(先取)를

보게 된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이 견해를 지지해주는 더 결정적인 단서는 ‘너희에게’

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분명히 지금 예수 앞에 있는 청중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미

래의 청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11:21

강한 자가…안전하되 – 전통적으로 본문의 ‘강한 자'(a strong man, NIV)는 사단

으로 설명되어져 왔다. 그리고 ‘집’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세상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Lenski). 한편 사단이 지키고 있는 ‘소유’에 대해서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여 갖추어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빼앗은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단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더 강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소유는 안전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의 안전을 파괴할 것이다.

=====11:22

더 강한 자가…이길 때 – 일반적으로 ‘더 강한 자’는 예수를 지시한다. 여기서

‘이길 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

긴 것을 뜻한다. (2)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켰던 귀신 축출 사건들을 가리킨다(14

절;4:1-13;8:26-39;9:37-45). (3)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

취될 하나님의 승리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옳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총체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믿던 무장을 빼앗고…재물을 나누느니라 – ‘믿던'(* , 에페포이

데이)은 ‘설득시키다’, ‘믿게하다’는 의미의 ‘페이도'(* ) 제2과거완료 능동

태로 ‘매우 유용하다고 신뢰하던’의 뜻이다. 무장(* , 파노플리안)

은 방패, 검, 창, 투구, 무릅받이, 흉배 등으로 완전 무장한 상태를 나타낸다. 사단이

아무리 강하고 완전한 무장을 하고 있더라도 예수는 사단을 궤멸시켜 그의 무장을 해

제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이는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와 새생명을 누리게

됨을 뜻한다(요 5:24). 바야흐로 인간을 약탈하던(9:39) 사단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의해 도리어 약탈을 당하고 파멸의 종국을 맞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11:23

함께 아니하는…모으지 아니하는 – 이 말씀은 매우 급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즉

예수와 사단과의 전쟁은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에서 중립적인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의 편에 서든지 사단의 편에 서든지 결단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를 시험

하거나 비방하는 자는(15,16절) 반대하는 자요 사단의 편이요 성령의 훼방하는 자들인

것이다(마 12:31). 마찬가지로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흩어놓는 자이다. 이것은 양떼

를 모으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요 10:12), 위급한 상황에서 양떼를 모으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 자는 양떼를 죽이는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 말씀이 9:50

의 말씀과 모순이 된다고 하나 그것은 문맥, 또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인 이

해에 얽매이는 데서 오는 오류이다(마 12:30 주석 참조). 9:50의 상황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대해 중립적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셨고 또 하려고 하는 일을 그

가 행했던 것이고, 여기서는 선과 악, 진리와 반(反)진리가 싸우는 상황에서 중립지대

는 없으며 분명히 어느 한편에 서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11:24

더러운 귀신이…돌아가리라 –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체험하긴 했지만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지는 않는 경우이다. 다시말해서 귀신이 나간 이후 한동안 공백 상

태가 지속될 뿐 성령을 영접해 들이지 않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탄에 빠

지게 된 경우인 것이다. 도덕적 파국의 심각성은 26절의 ‘거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고’가 ‘정착하다’, ‘영구히 거주하다’란 의미를 지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11:25

소제(掃除)되고 수리되었거늘 – 본문의 평행 구절(마 12:44)에는 그 집이 ‘비고’라

는 표현이 더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으로 채워져 있지 않음으로 결국 악령의 지배

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적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사단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틴데일(Tyndale)은 본문

의 의미를 도덕적인 청소가 되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헝클어졌던 마음이 정

리되고 그런 결과로 생활이 좋아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1:26

더 악한 귀신 일곱을…거하니 – 집이 소제되고 수리됨으로 말미암아 예전에 거했

던 한 악령이 들어가기에는 저항력(抵沆力)이 강했다고 본다면 이 악령이 다른 일곱

귀신을 데려온 것이 이해가 된다. 여기 일곱 귀신은 막달라 마리아를 괴롭힌 일곱 귀

신을 연상 시키는데(8:2), 그 숫자도 엄청나게 불었거니와 그 악함이 전에 있던 한 귀

신보다 더 심하다는 묘사는 이 사람이 일곱 귀신이 들었을 때의 상태가 얼마나 극심하

였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는 악령이

나간 자리를 하나님의 선한 영으로 채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악령이 축출된 자리

는 빈 공간으로 두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마샬(Marshall)은 이 이야기가 귀신만을 축출해 놓고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워주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킨 유대인 귀신 축출자들에(19

절)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이야기가 적대자들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태는 평행 구절에서

이 귀신들린 자가 바로 ‘이 악한 세대’ 즉 ‘유대인’ 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던 유대 백성들이(마 3:1-6)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완악해져 예수를 거역(마 12:24)했던 상황과 연관될 것이다(Hendriksen,

Lenski).

=====11:27

당신을 밴 태와…복이 있도소이다 – 엘리사벱이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를 보고서

찬양한 내용과(1:42) 유사하며, 렌스키는 여기서 1:48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의 여인은 단순히 한 선생의 달변(達辯)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

침 배후에 있는 신적인 권위를 발견한 듯하다. 본절의 의미는 “당신의 어머니는 하나

님의 특별한 축복(bless, NIV)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로 보면 될 것이다(Marshall).

=====11:28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 예수는 여인의 찬사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곧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복되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

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데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Lenski,

Tyndale). 그러니까 ‘오히려'(* , 메눈)는 여인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

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모친과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말씀과(8:21) 동일 선상

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신실성의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헌신이라는 사실이 다

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는'(* , 퓔라쏜테스)은

‘파수하다’, ‘준수하다’는 의미의 ‘퓔라쏘'(* )의 현재 분사형으로 복있

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임무로 아는 사람임을 뜻한

다.

=====11:29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 마태는 ‘음란한’을 첨가하고 있는데(마 12:39), 구약 시

대에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비유할 때(호 1:2) 이스라엘의 완악함

과 우상 숭배는 곧 음란으로 표현되었다. 유대인들의 표적(sign, NIV) 요구가 악한 것

으로 규정되는 까닭은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

며(Marshall), 또한 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키신 여러 가지 이적적인 사건들(14,20

절;4:38-44;8:22-25;40-56)이 하나님의 권능을 밝히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

을 아예 인정치 않으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1:30

요나가…인자도…그러하리라 – 요나가 바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구원받은 것이 곧 예수의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을 예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평행 본문인 12:40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9:22에 이은 또 하나의 수난 예고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말씀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을 때 회개 운동이 일어났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해야함을 촉구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

한 심판을 알리신 것이기도 하다.

=====11:31

남방 여왕이…정죄하리니 – 여기에 언급된 ‘남방 여왕’은 왕상 10:1-13에 나오는

스바의 여왕(queen of Sheba, NIV)을 말하는데 스바는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오늘날의

예멘(Yemen)을 가리킨다. 이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무려 2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찾아왔다. 이는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땅 끝에서 온 것이다(마

12:42). 이 여왕의 열정에 비하면 유대인들의 태도는 너무도 완악한 것이었다. 그들은

솔로몬 보다 더 위대한 사람과 함께 살면서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을 솔로몬 보다 ‘더 큰 이’라고 한다. 결국 유대인들은 거리상 비교도 안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 인격의 위대함에 있어서도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와 접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모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던 셈이다.

=====11:32

니느웨 사람들이…정죄하리니 – 같은 논리가 이번에는 니느웨 사람들과 유대인들

의 대조에 적용되고 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창 10:11)로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극심한 죄악을 범하였다(욘 1: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요나

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다(욘 3:5-10). 니느웨 사람들은 일개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

도 회개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요나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 위대하신 예수의 선포를 듣고

도 회개하지 않았다. 31-32에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

의 구원 받음’과 ‘유대인의 구원 받지 못함’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방인과 유

대인의 구원 관계에 관해서는 마 8:1-17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11:33

누구든지…보게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의 의미는 두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등

불이 예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등불이 등경 위에 위치하여 주위를 밝게 비추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듯이, 예수께서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항시 생명의 빛을

비추었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2)등불을 복음의 메시지로 간주

하는 견해. 예수의 말씀을 들은 자는 말씀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도 비춰주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11:34

몸의 등불은 눈 – 여기서 몸은 전체적인 인격을 뜻하나 등불에 비유된 눈은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통로에 해당한다.

눈이 성하면…나쁘면 – ‘성하면'(* , 하플루스)의 본래적 의미는 ‘주

름이 없는’, ‘단순한’, ‘진실한’으로 영적 안목이 단순하고도 진실되게 진리에만 고정

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 단어에 ‘일편 단심’이라는 은유적 의미가 있다

고 보아 “온 몸이 밝을 것이요”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눈이 건강해서 빛을 받아들

인다면 즉 영적인 눈이 일편 단심으로 복음의 빛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전 존재는 빛으

로 가득할 것이다.” 반면 ‘나쁜'(* , 포네로스) 눈은 그 시선이 약한 것

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진리와 복음을 거부하는 눈이다.

=====11:35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 누가는 이 말씀을 하나의 권고 형식으

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마태는 경고의 형식으로 기술하였다(마 6:2). “속에 있는

빛”에 관해서는 (1)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하는 내적 빛 곧 양심(Gilmore) 혹은 (2)청중

들이 스스로 빛이라고 여기는 것을 각각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중 어떤 견

해를 취하든 본절은 본성적으로 진리를 거스리기 쉬운 인간의 무지함과 완악함에 대한

경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

은 선한 양심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신앙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경성해야 할 것이다.

=====11:36

온몸이 밝아…온전히 밝으리라 –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누가만의 독

특한 결론이나,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아 베자 사본, 고대 라틴역, 수리아역 등에서는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앞의 내용을 반복하는 듯한 본절은 반복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면이나 주제면에서 볼 때 엡 5:13,14와 유사하다. 본절의 의미는 34,35절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해지는 바 믿음의 신령한 눈을 뜨고 있는 자는 복음의 광채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가 그 빛을 주위에까지 비추는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엡 5:8).

=====11:37

한 바리새인이…앉으셨더니 – 여기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모

종의 적대 의식 또는 반감을 가지고 책잡기 위해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점심 잡수시기’에 사용된 동사 ‘아리스테세'(* )는 ‘먹다’는 의미의

‘아리스타오'(* )의 과거형으로 정확하게 말해서 이 말의 뜻은 하루의

첫번째 식사를 가리킨다. 보통의 상류층 유대인들도 평일에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한

다. 한 번은 늦은 아침에 가볍게 하고(* , 아리스톤), 또 한 번은 늦은

오후에 하는 데 이 것이 주식사이다(* , 데이프논). 안식일에는 세 차

례의 식사를 하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먹는 점심을 가장 잘 차린다. 이렇게 볼 때 예

수께서 초대받은 식사는 첫 식사라는 의미에서 ‘아침’이며(요 21:12,15), 시간상 점심

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앉으셨더니'(* , 아나퓨토)는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는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11:38

손 씻지 아니하심을…이상히 – 막 7:2에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

다가 바리새인들과 부딪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 자신이 손을 씻지 않

고 식사에 임함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씻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배티조'(*

)는 ‘담그다’, ‘적시다’의 의미로서 규례에 따라 식사전에 물 그릇에 손

을 담그는 것을 뜻한다. 이 행위는 당시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고,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결

례(潔禮)였다. 아무튼 이 제의적(祭儀的) 식사 관습은 바리새인 뿐 아니라 일반 유대

인들도 철저히 지켰던 규범이었다(막 7:3-4). 따라서 이 유전을 무시한 예수의 행위는

그 바리새인에게 파격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의 유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저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악습을 질책하기 위한 의

도적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11:39

겉은 깨끗이…속인즉 탐욕과 악독 – 예수는 ‘주'(* , 호 퀴리오스)

로서 말씀하시며, 그 대상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을 넘어 전체 바리새인들

에게로 확대된다. 예수는 자신을 초청한 사람을 면전에 두고 매우 강한 어조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있는데 마태의 경우는 (마 23:25)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종교적인 거룩함을 보이려고 그릇의 겉을 닦듯이 철저히 예식

을 엄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외양을 포장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위선

자들이라는 것이다. 탐욕(* , 하르파게스)은 ‘채어가다’는 뜻의 ‘하르파

조'(* )에서 온 말로 ‘강탈’, ‘약탈’의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악독'(*

, 포네리아스)은 ‘악한 자’를 뜻하는 ‘포네로스'(* )에서

온 말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종교적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그 중심

을 얼마나 욕심이 많고 악한 자들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11:40

어리석은 자들아 – 겉만 깨끗하게 포장을 하면 속의 추악함이 감추어 질 수 있으리

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

는 일이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눈에는 피조물들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마 10:26).

=====11:41

그 안에 있는 것 – 이에 관하여 여러 해석이 있다. (1)잔과 접시 속에 있는 것, 곧

호화 음식으로 봄. 그러면 그 의미는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지 말고 그 식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잔 속에 있는 것을 구제물로 주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하리

라”(NEB)가 된다. (2)이를 부사적 대격으로 해석하여 “마음으로부터 자선을 베풀라”의

뜻으로 본다(N.Turner). (3)”네가 모아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즉시 너의 소유물

이 깨끗해 질것이다”(J.Knox). (4)누가가 기록한 ‘구제하라’는 아람어 ‘깨끗이 하다’

(dakki)를 ‘자선을 베풀다'(zakki)로 오역한 것이라는 해석(Wellhausen). 이러한 세가

지 해석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39절과의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2)의 견해가 가장 합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 마음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음에 틀림없

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부정한 재물을 모두 되돌려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구제’라는 말에 적합하

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11:42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 여기서부터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해서 여섯

가지의 화(禍)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선포되는데, 이 문구에는 ‘저주’ 또는 ‘복

수’의 의미라기보다는 ‘탄식’의 뜻이 들어 있다(10:13).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장(死藏)시킨 채 그 형식에만 집착함으로써 성스러운 하나님의

율법을 박재화시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바판하고 있다. 본래 구약의 율

법은 곡식, 포도주,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다

(레 27:30-33;신 14:22-29). 물론 여기에는 땅 위에서 소출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랍비적 규범은 십일조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

분화하였는데, 심지어는 땔 나무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한다(Mishna). 이런

것 자체가 벌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맹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리새

인들이 바친 십일조의 세 항목이 열거되고 있는데, ‘박하'(* , 헤두오

스몬)는 정원에서 재배하는 식물로 그 향기가 좋으며, ‘운향'(* , 폐가

논)은 회록색의 잎과 노란 꽃을 가진 식물이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23:23) ‘회향’

(* , 아네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논드 향료(anethum graveolens)를

가리킨다. 마지막 항목인 ‘채소'(* , 라카논)는 어떤 특정한 종류를 가

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총칭으로서의 채소를 뜻한다. 마태는 누가와 달리 특정

한 종류인 ‘근채'(* , 퀴미논)로 기록하고 있다.

공의와…사랑은 버리는도다 – 형식적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

성적이며 철저했던 바리새인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탈색시켜 버렸다.

여기서 ‘공의'(* , 크리시스)는 ‘정의’, ‘의로움’의 뜻으로 사회 정의와

관련된 말이며(Easton),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에 억압당하는 사

람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사랑'(* , 아가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에 근거하여 마음과 목숨과 힘, 그리고 뜻을 다해

하가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가리킨다(10:27).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공의와 사랑을 버렸던 것이다. ‘버리다'(*

, 파레르케스데)는 ‘비켜나다’, ‘간과하다’의 의미로 이들의 행위가 중요한 핵

심을 비켜가면서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 예수게서 그들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는 만큼 그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도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전자만이 지켜질 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혹자는 정결법의 규절을 파기하신 예수께서(38절) 율법의

준수를 말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맹목적 율법 파괴자로 오해하는 데서 오는 그릇된 문제 제기이다. 왜냐하면 (1)예수께

서는 율법 자체를 파괴하거나 반대하시지 않고(16:17), (2)결코 예수는 정신이 결여된

율법 준수를 인정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3)을 법이 규정하지도 않은 유전적(遺傳的)

규범을 거부하는 것과 정당한 목적을 가진 십일조를 인정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

기 때문이다.

=====11:43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명예

욕이 지적된다. 첫째로 지적되는 것은 교권적 교만으로, 그들은 공식적 예배 종교 교

육 담당 기관인 회당에서 늘상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23:6) 이들이 잔치에서도 상석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높은

자리'(* , 프로토카데드리아)는 ‘가장 높은 자리'(the most

important seats, NIV)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바리새인들이 회

당의 상석에 앉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 보다는 특권

적 우월 의식(優越意式)이나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던 점

이다. 둘째로 지적되는 것은 세속적 명예욕으로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을 자신

들의 특별한 존재성을 확인받는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은 단순한 문안 인사의 차원을 넘어 존경의 표시였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

들로서 당연히 존경의 인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으례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자신들의 내면과 행위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

에서 바른 것인지를 점검해 봤어야 했던 것이다.

=====11:44

평토장(平土葬)한 무덤 – 바리새인들에 대한 세번째 화(禍)는 그들의 본질적 모습

에 관한 것이다. 즉 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억울한 부

정을 범하게 만드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게 되는데 평토장한 무덤 같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도 닿으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 19:16). 본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부패하고 썩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은폐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 중에 부정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들로 비

판되고 있다. 이에 비해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23:27)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서술되고

있다. 즉 거기서는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 즉 속에는 죽음과 부패함이 있으나 겉은

아름답게 치장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그들의 은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고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외부적인 치장에 비판의 초점이 맞

추어져 있는 것이다.

=====11:45

한 율법사가…모욕하심이니이다 – 여기서부터는 비판의 대상이 바리새인에서 율법

사로 바뀌어진다. 마태복음의 경우 이 두 그룹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함께 싸잡아 바

난하고 있다(마 23:13,27,29). 여기서 율법사는 일명 서기관(scribe)으로 불리기도 하

는데(막 12:28), 유대교의 전문적인 율법 해석자나 율법 교사들을 가리킨다. 본문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집에 율법사도 함께 있었음을 말해주는데(37절) 이 율법사

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을 듣고 있던 중 마치 도둑이 제 발저린다는 격으로

찔림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율법사의 대부분은 바리새인이었으므로 그가 그렇게 받

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율법사는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

다”는 불만을 드러냄으로써 바리새인들에게 대한 비판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점

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그가 교만으로 가득차 예수의 비판을

‘모욕'(insult, NIV)으로 받아들인 것은 예수의 비판을 근거 없고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았음을 뜻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사들의 죄악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다.

=====11:46

지기 어려운 짐을…대지 않는도다 – 여기서 말하는 ‘지기 어려운 짐’이란 율법 자

체가 아니라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율법사들의 해석을 말하는데, 이들은 사실

상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 우월한 것으로까지 여겼다. 그런데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 되어 있고 복잡하여(모세의 율법을 제외하고도 613조에 달하는 규범

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 일일이 암기하여 지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저들은

이런 부담(burden)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기들은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마

23:3).

=====11:47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 이들은 선지자들이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죽임을 당

하여 묻힌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세워 선지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처럼 선전하

지만(마 23:29,30) 그것은 자신들의 악함을 은폐하기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

다. 이들은 죽은 선지자를 기념하면서 살아있는 선지자를 죽이는 모순된 자들이며

(9:9;마 14:3-12), 앞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선지자를 합한 것

보다도 더 위대한 한 선지자를 죽일 것이다(23:18,21,23).

=====11:48

너희는 쌓으니 – 47절과 마 23:29에서처럼 무덤을 장식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

나 그 보다는 역설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 의미는 (1)”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죽음을 확인한다. 즉 조상들의 악행을 완성

한다”(Manson, Schweizer). (2)”너희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 전하는 말씀을 거부한

너희 조상들 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 너희들은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O.Michel, Schulz). 결국 여기서도

계속 지적되는 것은 외적인 경건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역이다.

=====11:49

하나님의 지혜 – 이 문구에 대한 용례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이 문구에 대

한 학자들의 해석도 각양 각색이다. 학자들의 제 해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핍박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유대 묵시문학서 중 하나

의 이름이라고 본다(Bultmann). 그러나 이런 제목의 책은 발견된 적은 없다. (2)하나

님의 ‘지혜'(God in his wisdon. NIV)는 예수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Tatian,

Geldenhuys).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지혜(wisdon from God, NIV)라고 말한 적은 있

으나(고전 1:30), 예수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경우는 없다. (3)구약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Godet). (4)예수께서 과거에 하셨던 말씀들로 본다(Meyer). (5)예수의 지혜

속에 있는 하나님 즉 그의 예지와 신적 섭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본다

(Lenski). (6)’하나님이 그의 지혜로’의 의미로 본다(Creed, Manson, Danker). (7)구

약과 유대교에서 지혜를 인격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신적 지혜”로 이해한다

(U.Wilckens, Schulz). 지혜가 인격화되는 예를 보면 잠 1:20-33에서는 인간에게 말을

하며, 7:35에서는 그 자녀들에 관해 언급한다. 이러한 제 견해들 가운데 (6)과 (7)의

견해가 비교적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11:50

모든 선지자의 피 – 앞서간 세대들이 저지른 과오는 후대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고 은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

려 주어진 기회와 은총을 저버릴 때에는 전(前) 세대들로부터 누적된 심판을 받게된

다. 바로 예수 세대의 유대인들이 이런 상황을 자초하고 있었다(47-48). 전 세대들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악을 더하는 세대들에게 가해질 형벌의 중함과 엄격함

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여러 차례 기록이 되어 있다(잠 29:1;렘 7:16;겔 14:14). 한편

본문의 ‘모든 선지자’에 대해서 마태는 ‘의인'(* , 디카이온)으로 표현

하고 있는데 이는 ‘아벧’을 언급함에 있어서 ‘선지자’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았을 것

이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Marshall). 그러나 본문에서도 ‘선지자’라는 칭호에 초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종들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그

의미는 동일하다.

=====11:51

아벧의 피…사가랴의 피 – 이것은 유대인들의 성경 분류법상 처음 책인 창세기로

부터 마지막 책인 역대기하에 이르기 까지의 의로운 첫번째 죽음과(창 4:8) 마지막 죽

음(대하 24:20-22)을 표현한 것이다. 아벧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로 칭함을 받았으나 그의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가랴는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비판하다 죽임을 당한 의인이었다. 한편 마태는 사가랴가 바라갸의 아들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마 23:35), 이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스가랴)로

(대하 24:20) 기록하고 잇는 본문과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태는 여호야다의 아들과 예언서 스가랴의 기록자인 ‘바라갸’

의 아들 스가랴를 혼동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바라갸의 아들 스가

랴도 동일하게 살해당했다는 전승이 있거나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 언급되는

스가랴는 A.D.67년 헤롯당에 의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바라이스의 아들 스가랴로 보

는 견해도 있는데 이럴 경우 선지자의 죽음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의 전(全) 유대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셈이며 예루살렘의 멸망도 피의 대가로 지불된 하나님의 심판으

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담당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매우 강한 결

의의 표현으로 그 속에는 예수의 신적인 권위가 내포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A.D. 70년경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파멸됨으로써 과연 그 세대는 피의 대가를 담당하였

다.

=====11:52

지식의 열쇠 –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 행위 자체로도 악한 것이지만 더 악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것을 차단시켜 버리는 행위임을 밝혀지고 있다.

사실상 율법사(律法士)들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어서 마치 천국

문의 열쇠를 독점하고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형식만을 남겨둔 채 정신을 사장시켜 버리는 행위나 인간적인 전통에 맹종하여 결과적

으로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집을 부과하는 그들의 행위는 말 그대로 진리의 문,

천국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들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행위였

다. 이런 행위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부지 중에 부정을 범하게 만드

는 행위(44절) 이상의 것으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11:53

거기서 – ‘거기’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집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

과 율법사들의 위선과 몽매함을 준엄하게 비판하신 후에 그 집에서 나오고 있다. 식사

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식사가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맹렬히 달라붙어…힐문하고 – ‘맹렬히'(* , 데이노스)는 ‘두렵게’,

‘무섭게’의 의미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얼마나 결한 감정의 상태로 까지 흥분되어

있는가를 말해준다. ‘달라붙어'(* , 에네케인)는 ‘몹시 분노하다’ ‘누구

에게 분노를 품다’의 의미이다. 이 역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예수의 비판을 겸허하

게 받아들여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자기들의 잘못을 비판(批判)하는 선지자들을 죽

인 조상들처럼 예수를 해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1:54

잡고자 하여…지키더라 – 이 표현들은 사냥에서 사용되는 것들로 적대자들의 증오

의 정도가 얼마나 심하며 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잡고자 하여'(*

, 데류사이)는 ‘쫓다’, ‘사냥에서 잡다’의 의미를 가지며, ‘지키더라'(*

, 에네드류온테스)는 ‘-안에’를 뜻하는 ‘엔'(* )과 ‘자리’를 뜻하는

‘헤드라'(* )의 합성어로 사냥감을 포획(捕獲)하기 위해서 매복해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저들은 지금까지 행한(39-52절) 예수의 비판에 대해 아무런 반론을 제기

하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의 비판이 정당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공격할

허점을 찾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명분도 없는 일을 위해 이성

을 잃고 광분하는 모습은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품위를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며 짐승이

나 잡아먹고 사는 추한 모습인 것이다.

헬라어 누가복음 1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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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 에게네토 엔 토 에이나이 아우톤 엔 토포 티니 프로슈코메논 호스 에파우사토 에이펜 티스 톤 마데톤 아우투 프로스 아우톤 퀴리에 디닼손 헤마스 프로슈케스다이 카도스 카이 요안네스 에디닼센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개역개정,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새번역,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어느 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주께서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 One day Jesus was praying in a certain place. When he finished,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just as John taught his disciples.”

영어NASB,1 It happened that while Jesus was praying in a certain place, after He had finished,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just as John also taught his disciples.”

영어MSG,1 One day he was praying in a certain place. When he finished, one of his disciples said, “Master, teach us to pray just as John taught his disciples.”

영어NRSV,1 He was praying in a certain place, and after he had finished,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as John taught his disciples.”

헬라어신약Stephanos,1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ειναι αυτον εν τοπω τινι προσευχομενον ως επαυσατο ειπεν τις των μαθητων αυτου προς αυτον κυριε διδαξον ημας προσευχεσθαι καθως και ιωαννης εδιδαξεν τους μαθητα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et factum est cum esset in loco quodam orans ut cessavit dixit unus ex discipulis eius ad eum Domine doce nos orare sicut et Iohannes docuit discipulos suos

히브리어Modern,1 ויהי הוא מתפלל במקום אחד ויאמר אליו אחד מתלמידיו אחרי כלותו אדני למדנו להתפלל כאשר למד גם יוחנן את תלמידיו׃

성 경: [눅11: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소 모호한 표현인 ‘한 곳에서’로 이야기의 서두를 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3:21;6:12),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심을 지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 요한이…가르쳐 주옵소서 –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서 요청하는 것은 이 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는 것을 보자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것이 생각나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당시 어떤 종교 공동체(宗敎共同體)에서 지도자들이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고(Farrar, Plummer), 또한 일반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였다(행 10:3,9).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워줄 수 있는 기도를 원했던 것이다(Jeremias).

에펜 데 아우토이스 호탄 프로슈케스데 레게테 파테르 하기아스데토 토 오노마 수 엘데토 헤 바실레이아 수

개역개정,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새번역,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다른 고대 사본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는 ‘성령이 임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주시오며’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가 첨가되어 있음

우리말성경,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여,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가톨릭성경,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영어NIV,2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영어NASB,2 And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영어MSG,2 So he said, “When you pray, say, Father, Reveal who you are. Set the world right.

영어NRSV,2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2 ειπεν δε αυτοις οταν προσευχησθε λεγετε πατερ ημων ο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αγιασθητω το ονομα σου ελθετω η βασιλεια σου γενηθητω το θελημα σου ως εν ουρανω και επι της γης

라틴어Vulgate,2 et ait illis cum oratis dicite Pater sanctificetur nomen tuum adveniat regnum tuum

히브리어Modern,2 ויאמר אליהם כי תתפללו אמרו אבינו שבשמים יתקדש שמך תבוא מלכותך יעשה רצונך כמו בשמים כן בארץ׃

성 경: [눅11: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이렇게 하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 본문을 영원 불변의 기도형으로 생각해서 마치 주문(呪文)을 외듯이 반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될 것이며, 기도가 담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과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것을'(what) 기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how) 기도하라 하신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 아버지여 – 이 호칭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사용했던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것임을 나타낸다(10:21 주석 참조). 이제 예수는 제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롭게 갖게되는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준다(요 20:17;롬 8:14-17). 한편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로 되어 있어 형식에 있어서 더 세련되고 완벽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 부분은 마태복음과 일치한다(마 6:9).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표현한 것이니만큼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뜻한다. 결국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원(祈願)이자 경외심에서 기인하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또한 본 구절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높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겠다는 신앙의 표시이자 하나의 서약이라고 할 수 있다(레 22:32;시 79:9;사 8:13;29:23). 동시에 이 기원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worship)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형편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간구이기도 하다.

󰃨 나라이 임하옵시며 –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어 지는 것에 상응하는 인간에 대한 축복이다.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종말론적 성취를 대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의 종식(終熄)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 나라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9:1;10:17). 따라서 본문의 말씀도 성도들이 단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개인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을 바라며, 또한 실제로 경험하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로 보아야 한다.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 디두 헤민 토 칻 헤메란

개역개정,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새번역,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 ㉣또는 ‘내일 양식’

우리말성경,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가톨릭성경,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영어NIV,3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영어NASB,3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영어MSG,3 Keep us alive with three square meals.

영어NRSV,3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헬라어신약Stephanos,3 τον αρτον ημων τον επιουσιον διδου ημιν το καθ ημεραν

라틴어Vulgate,3 panem nostrum cotidianum da nobis cotidie

히브리어Modern,3 את לחם חקנו תן לנו יום יום׃

성 경: [눅11: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은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용할'(*, 에피우시온)이라는 형용사의 해석이 난해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된 범례(凡例)를 참고할 수도 없으며 그 의미도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1)’내일을 위한’이란 의미. 그러나 문맥상 ‘내일’이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요청하는데 초점이 있는만큼 이 해석은 저녁에 기도하는 경우에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단어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면 ‘내일’은 종말론적 완성의 때를 가리키며 ‘양식’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을 영적인 양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날'(6:11)은 그 미래의 양식을 ‘오늘’ 허락해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Liefeld). (2)’필요한’ 또는 ‘충분한’이라는 의미. 이렇게 되면 본문은 “날마다 충분한 양식을 주옵시고”가 되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예수 당시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으며(마 20:1-5),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은(출 16:4;신 8:9) 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 육체적인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

카이 아페스 헤민 타스 하마르티아스 헤몬 카이 가르 아우토이 아피오멘 판티 오페일론티 헤민 카이 메 에이세넹케스 헤마스 에이스 페이라스몬

개역개정,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새번역,4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 ㉤또는 ‘빠뜨리지’ ㉥다른 고대 사본들은 끝에 ‘우리를 악에서(또는 ‘악한 자에게서’) 구하시옵소서’가 첨가되어 있음

우리말성경,4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도 용서해 주소서.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가톨릭성경,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영어NIV,4 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one who sin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영어NASB,4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also forgive everyone who is indebted to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영어MSG,4 Keep us forgiven with you and forgiving others. Keep us safe from ourselves and the Devil.”

영어NRSV,4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forgive everyone indebted to us. And do not bring us to the time of trial.”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αφες ημιν τας αμαρτιας ημων και γαρ αυτοι αφιεμεν παντι οφειλοντι ημιν και μη εισενεγκης ημας εις πειρασμον αλλα ρυσαι ημας απο του πονηρου

라틴어Vulgate,4 et dimitte nobis peccata nostra siquidem et ipsi dimittimus omni debenti nobis et ne nos inducas in temptationem

히브리어Modern,4 וסלח לנו את חובתנו כי סלחים גם אנחנו לכל החיב לנו ואל תביאנו לידי נסיון כי אם הצילנו מן הרע׃

성 경: [눅11: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용서하오니…사하여 주옵시고 – 여기서 ‘죄'(*, 하마르티아)는 아람어 ‘호바'(hob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빚’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근거하건대 ‘죄’란 하나님께 ‘빚’ 또는 ‘부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응분의 대가를 치뤄야 할 ‘채무’를 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바 그것은 나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빚진 나의 채무를 필연적으로 탕감되도록 하는 담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 빚의 탕감을 조심스럽게 간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여기서 ‘시험'(*, 페이라스모스)은 ‘유혹'(temptation, NIV)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성도의 신앙을 꺾으려는 외적인 시련과 죄를 범할 수 있는 내적 유혹을 함축적으로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시험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하는 주체가 하나님인 것으로 오해의 여지를 남기나 약 1:1-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물론 때로는 그분의 선한 뜻을 펴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기도 하지만(4:1-12;욥 1:12) 본문은 성도가 시험에 부딪쳤을 때 굴복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이것은 마 6:13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영구가 있으나 권위있는 마태복음 사본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어 이것이 본래적인(original)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카이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티스 엨스 훼몬 엨세이 필론 카이 포류세타이 프로스 아우톤 메소뉰티우 카이 에이페 아우토 필레 크레손 모이 트레이스 아르투스

개역개정,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새번역,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우리말성경,5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누가 친구가 있는데 한밤중에 그가 찾아와 ‘친구여, 내게 빵 세 덩이만 빌려 주게.

가톨릭성경,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영어NIV,5 Then he said to them, “Suppose one of you has a friend, and he goes to him at midnight and says, ‘Friend, lend me three loaves of bread,

영어NASB,5 Then He said to them, “Suppose one of you has a friend, and goes to him at midnight and says to him, ‘Friend, lend me three loaves;

영어MSG,5 Then he said, “Imagine what would happen if you went to a friend in the middle of the night and said, ‘Friend, lend me three loaves of bread.

영어NRSV,5 And he said to them, “Suppose one of you has a friend, and you go to him at midnight and say to him, ‘Friend, lend me three loaves of bread;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τις εξ υμων εξει φιλον και πορευσεται προς αυτον μεσονυκτιου και ειπη αυτω φιλε χρησον μοι τρεις αρτους

라틴어Vulgate,5 et ait ad illos quis vestrum habebit amicum et ibit ad illum media nocte et dicit illi amice commoda mihi tres panes

히브리어Modern,5 ויאמר אליהם מי בכם אשר יהיה לו אהב והלך ובא אליו בחצות הלילה ואמר אליו ידידי הלוני שלשת ככרות לחם׃

성 경: [눅11: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밤중에…내게 빌리라 – “너희 중에 누가”라는 양식으로 비유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형식이다(11절;12:25;14:28;15:4;17:7). 한 친구가 찾아온 시각은 ‘밤중’이다. 7절에 의하면 이 시각은 제법 늦은 밤이었다. 왜냐하면 식구들이 모두 잠 자리에 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친구의 방문이 예의를 벗어나는 것임과 따라서 환영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에페이데 필로스 무 파레게네토 엨스 호두 프로스 메 카이 우크 에코 호 파라데소 아우토

개역개정,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새번역,6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우리말성경,6 내 친구가 여행 길에 나를 만나러 왔는데 내놓을 게 없어서 그렇다네’ 할 때

가톨릭성경,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영어NIV,6 because a friend of mine on a journey has come to me, and I have nothing to set before him.’

영어NASB,6 for a friend of mine has come to me from a journey, and I have nothing to set before him’;

영어MSG,6 An old friend traveling through just showed up, and I don’t have a thing on hand.’

영어NRSV,6 for a friend of mine has arrived, and I have nothing to set befor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6 επειδη φιλος μου παρεγενετο εξ οδου προς με και ουκ εχω ο παραθησω αυτω

라틴어Vulgate,6 quoniam amicus meus venit de via ad me et non habeo quod ponam ante illum

히브리어Modern,6 כי אהבי בא אלי מן הדרך ואין לי דבר לשום לפניו׃

성 경: [눅11: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여행 중에…먹일 것이 없노라 – 이 친구가 밤중에 떡(bread,NIV)을 얻으러 다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제시된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 즉 낮의 찌는 더위를 고려하건대 밤에 여행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므로 여행하는 친구가 밤에 찾아 온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마 2:9). 그런데 친구의 방문을 받은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었다. 이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이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조금은 있었으나 당시의 풍습상 손님에게 떡을 부족하게 대접하거나 먹다 남은 떡 조각으로 대접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그는 떡을 필요로하는 여행중의 친구를 위해 가족이 모두 한 방에서 자야하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분명하다.

카케이노스 에소덴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페 메 모이 코푸스 파레케 에데 헤 뒤라 케클레이스타이 카이 타 파이디아 무 멭 에무 에이스 텐 코이텐 에이신 우 뒤나마이 아나스타스 두나이 소이

개역개정,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새번역,7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우리말성경,7 그 사람이 안에서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은 다 잠겼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벌써 잠자리에 들었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뭘 줄 수가 없네’라고 거절할 수 있겠느냐?

가톨릭성경,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영어NIV,7 “Then the one inside answers, ‘Don’t bother me. The door is already locked, and my children are with me in bed. I can’t get up and give you anything.’

영어NASB,7 and from inside he answers and says, ‘Do not bother me; the door has already been shut and my children and I are in bed; I cannot get up and give you anything.’

영어MSG,7 “The friend answers from his bed, ‘Don’t bother me. The door’s locked; my children are all down for the night; I can’t get up to give you anything.’

영어NRSV,7 And he answers from within, ‘Do not bother me; the door has already been locked, and my children are with me in bed; I cannot get up and give you anything.’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κεινος εσωθεν αποκριθεις ειπη μη μοι κοπους παρεχε ηδη η θυρα κεκλεισται και τα παιδια μου μετ εμου εις την κοιτην εισιν ου δυναμαι αναστας δουναι σοι

라틴어Vulgate,7 et ille de intus respondens dicat noli mihi molestus esse iam ostium clausum est et pueri mei mecum sunt in cubili non possum surgere et dare tibi

히브리어Modern,7 והוא מלפנים יענה ויאמר אל תוגיעני כי כבר נסגרה הדלת וילדי שוכבים עמדי במטה לא אוכל לקום ולתת לך׃

성 경: [눅11: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 아마 이 주인은 잠이 들었다가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다소 불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의 방문을 환영하는 “친구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Manson). 실질적으로 이 집 주인이 괴롭게 생각했던 것은 떡을 주는 것보다는 첫째는 문이 이미 닫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식구들과 함께 자고 있는데 일어나 움직이면 식구들이 깨어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염려이다. 첫째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문을 잠그기 위해 문빗장을 걸었을 텐데 그것을 어두움 속에서 찾아 여는 것은 대단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Easton). 이 집은 온 가족이 한 방 한 이부자리 밑에서 잠을 자는 팔레스틴의 시골 농가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레고 휘민 에이 카이 우 도세이 아우토 아나스타스 디아 토 에이나이 필론 아우투 디아 게 텐 아나이데이안 아우투 에게르데이스 도세이 아우토 호손 크레제이

개역개정,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새번역,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우리말성경,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는 그가 일어나 빵을 갖다 주지 않을지라도, 끈질기게 졸라 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가톨릭성경,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영어NIV,8 I tell you, though he will not get up and give him the bread because he is his friend, yet because of the man’s boldness he will get up and give him as much as he needs.

영어NASB,8 “I tell you, even though he will not get up and give him anything because he is his friend, yet because of his persistence he will get up and give him as much as he needs.

영어MSG,8 “But let me tell you, even if he won’t get up because he’s a friend, if you stand your ground, knocking and waking all the neighbors, he’ll finally get up and get you whatever you need.

영어NRSV,8 I tell you, even though he will not get up and give him anything because he is his friend, at least because of his persistence he will get up and give him whatever he needs.

헬라어신약Stephanos,8 λεγω υμιν ει και ου δωσει αυτω αναστας δια το ειναι αυτου φιλον δια γε την αναιδειαν αυτου εγερθεις δωσει αυτω οσων χρηζει

라틴어Vulgate,8 dico vobis et si non dabit illi surgens eo quod amicus eius sit propter inprobitatem tamen eius surget et dabit illi quotquot habet necessarios

히브리어Modern,8 אני אמר לכם גם כי לא יקום לתת לו על היותו אהבו יקום בעבור עזות פניו ויתן לו ככל צרכו׃

성 경: [눅11: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벗됨을 인하여…강청함을 인하여 – ‘강청'(boldness, NIV)함을 견디지 못해 필요한 것을 준다. 여기서 ‘강청함'(*, 아나이데이안)은 부정접두어 ‘아'(*)와 ‘부끄러움이 없음’을 뜻하는 ‘아이도스'(*)의 합성어로 체면 불구하고 간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는 두가지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 했던 집 주인과 하나님의 쾌히 주심을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려는 것이고(9-13), 둘째, 응답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끈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함을 가르친다(살전 5:17).

카고 휘민 레고 아이테이테 카이 도데세타이 휘민 제테이테 카이 휴레세테 크루에테 카이 아노이게세타이 휘민

개역개정,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새번역,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우리말성경,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가톨릭성경,9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영어NIV,9 “So I say to you: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영어NASB,9 “So I say to you,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it will be opened to you.

영어MSG,9 “Here’s what I’m saying: Ask and you’ll get; Seek and you’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open.

영어NRSV,9 “So I say to you, Ask, and it will be given you; search,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γω υμιν λεγω αιτειτε και δοθησεται υμιν ζητειτε και ευρησετε κρουετε και ανοιγησεται υμιν

라틴어Vulgate,9 et ego vobis dico petite et dabitur vobis quaerite et invenietis pulsate et aperietur vobis

히브리어Modern,9 וגם אני אמר לכם שאלו וינתן לכם דרשו ותמצאו דפקו ויפתח לכם׃

성 경: [눅11: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구하라…주실 것이요 – 본문의 ‘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테이테'(*)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하는 ‘에로토'(*)와는 달리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기도’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된다(10:13;마 18:19;막 11:24;요 11:22;엡 3:20). 본문의 의미는 ‘받기 위해서는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로 이해할 수도 있고(Lagrange), ‘구하면 확실히 받을 수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Marshall). 그런데 후자의 의미는 다음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에 본절은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기도할 때 반드시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 찾으라…찾을 것이요 – 이 문구의 의미는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말해주는 거일 수 있고,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찾으라'(*, 제테이테)의 성경적 용법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신 4:29;삼하 21:1;호 5:15;행 17:27).

󰃨 두드리라…열릴 것이니 –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한 예는 랍비들의 가르침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아스(Jeremias)는 이 장면이 하늘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후 문맥상 다소 거리가 있다.

파스 가르 호 아이톤 람바네이 카이 호 제톤 휴리스케이 카이 토 크루온티 아노이게세타이

개역개정,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새번역,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우리말성경,10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릴 것이다.

가톨릭성경,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영어NIV,10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he who seeks finds; and to him who knocks, the door will be opened.

영어NASB,10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and he who seeks, finds; and to him who knocks, it will be opened.

영어MSG,10 “Don’t bargain with God. Be direct. Ask for what you need. This is not a cat-and-mouse, hide-and-seek game we’re in.

영어NRSV,10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and everyone who searches finds, and for everyone who knocks, the door will be opened.

헬라어신약Stephanos,10 πας γαρ ο αιτων λαμβανει και ο ζητων ευρισκει και τω κρουοντι ανοιγησεται

라틴어Vulgate,10 omnis enim qui petit accipit et qui quaerit invenit et pulsanti aperietur

히브리어Modern,10 כי כל השאל יקבל והדרש ימצא ולדפק יפתח׃

성 경: [눅11:1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구하는…열릴 것이니라 – 본절은 앞의 말씀에 대해 재차 강조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킨다(시 91:15;사 58:9;슥 13:9;요 15:7).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끈기와 인내보다는 하나님께서 필히 응답해 주신다는 ‘절대 신뢰’와 구한 것은 틀림없이 받는다는 ‘확신’이다.

티나 데 엨스 휘몬 톤 파테라 아이테세이 호 휘오스 이크뒨 카이 안티 이크뒤오스 오핀 아우토 에피도세이

개역개정,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새번역,11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우리말성경,11 너희 가운데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가톨릭성경,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영어NIV,11 “Which of you fathers, if your son asks for a fish, will give him a snake instead?

영어NASB,11 “Now suppose one of you fathers is asked by his son for a fish; he will not give him a snake instead of a fish, will he?

영어MSG,11 If your little boy asks for a serving of fish, do you scare him with a live snake on his plate?

영어NRSV,11 Is there anyone among you who, if your child asks for a fish, will give a snake instead of a fish?

헬라어신약Stephanos,11 τινα δε υμων τον πατερα αιτησει ο υιος αρτον μη λιθον επιδωσει αυτω ει και ιχθυν μη αντι ιχθυος οφιν επιδωσει αυτω

라틴어Vulgate,11 quis autem ex vobis patrem petet panem numquid lapidem dabit illi aut piscem numquid pro pisce serpentem dabit illi

히브리어Modern,11 ומי בכם האב אשר ישאל ממנו בנו לחם ונתן לו אבן ואם דג היתן לו נחש תחת הדג׃

성 경: [눅11:1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생선을 달라하면…뱀을 주며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근거를 제시하는 비유의 말씀이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생선을 주거나 생선이 없다면 적어도 해로운 것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을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주는 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틀림없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응답해 주시되 선한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이다.

에 카이 아이테세이 오온 에피도세이 아우토 스코르피온

개역개정,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새번역,12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우리말성경,12 또 자녀가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있겠느냐?

가톨릭성경,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영어NIV,12 Or if he asks for an egg, will give him a scorpion?

영어NASB,12 “Or if he is asked for an egg, he will not give him a scorpion, will he?

영어MSG,12 If your little girl asks for an egg, do you trick her with a spider?

영어NRSV,12 Or if the child asks for an egg, will give a scorpion?

헬라어신약Stephanos,12 η και εαν αιτηση ωον μη επιδωσει αυτω σκορπιον

라틴어Vulgate,12 aut si petierit ovum numquid porriget illi scorpionem

히브리어Modern,12 או כי ישאלנו ביצה היתן לו עקרב׃

성 경: [눅11:1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알을…전갈을 – 여기서 알은 떡, 마른 생선과 함께 유대지방의 정식으로 알려진 삶은 달걀을 말하며 전갈은 꼬리로 상대를 찔러 무감각하게 만드는 독을 가진 짐승이다. 이 전갈(全蝎)은 성경에서 악하고 위험한 것의 상징으로 묘사되며(신 8:15;계 9:3,10), 몸을 구부리면 계란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한편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는 ‘떡과 돌이’ 한 쌍을 이루며 서술되어 있어(마 7:9) 누가복음과 차이를 보인다.

에이 운 휘메이스 포네로이 휘파르콘테스 오이다테 도마타 아가다 디도나이 토이스 테크노이스 휘몬 포소 말론 호 파테르 호 엨스 우라누 도세이 프뉴마 하기온 토이스 아이투신 아우톤

개역개정,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새번역,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다른 고대 사본은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하늘에서부터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말성경,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가톨릭성경,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영어NIV,13 If you then, though you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Father in heaven give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him!”

영어NASB,13 “If you then, being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heavenly Father give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Him?”

영어MSG,13 As bad as you are, you wouldn’t think of such a thing–you’re at least decent to your own children. And don’t you think the Father who conceived you in love will give the Holy Spirit when you ask him?”

영어NRSV,13 If you then, who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the heavenly Father give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3 ει ουν υμεις πονηροι υπαρχοντες οιδατε αγαθα δοματα διδοναι τοις τεκνοις υμων ποσω μαλλον ο πατηρ ο εξ ουρανου δωσει πνευμα αγιον τοις αιτουσι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13 si ergo vos cum sitis mali nostis bona data dare filiis vestris quanto magis Pater vester de caelo dabit spiritum bonum petentibus se

히브리어Modern,13 הן אתם הרעים ידעים לתת מתנות טבות לבניכם אף כי האב מן השמים יתן את רוח הקדש לשאלים מאתו׃

성 경: [눅11:1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너희가 악할지라도 – 여기서 ‘악한'(*, 포네로스)이라는 형용사는 사람과 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3:19;6:45). 혹자는 이 표현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쓰여졌다는 사례에 근거하여(마 12:34), 여기서도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기도 한다(Marshall). 또한 이 말씀이 인간 일반의 원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둘 다 정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사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강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천부께서…성령을 – 누가가 인간이 주는 ‘좋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의 질적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총 가운데 최고의 선물인 성령이기 때문이다(요 16:7). 성령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전 12:4-11). 실제로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장 귀한 선물 곧 복음의 물결이 온 세계에로 확산되어갔다. 한편 마샬(Marshall)의 견해대로 마태의 ‘좋은 것’이라는 표현이 영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면(롬 10:15;히 9:11;10:1) 누가와 마태는 결국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카이 엔 에크발론 다이모니온 카이 아우토 엔 코폰 에게네토 데 투 다이모니우 엨셀돈토스 엘랄레센 호 코포스 카이 에다우마산 호이 오클로이

개역개정,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새번역,14 예수께서 귀신을 하나 내쫓으셨는데, [그것은] 벙어리 [귀신이었다]. 그 귀신이 나가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리가 놀랐다.

우리말성경,14 예수께서 말 못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계셨습니다. 그 귀신이 나오자 말 못하던 사람이 말하게 됐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가톨릭성경,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영어NIV,14 Jesus was driving out a demon that was mute. When the demon left, the man who had been mute spoke, and the crowd was amazed.

영어NASB,14 And He was casting out a demon, and it was mute; when the demon had gone out, the mute man spoke; and the crowds were amazed.

영어MSG,14 Jesus delivered a man from a demon that had kept him speechless. The demon gone, the man started talking a blue streak, taking the crowd by complete surprise.

영어NRSV,14 Now he was casting out a demon that was mute; when the demon had gone out, the one who had been mute spoke, and the crowds were amaze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ην εκβαλλων δαιμονιον και αυτο ην κωφον εγενετο δε του δαιμονιου εξελθοντος ελαλησεν ο κωφος και εθαυμασαν οι οχλοι

라틴어Vulgate,14 et erat eiciens daemonium et illud erat mutum et cum eiecisset daemonium locutus est mutus et admiratae sunt turbae

히브리어Modern,14 ויהי היום ויגרש שד והוא אלם ויהי אחרי צאת השד וידבר האלם ויתמהו העם׃

성 경: [눅11:1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한 벙어리 귀신 –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는 귀신 축출에 관한 기사가 없고(막 3:22), 마태복음(마 12:22)에 의하면 이 귀신은 그 사람을 벙어리가 되게 했을 뿐 아니라 눈까지 멀게 했다. 귀신을 좇아내는 과정은 일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 내고 그 사람이 온전해졌다는 기사(奇事)만 간략하게 서술함으로써 이어지는 바알세불 논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고 묻는 모습이 나온다(마 12:23).

티네스 데 엨스 아우톤 에이폰 엔 베엘제불 토 아르콘티 톤 다이모니온 에크발레이 타 다이모니아

개역개정,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새번역,15 그들 가운데서 더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가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

우리말성경,15 그러나 그중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예수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15 But some of them said, “By Beelzebub, the prince of demons, he is driving out demons.”

영어NASB,15 But some of them said, “He casts out demons by Beelzebul, the ruler of the demons.”

영어MSG,15 But some from the crowd were cynical. “Black magic,” they said. “Some devil trick he’s pulled from his sleeve.”

영어NRSV,15 But some of them said, “He casts out demons by Beelzebul, the ruler of the demons.”

헬라어신약Stephanos,15 τινες δε εξ αυτων ειπον εν βεελζεβουλ αρχοντι των δαιμονιων εκβαλλει τα δαιμονια

라틴어Vulgate,15 quidam autem ex eis dixerunt in Beelzebub principe daemoniorum eicit daemonia

히브리어Modern,15 ויש אשר אמרו בבעל זבוב שר השדים הוא מגרש את השדים׃

성 경: [눅11:1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그 중에 더러는 –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일단의 무리들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되어 있고(마 12:24), 마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다(막 3:22). 서기관의 대다수는 바리새인이었으므로 사실상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일치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 귀신의 왕 바알세불 – 바알세불이 귀신의 왕이라고 불리어지게 된 기원과 ‘바알세불’이라는 이름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이 다만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왕하 1:2에 근거하여 ‘바알’이 에그론(Ekron)에서 숭배되던 우상인 ‘바알세붑'(Baal-Zebub)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한편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공동 번역의 ‘베엘제불'(Beelzebull)에서 ‘Beel’은 ‘Baal’ 즉 ‘주’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뒷 부분인 ‘Zebull’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1)’집’, ‘높은 곳’을 뜻한다고 보면(왕상 8:13;사 63:15) ‘거주의 주’ 또는 ‘높은 곳의 주’가 된다(Foerster). (2)발음이 유사한 ‘똥’이라는 의미의 Zebel로 보면 ‘똥의 왕’의 된다(Hendriksen). (3)이를 ‘파리’로 해석하여 ‘파리의 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Bengel, Tyndale). 이 가운데 비교적 많이 인용되는 것은 (1)의 설명이다. 아무튼 본문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유대인들(좁게는 교권자들)이, 예수가 귀신을 좇아낸 사건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정당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무능력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진리를 매도하려 했던 것이다.

헤테로이 데 페이라존테스 세메이온 엨스 우라누 에제툰 파르 아우투

개역개정,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새번역,16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그에게 요구하였다.

우리말성경,16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시험할 속셈으로 하늘의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영어NIV,16 Others tested him by asking for a sign from heaven.

영어NASB,16 Others, to test Him, were demanding of Him a sign from heaven.

영어MSG,16 Others were skeptical, waiting around for him to prove himself with a spectacular miracle.

영어NRSV,16 Others, to test him, kept demanding from him a sign from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τεροι δε πειραζοντες σημειον παρ αυτου εζητουν εξ ουρανου

라틴어Vulgate,16 et alii temptantes signum de caelo quaerebant ab eo

히브리어Modern,16 ויש אשר נסוהו וישאלו ממנו אות מן השמים׃

성 경: [눅11:1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시험하여…표적을 구하니 – 마가는 여기서도 적대자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12:38). 이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마 12:23), 즉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담당할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귀신 축출 사건을 신적 권위의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 신적 권위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을 만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예수에게 더 무리한 요구를 하여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의도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들이 말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a sign from heaven, NIV)에 대해서는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류의 이적을 요구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왕상 18:1).

아우토스 데 에이도스 아우톤 타 디아노마타 에이펜 아우토이스 파사 바실레이아 엪 헤아우텐 디아메리스데이사 에레무타이 카이 오이코스 에피 오이콘 핖테이

개역개정,17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새번역,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

우리말성경,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나라든지 서로 갈라져 싸우면 망하게 되고 가정도 서로 갈라져 싸우면 무너진다.

가톨릭성경,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영어NIV,17 Jesus knew their thoughts and said to them: “Any kingdom divided against itself will be ruined, and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will fall.

영어NASB,17 But He knew their thoughts and said to them, “Any kingdom divided against itself is laid waste; and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falls.

영어MSG,17 Jesus knew what they were thinking and said, “Any country in civil war for very long is wasted. A constantly squabbling family falls to pieces.

영어NRSV,17 But he knew what they were thinking and said to them, “Every kingdom divided against itself becomes a desert, and house falls on house.

헬라어신약Stephanos,17 αυτος δε ειδως αυτων τα διανοηματα ειπεν αυτοις πασα βασιλεια εφ εαυτην διαμερισθεισα ερημουται και οικος επι οικον πιπτει

라틴어Vulgate,17 ipse autem ut vidit cogitationes eorum dixit eis omne regnum in se ipsum divisum desolatur et domus supra domum cadet

히브리어Modern,17 והוא ידע את מחשבותם ויאמר אליהם כל ממלכה הנחלקה על עצמה תחרב ובית יפל על בית׃

성 경: [눅11:1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아시고(*, 디아노에마타) – 이는 ‘깊이 생각하다’, ‘구분하다’의 의미를 갖는 ‘디아노에오'(*)에서 나온 말로 의도나 목적을 간파하였다는 의미이다.

󰃨 스스로 분쟁하는…무너지느니라 –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나라나 집은 없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비유 앞에 적대자들의 논리는 산산이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에이 데 카이 호 사타나스 엪 헤아우톤 디에메리스데 포스 스타데세타이 헤 바실레이아 아우투 호티 레게테 엔 베엘제불 에크발레인 메 타 다이모니아

개역개정,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새번역,18 그러니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는데,

우리말성경,18 사탄도 역시 서로 갈라져 싸우면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설 수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니

가톨릭성경,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영어NIV,18 If Satan is divided against himself, how can his kingdom stand? I say this because you claim that I drive out demons by Beelzebub.

영어NASB,18 “If Satan also is divided against himself, how will his kingdom stand? For you say that I cast out demons by Beelzebul.

영어MSG,18 If Satan cancels Satan, is there any Satan left? You accuse me of ganging up with the Devil, the prince of demons, to cast out demons,

영어NRSV,18 If Satan also is divided against himself, how will his kingdom stand? –for you say that I cast out the demons by Beelzebul.

헬라어신약Stephanos,18 ει δε και ο σατανας εφ εαυτον διεμερισθη πως σταθησεται η βασιλεια αυτου οτι λεγετε εν βεελζεβουλ εκβαλλειν με τα δαιμονια

라틴어Vulgate,18 si autem et Satanas in se ipsum divisus est quomodo stabit regnum ipsius quia dicitis in Beelzebub eicere me daemonia

히브리어Modern,18 וגם השטן אם נחלק על עצמו איככה תכון ממלכתו כי אמרתם שבבעל זבוב מגרש אני את השדים׃

성 경: [눅11:1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 앞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일반 논리로 이끌어 내었는데 여기서는 그 일반 논리를 특수한 문제에 적용시키고 있다. 나라와 집이 그러하듯이 사단도 자기들 끼리 싸우면 그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입은 것이며, 싸움은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만 있을 뿐이다(고후 10:4).

에이 데 에고 엔 베엘제불 에크발로 타 다이모니아 호이 휘오이 휘몬 엔 티니 에크발루신 디아 투토 아우토이 휘몬 크리타이 에손타이

개역개정,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새번역,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의 ㉧추종자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는 말이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 ㉧그, ‘아들들’. 귀신축출자들을 가리킴

우리말성경,19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내쫓는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영어NIV,19 Now if I drive out demons by Beelzebub, by whom do your followers drive them out? So then, they will be your judges.

영어NASB,19 “And if I by Beelzebul cast out demons, by whom do your sons cast them out? So they will be your judges.

영어MSG,19 but if you’re slinging devil mud at me, calling me a devil who kicks out devils, doesn’t the same mud stick to your own exorcists?

영어NRSV,19 Now if I cast out the demons by Beelzebul, by whom do your exorcists cast them out? Therefore they will be your judges.

헬라어신약Stephanos,19 ει δε εγω εν βεελζεβουλ εκβαλλω τα δαιμονια οι υιοι υμων εν τινι εκβαλλουσιν δια τουτο κριται υμων αυτοι εσονται

라틴어Vulgate,19 si autem ego in Beelzebub eicio daemonia filii vestri in quo eiciunt ideo ipsi iudices vestri erunt

히브리어Modern,19 ואם אני מגרש את השדים בבעל זבוב בניכם במי הם מגרשים אתם על כן המה יהיו שפטיכם׃

성 경: [눅11:1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너희 아들들은…재판관이 되리라 – 적대자들의 비방에 대한 예수의 반대 논리는 매우 철저하며 집요하다. 이제는 적대자들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귀신 축출 행위(逐出行爲)를 사단의 힘입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일하게 그들의 추종자들의 귀신 축출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자기들 스스로를 부정하고 악마화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의 재판관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들'(followers, NIV)로 번역된 ‘휘오스'(*)는 ‘추종자’, ‘제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며(히 12:5;벧전 5:13), 예수 당시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행 19:13).

에이 데 엔 닼튈로 데우 에고 에크발로 타 다이모니아 아라 에프다센 엪 휘마스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개역개정,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새번역,20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 / ㉨그,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우리말성경,20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는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온 것이다.

가톨릭성경,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영어NIV,20 But if I drive out demons by the finger of God,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to you.

영어NASB,20 “But if I cast out demons by the finger of God,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영어MSG,20 But if it’s God’s finger I’m pointing that sends the demons on their way, then God’s kingdom is here for sure.

영어NRSV,20 But if it is by the finger of God that I cast out the demons,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0 ει δε εν δακτυλω θεου εκβαλλω τα δαιμονια αρα εφθασεν εφ υμας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20 porro si in digito Dei eicio daemonia profecto praevenit in vos regnum Dei

히브리어Modern,20 ואם באצבע אלהים מגרש אני את השדים הנה הגיעה אליכם מלכות האלהים׃

성 경: [눅11:2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 여기서 ‘손’으로 번역된 ‘다크튈로스'(*)는 ‘손가락’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며(46절) 이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출 8:19;31:18;신 9:10). 그러나 더 흔하게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출 7:4,5;9:3,15). 한편 마 12:28에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삶의 초기부터 성령께서 함께하셨다는 의미에서(3:22;4:1,18) 마태의 서술도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영’이 의미상 거의 동일하였다고 할 때(대상 28:12,19) 누가와 마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적대자들의 비방은 완전하게 부정되며 예수는 오로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었다는 사실이 선언되었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임하였느니라 – 예수의 말씀은 단지 적대자들의 비방을 반박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임재함을 말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임하였느니라”로 번역된 ‘에프다센'(*)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동사의 의미는 ‘앞서 오다’의 뜻도 있고(살전 4:15), ‘방금 도착했다’, ‘도달한다’는 뜻도 있다(Lenski). 이 동사의 의미를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곧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 되고 현재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이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라면 적어도 그 순간 하나님의 권세가 사단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취(先取)를 보게 된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이 견해를 지지해주는 더 결정적인 단서는 ‘너희에게’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분명히 지금 예수 앞에 있는 청중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미래의 청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호탄 호 이스퀴로스 카도플리스메노스 퓔라쎄 텐 헤아우투 아울렌 엔 에이레네 에스틴 타 휘파르콘타 아우투

개역개정,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새번역,21 힘센 사람이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소유는 안전하다.

우리말성경,21 힘센 사람이 완전 무장을 하고 집을 지키고 있다면 그 재산은 안전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영어NIV,21 “When a strong man, fully armed, guards his own house, his possessions are safe.

영어NASB,21 “When a strong man, fully armed, guards his own house, his possessions are undisturbed.

영어MSG,21 “When a strong man, armed to the teeth, stands guard in his front yard, his property is safe and sound.

영어NRSV,21 When a strong man, fully armed, guards his castle, his property is safe.

헬라어신약Stephanos,21 οταν ο ισχυρος καθωπλισμενος φυλασση την εαυτου αυλην εν ειρηνη εστιν τα υπαρχοντ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21 cum fortis armatus custodit atrium suum in pace sunt ea quae possidet

히브리어Modern,21 בהיות הגבור שמר את חצרו והוא מזין והיה רכושו שלום׃

성 경: [눅11:2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강한 자가…안전하되 – 전통적으로 본문의 ‘강한 자'(a strong man, NIV)는 사단으로 설명되어져 왔다. 그리고 ‘집’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세상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Lenski). 한편 사단이 지키고 있는 ‘소유’에 대해서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여 갖추어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빼앗은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단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더 강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소유는 안전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의 안전을 파괴할 것이다.

에판 데 호 이스퀴로테로스 아우투 에펠돈 니케세 아우톤 텐 파노플리안 아우투 아이레이 엪 헤 에페포이데이 카이 타 스퀼라 아우투 디아디도신

개역개정,22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새번역,22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서 그를 이기면, 그가 의지하는 무장을 모두 해제시키고, 자기가 노략한 것을 나누어 준다.

우리말성경,22 그러나 힘이 더 센 사람이 공격해 그를 이기면 그가 의지하는 무장을 모두 해제시키고 자기가 노략한 것을 나눠 줄 것이다.

가톨릭성경,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영어NIV,22 But when someone stronger attacks and overpowers him, he takes away the armor in which the man trusted and divides up the spoils.

영어NASB,22 “But when someone stronger than he attacks him and overpowers him, he takes away from him all his armor on which he had relied and distributes his plunder.

영어MSG,22 But what if a stronger man comes along with superior weapons? Then he’s beaten at his own game, the arsenal that gave him such confidence hauled off, and his precious possessions plundered.

영어NRSV,22 But when one stronger than he attacks him and overpowers him, he takes away his armor in which he trusted and divides his plunder.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παν δε ο ισχυροτερος αυτου επελθων νικηση αυτον την πανοπλιαν αυτου αιρει εφ η επεποιθει και τα σκυλα αυτου διαδιδωσιν

라틴어Vulgate,22 si autem fortior illo superveniens vicerit eum universa arma eius aufert in quibus confidebat et spolia eius distribuit

히브리어Modern,22 ואם יבוא עליו חזק ממנו ותקפו ישא ממנו את נשקו אשר בטח בו ואת מלקחו יחלק׃

성 경: [눅11:2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더 강한 자가…이길 때 – 일반적으로 ‘더 강한 자’는 예수를 지시한다. 여기서 ‘이길 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긴 것을 뜻한다. (2)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켰던 귀신 축출 사건들을 가리킨다(14절;4:1-13;8:26-39;9:37-45). (3)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승리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옳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총체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 믿던 무장을 빼앗고…재물을 나누느니라 – ‘믿던'(*, 에페포이데이)은 ‘설득시키다’, ‘믿게하다’는 의미의 ‘페이도'(*) 제2과거완료 능동태로 ‘매우 유용하다고 신뢰하던’의 뜻이다. 무장(*, 파노플리안)은 방패, 검, 창, 투구, 무릅받이, 흉배 등으로 완전 무장한 상태를 나타낸다. 사단이 아무리 강하고 완전한 무장을 하고 있더라도 예수는 사단을 궤멸시켜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이는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와 새생명을 누리게 됨을 뜻한다(요 5:24). 바야흐로 인간을 약탈하던(9:39) 사단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의해 도리어 약탈을 당하고 파멸의 종국을 맞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호 메 온 멭 에무 캍 에무 에스틴 카이 호 메 쉬나곤 멭 에무 스코르피제이

개역개정,23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새번역,23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우리말성경,23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고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흩어 버리는 사람이다.

가톨릭성경,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영어NIV,23 “He who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and he who does not gather with me, scatters.

영어NASB,23 “He who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and he who does not gather with Me, scatters.

영어MSG,23 “This is war, and there is no neutral ground. If you’re not on my side, you’re the enemy; if you’re not helping, you’re making things worse.

영어NRSV,23 Whoever is not with me is against me, and whoever does not gather with me scatters.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 μη ων μετ εμου κατ εμου εστιν και ο μη συναγων μετ εμου σκορπιζει

라틴어Vulgate,23 qui non est mecum adversum me est et qui non colligit mecum dispergit

히브리어Modern,23 כל אשר איננו אתי הוא לנגדי ואשר איננו מאסף אתי הוא מפזר׃

성 경: [눅11:2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함께 아니하는…모으지 아니하는 – 이 말씀은 매우 급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즉 예수와 사단과의 전쟁은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에서 중립적인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의 편에 서든지 사단의 편에 서든지 결단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를 시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15,16절) 반대하는 자요 사단의 편이요 성령의 훼방하는 자들인 것이다(마 12:31). 마찬가지로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흩어놓는 자이다. 이것은 양떼를 모으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요 10:12), 위급한 상황에서 양떼를 모으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 자는 양떼를 죽이는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 말씀이 9:50의 말씀과 모순이 된다고 하나 그것은 문맥, 또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인 이해에 얽매이는 데서 오는 오류이다(마 12:30 주석 참조). 9:50의 상황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대해 중립적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셨고 또 하려고 하는 일을 그가 행했던 것이고, 여기서는 선과 악, 진리와 반(反)진리가 싸우는 상황에서 중립지대는 없으며 분명히 어느 한편에 서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호탄 토 아카다르톤 프뉴마 엨셀데 아포 투 안드로푸 디에르케타이 디 아뉘드론 토폰 제툰 아나파우신 카이 메 휴리스콘 토테 레게이 휘포스트렢소 에이스 톤 오이콘 무 호덴 엨셀돈

개역개정,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새번역,24 “㉩악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면, 그 귀신은 쉴 곳을 찾느라고 물 없는 곳을 헤맨다. 그러나 그 귀신은 찾지 못하고 말하기를 ‘내가 나온 집으로 되돌아가겠다’ 한다. / ㉩그, ‘더러운’

우리말성경,24 한 더러운 영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쉴 곳을 찾으려고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내가 전에 나왔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가톨릭성경,24 “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영어NIV,24 “When an evil spirit comes out of a man, it goes through arid places seeking rest and does not find it. Then it says, ‘I will return to the house I left.’

영어NASB,24 “When the unclean spirit goes out of a man, it passes through waterless places seeking rest, and not finding any, it says, ‘I will return to my house from which I came.’

영어MSG,24 “When a corrupting spirit is expelled from someone, it drifts along through the desert looking for an oasis, some unsuspecting soul it can bedevil. When it doesn’t find anyone, it says, ‘I’ll go back to my old haunt.’

영어NRSV,24 “When the unclean spirit has gone out of a person, it wanders through waterless regions looking for a resting place, but not finding any, it says, ‘I will return to my house from which I came.’

헬라어신약Stephanos,24 οταν το ακαθαρτον πνευμα εξελθη απο του ανθρωπου διερχεται δι ανυδρων τοπων ζητουν αναπαυσιν και μη ευρισκον λεγει υποστρεψω εις τον οικον μου οθεν εξηλθον

라틴어Vulgate,24 cum inmundus spiritus exierit de homine perambulat per loca inaquosa quaerens requiem et non inveniens dicit revertar in domum meam unde exivi

히브리어Modern,24 הרוח הטמאה אחרי צאתה מן האדם תשוטט במקמות ציה לבקש לה מנוחה ולא תמצא אז תאמר אשובה נא אל ביתי אשר יצאתי משם׃

성 경: [눅11:2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더러운 귀신이…돌아가리라 –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체험하긴 했지만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지는 않는 경우이다. 다시말해서 귀신이 나간 이후 한동안 공백 상태가 지속될 뿐 성령을 영접해 들이지 않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탄에 빠지게 된 경우인 것이다. 도덕적 파국의 심각성은 26절의 ‘거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고’가 ‘정착하다’, ‘영구히 거주하다’란 의미를 지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카이 엘돈 휴리스케이 세사로메논 카이 케코스메메논

개역개정,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새번역,25 그런데 와서 보니, 집은 말끔히 치워져 있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말성경,25 그런데 그곳에 이르러 보니 집이 깨끗하게 청소돼 있고 말끔히 정돈돼 있었다.

가톨릭성경,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영어NIV,25 When it arrives, it finds the house swept clean and put in order.

영어NASB,25 “And when it comes, it finds it swept and put in order.

영어MSG,25 On return, it finds the person swept and dusted, but vacant.

영어NRSV,25 When it comes, it finds it swept and put in order.

헬라어신약Stephanos,25 και ελθον ευρισκει σεσαρωμενον και κεκοσμημενον

라틴어Vulgate,25 et cum venerit invenit scopis mundatam

히브리어Modern,25 ובבואה תמצא אתו מטאטא ומהדר׃

성 경: [눅11:2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소제(掃除)되고 수리되었거늘 – 본문의 평행 구절(마 12:44)에는 그 집이 ‘비고’라는 표현이 더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으로 채워져 있지 않음으로 결국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적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사단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틴데일(Tyndale)은 본문의 의미를 도덕적인 청소가 되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헝클어졌던 마음이 정리되고 그런 결과로 생활이 좋아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토테 포류에타이 카이 파랄람바네이 헤테라 프뉴마타 포네로테라 헤아우투 헾타 카이 에이셀돈타 카토이케이 에케이 카이 기네타이 타 에스카타 투 안드로푸 에케이누 케이로나 톤 프로톤

개역개정,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새번역,26 그래서 그 귀신은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딴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우리말성경,26 그래서 더러운 영은 나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영들을 일곱이나 데리고 와 그 곳에 들어가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지막 상황은 처음보다 훨씬 더 나빠진다.”

가톨릭성경,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영어NIV,26 Then it goes and takes seven other spirits more wicked than itself, and they go in and live there. And the final condition of that man is worse than the first.”

영어NASB,26 “Then it goes and takes along seven other spirits more evil than itself, and they go in and live there; and the last state of that man becomes worse than the first.”

영어MSG,26 It then runs out and rounds up seven other spirits dirtier than itself and they all move in, whooping it up. That person ends up far worse than if he’d never gotten cleaned up in the first place.”

영어NRSV,26 Then it goes and brings seven other spirits more evil than itself, and they enter and live there; and the last state of that person is worse than the first.”

헬라어신약Stephanos,26 τοτε πορευεται και παραλαμβανει επτα ετερα πνευματα πονηροτερα εαυτου και εισελθοντα κατοικει εκει και γινεται τα εσχατα του ανθρωπου εκεινου χειρονα των πρωτων

라틴어Vulgate,26 et tunc vadit et adsumit septem alios spiritus nequiores se et ingressi habitant ibi et sunt novissima hominis illius peiora prioribus

히브리어Modern,26 ואחר תלך ולקחה שבע רוחות אחרות רעות ממנה ובאו ושכנו שם והיתה אחרית האדם ההוא רעה מראשיתו׃

성 경: [눅11:2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더 악한 귀신 일곱을…거하니 – 집이 소제되고 수리됨으로 말미암아 예전에 거했던 한 악령이 들어가기에는 저항력(抵沆力)이 강했다고 본다면 이 악령이 다른 일곱 귀신을 데려온 것이 이해가 된다. 여기 일곱 귀신은 막달라 마리아를 괴롭힌 일곱 귀신을 연상 시키는데(8:2), 그 숫자도 엄청나게 불었거니와 그 악함이 전에 있던 한 귀신보다 더 심하다는 묘사는 이 사람이 일곱 귀신이 들었을 때의 상태가 얼마나 극심하였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는 악령이 나간 자리를 하나님의 선한 영으로 채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악령이 축출된 자리는 빈 공간으로 두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마샬(Marshall)은 이 이야기가 귀신만을 축출해 놓고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워주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킨 유대인 귀신 축출자들에(19절)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이야기가 적대자들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태는 평행 구절에서 이 귀신들린 자가 바로 ‘이 악한 세대’ 즉 ‘유대인’ 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던 유대 백성들이(마 3:1-6)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완악해져 예수를 거역(마 12:24)했던 상황과 연관될 것이다(Hendriksen, Lenski).

에게네토 데 엔 토 레게인 아우톤 타우타 에파라사 티스 포넨 귀네 에크 투 오클루 에이펜 아우토 마카리아 헤 코일리아 헤 바스타사사 세 카이 마스토이 후스 에델라사스

개역개정,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새번역,2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무리 가운데서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우리말성경,27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사람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을 낳아 젖 먹이며 기르신 어머니는 정말 복 있는 분입니다!”

가톨릭성경,27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영어NIV,27 As Jesus was saying these things, a woman in the crowd called out, “Blessed is the mother who gave you birth and nursed you.”

영어NASB,27 While Jesus was saying these things, one of the women in the crowd raised her voice and said to Him, “Blessed is the womb that bore You and the breasts at which You nursed.”

영어MSG,27 While he was saying these things, some woman lifted her voice above the murmur of the crowd: “Blessed the womb that carried you, and the breasts at which you nursed!”

영어NRSV,27 While he was saying this, a woman in the crowd raised her voice and said to him, “Blessed is the womb that bore you and the breasts that nursed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7 εγενετο δε εν τω λεγειν αυτον ταυτα επαρασα τις γυνη φωνην εκ του οχλου ειπεν αυτω μακαρια η κοιλια η βαστασασα σε και μαστοι ους εθηλασας

라틴어Vulgate,27 factum est autem cum haec diceret extollens vocem quaedam mulier de turba dixit illi beatus venter qui te portavit et ubera quae suxisti

히브리어Modern,27 ויהי כדברו את הדברים האלה ואשה אחת מן העם נשאה את קולה ותאמר אליו אשרי הבטן אשר נשאתך והשדים אשר ינקת׃

성 경: [눅11:2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복있는 자]

󰃨 당신을 밴 태와…복이 있도소이다 – 엘리사벳이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를 보고서 찬양한 내용과(1:42) 유사하며, 렌스키는 여기서 1:48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의 여인은 단순히 한 선생의 달변(達辯)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배후에 있는 신적인 권위를 발견한 듯하다. 본절의 의미는 “당신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bless, NIV)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로 보면 될 것이다(Marshall).

아우토스 데 에이펜 메눈 마카리오이 호이 아쿠온테스 톤 로곤 투 데우 카이 퓔라쏜테스

개역개정,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새번역,28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

우리말성경,28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정말 복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다.”

가톨릭성경,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영어NIV,28 He replied, “Blessed rather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ey it.”

영어NASB,28 But He said, “On the contrary, blessed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serve it.”

영어MSG,28 Jesus commented, “Even more blessed are those who hear God’s Word and guard it with their lives!”

영어NRSV,28 But he said, “Blessed rather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obey it!”

헬라어신약Stephanos,28 αυτος δε ειπεν μενουνγε μακαριοι οι ακουοντες τον λογον του θεου και φυλασσοντε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28 at ille dixit quippini beati qui audiunt verbum Dei et custodiunt

히브리어Modern,28 והוא אמר ואף כי אשרי השמעים והשמרים את דבר האלהים׃

성 경: [눅11:2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복있는 자]

󰃨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 예수는 여인의 찬사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곧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복되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데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Lenski, Tyndale). 그러니까 ‘오히려'(*, 메눈)는 여인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모친과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말씀과(8:21) 동일 선상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신실성의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헌신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는'(*, 퓔라쏜테스)은 ‘파수하다’, ‘준수하다’는 의미의 ‘퓔라쏘'(*)의 현재 분사형으로 복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임무로 아는 사람임을 뜻한다.

톤 데 오클론 에파드로이조메논 에릌사토 레게인 헤 게네아 하우테 게네아 포네라 에스틴 세메이온 제테이 카이 세메이온 우 도데세타이 아우테 에이 메 토 세메이온 요나

개역개정,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새번역,29 무리가 모여들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말성경,29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자 예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그들은 표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표적 외에는 어떤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영어NIV,29 As the crowds increased, Jesus said, “This is a wicked generation. It asks for a miraculous sign, but none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영어NASB,29 As the crowds were increasing, He began to say, “This generation is a wicked generation; it seeks for a sign, and yet no sign will be given to it but the sign of Jonah.

영어MSG,29 As the crowd swelled, he took a fresh tack: “The mood of this age is all wrong. Everybody’s looking for proof, but you’re looking for the wrong kind. All you’re looking for is something to titillate your curiosity, satisfy your lust for miracles. But the only proof you’re going to get is the Jonah-proof given to the Ninevites, which looks like no proof at all.

영어NRSV,29 When the crowds were increasing, he began to say, “This generation is an evil generation; it asks for a sign, but no sign will be given to it except the sign of Jonah.

헬라어신약Stephanos,29 των δε οχλων επαθροιζομενων ηρξατο λεγειν η γενεα αυτη πονηρα εστιν σημειον επιζητει και σημειον ου δοθησεται αυτη ει μη το σημειον ιωνα του προφητου

라틴어Vulgate,29 turbis autem concurrentibus coepit dicere generatio haec generatio nequam est signum quaerit et signum non dabitur illi nisi signum Ionae

히브리어Modern,29 ויקבצו עם רב ויחל לדבר הדור הזה דור רע הוא אות הוא מבקש ואות לא ינתן לו בלתי אם אות יונה הנביא׃

성 경: [눅11:2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요나의 표적]

󰃨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 마태는 ‘음란한’을 첨가하고 있는데(마 12:39),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비유할 때(호 1:2)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우상 숭배는 곧 음란으로 표현되었다. 유대인들의 표적(sign, NIV) 요구가 악한 것으로 규정되는 까닭은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며(Marshall), 또한 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키신 여러 가지 이적적인 사건들(14,20절;4:38-44;8:22-25;40-56)이 하나님의 권능을 밝히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아예 인정치 않으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도스 가르 에게네토 요나스 토이스 니뉴이타이스 세메이온 후토스 에스타이 카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테 게네아 타우테

개역개정,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새번역,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과 같이, 인자 곧 나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우리말성경,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 것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게 표적이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영어NIV,30 For as Jonah was a sign to the Ninevites, so al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영어NASB,30 “For just as Jonah became a sign to the Ninevites, 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영어MSG,30 What Jonah was to Nineveh, the Son of Man is to this age.

영어NRSV,30 For just as Jonah became a sign to the people of Nineveh, so the Son of Man will be to this gener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θως γαρ εγενετο ιωνας σημειον τοις νινευιταις ουτως εσται και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τη γενεα ταυτη

라틴어Vulgate,30 nam sicut Ionas fuit signum Ninevitis ita erit et Filius hominis generationi isti

히브리어Modern,30 כי כאשר היה יונה לאנשי נינוה לאות כן יהיה גם בן האדם לדור הזה׃

성 경: [눅11:3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요나의 표적]

󰃨 요나가…인자도…그러하리라 – 요나가 바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구원받은 것이 곧 예수의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을 예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평행 본문인 12:40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9:22에 이은 또 하나의 수난 예고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말씀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을 때 회개 운동이 일어났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해야함을 촉구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알리신 것이기도 하다.

바실리싸 노투 에게르데세타이 엔 테 크리세이 메타 톤 안드론 테스 게네아스 타우테스 카이 카타크리네이 아우투스 호티 엘덴 에크 톤 페라톤 테스 게스 아쿠사이 텐 소피안 솔로모노스 카이 이두 플레이온 솔로모노스 호데

개역개정,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새번역,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우리말성경,31 심판 때에 남쪽 나라의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가톨릭성경,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영어NIV,31 The Queen of the South will rise at the judgment with the men of this generation and condemn them; for she came from the ends of the earth to listen to Solomon’s wisdom, and now one greater than Solomon is here.

영어NASB,31 “The men of Nineveh will stand up with this generation at the judgment and condemn it, because they repented at the preaching of Jonah; and behold, something greater than Jonah is here.

영어MSG,31 “On Judgment Day the Ninevites will stand up and give evidence that will condemn this generation, because when Jonah preached to them they changed their lives. A far greater preacher than Jonah is here, and you squabble about ‘proofs.’

영어NRSV,31 The queen of the South will rise at the judgment with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and condemn them, because she came from the ends of the earth to listen to the wisdom of Solomon, and see, something greater than Solomon is here!

헬라어신약Stephanos,31 βασιλισσα νοτου εγερθησεται εν τη κρισει μετα των ανδρων της γενεας ταυτης και κατακρινει αυτους οτι ηλθεν εκ των περατων της γης ακουσαι την σοφιαν σολομωντος και ιδου πλειον σολομωντος ωδε

라틴어Vulgate,31 regina austri surget in iudicio cum viris generationis huius et condemnabit illos quia venit a finibus terrae audire sapientiam Salomonis et ecce plus Salomone hic

히브리어Modern,31 מלכת תימן תקום במשפט עם אנשי הדור הזה והרשיעה אותם כי באה מקצות הארץ לשמע את חכמת שלמה והנה יש פה גדול משלמה׃

성 경: [눅11:3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요나의 표적]

󰃨 남방 여왕이…정죄하리니 – 여기에 언급된 ‘남방 여왕’은 왕상 10:1-13에 나오는 스바의 여왕(queen of Sheba, NIV)을 말하는데 스바는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오늘날의 예멘(Yemen)을 가리킨다. 이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무려 2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찾아왔다. 이는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땅 끝에서 온 것이다(마 12:42). 이 여왕의 열정에 비하면 유대인들의 태도는 너무도 완악한 것이었다. 그들은 솔로몬 보다 더 위대한 사람과 함께 살면서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을 솔로몬 보다 ‘더 큰 이’라고 한다. 결국 유대인들은 거리상 비교도 안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 인격의 위대함에 있어서도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와 접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모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던 셈이다.

안드레스 니뉴이타이 아나스테손타이 엔 테 크리세이 메타 테스 게네아스 타우테스 카이 카타크리누신 아우텐 호티 메테노에산 에이스 토 케뤼그마 요나 카이 이두 플레이온 요나 호데

개역개정,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새번역,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우리말성경,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은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이 세대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가톨릭성경,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영어NIV,32 The men of Nineveh will stand up at the judgment with this generation and condemn it; for they repented at the preaching of Jonah, and now one greater than Jonah is here.

영어NASB,32 “The men of Nineveh will stand up with this generation at the judgment and condemn it, because they repented at the preaching of Jonah; and behold, something greater than Jonah is here.

영어MSG,32 On Judgment Day the Queen of Sheba will come forward and bring evidence that condemns this generation, because she traveled from a far corner of the earth to listen to wise Solomon. Wisdom far greater than Solomon’s is right in front of you, and you quibble over ‘evidence.’

영어NRSV,32 The people of Nineveh will rise up at the judgment with this generation and condemn it, because they repented at the proclamation of Jonah, and see, something greater than Jonah is here!

헬라어신약Stephanos,32 ανδρες νινευι αναστησονται εν τη κρισει μετα της γενεας ταυτης και κατακρινουσιν αυτην οτι μετενοησαν εις το κηρυγμα ιωνα και ιδου πλειον ιωνα ωδε

라틴어Vulgate,32 viri ninevitae surgent in iudicio cum generatione hac et condemnabunt illam quia paenitentiam egerunt ad praedicationem Ionae et ecce plus Iona hic

히브리어Modern,32 אנשי נינוה יקומו במשפט עם הדור הזה והרשיעהו כי הם שבו בקריאת יונה והנה יש פה גדול מיונה׃

성 경: [눅11:3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요나의 표적]

󰃨 니느웨 사람들이…정죄하리니 – 같은 논리가 이번에는 니느웨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대조에 적용되고 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창 10:11)로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극심한 죄악을 범하였다(욘 1: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다(욘 3:5-10). 니느웨 사람들은 일개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요나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 위대하신 예수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31-32에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의 구원 받음’과 ‘유대인의 구원 받지 못함’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 관계에 관해서는 마 8:1-17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우데이스 뤼크논 앞사스 에이스 크륖텐 티데신 우데 휘포 톤 모디온 알 에피 텐 뤼크니안 히나 호이 에이스포류오메노이 토 포스 블레포신

개역개정,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33 “아무도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두어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

우리말성경,33 등불을 켜서 은밀한 장소에 두거나 그릇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오직 등불은 들어오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등잔대 위에 얹어 두는 법이다.

가톨릭성경,33 “ 아무도 등불을 켜서 숨겨 두거나 함지 속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영어NIV,33 “No one lights a lamp and puts it in a place where it will be hidden, or under a bowl. Instead he puts it on its stand, so that those who come in may see the light.

영어NASB,33 “No one, after lighting a lamp, puts it away in a cellar nor under a basket, but on the lampstand, so that those who enter may see the light.

영어MSG,33 “No one lights a lamp, then hides it in a drawer. It’s put on a lamp stand so those entering the room have light to see where they’re going.

영어NRSV,33 “No one after lighting a lamp puts it in a cellar, but on the lampstand so that those who enter may see the light.

헬라어신약Stephanos,33 ουδεις δε λυχνον αψας εις κρυπτον τιθησιν ουδε υπο τον μοδιον αλλ επι την λυχνιαν ινα οι εισπορευομενοι το φεγγος βλεπωσιν

라틴어Vulgate,33 nemo lucernam accendit et in abscondito ponit neque sub modio sed supra candelabrum ut qui ingrediuntur lumen videant

히브리어Modern,33 אין מדליק נר אשר ישימהו בסתר או תחת האיפה כי אם על המנורה למען יראו באי הבית את אורו׃

성 경: [눅11:3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몸의 등불]

󰃨 누구든지…보게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의 의미는 두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등불이 예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등불이 등경 위에 위치하여 주위를 밝게 비추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듯이, 예수께서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항시 생명의 빛을 비추었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2)등불을 복음의 메시지로 간주하는 견해. 예수의 말씀을 들은 자는 말씀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도 비춰주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호 뤼크노스 투 소마토스 에스틴 호 옾달모스 수 호탄 호 옾달모스 수 하플루스 에 카이 홀론 토 소마 수 포테이논 에스틴 에판 데 포네로스 에 카이 토 소마 수 스코테이논

개역개정,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새번역,34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도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다.

우리말성경,34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눈이 좋으면 너희 온몸도 밝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나쁘면 몸도 어두울 것이다.

가톨릭성경,34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영어NIV,34 Your eye is the lamp of your body. When your eyes are good, your whole body also is full of light. But when they are bad, your body also is full of darkness.

영어NASB,34 “The eye is the lamp of your body; when your eye is clear, your whole body also is full of light; but when it is bad, your body also is full of darkness.

영어MSG,34 Your eye is a lamp, lighting up your whole body. If you live wide-eyed in wonder and belief, your body fills up with light. If you live squinty-eyed in greed and distrust, your body is a dank cellar.

영어NRSV,34 Your eye is the lamp of your body. If your eye is healthy, your whole body is full of light; but if it is not healthy, your body is full of darkness.

헬라어신약Stephanos,34 ο λυχνος του σωματος εστιν ο οφθαλμος οταν ουν ο οφθαλμος σου απλους η και ολον το σωμα σου φωτεινον εστιν επαν δε πονηρος η και το σωμα σου σκοτεινον

라틴어Vulgate,34 lucerna corporis tui est oculus tuus si oculus tuus fuerit simplex totum corpus tuum lucidum erit si autem nequam fuerit etiam corpus tuum tenebrosum erit

히브리어Modern,34 נר הגוף הוא העין לכן בהיות עינך תמימה גם כל גופך יאור ובהיותה רעה וחשך גם גופך׃

성 경: [눅11:3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몸의 등불]

󰃨 몸의 등불은 눈 – 여기서 몸은 전체적인 인격을 뜻하나 등불에 비유된 눈은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통로에 해당한다.

󰃨 눈이 성하면…나쁘면 – ‘성하면'(*, 하플루스)의 본래적 의미는 ‘주름이 없는’, ‘단순한’, ‘진실한’으로 영적 안목이 단순하고도 진실되게 진리에만 고정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 단어에 ‘일편 단심’이라는 은유적 의미가 있다고 보아 “온 몸이 밝을 것이요”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눈이 건강해서 빛을 받아들인다면 즉 영적인 눈이 일편 단심으로 복음의 빛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전 존재는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반면 ‘나쁜'(*, 포네로스) 눈은 그 시선이 약한 것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진리와 복음을 거부하는 눈이다.

스코페이 운 메 토 포스 토 엔 소이 스코토스 에스틴

개역개정,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새번역,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

우리말성경,35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라.

가톨릭성경,35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영어NIV,35 See to it, then, that the light within you is not darkness.

영어NASB,35 “Then watch out that the light in you is not darkness.

영어MSG,35 Keep your eyes open, your lamp burning, so you don’t get musty and murky.

영어NRSV,35 Therefore consider whether the light in you is not darkness.

헬라어신약Stephanos,35 σκοπει ουν μη το φως το εν σοι σκοτος εστιν

라틴어Vulgate,35 vide ergo ne lumen quod in te est tenebrae sint

히브리어Modern,35 על כן השמר לך פן יחשך האור אשר בקרבך׃

성 경: [눅11:3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몸의 등불]

󰃨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 누가는 이 말씀을 하나의 권고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마태는 경고의 형식으로 기술하였다(마 6:2). “속에 있는 빛”에 관해서는 (1)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하는 내적 빛 곧 양심(Gilmore) 혹은 (2)청중들이 스스로 빛이라고 여기는 것을 각각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중 어떤 견해를 취하든 본절은 본성적으로 진리를 거스리기 쉬운 인간의 무지함과 완악함에 대한 경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선한 양심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신앙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경성해야 할 것이다.

에이 운 토 소마 수 홀론 포테이논 메 에콘 메로스 티 스코테이논 에스타이 포테이논 홀론 호스 호탄 호 뤼크노스 테 아스트라페 포티제 세

개역개정,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새번역,36 네 온 몸이 밝아서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 마치 등불이 그 빛으로 너를 환하게 비출 때와 같이, 네 몸은 온전히 밝을 것이다.”

우리말성경,36 만약 너희 온몸이 빛으로 가득하고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 마치 등불이 너희를 환하게 비출 때처럼 너희 몸도 온전히 빛날 것이다.”

가톨릭성경,36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

영어NIV,36 Therefore, if your whole body is full of light, and no part of it dark, it will be completely lighted, as when the light of a lamp shines on you.”

영어NASB,36 “If therefore your whole body is full of light, with no dark part in it, it will be wholly illumined, as when the lamp illumines you with its rays.”

영어MSG,36 Keep your life as well-lighted as your best-lighted room.”

영어NRSV,36 If then your whole body is full of light, with no part of it in darkness, it will be as full of light as when a lamp gives you light with its rays.”

헬라어신약Stephanos,36 ει ουν το σωμα σου ολον φωτεινον μη εχον τι μερος σκοτεινον εσται φωτεινον ολον ως οταν ο λυχνος τη αστραπη φωτιζη σε

라틴어Vulgate,36 si ergo corpus tuum totum lucidum fuerit non habens aliquam partem tenebrarum erit lucidum totum et sicut lucerna fulgoris inluminabit te

히브리어Modern,36 והנה אם גופך כלו אור ואין בו כל דבר חשך אז יאור כלו והיה כהאיר לך הנר בברק נגהו׃

성 경: [눅11:3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몸의 등불]

󰃨 온몸이 밝아…온전히 밝으리라 –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누가만의 독특한 결론이나,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아 베자 사본, 고대 라틴역, 수리아역 등에서는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앞의 내용을 반복하는 듯한 본절은 반복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면이나 주제면에서 볼 때 엡 5:13,14와 유사하다. 본절의 의미는 34,35절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해지는 바 믿음의 신령한 눈을 뜨고 있는 자는 복음의 광채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가 그 빛을 주위에까지 비추는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엡 5:8).

엔 데 토 랄레사이 에로타 아우톤 파리사이오스 호포스 아리스테세 파르 아우토 에이셀돈 데 아네페센

개역개정,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새번역,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자기 집에서 잡수시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들어가서 앉으셨다.

우리말성경,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바리새파 한 사람이 자기 집에서 잡수시기를 청하자 예수께서 안으로 들어가 식탁에 기대어 앉으셨습니다.

가톨릭성경,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영어NIV,37 When Jesus had finished speaking, a Pharisee invited him to eat with him; so he went in and reclined at the table.

영어NASB,37 Now when He had spoken, a Pharisee asked Him to have lunch with him; and He went in, and reclined at the table.

영어MSG,37 When he finished that talk, a Pharisee asked him to dinner. He entered his house and sat right down at the table.

영어NRSV,37 While he was speaking, a Pharisee invited him to dine with him; so he went in and took his place at the table.

헬라어신약Stephanos,37 εν δε τω λαλησαι ηρωτα αυτον φαρισαιος τις οπως αριστηση παρ αυτω εισελθων δε ανεπεσεν

라틴어Vulgate,37 et cum loqueretur rogavit illum quidam Pharisaeus ut pranderet apud se et ingressus recubuit

히브리어Modern,37 ויהי בדברו ויבקש ממנו פרוש אחד לאכל אתו לחם ויבא הביתה ויסב׃

성 경: [눅11:3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한 바리새인이…앉으셨더니 – 여기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모종의 적대 의식 또는 반감을 가지고 책잡기 위해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점심 잡수시기’에 사용된 동사 ‘아리스테세'(*)는 ‘먹다’는 의미의 ‘아리스타오'(*)의 과거형으로 정확하게 말해서 이 말의 뜻은 하루의 첫번째 식사를 가리킨다. 보통의 상류층 유대인들도 평일에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한다. 한 번은 늦은 아침에 가볍게 하고(*, 아리스톤), 또 한 번은 늦은 오후에 하는 데 이것이 주식사이다(*, 데이프논). 안식일에는 세 차례의 식사를 하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먹는 점심을 가장 잘 차린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초대받은 식사는 첫 식사라는 의미에서 ‘아침’이며(요 21:12,15), 시간상 점심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앉으셨더니'(*, 아나퓨토)는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는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호 데 파리사이오스 이돈 에다우마센 호티 우 프로톤 에밮티스데 프로 투 아리스투

개역개정,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새번역,38 그런데 그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가 잡수시기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

우리말성경,38 그런데 그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께서 음식을 들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가톨릭성경,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영어NIV,38 But the Pharisee, noticing that Jesus did not first wash before the meal, was surprised.

영어NASB,38 When the Pharisee saw it, he was surprised that He had not first ceremonially washed before the meal.

영어MSG,38 The Pharisee was shocked and somewhat offended when he saw that Jesus didn’t wash up before the meal.

영어NRSV,38 The Pharisee was amazed to see that he did not first wash before dinner.

헬라어신약Stephanos,38 ο δε φαρισαιος ιδων εθαυμασεν οτι ου πρωτον εβαπτισθη προ του αριστου

라틴어Vulgate,38 Pharisaeus autem coepit intra se reputans dicere quare non baptizatus esset ante prandium

히브리어Modern,38 ויתמה הפרוש בראתו אשר לא נטל ידיו בראשונה לפני הסעודה׃

성 경: [눅11:3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손 씻지 아니하심을…이상히 – 막 7:2에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가 바리새인들과 부딪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 자신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에 임함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씻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배티조'(*)는 ‘담그다’, ‘적시다’의 의미로서 규례에 따라 식사전에 물 그릇에 손을 담그는 것을 뜻한다. 이 행위는 당시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고,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결례(潔禮)였다. 아무튼 이 제의적(祭儀的) 식사 관습은 바리새인 뿐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도 철저히 지켰던 규범이었다(막 7:3-4). 따라서 이 유전을 무시한 예수의 행위는 그 바리새인에게 파격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의 유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저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악습을 질책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에이펜 데 호 퀴리오스 프로스 아우톤 뉜 휘메이스 호이 파리사이오이 토 엨소덴 투 포테리우 카이 투 피나코스 카다리제테 토 데 에소덴 휘몬 게메이 하르파게스 카이 포네리아스

개역개정,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새번역,39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우리말성경,39 그러자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지만 너희 속에는 욕심과 사악함이 가득 차 있다.

가톨릭성경,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영어NIV,39 Then the Lord said to him, “Now then, you Pharisees clean the outside of the cup and dish, but inside you are full of greed and wickedness.

영어NASB,39 But the Lord said to him, “Now you Pharisees clean the outside of the cup and of the platter; but inside of you, you are full of robbery and wickedness.

영어MSG,39 But the Master said to him, “I know you Pharisees burnish the surface of your cups and plates so they sparkle in the sun, but I also know your insides are maggoty with greed and secret evil.

영어NRSV,39 Then the Lord said to him, “Now you Pharisees clean the outside of the cup and of the dish, but inside you are full of greed and wickedness.

헬라어신약Stephanos,39 ειπεν δε ο κυριος προς αυτον νυν υμεις οι φαρισαιοι το εξωθεν του ποτηριου και του πινακος καθαριζετε το δε εσωθεν υμων γεμει αρπαγης και πονηριας

라틴어Vulgate,39 et ait Dominus ad illum nunc vos Pharisaei quod de foris est calicis et catini mundatis quod autem intus est vestrum plenum est rapina et iniquitate

히브리어Modern,39 ויאמר אליו האדון כעת אתם הפרושים מטהרים את הכום והקערה מחוץ והפנימי אשר בכם הוא מלא גזל ורשע׃

성 경: [눅11:3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겉은 깨끗이…속인즉 탐욕과 악독 – 예수는 ‘주'(*, 호 퀴리오스)로서 말씀하시며, 그 대상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을 넘어 전체 바리새인들에게로 확대된다. 예수는 자신을 초청한 사람을 면전에 두고 매우 강한 어조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있는데 마태의 경우는 (마 23:25)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종교적인 거룩함을 보이려고 그릇의 겉을 닦듯이 철저히 예식을 엄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외양을 포장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탐욕(*, 하르파게스)은 ‘채어가다’는 뜻의 ‘하르파조'(*)에서 온 말로 ‘강탈’, ‘약탈’의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악독'(*, 포네리아스)은 ‘악한 자’를 뜻하는 ‘포네로스'(*)에서 온 말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종교적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그 중심을 얼마나 욕심이 많고 악한 자들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아프로네스 우크 호 포이에사스 토 엨소덴 카이 토 에소덴 에포이에센

개역개정,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새번역,40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말성경,40 너희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든 분이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가톨릭성경,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영어NIV,40 You foolish people! Did not the one who made the outside make the inside also?

영어NASB,40 “You foolish ones, did not He who made the outside make the inside also?

영어MSG,40 Stupid Pharisees! Didn’t the One who made the outside also make the inside?

영어NRSV,40 You fools! Did not the one who made the outside make the inside also?

헬라어신약Stephanos,40 αφρονες ουχ ο ποιησας το εξωθεν και το εσωθεν εποιησεν

라틴어Vulgate,40 stulti nonne qui fecit quod de foris est etiam id quod de intus est fecit

히브리어Modern,40 הכסילים הלא עשה החיצון גם עשה את הפנימי׃

성 경: [눅11:4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어리석은 자들아 – 겉만 깨끗하게 포장을 하면 속의 추악함이 감추어 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눈에는 피조물들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마 10:26).

플렌 타 에논타 도테 엘레모쉬넨 카이 이두 판타 카다라 휘민 에스틴

개역개정,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새번역,41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우리말성경,41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자비를 베풀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가톨릭성경,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영어NIV,41 But give what is inside the dish to the poor, and everything will be clean for you.

영어NASB,41 “But give that which is within as charity, and then all things are clean for you.

영어MSG,41 Turn both your pockets and your hearts inside out and give generously to the poor; then your lives will be clean, not just your dishes and your hands.

영어NRSV,41 So give for alms those things that are within; and see, everything will be clean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41 πλην τα ενοντα δοτε ελεημοσυνην και ιδου παντα καθαρα υμιν εστιν

라틴어Vulgate,41 verumtamen quod superest date elemosynam et ecce omnia munda sunt vobis

히브리어Modern,41 אבל תנו לצדקה את אשר בם והנה הכל טהור לכם׃

성 경: [눅11:4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그 안에 있는 것 – 이에 관하여 여러 해석이 있다. (1)잔과 접시 속에 있는 것, 곧 호화 음식으로 봄. 그러면 그 의미는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지 말고 그 식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잔 속에 있는 것을 구제물로 주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NEB)가 된다. (2)이를 부사적 대격으로 해석하여 “마음으로부터 자선을 베풀라”의 뜻으로 본다(N.Turner). (3)”네가 모아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즉시 너의 소유물이 깨끗해 질것이다”(J.Knox). (4)누가가 기록한 ‘구제하라’는 아람어 ‘깨끗이 하다'(dakki)를 ‘자선을 베풀다'(zakki)로 오역한 것이라는 해석(Wellhausen). 이러한 세가지 해석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39절과의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2)의 견해가 가장 합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 마음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부정한 재물을 모두 되돌려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구제’라는 말에 적합하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라 우아이 휘민 토이스 파리사이오이스 호티 아포데카투테 토 헤뒤오스몬 카이 토 페가논 카이 판 라카논 카이 파레르케스데 텐 크리신 카이 텐 아가펜 투 데우 타우타 데 에데이 포이에사이 카케이나 메 파레이나이

개역개정,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새번역,42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

우리말성경,42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들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면서 정작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은 무시해 버리는구나. 그런 것들도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가톨릭성경,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영어NIV,42 “Woe to you Pharisees, because you give God a tenth of your mint, rue and all other kinds of garden herbs, but you neglect justice and the love of God. You should have practiced the latter without leaving the former undone.

영어NASB,42 “But woe to you Pharisees! For you pay tithe of mint and rue and every kind of garden herb, and yet disregard justice and the love of God; but these are the things you should have done without neglecting the others.

영어MSG,42 “I’ve had it with you! You’re hopeless, you Pharisees! Frauds! You keep meticulous account books, tithing on every nickel and dime you get, but manage to find loopholes for getting around basic matters of justice and God’s love. Careful bookkeeping is commendable, but the basics are required.

영어NRSV,42 “But woe to you Pharisees! For you tithe mint and rue and herbs of all kinds, and neglect justice and the love of God; it is these you ought to have practiced, without neglecting the others.

헬라어신약Stephanos,42 αλλ ουαι υμιν τοις φαρισαιοις οτι αποδεκατουτε το ηδυοσμον και το πηγανον και παν λαχανον και παρερχεσθε την κρισιν και την αγαπην του θεου ταυτα εδει ποιησαι κακεινα μη αφιεναι

라틴어Vulgate,42 sed vae vobis Pharisaeis quia decimatis mentam et rutam et omne holus et praeteritis iudicium et caritatem Dei haec autem oportuit facere et illa non omittere

히브리어Modern,42 אך אוי לכם הפרושים כי תעשרו את המנתא ואת הפיגם ואת כל הירק ותעברו את המשפט ואת אהבת אלהים והיה לכם לעשות את אלה ולא להניח גם את אלה׃

성 경: [눅11:4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 여기서부터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해서 여섯가지의 화(禍)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선포되는데, 이 문구에는 ‘저주’ 또는 ‘복수’의 의미라기보다는 ‘탄식’의 뜻이 들어 있다(10:13).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장(死藏)시킨 채 그 형식에만 집착함으로써 성스러운 하나님의 율법을 박재화시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바판하고 있다. 본래 구약의 율법은 곡식, 포도주,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다(레 27:30-33;신 14:22-29). 물론 여기에는 땅 위에서 소출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랍비적 규범은 십일조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분화하였는데, 심지어는 땔 나무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한다(Mishna). 이런 것 자체가 벌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맹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이 바친 십일조의 세 항목이 열거되고 있는데, ‘박하'(*, 헤두오스몬)는 정원에서 재배하는 식물로 그 향기가 좋으며, ‘운향'(*, 폐가논)은 회록색의 잎과 노란 꽃을 가진 식물이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23:23) ‘회향'(*, 아네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논드 향료(anethum graveolens)를 가리킨다. 마지막 항목인 ‘채소'(*, 라카논)는 어떤 특정한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총칭으로서의 채소를 뜻한다. 마태는 누가와 달리 특정한 종류인 ‘근채'(*, 퀴미논)로 기록하고 있다.

󰃨 공의와…사랑은 버리는도다 – 형식적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며 철저했던 바리새인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탈색시켜 버렸다. 여기서 ‘공의'(*, 크리시스)는 ‘정의’, ‘의로움’의 뜻으로 사회 정의와 관련된 말이며(Easton),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에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사랑'(*, 아가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에 근거하여 마음과 목숨과 힘, 그리고 뜻을 다해 하가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가리킨다(10:27).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공의와 사랑을 버렸던 것이다. ‘버리다'(*, 파레르케스데)는 ‘비켜나다’, ‘간과하다’의 의미로 이들의 행위가 중요한 핵심을 비켜가면서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 예수게서 그들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는 만큼 그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도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전자만이 지켜질 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혹자는 정결법의 규절을 파기하신 예수께서(38절) 율법의 준수를 말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맹목적 율법 파괴자로 오해하는 데서 오는 그릇된 문제 제기이다. 왜냐하면 (1)예수께서는 율법 자체를 파괴하거나 반대하시지 않고(16:17), (2)결코 예수는 정신이 결여된 율법 준수를 인정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3)을 법이 규정하지도 않은 유전적(遺傳的) 규범을 거부하는 것과 정당한 목적을 가진 십일조를 인정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아이 휘민 토이스 파리사이오이스 호티 아가파테 텐 프로토카데드리안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카이 투스 아스파스무스 엔 타이스 아고라이스

개역개정,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새번역,43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우리말성경,43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 좋아하고 시장에서 인사받기 좋아하는구나.

가톨릭성경,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영어NIV,43 “Woe to you Pharisees, because you love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greetings in the marketplaces.

영어NASB,43 “Woe to you Pharisees! For you love the chief seats in the synagogues and the respectful greetings in the market places.

영어MSG,43 “You’re hopeless, you Pharisees! Frauds! You love sitting at the head table at church dinners, love preening yourselves in the radiance of public flattery.

영어NRSV,43 Woe to you Pharisees! For you love to have the seat of honor in the synagogues and to be greeted with respect in the marketplaces.

헬라어신약Stephanos,43 ουαι υμιν τοις φαρισαιοις οτι αγαπατε την πρωτοκαθεδριαν εν ταις συναγωγαις και τους ασπασμους εν ταις αγοραις

라틴어Vulgate,43 vae vobis Pharisaeis quia diligitis primas cathedras in synagogis et salutationes in foro

히브리어Modern,43 אוי לכם הפרושים כי תאהבו את מושב הראש בבתי הכנסיות ואת שאלות שלומכם בשוקים׃

성 경: [눅11:4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명예욕이 지적된다. 첫째로 지적되는 것은 교권적 교만으로, 그들은 공식적 예배 종교 교육 담당 기관인 회당에서 늘상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23:6) 이들이 잔치에서도 상석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높은 자리'(*, 프로토카데드리아)는 ‘가장 높은 자리'(the most important seats, NIV)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바리새인들이 회당의 상석에 앉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 보다는 특권적 우월 의식(優越意式)이나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던 점이다. 둘째로 지적되는 것은 세속적 명예욕으로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을 자신들의 특별한 존재성을 확인받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은 단순한 문안 인사의 차원을 넘어 존경의 표시였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당연히 존경의 인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으례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자신들의 내면과 행위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른 것인지를 점검해 봤어야 했던 것이다.

우아이 휘민 호티 에스테 호스 타 므네메이아 타 아델라 카이 호이 안드로포이 호이 페리파툰테스 에파노 우크 오이다신

개역개정,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새번역,44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말성경,44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 같아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나 무덤인 줄 모른다.”

가톨릭성경,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영어NIV,44 “Woe to you, because you are like unmarked graves, which men walk over without knowing it.”

영어NASB,44 “Woe to you! For you are like concealed tombs, and the people who walk over them are unaware of it.”

영어MSG,44 Frauds! You’re just like unmarked graves: People walk over that nice, grassy surface, never suspecting the rot and corruption that is six feet under.”

영어NRSV,44 Woe to you! For you are like unmarked graves, and people walk over them without realizing it.”

헬라어신약Stephanos,44 ουαι υμιν γραμματεις και φαρισαιοι υποκριται οτι εστε ως τα μνημεια τα αδηλα και οι ανθρωποι οι περιπατουντες επανω ουκ οιδασιν

라틴어Vulgate,44 vae vobis quia estis ut monumenta quae non parent et homines ambulantes supra nesciunt

히브리어Modern,44 אוי לכם הסופרים והפרושים החנפים כי אתם כקברים הנסתרים ובני האדם מתהלכים עליהם ולא ידעו׃

성 경: [눅11:4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평토장(平土葬)한 무덤 – 바리새인들에 대한 세번째 화(禍)는 그들의 본질적 모습에 관한 것이다. 즉 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억울한 부정을 범하게 만드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무덤에 닿으면 칠일간 부정하게 되는데 평토장한 무덤 같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도 닿으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 19:16). 본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부패하고 썩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은폐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 중에 부정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들로 비판되고 있다. 이에 비해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23:27)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서술되고 있다. 즉 거기서는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 즉 속에는 죽음과 부패함이 있으나 겉은 아름답게 치장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그들의 은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고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외부적인 치장에 비판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티스 톤 노미콘 레게이 아우토 디다스칼레 타우타 레곤 카이 헤마스 휘브리제이스

개역개정,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새번역,45 율법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45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45 One of the experts in the law answered him, “Teacher, when you say these things, you insult us also.”

영어NASB,45 One of the lawyers said to Him in reply, “Teacher, when You say this, You insult us too.”

영어MSG,45 One of the religion scholars spoke up: “Teacher, do you realize that in saying these things you’re insulting us?”

영어NRSV,45 One of the lawyers answered him, “Teacher, when you say these things, you insult us too.”

헬라어신약Stephanos,45 αποκριθεις δε τις των νομικων λεγει αυτω διδασκαλε ταυτα λεγων και ημας υβριζεις

라틴어Vulgate,45 respondens autem quidam ex legis peritis ait illi magister haec dicens etiam nobis contumeliam facis

히브리어Modern,45 ויען אחד מבעלי התורה ויאמר אליו רבי בדבריך אלה תחרף גם אתנו׃

성 경: [눅11:4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한 율법사가…모욕하심이니이다 – 여기서부터는 비판의 대상이 바리새인에서 율법사로 바뀌어진다. 마태복음의 경우 이 두 그룹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함께 싸잡아 바난하고 있다(마 23:13,27,29). 여기서 율법사는 일명 서기관(scribe)으로 불리기도 하는데(막 12:28), 유대교의 전문적인 율법 해석자나 율법 교사들을 가리킨다. 본문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집에 율법사도 함께 있었음을 말해주는데(37절) 이 율법사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을 듣고 있던 중 마치 도둑이 제 발저린다는 격으로 찔림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율법사의 대부분은 바리새인이었으므로 그가 그렇게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율법사는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는 불만을 드러냄으로써 바리새인들에게 대한 비판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그가 교만으로 가득차 예수의 비판을 ‘모욕'(insult, NIV)으로 받아들인 것은 예수의 비판을 근거 없고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았음을 뜻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사들의 죄악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다.

호 데 에이펜 카이 휘민 토이스 노미코이스 우아이 호티 포르티제테 투스 안드로푸스 포르티아 뒤스바스타크타 카이 아우토이 헤니 톤 닼튈론 휘몬 우 프로스프사우에테 토이스 포르티오이스

개역개정,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새번역,4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희 율법교사들에게도 화가 있다! 너희는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면서, 너희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말성경,46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율법학자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백성들에게 지기 힘든 어려운 짐을 지우면서 너희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 하지 않는구나.

가톨릭성경,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NIV,46 Jesus replied, “And you experts in the law, woe to you, because you load people down with burdens they can hardly carry, and you yourselves will not lift one finger to help them.

영어NASB,46 But He said, “Woe to you lawyers as well! For you weigh men down with burdens hard to bear, while you yourselves will not even touch the burdens with one of your fingers.

영어MSG,46 He said, “Yes, and I can be even more explicit. You’re hopeless, you religion scholars! You load people down with rules and regulations, nearly breaking their backs, but never lift even a finger to help.

영어NRSV,46 And he said, “Woe also to you lawyers! For you load people with burdens hard to bear, and you yourselves do not lift a finger to ease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46 ο δε ειπεν και υμιν τοις νομικοις ουαι οτι φορτιζετε τους ανθρωπους φορτια δυσβαστακτα και αυτοι ενι των δακτυλων υμων ου προσψαυετε τοις φορτιοις

라틴어Vulgate,46 at ille ait et vobis legis peritis vae quia oneratis homines oneribus quae portari non possunt et ipsi uno digito vestro non tangitis sarcinas

히브리어Modern,46 ויאמר אוי גם לכם בעלי התורה כי עמסים אתם על בני האדם משאות כבדים מסבל ואתם בעצמכם אינכם נגעים במשאות גם באחת מאצבעותיכם׃

성 경: [눅11:4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지기 어려운 짐을…대지 않는도다 – 여기서 말하는 ‘지기 어려운 짐’이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율법사들의 해석을 말하는데, 이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 우월한 것으로까지 여겼다. 그런데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 되어 있고 복잡하여(모세의 율법을 제외하고도 613조에 달하는 규범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 일일이 암기하여 지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저들은 이런 부담(burden)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기들은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마 23:3).

우아이 휘민 호티 오이코도메이테 테 므네메이아 톤 프로페톤 호이 데 파테레스 휘몬 아펰테이난 아우투스

개역개정,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새번역,47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운다.

우리말성경,47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다. 바로 너희 조상들이 그 예언자들을 죽인 사람들이었다.

가톨릭성경,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영어NIV,47 “Woe to you, because you build tombs for the prophets, and it was your forefathers who killed them.

영어NASB,47 “Woe to you! For you build the tombs of the prophets, and it was your fathers who killed them.

영어MSG,47 “You’re hopeless! You build tombs for the prophets your ancestors killed.

영어NRSV,47 Woe to you! For you build the tombs of the prophets whom your ancestors killed.

헬라어신약Stephanos,47 ουαι υμιν οτι οικοδομειτε τα μνημεια των προφητων οι δε πατερες υμων απεκτειναν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47 vae vobis quia aedificatis monumenta prophetarum patres autem vestri occiderunt illos

히브리어Modern,47 אוי לכם כי בונים אתם את קברות הנביאים ואבותיכם הרגו אותם׃

성 경: [눅11:4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 이들은 선지자들이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여 묻힌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세워 선지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처럼 선전하지만(마 23:29,30) 그것은 자신들의 악함을 은폐하기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은 죽은 선지자를 기념하면서 살아있는 선지자를 죽이는 모순된 자들이며(9:9;마 14:3-12), 앞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선지자를 합한 것 보다도 더 위대한 한 선지자를 죽일 것이다(23:18,21,23).

아라 마르튀레스 에스테 카이 쉬뉴도케이테 토이스 에르고이스 톤 파테론 휘몬 호티 아우토이 멘 아펰테이난 아우투스 휘메이스 데 오이코도메이테

개역개정,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새번역,48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증언하며 찬동하는 것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세우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48 그래서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저지른 일을 인정하고 찬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죽였고 너희는 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영어NIV,48 So you testify that you approve of what your forefathers did; they killed the prophets, and you build their tombs.

영어NASB,48 “So you are witnesses and approve the deeds of your fathers; because it was they who killed them, and you build their tombs.

영어MSG,48 The tombs you build are monuments to your murdering ancestors more than to the murdered prophets.

영어NRSV,48 So you are witnesses and approve of the deeds of your ancestors; for they killed them, and you build their tombs.

헬라어신약Stephanos,48 αρα μαρτυρειτε και συνευδοκειτε τοις εργοις των πατερων υμων οτι αυτοι μεν απεκτειναν αυτους υμεις δε οικοδομειτε αυτων τα μνημεια

라틴어Vulgate,48 profecto testificamini quod consentitis operibus patrum vestrorum quoniam quidem ipsi eos occiderunt vos autem aedificatis eorum sepulchra

히브리어Modern,48 וכן אתם מעידים ורוצים במעשי אבותיכם כי המה הרגו אותם ואתם בונים את קבריהם׃

성 경: [눅11:4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너희는 쌓으니 – 47절과 마 23:29에서처럼 무덤을 장식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역설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 의미는 (1)”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죽음을 확인한다. 즉 조상들의 악행을 완성한다”(Manson, Schweizer). (2)”너희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 전하는 말씀을 거부한 너희 조상들 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 너희들은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O.Michel, Schulz). 결국 여기서도 계속 지적되는 것은 외적인 경건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역이다.

디아 투토 카이 헤 소피아 투 데우 에이펜 아포스텔로 에이스 아우투스 프로페타스 카이 아포스톨루스 카이 엨스 아우톤 아포크테누신 카이 디옼수신

개역개정,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새번역,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도 말하기를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겠는데, 그들은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였다.

우리말성경,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도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낼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 중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핍박할 것이다.’

가톨릭성경,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영어NIV,49 Because of this, God in his wisdom said, ‘I will send them prophets and apostles, some of whom they will kill and others they will persecute.’

영어NASB,49 “For this reason also the wisdom of God said, ‘ I will send to them prophets and apostles, and some of them they will kill and some they will persecute,

영어MSG,49 That accounts for God’s Wisdom saying, ‘I will send them prophets and apostles, but they’ll kill them and run them off.’

영어NRSV,49 Therefore also the Wisdom of God said, ‘I will send them prophets and apostles, some of whom they will kill and persecute,’

헬라어신약Stephanos,49 δια τουτο και η σοφια του θεου ειπεν αποστελω εις αυτους προφητας και αποστολους και εξ αυτων αποκτενουσιν και εκδιωξουσιν

라틴어Vulgate,49 propterea et sapientia Dei dixit mittam ad illos prophetas et apostolos et ex illis occident et persequentur

히브리어Modern,49 בעבור זאת גם אמרה חכמת האלהים אשלח אליהם נביאים ושליחים ומהם יהרגו וירדפו׃

성 경: [눅11:4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하나님의 지혜 – 이 문구에 대한 용례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이 문구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도 각양 각색이다. 학자들의 제 해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핍박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유대 묵시문학서 중 하나의 이름이라고 본다(Bultmann). 그러나 이런 제목의 책은 발견된 적은 없다. (2)하나님의 ‘지혜'(God in his wisdon. NIV)는 예수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Tatian, Geldenhuys).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지혜(wisdon from God, NIV)라고 말한 적은 있으나(고전 1:30), 예수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경우는 없다. (3)구약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Godet). (4)예수께서 과거에 하셨던 말씀들로 본다(Meyer). (5)예수의 지혜 속에 있는 하나님 즉 그의 예지와 신적 섭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본다(Lenski). (6)’하나님이 그의 지혜로’의 의미로 본다(Creed, Manson, Danker). (7)구약과 유대교에서 지혜를 인격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신적 지혜”로 이해한다(U.Wilckens, Schulz). 지혜가 인격화되는 예를 보면 잠 1:20-33에서는 인간에게 말을 하며, 7:35에서는 그 자녀들에 관해 언급한다. 이러한 제 견해들 가운데 (6)과 (7)의 견해가 비교적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히나 에크제테데 토 하이마 판톤 톤 프로페톤 토 엨케퀴메논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아포 테스 게네아스 타우테스

개역개정,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새번역,50 창세 이래로 흘린 모든 예언자들의 피의 대가를 이 세대에게 요구할 것이다.

우리말성경,50 그러므로 이 세대는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흘린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다.

가톨릭성경,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영어NIV,50 Therefore this generation will be held responsible for the blood of all the prophets that has been sh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world,

영어NASB,50 so that the blood of all the prophets, shed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may be charged against this generation,

영어MSG,50 What it means is that every drop of righteous blood ever spilled from the time earth began until now,.

영어NRSV,50 so that this generation may be charged with the blood of all the prophets shed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헬라어신약Stephanos,50 ινα εκζητηθη το αιμα παντων των προφητων το εκχυνομενον απο καταβολης κοσμου απο της γενεας ταυτης

라틴어Vulgate,50 ut inquiratur sanguis omnium prophetarum qui effusus est a constitutione mundi a generatione ista

히브리어Modern,50 למען ידרש מן הדור הזה דם כל הנביאים אשר נשפך למן הוסד הארץ׃

성 경: [눅11:5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모든 선지자의 피 – 앞서간 세대들이 저지른 과오는 후대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고 은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어진 기회와 은총을 저버릴 때에는 전(前) 세대들로부터 누적된 심판을 받게된다. 바로 예수 세대의 유대인들이 이런 상황을 자초하고 있었다(47-48). 전 세대들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악을 더하는 세대들에게 가해질 형벌의 중함과 엄격함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여러 차례 기록이 되어 있다(잠 29:1;렘 7:16;겔 14:14). 한편 본문의 ‘모든 선지자’에 대해서 마태는 ‘의인'(*, 디카이온)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아벨’을 언급함에 있어서 ‘선지자’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Marshall). 그러나 본문에서도 ‘선지자’라는 칭호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종들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그 의미는 동일하다.

아포 하이마토스 하벨 헤오스 하이마토스 자카리우 투 아폴로메누 메탘쉬 투 뒤시아스테리우 카이 투 오이쿠 나이 레고 휘민 에크제테데세타이 아포 테스 게네아스 타우테스

개역개정,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새번역,51 아벨의 피에서 비롯하여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우리말성경,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말이다. 그렇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가톨릭성경,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영어NIV,51 from the blood of Abel to the blood of Zechariah, who was killed between the altar and the sanctuary. Yes, I tell you, this generation will be held responsible for it all.

영어NASB,51 from the blood of Abel to the blood of Zechariah, who was killed between the altar and the house of God; yes, I tell you, it shall be charged against this generation.’

영어MSG,51 from the blood of Abel to the blood of Zechariah, who was struck down between altar and sanctuary, is on your heads. Yes, it’s on the bill of this generation and this generation will pay.

영어NRSV,51 from the blood of Abel to the blood of Zechariah, who perished between the altar and the sanctuary. Yes, I tell you, it will be charged against this gener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51 απο του αιματος αβελ εως του αιματος ζαχαριου του απολομενου μεταξυ του θυσιαστηριου και του οικου ναι λεγω υμιν εκζητηθησεται απο της γενεας ταυτης

라틴어Vulgate,51 a sanguine Abel usque ad sanguinem Zacchariae qui periit inter altare et aedem ita dico vobis requiretur ab hac generatione

히브리어Modern,51 מדם הבל עד דם זכריהו אשר נהרג בין המזבח ולבית הן אמר אני לכם דרוש ידרש מן הדור הזה׃

성 경: [눅11:5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아벨의 피…사가랴의 피 – 이것은 유대인들의 성경 분류법상 처음 책인 창세기로부터 마지막 책인 역대기하에 이르기 까지의 의로운 첫번째 죽음과(창 4:8) 마지막 죽음(대하 24:20-22)을 표현한 것이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로 칭함을 받았으나 그의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가랴는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비판하다 죽임을 당한 의인이었다. 한편 마태는 사가랴가 바라갸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마 23:35), 이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스가랴)로(대하 24:20) 기록하고 잇는 본문과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태는 여호야다의 아들과 예언서 스가랴의 기록자인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를 혼동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도 동일하게 살해당했다는 전승이 있거나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 언급되는 스가랴는 A.D.67년 헤롯당에 의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바라이스의 아들 스가랴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럴 경우 선지자의 죽음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의 전(全) 유대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셈이며 예루살렘의 멸망도 피의 대가로 지불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담당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매우 강한 결의의 표현으로 그 속에는 예수의 신적인 권위가 내포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A.D. 70년경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파멸됨으로써 과연 그 세대는 피의 대가를 담당하였다.

우아이 휘민 토이스 노미코이스 호티 에라테 텐 클레이다 테스 그노세오스 아우토이 우크 에이셀다테 카이 투스 에이세르코메누스 에콜뤼사테

개역개정,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새번역,52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우리말성경,52 너희 율법학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도 막았다.”

가톨릭성경,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영어NIV,52 “Woe to you experts in the law, because you have taken away the key to knowledge. You yourselves have not entered, and you have hindered those who were entering.”

영어NASB,52 “Woe to you lawyers! For you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you yourselves did not enter, and you hindered those who were entering.”

영어MSG,52 “You’re hopeless, you religion scholars! You took the key of knowledge, but instead of unlocking doors, you locked them. You won’t go in yourself, and won’t let anyone else in either.”

영어NRSV,52 Woe to you lawyers! For you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you did not enter yourselves, and you hindered those who were entering.”

헬라어신약Stephanos,52 ουαι υμιν τοις νομικοις οτι ηρατε την κλειδα της γνωσεως αυτοι ουκ εισηλθετε και τους εισερχομενους εκωλυσατε

라틴어Vulgate,52 vae vobis legis peritis quia tulistis clavem scientiae ipsi non introistis et eos qui introibant prohibuistis

히브리어Modern,52 אוי לכם בעלי התורה כי הסירתם את מפתח הדעת אתם לא באתם ואת הבאים מנעתם׃

성 경: [눅11:5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지식의 열쇠 –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 행위 자체로도 악한 것이지만 더 악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것을 차단시켜 버리는 행위임을 밝혀지고 있다. 사실상 율법사(律法士)들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어서 마치 천국 문의 열쇠를 독점하고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형식만을 남겨둔 채 정신을 사장시켜 버리는 행위나 인간적인 전통에 맹종하여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집을 부과하는 그들의 행위는 말 그대로 진리의 문, 천국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들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행위였다. 이런 행위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부지 중에 부정을 범하게 만드는 행위(44절) 이상의 것으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카케이덴 엨셀돈토스 아우투 에릌산토 호이 그람마테이스 카이 호이 파리사이오이 데이노스 에네케인 카이 아포스토마티제인 아우톤 페리 플레이오논

개역개정,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새번역,53 예수께서 그 집에서 나오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뜩 앙심을 품고서, 여러 가지 물음으로 예수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우리말성경,53 예수께서 그곳에서 나오실 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격렬하게 적대시하며 여러 가지 질문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성경,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영어NIV,53 When Jesus left there,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began to oppose him fiercely and to besiege him with questions,

영어NASB,53 When He left there,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began to be very hostile and to question Him closely on many subjects,

영어MSG,53 As soon as Jesus left the table, the religion scholars and Pharisees went into a rage. They went over and over everything he said,

영어NRSV,53 When he went outside,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began to be very hostile toward him and to cross-examine him about many things,

헬라어신약Stephanos,53 λεγοντος δε αυτου ταυτα προς αυτους ηρξαντο οι γραμματεις και οι φαρισαιοι δεινως ενεχειν και αποστοματιζειν αυτον περι πλειονων

라틴어Vulgate,53 cum haec ad illos diceret coeperunt Pharisaei et legis periti graviter insistere et os eius opprimere de multis

히브리어Modern,53 ויהי כדברו להם את אלה ויחלו הסופרים והפרושים לשטם אותו מאד ולהקשות לו בדברים רבים׃

성 경: [눅11:5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거기서 – ‘거기’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집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위선과 몽매함을 준엄하게 비판하신 후에 그 집에서 나오고 있다. 식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식사가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 맹렬히 달라붙어…힐문하고 – ‘맹렬히'(*, 데이노스)는 ‘두렵게’, ‘무섭게’의 의미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얼마나 결한 감정의 상태로까지 흥분되어 있는가를 말해준다. ‘달라붙어'(*, 에네케인)는 ‘몹시 분노하다’ ‘누구에게 분노를 품다’의 의미이다. 이 역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예수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자기들의 잘못을 비판(批判)하는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처럼 예수를 해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에네드류온테스 아우톤 데류사이 티 에크 투 스토마토스 아우투

개역개정,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새번역,54 그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렸다.

우리말성경,54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트집을 잡으려고 애썼습니다.

가톨릭성경,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영어NIV,54 waiting to catch him in something he might say.

영어NASB,54 plotting against Him to catch Him in something He might say.

영어MSG,54 plotting how they could trap him in something from his own mouth.

영어NRSV,54 lying in wait for him, to catch him in something he might say.

헬라어신약Stephanos,54 ενεδρευοντες αυτον και ζητουντες θηρευσαι τι εκ του στοματος αυτου ινα κατηγορησωσι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54 insidiantes et quaerentes capere aliquid ex ore eius ut accusarent eum

히브리어Modern,54 ויארבו לו ויבקשו לצודד דבר מפיהו למען ימצאו עליו שטנה׃

성 경: [눅11:5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잡고자 하여…지키더라 – 이 표현들은 사냥에서 사용되는 것들로 적대자들의 증오의 정도가 얼마나 심하며 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잡고자 하여'(*, 데류사이)는 ‘쫓다’, ‘사냥에서 잡다’의 의미를 가지며, ‘지키더라'(*, 에네드류온테스)는 ‘…안에’를 뜻하는 ‘엔'(*)과 ‘자리’를 뜻하는 ‘헤드라'(*)의 합성어로 사냥감을 포획(捕獲)하기 위해서 매복해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저들은 지금까지 행한(39-52절) 예수의 비판에 대해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의 비판이 정당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공격할 허점을 찾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명분도 없는 일을 위해 이성을 잃고 광분하는 모습은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품위를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며 짐승이나 잡아먹고 사는 추한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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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984-누가복음 11장

누가복음 11장

Ⅰ. 기도에 대한 가르침 11:1-13

기도는 자연 종교의 가장 큰 원칙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돕고 의무에 복종케 하며, 기도 속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로써 믿음의 진보를 가지도록 북돋아 주는 것이다.

(1)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1절).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자주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던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세례받으실 때(3:21) 기도하셨고, ‘물러가사 한적한 것에서’ 기도하셨으며(5:16),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6:12). 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셨고(9:18),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변화하셨다(9:28,29).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2) 제자들은 예수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그들은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요청하였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그와같이 여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기도하기를 마치셨을 때 제자 중 하나가 ‘주여…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늘 가르치시는 분이셨으나 특별히 여기서는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계시다.

1)제자들의 요청은 이러했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1절).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는 그것 자체로는 하나의 좋은 기도이며 필요한 기도이다. 왜냐하면 기도를 잘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리스도만이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기도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꼭 필요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는 입과 지혜를 주옵소서. 즉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옵소서.”

2)그들은 또한 이렇게 탄원하였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가르쳐 주옵소서. “요한은 이러한 필요한 의무를 그의 제자들에게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처럼 배우고 싶습니다.” 유대인의 기도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송영이었지만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간구와 청원의 기도를 가르쳤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요청은 이런 것이라고 하겠다. “주여, 이제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숙해진 찬양과 송영에 덧붙여야 할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스도는 완전히 간구로 된 기도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기도에는 송영과 아멘이 생략되어 있었다.

(3) 그리스도는 전에 산상설교에서 가르쳤던 것과 똑같은 기도를 가르쳤다(마 6:9-13). 그들은 그들이 요구했던 모든 것이 이 몇 마디 말씀에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자신의 말로 부연시키거나 더 상세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1)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그 하나가 네 번째 기원이다. 마태복음에는 네 번째 기원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지만, 본문에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다. 즉 “우리에게 우리 몸에 필요한 양식을 날마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필요한 양식은 오늘, 내일 필요한 양식은 내일 있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날 그날의 필요에 따라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므로 그날 그날 해야할 의무에 새롭게 복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기원에도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는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고, 본문에는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용서에 필요한 자격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을 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는 또 한 가지 덧붙여진 것이 있다. 즉 일반적으로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다. 본문에는 끝부분에 송영과 아멘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이 부분을 비워 두어서 기독교의 원리에 따리 성부 성자 성령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으로 채우도록 했던 것 같다.

2)그러나 두 기도문은 본질적으로 같다. 본문에는 몇 가지 일반적인 교훈들이 들어 있다.

①기도할 때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나아가듯이 우리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②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에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원리인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철저히 계속해서 그 원리에 맞게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③경건한 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④기도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그의 나라에 권세를 돌림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⑤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와 실제는 매우 본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의 원리와 실제가 그 본래적인 것에 일치하기를 기대해야 한다.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라는 말은 기도문의 처음 세가지 간구에 대한 언급이다.

⑥믿음으로 진실되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다른 모든 일들이 더해 질 것을 겸허하게 소망하며 그것들을 위해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첫 번째 소원과 관심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의 나라가 임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⑦현세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절제하며 우리의 능력에 맞게 한정시킬 수 있어야 한다. 본문의 ‘날마다’라는 표현은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과 아주 같은 것이다.

⑧죄는 우리가 매일 지고 있는 빚이다. 그러므로 말나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 죄는 날마다 쌓인다. 그런데 자비의 기적으로 우리는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매일 매일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도할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보다 더 많이 용서해 주신다.

⑨만일 우리가 언제고 우리를 모요하고 우리에게 해를 입힌 자들을 진실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⑩우리는 죄에 대한 유혹을 죄로 인해서 파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유혹을 받아 죄에 빠지고,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열심히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⑪우리는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악에 빠지지 않고 악을 가져오는 사단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는 다음 내용을 보이심으로 기도할 때 강청할 것과 열심과 끈기를 가질 것을 역설하신다.

1)강청은 사람들은 대할 때 효과를 가져다 준다(5-8절). 어떤 사람이 때아닌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자기 자신이 아니라 찾아온 친구를 위해서 이웃에 떡 한두 덩이를 빌리러 갔다고 생각해 보자. 그 이웃은 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문을 두드려 잠을 깨움으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많은 사과를 했을 것이나 그의 이웃은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자기가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 이웃은 그 사람에게 떡을 주어 돌아가게 할 것이다.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8절). 사람들은 강청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들어주지만 하나님께서 강청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①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친절히 대해주는 이웃이나 친구의 집에 가서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②우리는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양식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③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떡을 구하러 갔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선행을 베풀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사고 구하는 것 이상의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④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부주의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서 곤란을 당하는 것이라면, 어려운 가운데서도 더욱더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친구가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떡을 구하러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배려해 주신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강청함으로써 화가 난 사람을 이처럼 설복시킬 수 있다면, 무한히 관대하시며 강청함에 화내시지 않고 받아 주시는 하나님께 강청할 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쉬지 않고 기도한다면 합당한 때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2)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하심 뿐 아니라 그의 말씀도 가지고 있다(9,10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9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구할 뿐만 아니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한 것에 대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 구하고 찾을 때는 계속해서 강청하고 똑같은 문을 두드려야 마침내 응답을 듣게 될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10절).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믿음으로 구하면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지시하신 것들 즉, 그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고 나라가 임하며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 있어 우리는 강청해야 한다.

(5)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게 하심으로 교훈과 용기를 주신다.

1)세상에서의 아버지의 인자함을 상기시킴: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는 너희 자녀에게 그렇게 몰인정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11,12절).

2)이 말씀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축복에 적용시킴(13절):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에도 그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내용을 살펴 보자.

①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성령을 구해야 하는 까닭은, 성령께서 기도를 잘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하게 될 모든 선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그리스도는 이 기도가 곧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라고 우리를 격려하신다. 너희 천부께서 주시지 않겠느냐. 그는 그의 권세로 성령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좋은 것 일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것들은 성령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약속된 전부는 아니다. 이 세상의 부모들이 악할지라도 친절하며 빈약할지라도 자녀들에게 줄 뿐만 아니라 식별하여 가장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

Ⅱ. 예수와 바알세불 11:14-26

본문은 마태복음 12:22이하에도 나온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특별히 사단을 다스리는 권세를 증명해 보임으로써 신적인 사명에 대한 일반적인 증거를 보여주고 계시다. 본문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의 성취를 위한 열심을 보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으셨다. 마태복음에는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귀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쫓겨나와 그 벙어리는 즉시 말하게 되었다.

(1)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을 보고 감동받았다. 무리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였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였다(15절). 이들은 이러한 생각을 확증하고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능력의 증거에 맞서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어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신시켜 달라고 도전하였다. 그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라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손을 잡아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행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지독한 불신자들은 어떤 일을 꾸미든지 절대로 당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트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답변하신다.

1)사단처럼 교묘한 왕이 자신을 파멸시킬 일을 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17,18절). 예수께서는 그들이 흉증을 감추려고 생각할 때에도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이러한 비난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 분쟁하는 자가 결코 서지 못한다는 것은 공인된 격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라나 가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자든지 스스로 분쟁한다면 자신의 파멸을 재촉하는 것이 될 것이다.”

2)그들이 그리스도가 사단과 협약을 맺었다고 비난한 것은 매우 편파적이고 심술궂은 태도였다. 다른 사람이 이러한 기적을 행했다면 그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찬미했을 것이다(19절). 너희 아들들은 주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너희 동족인 유대인이나 너희의 제자인 바리새인 중 어떤 자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당한 것같이 가증하게 사단과 용납하면서 책망하는 자를 정죄한다는 것은 크나큰 위선이다.

3)이러한 기적을 확신하지 않음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원수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밀쳐 냈기 때문이다(20절)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따라서 만일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면 멸망할 것이다.” 본문의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가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광대하신 팔을 다 뻗지 않으셔도 된다. 원하신다면 울부짖는 사자도 나방처럼 손가락 하나로 죽이실 수 있다.

4)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은 귀신과 그들이 힘을 파괴하는 것이었다(21,22절).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셨을 때, 그는 귀신보다 강했으며, 권능으로 그 일을 하실 수 있었으므로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기 위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나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지배하시고 이기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볼 수가 있다.

①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비참한 상태: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 할 그의 마음이 귀신의 소굴이 되어 있다. 그리고 영혼의 모든 힘과 능력은 귀신의 재물이 되어 버렸다. 거룩한 심령은 거룩한 것의 거처이지만 성화되지 않은 심령은 귀신의 소굴이다. 강하게 무장된 귀신은 이 소굴을 지키며 그리스도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할 수 있는 무장을 다한다. 마귀는 온갖 그릇된 생각으로 인간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진리와 거룩함을 대적하게 하는데 이 그릇된 생각들은 곧 마귀가 자기의 소굴을 지키기 위한 요새이다. 강하게 무장된 마귀가 지키고 있는 동안 회개치 않은 영혼의 소굴에는 평안이 있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죄인은 자신을 좋게 평가하여 매우 안일해하며 즐거워한다. 그는 자신만만하며 편안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무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한 길만 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되면 마귀의 소굴의 평안은 소란케 될 것이다.

②회개함으로써 오는 놀라운 변화:사단은 강하게 무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하다. 그가 승리하신 방식을 보라. 예수께서는 사단이 자기의 소유가 안전하고 그것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오신다. 이러한 승리의 증거를 보라.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아 버리신다(22절). 즉 예수께서 친히 그 재물을 소유하신다. 이제까지 사단을 위해 사용되었던 마음과 육체의 재산이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쓰여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분배해 주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승리의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의 목적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적과 한패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23절).

5)계약에 의해서 귀신이 나가는 것과 강제적으로 쫓겨나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어쫓김을 당한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책임이기 때문이다(막 9:25). 반면에 귀신은 스스로 나가면 언제든지 다시 들어오곤 한다(24-26절). 그리스도께서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적을 패배시키신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①위선자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그의 마음은 여전히 귀신의 집이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은 나갔다. 그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얼마동안 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겉으로는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다. ㉡그 집은 부분적인 회개로 어느 정도 소제되었다. 그러나 집은 소제되었지만 깨끗하지는 않았다. 그 집이 깨끗하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집이 될 수 없다. 소제함으로 더러운 쓰레기는 치워지지만 죄인을 따라다니던 죄는 그대로 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소제되지만 구석구석에서 눈에 띄지않는 쓰레기는 치워지지 않은 채로 있게 된다. 집은 청소되어도 더러운 것은 벽 속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집은 일반적인 은사와 은혜를 닮은 것들로 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모두 허식이요 눈가림이며 진실된 것도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집은 수리되어도 소유물은 그대로 있는 상태이다. 그 집은 그리스도께 복종한 것이 아니다.

②배교자의 최후의 상태는 귀신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26절). 그들은 아무런 어려움없이 들어간다. 그들은 환영받으며 거기서 거한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위선은 배교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죄의 은밀한 장소가 외적인 신앙고백의 가면 속에 감추어지고 양심이 타락한 곳에 배교의 길이 있다. 그러한 자의 나중의 죄와 형벌은 전보다 더 심하게 된다. 배교는 인간의 최악의 상태이다. 그들의 양심은 마비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죄는 극도에 달할 것이다. 그리고 내세에서 그들은 더 큰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Ⅲ.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복 11:27-28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구절이다.

(1) 한 다정하고 정직한 여인이 예수의 훌륭한 말씀을 듣고 찬사를 보냈다. 이 선한 여인은 그의 말씀을 찬미하였다. 이 말씀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 당신을 밴 태가 복이 있도소이다(27절). “즉 당신을 아들로 나은 여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 땅에 매우 복된자가 되며, 결코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신 자의 어머니였다면 나는 참으로 복된 자가 되었을텐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은 귀중한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낳고 길러 준 자보다 그의 신실하고 순종적인 제자들이 더 복된 자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28절). 예수께서는 한편으로는 육신의 모습에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그녀를 견제하기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된다면 그의 어머니처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격려해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다. 즉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만이 진정으로 복된 자이다.

Ⅳ. 선지자 요나의 표적 11:29-36

(1) 우리가 우리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유력한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였다는 사실이다.

1)예수께서 이미 많은 표적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무리가 모였다(29절). 많은 무리가 모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많은 무리가 왜 모였는지를 아셨다. 즉 그들은 표적을 구하기 위해서 왔고 구경하기 위해서 왔으며 집에 돌아가서 할 이야기거리를 얻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2)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이제까지 본 표적과는 다른 한 가지 표적을 보여 줄 것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곧 선지자 요나의 표적으로, 마태복음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극도의 파멸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인자는 이 세대의 표적이니라(30절).

3)예수께서는 이러한 표적을 믿으라고 경고하셨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1절). 남방의 스바 여왕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 생소했으나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다. 그너는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려고 왔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예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음에도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 조금도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2절).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설교는 요나의 설교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듣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니느웨 백성처럼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도 않았다.

(2)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 우리에게서 기대하시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내용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1)그들은 등불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의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석에서 전파하지 않으셨다. 복음의 빛이 등경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큰 특혜이다. 그러므로 들어오는 자마다 그것을 볼 수 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볼 수 있다.

2)등불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을 보는 것이었다. 사물을 아주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만약 몸의 기관이 건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건강한 것이 아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라(34절). 영혼의 등불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의 계시의 등불이 우리에게 비치면 그것이 곧 축복이다. ①만일 영혼의 눈이 성실하고 분명하게 보며 오로지 진리만을 목적으로 하여 자체를 추구한다면, 온 몸 즉 온 영혼은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충만한 빛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영혼을 채운다. 우리의 영혼이 복음의 빛으로 채워져서 어두운 부분이 없다면 모든 영혼은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영혼은 어두움 그 자체였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36절). 복음은 그것을 받기 위해 대문과 창문을 열어 놓은 자의 영혼으로 들어올 것이다. ②영혼의 눈이 약하다면 온 몸, 온 영혼이 어두움으로 가득찰 것이다(34절).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절). 성실함과 진리를 탐구하고 거기서 사랑, 빛, 능력을 받을 준비를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 세대의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 그들이 어둠 속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Ⅴ. 바리새인을 책망하심 11:37-54

그리스도께서는 본문과 한 바리새인과 그의 손님에게 식사중에 사적인 대화로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후에 이 말씀을 성전에서 공적인 설교룰 통해서 하셨다(마 23장). 예수께서 공적으로 말씀하신 것과 사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일치한다.

1. 바리새인 집에 식사하러 가심(37)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정중하게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한 바리새인과 함께 식사하러 갔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기를 청하므로(37절). 우리는 이 바리새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나 그리스도께서는 아셨다. 만일 그가 좋지 못한 의도를 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선한 의도를 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들어가 앉으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에게서 무뚝뚝하지 않고 사교적인 태도를 배웠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조심해야 되지만 경직될 필요는 없다.

2. 바리새인의 범죄(38)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보고 좋지 않게 여겼다. 그는 거룩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식사하시기 위해 앉으시고서 먼저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상하게 여겼다. 바리새인과 다른 손님들은 물론 손을 씻었다. 의식법에는 씻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가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손을 씻는 규정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손을 씻지 않으면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셨다.

3. 그리스도의 책망(39-44)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하였다.

(1) 그리스도께는 바리새인들이 신앙을 의식적이며 사람의 눈에 잘 보이는 것으로 대치하고, 반면에 영혼에 관한 것이나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이는 일은 미루거나 아주 잊어버리는 데 대해 책망하셨다(39,40절). (1) 그들은 어리석음을 범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39절). “너희는 물로 손은 씻지만 너희 마음의 사악함은 씻지 않는다.” 잔이나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고 속은 깨끗이 하지 않는 자는 결코 청결한 종이 될 수 없다. 모든 신앙적인 헌신에 있어서 마음의 상태는 잔과 대접의 속과 같다. 마음이 더러우면 예배를 더럽힌다. 영적인 죄악의 지배하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큰 모욕이다. 그것은 마치 종이 잔 겉의 먼지는 씻었으나 속은 거미집과 거미로 찬 잔을 그의 주인의 손에 쥐어주는 것과 같다. 원한과 사악은 더 크고 더럽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음란의 죄등을 잔의 겉에서 씻어낸 자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한 죄이다. (2) 어리석음의 구체적인 예가 본문에 나와 있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 즉 모세의 율법에 여러 가지 씻는 일들을 지시해 주신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정화시키지 아니하시겠느냐. 밖을 위해서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속을 위해서는 더욱 더 많은 것을 만들지 않았겠는가. 이 육체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더욱 놀랍고도 기이하게 만들어진 이 영혼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다 만드셨다면, 그는 당연히 우리가 그 둘 다 돌보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영혼도 씻어 마음의 문둥병을 치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다 우리 음식물이 우리를 깨끗케 하는 규정을 추가하고 있다(41절). “먹기 전에 너희 손을 씻는 대신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여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몫을 가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할 것이며 너희도 그것들을 안전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의 분명한 의미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들의 소산물의 일정한 양을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깨끗한 것이 되었다(신 26:12-15). 우리가 예비치 못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편안히 누릴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몫을 취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가진 것 역시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품으로써 음식을 사용할 우리의 자유를 유리 자신에게 분명히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사소한 일에는 관심을 두면서 율법의 중요한 부분은 소홀히 하는데 대해 책망하셨다(42절).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수단에 관계되는 율법은 아주 정확하게 지켰다.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즉 종류대로 완전하게 드렸다는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는 일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중요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데 대한 보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에 관계되는 율법을 무시하였다. 너희가…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몫을 주면서도 하나님께는 너희 마음을 드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

(3)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허영을 책망하셨다.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43절).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자리에 앉거나 문안받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런 일들을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다.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절). 이 바리새인들의 내부는 부패한 무덤처럼 혐오, 교만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은 예배라는 미명하에 교묘하게 그것을 감춘다. 그러므로 그들과 얘기하고 그들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은 죄로 더럽혀지고, 그들의 부패상과 악한 교훈에 감염되게 된다. 전염병은 서서히 침투하여 모르는 사이에 감염되고 만다. 그러나 병에 걸린 자들은 결코 자신이 악화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 율법사와 서기관들에 대한 책망(45-54)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율법사와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을 가졌지만, 율법사와 서기관들의 임무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분개한 율법사 한 사람이 있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절). 충실하고 우정깊은 충고를 악용하는 것은 죄와 영합하여 거기서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의 어리석은 소행이다. 그들은 충고자들이 자기들을 비난하려 한다며 화를 내고 자신들을 합리화시킨다. 이 율법사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지지하면서 그의 죄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

(2)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화 있을 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46절). 그리고 또 ‘화 있을 진저 너희 율법사여’라고 말씀하셨다(52절).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평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들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항의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단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화를 자초할 뿐이다.

1)율법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시키신 것보다 더 부담이되게 신앙의 봉사를 하게 하고 자신들에게는 더 가벼운 짐이 되게 한 것에 대해 책망받았다.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절). 다시 말해서, ①”너희는 그들과 함께 짐을 지지도 않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그 속박에 구속받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②”너희는 너희가 다스리는 자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지 않을 것이며 손을 대지도 않을 것이다. 즉 너희는 무겁고 어려운 짐을 진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짐을 없애 주거나 덜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두 손을 가지고 나오나 장로들의 엄격한 전통을 완화시키는 일에는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2)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죽였던 선지자들을 존경하는 척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 그들의 조상들은 똑같은 임무를 띠고 그들에게 보내진 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다(47-49절). ①이 위선자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았다'(47절). 즉 그들은 선지자들을 찬양하며 그들의 무덤에 비문을 세웠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유물을 무덤 속에 넣거나 순교자들의 무덤을 경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신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선지자들의 자손인 양 그들의 경건을 추모하고자 그 무덤들을 수선하고 아름답게 꾸며 신성하게 하였다. ②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선지자들의 영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온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 철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에게 보내진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죽이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할 것이다. “내가 선지자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저희는 선지자들을 모함하고 반대할 뿐만 아니라 죽이고 핍박할 것이다.” ③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일을 아주 다르게 해석하실 것이다. 즉 그 일은 그들이 자기 조상들의 행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45절):그들의 조상들이 이곳에 매장된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일은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다. ④그들의 박해가 다하면 그들은 심판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50,51절).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박해한 죄는 그들의 조상들이 지은 어떤 죄보다 더한 것이므로 진노가 그들에게 가장 심하게 내려질 것이다. 사실 로마인에 의한 그들의 멸망은 너무 가공할 만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선지자들을 박해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보복으로 여겨졌다.

3)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한 것에 대한 책망을 받았다(52절). 그들은 자기들의 임무에 따라, 메시야를 예언한 구약성경을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사람들을 혼돈시켰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해 그 열쇠를 사용하거나 그들로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도와주는 대신에 그것을 그들에게서 감추었다. 이러한 일을 마태복음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천국문을 닫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마 23:14). 그들은 구약의 지식을 통해 때가 찼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안내나 도움을 받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을 쫓아내겠다고 위협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방해하고 좌절시켰다.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나쁘지만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더 나쁘다.

끝으로 본 장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사악하게 그리스도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는가를 볼 수 있다(53,54절).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것들을 책망하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책망이 심하기 때문에 그를 저지시키기 위해 격분하여 대든다는 듯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밉게 보거나 정부가 그를 불쾌하게 생각하도록 만들만한 것을 책잡고자 ‘목을 지켰다.’ 죄를 충실하게 책하는 자는 많은 대적들을 예상해야 한다. 인내로써 이러한 종류의 시험을 견디고 신중하게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죄인들의 반대를 견디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자.

#1-4 “Lord, teach us to pray,” is a good prayer, and a very needful one, for Jesus Christ only can teach us, by his word and Spirit, how to pray.

Lord, teach me what it is to pray; Lord, stir up and quicken me to the duty; Lord, direct me what to pray for; teach me what I should say.

Christ taught them a prayer, much the same that he had given before in his sermon upon the mount.

There are some differences in the words of the Lord’s prayer in Matthew and in Luke, but they are of no moment.

Let us in our requests, both for others and for ourselves, come to our heavenly Father, confiding in his power and goodness.

#5-13 Christ encourages fervency and constancy in prayer.

We must come for what we need, as a man does to his neighbour or friend, who is kind to him.

We must come for bread; for that which is needful.

If God does not answer our prayers speedily, yet he will in due time, if we continue to pray.

Observe what to pray for; we must ask for the Holy Spirit, not only as necessary in order to our praying well, but as all spiritual blessings are included in that one.

For by the influences of the Holy Spirit we are brought to know God and ourselves, to repent, believe in, and love Christ, and so are made comfortable in this world, and meet for happiness in the next.

All these blessings our heavenly Father is more ready to bestow on every one that asks for them, than an indulgent parent is to give food to a hungry child.

And this is the advantage of the prayer of faith, that it quiets and establishes the heart in God.

#14-26 Christ’s thus casting out the devils, was really the destroying of their power.

The heart of every unconverted sinner is the devil’s palace, where he dwells, and where he rules.

There is a kind of peace in the heart of an unconverted soul, while the devil, as a strong man armed, keeps it.

The sinner is secure, has no doubt concerning the goodness of his state, nor any dread of the judgment to come.

But observe the wonderful change made in conversion.

The conversion of a soul to God, is Christ’s victory over the devil and his power in that soul, restoring the soul to its liberty, and recovering his own interest in it and power over it.

All the endowments of mind of body are now employed for Christ.

Here is the condition of a hypocrite.

The house is swept from common sins, by a forced confession, as Pharaoh’s; by a feigned contrition, as Ahab’s; or by a partial reformation, as Herod’s.

The house is swept, but it is not washed; the heart is not made holy.

Sweeping takes off only the loose dirt, while the sin that besets the sinner, the beloved sin, is untouched.

The house is garnished with common gifts and graces.

It is not furnished with any true grace; it is all paint and varnish, not real nor lasting.

It was never given up to Christ, nor dwelt in by the Spirit.

Let us take heed of resting in that which a man may have, and yet come short of heaven.

The wicked spirits enter in without any difficulty; they are welcomed, and they dwell there; there they work, there they rule.

From such an awful state let all earnestly pray to be delivered.

#27,28 While the scribes and Pharisees despised and blasphemed the discourses of our Lord Jesus, this good woman admired them, and the wisdom and power with which he spake.

Christ led the woman to a higher consideration.

Though it is a great privilege to hear the word of God, yet those only are truly blessed, that is, blessed of the Lord, that hear it, keep it in memory, and keep to it as their way and rule.

#29-36 Christ promised that there should be one sign more given, even the sign of Jonah the prophet; which in Matthew is explained, as meaning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d he warned them to improve this sign.

But though Christ himself were the constant preacher in any congregation, and worked miracles daily among them, yet unless his grace humbled their hearts, they would not profit by his word.

Let us not desire more evidence and fuller teaching than the Lord is pleased to afford us.

We should pray without ceasing that our hearts and understandings may be opened, that we may profit by the light we enjoy.

And especially take heed that the light which is in us be not darkness; for if our leading principles be wrong, our judgment and practice must become more so.

#37-54 We should all look to our hearts, that they may be cleansed and new-created; and while we attend to the great things of the law and of the gospel, we must not neglect the smallest matter God has appointed.

When any wait to catch something out of our mouths, that they may insnare us, O Lord, give us thy prudence and thy patience, and disappoint their evil purposes.

Furnish us with such meekness and patience that we may glory in reproaches, for Christ’s sake, and that thy Holy Spirit may rest upon us.

누가복음 11장: 기도와 영성

누가복음 11장: 기도와 영성

1. 1-13절: 기도에 대한 가르침

앞에서 본 것처럼 누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을 거듭 부각시킵니다. 기도는 그분의 매일 일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기도에 전념하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제자들이 청합니다(1절). 기도는 한 사람의 신학의 요약이고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그렇기에 영적 지도자들은 자신의 신학과 사상을 담은 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곤 했습니다.

그 요청에 예수님은 모범 기도문을 만들어 주십니다(2-4절). 이것을 우리는 ‘주기도’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6장에 있는 주기도와 차이가 나는 이유는 독자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의 핵심은 그대로 유지하되 독자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마태는 유대적으로, 누가는 이방인들에게 맞게 만든 것입니다. 주기도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는 ‘기도의 전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에서 주목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먼저 나온다는 것입니다(2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우선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기도가 기본적인 필요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3절). 정화되지 않은 욕망을 쏟아내는 우리의 기도와 다른 점입니다. 셋째는 우리 자신의 영적 필요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제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현세적인 부와 성공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제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비유(5-8절)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친구는 친구라고 부를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친구가 간청하는데 일어나는 것이 귀찮아서 청을 거절하는 사람은 친구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간청을 하면 결국 일어나 청을 들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가장 못된 인간과 가장 선하신 하나님을 대조시킵니다. 이렇게 못된 인간도 계속 간청하면 들어 주는데, 가장 선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들어 주시겠느냐는 뜻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비유를 잘 못 해석하여, 하나님이 이 못된 친구처럼 귀찮을 정도로 간청해야 들어 주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을 뒤집어 놓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줄 것이다”(9절)라고 권하시면서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10절)라고 덧붙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꺼이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말씀하십니다.

안심이 안 되셨던지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드십니다. 생선을 달라는 아들에게 뱀을 줄 아버지가 없고 달걀을 달라는데 돌을 줄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못된 친구의 비유와 못된 아버지의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는 13절(“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에 숨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넉넉한 신뢰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또한 기도로써 구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14-36절: 마음의 눈을 떠라

그 후에 예수께서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을 내어 쫓으시자 어떤 사람이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을 모함했습니다. 당시에 악한 영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부르는 말이 여럿 있었는데, 바엘세불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무당이나 영매들이 귀신을 무마시켜 내보내는 것처럼 예수님이 사탄과 내통하여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모함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은 사탄과의 협잡이 아니라 사탄의 본영을 무너뜨리고 그 세력을 패퇴시키는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동일하다고 하여 그 내용도 같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20절).

그런 다음 예수님은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할 일에 대해 말씀을 주십니다(24-26절). 귀신에게서 해방된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만일 내면이 비어 있는 상태로 머물러 있다 보면 과거보다 더 심한 상태로 귀신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 때 어떤 여인이 ‘저런 아들을 둔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서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27절)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28절)고 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육신적인 조건과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곁으로 많은 무리가 몰려들자 그분은 표징을 구하는 세대에 대해 탄식하십니다(29절). 그들은 예수님에게 더 놀라운 표징을 보여 달라고 구했습니다.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이미 충분히 드러났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 결정적인 표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보여 줄 표징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29절). 그것은 부활의 사건을 뜻하는 것입니다. 실상 부활이야말로 표징 중 가장 큰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나라가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솔로몬보다 큰 이”(31절)이며 “요나보다 더 큰 이”(32절)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자의 대표이고 요나는 예언자의 대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직분(제사장, 왕, 지혜자, 예언자 등)을 합친 것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표징이 드러나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닫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34절)입니다. 몸에 대해 눈이 하는 역할을 마음이 담당합니다. 마음이 밝아야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무뎌지면 표징을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3. 37-54절: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에 대한 책망

그 때 어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관습대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절차를 무시하고 식탁에 앉으십니다. 의도적으로 도발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허위와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더러운 것이 가득한 속은 그냥 두고 겉만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39-41절). 또한 그들은 물질의 십일조는 철저히 지키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42절)은 소홀히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당 같은 곳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43-44절). 종교적인 행위는 많았지만 그로 인해 맺혀야 할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 한 사람이 “선생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라고 말합니다. 율법교사는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서 율법에 대해 철저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율법 준수를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게을리 하고(46절), 예언자들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당대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47-51절), 율법을 잘못 해석하여 사람들을 호도하고 있다(52절)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걸어 넘길 구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53-54절).

묵상:

오늘 기억할 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실천할 한 가지 일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강해

누가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2월 12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누가복음 서론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5장: 죄인을 부르심 6장: 가르치심 7장: 기적들을 행하심 8장: 기적들을 행하심 9장: 제자의 길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2장: 절대적 신앙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서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휘, 문체 등의 특징 및 동일한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 등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의 ‘우리’라는 부분들(행 16:10-17; 20:5-21:18; 27:1-28:16)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반자이었음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코이네 헬라어에 익숙하였고 어휘가 풍부했다. 1) 이 두 책에는 의학적 용어와 질병이나 병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난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이었던 의사 누가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초대교회의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에는 “바울이 그의 전도 여행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의사 누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세 번째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써 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바울의 동반자인 누가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다” 2) 고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와 터툴리안(160-220년경)도 이 책을 누가의 저작으로 돌렸다. 누가는 헬라인인 듯하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누가를 유대인과 구별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4:10-11, 14). 그러나 그는 구전 자료들과 기록된 자료들을(1:1-4) 성령의 인도 아래 사용했을 것이며 사도들과 기타 증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많은 것을 듣고 확인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을 61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누가복음은 그보다 일찍 아마 주후 58년경 즉 바울이 가이사랴에 투옥되었을 때 즈음에 사도 바울 곁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세 번째 책이다. 복음서들의 목적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이를 통해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20:30-31). 누가는 이 책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데오빌로의 지식을 확실케 하기 위함이라고 썼다(눅 1:1-4).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은 참 믿음의 요소이다. 누가복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 가장 자세히 증거했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많은 언급과 교훈이 나온다.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해 15번 나오는데, 그 중 11번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또 누가복음 11,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은 찬양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넷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동정적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장), 탕자의 비유(15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3) 다섯째로, 누가복음은 여인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여섯째로, 누가복음은 복음서들 중에 가장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일곱째로, 누가복음에는 세계주의적 안목도 나타난다.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묘사되었고(2:32), 그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올라갔으며(3:38), 유대인들을 제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범으로 제시되었다(10:25-37). 4)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4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 . . . 누가복음의 인간 저자는 누가이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며 의사이었고(골 4:14; 딤후 4:11) 사도행전의 저자이었다. 그는 본문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누가는 본서의 내용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NASB, BDAG) 이라는 원어( 페플레로포레메논 프라그마톤 )는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 (KJV) 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누가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이루어진 사실들이며 초대교회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이 지어낸 말들에 근거하지 않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들과 사건들에 근거한다.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한 사역자들이 증거한 바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 중에는 그의 말씀들과 행적들에 관해 글들을 남긴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글들은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자료들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증인들과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참고함으로써 사건들과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으며 그것들을 확증할 수 있었다. 누가는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대략적인 시간 순서를 포함한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당시 어떤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자임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누가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이 귀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누가는 본서의 목적이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가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본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본서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고 확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자. 5-25절,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함 [5-7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 . . .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했던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가랴이며 그 아내도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의인은 없지만(롬 3:11),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의롭게 산 의인들은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법들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어도, 짐승 제사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들을 힘써 지킨 자들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그들을 주목하셨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그 둘의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이런 부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욱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런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어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고,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8-17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 . . .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때에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였는데,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분향단 우편에 섰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자 천사가 말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말은 사가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옛날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노아도 오랫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 생활로 믿음의 단련을 얻었고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본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에게서 잉태되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 후 그에 대해 네 가지 내용을 전하였다. 첫째,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둘째,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셋째, 그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넷째,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당신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오늘날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 . . . 사가랴가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말하자, 천사는 대답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떻게’라는 원어 ( 카타 티 )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이상(異像) 즉 환상을 본 것을 알았다. 그는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 그 직무의 날이 다 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24-25절]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 . . .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말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여인이 자녀를 잉태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그에게 잉태하는 복을 주셨다. 과거에 오랫동안 그들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자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자녀를 잉태케 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시 135:6). 1-25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확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본 증인들의 증언들과 그 글들인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확실함을 깨닫고 그 모든 진리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의롭게 살자.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2).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힘써 행함으로 실제로 의롭게 살자. 셋째로, 의인에게도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부족이었다. 의인에게도 부족과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그의 하시는 일들을 기다리자. 넷째로, 우리는 기도 응답을 믿자. 사가랴의 기도는 간절히 또 아마 오랫동안 올려졌던 것 같은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들으신 바 되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힘써 기도하자.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이었지만, 벙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잘 이해하고 의심하지 말고 다 믿고 또 힘써 행하자. 26-38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26-27절]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 . . .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나타났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이었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일이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 언급한 것(27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잉태되셨음을 증거한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34절) 숫처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순결한 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1절]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 . . . 천사는 마리아에게 들어가 말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전통본문). 5) ”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자, 천사는 말하였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생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 . . . 천사는 또 말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가 어떤 자이며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자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울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34-36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 . .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 포스 )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다. 잉태치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아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성탄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KJV, NASB, NIV) 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 . . .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 헤 둘레 퀴리우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마리아의 말은 그의 겸손과 그의 믿음과 순종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은 아름다웠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자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39-56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 [39-45절]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 . . .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북쪽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있는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팔레스틴의 남쪽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친척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잉태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그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도,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가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 할 주가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주의 모친’이 될 마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여인이 훌륭한 아들을 둔 것도 복이지만,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46-56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 . .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찬송하였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그는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말씀하셨듯이, 그의 긍휼을 기억하셔서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낮고 비천함을 고백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종임을 고백하는 자는 겸손한 자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다. 마리아는 또한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의 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말하며 그의 초월성을 고백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성결성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그의 초월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언급하며 그 긍휼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세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는 그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긍휼을 얻는 길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능력, 특히 공의로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적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셨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그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졌는지!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지식이며(신 32:39), 옛날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가졌던 지식과 믿음이었다(삼상 2:6-7). 또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그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엘리사벳은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 아마 이모쯤 되었던 것 같다. 석 달은 임신한 여자가 입덧을 할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26-5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처녀이었던 마리아(27절) 사내를 알지 못했던(34절)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35절) 하나님의 능력으로(37절)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 그러므로 천사 가브리엘이 증거한 바와 같이, 마리아가 잉태한 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며(32절) 이러므로 마리아에게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다(35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뱃속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을 체험하였다(41절). 또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실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그는 메시아이시다. 천사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했다(31절).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죄인들을 그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천사는 또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며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한다(33절).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예레미야 23:5-6도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구주이시다. 죄인은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셋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38절)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헌신하였다(38절, 45절). 그는 온갖 오해와 비난과 수치, 그리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의 능력과 긍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긍휼과 공의를 고백하며 주께 헌신하자.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57-66절, 세례 요한의 출생과 할례받음 [57-66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 . . .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고 이웃과 친족들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다. 8일이 되자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였는데, 그 모친이 대답하기를,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고 하고 그 부친에게 형용하여[손짓으로]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書板)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니 모두 다 기이히 여겼다. 이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 근처에 사는 자들은 다 두려워했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며 듣는 사람들은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고 말했다.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요한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으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중에서 더 견고해진다. 67-80절, 사가랴의 찬송 [67-71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 . . .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입이 열린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贖良)하시며[구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참된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알고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의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속량(贖良)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가리킨다(렘 23:5-6; 겔 34:23-24; 호 3:5; 사 11:10 등). 뿔은 능력의 상징이다. ‘구원의 뿔’이란 ‘능력의 구주’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가? 사가랴는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이며, 또 사탄의 도구가 된 악의 세력들과 세상 권세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앗수르, 바벨론 등 이웃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이었다. [72-75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구원얻을 영혼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맹세로 그의 긍휼을 나타내셨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불결과 죄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 될 것이다. 또 구원받아 천국 백성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79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아들 요한의 역할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의 역할은 지극히 높으신 자 곧 하나님의 선지자 즉 대언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죄를 각성시키고 그 죄를 버리게 하는 것, 즉 회개하게 하는 사역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고(마 3:2)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눅 3:3). 사가랴는 요한이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할 메시아의 사역을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 스플랑크나 엘레우스 ) [긍휼의 심정]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가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구원은 죄사함의 일이다. 사람이 죄사함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의 복을 얻을 수 없다. 에베소서 1:7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로써 돋는 해( 아나톨레 )[해의 돋음]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돋는 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슬픔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킬 것이다.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자들에게 지식과 의, 기쁨과 생명과 천국의 복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결과는 평강이다. 구원은 평강의 길이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 . . . 아이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려면 심령의 강건함이 필요하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그러한 생활은 속화된 제도적 종교 생활보다 많은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종들이, 배교되고 타협하는 교회들의 풍조에 비교적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더 적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 곧 구주를 주셨음을 찬송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의 원수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원수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며 모든 죄와 불행으로부터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죄사함의 구원이다. 죄사함은 구원의 방법이며 구원 자체이다. 죄가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마 20:28).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구원의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義)도, 조건도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 구원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 구원의 목표는 빛과 평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돋는 해로 오셨다. 그 빛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이며,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다. 이제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길 것이다.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이며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현재의 삶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구원을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자가 되자.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지옥]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의 때문에] 영생이니라.”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1-7절, 예수님의 탄생 [1-5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 . .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온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때이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역사상 옥타비아누스라는 인물이며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다. 총독 구레뇨는 두 번 수리아 총독직을 맡았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주전 10-7년경이고, 두 번째는 주후 6-9년이다. 가이사 황제의 칙령은 구레뇨가 처음 총독이었을 때 내려졌던 것 같다. 6)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마 1:16, 20)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해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약혼]한 [아내](전통본문) 7)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그 여자의 남편’(마 1:19), 마리아를 ‘그의 아내’(마 1:20, 24)라고 표현하였다. 마리아는 임신한 지 여러 달이었다. 그의 태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마 1:18; 눅 1:35).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예언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6-7절]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 . . .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었을 때(마 2:1, 8, 16)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 )는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는 말로 마리아가 예수님 출산 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나타낸다. 전통사본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의 남동생들과 또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를 부당하게 높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천주교회는 이 외에도 마리아가 평생 죄가 없었고 승천하였고 죄인들의 중보자요 기도를 들으시는 자라고 가르치는데 이것들은 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교리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은 심히 비천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구주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 탄생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제물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탄생하신 것이었다. 여기에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 1:14)의 깊은 뜻이 있었다. 8-14절, 천사의 증거와 찬송 [8-10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 . . .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 날 밤, 그 지경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은 주의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의 천사는 역사상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날 밤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곁에 섰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은 그 천사를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주의 천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연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그 천사는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였다. [11-12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 . . . 천사는 말하였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구주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 주’이시다. ‘주’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불행과 죽음에서 건져낼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셨다. 목자들은 가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고 또 표까지 주셔서 그 소식을 믿게 하셨다. 기독교는 많은 표적들로 확증된 진리이다. [13-14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 . . . 홀연히 하늘의 천사들의 큰 무리가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로다](전통본문).” 8)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나 ‘낙원’과 동일하다(고후 12:2-4). 그 곳은 태양계와 은하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구주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또 땅 위에서는 평화와,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은혜와 평화는 구원의 원인과 그 결과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죄로 인해 심령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평안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참된 평안을 얻는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도 상당한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린다.

15-20절, 목자들의 확인 [15-20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 . .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그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다. 그들은 주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였다. 또 그들은 이 아기에 대해 들은 것을 다 알려주었다. 듣는 자들은 다 목자들의 말하는 것을 기이히 여겼으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는 이와 같이 찬송이 있었다.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고 목자들의 찬송도 있었다.

1-20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다윗의 동네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약속하셨었다. 본문은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올라갔다고 말하며(5절) 또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다윗의 동네에서 구주가 나셨다고 말하였다(11절)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약속을 지키신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강보로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 7절,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2절, “너희는 가서 강보에 사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16절, “[목자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께서 외양간에서 탄생하셨고 포대기에 싸여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셨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것도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탄생 때부터 그러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했다(빌 2:5-8).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도 바울은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낮아지심이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주의 천사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하였다(10-11절). 구주께서는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쁘고 복된 일은 없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는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또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하였다(갈 1:4). 또 그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땅에 사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는 일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로다”라고 말하였다(14절).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를 통해 주신 구원의 결과는 평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안이 없는 세상에 평안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은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롬 3:16-17). 그런데 구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11:28). 또 그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요 14:27). 그러므로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살후 3:16). 우리를 죄와 불행과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자. 또 세상이 줄 수 없고 오직 그 분만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자. 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감사하며 다른 이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21절, 할례를 받으심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 . . . 할례할 8일이 되자,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그것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이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로서(창 17:10-11)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또 할례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갈 5:3).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자이시며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서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다. 22-24절, 마리아가 결례의 제사를 드림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 . . .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결례(潔禮)의 날이 찼을 때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결례의 날이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아이의 경우 출산 후 7일과 33일, 합하여 40일이 지난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율법대로 첫 남자아이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경건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케 하셨다. 오늘날도 성경말씀대로 행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가정이 될 것이다.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산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하였다. 그들이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 제물은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우리는 가난해지신 그를 통해 천국의 상속과 하나님 자녀 됨의 회복과 영생의 복을 얻었다. 25-35절, 시므온의 찬송과 예언 [25-27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 .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의 부패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가 있었다. 사람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당시에 우선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런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임함을 의미할 것이다. 천국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보내 주시는 참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그리스도이시며 시므온은 그를 보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아기 예수를 만났다. [28-33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 . . 그때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하였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요셉과 그의 모친(전통본문)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구원’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그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실 것이다(요 1:29). 그는 세상 모든 족속의 구주가 되실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사 42:6; 49:6). [34-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 . . . 시므온은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말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고’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면, 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인간은 참으로 심히 죄악되고 악한 존재이다! 36-38절, 여선지자 안나의 감사 [36-38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 . .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당시 아마 106세쯤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예루살렘에서](전통본문) 9)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9절, 나사렛으로 돌아가심 [39절]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들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도착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 관련하여,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본절(39절)의 중간 즈음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고 저술하며 증거하였다고 보인다. 21-39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주이시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함으로 다 구원을 받자. 또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사함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자.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는 죄사함받은 사실을 감사하며 이제는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경건한 성도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가치를 두고 살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자. 그는 영광의 천국을 떠나 이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마구간에서 출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출생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부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가 난해지셨다(고후 8:9). 우리는 그의 겸비하심을 본받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하자.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 . . . 본문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에 대해 “아기가 자라며 [심령이](전통본문) 10)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튼튼하게 자라셨다. 인간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이 자라셨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은 심령으로 강하여지셨다. 아기 예수님은 몸 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셨다. 아기 예수님의 심령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상태에서 점점 강해지셨다. 셋째로, 아기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라고 보인다.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로고스 )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특히 지혜와 능력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하셨던 것 같다. 넷째로, 아기 예수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그에게는 원죄의 죄성과 연약성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어린 아기들에게도 있는 불만과 저항심 같은 것이 없으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그 위에 계셨다. [41-47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 . . .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혹은 조금 자라서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그는 아기 때부터 경건 훈련을 받으신 셈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그 부모[요셉과 그 모친](전통본문) 11) 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으며 사흘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소년 예수께서는 선생[랍비]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계셨고 듣는 자들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지혜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서 엿보였다. 소년 예수께서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알 수 없으나, 본문은 삼일 후 요셉과 그 모친이 소년 예수를 발견한 것이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고 선생들이 다 소년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47절의 ‘지혜’라는 원어( 쉬네시스 )는 ‘총명’이라는 뜻이며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 소피아 )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소년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48-50절]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 . . 그 부모는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말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아이야’라는 원어( 테크논 )는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보통의 말이다. 또 마리아는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부친이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문(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에는 ‘집’이라는 말( 오이코스 )은 없고 남성 혹은 중성 복수정관사( 토이스 )만 있다. 생략된 명사는 단수명사인 ‘성전’이나 ‘집’보다 복수명사인 ‘일들’( 에르고이스 )이 더 가능하여 보인다. 이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 (KJV) 의 번역대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소년 예수의 증거이다. 소년 예수께서 12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또 그는 12살 때에 벌써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다. 그 후 30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성경 연구와 기도로 그의 사명을 준비하셨을 것이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神性)의 신비, 즉 그의 인성과 그의 신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될 수 있으신지의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고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 . . . 본문은 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니라”고 증거하였다. ‘한가지로’라는 말( 메트 아우톤 )은 ‘그들과 함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그는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시며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섬기셨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원어 12) 는 그가 계속하여 그들에게 순종하셨음을 보인다. 소년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명하였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소년 예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오늘 시대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며, 부모들도 자녀들을 예수님처럼 계명을 순종하는 자로 키워야 한다. [52절]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문은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증거한다.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셨다.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는 영혼의 활동들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40절),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자라셨던 것 같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 속에서 자라셨던 것 같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키가 자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 그의 몸은 어린아이에서 십대의 소년으로, 20대의 청년으로, 그리고 30세의 성인이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죄 없는 인격, 흠과 결함이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이셨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40-52절의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의 신성에 관해,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셨다. 또 그는 열두 살 되셨을 때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는 모친 마리아의 말에 대해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그 모친 마리아도 소년 예수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둘째로, 그의 인성에 관하여, 예수님은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성장하실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계명대로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하자.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제물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을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는 신약성경과 특히 사복음서를 통해 그를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얻기를 바란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본받고 우리 자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자. 우리는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한다. 특히 경건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과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실천함을 통해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운 자들이 되기를 기도하자. 또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고 성경말씀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모범대로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 되어야 한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6절,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 [1-2절]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사역은 명확히 역사적 사실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활동 시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되어 있다.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 되는 해는 주후 28년경일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유대의 총독이었고(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헤롯 안디바스는 예수님 탄생 때의 왕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의 분봉왕(영토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왕)이었다(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그 동생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었고(주전 4년부터 주후 34년까지),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주후 약 27년부터 28년까지).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고(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안나스는 그의 장인으로서(요 18:13) 역시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이 증거한 대로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이나 그 이전에 탄생하셨고 주후 28년 초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 곧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알리시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그것은 영생의 말씀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지자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큰 특권이며 큰 복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될 자는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대의를 파악하고 그 심령이 그 말씀으로 불붙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 곧 광야에서 요한에게 왔다. 광야는 비교적 세속 사회에 때묻거나 물들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조용히 하나님과 많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며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때때로 우리는 광야에서나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광야는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이 좋지 않은 거친 들판이다. 마태의 증거대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간 것은 아마 당시의 제사장 사회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된 사회 환경이나 심지어 부패된 교회 환경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3절]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그는 노방 전도 혹은 야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마태의 증거대로(마 3:5-7), 많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사회각계각층이 죄악되고 사람의 본성과 삶이 죄악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회개는 죄사함을 얻게 한다.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또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고 또 회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명하셨고 사람이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세례’는 회개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물론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의 표시요 고백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는 자는 세례받을 수 있고 또 세례받아야 하며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6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 . 이 일은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와 같았다. 거기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았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것은 왕의 행차시 길을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한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낮추고 불신앙과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깊은 골짜기들을 메우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과 높은 마음을 버리기 전에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될 구원의 복음이다.

세례 요한은 구체적 역사 상황 속에서 일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신화적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그 기초요 그 골격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믿고 확신하자. 기독교의 핵심은 죄사함의 구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요긴한 진리는 죄가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의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며, 죄사함이 이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의 구원이다. 모든 사람은 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죄사함은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진심의 회개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서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과 악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는 자만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7-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7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 . . .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뱀이 사람을 범죄케 한 후,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거절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또 그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책망하셨다(마 23:33). 사도 요한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요일 3:8). 이것은 다 영적인 표현이다. 요한은 또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 엄하고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인류 초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나 후에 소돔 고모라 성의 심판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또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인 한 내용이다.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 . . . 요한은 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그는 회개하는 겉모습만 가지지 말고 참으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다. ‘회개’라는 원어( 메타노이아 )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참 회개는 변화된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불의와 악과 거짓의 삶을 청산하고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참된 회개가 없이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며 우리가 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큰 해가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 없는 구원의 확신은 오히려 그를 멸망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는 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이방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이 주권적 처분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그의 은혜이었다.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 . . . 요한은 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을 나무에, 하나님의 심판을 그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에 비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선한 행위들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미( 에데 )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악인들을 마지막 날 지옥불에 던질 것이다. 지옥은 사탄과 악령들 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10-13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 . . .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대답하였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먹을것과 입을 것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참 회개는 구체적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행위의 변화이다. 남을 돌아보며 없는 자와 나누는 것은 회개의 증거이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자, 그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강제로 징수하지] 말라”고 말했다. 세금받는 자들은 나라에서 정한 세금 외에 더 무엇을 징수치 말고 정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옳고 양심적인 일이다. [14절]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 . . . 군병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 그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거짓되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다. 군인들이 칼의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사람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칼의 힘을 악용하지 않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이 맺을 회개의 열매이다. 이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의와 선함과 진실의 행위들이다. 오늘날 정치가나 법조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사업가나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직, 선함, 진실이 요구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였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의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내 보이어야 한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헛된 확신을 다 버리자. 좋은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실히 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다. 주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바울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했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러해야 한다. 모든 불의와 사악과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성도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구원에 합당하게 성실히 달음질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그 구원에 합당하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었는지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15-17절,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 [15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 . . .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사 제국과 헬라 제국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정치적 불만족과 육신적 질병들과 경제적 가난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자요 구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파하시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육신적 건강까지도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모든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17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 . . .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 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요한과 장차 오실 분은 그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분은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은 분이시다. 특히 그것은 기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운동은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고후 4:7-12). 둘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이시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세례는 단지 죄씻음을 외적으로 표시하고 확증한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실제로 죄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중생(重生)시킨다. ‘성령과 불로’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불은 용광로에서 금을 제련하는 데 사용된다. 성령은 죄인을 깨끗케 하신다(고전 6:11; 딛 3:4-6).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키’는 타작할 때에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기구이다. 그의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는 이 세상의 소유주이시며 또한 심판하실 권한이 있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세우신 자가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는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실 것이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쭉정이, 즉 회개치 않고 순종치 않은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에 대하여 “거기는 [악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8).

18-20절, 옥에 갇힘 [18-20절]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 . . . 요한은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는 말은 악인들의 회개치 않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 요한은 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신적 능력의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잘 도우실 수 있다. 이 능력의 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든든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시키신 분,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분이시다. 오늘도 그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렇게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의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알곡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회개하고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은 확실히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나, 계속 죄 가운데 머무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21-22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21-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 .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죄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심을 나타내신 것뿐이다. 그것은 청년 예수께서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첫걸음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가 세례 받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 간구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볼 수 있는 형체로 내려오셨다. ‘비둘기같이’라는 말은 성령의 순결하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본체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이시지만, 두 분 간의 인격적 구별은 있다. 이제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성령께서 오셨다. 그때 하늘로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함께 나타나셨다. 하늘로서 난 소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후에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한번 더 친히 증거하실 것이다(눅 9:35). 성경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23-38절, 예수님의 족보 [23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예수께서는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셨고 13)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실제상의 사실이 아니고 단지 족보상의 사실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요셉의 부친은 헬리이었다. [24-27절]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아람](전통본문)요, 14)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주신(눅 1:4) 증거의 책에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허용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둘 다 정확한 내용임을 믿는다. 그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추측들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족보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의 어떤 부분을, 같은 사람이 다른 두 이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養子) 제도나, 또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수혼(嫂婚) 제도(신 25:5-6)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여러 주석가들의 15) 추측대로 본장의 족보는 아마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 즉 23절의 ‘헬리’는 요셉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장인이라는 말이다. 랍비들의 글에 마리아를 ‘헬리의 딸’이라고 부른 곳이 있다고 한다. 16)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킨 것은 그가 구약시대에 또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증거하였고(사 11:1, 10; 렘 23:5, 6; 30:9; 33:15; 겔 34:23; 37:24; 호 3:5), 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예언하였다(창 12:2-3; 22:18). 더욱이, 누가는 메시아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하신 선언에서도 나타나 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최초의 메시아 예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인간의 죄의 형벌은 인간이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선언하신 대로 여인의 후손을 보내셨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또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자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신약성도에게 하신 약속들, 즉 예수님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 복된 영원한 생명 등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기뻐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친 음성의 증거 곧 그의 직접적인 증거이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무엇을 증거하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때에 이 중요한 증거를 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대해 친히 하신 증거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인류를 위해 보내주셨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독생자를 죄인들의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귀한 것을, 우리의 외아들을, 아니 우리 자신을 드리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큰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차례이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독특한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분명히 사람이셨다. 그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이다. 그것은 가장 놀라운 신비이며 기적 중에 기적이다. 넷째로,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굳게 믿고 소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1-13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 . . .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고 날 수가 다하므로 주리셨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지만, 인간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후에 일하셨다면, 오늘날 성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과 봉사생활, 특히 전도의 일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며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과 풍조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로 불린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요(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다(엡 2: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3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 . . 마귀는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첫 번째 시험은 떡 시험, 즉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본적 문제이다. 사람은 먹는 것을 위해 일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대부분 먹는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이 기본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 마귀의 이 말에서 우리는 마귀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옳은 개념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신약성경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전능하신 신성이 있으시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서 몹시 배고프셨기 때문에 기적의 정당성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그의 신성을 확증하였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록하기를( 케그랍타이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전통본문) 17) ”고 하셨다.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권위로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는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하셨다. 시편 119:105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됨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 됨을 증거하였다(엡 6:17).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육신적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 존재이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으며 행복을 위해 먹지만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떡은 몸을 위해 필요하나 영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떡은 사람의 죄 문제, 평안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죽음이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을 구하며 받자(엡 5:18). 그래야 신앙생활, 봉사생활을 잘 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자. 오직 그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자.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 . . . 마귀는 또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18)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말하였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그것을 주겠으니 내게 절하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였고(고후 4:4; 엡 2:2), 또 ‘온 세상은 악한 자[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였다(요일 5:19). 또 이 세상의 권세, 부귀, 영광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러나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미혹하였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고(약 4:4), 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이다(요일 2:15).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히 그를 물리치시며 대답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전통본문). 19)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건의 순수성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험은 없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마리아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9-11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 . . 마귀는 또 그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또 하나의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진실한 교훈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겠으나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의 추구, 혹은 과장된 기적 체험의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곳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생각이 무의미할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성경 해석의 건전한 법칙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문법적 해석이고,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고, 셋째는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과 문장 구성과 문맥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해석하는 것이고,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참 저자가 성령이심을 믿는다면,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충돌시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제안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다른 부분의 분명한 말씀에 위반되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그것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실상 기적의 필요성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적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경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자.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그를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였다면, 우리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6:41),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근신하라, 깨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5:8).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충만함을 얻고 성경말씀으로 잘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성경 읽기와 성경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권세와 영광을 얻으려고 사탄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려고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14-30절,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심 [14-15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 . .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화력뿐 아니라, 그의 기적의 행위들을 뜻하는 것 같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긴 것으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또 공적 문제들도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요소이다.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는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셨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곧 고향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습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수주일, 성경 읽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에는 예배실(‘바실리카’라고 부름) 앞부분에 강단(‘베마’라 부름)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19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 . . . 예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받고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이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펼쳐서 읽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원어는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니’라는 뜻이다. 전통본문에는 ‘나를 보내사’라는 말 다음에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며’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20)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 영적 문제는 육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마귀와 죄에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죄의 결과로 외적으로,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병,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께서는 이런 인생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를 그 불행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가운데 없지 않았으나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증거하였고(요 1:17),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고후 6:2). [20-22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 . . . 예수께서 회당에서 그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은 다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주께서는 그 날 회당에서 책을 읽기만 하시고 설명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단지, 그는 앉으신 후 회당에 참석했던 자들이 다 그를 주목하자, ‘이 글( 헤 그라페 )(혹은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하신 메시아, 곧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또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를 좋게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마태복음 13:54 이하에는, 그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칠 때, 사람들은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그들은 그 요셉의 아들이 정말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를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유 없이 그를 의심했고 무시했고 배척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시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57에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믿을 만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의 긍휼을 주권적으로 베푸시되,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버려두시고 이방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의 한 장군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 . . . 회당에 있는 자들은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미움은 살인이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는 권세와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육으로 가난해졌고 상했고 포로되었고 눈멀었고 억눌렸던 인생들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곧 평강과 자유와 기쁨의 구원을 주시는 자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아, 곧 인류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이히 여겼고 마침내 분이 가득하여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의 영광을 도무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영접하며 따르자. 또 오늘날도 성도들은 교회의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들을 그들의 인간적 약점만 보거나 바른 말씀을 싫어하여서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직분과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행하며 따라야 한다. 31-37절,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일 [31-32절]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셔서 안식일에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28-29도,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증거한다. 그의 말씀은 매우 권위가 있으셨다. [33-34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 . .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들을 일으키는 악령이다.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더욱 확산되고 왕성하여진다. 그 사람은 크게 소리질러 말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였다. 귀신 혹은 악령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지는 못하나, 그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35-37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 . . . 예수께서는 꾸짖어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주께서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신 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 대한 진리가 공개적으로 증거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 사실이 아직 공적으로 증거되지 말아야 하였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으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그의 능력과 권세는 확실히 신적 능력과 권세이었다. 이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 38-39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8-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 . .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독신자가 아니고 결혼한 자이었다(고전 9:5).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께 구하자 예수께서는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증거한다(마 8:15; 막 1:31). 주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 열병은 예수께 복종하였다. 그 병은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또 완전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확실히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 즉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생명체가 그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시다. 생물계와 무생물계가 다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한다. 40-41절,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치심 [40-41절]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 . . . 해 질 적에 각종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자를 데리고 나아오니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받는 자나 보는 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그리스도] 21)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마 8:4; 9:30). 그 이유는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고치기 위해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전체적인 문제 곧 죄사함을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기독교는 외적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 기적, 곧 회개와 믿음, 구원, 인간 변화, 새 사람 됨을 전한다.

42-44절, 전도하심 [42-44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말리려 했으나 그는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씀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것은 마귀의 나라와 대조된다. 마귀의 나라는 어두움과 죄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빛과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뜻과 그의 말씀을 지킨다. 자신의 전도 사명을 밝히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22)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를 믿고 구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며,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으며,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심지어 열병에게도 명령하셨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의 능력 곧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셨다. 그는 병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 오늘도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나 좀더 넓게 말한다면 밥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완전한 치료, 곧 구원을 위하여, 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주셨고 그것과 더불어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며 또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자. 5장: 죄인을 부르심 1-11절,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다. [1-2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 . . . 무리가 둘러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하나의 명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그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밤에 고기를 잡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 베드로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 . .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이었다.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형식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은 청중이 되었다. 그 자신도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다.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다. [4-5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 . . . 그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대답하였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증거를 따라 이미 예수님을 알았던 자이었다(요 1:41-42).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몬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 . . .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찢어지다’는 원어( 디에레그뉘토 , 미완료과거)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친구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8-11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 . . . 시몬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였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존칭어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진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영광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다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일 뿐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참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으셨다. 그들은 다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임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참으로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이 허무한 세상임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과 천국이 이 세상과 돈보다 귀함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택하신 영혼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는 그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셨고 배 위에 앉으셔서 가르치셨고 시몬과 그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신기한 고기잡이를 통해 시몬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나 가득차게 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속의 물고기떼를 주장하셔서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그 물고기들이 잠간 동안에 그렇게 많이 잡히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그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깨닫고 믿는 자마다 그를 따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릴 것이다. 12-16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 . .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나병, 한센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였다. 나병 혹은 한센병은 피부를 붓게 하고 모양을 보기 싫게 만들고 피부색이 변하는 병이다. 이 병은 얼굴과 팔과 다리 표면의 신경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피부가 데거나 상처가 나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플레레스 레프라스 )[나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 병은 온몸에 퍼져 몸을 보기 싫게 만들었고 온몸의 감각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에게 나아갔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렀다. 이사야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소원을 말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많은 병고침의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았거나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구원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하였다.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 . .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 그는 마치 그 일 때문에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 같았다. 그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온몸에 나병 환처(患處)가 있는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병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병이 곧 떠났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하나님의 치료만이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14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 . . 예수께서 그를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병고침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셨다. 그의 임무와 사명은 다른 데 있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인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본다. [15-16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 . . .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힘을 얻어야 한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온몸에 나병이 가득한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나병은 곧 깨끗해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나 사명은 병고침이 아니셨다. 그는 불쌍한 나병 환자나 기타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의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주된 임무와 사명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심으로 그의 사명을 수행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목사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능력을 받는 길이다. 17-26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 . . .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고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였다.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求道者)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 노모디다스칼로스 )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 노미코스 )나 ‘서기관’( 그람마튜스 )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물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진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곳에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는 병환자들이 많았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주의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성(神性)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리킨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 . .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보인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고 또한 믿음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 . . .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을 가리킨다. 아니, 거기에 그 병자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아마 그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자의 믿음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수고하였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성경에서 병과 죄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물론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이 근원적으로는 죄에서 왔다. 각종 병도 그러하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병이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병은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로 세상에 있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자들도 많고 병원들도 많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자들도, 병원들도 없을 것이다. [21-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 .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의논한다’는 원어( 디아로기조마이 )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다’는 뜻으로 그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사람의 은밀한 의논까지도 아신다.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이 참람하고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만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23-24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러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인자(人子)는 그의 인성을 보인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사람이신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신적 사역을 하셨다. [25-26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 . .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었다. 또 ‘곧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이 일은 인간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시는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죄사함의 권세를 그가 가지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병의 관련성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건강을 누릴 것이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병 낫기를 기도할 수 있다(약 5:16). 그러나 우리는 병과 죄의 관련성을 알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도 본받자. 그들에게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친구에 대한 사랑, 서로 협력함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27-32절,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심 [27절]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 . . . 예수께서는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이었다. 그가 세관에 앉은 것은 그가 세금을 받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다(삼상 16:11-13). ‘나를 좇으라’는 말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초청이 아니고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사명의 부르심이었다. 주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렇게 부르셨다(마 4:18-22). 주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일꾼들을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위이셨다. 그 부르심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다.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했을 것이다. 여하튼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였다(마 4:20, 22; 눅 5:11).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유여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과 유여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지내며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를 통해 밝히 주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대신하여 그 일을 계승할 것이다.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 . . .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 . .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잘 모를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성도의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의 차원이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교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영적 교제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심히 불경건하고 무지하고 죄악되었을 때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도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다.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인과도 만나야 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해야 한다. 전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죄인들과 만나야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그들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만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여는 빌리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방법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진리에서 탈선한 이단자들이며 그런 이단자들은 회개와 전도의 대상이지 결코 전도 활동의 협력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며, 신약 교회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힘과 물질을 다 사용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귀한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레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세상적 안정과 물질적 여유를 다 포기하였다.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 그것은 가장 큰 보화이다. 우리는 남을 잘못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잘못 비난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인하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33-39절, 금식에 대하여 [33절]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 . . .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왜] 23)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저희’는 문맥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함께 이런 질문을 한 것 같다(마 9:14).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을 본받아서(마 11:18) 또 더욱이 지금 그들의 선생님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성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요 3:29).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가장 기쁜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기쁜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절]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극기(克己)와 자기 부정의 삶이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핍박과 환난의 현실 가운데서 항상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초두에 기록된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16-17). 또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유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 장로들을 장립할 때 금식하였다(행 13:2-3; 14:23). 교회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장립식에 축하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둘 다 보존되리라]. 24) ” 이 두 비유는 새 것이 옛 형식에 적합하지 않음을 보인다.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자기 자신에 비유하셨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들은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 즉 메시아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구약의 내용은 율법이며, 그것은 율법적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들 중 대표적인 것은 성전 제도와 제사 제도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은 복음이며, 그것은 새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옛 생활 방식에 맞지 않고 복음의 새 생활 방식에 맞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려야 했으나,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진심의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뿐이다. 구약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규례들에 비하면, 신약의 형식은 아주 단순하고 영적이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영]에 있고[혹은 ‘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이나 신앙생활의 형식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 . . . 예수께서는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25)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 26) 좋다 함이니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옛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에서도 그렇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에서도 그렇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 21:21-26)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간에는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고 마셨듯이, 오늘날 그를 믿는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누리지 못하지만, 그를 아는 자마다 그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빌 4:4). 우리는 종교적 규례와 의식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신약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의 구조나 신앙 생활의 형식은 구약 교회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것들에 비교하면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진심으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섬기지만, 또 의와 선과 진실 안에서 기쁨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법을 행해야 한다. 6장: 가르치심 1-11절, 안식일 문제 [1-2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 . . . 안식일에[두 번째 첫 안식일에](전통본문) 27)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했다(눅 4:16, 31).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안식일들 말고 두 번째 언급하는 첫 안식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제자들의 행위는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그는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에게 그 떡을 주었고 그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7일이 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 . . .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 그는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품고 분노하며 함께 의논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자.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제7일 토요일 안식일은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그 날에 물건을 사고 팔거나 육신적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2-16절, 사도들을 택하심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 . . . 이 때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열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 밤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에 기도하셨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특히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산은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악되고 부족 투성이인 사람들의 사회는 항상 시끄럽고 복잡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산은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신비한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를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신 그는 참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우리는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빌 4:6, 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13-16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이었다. ‘사도’라는 원어( 아포스톨로스 )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엡 2:20).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사역의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기타 교리들과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서신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13절),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14, 15절). 여기에 사도들의 직무가 나타나 있고 그들을 세우신 주님의 의도도 드러나 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주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고 말하였다(4절).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 진리를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14).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는 일반 성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목사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위해 쓰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은 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반 성도들은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을 존중하며 복종해야 한다(살전 5:12-13; 히 13:17).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요 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요 6:70), 마침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요 13:27)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마 26:15). 어떻게 이런 사람이 열두 제자들 중에 포함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통해 배신의 고통까지 경험하실 것이다. 가룟 유다가 사도들 중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목사들과 장로들 가운데 가룟 유다 같은 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런 자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주께서는 일찍이 거짓 교사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행위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마 7:15-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실생활에서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 자신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실함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언제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종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하겠는가! 또 모든 성도는 기도로 늘 승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많이,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풍성히 거하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주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임을 자신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은 오직 그의 행위들을 통해 분별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종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들을 돕고 그들을 따르며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와 은혜와 평강 가운데 힘있게 잘 진행될 것이다. 17-19절, 병자들을 고치심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추측하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 28)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로 보이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신 후에 되어진 일이라고 보여진다. [17절]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 . .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는데, 그의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교훈을 행하며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8-19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 .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온 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를 만지는 모든 사람이 나았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가 행하신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증거들이다. 20-26절,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2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본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잘 깨닫게 된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육신적 가난과 슬픔이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고린도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으며 우는 자가 웃게 될 때는 언제인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며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복은 더욱 크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 영원히 배부름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23절]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다. 악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였고, 또 그의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고난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할 때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인데,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시대에도 참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주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24-25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 . . . 예수께서는 화가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도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義)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영원히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참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인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들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힘과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움과 고통과 찔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 바울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졌고(고후 6:8), 또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딤후 1:15-18).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병자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것들은 기적들이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선생들의 가르침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현세 중심, 세상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이었다. 주님의 제자는 육신적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또 그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항상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고 실행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27-36절, 원수를 사랑하라 [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 세상에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더러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구약의 율법 레위기 19:18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율법의 말씀보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29-30절]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그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도적질이나 강도질이나 폭력이나 살인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라일(J. C. Ryle)은, 이 말씀은 범죄의 억제를 금하신 것이 아니고 보복 정신을 정죄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29)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고 범죄의 처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다거나 그들의 직분이 부당하다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평화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하신 것이나,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가복음 22:36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심으로 칼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칼을 가지고 사회 정의를 시행함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경우에도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인권을 짓밟지 말고 그를 학대하지 말아야 하며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이 아니고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23:2). 그러나 합법적 전쟁의 경우에도, 먼저 평화를 제안하고 불가피한 폭격 외에는 자제하고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의 행위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양보를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하며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사실, 세상의 악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6:52). 우리는 악한 자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로마서 12:17-21은 이 원리를 잘 교훈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롬 5:6-8, 10).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 명령이 비록 높아 보이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행 7:60).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을 자기 아들로 삼았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잘 참았다.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야 한다.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최선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대인관계에서도,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먼저 잘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32-34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빌린다’는 말은 ‘빌려준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본문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신다. 성도들이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의 교제는 순수한 것이 좋다. [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상이 클 것이다. 그 상은 천국에서의 상을 가리킨다. 천국에서 성도가 받을 상급은 지상에서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에 대한 약속으로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신다. 또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27절부터 36까지의 말씀은 요약하면 서너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악한 자를 선대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남이 우리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남에게 먼저 잘 해주라는 것이다. 셋째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가 없이 빌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본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위요 처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 37-49절, 비판치 말고 선을 행할 것 [37-38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치 말라’는 교훈은 어떤 경우에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안디옥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판단하고 바른 길을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5:20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이 이단을 배격하라고 가르칠 때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전제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교회적 판단을 금하신 것이 아니고 개인적 판단에 대해 하신 것이며(매튜 풀), 그것도 언제든지 비판치 말라는 절대적 금지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남의 말이나 견해나 행위의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게 충고하거나 그를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비판이나 정죄 자체가 악은 아니다.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들 즉 목사나 장로들은 공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교인들을 판단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위치에 있다. 남이 비판을 받을 만하다면, 우리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야고보서 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실상 다 부족이 많은 자이다. 만일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우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둘째로,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어려운 형편도 있다. 특히 우리는 남의 은밀한 마음이나 행위에 대한 동기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고린도전서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셋째로, 우리가 비판치 말아야 할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일들의 경우도 비판치 말아야 한다. 로마서 14:1-5,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또 성경적으로 명백한 잘못인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나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일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단지 개인적으로 은밀히 충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은 또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버리고 남을 용서하고 구제하라고 교훈한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와 구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이신 명확한 뜻이다. 그것은 성도의 중요한 생활 규칙의 하나이다. 특히, ‘준다’는 말씀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주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음을 가리킨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이라는 표현은 밀가루를 되에 가득히 채워 주는 것 같은 풍성한 보상을 묘사하신 것이다. [39-40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소경이’라는 말은 무지한 인도자들을 가리키고, ‘소경을’이라는 말은 무지한 교인들을 가리킨다. 구덩이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와 그로 인한 낭패를 가리킨다. 진리의 바른 지식과 바른 삶이 없이 남을 인도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그가 인도하는 자들도 망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도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런 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도 되지 말아야 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는 말은 선한 뜻에서도, 나쁜 뜻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선한 선생에게서는 선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울수록 좋으나, 악한 선생에게서는 악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우지 않을수록 좋을 것이다. [41-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하고 ‘들보(통나무)’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고친 후에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고친 후에 형제를 권면해야 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지만(잠 27:5), 단지 자신의 큰 결함이 없을 경우에 그러한 책망이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37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교회 문제, 진리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신을 남을 용서하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지식과 실천이 없이 남을 지도하고 권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남의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큰 부족을 깨닫고 고친 자만이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을 고쳐줄 수 있다. 43-49절, 행위의 중요성 [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를 비유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같이가기 때문에, 사람의 인품은 그의 말과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평소 훈련을 통해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하고 선해야 한다. [46-49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전통본문) 30)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진대, 우리는 그의 가르치신 바들을 행하려 해야 할 것이다. 또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환난이나 재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튼튼한 기초 없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다. 그는 환난의 날에 낙심케 될 것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계명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주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중요함을 교훈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선한 말과 행위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또 순종의 행위는 집을 튼튼히 짓는 것과 같다. 평소에 행함이 없는 자는 환난 중에 실패할 것이지만, 행함이 있는 자는 실패치 않고 승리할 것이다. 7장: 기적들을 행하심 1-10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심 [1-3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 . . . 예수께서는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기를 마치신 후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과 시몬의 집에서 중한 열병으로 아파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과 해 질 때 집에 모여든 여러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하였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었다. 그는 물론 로마 사람이었다. ‘사랑하는’이라는 원어( 엔티모스 )는 ‘소중히 여기는’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이다. 충성된 종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병이 들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 종은 결국 고침을 받았다.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다. 물론 그 종도 주인에게 충성했겠지만, 그 주인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이 백부장은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5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 . .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였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두 번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과 사랑이 가는 곳에 돈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돈을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 . . . 예수께서 함께 가실 때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그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고백한 것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네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

[누가복음 11장 설교말씀] 예수님의 기도 생활(눅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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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1장 설교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도 항상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셨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항상 충만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성도인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평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눅 11:1)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시자 한 제자가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하고 청하였습니다. 필요한 질문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바로 하려면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대해 알아보며 나의 기도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예수님은 아침과 저녁에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라”(막 1:3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라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물에 계시다가”(막 6:46,47).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는데 그전날은 가버나움에서 병자도 고치시고 말씀도 전하셨습니다. 사람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셨고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사정에 따라 다르겠으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기도하는 새벽기도가 좋습니다. 또 저녁에 아무리 피곤하시더라도 기도하셨습니다. 하루 생활을 하나님께 보고하였으며 기도로 마치셨습니다. 저녁에도 기도를 잊지 말고, 하루 생활을 하나님과 같이 해야 합니다. 하루 생활의 계획은 하나님 앞에서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일을 꼭 같이 힘쓰셨는데 우리도 낮에는 일을 아침과 저녁에는 기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되며, 기도하고 일하며 일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많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사 사도라 칭하시고 “(눅 6:12,13) 열두 제자를 택하기 전에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눅 9:18) 자기의 메시아됨을 나타내시기 전에 많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는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했다. 메시아로 오신 것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시고 다른 사람에게 이르지 말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에, 새 계획을 세울 때에, 중요한 작정을 할 때에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새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조직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이루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3.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크게 임하셨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노라”(눅 3:21,22).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충만하셨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순절에도 제자들이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성령이 충만했으며 개인도 기도할 때에 성령이 충만하고 교회도 기도할 때에 성령이 충만합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고 내려올 때에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성령충만, 성령의 역사,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적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4. 예수님은 큰 위기, 큰 고난 곧 죽음을 당면할 때에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놓으시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맡기시고 그리고는 침착한 태도로 담대히 원수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로 정신을 무장하신 것처럼 우리도 위기를 당할 때에 기도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은 위험합니다. 누구나 일생에 몇 번 위기를 맞는데 기도의 비결을 배울 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은 기도로 최후를 마치셨습니다.

십자가 칠언 중 세 말씀이 기도이고 첫 말씀 마지막 말씀이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우리는 무슨 말로 최후를 마쳐야 합니까? 기도로 마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평생을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 참 사랑이십니다. 인간적 견지에서 그 생활을 살펴볼 때에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시면서도 기도하셨는데 죄 있는 우리는 더더욱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옛날부터 오늘까지 기도 없는 성결, 고전, 고귀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밀레의 저녁종 그림은 부부가 일하다가 저녁 종소리가 나니 일손을 놓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참인간의 모습, 행복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일어나시고, 기도로 주무시고, 기도로 일하시고, 기도로 목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교훈을 배워 실천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강해설교말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딤전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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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

<누가복음 11장 흐름정리>

흔히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기도문이 언급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도 나오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기도문을 가르치신 동기가 밝혀져 있다는 것이다. 13절까지 기도의 원리가 나타나 있으니 잙 읽어보자. 한편 11장이 끝날 때까지느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트집과 비난이 줄곧 이어지고 있다.

<누가복음 11장 줄거리>

1. 그리스도가 기도를 가르침.

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겠다고 보증함.

14. 그가 한 벙어리 귀산을 쫓아내고, 불경한 바리새인들을 책망함.

28. 누가 복 있는 자인지 일러 줌.

29. 무리들에게 전파함.

37. 겉으로 거룩한 척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을 꾸짖음.

<누가복음 11장 도움말>

* 1절 :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당시 랍비들은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주곤하였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 5절 : 밤중에.

중동 지방에서는 낮의 열기를 피해서 밤에 여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 11, 12절 : 생선, 알.

팔레스타인 지역의 주식은 떡, 생선, 계란이었다.

* 12절 : 전갈.

독전갈과의 곤충. 길이는 6cm 정도이며 독침이 있다. 고문용으로도 사용했다. 원수에게 당하는 고통에 비유하기도 한다.

* 15절 : 바알세불.

사단에 대한 별칭.

* 27절 : 태, 젖.

유대인들은 흔히 신체의 일부를 언급하여 인격 전체를 가리켰다.

* 38절 : 손 씻지 아니하심.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 오는 규례였다.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었으며, 식사 도중에 다른 음식으로 바꾸어 먹을 때에도 손을 씻었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누가 복음 11 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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