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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화 |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이찬수 목사 : 갓피플Tv 254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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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국민일보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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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1/1/2022

View: 4076

[스크랩] [난해]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바른 해석은? – 다음블로그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이 말씀은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기위해 날마다 죽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면 죽을 각오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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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1/2021

View: 7953

[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코이네자료실

성격이 급한사람일수록 혈기를 잘내고 실수를 잘하게 되는 것이다.베드로는 성격이 급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을때 칼을 빼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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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inedata.tistory.com

Date Published: 6/18/2022

View: 6899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29-34) – 기멀전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헬라어로 ‘카트 헤메란 아포트네스코’라는 이 말씀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의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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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7/7/2021

View: 9791

[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 Pensées

[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1. 말씀읽기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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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11/12/2022

View: 8291

날마다 죽는 신앙의 신비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

이러한 우리들의 삶에 깜짝 놀랄 고백을 사도 바울이 보여줍니다.“나는 날마다 죽노라”이 말씀을 의역하면“나는 매일 죽으며 삽니다. 나는 매일 죽음에 노출되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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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1/16/2022

View: 9040

예화창고 – 날마다 죽노라 – 햇볕같은이야기

여러가지 이유로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중간에 멈출 수 밖에 없는 실패한 생애가 된다. 누에의 모본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날마다 새로와 지는 경험을 체험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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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yw.pe.kr

Date Published: 7/8/2022

View: 512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이찬수 목사 : 갓피플Tv 답을 믿으세요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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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ou.covadoc.vn

Date Published: 6/26/2021

View: 7160

“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 아이굿뉴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탄식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육을 죽이기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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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goodnews.net

Date Published: 11/5/2021

View: 7486

천국에 가기 위해 필수조건 – 예화

“죽어야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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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nebody.org

Date Published: 2/5/2022

View: 6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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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  - 이찬수 목사 : 갓피플TV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이찬수 목사 : 갓피플TV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화

  • Author: 갓피플TV
  • Views: 조회수 57,2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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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4.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NuvWsTIpK0

[오늘의 설교]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국교회가 맘몬주의, 교회세습, 교권주의 등으로 세상 속에서 참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조롱하고 비난합니다.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습에 실망해 교회를 떠납니다. 서글픈 일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모두가 높아지려하고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향한 고백을 삶으로 살아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도 매일 죽여야 할 ‘자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듯이 우리도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교회가 삽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목회는 내려놓고 죽는 훈련이다. 성도들을 이기는 것은 내가 지는 것이고, 성도들에게 지는 것은 내가 이기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실천하기까지 사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가 죽어야 성도가 살고, 성도가 죽어야 교회가 부흥됩니다.”

왜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이 어려울까요. 우리 안의 죄성은 자기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겸손이 중요하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머리론 알고 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죽는다’는 이 구절이 자기 삶에서 현실로 이뤄졌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는다고 해서 말씀이 이뤄졌다고 속단해선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자각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낮아지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었던 앤드류 머레이는 “반항은 죄인의 체질이다. 순종은 힘든 학습”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의미는 그의 눈높이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순종은 나의 기준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준에 맞춰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부인이 참된 순종입니다. 나의 바람과 기대를 내려놓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나를 부인하고 낮아지는 것은 힘든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셨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낮아지는 훈련을 통해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바울 등이 그렇습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아래 말씀 회복과 영적 회복을 위해 운동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원조는 요시야 왕입니다. 그는 구약 시대에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말씀 앞에서 옷을 찢으며 회개했습니다. 우리도 말씀 앞에서 눈물로 통곡하며 우리의 고집, 교만, 죄악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위해 인간으로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낮아지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삶을 실천합시다.

김현길 목사

god saves us

[난해]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바른 해석은?

고전15장 29절-34절

글/扈一麥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장 31절)

고린도전서 15장을 가리켜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부활장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1절-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임을 논증합니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믿음을 각자가 다 가지고 있는 줄로 압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12절-28절에서 신자의 부활에 관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첫 열매로서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믿으십니까? 아멘! 우리는 장차 있을 우리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과거에 대한 믿음이라면, 신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미래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본래 초대 교회는 매 주일이 부활절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약 시대 안식일과 달리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된 이유 자체가 주님이 그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매주일이 부활절이었고, 매일 매일의 삶이 부활을 경험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의 삶은 언제부턴가 부활절은 일년에 한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적인 기념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 당시에 이미 그러한 현상들이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온데 간데 없고, 하나의 맥빠진 의식만 남아있는 절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부활절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부활절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이시간 본문 말씀을 통해 부활절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고, 삶이 부활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두가지 경우 모두 ‘믿는다’는 것은 현재를 의미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을 믿든, 미래에 일어날 신자의 부활을 믿든, 그 믿음의 시제는 항상 현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영원한 현재입니다. 믿음 뿐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삶 자체도 항상 현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부활의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부활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게 배우고, 이시간 이후로 부활의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이 말씀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라는 말은 휘페르 (υπερ) 라는 헬라어 전치사인데, 이것은 ‘위하여’ 라는 말 보다는 “앞에서”, 또는 “위에서” 라고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죽은사람을 위해 대신 세례를 받는 예식을 행하던 것은 당시에 유행했던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자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죽은자를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관련자료보기= [난해]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침례] 받을 수 있는가?

문제는 의식을 행하면서도 실제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앙에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절이 되면 여러 가지 의미있는 행사를 갖고, 의식을 거행합니다. 고난 주간에 금식을 하기도 하고, 특별 새벽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려보기도 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지거나 채찍에 맞거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가운데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삶은 계란을 먹는 것으로 부활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의식들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의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1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장차 있을 성도의 부활, 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의 믿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이 지금 현재도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현재 살아계신 예수님과 내가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생명의 관계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도나무의 진액이 가지에게 공급되어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예수님의 은혜와 생명이 지금도 나에게 공급되고 나를 통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30-32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들의 삶과 비교하여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과 부활의 믿음이 없는 사람의 삶을 대조합니다. 매일 맹수들과 싸워야 하는 검투사들의 삶은 하루 하루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삶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일이면 죽을 목숨, 먹고 마시고 즐기자!” 라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들의 삶을 자신의 삶,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대조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들의 삶과 닮은 꼴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당시 로마나 에베소에서 고린도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건이나 풍습 등을 예로 들어서 알기쉽게 설명하였습니다.

특히 바울 자신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카타 헤메란 아포드네스코)라고 하므로써 참 생명의 삶이란 내가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며, 주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의 감동 감화를 따라 사는 삶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쉴새없이 파도가 덮쳐오듯이 고난과 핍박이 그를 덮쳐왔습니다. 특히 그는 에베소에서 검투사가 원형경기장 안에서 맹수들과 싸우듯이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문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까? 31절을 읽어 보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어떤 면에서 그의 삶은 검투사들과 같았습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눈앞에 일어나는 상황만 보면, 하루 하루가 너무 절망적이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삶,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때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런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어떤 때는 너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고후1:8,9) 이때마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면, 꼭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개입하시고, 성령께서 그를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은 줄 알았는데, 벌떡 일어났습니다. 넘어진 줄 알았는데, 오뚝이처럼 우뚝 섰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검투사로 에베소의 맹수들과 싸웠습니다.

우리의 삶이 원형경기장에 갇혀서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의 삶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 앞에서 절망하고, 상황에 눌려 낙심한 나머지 실컷 먹고 자고 TV나 영화나 보며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신앙생활도 아무 생각 없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럭저럭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다가 죽으면 천국 가겠지 뭐~” 이런 신앙생활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이런 신앙에서 무슨 경건의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무엇보다 부활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현실 도피에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로 도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래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과거를 회상합니다. 잘 나가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왕년에 어쩌구 저쩌구’ 하는 자기 자랑을 하며 위안을 찾습니다. 또한 과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집착합니다. 과거의 문제 때문에 현재 상황이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후자는 미래에 엄청난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꿈은 이루어진다!” 라는 자기 확신 가운데 현실의 절망을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삶은 항상 현재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으로 ‘추억 속에 존재하는 현재’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기대 속의 현재’입니다. 따라서 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가 힘들면 과거의 기억도 어두워지고, 미래도 암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가 잘 나가면 과거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미래의 모습도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은?

왜냐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치열한 삶,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할 마음을 먹고 살았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이 말씀은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기위해 날마다 죽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면 죽을 각오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부활의 믿음으로 살 때 누구든지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 삶이 복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은 만남으로 율법의 죄가 다 용서 되었고, 복음을 전하다가 죽기를 원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를 자기를 왜 쳐서 복종하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도덕적인 죄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요즘 이 말씀을 곡해 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는데 사도바울은 복음 전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어도 좋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검투사가 맹수와 싸우는 것 같이 우리도 세상의 맹수들과 싸워서 승리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성도들이 자기 십자가를 집니까?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드는 마귀에게 잡혀 먹습니다. 지옥갈 죄의 문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 받은 이의 삶은 매일 매순간 우리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맡은바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삶이 매일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루를 잘 사는 것이 곧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탁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 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하루만 죽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만 잘하면 됩니다. 인생의 내일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만 주님 말씀에 잘 순종하면 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요? 주님의 증인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오늘 하루만 참고, 오늘 하루만 헌신하고, 오늘 하루만 희생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일 세상이 폭발하여 없어진다 하여도 밤에 눈을 감을 때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죽는 심정으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다시 부활하는 심정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위해 죽기를 각오 하여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1장 22절-28절에『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날마다 죽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고 복음 전하기 위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33,34) 악한 동무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은 언제나 동일한 패턴입니다. “오늘은 쉬고, 내일 하라~”는 것입니다.특히 믿음이 아닌 것으로 다가와서 그럴듯하게 복음을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지옥갈 죄를 다 용서 받은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로 인해서는 육신의 생사화복만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는 육신적으로도 잘 살아야만 합니다. 복음전하기 위해서 참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상급이 있습니다. 과거에 잘 한 것 자랑하지 말고, 미래에 잘 하겠다고 맹세하지 말고, 오늘 잘 해야 합니다. 특히 복음 전하는 것을 내일 하겠다고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부활의 믿음으로 오늘 하루만 잘 합시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날마다 죽기를 원합니다.扈ⓗ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 (일맥)

메모 :

[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세상에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힘들고 세상을 사는것도 힘들지만 더욱 힘든것은 죽는것이 제일 힘듭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을때 잘죽는것도 큰 복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때 마귀가 와서 끌고가려고 하는데 따라가지 않을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땀을 뻘뻘흘리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우지 모릅니다. 세상사람들은 살려고 발버둥치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안에서 죽고 새로 내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왓습니다. 예수님은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느니라 고하셨습니다,내가 죽는것만큼 내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고 그리스도께서 연사하시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신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습니다. 함께란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실때 우리도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나혼자 죽은것이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자살하는 연습을 하라는것이 아닙니다. 자살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끊는것이기 때문에 자살하면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가롯우다는 예수님을 은30냥에 팔고 나무에 목에서 자살했기때문에 지옥에 갔습니다. 어던 사람은 예수믿는 사람도 살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는데 분명히 자살은 살인아니 같기 때문에 지옥간다는 것을 알고 마음대로 죽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사람은 육과 영이 있는데 육이죽으면 영이 살고 육이살면 영이 죽게 되어잇습니다.롬8;5-6 육신을 좃는자는 육신의일을 영을 쫏는자는 영의일을 하나니 유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샌자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햇습니다.우리육신은 자꾸 세상으로 끌고갈려고 합니다, 그래서 영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롬8;13에도 너희가 육신대로살면 반듯이 죽을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니라 고 햇습니다.

그러면 육체에 속한 일이란 어떤 것이 잇습니까?

갈5;19보면 육신이 일은 현져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맺는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짖는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한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힁에게 경계한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일을 하는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 햇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어야할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혈기가 죽어야 합니다.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도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성격이 급한사람일수록 혈기를 잘내고 실수를 잘하게 되는 것이다.베드로는 성격이 급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을때 칼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이 귀를 잘라서 떨어뚜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충만하고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했지만 인내하면서 끝까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혈기가 한꺼번에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매일매일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잘해 놓고도 혈기를 부리면 열심히한일이 아무 가치가 없게됩이다. 다된 밥에 재뿌리다는말이 있듯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경우가 잇습니다.

마5;5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당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이요 .

혈기를 죽이게되면 온유한자가 됩니다. 배가고파서 화가나있는 사자를 보세요 얼마나 무섭습니까? 구러나 잠들어있는 사자는 얼마나 순합니까? 두얼굴가진 사나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이 같은 얼굴인데 두얼굴이 될수있다.어던때는 천사의 얼굴이 된;도 하고 어떤때는 악마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정말 은혜 충만하고 웃으면서 말할때는 천사의 얼굴 같은데 화가나서 싸우는 얼굴을 보면 악마의 얼굴과 같습니다.

너희는 어데게 한 우물에서 쓴물과 단물을 내겠느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게서 만드신 얼굴을 가지고 천사의 얼굴과 마구의 얼굴을 해서는 안되겟습니다. 일곱 집사가운데 한사람인 스데반 집사는 마지막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났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지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의 얼굴을 볼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화가나서 마귀의 얼굴이되어서 싸울려고할때 내앞에 예수님이 얼굴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절대로 혈기를 부리거나 화를 낼수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욕심을 죽여야 합니다.

약1;14 오직 각사람이 시험을 받는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돔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욕심은 결국 죄를 낳게되고 죄가 싸이면 결국은 사망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사람이 시험을 받는것은 그랬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느것은 욕심때문에 시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반듯이 나보다 낳은 사람을 바라볼대 생기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은 절대로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5자평짜리 집에 살고있어도 100자리 집에 사는 사람다을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속옷하나에도 몇십만원짜리 옷이있다고 하는데 글쎄요 그런옷을 입으면 목욕을 안해도 되는 옷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욕심다이 물질에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같습니다.

인가의 자가심은 끝이 없습니다. 얼마난 깊은 지 아무리 채워도 차지를 않습니다.평새채워도 차지를 않습니다. 밑빠진 독에 물붙는것과 같습니다.아파트 한채 가지고 있으면 한채도 없는 사람도 있는데 두채 가지고 싶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신청을 합니다. 별로 필요도 없는데 차도 두세대씩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것들은 모두 욕심이 가득차게됨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필요 없는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욕심을 부려도 좋은 욕심을 갖어야 합다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욕심 은혜를 많이 받겠다고화는 욕심 신앙생활을 좀더 잘해 보겠다고하는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일년에 우리교회에서 전도를 제일 많이할가하는 욕심을 가져야합니다. 어더게하면 하나님게 좀더 많이 드릴가하는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돈을 벌어도 내 배만 채우기 위해서 버는것은 잘못된 욕심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 나라를위해서 쓰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스기위해서 돈을 벌겠다고하는 욕심은 잘못된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하는것도 높은자리하나얻어서 목에다 힘주고 다른 싸람들을 부리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많이 배워서 하나님의 영광을위해 쓰고 억울하고 배우지 못한사람들을위해 쓰고자 배우는 욕심은 좋은 욕심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욕심은 날마다 죽여야 합니다.

셋째;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잠언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햇습니다. 인가이 교만하여 하나님과 같이되고자 선악과를 먹다가 저주를 받게되엇습다다.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실은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은 절대 쓰지질 않습니다. 쥐고리만한 돈조금 있다고 교만한사람 얼마나 보기 실은지 모릅니다.

별것도 아닌 지식좀 있다고 , 자기집좀 가지고있디고 , 자기가 좀 잘생겼다고, 교만한사람 얼마나 보기 추한지 모릅니다. 요즈음은 별것도아닌 말단 공원자리하나 앉아있어도 얼마나 목에 힘을주는 사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는 절대 겸손해야 합니다. 수양버들처럼 부드러운 너무는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불어지지 않지만 포플러처럼 곧게 서있는 나무는 허리가 독 부러지고 맙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간는 하나님께서 부러드려 놓게되면 얼마난 아픈지 모릅니다. 하나미앞에는 아무리 세상에사 가진 것이 많이있다 할지라도 마우리 많이 배웠닥 할지라도 하나님앞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라야 합니다.

이 교만도 날마다 죽여야 합니다. 항상 교만이 생길수있기대문에 날마다 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찬송가 330장 3절에 보면 교만한을 내버리고 예수게로 나옵니다. 라고 되어잇습니다. 우리가 주님게 나오가때는 교마난 마음을 내버리고 나와야 합니다.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물리치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햇습니다.

넷째;정욕을 날마다 죽여야 합니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셧으니 가고 하셨습니다….마음속에 정욕이 부타게되면 육신을 더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얼마난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위해서 술집으로 캬바레로 호텔로 찾아다니는지 모릅니다. 사실 육신의 정욕도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먹고 마셔도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편을 다섯이나 바꿨어도 육신의 정욕을 채울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을 죽여서 절제할줄 알아야 합니다.

정욕을 죽이지못하면 짐승과 같이 됩니다. 짐승은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하는것이 짐승입니다.

약4;3 너가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스려고 잘못구함이라고고 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우리가 구해도 육신의 정욕을위해 쓰려고 구하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기 대문에 우리는 날마다 육신의 정욕을죽이는 연습을해야합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면서 자싸기 자신을 철저히 죽이는연습읗했습니다.어제까지의 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깡패나 살인강도가 오늘 예수믿었다고 금방 성자가 되는 것으 아니다 날마다 옛사람이 죽는 훈련을 통해서 주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날마다 옛생각,성품이,습관이 죽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말마다 죽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by 코이네자료실

[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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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1. 말씀읽기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2. 묵상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버렸습니다. 엄밀하게 그리스도와 맞바꾸었습니다. 오늘은 앞선 묵상에 포함된 9절을 포함하여 11절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

딕 루카스는 9절을 주해하면서 그가 포기한 의와 그가 바라는 의로 명징하게 구분했습니다. 그가 버린 의는 ‘율법의 의’입니다. 율법은 육신에 속한 것이며, 거룩하고 의롭지만 결코 하나님을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 본다면,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육체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육체에 속한 것을 가톨릭의 공로와 비교했던 것입니다. 그럼 그가 바라는 의는 무엇일까요? 루카스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그것은 육체 속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의 문제로 넘어가야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것을 신자의 것으로 만드는 수단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그럼 어디서 났는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이 표현은 깊이 사색하지 않아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나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과 그리스도가 하는 것을 동시에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불가피하게 빅딜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고민은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혼의 변화, 세계관의 변혁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내 안의 우상인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 그리스도로 인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전인격적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랄드 호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련의 명제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신뢰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예”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전인격적으로 예라고 긍정하는 것, 이것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는 것입니다.

2)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믿음으로 받는 것이 전인격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라면, 이제 행위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전인격적이라함은 지적인 동의를 너머 삶의 변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존 칼빈은 이 본문에 대해 ‘경건한 자의 실 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적 동의, 의지의 변화는 다시 삶이라는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종착역인 ‘부활에 이르는 것’(11절)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바울의 믿음이 체계적이며 반복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육체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의 영광을 바라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존 칼빈의 탁월한 주해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써 성경이 보통 육신을 죽이는 것, 또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것인데 겉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십자가를 참고 견디는 것인데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취급하고 있는 애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귀절에서도 취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우리가 재난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주를 따르게 되는 것은 그의 부활의 능력을 깨달은 이후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기를 우리가 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죽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자들은 이 땅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이와 같은 묵상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계속’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계속 죽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죽음을 묵상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우리가 참된 빛을 받아서, 마음의 온갖 눈먼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본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묵상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며,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다시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정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자기를 부정하게 됩니다.

3)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은 결연한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εἴ πως καταντήσω)’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얻기 위하여’가 됩니다. ‘카탄테소(καταντήσω)’라는 단어는 약간의 의심과 걱정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사용된 구절을 살펴보면 이 단어는 ‘경외감과 경이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 구절을 살펴보십시오.

행 27: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καταντήσω)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롬 1:10 어떻게 하든지(καταντήσω)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1: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καταντήσω)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곳에 나타난 단어들은 한결같이 갈망이나 염원, 그리고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다는 말이 됩니다. 바울은 부활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섭리에 대한 경외인 것입니다.

제랄드 호돈 적절하게 이 단어를 해석하면서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과, 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 때문인 듯하다’고 말합니다.

나가면서

부활로 가는 길은 험난합니다. 자기를 부정해야하고, 고난과 수모를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전인격적 삶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아니 그리스도가 살아서 그의 삶을 주관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내적인 가치관의 변화, 외적인 삶의 변화까지 일어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갑시다. 바울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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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노라

농촌에서 짧은 시간에 목돈을 마련하는 방법은 누에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씨로부터 부화를 해서 고치를 따서 출하하기 까지 30일이면 작업이 끝나는 일이다.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듯하지만 해마다 봄과 여름철에 누에고치를 생산하는 일은 수고한 보람이 있었다.

누에는 5령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시기까지 온도와 습도, 그리고 먹이를 시간에 맞추어 보살펴 공급하지 않는다면 실패를 하는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누에가 잠을 자는 모습을 살펴보면 그렇게도 열심히 뽕잎을 먹던 부지런하던 누에가 머리를 들고 가만히 멈추어 있다.

만 하루 동안 가만히 있다가 마지막 순간의 모습을 보면 먼저 입 마게가 떨어져 나가고 그 작은 구멍으로 몸이 빠져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너무도 힘들어 보이지만 전심전력하여 빠져 나오게 되면 누에는 잠자기 전보다 상당히 성장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힘이 약하거나 병든 누에는 잠을 자고 난 다음에 입 마게는 떨어졌어도 몸이 그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지 못하여 결국은 살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달 동안 누에는 다섯차례나 이러한 힘겨운 잠을 잔 후에 껍질을 벗는 일을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을 정상적으로 치루어야 고치를 짓고 나방이 되어 짝짓기를 하고 알을 생산하는 성공적인 생애를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 살이를 살펴보면 날마다 거듭나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 거듭나는 일은 날마다 죽는 것과 같은 경험을 체험하게 되어야 한다. 어제의 일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려면 어렵게만 느껴지던 험난한 시험들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통과해야 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중간에 멈출 수 밖에 없는 실패한 생애가 된다.

누에의 모본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날마다 새로와 지는 경험을 체험하기를 빕니다.

순수한 신앙의 여인

어느 교회에 너무나 진실하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사는 자매 한 분이 있었습니다. 말도 없이 자기 할 일에 언제나 충성하는 모습에 모든 교인들은 그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목사의 눈이나 장로의 안목이나 교인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할 일만 충성스럽게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그렇게 말없이 충성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매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사연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저희 집은 도저히 나를 기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광주리에 담아서 근처에서 가정 부잣집 대문 앞에 나를 버렸습니다.

부잣집에서 나를 보지 못 하고 지나 가던 사람 하나가 나를 데려다가 길렀습니다. 그 때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술고래였습니다. 알콜중독자였습니다.집안이 술로 기우러 버렸습니다. 내가 14살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창녀굴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또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더욱 더 심한 알콜 중독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나도 뭇 남자들에게 시달리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사창가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생명을 걸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착하고 좋은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오랫만에 맛보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걸어가는 데 길가에 있는 교회로부터 찬송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쉬떠나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예수 예수 내 주여 섭섭하여 울 때에 눈물 씻어 주시고 나를 위로 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쉬떠나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나는 나도 모르게 교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들어섰을 때 3절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나도 같이 따라 불렀습니다.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쉬떠나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어느 덧 내 몸을 교회 뒷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설교를 들었습니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내게 예수님만이 내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만이 나의 위로가 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무거운 짐을 덜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증오와 미움이 이글거리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참으로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내 마음에 다시 모셨습니다. 평화가 깃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신 후로 내 마음은 늘 기쁘고 안정되고 축복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말없이 충성하기로 하였습니다.”

– 강문호 목사(갈보리선교교회)

하나교회 안내(19)

Praise the Lord! 안녕하세요

본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365일 예배드리는 교회를 설립하고자 합니다.(히10:25, 행17:11, 행2: 42- 47 등)

1주일 중 5, 6일은 전국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등의 유명한 목사님들의 동영상 설교(인터넷 또는 기독교 TV 등 이용)를 통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누구든지 1주일 중 하루 이상을 자유롭게 찾아오셔서 참여하는 예배당입니다. 교회에 억지로 등록(참여)시키거나 헌금 등의 무거운 짐(부담)을 주지 않도록 배려할 계획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따라 기드온의 300명 용사(사사기 7장)처럼 이 어두운 세상에 횃불을 높이들 십자가의 군병(성도)들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한국교회 갱신의 모델교회를 창설하여 복음과 사랑의 빛을 비추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을 당신은 할 수 없고, 당신이 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하면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일에 전심코자 하는 형제여 함께 모입시다. 작은 물방울처럼 모여 예수의 큰 강을 이룹시다.

1. 하나교회는 초대교회(사도행전2:42-47)와 같이 모든 성도가 서로 사랑과 교제와 나눔이 있는 교회입니다. 즉 하나님도 한 분, 지구도 하나, 진리도 하나,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4: 32)

2. 매일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히브리서 10:25) 그러나 모든 성도가 매일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주일 중 자유롭게 선택하여 1 일 이상을 참석하여 예배드리면 됩니다.

3. 모든 성도가 영육간에 주림이 없는 풍요로운 삶과 꿈(비전)을 보장하는 교회입니다.

4. 모든 성도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 충성하는 교회입니다.(막8:35)

5. 교회 예산(선교, 구제비)을 헌금(십일조)에만 의존하지 않고 교회 직영의 사업체를 두어 성도(신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고 자아실현의 기회를 주는 교회입니다.

6. 믿음과 행함(실천)이 있는 교회 (성령의 9가지 열매가 풍성한 교회)

7. 인간(담임 목사)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과 말씀 중심의 교회

* 세상에는 많은 종교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진리와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전하며 당신을 믿음의 형제, 자매로 모시고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과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저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 연락처: HP: 010- 7676- 3049(한태완), (02)959- 3049

(이메일: [email protected])

* 혼자의 힘은 약합니다. 그러나 여럿이 힘을 합하면 강합니다. 마가복음 8장 35절에 나(예수)와 복음을 위해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성도여 모입시다. 함께 힘을 합하여 조직을 이룹시다. 오직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살고 죽고자 하는 성도의 모임 즉 교회 조직을 세우는데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께 칭찬받는 교회를 함께 이룩합시다.

* 한국 기독교가 쇠퇴하는 가장 큰 이유를 저는 지나친 개교회 주의 때문이라고 봅니다. 불교나 천주교는 문화활동이나 구제활동을 해도 불교나 천주교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는데 반해 우리 기독교는 개교회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문화활동을 할 수 없고 빛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교파를 떠나 이단(사이비)이 아니라면 기독교계의 모든 교단의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말씀을 우리 성도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런 일에 동참하실 분은 꼭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시기를 바랍니다.

* 지금 여러 분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교회 설립을 위해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2-230-402436(예금주: 한태완)

하나은행 158-910128-66107(예금주: 한태완)

국민은행 010901- 04- 122780(예금주: 한승진)

* 후원금의 전액은 교회 설립비로 사용됩니다.

* 하나교회의 비전(꿈)은 여러분의 운명을 변화시키며, 이 꿈(비전)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1.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하기 위함입니다.(예배)

2.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사역)

3.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함입니다.(전도)

4. 하나님의 가족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교제)

5. 하나님의 백성을 교육하기 위함입니다.(훈련)

6.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협력)

*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교회

하나교회는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즉 당신을 영육간에 끝까지 사랑하고 돌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찌들고, 병들고, 상처받고 멸시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고…(마25:40) 이 시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올바르게 빛을 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교회의 일꾼으로 당신을 부르십니다.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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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57.이정기 목사와 함께하는 새신자를 위한 성경공부

로마서 7장을 보면 우리 안에 두 마음이 공존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영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육은 악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두 마음이 우리 안에서 서로 싸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싸웁니다. 서로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롬 8:6절 이하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 육체의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상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며 탄식합니다.(롬 7:24)

그러나 사도 바울은 탄식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육을 죽이기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라.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갈라디아서 5:16절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8: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 4:8절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새벽기도도 훈련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 묵상도 훈련해야 합니다. 나누고 베푸는 일도 훈련해야 합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도 훈련해야 합니다. 마음 지키는 것도 훈련해야 합니다. 잠언 17: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단련하십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때에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골리앗과 맞서 싸우려는 다윗에게 형 엘리압은 쓸데없이 까불지 말라고 화를 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은 형에게 따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만 집중했습니다. 만약 다윗이 형에게 화를 내느라 진짜 싸워야 할 상대를 잊어버렸다면, 골리앗을 이길 기회를 놓쳤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기에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 도망자로 살다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기에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해 주시기를 구하며 하나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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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천국을 설명하고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천국에 가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한 꼬마가 말했다.

“죽어야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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