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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신 예수님 | 마태복음 강해(62) ‘나귀를 타신 예수님’ / 송태근 목사 254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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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복음 21:1-9

나귀를 타신 예수님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제목 :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크릭 !]

성경 : 마태복음 21 : 1-11, 3.25(종려주일) 4 복음서에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기록이 25장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마지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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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dridsarang.com

Date Published: 1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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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 – 주일설교 – 휄로쉽 교회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실 때도 보잘 것 없는 갈릴리 마을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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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ellowshipusa.com

Date Published: 3/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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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의미를 새롭게 살피다 눅 19:28-40절 …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과 사람이 일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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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3.or.kr

Date Published: 4/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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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스가랴 9~14장은 구약에서 메시아 예언의 장으로 유명한데 그 가운데 9:9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실행하셨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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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5/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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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데겔 설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 가스펠투데이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했는데, 이는 왕이 평화적인 의도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예수는 평화 속에서 입성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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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speltoday.co.kr

Date Published: 10/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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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겸손해서? – 드림투게더

그런데 ‘예수님이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신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을 저도 갖고 있었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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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dreamtogether.com

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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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 12장 …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요12:12-33. 어느 시대나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대단한 기대와 부푼 꿈을 가지게 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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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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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2019 – 나귀타신 예수님을 따르자 [마가복음 11:1-10]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칩니다. 호산나는 헬라어로 “오!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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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kumc.org

Date Published: 7/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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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신 왕 (요한12:12~19) – 가톨릭정보 – 굿뉴스

예수님의 나귀행차는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을 얻어 그 힘으로 완성되는 화려한 세상 다윗 왕국의 재건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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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ria.catholic.or.kr

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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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62) ‘나귀를 타신 예수님’ / 송태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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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귀를 타신 예수님

  • Author: SamilChurch삼일교회
  • Views: 조회수 16,581회
  • Likes: 좋아요 378개
  • Date Published: 2021. 10. 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9nCnHerd73Y

제목 :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성경 : 마태복음 21 : 1-11, 3.25(종려주일)

4 복음서에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기록이 25장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동안 당하신 고난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은 오늘 본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많은 무리들은 겉옷과 종려나무가지를 길에 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실을 통해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나귀 주인은 알고 있었다 .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위해 두 제자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네게로 끌고 오라.”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 주인의 허락을 받아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4복음서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나귀 주인이 주님을 위해 어떻게 나귀를 선뜻 내어줄 수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나귀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짐을 실어 나르거나, 이동할 때 없어서 안 될 교통수단입니다. 또한 나귀는 한국 농촌에서 소가 살림 밑천이었던 것처럼 아주 소중한 자산을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아무 조건 없이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구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적용한다면 매일 승용차로 출퇴근하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차를 빌려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매일 출퇴근하는 차를 빌려달라고 할 때 선 듯 내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나귀 주인은 주님에게 나귀를 내어줌으로 불편은 물론,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는 사실입니다.

나귀가 묶여 있었던 동네는 “벳바게 맞은 편 마을”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이 바로 “베다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을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웃동네입니다.

베다니는 어떤 동네입니까 ? 주님이 나사로를 살린 곳이며,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 곳이며, 많은 병자들을 고친 곳입니다.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이란 뜻이지만, 베다니 동네사람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베다니 사람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베나니 사람들은 주님이 나귀를 사용하시겠다고 하였을 때, 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3절)“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주가 쓰시겠다.”란 “네 주인이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퀴리오스)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직접 “ 내가 주인이다 .”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 마태복음 16장,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마16:16)“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자가 되실 뿐 아니라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나니 사람들, 특히 나귀

주인은 자신의 인생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12:1)“너는 청년의 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내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 생명과 힘과 능력, 모두가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됨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무리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노르웨이 하콜 왕이 한 신하와 함께 마차를 타고 눈이 많은 오슬로 지방을 순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로 마차가 부서지면서 왕은 괜찮았지만, 신하는 크게 중상을 입어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은 신하를 마차에 태우고 왕이 마차를 끌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사진과 함께 왕이 사고를 당했지만, 신하가 왕을 무사히 구출했다.”라고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왕궁으로 돌아와 이 기사를 본 왕이 기자를 불러 “왜 사실대로 보도하지 않았느냐?” “왕과 신하를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하자 신하가 답변하길 “왕이 종의 행세를 하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만왕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나귀를 타고 종의 행세를 하므로 사람들이 몰랐던 것입니다. 나귀는 영어로 동키(donkey)라고 하며, 수컷은 잭(jack), 암컷은 제니(jenny)라고 부릅니다. 유럽에서 고집불통인 사람을 “당나귀(Donkey)같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작품 속에 나오는 돈키호테의 시종 산초가 탔던 것이 바로 나귀입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 무리들이 자신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이뿐 아니라 (10-11절)“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냐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예수님이 출생하였을 때 “유대인의 왕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나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가 입성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크게 흥분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드디어 우리 민족을 로마로부터 해방 시킬 메시야가 왔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를 정복하고 자기 민족을 해방하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장군이나 메시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로마를 정복할 수 있는 장군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실망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이유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일주일 만에 돌변하였습니다 . (눅23:18-21)“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무리들은 주님으로부터 떡을 얻어먹고, 병 고침을 받고, “호산나”하며 환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살인자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쳤습니다.

한국은 작년에 촛불집회를 통해 대통령을 탄핵하였습니다. “탄핵하라”, “구속하라” 그 결과 시민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시민들은 이제 태극기를 들고 또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군중심리와 민심은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거품처럼 올랐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이 군중입니다.

마태는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5절)“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주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시고 겸손하게 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 세상 정복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에 권세를 부리고 힘을 과시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남에게 군림하고, 큰소리치고, 약한 자를 무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겸손함입니다.

주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 스가랴가 말씀하시다 .

나귀는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교통수단입니다. 나귀는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많은 짐을 지고 산과 사막, 들판 어디서나 짐을 지고 갑니다. 이런 이유로 “나귀는 짐을 지는 동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을 나귀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 (5절)“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즉, 주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우리의 모든 짐을 지신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는(사53: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하셨습니다.

“담당”이란 “모든 짐을 지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지고 있는 모든 죄의 짐을 주님에게 지우셨다.”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짐입니다. 세상에서 죄만큼 무거운 짐이 없습니다 . 다윗은(시32:1-3)“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사람이 태어날 때 뼈는 약 350개 정도이며, 어른이 되면서 서로 붙어 200개정도 된다고 합니다. 뼈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피를 만드는 것과 인체에 필요한 영양분을 저장하는 역할입니다. 한마디로 “뼈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며 출발지”란 뜻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표현할 때 “뼈 속 깊이 사무치다” “뼈를 깎다.”“뼈 빠지게 일하다.” 사람이 감내 하기 힘든, 최고의 고통을 표현할 때 “뼈가 아프다.”라고 합니다. 다윗이 “뼈가 아프다.”는 것은 “생명의 뿌리가 아프다.”란 뜻입니다.

죄는 우리를 넘어지게 할 뿐 아니라, 인생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기쁨과 소망,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습니다. 죄를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의 짐을 져 주셨습니다.

주님이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의 왕과 같은 모습이 아닌,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 짐을 져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깊이 세기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3/31/19)

막11:1-10

·세상의 왕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지만 이 땅에 진정한 왕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유는 그분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미 여러 차례 방문하셨지만 이번은 당신을 따르던 무리들, 심지어는 유대교 지도자들 조차도 다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공공연하게 진행되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고, 그 나귀 마저도 빌린 것이었고, 안장도 없어서 제자들이 겉옷을 깔았다. 이것은 예수님이 500년 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다.(슥9:9)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안장처럼 올려놓기도 하고, 길가에 종려나무 가지를 깔아 놓기도 했다. 또한 ‘호산나’를 외쳤는데, 자신들의 눈앞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 그분이 유대 나라를 독립시켜서, 이전 다윗 왕 때의 영화를 찾아줄 수 있는 분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7-10절)

*‘종려나무’=‘승리’나 ‘번영’을 상징,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그분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셨다.(슥9:10) *나귀 새끼 = ‘겸손’과 ‘평화’를 상징

·‘화평’이란 예수 믿으면 마음 편해진다는 말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가 되었고, 그 결과 인간들은 죄악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보며 낙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함으로 사람들과의 다툼과 단절을 가져온다. 맞고 틀리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시켜주시기 위해 오셨다.(엡2:14,16)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과 지혜로 살게 해주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처한 상황을 이해할 때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보며 이해하게 되며 받아들이게 해준다. 결국 갈등과 다툼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셨고, 겸손을 통해 구원에 동참할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

·지상 최대의 겸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것도 로마 군병들의 가진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죽기 까지 낮아지신 것이다.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실 때도 보잘 것 없는 갈릴리 마을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데도 나귀 새끼를 타셨다.

·그러나 그분의 겸손은 최고의 반전을 이루었다.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수많은 군대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이 일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겸손하게 죽으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겸손함으로 섬길 때 영혼 구원의 역사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 분 자신이 창조주이이셨지만,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통해서이다.(요13:14,15)

·진짜 겸손은 사람들 앞에서 겸양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 앞에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는 것이다.(벧전5:5,6)

·반대로 진짜 교만은 자신의 생각이 늘 옳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 교만 가운데 있으면 결국은 패망한다.(잠16:18,19)

·또한 진짜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께서 함께 하시고 이루실 일이라면 뒤로 물러설 일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기에 못한다 소리 하지 않고, 반대로 내 지식과 내 경험가지고 말하지 않게 된다.(렘1:7,8)

3)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의 뜻에 합당하게 쓰여져야 함을 말씀하신다.

·주께서는 허락도 없이 쓰시겠다고 했고, 또 사람들은 그 말에 순종했다. 주께서 하시는 일들 앞에 거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 생각으로 하면 절대로 안될 것 같은 일도 되어지고, 또 어떻게 보면 무례하고 대책없는 일 같지만 그 일이 정말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물질 뿐 아니라, 은사도, 나의 시간도 심지어는 내 자식들도 내 것이 아니다. 주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들을 나에게 맡겨두신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청지기 의식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제자의 삶이다. 부하려 하면 시험과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서 곧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재물을 주시고 안주시고는 주께서 정하시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삶의 자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정말 그 일을 하는데, 돈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주께서 알아서 주신다.

·지금 이 시대에는 아직도 주의 은혜를 알지 못해서 어둠 속에서, 사망 가운데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 주께서는 그들을 향해 가라고 말씀하신다.

학습 및 적용 문제:

1)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이유를 슥9:9,10의 말씀을 통해 두가지로 설명해보라.

2) 진정 겸손은 어떤 것이며,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벧전5:5,6; 렘1:7,8)

3) 나는 진정으로 겸손한 자인지, 나의 물질에 대한 생각들은 어떤지 나누어보자.

[이달의 데겔 설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2021년 3월 28일 종려주일

마가복음 11장 1-11절

신학적 관점 예수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라 계속 가는 중에 생긴 이 사건은 극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소개되어서 예수에 관한 전승 중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마가 고유의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예수는 왜 환호를 받으며 적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로 결정했나? 예수가 잔인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고도 입성한 것은 그의 대적자들에 대한 도전이었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 이외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에 의한 것이었나?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어떤 일이 생기든 상관없이, 예루살렘 입성은 장차 생길 일에 대한 징표였나? 한 주일 안에, 환호는 멸시와 조롱으로 바뀐다. 종려주일은 돌이킬 수 없이 성금요일로 변한다. 추앙받던 예수는 멸시의 대상이 된다. 예수의 고난을 오늘의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고난과 연결하지 않고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가 당한 멸시와, 멸시 속에서도 빛나는 진정한 존엄의 의미도, 오늘날 조롱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지 않고 깨달을 수 없다.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했는데, 이는 왕이 평화적인 의도를 갖고 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예수는 평화 속에서 입성했다는 것이다.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다. 예수는 그를 파괴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도리어 그들이 예수를 파괴하는 데 세력을 모으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금요일의 어두움이 종려주일의 광명을 변형시킨다. 즉 이 두 가지가 연결될 때만 우리는 존엄성은 온전함(integrity, 통합성, 통일성)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잘못된 심판과 의혹과, 공포와 폭력, 심지어 죽음의 위력은 객관적인 모습 그대로 먼저 파악된 후에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주석적 관점 “승리의 입성”(개선행진)이란 용어는 마가복음에 중요한 장면 전환을 가져오고 설화의 중심점이 되는 이 본문의 중요성을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나귀의 중요성을 무엇인가? 마을에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은(11:2) 놀랍다. 말 대신 나귀를 이용한 것은 마가의 독자들에게 영광과 전쟁보다(슥 9:9) 평범함과 겸손함을 보여주지만, 하지만 나귀가 일반적으로 타는 짐승인 것처럼 이는 우스꽝스럽거나 비천한 것은 아니다. 한 번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것은 의전용으로 딱 맞는 것이다( 민19:2; 신21:3 삼상 6:7에서 아직 멍에를 매어 본 일이 없는 짐승 참조). 예수는 그 짐승이 어디 있는지, 그의 제자들이 가져오려 할 때 무슨 질문을 받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등, 그가 예상하고 있는 일어날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모든 사건은 그의 목적이 예수와 완전히 일치를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있다. 예수가 나귀를 타셨을 때, 많은 사람이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는데, 이는 주요한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는 순례자에게 하는 일반적 환영방식이었다(요한복음에서만 종려나무 가지로 특정하고 있다). 군중들은 소리 지르며 순례자들에게 구원의 주님으로 부르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시 118:26 이하 참조). 마가는 새로운 전체 시의 축하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걸어온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탔고, 군중들은 생나무만 깔아놓은 것이 아니라 겉옷 또한 길에다 폈다(왕에 대한 환영방식, 왕하 9:13 참고). 마가의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거나 과감하게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정체성을 애매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외쳤다. 그들이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는 외침은 예수를 다윗 왕조의 계승자로 환영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군중들이 시가지를 행진하며 환호하고 경의를 표하며 공개적으로 메시야 왕이 되어 달라고 청원한 것은 분명히 깃발을 들고 위기를 촉발하는 것이지만, 예수는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 이상한 “승리의 입성”의 반글라이맥스적인 대단원은 독자들에게 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나지 기다리며 보라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랑에 대한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인 관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지탱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 연관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종려 가지 사이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이상하게도 우리가 피상적인 사랑이라는 망상 쪽으로 향하지 않기 위해 싸우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예수에게는 피상적인 사랑이란 없다. 우리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공포를 견디는 사랑을 받는다. 이런 사랑은 종종 우리가 실제라고 착각하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려주일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오해하는지 보여준다. 우리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확장되어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실제 행동들로 측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나귀에 타고 종려나무 사이로 행진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런 행위는 위대한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다. 위대한 기독교 신비가 시몬느 베이유는 이렇게 썼다.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 줄 사람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관심을 줄 수 있는 능력은 매우 드물고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다. 그것은 기적이다.” 예수가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완전한 관심을 가지신다는 기적이다. 예수 안에서 세상은 자기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되고, 예수 안에서 이런 깨달음으로 우리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하나님과 씨름하던 존재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피조물로 변모한다.

설교적 관점 이번 주일은 설교자들에게 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려는 설교자들에게는 도전이 되는 주일이다. 교회에 있어서 고난주일 예전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입성을 약화시키거나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중대한 일이고 설교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때로 종려주일 예전을 위한 본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비록 그 본문이 분명히 보다 큰 고난이야기라는 상황에서 선포되어야 하면서도 말이다. 예루살렘 입성에 초점을 두는 것은 중요한데 그것은 이 이야기가 예수사역에 있어 가장 거칠고 또 격앙된 정치적 행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찬양이 지닌 정치적 특성뿐만 아니라 예수 사역에 담긴 정치적 갈등을 기억나게 한다. 이 사건은 단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귀여운 어린이들을 보며 어른들이 웃는 그저 예배를 시작하는 행진정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마가복음 11장 1-11절에서 예수는 세심하게 계획된 풍자적인 “군대행진”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감으로써 정치권력을 비웃는다.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권력”을 섬기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고 초대한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행사의 정신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중요한 정치적 의미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오늘 본문에서 단지 몇 구절만이 (8절-11a절)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본문 중 대부분은 (1절-7절) 이 사건을 위해 예수가 했던 계획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구절들은 예수가 이 모든 일을 미리 계획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새끼 나귀를 준비했고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보고 있는 군중들과 더불어 사용할 신호도 가르쳐주었다. 예수는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다. 그는 한편의 “길거리 공연”을 세심하게 연출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길거리 공연에서 예수는 왕을 패러디하는 풍자극을 연출한다. 그는 감람산에서 시작하는데 (1절), 그 산은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해방을 위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 장소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예수는 자신의 “마지막 행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것을 내보낼 때 좀 이상한 상황이 된다. 그가 선택한 것은 전쟁무기가 아니라 새끼 나귀 (마가복음에서는 완전히 자라지도 않은 당나귀)였다. 예수는 무장하지 않은 채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때, 그는 승리한 민족영웅을 위한 열병식 같은 이 행진을 받아들인다.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군중들은 승리한 군사지도자가 기대할만한 모든 행동을 한다. 제국의 입장에서 반역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하며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와 옷을 존경의 표시로 예수 앞에 펼친다. 그들은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만수무강 하소서”라고 찬양하며 외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환호하는 군중 속으로 새끼 나귀를 타고 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줄곧 제국의 권력과 통치가 어떤 것인지를 군중들에게 보여준다. 예수의 길거리 공연은 우스꽝스런 정치적인 풍자이다. 그의 “승리의 입성”에서 예수는 “기존질서”와 그 가식적인 화려함과 지배를 풍자하고 대안적인 지배방식을 제시한다. 새끼 나귀를 탄 예수의 발은 땅을 질질 끌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그런 지배를 거부하는 분으로 나아온다. 그는 힘센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연약하고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로 다가온다. 예수는 여기서 광대의 역할을 취하여 우스꽝스럽고 어리버리한 모습으로 즉 다른 형태의 “다스림”으로 다가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 것을 요청한다. 예루살렘입성은 우스꽝스럽고 극적이며 또 정치적이다. 이 이야기를 신중하게 편성하여 현실풍자를 하는 길거리 공연으로 재현하는 일은, 예수의 행동이 체제전복적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의 길거리 공연은 풍자가 “기존질서”를 폭로하고 저항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설교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풍자와 축제형식을 통하여 복음과 기독교 예배가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설교자가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거행하는 종려주일 예배는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헌신과 제자도를 요청한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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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겸손해서?

예수의 마지막 한 주 다시 읽기(1) –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

Louis Felix Leullier(1811-82), The Entry Of Christ Into Jerusalem,

종려주일, 거의 대부분의 교회나 많은 기독교인이 떠올리는 분문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입성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읽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익숙한 성경 읽기가 주는 아쉬운 대목입니다. 무엇이 아쉬운 점일까요? 먼저 성경 본문을 읽어봅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 21:2-3)….”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2-3)

김동문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30).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고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눅 19:30, 31)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한복음 12:14, 5)

김동문

1.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 또는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는 표현입니다.’매인 나귀’의, ‘매였다’는 것에(만) 주목하면 곤란합니다. 나귀 새끼의, ‘새끼’에(만) 주목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나귀는 집에서나 이동하지 않고 들에 머물 때, 양과 염소가 꼴을 여유롭게 뜯는 시간에,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매어두곤 합니다. 매인 나귀는 묶여 있는 나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매인 나귀’는, 짐이나 사람을 싣고 다니는, 안장이 앉혀진 나귀입니다.

나귀 새끼는 물론 쉽게 생각하는 나귀의 새끼가 아닙니다. 나귀 새끼로 우리말로 풀이한 표현은 어릴 때는 한 살 많게는 4살 나귀까지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나귀 새끼는 새끼 나귀일 수도 있지만, 본문의 맥락이나 나귀의 얽힌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 안장이 지워지지 않은 나귀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김동문

들이나 도시 안팎에서, 등에 안장을 지고, 짐이나 사람을 싣고 가는 나귀와 그 옆에 따라 가는 안장을 지지 않은 나귀를 볼 수 있습니다. ‘안장을 진 나귀’는 ‘매인 나귀’를 뜻하고, 그 곁에 따르는 나귀, 어린 나귀는, 아직 사람이나 짐을 싣지 않은, 안장을 지지 않은 나귀를 뜻합니다. 나귀에 짐을 실거나 사람이 탈 때는 안장을 얹곤 합니다. 안장을 얹지 않고 나귀를 타는 것은 편하지 않고, 나귀를 탄 사람이 균형을 잡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 상황을 이해할 때, 안장을 얹지 않고 조랑말이나 말을 타는 것을 떠올려 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는 안장이 지워지지 않은 나귀를 뜻합니다.

김동문

안장을 진 나귀 곁에 안장을 얹지 않은 나귀를 곁에 따라 붙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나귀로 하여금 길을 익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매인 나귀 = 안장을 지운 나귀, 나귀 새끼 = 안장을 지우지 나귀로 다시 풀어볼 수 있습니다.

2. 권위, 권세, 나귀

고대 이집트 5왕조 Khuiwer 무덤 벽화(Erman, A. (1887) Ägypten und ägyptisches Leben im Altertum (Tübingen: Laupp). P.649.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귀를 탄다는 것은 권위의 표현이었습니다. 왕이 즉위식을 하거나 행차를 할 때도 나귀를 탔습니다. 특별히 흰 나귀는 왕과 왕실의 소유였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평민들이 가마를 타지 못하던 것처럼, 나귀는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바사(페르시아)의 황제조차도 나귀를 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황제 행차 시에 나귀를 타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마리의 나귀를 갖고 있는 경우는 수송 전용 나귀를 타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밭일도 하고 짐도 실고 사람도 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태가 언급한 멍에 매는 짐승은 바로 이런 느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김동문

한편으로, 구약시대에, 고대 근동에서는 말은 아주 귀한 군수용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나 바벨론, 페르시아 같은 대제국이 아니면 말 자체를 소유하거나 일상생활에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왕이 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출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전쟁으로 돌아오는 길이 아니라면, 말을 타고 행차를 한다거나 즉위식을 치루는 풍경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신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을 저도 갖고 있었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유교, 동양문화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님이 겸손하다’는 것과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셨다’는 것이 인과관계, 상관관계가 있는 듯 적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부 오해가 담긴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과 연결한 구약 본문은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이렇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집트 중왕국 베니하싼 무덤 벽화 중 “이집트를 찾은 아시아계 민족” 이 나귀에 짐과 아이를 실고 있다.(P.E. Newberry(1893), Beni Hasan I. Archaeological Survey of Egypt (London: Kegan Paul)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신다! 1) 그는 공의로우시다. 2) (그는)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3) (그는) 가난하시다. 4) (그는) (숫)나귀를 타신다, 5) (암)나귀 새끼, 어린 (숫)나귀를 타신다.” 즉 3)과 4)는 인과관계 즉 가난하셔서,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이라고 보기보다, 상호 무관한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조금은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의 인용 구절도 ‘겸손’ + ‘나귀를 탐’을 인과관계로 볼 수는 없습니다.

Carle Vernet(1758~1836), Detail of The Triumph of Aemilius Paulus(1789)

3. 황제의 입성과 예수의 입성

로마 황제가 그가 정복한 도시에 입성하는 장면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 겹쳐집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황제의 입성식 따라하기, 코스프레에 해당합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기획한 것이기 보다, 예수를 맞이하는 무리의 연출인 듯합니다. 이것은 로마의 황제권에 도전하는 사회적 정치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도시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즉위했음을 백성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Pedro de Orrente(1580~1645),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162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모든 것이 완전한 왕 즉위식, 자기의 땅에 입성하는 그림 언어로 가득합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고, 새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새 예루살렘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로마 당국과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권력자들이 느꼈을 긴장감과 분노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온 사방으로 유월절을 맞이하기 위해 몰려든 이스라엘 백성은 적잖이 흥분하고 설레었을 분위기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새끼 나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식의 본문 해석과 설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 겸손’을 다소 유교적이거나 모호하게 풀이하는 것도 아쉬운 해석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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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 12장 12절-33절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요12:12-33

어느 시대나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대단한 기대와 부푼 꿈을 가지게 됩

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도 보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소위 8룡이니 9룡이니 하는

사람들에게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나라에 지도자 감들이 그만큼 많다

는 것은 참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야, 저분이 대

통령이 되면 뭔가 우리 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아니할까’ 하는 나름대로

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냉혹하게 교훈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도자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지도자에 대한 기대의 역사는 곧 실망의 역사였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불란서 혁명이 터지고 나서 눈부실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젊은

지도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입니다. 그의 등장을 지켜보며 온 유럽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흥분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26살 먹은 천재 음악가였던

베토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을 무척 존경했습니다. 자기보다 한 살 위

였지만 그의 인물됨에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폴

레옹에게 조금이라도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어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목도 나폴레옹의 이름을 따

“보나빠뜨라 교향곡”이라고 붙이고는 5년 후에 나폴레옹에게 증정할 수 있는 기회가 오

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폴레옹이 마침내 황제에 즉위했다는 말이 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토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보나빠뜨라’라는 제목을 써두었던 교향곡의 표지를 찢어버리며 이렇게 소리질렀다고 합

니다. “그 사람도 속인에 지나지 않았어. 자기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황제가 되다니 정

말 실망했어.” 그리고는 그 교향곡 이름을 “심포니아 에로이카”로 바꾸고 특별히 제 2악

장에는 “장송 행진곡”이라는 음울한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는 그로부터 17년 후에 나폴

레옹이 세인트 헤레나에 가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나폴레옹에게 바치려고 했던 그 교향곡을 다시 손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미 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을 다 내다보고 있었어. 제 2악장을 장송 행

진곡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

지도자에 실망한 사람이 어디 베토벤뿐이겠습니까? 세계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우

리가 역사를 돌아보면 세상에 등장했던 왕이나 통치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이 사람들

에게 안겨 준 것은 결국 실망과 허탈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펴놓고 읽은 말씀에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

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이 예수

님을 가리키면서 “저 분만이 인류가 기다리는 진정한 왕”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당

시의 세계 최대 강국은 로마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로마 정부가 파송한 빌라도를 위시

한 지도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빌라도는 “예수라는 사람이 지

금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데 모든 백성들이 그를 향해서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는 보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

은 빌라도는 아마도 술잔을 들고 마시다가 너무 우스워 가지고 배꼽을 쥐고 웃다가 술잔

을 다 쏟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주제에 왕이라고?’ 얼마

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는 분을

놓고 인류가 기다리는 왕이요 구원자라고 누가 생각을 하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엄숙

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만이 진정한 왕이요 예수만이 인류의 구원자다.” 이렇게 선언하

시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왕 예수

이미 앞 시간에 우리가 보았습니다만 예수님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조용하게 하

루를 쉬시다가 그 다음날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

루살렘으로 입성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를 보내어 나귀를

구해 오도록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제자

가 나귀를 끌고 오자 제자들은 나귀 새끼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님을 올라앉으

시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에 화려한 카페트 대신 자

기들의 옷을 펴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기도 하며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

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무렵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 나라 사방으로부터, 세계 도처로

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오

신다는 말을 듣고 너나 없이 달려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그 충격적인 소식이 이미 쫙 퍼져 있던 터라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

고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에 호기심 반, 흥분 반으로 몰려나간 것입니다. 그들은 제

자들이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하며 외치는 소리를 듣고는 함께 들떠서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종려나무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호산나”라고 하는 말은 “주여 우리

를 구원하소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안겨주실 분, 자기들을 구원해주실 분으로 기대했던 것입니

다. 예수님은 그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 대로를 따라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지난 3년간을 우

리가 돌이켜 보면 예수님은 한번도 자기의 신분을 공적으로 노출시킨 일이 없습니다. 가

끔 지도자들이 “네가 누구냐? 신분을 분명히 밝혀라.”며 따지고 들었을 때도 예수님은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시고 인자라고 하는 약간 모호한 용어를 쓰시면서 대꾸를 하셨습니

다. 요한복음 6장 15절을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달려와서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바람에 일부러 피해서 산으로 도망가신 적도 있었습니다. 7장 4절에 보면 자기 형

제들이 “아니, 세상에 나타나서 세상에 큰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면 왜 숨어 다니느

냐? 스스로 자기 정체를 밝히고 당당하게 맞서지.” 하고 빈정거렸을 때에도 예수님은

“나의 때는 아직도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시면서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러다가 제자들과 오붓하게 한적한 곳에서 만날 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곧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요, 왕

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기를 원치 아니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신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자기가 다윗의 자손이요 평화의 왕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를 하신 셈입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

신이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쥐고 행동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16절에 보니까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

시고 승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

은 태도를 바꾸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기를 향해 “호산나! 이

스라엘의 왕,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고 소리를 지를 때도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삼사 일 후에는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폭도로 변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공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어린아이들까지 합세를 해서 “호산나! 이스

라엘의 왕이여!” 하고 외쳐댔습니다. 그것을 보고 흥분한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곁에 와 가지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당신, 저 소리 못 들어요? 입 좀 막도록 해

요.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도록 내버려둬요? 입 좀 다물게 하라고.” 그 때 예수님은 유

명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소리 지르지 아니하면 여기 있는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인류의 왕이

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그를 환호하지 아니하면 돌이라도 소리를 지르도

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태도를 바꾸셨을까요? 우리는 성경에 한두 가지 이유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스가랴 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 가운데 한 구절에서 예수님에 관해 예언한 것이 있습니다. 그 예언의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5절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말씀은 헬라어로 번역된 70

인경이라는 구약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읽는 스가랴 9장 9절과 비교하

면 조금 표현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었어요. 그는 그 말씀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의 입을 통해

서 하나님이 예언하신 말씀 가운데 메시야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입

성하신다는 것을 기록했다면 자기는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공포 분위기입니다. 유대 나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기회 있으면 잡아서 처치하

려고 지금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순종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도를 바꾸신 데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

가에서 처형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처형되기 전에 분명히 밝혀야 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특별히 자기를 죽이는 유대 나라 지도자들과 유대 나라 백성들에게 죽

기 전에 분명히 밝혀야 될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들이 누구를 죽었느냐 하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

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죽이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왕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는 것입니다. 의인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의 신분을 분명

히 노출하셨던 것입니다.

겸손하신 왕

그러면 우리 예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그가 세상의 왕과 비교할 때 어떤 점에서 다

릅니까? 오늘 이 사실을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한번 찾아봅시다. 아마 한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왕입니까? 세상의 지도자들과 어떤 점에서

다르신 분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겸손하신 왕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습

니다.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나귀의 사이즈에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

라.” 나귀의 사이즈에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고의

적으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

내면서 나귀를 구해 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대로 가서 어미 나귀를 끌고 왔습니

다. 그런데 새끼 한 마리가 어미를 따라왔습니다. 아마 꽤 큰 새끼였던 것 같습니다.

나귀가 사람을 태우는 짐승인 것을 감안하면 나귀를 타려면 어미 나귀를 타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미 나귀를 제쳐놓고 일부러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래

서 새끼 나귀가 한동안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하나님이 스가랴를 통해 자신을 나귀 새끼를 타고 오

는 왕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주님은 그 말씀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 새끼를

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가랴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는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타셨다.” 겸손이란 자신

의 높음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의 처지로 자신이 내려앉아 함께 울고 함께 웃기를 기뻐

하는 마음가짐이 아닙니까? 이러한 겸손한 마음가짐에서 사람을 거칠게 대하지도 아니

하고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아니하면서 사람과 가까워지는 온유함이 나오는 것입니

다. 우리 예수님이 이런 왕이십니다. 겸손하시기에 온유하신 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

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을 걸어가고 있어

요. 이 인생 여정이라는 게 짧으면서도 참 길지 않습니까?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얼마나

멉니까? 멀리서 볼 때는 탄탄대로 같이 보이지만 가까이 가 볼수록 얼마나 그 길이 험하

고 좁습니까? 십대가 인생을 볼 때는 그 인생이라는 것이 온통 젤리 투성이요, 행복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20대 들어가서 보면 인생길이 조금 달라 보이고, 30대, 40대,

50대에 들어가면 그 인생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우리가 다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모두

는 너나 할 것 없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두 가지 짐을 지고 있었어요. 죄와 사망이 주는 영적 짐을 지

고 있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짓누릅니다. 가책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죽음의 공포가 우

리를 사시나무 떨듯이 만듭니다. 밤낮없이 그 고통 속에 우리는 매어서 살았어요. 게다

가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에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의 짐을 다 지고 신음하고 있습니

다.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다음에는 죄와 사망이 우리를 짓누

르는 짐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드디어 사망의 공포가 우리에게서 떠났습

니다. 죄의 가책과 죄의 형벌이 우리에게서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인생 여정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고 걸어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피곤할 때도 많습니다. 슬플 때도 많습니다. 상처 입을 때도 많습니

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많습니다. 고독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기쁘고

신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짓누르는 수고와 슬픔

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같이 나귀 새

끼를 타고 오시는 겸손하신 왕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내 곁에 있어주셔야만 내가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가다 지쳐 쓰러질 때 그 짐을

함께 지고 갈 수 있는 겸손한 왕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다가 쓰러지면 조용히 와서 왜

쓰러졌느냐고 따지기 전에 나의 팔을 붙들고 일으켜 세워 주면서 “내가 있지 않니? 같이

가자.” 하시는 그런 겸손한 왕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 나귀를 타고 내 가까이 다가오시는 겸손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를 얼

마나 알고 계십니까? 물론 그분은 지금 굉장한 곳에 계십니다. 승리하신 왕으로서 하나

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지 사도 요한은 그를 보고는 죽은 자와 같

이 혼 줄이 나가지고 정신을 잃어버리고 땅에 거꾸러졌다고 했습니다. 그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납니다. 그 머리털은 양털처럼 흽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큰 우렛소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광 중에 계시는 만유의

통치자로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예수님을 부를 때마다, 예수님 앞에 다가갈 때

마다, 예수님에게 마음을 쏟아 놓을 때마다 우리를 찾아 주시는 예수님이 그렇게 무시무

시한 예수님입니까? 나는 철이 나고 나서 40-50년 동안 신앙 생활을 지금까지 해오면서

내가 부를 때마다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은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광채가 나서 가까이 갈

수도 없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만나주신 분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

시는 겸손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군마에 올라앉아 홀을

들고 면류관을 쓰고 많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고 오는 왕 앞에는 아무도 접근 못합니다.

그러나 나귀 새끼 타고 오시는 왕이시기에 어린애라도 가서 톡톡 두들겨 볼 수 있고 그

옷자락을 잡아당길 수도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얼마나 멋있어요? 예수님이 바로 이런

겸손한 왕이십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찾을 때마다 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겸손하신 예수님, 온

유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면 늘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답답

하고, 어떤 때는 살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기분에 빠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

을 찾으면 “내가 네 곁에 있지 않니?” 하면서 다가와 주십니다. 여러분이 만나시는 예수

님도 아마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국제 전화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남

편을 따라 외로운 외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있는 힘을 다 쏟아서 충성한 귀한 목사

님 부인입니다. 그러다가 몸도 다쳐 가지고 사실 지병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암이래요. 내일 모레 입원

을 하고 수술을 받아야 되나 봐요.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무슨 말이 나옵니까? ‘아, 하나님 왜 이러세요.’ 이런 짜증스러운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저는 교회에서도 집에 가서도 그 사모님을 위해서 기도했습

니다.

입원을 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서 그 다음날 국제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벌써 병원에 들어가고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병원을 수소문해서 전화를 연결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전화 소리는 너무 명랑하고 너무 밝은 소리였습니다. “목사님, 왜 또 전화

하셨어요? 목사님, 지금 의사 말 들으니까요 뼈 속에 암세포가 퍼져 있는지 안 퍼져 있

는지 검사를 하고 수술을 해야 된데요. 아마 2,3일 후면 수술 할 것 같아요. 목사님, 우

리 남편이 이런 병에 걸렸으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하던 사역을 다 놓아야 되니까 참 안

타까울 수밖에 없을 텐데 마침 제가 이런 병에 걸렸으니까 얼마나 다행이에요.” 이런 말

을 하는데 이 사람이 진짜 암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소파에 앉아 가지고

기분 좋게 떠드는 사람인지 제가 그냥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가지

고 눈에 눈물도 나려고 하는데 막상 당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기분 좋게 전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전화 통화를 하고 기도해 주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 사모님은

자기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겸손하시고 온유하셔서 가까이 다가

오셔서 왜 그랬느냐고 따지지 아니하시고 조용히 부드러운 팔로 껴안아 주시고 “걱정하

지마. 내가 네 옆에 있어.” 하시는 그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서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우울함이나 두려움, 공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예수님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기쁨으로 찬양>에 보면 “매일처럼 주

저앉고 싶을 때 예수님이 나를 밀어주시네/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

시네”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녀도 지치고 곤하여 쓰러질 때 내게

손 내미시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오늘 이 시간 이 주

님의 손에 붙들리는 시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답답하십니까? 지쳐

있습니까? 고독하십니까? 사람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 새

끼를 타고 죽음의 현장인 줄 알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이라는 것을 선포

하시면서 가시던 그 주님이 오늘 나를 찾아와 “내가 네 곁에 있지 않니?” 하시는 말씀을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이런 음성을 듣고 살아야지 날마다 허공을 치

듯이 신앙 생활하면 어떻게 합니까? 세상은 너무 험하고 악합니다. 우리 힘으로 도무지

이겨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 그분이 내 곁에 계시다는

믿음 때문에, 병상에 있는 어느 선교사 부인처럼 남이 우는 자리에서 웃을 수 있고 남이

불평하는 자리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희생하시는 왕

둘째로, 예수님은 희생하시는 왕이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제사에 쓰는 짐승은 한번도

멍에를 메고 일을 해보지 아니한 것이라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려

고 할 때는 이미 멍에를 메고 밭을 갈고 논을 갈고 한 소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나

귀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하면 나귀 역시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여야 합니

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제단에 올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한번도 타보지 아니한

어린 새끼를 타고 가셨을까요? 자기가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거

룩한 제단에 올려놓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태우고 가는 짐승 역시 한번도 사람이 타보지 아니한 나귀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는 십

자가를 향해서 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습니다.

요세푸스라고 유대 나라 유명한 사학자의 말을 보면 유월절을 당할 때마다 유대 나라

각지에서 아니면 세계 도처에서 200만이 넘는 군중이 모여 가지고 북새통을 이룬다고 합

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제사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10명이나 20명 단위

로 팀이 되어 가지고 짐승 하나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이

유월절 때 성전 안에서 희생되는 짐승의 수는 25만 6천 마리에 이른다고 합니다. 어마어

마한 짐승들이 피를 흘리고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이 짐승들은 유월절이

있는 그 달 10일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전부 끌려 들어갑니다. 이 날은 바로 예수님이 어

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바로 그날입니다. 수많은 양들이 예루살렘 성

전 안으로 끌려 들어가서 따로 설치된 특별 구역에서 기다리다가 그 달 14일이 되면 한

꺼번에 다 죽임을 당해서 그 제물이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던 바로 그날, 그 모든 양들은 다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어린양들이 죽임을 당할 때 드디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 마지막 유

월절 양이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대속의 제물이었습니다. 대속이라는

말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대속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의 고통을 대신 당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풀어주는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나의 고통과 나의 형벌, 나의 저주를 대

신 받아주시고 나를 거기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아이슈비츠 수용소 하면 소름 끼치는 이름 아닙니까? 나치 치하에서 얼마나 악명을

떨쳤던 살인의 현장이었습니까? 거기에 폴란드의 프란시스 파에 소속된 신부 한사람이

갇혀 있었습니다. 한번은 유대인들 가운데 몇 사람을 뽑아 냈습니다. 아마 그 사람들을

굶겨 죽이기로 작전을 세웠던가 봅니다.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사람을 차출해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걸려들면 사형으로 가는겁니다. 몇 사람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수들

이 벌써 몇 사람을 불러내어 그들을 지하 모처에서 굶겨 죽이려는 잔인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자기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줄 알고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좀 살려 주시오.

나에게는 처자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식구가 있습니다.” 그러자 그 간수가 이렇게 말했

다고 합니다. “너 대신 죽어줄 사람이 나오면 고려할 수 있다.” 그때 이 말을 들은 막스

밀리안 콜베 라고 하는 신부가 선뜻 나섰습니다. “나에게는 딸린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

다.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간수가 “꼭 하고 싶으면 대신 하라고. 저 사

람 대신 나를 넣어주시오.” 그래서 콜베 신부님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그 팀에 끼게 되

었고 결국에는 지하 감옥으로 끌려 들어가서 굶어 죽었습니다.

콜베 신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바로 이런 죽음을 일컬어서 구

속적 죽음, 곧 대속적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구약 시대의 번제

나 화목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는 피 없이는 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때면

언제나 수많은 양과 소가 대신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습니다. 죽임을 당할 때마다 주인

은 와서 그 양이나 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했습니다. 주인의 모든 형벌과

고통과 죄를 다 짊어지고 대신 죽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죽음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내 모든 죄를 그에게 다 짊어지었고 내 모든 고통과 하나님의 저주를 그에게 다 인계했

습니다. “당신이 짊어지고 죽으시오. 당신이 다 짊어지고 죽고 나는 살아야 되겠소.” 이

래 가지고 예수님이 죽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

어서 대속의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24절을 보십시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상함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나니.” 바로 이것이 대속의 죽음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바로 이러한 대속의 죽

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죄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신 이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님의 손에 여러

분이 죄짐을 벗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어떤 죄책감 때문에 짓눌려서 사는 사람이 있

습니까? 자기를 희생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서 그분으로 인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

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주시는 왕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왕이십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

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4절을 잠깐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

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

님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열매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구원

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영원한 저주를 받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수많은 사

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다시 32절로 넘어가 봅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땅에서 들리면” 하는 말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면”, “승천하면”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는 그날에 세계 모든 사람을, 온 세상을 자기에게로

이끌겠노라, 구원하겠노라 하는 말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19절로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바리새인들이 서로 한 말이 있습니다. 온 천하의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

수님을 보고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고 소리를 지르고 흥분하니까 그들이 뭐라

고 말했습니까? “볼지어다.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모든 너희들의 계획이 다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가끔 마귀도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이 영원한

진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온 세상이, 열방이 예수님을

좇는 날이 온 것입니다. 온 열방에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날이 온 것입니

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화해도 없습니

다. 민족끼리 이웃끼리 빈부 사이에 흑백 사이에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갈라진 이 틈

을 하나로 메우고, 영원한 나라 영원토록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구원을 주신 분

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왕이나 황제도 이 일을 해내지 못했습니

다. 1963년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했습니다. 왜 암살을 당했습니까? 케네디 대통령

은 백인과 흑인 사이를 좀더 조화시켜 미국을 인종 갈등이 없는 나라로 만들어 보려고

특별한 스케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 백인 중의 어떤 사람이 그를 죽

여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임금도, 어떤 유능한 사람도 진정한 구원을 가져다

줄 사람은 없습니다. 인류에게 평화와 진정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 사람은 없습니

다.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구원을 주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만이 이 구원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 본문이 하나 있습니다. 계시록 21장 3,4절입니다. “내

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누가 이런

영원하고 행복한 지상의 낙원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겠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분

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분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바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그분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겸손하신 왕이요, 희생하신 왕이요, 구원하신 왕이신 예

수님이 오늘 이 자리에 계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 가

까이 다가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쉬어라. 너 마음이 몹시 무겁지? 피곤하지? 힘들지? 그러나 내 곁에 와 쉬어라. 사

랑하는 자야 나는 너를 위해 죽었노라. 너를 너무 사랑해서 죽었노라. 내 품에서 진정한

평화를 소유해라. 사랑하는 자여 나는 너를 구원하기를 원하노라. 영생의 나라로 너를

인도하기를 원하노라. 비록 인생 여정이 힘들고 고달파도 조금만 참아라. 너무 황홀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내가 그 나라를 네게 주노라.” 여러분 이렇게 말씀하시

는 겸손하신 주님, 희생하신 주님, 구원의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오늘 이 시간 여러

분 모두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나귀타신 예수님을 따르자 [마가복음 11:1-10]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오늘 말씀보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서, 종려나무가지를 꺽어 흔들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 길거리에 깔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다. 그렇게 한 이유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그토록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나타냈던 존재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타셨던 나귀, 그것도 나귀의 새끼입니다.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500년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기억해냈습니다.

스가랴 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나귀는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입성하시기 전에, 두 제자에게 나귀를 가지고 오도록 합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볼텐데 풀어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일러주신 대로 가보니 예수님 말씀대로 나귀가 묶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서 가져 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라고 묻습니다. 누가복음19:33에 보면, 그 나귀의 임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이 일러주신대로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나귀의 임자들은 그 나귀를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은 그 묶여있던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에 주인이시고,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내어 드려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도리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가지고 왔을 때에, 예수님은 그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보면서,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됨을 깨닫고 흥분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칩니다. 호산나는 헬라어로 “오!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그렇게 환영하며 외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앞뒤로 따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할 메시야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해, 그 많은 짐승 중에 하필 나귀라는 짐승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실 진정한 공의와 구원은 어떠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살피고,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이 타셨던 나귀와 같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평화의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가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분은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나귀는 전쟁 때 타는 것이 아니라, 평화 때 타는 짐승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은 평화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평화를 주장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 대제국을 이루고 있던 로마제국도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역사학자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내란을 수습하고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후 약 200년간 비교적 안정된 시기가 있었는데 이 때를 팍스 로마나 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로마 사람들은 이 때를 평화의 때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로마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제국은 식민지 사람들을 억압하고 학대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불에 타고 무너졌던 70년도 바로 이 팍스 로마나 때의 일입니다. 티투스 장군은 군마를 타고 식민지 사람들을 짓밟으며 자신들만의 의와 평화를 만들어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백마를 타고서 의와 구원을 이루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구원을 말하지만, 자신만의 구원을 위해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의를 이룬다고 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이 땅에서는 불의와 억압이 있었고, 그 가운데 전쟁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탄 왕들과 영웅들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도 스가랴의 예언대로, 공의와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쟁을 위한 말을 타고 오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의미하는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공의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평화의 방법을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을 따라 평화의 모습으로, 이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나귀를 탄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의 마음속에는, 힘있는 말을 탄 예수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강력한 지도력과 능력을 가지고, 로마와 대항해서 그들을 압제함으로 승리를 이루고, 구원함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억누르던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의와 평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쫓으려고 하니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질렀던 것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말하지만, 로마와 같은 평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강력한 지식과 권력, 능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억압함으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의와 평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호기롭게 백마를 탄 왕들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죄인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평화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그 답답하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이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 신약 성경에 보면,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았던 사람이 있는데,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백마를 탄 자들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서 학대하기 위해서 대제사장들로부터 종교적인 권력을 위임받아서 다메섹까지 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사도바울은 180도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백마를 타고 사람들을 압제하는 세상 권력자들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지 않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같이 나귀탄 자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평화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사도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사도바울을 욕을 하기도 하고, 돌을 던져 바울이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겠다는 결사대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러한 이들을 향해서 전쟁하려고 하지 않고, 평화하려고 했습니다.

로마서 12:18절에, “할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갈등, 자유인과 노예들의 갈등 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평화롭게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 또한 이방인들을 품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4: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과는 다른 민족인 이방 사람들을 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해산하는 고통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은 갈등과 전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공의와 구원을 쟁취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불의하게 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때로 가정안에 말을 탄자가 있기도 합니다. 교회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회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말을 타고 권력을 휘두르며 다른 이를 억누르는 자가 아니라, 평화의 모습으로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자인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심으로, 겸손히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메시야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곧 나귀새끼를 탄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나귀는 대단한 인물들이 타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위대하다고 자부하는 왕이나 권세자들이 나귀를 탄자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귀를 타신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겸손함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겸손함은 단순히 나귀를 탔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나귀가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또한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하셨습니다.

사람이 능력이 있다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힘이 없는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교만하여서 고집을 피우고 불순종하면 사용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황소와 같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겸손히 주인에게 순종할 때에 쓰임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대단한 지식이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당신의 의와 구원을 이루도록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겸손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에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는 것이 너무 떨리고 죽을 것 같아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 쉬우셨던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더 힘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하게 기도하셨고, 결국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십자가를 받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에는 나귀와 같이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은 죽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 죄인들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자신에게 지어주시는 짐을 겸손히 진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주인이 맡겨주는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지어주시는 짐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위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방주를 짓는 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모세를 부르셔서 그에게 짐을 져 주셨습니다. 베드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짐을 주셨고, 사도 바울에게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자 그에게 짐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아,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겸손히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이시고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미천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밤에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일일이 발을 씻기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1:46절에서 율법사들을 책망하십니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자신은 섬김을 받고자 하면서, 다른 이들을 섬기지 않는 것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순종하며,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사람이고, 섬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의 외침은 이천년전 예수에게만 외쳐졌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 땅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구원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백마 탄 자들을 향하여서 호산나를 외치며, 그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따릅니다. 자신들의 삶의 구원이 세상의 권력과 부를 가지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도 뱃마에 오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권력을 구할 때에 자신은 구원할지 모르지만, 또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불의로 대하며 절망의 상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 다른 이들에게는 얽매임이 되고, 나의 의가 다른 이들에게 불의가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공의와 구원은 백마를 탄, 이 땅의 왕들을 따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에게, 강력한 말을 주시면서 그것을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어리석고 연약해 보이지만, 평화를 이루어나가며 겸손을 나타낼 나귀에 예수님을 태워서 예루살렘에 보내셨습니다.

세상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이 땅에 백마를 타고 의를 이루고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세력가들이 많습니다. 때로 우리 자신이 이러한 말을 타고 가정과 교회, 이 사회에 공의와 구원을 이루겠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의 공의와 구원은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있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때에, 평화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겸손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짐들을 순종하며 감당할 때에 하나님의 의와 구원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이 세상의 구원은 나귀를 탄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강함과 권력을 추구하며 경쟁하고 다투는 삶이 아니라, 겸손히 다른 이들을 섬기며 그 짐을 지어 줌으로 평화를 만들고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그래서 나귀가 쓰임받았던 것처럼, 주님께 더욱 귀하게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GoodNews 가톨릭정보

공동번역성서 나귀를 타신 왕 (요한12:12~19) 12 명절을 지내러 와 있던 큰 군중은 그 이튿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 받으소서!’ 하고 외쳤다. 14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보시고 거기에 올라 앉으셨다. 이것은 성서에, 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 임금이 너에게로 오신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신 말씀 그대로였다. 16 예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다음에야 이것이 모두 예수를 두고 기록된 것이며 또 이런 일들이 그대로 예수께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7 예수께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증언 하였다. 18 군중이 예수를 맞으러 나간 것도 예수께서 이렇게 기적을 보여 주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9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서로 걱정하였다. 아멘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우리는 요한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기 전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그 앞에 끼워 넣음으로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암시했어요. 예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그 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이야말로 참 제사장이요 참 예언자요 참 왕이라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인정은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 상을 베푸시는 행위였으며 그렇게 낮아지고 죽는 모습이 결국 하느님 나라의 승리의 삶임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실제 화하여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대표로 그 자리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그녀를 버렸습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 세상의 힘을 모두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자신의 영광인 머리카락을 주님의 발 아래로 내려놓았던 그녀의 행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바보 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한 마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고 이 땅을 작은 예수로 살아가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의 삶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러한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대로 반영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복음이 전해질 때 이 여인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게 될 것이라’ 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이미 예고된 것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는 보잘것없고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승리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예고된 예수님의 죽음의 행진이 오늘 본문에서 실제화 되어 나타나는데 이렇게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절기 때마다 의무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습니다. 성인 남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고 나머지 식구들도 최소한의 인원만을 집에 남겨두고 대부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명절을 지켰습니다. 유대 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인들의 수가 270만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숫자이지요? 지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소식을 듣고 그 성 입구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향해 환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호산나’ 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 하소서’ 라는 말입니다. 시편 118편에 가면 그 단어가 나옵니다. (시편118:25~27) 25 주소서,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 주소서, 야훼여, 승리를 주소서. 26 야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가 야훼의 집에서 그대들을 축하하리라. 27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신다. 나뭇가지 손에 들고 줄줄이 제단 돌며 춤을 추어라. 25절에 있는 ‘구원을 주소서’ 라는 단어가 ‘호쉬아나’ 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바로 그 단어를 주님을 향해 큰 소리로 반복하여 연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호산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편 118편의 ‘호쉬아나’ 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빛을 주신다 하지요? 빛 생각하는 것이 있지요? 도피성입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살인자라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행복과 만족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 내재된 것만으로는 그것을 다 채울 수 없어서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의 것들을 탈취하여 자신의 행복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경쟁자요 원수로 여기게 되어 있는데 성경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 확실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3:15) 그래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은 다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율법에 의하면 살인자들은 모두 사형입니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야 합니다. 그 사람을 죽을 때까지 돌로 쳐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확정적 고의나 미필적 고의가 아닌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지 않고 죽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마련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도피성으로 피해서 빛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카인의 후손들로 칭해지는 죄인들은 모두 다 카인처럼 고의적인 살인자들이지만(카인은 아벨에게 들로 가자고 유혹한 후 거기서 죽인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고의적 살인자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 즉 하느님의 남은 자들은 고의적 살인자들의 명단에서 그 이름을 빼내어 도피성에서의 구원의 기회를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친절한 힌트였습니다. 시편 118편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호산나’ 를 외쳐야 하는 긴박한 지경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쉬운 말로 ‘하느님 살려 주세요’ 입니다. 그들의 외침은 ‘하느님 우리 스스로는 절대 이 지긋지긋한 죄와 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좀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하는 절박한 외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죄와 사망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호산나’ 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와 가난과 질병으로부터의 ‘호산나’ 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인데 지금 로마라는 악한 자들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으니 그 현실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는 ‘호산나’ 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신 하늘의 왕에게 이 세상 현실에서의 구원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이 바로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사실 종려나무가지는 유월절에 흔드는 것이 아니라 장막절(수전절)에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든 것은 그로부터 2세기 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손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그들을 쫓아낸 유다 마카베오의 승리를 예수님에게 다시 한 번 기대하는 유대인들의 강한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시리아는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 유화정책을 써서 그들의 종교와 제사 등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성전 보수 자금까지 대 주었습니다. 그런데 BC198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3세가 BC190년에 로마를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에게 대패를 하고 당시 돈 5만 달란트를 로마에 물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안티오쿠스 3세는 점령지의 물건을 수탈하기 시작했고 특히 성전의 집기들이나 물건들을 모조리 빼앗아서 그 빚을 갚았습니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은 힘겨운 식민지 백성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 우리가 잘 아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엄청난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다니엘이 본 환상에 나온 사람입니다. 다니엘서 8장 23절에 보면 헬라에서 갈라진 네 나라의 마지막 즈음에 한 왕이 일어나서 유대인들을 파괴하고 멸할 것이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가 바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였습니다. 그는 정말 엄청나게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BC167년에 아폴리우스 장군을 비롯한 2만 명의 대군을 팔레스타인에 보내어 주둔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안식일과 할례 제사를 폐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금서로 지정을 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절기도 지키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성전의 지성소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우스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제사의 제물은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로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제단은 늘 돼지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제사를 드린 후에는 반드시 그 제물로 바쳐진 돼지를 먹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에 창녀들을 두어 신성한 성전을 매춘 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엄청난 박해 속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을 때 마따디아 라는 노 제사장이 시리아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들의 뜻대로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어떤 유대인을 죽여 버리고 그를 저지하는 시리아 왕의 사신과 군사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아들과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들의 무리를 데리고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얼마나 나이가 많았는지 3개월 만에 노환으로 늙어 죽었고 엉겁결에 셋째 아들인 유다가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동조자들 특히 하시딤(경건 주의자)들과 합세해서 시리아 군과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그는 결국 3년 만에 시리아 군을 몰아내었고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유다가 얼마나 잘 싸웠는지 그의 별명이 “망치” 였습니다. “망치” 라는 히브리어가 ‘마카베오’ 입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마카베오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카베오에 의해 성전이 청소되고 제사를 드린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대인들이 지금도 지키고 있는 ‘수전 절 하누카’ 입니다. 성전탈환 절 성전봉헌 절이라고도 합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유다 마카베오를 메시아로 추앙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유다 마카베오로부터 시작된 하스모니안 왕조는 온갖 내분과 외세의 공격으로 금방 지리멸렬했고 그들이 원하는 다윗 왕국의 화려함과 풍성함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또 다시 유다 마카베오와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로마에게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 눈앞에서 오병이어로 빵과 고기를 산더미처럼 만들어 내시는 분이 오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병든 자 들을 순식간에 고치고 죽은 자까지도 살려내는 신통력까지 있습니다. 물위를 걷기도 하고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한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셨구나 이제 우리 이스라엘은 세계를 지배하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구나’ 하고 흥분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 율사들 등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해가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호시탐탐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를 연호하며 그 분께 환호하는 무리들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자기들의 이 세상의 삶에도 유익이 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그 분의 능력을 인정은 하되 그것이 자기들의 이 세상살이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 분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뒤 그 두 부류는 한 편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적과 그 분의 능력이 자기들의 이 세상살이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때에 ‘호산나’ 를 외쳤던 목소리들이 며칠 뒤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외쳤던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종교행위나 신앙생활은 모두 이 세상에서의 유익을 얻어내는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하나의 모형으로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왕으로 당신의 나라인 이스라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장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린 나귀 즉 새끼 나귀입니다. 어른이 새끼 나귀를 타면 발이 거의 땅에 닿습니다. 말이 나귀를 탄 것이지 실제로는 거의 자기 발로 걷던지 아니면 보기 흉하게 두 발을 반짝 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왕의 모습으로 어울립니까?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입성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요한12:15) 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 임금이 너에게로 오신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신 말씀 그대로였다. 이 말은 지금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입성이 구약의 어딘가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즈가리야9:9-12) 9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10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11 ‘너는 나와 피로 계약을 맺었으니 나 그 피를 생각하여 사로잡힌 너희를 물 없는 굴에서 건져 내리라. 12 수도 시온아, 포로들은 그리던 고행을 찾아 너에게로 돌아 오리라. 네가 포로로 지내던 시절의 아픔은 내가 곱절로 갚아 주리라. 지금 요한은 스즈가리야서를 인용하여 주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즈가리야서는 나귀를 타신 주님의 입성을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그들의 활을 끊기 위함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은 곧 에브라임과 유다 즉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귀행차는 이스라엘의 무장을 해제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유대주의) 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화평이 전해질 것인데 그 방법은 ‘계약의 피’ 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전체의 내용을 단 한 절로 요약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귀행차는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을 얻어 그 힘으로 완성되는 화려한 세상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유대주의를 부수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참된 하늘의 메시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칼과 창이 아닌 겸손으로 계약의 피로 그 일을 이루러 오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몇 가지 준수사항을 하달하셨습니다. (신명17:16) 16 그러나 왕이라고 해도 군마를 많이 기르는 일만은 하지 못한다. 백성을 에집트로 다시 보내어 군마를 많이 얻어 오게 해도 안 된다. 너희가 그리로 되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야훼께서 너희에게 일러두시지 않았느냐?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말과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의 힘은 말과 병거와 은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시편33:16~17) 16 왕들아, 너희가 대군을 거느렸다고 이길 성싶으냐? 힘 좀 있다 해서 궁지에서 살아날 성싶으냐? 17 군마만 믿다가는 살아나기 어렵고, 대군을 거느렸다 해서 사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시편20:6-7) 6 야훼께서 기름부으신 임금에게 승리 주심을,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 들으시고, 오른손 힘차게 뻗어 승리 주심을! 7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이 세상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힘을 부어주시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백마를 타고 오셨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활과 칼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탱크와 자동소총과 원자폭탄으로 바꾸어 주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오셔서 이스라엘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이 일을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바오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후12:9~10)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13:4) 4 그리스도께서는 약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하느님의 권능으로 지금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약하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서 여러분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바오로가 본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필두로 한 하느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새끼 나귀를 탄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연약해 보이나 사실은 그 속에 하느님의 강함이 꽉 채워진 진짜 강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행진을 마치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요한 12:24-25) 24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주의자들처럼 하느님 앞에서도 ‘자기 자신’ 이 주인공인 사람들은 사망으로 던져질 것이고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 즉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들만이 영생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을 하느님께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라는 알기 쉬운 그림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예수 안에서 연합이 되어 작은 예수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역시 이 세상에서는 나귀를 탄 우스꽝스럽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다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느라 커다란 말을 타고 활보하는 가운데 우리 성도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여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그 분의 말씀을 좇아 져주고 섬겨주고 용서해 주고 감싸주고 인내하면서 새끼 나귀를 탄 바보로 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볼 멘 소리를 하지요. ‘하느님 창피하게 새끼 나귀가 뭡니까? 폼 나게 백마 한 마리 보내 주세요 내가 그 백마 타고 하느님 일 열심히 할게요’ 그런데 하느님은 자꾸 새끼 나귀만 보내십니다. 그러나 그게 잘 가고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시편 2:1~9) 1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2 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미며 3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이 멍에를 벗어 버리자!’ 한다마는 4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와 웃으시다가 5 드디어 분노를 터뜨려 호통치시고 노기 띤 음성으로 호령하신다. 6 ‘나의 거룩한 시온산 위에 나의 왕을 내 손으로 세웠노라.’ 7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야훼의 칙령을 들어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8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9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보세요.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군왕들이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합니다. 나귀를 탄 연약한 예수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들을 보고 비웃으신다고 하지요? 나귀를 타신 예수가 철장으로 그들을 질그릇처럼 부수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약함이 강함을 파하는 형국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가 땅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거기에 대한 힌트가 나옵니다. (요한 12:19) 19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서로 걱정하였다. 하느님은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하여 시편 2편 8절의 말씀 온 세상의 당신의 백성들이 나귀를 타신 예수에 의해 다른 말로 십자가의 연약함을 통해 당신께로 다 돌아오게 될 것임을 힌트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우스꽝스러운 예수님에 의해 온 세상이 정복당할 것임을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해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서 나귀 새끼 같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부터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창세49:10~11) 10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지휘봉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이 와서 만백성이 그에게 순종하게 되리라. 11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 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 포도주로 옷을 빨고 포도의 붉은 즙으로 겉옷까지 빨리라. 야곱이 자기의 아들들에게 유언을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유언을 하면서 그의 후손으로 실로 즉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예언합니다. 그 메시아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옷을 포도주와 포도즙에 빨 것이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포도즙을 blood of grapes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포도의 피에 자신의 옷을 빨게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포도나무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빠는 이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복음서 모두에 공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거기서 등장하는 새끼나귀는 전부 매여 있는 나귀입니다. 그러니까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는 다른 말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의 모습은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붉게 적시고 물들이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피 묻은 저주의 옷은 모두다 자신이 가져가고 아버지의 백성들에게 새 하얀 세마포 옷을 입히시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묵시19:11~16) 11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 와 ‘진실’ 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을 썼으며 그분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의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13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 이라 하였습니다. 14 그리고 하늘의 군대가 희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15 그분의 입에서는 모든 나라를 쳐부술 예리한 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친히 쇠지팡이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분노의 포도를 담은 술틀을 16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모든 왕의 왕, 모든 군주의 군주’ 라는 칭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시편 2편의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백마를 타고 철장으로 적들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분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누구지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 뿌린 옷을 입고 있는 예수의 뒤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늘의 군대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앞장을 서셔서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받아내어 온통 피가 뿌려진 옷을 입으심으로 뒤에 따라오는 당신의 군대들인 성도가 희고 깨끗한 하얀 세마포를 입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그 피 뿌린 옷은 우리가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뿌려지는 피도 우리의 피였어야 합니다. (이사63:1-6) 1 에돔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붉게 물든 옷을 걸치고 보스라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위엄찬 옷을 입고 위세를 떨치며 저벅저벅 걸어 온 이분은 누구신가? ‘나는 구원을 약속하는 자, 도울 힘이 많은 자이다.’ 2 ‘어쩌다가 당신 옷에 붉은 물이 들었습니까? 당신 옷은 마치 포도주틀을 밟다가 물든 것 같군요.’ 3 ‘나는 혼자서 술틀을 밟아야 했다. 나의 백성 가운데 나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도 노여워, 나는 그것들을 마구 밟았다.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나의 옷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것이다. 4 원수갚을 날을 정하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내 복수할 해가 왔는데, 5 아무리 둘러 보아도 나를 돕는 자가 없었다. 놀랍게도 내 편을 드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 팔밖에 믿을 것이 없었고 나의 분노만이 나를 밀어 주었다. 6 너무나도 노여워 백성들을 짓밟고 너무나도 화가 나서 그것들을 짓바수어 그 피를 땅에 흘린 것이다.’ 이렇게 백마를 타신 예수님에 의해 짓 밟혀지고 짓 이겨져서 피를 튀기며 죽었어야 할 우리였는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당신 자신을 밟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로 당신의 옷을 적셔 버리심으로 우리의 옷을 희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스바니아가 이렇게 멋지게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스바니아3:14~17) 14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 소리로 외쳐라.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15 야훼께서 원수들을 쫓으셨다. 너를 벌하던 자들을 몰아 내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16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 이렇게 일러 주어라. ‘시온아, 두려워 말라. 기운을 내어라. 17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오늘 본문 15절의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는 말이 여기에 동일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두에 즈가리아서 9장에서 찾아본 바에 의하면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고 한 후에 ‘에브라임과 예루살렘 즉 유다의 칼과 활과 병거를 다 부수실 것이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온의 딸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답이 스바니아 3장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시온의 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야훼께서 예수 안에서 그들의 형벌을 제하였고 그들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아예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십자가이며 그게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오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왜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지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새끼 나귀를 타시고 다른 말로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부인하시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만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의 모습은 이 땅에서 어떻게 보여야 할까요? 역시 나귀 새끼를 탄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셔서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적심으로 원수들을 살려 내셨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구원의 때입니다. 은혜의 때 구원의 때에는 예수가 백마를 타고 와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백마를 타고 오시는 그 순간 죄인들은 멸망의 자리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천년 전 예수께서 이 세상에 백마를 타고 오셨다면 이 세상은 거기서 끝나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읽은 것처럼 백마를 타신 예수는 심판의 예수이신 것입니다. 이제 곧 그 분이 백마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 세력들이 모두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성도들이 백마를 타고 오신 주님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될 옛 사람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신 예수에 의해 구원을 얻은 성도의 삶에는 종말에 나타날 백마를 타신 예수의 심판의 전쟁이 자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백마를 타신 예수께서 이 세상의 죄를 모두 솎아내어 불 못에 던져버리시는 그것처럼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는 우리의 옛사람이 백마를 타신 예수에 의해 미리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 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이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마 백발백중 불 못으로 들어가야 할 자들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죄를 털어내고 잘라버리고 쫒아내고자 하는 예수님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면 우리는 복 받은 자들이 맞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힘과 꾀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궈놓은 아담 적 열매들을 하나하나 쳐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처럼 사랑하고 섬기기도 하며 참아주고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공격에 의해 우리의 옛 자아가 조금씩 죽어가게 될 때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나귀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는 나귀를 탄 바보 같고 연약한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마 타신 예수님에게 철장을 맞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연약하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들이 바로 백마를 타고 새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백마를 타신 예수님의 공격은 바로 우리를 그렇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늘의 군대로 만들어 가시는 은혜의 씨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것이 어떻게 십자가 복음으로 연결이 되는지 잘 아시겠지요?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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