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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의 비유 |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 손경민 (Feat.이윤화) (햇살콩일러스트) 468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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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수정후 재업로드 입니다. 이전에 올려주신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손경민 EP 음반 수록곡 ‘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누가복음 17장 10절)
이 곡은 2012년도에 작곡되어 오랜 묵상 기간을 거쳐 9년만에 발매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일본복음사역에 힘을 쏟고 있는 친구 이윤화 사역자가 불러주었습니다.
악보는 블로그에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kyungmin0716/222291186020
노래- 이윤화
작사, 작곡 – 손경민
편곡 – 손경민, 박정연
믹스\u0026 마스터링 – 이호 (Ark Studio)
디자인 – 햇살콩 (김연선,김나단)
영상 – 김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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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의 비유 (눅 17:7-10) – 기멀전

열심히 일해야 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이보다 더한 일도 해야 합니다. 종은 무익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익한’이라는 말은 ‘가치 없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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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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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 – 무익한 종 (누가복음 17:7-10) – 함께걷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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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과 착하고 충성된 종의 차이는 무엇일까? – 아이굿뉴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임의로 해석하여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한 것, 이것이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무익한 종이라 일컬어진 이유입니다. 착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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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21) 무익한 종의 비유 > 수요기도회 | 하늘품은교회

스토리가 흐르는 영감이 있는 예배로, 성경에 충실한 설교와 배움으로, 과업과 행사보다는 신앙의 성품과 인격으로, 지역을 섬기는 따뜻한 이웃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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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 손경민 (feat.이윤화) (햇살콩일러스트)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 손경민 (feat.이윤화) (햇살콩일러스트)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무익한 종의 비유

  • Author: 손경민 (Son Kyungmin Official)
  • Views: 조회수 272,346회
  • Likes: 좋아요 2,388개
  • Date Published: 2021. 3.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uQt9DWkq64

무익한 종의 비유 (눅 17:7-10)

무익한 종의 비유 (눅 17:7-10)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밖에서 열심히 밭을 갈고 양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피곤해서 좀 쉬려고 하는데 집에서 편히 놀기만 하던 사람이 밥상을 차려달라고 합니다. 꾹 참고 밥상을 차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에게 수고했다고 하며 같이 밥을 먹자고 하기는커녕 자기 옆에서 물과 수건을 들고 밥 먹는 시중을 들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나머지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부당하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 말씀처럼 그 사람이 종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종입니다. 자기 주장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야 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이보다 더한 일도 해야 합니다. 종은 무익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익한’이라는 말은 ‘가치 없는’ ‘쓸모없는’ 이란 뜻입니다. 나는 가치 없는 종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10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는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내가 수고해서 교회를 세우고, 내가 무수한 핍박을 받고, 내가 많은 시간을 드리고 헌신을 했다할지라도 이것이 자기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이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문제의 관건은 스스로를 이처럼 무익한 종으로 인정하느냐입니다. 인간은 끝까지 종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종으로 시작 하지만 마지막은 주인 행세를 하려는 종들이 많습니다.

종교개혁과 무익한 종

오늘은 종교개혁이 발발한지 490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당시 가톨릭을 비판하는 95개조 격문을 붙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은 성서 말씀을 떠나서 여러 인간적 교리와 전통으로 가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면죄부는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서 그 판매가 시작되었습니다. 연보궤에 넣은 돈이 바닥에서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죽은 영혼이 연옥에서 빠져나온다고 하며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하였습니다.

이에 반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외쳤습니다. 당시 교황과 사제들의 특권 의식에 반발하여 만인 사제주의, 곧 모든 사람이 누구의 중재 없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주장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 ‘오직 그리스도’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호들의 중심을 관통하는 사상이 바로 이 무익한 종의 사상이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교회에는 인간이 권리주장할 근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은 인간의 구원과 죄사함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처럼 주인의 관대함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지 내가 이만큼 선행을 했으니 그 보상의 대가로 구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서’는 성서를 대신해서 인간의 전통이나 교리가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라는 말씀 앞에 절대 순종해야 하는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만이 우리 왕이시다는 고백입니다. 교황이나 사제가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이념이나 철학이 우리 구원의 반석이 될 수도 없습니다. 종교개혁은 이처럼 인간이 무익한 종임을 선언한 사건입니다. 인간이 마치 주인처럼 행세한 것에 대해서 다시 원위치로 돌린 사건이 종교개혁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그 핵심은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무익한 종의 자세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6,70년대 어려운 시절을 지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개척 전선에 뛰어 들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옛날에는 성미함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쌀을 모아서 교회에 가져와서 성미함에 넣었습니다. 이 성미함은 가난한 목회자들을 위한 식량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신도들이 여성들이었습니다. 경제권이 없는 여성들이 도울 수 있는 길은 자기 집의 쌀 한 바가지를 몰래 퍼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 눈물겹게 충성했던 것이 당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누가 목회자가 되려 했겠습니까? 신학교는 요즘과는 달리 항상 미달이었습니다. 목회는 그야말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단란한 가정의 행복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녀들은 말이 하나님께 맡겼을 뿐이지 내팽개치고 오직 목회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런 괄목한 성장을 하게 된 것은 주의 종들의 이런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열심히 밭 일하고 양을 치고 집에 돌아와서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제 밥상 내놔라 하며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큰 교회를 이루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달라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적인 보상을 요구합니다. 세상적인 명예를 요구합니다. 이제는 내가 이렇게 성공한 목회를 하였는데 이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회세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당연할 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고생했으니까 자기 몫 찾아간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 명령을 따라서 순종해야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모든 영광과 권리는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장로나 권사 등 임직자들도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만큼 헌금했으니, 이 만큼 봉사했으니 그 권리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목회자와 장로의 갈등이 심각합니다. 급기야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장로들이 마치 기업의 오너가 된 것 같이 자신의 뜻대로 교회를 좌지우지 합니다. 교회에 인간의 소리가 너무 많이 납니다. 우리는 단지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헌신과 봉사를 했다 할지라도 나는 아무 권리 없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정년 퇴직을 하시면서 마지막 은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이 교회에 23년 동안 목회하며 교회를 성장시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해도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이 분은 65세에 조기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가 1981년도니까 그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이 분의 고별사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목사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무익한 종과 관련된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 9, 10절을 인용해 “명한 대로 행했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씀한 뒤, 교인들에게 “무익한 종은 물러갑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하고는 단상을 내려왔습니다. 이 분은 바로 청량리 중앙교회의 임택진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야말로 무익한 종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셨다 할 것입니다. 그 이후 임 목사님은 교회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설교해 달라는 요청도 뿌리쳤습니다. 교인 중 후임목사의 일에 대해 의견을 물어도 “그게 내 교회냐”며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 이런 분들이 많으면 우리 목회자들이 존경받고 한국교회가 정말 이 민족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마치 현대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은 젊었을 때 했던 열심과 충성을 나이 들어 다 까먹고 있는 형국과 같다 할 것입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를 잃어버린 한국교회가 다시 이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종교개혁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개척 단계이고 아직 젊기 때문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아마 저에 대한 판단은 나이 들어서도 이 무익한 종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일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무익한 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기도했으니까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까 이에 대해서 보상해 달라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보상받지 못한 것에 섭섭해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라, 사랑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우리는 이 명령을 수행한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실제 우리는 무익하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무익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우리 공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농사를 자기 혼 자 다 짓는 것처럼 착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씨앗이라는 생명체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땅도, 땅의 영양분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햇볕도, 비도, 적당한 온도도 다 하나님의 노력입니다. 인간은 적당한 때에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농약을 뿌린 조그만 수고를 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세상 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능력을 주시고, 그 자리에 세우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제도 환경들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내가 하지 않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항변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세우셔서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 일을 맡겨준 것에 다만 우리는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처럼 유익한 종을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또 그것이 자기 능력으로 된 것 마냥 교만해집니다.

어느 날 코끼리 한 마리가 자기 몸무게를 달아보기 위해 체중계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너무 무거워 그만 체중계가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마침 개미 한 마리가 코끼리 등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체중계를 부서진 것을 보고 개미가 코끼리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런 우리 둘이 함께 올라가니까 이런 일이 발생했구나…….” 우스개 이야기지만 우리 인간들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능력으로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담긴 보배가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높일수록 질그릇도 존귀해집니다. 반면에 보배를 무시하고 질그릇을 높이려 하면 결국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무익한 종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베풀고 주는 삶이 더 아름답습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인간관계는 추해지기 시작합니다. 섭섭하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나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들면 원망이 생기고 마음이 매우 불편해집니다. 그 사람을 보아도 심사가 뒤틀려 표정이 바뀝니다.

여러분 오늘 이 무익한 종의 비유를 보면서 혹시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까? 이 사람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부모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밖에서 돈 버느라 힘들어 지쳐서 집에 돌아옵니다. 좀 쉬려고 하는데 어린 자녀들이 와서 함께 놀자고 합니다. 끼니 때가 되니 밥을 차려 달라고 야단입니다. 밥 먹을 땐 또 먹여달라고 보챕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밥을 다 먹고 난 다음에서야 주섬주섬 밥을 먹습니다. 부모야말로 무익한 종의 모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자라면서부터입니다. 그때부터는 기대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기대에 못 미치면 섭섭함과 원망이 생깁니다. 그때부터 부모와 자녀의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인간관계를 이처럼 보상과 대가 개념으로 생각하면 복잡해지고 은원에 얽힙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듯이 인간관계도 은혜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아낌없이 베풀고 바라지 않을 때 서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익한 종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삶입니다. 한 소년과 나무가 서로 사랑을 했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 그 나무에서 그네를 타고 가지에 매달리며 놀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이 점점 성장하면서 더 이상 그 나무를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 나가서 살아야 한다면 그 나무의 열매를 요구합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다 줍니다. 또 한참이 지난 후에 와서는 집도 짓고 아내와 자식도 얻어야 한다며 나무 앞에 칭얼댑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나무가 자기 가지를 베어가라고 말합니다.

소년이 중년이 되어서는 배타고 멀리 항해를 나가야 한다면 나무의 둥치를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밑동만 남은 나무는 소년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미안했습니다. “얘야 이젠 내가 줄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 내 밑동에 앉아 쉬어라”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무익한 종과 같은 분은 아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생명과 우주라는 자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대가로 이제 편히 쉬셔도 될 텐데 어린 아이마냥 인간들이 가만히 놓아주질 않습니다. 죄는 자기가 저질러 놓고 이렇게 연약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기 실수로 불행을 자초하고도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느냐고 원망하고 빨리 도와주지 않는다고 야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런 모든 투정을 엄마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마치 무익한 종이 된 것 마냥 다 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까닭은 우리의 어떤 무리한 항변이나 짜증도 그분이 다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높으신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낮추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우리가 살게 된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무익한 종이 되어 우리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가 무익한 종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익한 자가 유익하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무익하게 될 때 유익한 존재가 됩니다. 항아리가 쓸모가 있는 것은 속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가 무익한 존재가 될수록 하나님은 그 안에 많은 주님의 보화들을 담습니다.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무익하다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고전 『장자』에 보면 쓸모없는 나무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엄청나게 큰 도토리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높은 산만 했으며 수천 마리의 소가 그 그늘에 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장석이라는 유명한 목수가 이 나무를 보면서도 “쓸모없는 나무야!”하며 그냥 지나칩니다. 크기는 하지만 배로도, 관으로도, 기둥으로도 쓰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장석이 이처럼 나무에 대해 악평을 하고는 집에서 잠을 자는데 꿈속에 이 도토리나무가 나타나 장석을 나무랍니다. “그대는 내가 과일 나무나 좋은 재목처럼 쓸모 있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가?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다 베어져 없어지고 말았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되었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성경으로 다시 푼다면 무익한 자가 실상은 유익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건축자의 버린 돌을 가져다가 큰 집의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모세가 그 나이 80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입술이 둔합니다, 안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며 하나님을 화나게 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쓸모없는 모세가 하나님의 손에 들릴 때 그 누구보다도 엄청난 일을 이루었습니다.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6:15)고 고백하는 기드온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형제 중 막내인 여덟째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저는 아이라 말할 줄도 모르다는 예레미야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죄인중 괴수인 사도 바울을 택하셔서 당신의 복음 증거자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무익한 것이 실살 유익합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성녀로 추앙받을 정도로 빈민들을 위한 삶을 살았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쥐인 몽당연필에 비유하였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몽당연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연필을 자를 수도 있고 깎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 쓰고 싶으면 쓰시고 그리고 싶으면 그리실 것입니다. 멋진 그림을 보거나 감동적인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미술도구나 연필을 칭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 감탄합니다. 온간 영예와 영광이 영원히 우리 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테레사 수녀는 정말 작아서 마치 몽당연필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었습니다. 몽당연필이 자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무익한 종처럼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아름다운 작품이 그려집니다. 몽당연필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여 그 작품의 영광은 몽당연필이 받지 않습니다. 그 화가가 받습니다. 몽당연필은 그런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연필이 하나님의 손에 쥐어질 때 작지만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몽당연필처럼, 무익한 종처럼 쓸모없다고 고백하는 테레사 수녀를 통하여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영혼을 구하는 지극히 쓸모 있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익한 자를 찾고 있습니다. 세상은 유능하고 쓸모 있는 사람들은 찾지만 하나님은 쓸모 없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묵묵히 아무 대가도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찾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그것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단지 주님의 명령을 기쁘게 감당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도 여전히 나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는 겸손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실상 이런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가장 유익한 사람들입니다.

무익한 종과 착하고 충성된 종의 차이는 무엇일까?

임석순 목사의 성경으로 풀어가는 기독교 교리여행(39) 하나님을 따르는 삶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25:16~18)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입니다. 오늘날의 계산으로 1달란트는 대략 6억 정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분량에 맞게 맡기시지만 가장 적게 맡긴 자의 달란트도 절대로 적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달란트로 수익을 남겨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을 받았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그대로 땅에 묻어 무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은 많은 일을 열심히 하고 무익한 종은 게으르고 적게 일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25:24)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임의로 해석하여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한 것, 이것이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무익한 종이라 일컬어진 이유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무지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전적인 선의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창2:17) 인간이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취한 것은 인간 스스로 선악을 아는 일에 주체가 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회복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누가 봐도 멸망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것은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마6:9,10) 아버지께서 뜻을 바꾸실 수 있는지를 물으셨고 또한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능력을 구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거듭하시면서(마26:42~45) 예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셨습니다.(마26:46)

우리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가 그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엡1:22,23/골1:18) 뇌와 육체가 연결되어야 하는데 연결이 끊긴 것을 ‘뇌사’라고 합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영적인 뇌사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내고 크고 놀라운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무에서 단절된 가지가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요15:1~5)

우리가 무익한 종의 삶을 살지 않으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 1.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묻고 2. 기도를 통해 내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아뢰며 하나님의 힘을 구하고 3. 기도로 알게 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의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어 어마어마하게 남는 일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통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국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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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으로 살아가기

김명길 목사 칼럼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무익한 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제자들에게 종의 자세를 지닐 것을 가르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스로를 종이라고 생각하고 종의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강요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자기를 종이라고 부르는 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기왕이면 양반의 마음으로 살려고 하지 종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독교는, 기독교가 믿는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2가지 신분을 모두 가져야만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종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3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종은 ‘소유권’이 없다. 종이 가진 건 모두 종의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종이 가진 재산이라고 해야 얼마나 되겠나.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조차도 자신의 것이 아니다. 모두 주인의 것이다. 주인이 달라고 하면 언제든 줘야 한다.

심지어 생명도 자기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 자기의 재능은 물론, 심지어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것이 되고 만다. 이처럼 모두가 주인의 것일 뿐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역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것’임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언제든 다시 돌려드릴 수 있는 종의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만약 주인이 잠시 맡긴 것을 관리하면서 마치 그것이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착각하고 오해한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늘 잊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어서 종의 2번째 특징은 ‘절대순종’이다. 종은 주인이 시킨 일에 대해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이 종이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종은 하루 종일 밖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온 상태였다. 온 종일 퇴약볕 아래서 일을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나. 배도 고프고 몹시 피곤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 그런 종을 향해 ‘너는 이제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먹는 동안에 옆에서 수종을 든 다음에 밥을 먹어야 한다’(7~8절)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화가 나는 상황인가? 요즘 말로 하면 갑질이다. 자신은 집에서 하루 종일 놀고 먹었으면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온 사람한테 쉬지도 못한 채 식사 준비와 시중을 들라고 하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종은 그 상황에서 따지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저 주인이 양을 치라면 양을 치고, 밭을 갈라면 밭을 갈아야 한다. 불평이나 문제제기는 종의 영역이 아니다.

혹시 여기까지 읽은 후 행여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갑질하는 하나님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에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고, 억울하고 화나는 상황에 처할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키신(허락하신) 일이라면, 따지고 불평하기 보다는 내 생각과 계획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순종하는 것이 종의 자세임을 누가복음 17장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순종에 있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에만 순종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건 믿음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와 납득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순종할 준비가 됐는지 안 됐는지를 보실 뿐이다.

마지막으로, 종의 3번째 특징은 ‘보상이 없다’는 것이다. 일을 시킨 일꾼에게는 그 보상으로 ‘삯’을 준다. 하지만 종에게는 보상이 없다. 심지어 고맙다는 인사도 듣지 못한다.

누가복음 17장 9절에서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라며 선을 그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찬바람이 느껴질 정도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이리도 인색하단 말인가. 고생한 만큼 인정받는 것이, 그걸 알아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종이라고 왜 칭찬받고 싶어하지 않겠냐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서운해하고 상처받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과 관련이 있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서운함과 상처가 그것이다.

교회 안에서 내가 이만큼 일하고 있는데, 내가 이만큼 헌신했는데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이 그만큼 안 알아주고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운해하고 상처받는다.

꼭 그걸 바라고 하는 헌신이나 봉사는 아닐지라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그런 심리적 보상이 없을 때 우리는 서운한 마음을 갖게 되기 쉽다. 목사나 성도나 이 점에서 예외는 없다.

그런 우리의 약함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종의 마음을 갖길 원하셨다. 보상이나 인정이 없을지라도 서운해하지 말고 상처받지 말고 묵묵히 너의 할 일을 해 나가라고, 그것이 종의 자세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앞에 ‘하나님의’ 라는 수식어가 달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나님의 종은 이 세상 그 어떤 자리보다 존귀한 자리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그 분 앞에 서는 순간, 우리 모두가 이 고백을 하게 되길 바란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김명길 목사

현 웨슬리 교회 부목사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과정

감리교 신학대학교 목회학 석사

건국대학교 히브리학과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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