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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팔복 | [Live] 팔복으로 사는 신앙 (마태복음 5:1-1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10120 123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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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 복음 팔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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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RqQchymyb8

[산상수훈] – 팔복(八福) <마태복음 5:1-12>

– 목사님 설교 요약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자’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며, 배고픈 자가 본능적으로 영양을 섭취하고자 하듯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자이다.

부자나 권력자라도 심령이 가난할 수 있으며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라도 심령이 가난하지 않을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므로 늘 묵상하고 기도한다.

‘복이 있나니’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뜻이다. 내가 보상으로 받는 게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께 받음을 가리킨다. 복이란 주시는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자들의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자기의 고통을 인식하는 눈이 열린 자이다.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죄를 지어서 괴로워하는 자다. 영적 감각이 죽은 자는 애통함이 없다.

또한 사랑이 있는 자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모습을 보고 애통해 하는 자다.

몸이 아픈 곳을 아는 건 축복이다. 아픈 곳을 모르면 무감각한 것이므로 불행하다.

나의 모순이 느껴지고, 나의 아픔이 드러나게 되어서 그것을 느끼고,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면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건 축복이다.

애통해 할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위로하신다. 애통해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지 않는다.

나의 모순, 나의 약함, 나의 부족함을 안타까워하고 이 땅에서 내가 요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식하여 애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해야 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란 하나님에 의해 다듬어지고 하나님 앞에 길들여짐을 말한다. 마냥 부드럽고 따뜻하라는 뜻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온유해 질 수 있나? 하나님에 의해 다듬어져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은 온유함을 나타낸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다.

다윗은 어렸을 때 거인 골리앗을 이겨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이후 20여 년간 방랑 생활을 하며 온유함의 훈련을 쌓았다.

힘이 있으되 온유함의 훈련을 쌓아야 한다.

성경에는 온유에 대한 표현이 무수히 많다.

* <시편 18: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 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 <마태복음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 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 <민수기 12:3> 모세는 온유 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

땅은 토지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사회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이 온유하게 나를 붙들어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해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인간은 ‘의(義)’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를 의인으로 칭했으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를 가리킨다.

<사도행전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때로 세상을 거스른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전도할 때 이를 시기하던 그 지방의 유대인들이 신자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 소동을 일으켰다.

”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다! 카이사르 황제 외에 다른 임금이라며 예수라 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

<사도행전 17:6>

사도 바울을 믿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예수의 능력이 넘치던 자들이었으며 세상을 뒤바꾸던 자들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신들이 베푸는 잡다한 의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며 영원하고 불변하며 삶의 이정표가 될 진정한 의에 목말라 있던 자들이었다.

의에 주린 자는 하나님의 손길을 갈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목말라 한다. 나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 안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한다. 자비, 용서, 어진 마음과 같다. 베풀었을 때 돌아오는 것을 예상하는 건 긍휼이 아니다.

어떤 임금이 빚진 종의 부채를 탕감하여 주었다. 그 종은 감사하며 돌아가 자기에게 빚진 동료가 갚지 않자 그를 옥에 가두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노하여 그 종을 도로 가두어버렸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는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어진 마음은 긍휼의 마음을 대변한다.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긍휼히 대해야 할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 저항하고 뜻을 저버리며 적대시하는 부류에게 긍휼히 대할 순 없다. 가룟 유다,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긍휼의 대상이 아니다.

악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는 것은 악을 받아들임을 뜻하며 긍휼이라 할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청결이란 ‘Pure in heart’이며 순결, 순수함을 뜻한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건 도를 닦는다거나 수양을 하여 인격을 완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특별한 비법이 있어서 특별한 몇몇 사람에게 전수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수준으로 청결해야 할까?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가능하다. 누구나 가능하며 많은 사람들이 청결할 수 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꾸준히 순종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다. 하나님은 역사(歷史) 속에 역사(役事)하신다. 역사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꾸준히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여, 시대를 거치며 징벌과 권면을 통해 다듬어져 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 눈의 청결의 차이로 각각 다르게 보이긴 하나 – 누구나 다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성경을 더 공부해야 하며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본다’는 건 무엇일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거나 에스겔처럼 어떤 형상을 보는 게 아니다. 그런 건 매우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때의 특별한 현상이다. 본다는 건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더 가까이 다가감을 뜻한다. 한 언덕을 넘으면 다른 언덕이 보이고, 산 하나를 넘으면 다른 산이 보이며 점점 다가가게 된다. 이는 마치 자식을 낳아보고 난 뒤에야 어머니의 모습이 새롭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녀는 비로소 어머니의 정성과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닫게 된다.

욕심과 죄악이 눈을 가리면 눈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한다. 사탄의 유혹 소리가 더 크게 들려 보는 눈을 막기 때문이다. 달콤한 소리 뒤에 멸망의 구렁텅이가 도사리고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노력하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 속이 평화로워야 모든 것이 평화롭다. 먼저 나 자신과 화해하고 화평해야 한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려져 있다면 결코 화평할 수 없다.

진정한 화평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부여받는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 을 누리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자다.

<사도행전 10:36-37>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 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며 희생으로 섬기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건 인간 최고의 찬사이다.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뜻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세상의 ‘의’는 움직이며 변화하며 상대적이다.

하나님의 ‘의’는 흔들리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다. ‘의를 위하여’란 ‘그리스도를 위하여’이다.

복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심령이 가난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복음을 전파한다. 세상에 거역하므로 박해를 받는다.

핍박을 통해서 나의 신앙이 자란다. 핍박을 통해서 찌꺼기가 빠져나간다. 반면 세상적 불이익을 감내해야 한다. 불이익을 뛰어넘어 더 큰 이익을 바라봐야 한다.

이들에게는 복 중의 가장 큰 복, 천국이 기다린다. 하나님의 상급이 기다린다.

————————————————–

*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여덟 가지 복)은 복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명령이며 권고이다.

팔복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화평’과 ‘박해’로 귀결된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박해를 받더라도 기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게 되고,

마지막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의 상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스라엘 갈릴리 지역에 세워진 팔복교회>

(2012.9.23. ~ 2012.12.2. 일산벧엘교회 박광석 목사님 설교 중 발췌)

마태복음 5장 1-12절 팔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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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5:1-12

1. 본문 읽기

마태복음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태복음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2. 강해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주님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산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 장소와 보좌를 뜻합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을 강조합니다. 사실 갈릴리 주변에서 산이라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작은 둔덕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마태는 ‘산’으로 표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써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아래의 구절들을 읽어보면 성경 안에서 산이 갖는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 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이사야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 에 앉으리라

이사야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 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마태복음 15: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마태복음 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왕이 보좌에 앉았으니 이제 신하들이 왕께 나올 차례입니다.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제자들이 되지 않았습니다. 익명으로 남아있고, 자신이 이름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무리에서 제자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무리가’(4:25)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로 남겨져 있습니다. 1절 후반부눈 ‘제자들이’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반대로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곧 제자들입니다. 무리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리는 자신의 필요를 따라 예수님을 따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산은 보좌이고, 권위의 상징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진리에 대한 명징함은 수많은 공부와 빅데이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신에서 시작됩니다.

“복이 있나니(Μακάριοι)”

주님은 진정한 가치에 대해 설파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과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복이 확연히 다릅니다. 주님은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 하십니다. 가치의 전복이자 세계관의 차이입니다. 물질의 과한 소유를 복이라 생각하고, 건강을 복이라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타인과 약자에 대한 차별, 경쟁, 탈취의 개념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경쟁해 이겨야하고, 타인보다 더 많이 소유해야하고, 더 많은 권력을 쥐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적이며 타인에 대한 탈취로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순수한 방법은 없습니다. 적든 크든 세상의 복은 타인의 불행을 전제로 합니다. 겸손한 자라면 자신의 노력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거나 성공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나누지 못함을 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복은 불행하게 된 타인들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전복된 가치요, 세상에 다른 관점 즉 다른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의 시작입니다.

가난, 애통, 온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마태는 ‘심령(πνεῦμα)’을 첨가합니다.(프뉴마(πνεῦμα)은 성령, 바람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구약의 ‘루아흐’와 거의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과 육신, 또는 삶이 구분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이 먼저 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유난히 마음에 대해 강조하고 있음이 전반적으로 드러납니다. 특히 산상수훈에서 강조됩니다.

마태복음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가난한 자는 문자적으로 소유의 문제입니다. 당시 가난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가진 자들은 자신이 부로 거짓 증인을 사고, 권력을 사서 가난한 자들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소유를 더 불리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저주이자 비루한 인생 자체를 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말함으로 전혀 새로운 가치관, 관점을 제시합니다. 땅에서 가난한 자들이 왜 복이 있는가 주님은 그 이유를 ‘천국이 그들의 것'(3절)이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소유의 문제입니다. 땅에서의 상실이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단지 물질의 가난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심령의 가난은 땅의 것의 무의미하함을 아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기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은 다시 애통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애통은 죄에 대한 애통, 즉 자신의 본질에 대한 애통임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애통입니다. 타인을 불행을 좌시(坐視)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는 자는 자기기만에 빠진 자들입니다. 애통은 자기와 타인을 구분하지 않는 모든 죄에 대한 총체적인 애통입니다. 애통의 기저에는 소망 없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허무함과 무의미를 직시하는 것, 그것이 애통의 시작입니다.

온유함은 애통의 결과이자 전제입니다. 온유는 형식상 친절하다는 뜻이지만 훨씬 많은 것을 내포합니다. gentle로 번역되는 온유(파라후스 πραΰς)는 종종 겸손과 함께 쌍을 이룹니다.

마태복음 11장29절 나는 마음이 온유(πραΰς)하고 겸손(ταπεινὸς)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온유는 성격이 좋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폭력과 무자비에 대한 항거입니다. 온유는 연대이며, 포괄이며, 협력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땅, 즉 영향력을 얻게 됩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얻게 됩니다. 땅은 영향력이며, 타인의 지지와 포용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즉 지배력을 말하며 의역하면 ‘왕’이 된다는 말입니다.

의, 긍휼, 마음의 청결

온유와 의는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온유가 개인적 성향이 강한반면 의는 관계적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의’는 종종 가난한 자를 향한 구제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실천적 삶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의의 결과는 ‘배부름’입니다. 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러므로 의는 곧바로 ‘긍휼’로 내재화 됩니다.

긍휼은 구약의 헤세드와 다르지 않으며, 타인과 나를 한 몸으로 보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긍휼 없이 기독교는 없습니다. 타인과 하나 된 마음은 궁극적으로 ‘마음의 청결’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욕심은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사랑은 마음을 맑게 하고, 명징하게 드러냅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청경은 반드시 ‘화평’으로 나아갑니다.

화평, 핍박 받음

예수님의 사역은 화평입니다. 궁극적으로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속죄의 사역을 전제 합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교만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양태(樣態)는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엄밀하게 하나님에 대한 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떤 죄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없습니다. 모든 죄는 관계적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를 사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벽과 담을 허무시고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6절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에베소서 2장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골로새서 1장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화평은 불가피하게 핍박을 불러 옵니다. ‘나를 위하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속에서라는 뜻입니다. 화평을 추구하는 자들은 탐욕자들의 미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십자가가 만든 화평은 세상의 모든 판단의 기준과 가치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소유로 사람들을 구분하고, 권력으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학벌과 인종, 출신성분으로 혐오하고 반목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차별과 반목을 제거하고 오직 십자가로 하나되게 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십자가의 기준을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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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태복음 5:1-3)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태복음 5:1-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 제목에, ‘심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마음과 영혼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새롭게 가지게 되는 생각들을 ‘관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보이는 부분에 대한 관심을 주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잘 신경쓰지 않습니다. 몸의 건강도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팔복’으로 많이 알려진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첫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산에 오르셔서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내용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이란 무엇인가요? 혹은 어러분은 ‘어떤 복’을 받고 싶은가요?

사람들은 흔히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자녀들이 잘 되었거나 건강하거나 장수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소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돈, 건강, 생명 등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난’, 즉 ‘소유하지 않은 상태’ 가 복있는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걱정과 염려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죄와 벌』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는 마태복음의 첫 번째 복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아무 것도 잠가둘 것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 (Blessed are they who have nothing to lock up)

무언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잠가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생기고, 소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무언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생기면서 전에는 없었던 염려와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이것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떻게 빼앗기지 않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더 늘리고 가져야 할지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걱정과 염려를 주는 존재가 동시에 ‘복’이 된다는 것이 모순이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됩니다. 물질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성가들은 가난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이들은 그것을 ‘거룩한 가난’(holy poverty)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성가들은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가난을 통해서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놓는 훈련을 했습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물질에 대해 바른 태도를 의미합니다.

물질을 갖기 위해 삶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나누는 삶이 되는 것의 축복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마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먼저 본문 3절을 읽어봅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PPT한영)

마태복음의 첫 번째 팔복의 말씀은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만이 아니라, 내면의 가난함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을 말합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건강을 잃었을 때, 학업이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삶의 큰 시련을 맞이했을 때 등, 우리가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때, 나의 무기력함과,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마음의 가난이 절망을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가난 속에서, 무엇으로 채울까… 성경은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했는데,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적 관점이 강한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계명을 따라서 ‘하나님’이란 말이 나오면 다른 단어로 고쳐서 쓰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도 ‘하늘나라’, 하늘 ‘천’자에 나라 ‘국’자로 바꾸어서 썼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만 ‘하늘나라’, ‘천국’이란 말로 쓰고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그대로 썼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심령”이란 말이 없고 그냥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여기 “가난”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해야 할 정도의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뜻합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첫째는, ‘πένης’ [penes]란 단어이고, 둘째는 ‘πτωχός’ [ptochos] 라는 단어입니다. 예를들어, 페네스는 수입은 있지만 남는 게 없고 여유가 없는 가난, 즉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가난입니다.

그러나 프토코스는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고, 파산을 당하거나 해서,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10초에 한 명 꼴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프토코스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하고 절대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은 바로 두 번째 프토코스의 가난입니다. 가장 절망적이고 무력하게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오히려 저주에 가까워 보입니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꼭 돈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하게 되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인종이나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소유’, ‘부’, 즉, ‘넉넉함’입니다. 물질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운 것을 다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다 ‘부’를 추구하고, ‘풍요’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우리의 이해와는 반대로, 역설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좋아하고 희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가난한 사람, 절망한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분명히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시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부자가 복이 있다, 천국은 부자의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가난의 상태를 ‘복’있는 상태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의 상태가 복된 상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하지 않으면 복이 없는가?’ ‘부자는 복이 없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언뜻 생각해봐도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넉넉한 삶을 살아가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가난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성경에서 ‘가난함’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가난함 그 자체가 옳다고 말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가난 자체를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잘 보면 가난은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함은 영적이든 경제적이든 하나의 ‘현상’일 뿐, 복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잘 못 해석하여 가난한 것,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그 자체를 미덕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무소유’라는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만일 가난 자체가 복이라면, 우리가 노력하고 발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서, 일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난 자체를 복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 자체를 축복하시고, 또 부와 물질 자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가난’은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 때문에 어떻게라도 무언가를 구걸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도움을 구하고자 상태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으로는 뉘앙스가 잘 살아나지 않는데, 헬라어로 보면 이 구절 중간에서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οτι’(호티), 즉 ‘왜냐하면’이란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에 따르면, 천국을 소유한 사람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즉 가난한 것, 혹은 영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가난’이라는 것은 무언가가 필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심령, 곧 마음과 영혼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과 영혼에 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을 소유한 사람, 즉 이 세상 기준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고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을 잘 믿는 부자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지금 잠시 나에게 있을 뿐, 원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의 것을 내가 잠시 맡아두고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청지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을 복되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 삶의 기준이, 이 세상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되다, 하신 이유는 단지 ‘가난’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필요하다는 믿음 곧 ‘심령의 가난’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천국이 주어지고, 그래서 복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유’를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돈, 학벌, 경험 등, 내가 가질 수 있는, 혹은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가하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소유는 내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잠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와 조금 다릅니다. 우리 삶의 배경은 모두 다르겠지만, 한국의 경우는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이후에 경제성장이 되어서, 70년대 말부터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넉넉한 환경이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있는 대부분의 분들은 그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물론 각 가정형편이 다르겠지만, 상대적 빈곤을 경험했을 뿐이지, 절대적인 빈곤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상대적 빈곤이란, 누군가와 비교해서 어려운 것을 의미하고, 절대적 빈곤이란, 모든 사람이 어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함께 어려운 시절을 경험하진 못했습니다.

해외에서 자란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자란 분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미국은 이미 강대국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분들이나, 십대에 미국에 와서 자란 분들 모두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들입니다. 그런데 2000년 이후로 경제성장이 멈추고,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여러분 세대가 겪고 있는 문제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입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넉넉하지만, 개인의 만족도는 낮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풍요롭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역설”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한번쯤은 곱씹어 볼 내용입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는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난다.

너무 책을 적게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로 늘어났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 주며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서두르는 것은 배웠지만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엄청나게 일을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사유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맞벌이가 늘어나지만 이혼은 늘고

집은 근사해지지만 가정은 깨지고 있다.

세계 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 시간은 늘어났어도 기쁨은 줄어들었다.

식품은 다양해졌지만 영양가는 줄어들었다.

아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친구는 줄어들었다.

교통수단은 더 빨라지지만 소통은 더 막히여졌고

광고는 더 많아졌지만 상업 양심은 더 줄어들었다

쾌락을 느끼게 하는 약들은 많이 졌지만

행복을 느끼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축복’이라는 것은 결코 소유를 통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가질까’, 즉 ‘소유’에 집착한다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심령의 가난함을 간직할 때,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물질적 소유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인데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라는 성경구절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외우기도 하는 구절일텐데요, 11절과 12절을 함께 외우는 분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11절과 12절을 함께 보시죠.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지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때로는 가지지 않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됩니다. 오늘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팔복이란 무엇인가요?

질문

팔복이란 무엇인가요?

답변

팔복은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을 시작하시면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축복 선언으로서 (마태복음 5:3-12), 각 문장이 “…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문구로 시작됩니다. 정확히 몇 개의 축복 구절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7개, 9개, 혹은 10개라고까지 말하지만, 숫자상으로는 8개로 보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은 한 개의 복으로 봄).“복이 있나니”로 번역된 헬라어는 “행복, 더 없이 행복한”, 또는 문자 그대로 “확대되다”를 의미합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은 피상적 행복 그 이상을 언급하시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하십니다. 이 문맥에서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은 영적인 행복과 번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행복은 영혼의 깊은 기쁨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 측면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림, 긍휼, 마음의 청결, 화평하게 함, 박해를 받음) 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두 번째 측면(천국, 위로, 땅의 기업, 배부름, 긍휼히 여김,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짐, 천국의 상속) 역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복이 있는 자는 천국을 미리 맛보며 구원에 참여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팔복 구절을 다르게 번역하면 “오, …의 더 없는 행복 (또는 축복)이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팔복은 이상적인 제자상과 현재 및 미래에 누릴 수 있는 보상을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구절 안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품 및 생활 방식을 영위합니다. 문학적인 형식으로서 팔복은 또한 구약 성경, 특히 시편 (1:1, 34:8, 65:4, 128:1)과 다른 신약성경 (요한복음 20:29, 14:22, 야고보서 1:12, 요한계시록 14:13)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신약 히브리어 설교말씀] 산상수훈 팔복 강해설교(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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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신약 히브리어 설교말씀 중에서 산상수훈 팔복 강해설교의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팔복을 통해서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산상수훈 팔복 강해설교(마 5:1-12)

마태복음 5:1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면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왔다. 산에서 앉으셨다는 것은 오후 정도로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아침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산으로 바람이 부는데 저녁이 될수록 산 위에서 바다 쪽으로 바람이 분다. 예수님은 바람을 이용하여 무리들에게 설교하셨다.

1. 무리에 대한 예수의 연민의 마음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 헬라어에서 산(호로스)이란 단어에 관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산은 예수의 공생애와 인연이 깊은 산이었을 것으로 본다. 아마 갈릴리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산이었을 것이다. 히브리어는 하르이다. 히브리어에도 하라는 관사가 붙어있다.

1. 산에서 행해진 그리스도의 역사

1) 시험을 받으심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2) 설교하심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15: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막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3)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르심

마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 17:1-8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4) 변화산 상에서 변화하심

마 17:1-9

막 9:2-10

눅 9:28-36

5)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심

마 28:16,17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6) 예언하심

마 24: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7) 고뇌의 동산

마 26:30,31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8) 승천하심

눅 24: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 나아온지라(프로셀단 아우토)

기본형 (프로세르코마이)는 (프로스:가까이, 곁에, 향하여)와 (에르코마이)의 합성어로서 “접근하다. (영적으로). 접근하다. 가까이 다가가다. (은유적으로) ….에 응하다. ….에 동의하다”는 뜻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는 말이다.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그분의 오묘한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헬라어 문법은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복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려고 할 때 실제로 제자들이 나왔다는 말이다. 말씀을 전하는 시점은 현재인데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어디에서 말씀을 전하시는지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히브리어는 나가쉬 5066 동사이다. 나가쉬(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가까이 끌어당기다 draw near, 접근하다 approach’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대상에게 매우 가까이 근접하여 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어근과 매우 비슷한 말인 카라브(7126)와 달리, 나가쉬는 실제적인 접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25회 나오며, 칼, 니팔, 호팔,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1. 예수의 부름에 순종한 자들

마 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 산상보훈의 직접적 대상-제자들

눅 8: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참고) 마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마태복음 5:2

†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입을 열어서 예수님이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가르치다는 단어가 야라 3384 동사이다. 던지다, 쏘다, 가르치다, 비를 내리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율법과 연관이 있는 단어다. 율법의 어근이 야라에서 왔다. 율법의 토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가르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집어던진다는 의미가 있다. 야라의 동사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님이 입을 열어 가르치신 산상수훈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한다.

1. 침묵 후의 발설(신중한 발언)

욥 3: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행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2.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자 할 때

시 78:1,2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잠 8:6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마 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3. 마땅히 할 말을 담대히 말하고자 할 때

잠 31:8,9 너는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마태복음 5:3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가난한 자는(호이 프토코이)

기본형 (프토코스)는 (프톳소:구부리다. 움츠리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고 “구걸하는, 의지하여 사는, 가련한, 무력한”이라는 뜻의 ‘지극한 가난’을 의미한다. 히브리어로 가난이라는 단어는 아니 6041이다. 아니(형용사)는 아나(6031)에서 유래했으며, ‘가난한 poor, 비천한 humble, 낮은 lowly, 억압(압제) 받는 oppressed’을 의미한다. 히브리적 개념의 가난은 돈이 없어서 구걸하는 개념의 가난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억압당하고 비천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비천해지고 가난해지셨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1)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대하 33:12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대하 34:27 내가 이 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잠 16:19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약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약 4:9,10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2)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자

삼하 7:18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삼하 9:8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 보시나이까

욥 40:4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3) 회개하는 자

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눅 18:13,14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4)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가난한 자

눅 18:28-30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참고) 눅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 영적으로 좋은 가난

1) 통회하는 심령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2) 하나님의 가난

사 14:32 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

3) 가난하나 부요한 것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3. 영적으로 나쁜 가난

1) 말씀의 결핍

암 8:11,12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2) 부패(타락)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 미숙

고전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복이 있나니

* 복이 있나니(마카리오이)

기본형 (마카리오스)는 본래 시(詩)에서 사용되던 단어로서 신들의 복됨을 가리킨다. 후에 이 단어는 부자들이 일상적인 걱정, 근심에서부터 놓여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뜻한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 쓰이면서 변형되고 고상하게 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진단팔복(眞端八福)의 비참한 세상이라고 보이는 특이한 상황들과(마 5:3-12) 또는 희귀하고 난해한 행위들(요 13:14-17)과의 관련성 속에서 맛볼 수 있고 이해되는 행복이다.

딤전1:11의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연결성 속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의 복은 예수처럼 세상의 죄와 비참의 무거운 짐을 지시는 대속자로서의 자기비하(自己卑下)에 있음을 나타내 주고, 이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있음을 나타내 준다. 히브리어는 아쎄르 835이다. 행복, 복, 지복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의 복은 정직하게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1. 복의 이유 및 내용

1)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2: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시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112: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 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9:1,2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시 128: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 148: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잠 8: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눅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죄사함으로 인한 내적 행복

시 32:1,2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롬 4:8-9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3)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보는 것

마 11:8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4) 하나님의 나라와 약속에 참예하는 것

눅 6:20,2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호티)

“왜냐하면”이라는 뜻으로 개역성경 본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팔복의 모든 문장들이 본문으로 성립되어 있는데 그 중간에는 항상 (호티)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3절을 직역하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번역된다.

1. 천국에 참예할 수 있는 자

1) 회개한 자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2) 어린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의 소유자

막 10:14,15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약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마태복음 5:4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애통(**: 펜도스)

여기서의 애통은 죄를 지은데 대한 슬픔만이 아니며, 이 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없고, 이 세대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애통인 것이다. 애통하는 것은 이 세대로부터 구별 짓는 표시가 되며, 언제나 죄를 지은데 대한 참회의 슬픔이라고 하는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히브리어는 아벨 57이다. 슬퍼하는, 애도하는 자라는 뜻이다. 헬라여 애통하는 자의 문법은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이다.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은 지금 계속해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애통해할 때 위로를 받게 된다.

1.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함-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시 51:3-5,17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슥 12:10-14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 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고후 7:9,10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약 4:9,10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2. 백성의 죄악과 그들이 당할 재앙으로 인해 애통함

겔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중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렘 9:1,2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패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눅 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롬 1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벧후 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룻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3. 대적의 핍박, 육적인 고난 등으로 인해 슬퍼함

시 6:8-8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시 13: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 116:3,4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에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눅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파라클레데손타이)

기본형 **(파라칼레오)는 **(파라:곁에. 가까이)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서 “곁으로 부르다. 옆으로 소집하다. 이끌다. 격려하다. 위로하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그를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문법은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복수 3인칭이다. 직설법은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미래 시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애통하는 자는 앞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수동태는 이런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위로를 해 주신다.

히브리어는 나함 5162 동사이다. 나함(동사)은 기본 어근이며, ‘후회하다 repent, 위로하다 comfort’를 의미하며, ‘회개하다, 애석해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라는 의미도 함축한다. 이 어근의 기원은 ‘깊이 숨 쉼’ 따라서 사람의 감정, 주로 슬픔, 동정, 위로의 육체적 표출이라는 개념을 반영하는 것 같다. 문법은 푸알(강조수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이다. 푸알 동사를 사용한 것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위로를 받을 것을 말한다.

1. 하나님(예수)께로부터 오는 위로

사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사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51:11,12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사 57: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사 61:2,3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고후 1:4-7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은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 성령의 위로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 하나님의 말씀(성경)의 위로

시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4. 위로의 목적과 결과

1) 주님을 의지함

시 23:1-6

2) 하나님께 합당히 행함

살전 2:11,12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3) 사죄의 은총 경험

슥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시 32:3-5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에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4) 환난으로부터의 구원, 보호

시 40:1-3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5) 고난을 견디는 힘을 얻음

고후 1: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6) 기쁨과 감사를 체험함

사 12: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사 49: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고후 7: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5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함(**: 프라위스)

“부드러운, 유순한, 친절한”의 뜻인데, 여기에서 상속이 약속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은혜로운 뜻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어의 온유함은 아나우(형용사)는 아나(6031)에서 유래했으며, ‘가난한, 고통받는, 비천한, 겸손한, 유순한, 온유한’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9회 나온다. 히브리적 개념은 온유와 겸손이 같은 개념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온유이며 겸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하여 헌신할 때 예수님이 이름이 높임을 받는다.

1. 조롱과 비방에 인내하는 온유한 자

민 12:1-3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시 2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3. 성령의 열매인 온유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4.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온유의 성품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로 좇으며

딛 3: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벧전 3:4,15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5. 주의 종에게 온유한 마음이 필요함

고전 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1. 온유한 자에 대한 상급

1) 땅을 차지함

시 37:9,11,22,34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2) 하나님께서 구원하심

시 76:8,9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시 149: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3) 심판때 인도를 받음

시 25: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4) 육체적 필요가 채워짐

시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5)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음

습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6) 하나님께서 붙드심

시 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7) 기쁨이 더함

사 29: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마태복음 5:6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주리다’는 말속에는 은유적인 의미로 ‘열망하다’는 뜻이 있다. 따라서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강렬하게 열망한다’는 뜻이 된다. 히브리어로 주린다는 말은 라에브(형용사)는 라에브(7456: 배고프다, 굶주리다)에서 유래했으며, ‘굶주림, 배고픔 hungry’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0회 나온다. 엄청난 기근이 왔을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주리고 있다면 복이 있는 자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배부름으로 채워주실 것이다.

1.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갈급함

시 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 63:1,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영혼의 갈급함

시 119:123,131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벧전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함이라

3.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4.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곳

1) 복음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 우리의 불의가 있는 곳

롬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

마태복음 5: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라함 동사이다. 라함(동사)는 라함(7356)에서 유래했으며,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심을 갖다, 자비롭다’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자연적인’ 유대에 뿌리를 둔 깊은 사랑(대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해 갖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 어근의 피엘형은 우리가 동정, 연민, 자비 등 여러 가지로 알고 있는 깊은 내적 감정에 대해 사용된다. 여기에서는 푸알(강조수동) 미완료를 사용했다. 남을 긍휼히 볼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긍휼함을 계속해서 받을 것을 말한다.

1.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

삼하 22: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시 18: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2. 성도가 긍휼히 여길 자

1)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Mercy)과 구제

욥 31:16-20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내가 언제 사람의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시 37: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시 4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시 112:4,9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잠 14:21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단 4:27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편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2)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긍휼(자비)

슥 7:9,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3) 다른 신자(형제)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4) 마음이 상한 자

시 109:16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5) 원수

삼상 23:21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6) 의심하는 자

유 1: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7) 동물

잠 12: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8)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자들

유 1: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3. 남을 용서하고 사랑함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18:33-35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4. 성도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

1)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기 때문에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2) 주를 존경하기 때문에

잠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3) 긍휼 없는 심판을 면하고, 이기기 위하여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4)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기 때문에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5. 긍휼을 베푼 자의 실례

1)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마 9:13,27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 다윗이 사울에게

삼상 24:10-13,17

†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긍휼(**: 엘레오스)

히브리어 헤세드(자비)에 해당하는 말인데 손님과 주인, 상전과 하인 등의 상호적 관계, 그 밖의 계약적 상호관계에서 야기되는 태도를 가리킨다. 긍휼은 성품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키며 다른 사람이 당하는 부당한 고통으로 인하여 야기된 자비심과 더불어 두려움도 내포하고 있는 감정을 의미한다.

1. 심판 날에 긍휼을 입음

딤후 1:16-18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만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2.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음

마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3.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음

호 2:1,23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롬 11: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딤전 1:13,16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4. 주의 자비하심을 입음

삼하 22: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시 18: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5. 자손이 복을 받음

시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마태복음 5:8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청결한(**: 카다로스)

“깨끗한, 순결한, 거룩한”의 뜻인 이 용어는 본래 신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의 속성으로서의 의미였으며 후에 도덕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에일리크리네스, 순수한)는 못 쓸 것은 다 가려내고 순수한 것만 남은 것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는 바르(형용사)는 바라르(1305: 깨끗하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깨끗한, 순결한, 정결한’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완전히 청결하게 된 것을 말한다.

1. 하나님 앞에 설 자-마음이 청결(Purity)해야함

시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2. 마음의 청결을 사모하는 성도

잠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딤후 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3. 내면으로부터의 청결이 중요함

마 23:25-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4. 마음을 청결케 하는 법

1) 하나님께 청결한 마음을 달라고 간구함

시 51:6,10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2) 죄의 자백으로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3) 그리스도의 피로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4) 진리를 순종함으로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1.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봄

(참고) 히 12:14

2. 마음의 눈이 밝아짐

엡 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3. 그 날에는 얼굴을 맞대고 주를 볼 것임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온전히 알리라

요일 3: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마태복음 5:9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아론이라는 이름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아론이 가는 곳마다 화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싸움이 있는 곳에 싸움이 멈추고 우는 곳에 울음이 떠나갔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화평케 하는 것은 샬롬(명남)은 샬람(7999)에서 유래했으며, ‘평화, 복지, 번영, 행복, 건강, 완전, 안전’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0회 나온다. 샬롬은 헬라어 에이레네(1515)의 개념을 확장시키는데 영향을 미침으로 이 헬라어도 성장과 번영이라는 셈어 개념을 함축하기에 이르렀다.

1.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s)

1) 그리스도

고후 5:18-21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 그리스도인

롬 14:18,19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말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 화평케 해야 하는 대상

1)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도모함

고후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 인간 사이의 화평을 도모함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딤후 2:22-24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약 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3. 화평케 하는 원리

벧전 3:8-13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또 너희가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4. 성령의 열매인 화평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 뒤로부터 난 지혜의 특성인 화평

약 3:16-18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는 이유

1)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에

마 5:45,48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눅 8: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엡 5:1,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빌 2:15,16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이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벧전 1:14-16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케 하는 사역에 동참하기 때문에

엡 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의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마태복음 5:10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핍박을 받은 자는(**: 호이 데디오그메노이)

기본형 **(디오코:급히 가다, 몰아 대다, 박해하다)의 현재완료 수동형 분사이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핍박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굳이 직역하자면 “핍박을 받아 온 자는”이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라다프(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뒤를 따르다, 추적(격)하다, 추구하다, 박해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5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푸알,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니팔(수동태)를 사용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이런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

1. 그리스도로 인해 핍박과 고난을 받음

마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눅 6: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 21: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요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고전 4:9-12 내가 생각컨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저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딤후 3:11,12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벧전 3:13,14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 핍박의 형태

1) 출교

요 9:22,34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 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2) 배반

마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3) 욕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눅 6: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4) 조롱

시 42:3,10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하도다

렘 20:7,8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5) 폭력

시 94:5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렘 2:30 내가 너희 자녀를 때림도 무익함은 그들도 징책을 받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행 5:29,40-42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갈 6:12,17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6) 미움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7) 위협

행 4:17,18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행 5: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8) 결박과 투옥

눅 21: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행 9:2,14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9) 죽임

눅 21: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3. 핍박과 고난을 통한 축복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고후 4:8-11,17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빌 1: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딤후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약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6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과 동일함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 의를 사랑하고 행하는 자

1) 천국을 소유하게 됨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심

히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3) 생명에 이름

잠 11:18,19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잠 12:28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4) 하나님께서 보상하심

출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잠 15:9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여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5) 영생을 얻음

롬 5:21 이는 죄가 사망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니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6) 구원을 얻음

잠 11:6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7) 영원한 평안과 안전

사 32:17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3.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축복임

살후 1:4-7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4. 생명의 면류관-시련을 견딘 성도에게 주어지는 보상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마태복음 5:11

†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우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복이 있다고 했다. 욕하고라는 단어가 하라프(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비난하다, 꾸짖다 reproach, 조롱하다 taunt, 모욕하다 blaspheme, 무시하다 defy’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9회 나오며, 칼형과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도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피엘형을 쓴 것은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엄청나게 모욕감을 주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고 비난받는다면 그 사람은 복이 있다.

1.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박해와 고난

마 10:18,22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막 13:9,1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눅 6:22 인자를 위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 21:12,17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요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2.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성도의 삶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핍박하다(**: 디오코)

“급히 간다, 몰아댄다”의 뜻인데 “악의를 가지고 추적하다, 박해하다”로 쓰인다. 박해는 시험(마 5:44)이며 특혜이다.

1. 예수께서 모욕과 핍박을 당하심

시 35:11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마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눅 7:33,34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이 친구로다 하니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받는 모욕과 비방

마 10: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요 9: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마태복음 5:12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 즐거워하라(**: 아갈리아스데)

기본형 **(아갈리아오)는 “기뻐 날뛰다, 기뻐하다, 기뻐서 미칠 지경이다”는 뜻으로 억제할 수없어서 그대로 표출되는 기쁨을 나타낸다. 히브리어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을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다. 주님은 이렇게 핍박받고 고난을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신다.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했다. 전에 있던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렇게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 때문에 핍박받고 힘들고 어렵다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고난이 올 때 하늘나라에서는 더 큰 상이 있다고 말한다.

1. 핍박에 대한 성도의 자세

1) 핍박 중에 기뻐할 것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를 채우노라

살전 1:8 또 너희는 많은 환난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2) 인내할 것

시 44:17,18,22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

벧전 4:18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4) 핍박자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할 것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롬 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5) 사랑의 정신을 가질 것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람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6) 용감하게 견딜 것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살후 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딤후 1:8,12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줄을 확신함이라

약 5:6,10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7) 다른 동네로 피할 것

마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 그리스도께서 위로하심

눅 6:22,23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 상 주시는 하나님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 선행에 대한 상

마 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잠 11:18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2) 주를 위해 고난 받는 자가 받을 상

히 11:28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3) 주님을 섬기는 사역자가 받을 상

고전 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4) 은밀하게 행한 의에 대한 상

마 8:3,4,6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 말씀을 실행하는 자가 받을 상

시 19: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1. 구약 선지자들에게 가해진 박해(핍박)

왕상 19:2,10,14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매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었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22:8,26,27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이스라엘 왕이 가로되 미가야를 잡아 부윤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

대하 16:10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대하 24:20-22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하니라

렘 26:8,21-23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여호야김 왕과 그 모든 용사와 모든 방백이 그 말을 듣고는 왕이 그를 죽이려하매 우리야가 이를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내었더니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어내어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하니라

2. 구약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노선-의를 위해 고난당함

마 21:34-39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3:34-3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1:49-51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세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눅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당하는 것은 선지자들의 전례를 따르는 것

눅 8: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살전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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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I) (마 5:1-12).

마태복음 강해 (8) – 팔복(I) (마 5:1-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1-2).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3)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두움의 나라인 세상에서 건져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즉, 우리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으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요? 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새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로서 새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어 깊은 감동을 주는 인물이 존 뉴톤입니다. 그 분은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시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속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존 뉴톤은 1725년에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님은 성경을 뉴톤에게 가르쳐주던 경건한 여인이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후 존 뉴턴은 선원이 되어 아버지를 따르다가 해군의 장교로 복무하다 탈영하게 되고 결국 체포되어 15개월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석방된 존 뉴턴은 노예선의 선원이 되어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잡아 영국에 파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가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방탕한 삶을 살며 하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존 뉴턴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싣고 오다가 폭풍을 만나게 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뉴턴은 어머님이 가르쳐 주었던 기도를 생각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폭풍에서 자신을 지켜주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전에는 노예들을 무자비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인격적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윌버포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노예폐지운동을 하도록 했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Amazing Grace (나같은 죄인 살리신)’라는 찬송시를 작곡하게 됩니다. 존 뉴턴은 그 후에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는 평생동안 자기와 같은 죄인까지도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죄에 매여서 종살이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전력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말기에 항상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내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다 할지라도 ,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 한 가지는 내가 과거에 엄청난 죄인이었다는 것과 , 또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에, 나는 내 목숨이 다하는 그 시간까지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 심부름꾼 존 뉴턴은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용서받았고 또 자기가 오랫동안 대적하고 파괴하려 했던 믿음을 오히려 전하게 되었다 …”

존 뉴턴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의 나라에서 세상의 가치대로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성품을 얻게 되었고 새로운 가치를 통해서 자신이 생업으로 삼았던 노예 제도를 회개하고 이제는 노예 폐지운동을 하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변화된 자의 변화된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양식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팔복과 산상수훈의 말씀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즉, 옛 본성과 의지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치신 삶의 원리를 마음에 깊이 받아들이고 이와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영적인 분별력과 순종의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팔복의 의미와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3).

우리는 심령이 가난 한 자에 대하여 두 가지의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재정적인 가난입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가난한 자들이 주님 앞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한 땅이나 밭이 없었고, 심지어는 먹을 양식도 부족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박으로 고통을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헤롯왕의 과도한 건축으로 인하여 과도하게 세금이 수탈되고 있었고,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일할수 있는 곳이 없어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가난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들이 복있는 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가난입니다. 영적인 가난은 자신의 마음으로 영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요? 이는 영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왕이신 주님께 나아와 주님의 보혈로 자신의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의가 더러운 누더기와 같음을 깨닫고 더러운 자신의 죄를 보면서 회개하는 자입니다. 자신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의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자인 것입니다.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신 안에 모든 것이 가득하기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부유한 자는 세상의 부귀 영화로 만족하기에 그리스도의 의와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왕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함을 얻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영적으로 가난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이 가난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영이 가난하기에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순종의 삶으로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영적인 부요함을 주님과의 충만한 관계를 통해서 누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묵상하며 생명의 꼴을 얻어 영적으로 강건해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기도의 삶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 혼자 설 수 없음을 인식하고, 철저히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애통하는 시간들을 종종 만납니다. 우리가 만나는 슬픔은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하는 삶의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슬픔의 순간을 만날 때가 언제인가요? 우리가 신뢰했던 우정이 깨어지거나,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질 때에 아픔을 겪습니다. 때로 우리는 소유했던 재산을 여러 가지 이유로 잃어버리면 말할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가장 아픈 순간은 가장 사랑했던 배우자나 자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애통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애통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면 주님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위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슬픔의 때를 만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때를 만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스패포드 교수는 시카고의 변호사였습니다. 그는 큰 역경을 이기는 과정에서 ‘내 평생에 가는 길’ 이라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변호사로서 시카고의 부동산에 크게 투자했는데 시카고 대화재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무디와의 절친으로서 무디가 영국에서 집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쉼의 시간을 갖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네 명의 자녀들을 먼저 배로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1873년 12월 22일에 출발하던 배가 영국의 배와 정면으로 출동하여 226명을 실은 배가 파선하게 되며, 그의 네 아이들을 모두 잃게 됩니다. 그는 홀로남은 부인으로부터 ‘홀로 생존’이라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게 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에 무디 전도 집회에서 자녀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배를 타고 가면서 선장으로부터 배가 가라앉은 곳을 바라보면서 크게 애통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면서 하나님의 평안에 대한 찬송시를 다음과 같이 작사하게 되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가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영혼 평안해 내영혼 평안해.” 스패포드의 인생에는 두 가지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시카고 대 화재 때 그의 재산을 잃었고 또 물속에서 네 자녀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패포드는 이러한 시련 가운데서도 “내 영혼은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에서 슬픔으로 인하여 애통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애통함을 위로하시며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여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2-3).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모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슬퍼할 때에 주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주님은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시며 재를 대신하여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여 찬송의 옷으로 대신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세우시기 위하여 고통을 허락하시고, 그 고통 가운데 함께 하셔서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하나님이 가장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기에 한시도 떠나지 아니하시며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고통을 느끼시며 우리의 고통에 함께 공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슬퍼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요 11:33-36). 주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나사로를 향한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슬픔은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깊은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애통할 때에 찾아오셔서 큰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3.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온유함이 약한 사람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것을 자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온유는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강한 사람들의 특징임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 11:29)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모세도 온유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에 이백 만명을 광야에서 이끈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 12:3). 모세의 온유함은 내적인 강함이 외적인 온유로 나타난 것입니다.

온유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온유는 영어로 gentle 또는 kind, 즉 온화하며 친절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하지만 수용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입니다. 온유의 헬라어는 길들여진 야생말을 의미합니다. 야생말이 길들여지면 자신의 힘을 절제할 수 있고 주인을 위하여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는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마음의 원한을 복수하거나 폭력적인 언어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마음과 입술을 통해서 나타나는 자인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관계에서 찾아오는 갈등을 피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상대가 아무리 과격하게 말해도 온유한 대답으로 상대의 분노를 누그리기 때문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 15:1). 우리가 화를 내면 상대도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화하며 친절하게 대답하면 상대의 화가 누그러지게 될 것입니다. 잠언 25장은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잠 25:15) 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보다는 오래 참으며 진지한 자세로 말하면 설득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혀, 즉 온유한 언어는 듣는 자의 강팍한 마음을 누구러 뜨리는 것입니다. 뼈는 단단한 신체의 부분이지만, 그 강한 마음을 설득하는 것이 온유한 마음에서 나오는 온유한 언어입니다.

모세는 온유한 자였지만 순간 순간 분을 품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정하지 못하면서 큰 죄를 범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분을 조절하지 못하면서 애굽 사람을 살인했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십계를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자 화가 나서 십계명을 던져서 깨트렸습니다. 그는 다시 산에 올라가서 십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말라하자 바위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화가나서 바위를 지팡이로 치게 됩니다. 그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일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시 37:11) 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땅은 이 시대의 기업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주시는 기업인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주님을 닮아가는 자입니다.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예수님의 온유함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표현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온유함은 온화한 성품과 친절하고 상냥한 언어로 가족과 지체들에게 먼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온화하고 평안의 은혜를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은 현저한 차이를 보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성령의 내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존 뉴톤의 변화가 그리스도가 주시는 새 생명이었듯이, 우리들의 모습의 변화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하신 복되고 행복한 삶은 심령이 가난하게 살아감으로 주님을 날마다 의지하는 것이며, 애통하는 자로서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주님의 위로를 받는 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복을 누리는 자는 교만하거나 거만한 자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온유한 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발견되는 주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주님을 더욱 의지하며 그 분의 능력으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팔복: 그리스도인의 삶의 축복

지복은 ‘최고의 축복’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도들 천국에서는 영원한 팔복의 상태로 산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하신 팔복을 의미합니다. 산상수훈 .

정의

팔복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입니다. Fr.로 John A. Hardon, S.J.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씁니다.현대 가톨릭 사전,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받아들이고 그의 신성한 모범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신 행복의 약속’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천상(天上)에 있는 사람을 팔복(八富)이라 하며, 팔복(八德)에 약속된 행복은 내세나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위치

팔복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마태복음 5:3-12)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서입니다. 복음 누가복음(눅6:20-24)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산상 수훈 중에 팔복을 전하셨습니다. 누가에서는 덜 알려진 평야 설교에서 더 짧은 버전이 전달됩니다. 여기에 주어진 팔복의 텍스트는 세인트 매튜 , 가장 일반적으로 인용되고 우리가 전통적인 카운트를 도출하는 버전 팔복 (마지막 구절 ‘너희는 복이 있나니…’는 팔복의 하나로 계산되지 않는다).

팔복(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를 위하여 거짓으로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스르는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말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원천:

[마태복음 산상수훈 팔복 강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마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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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산상수훈 팔복 강해 중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산상수훈 팔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

본문: 마 5:1-12

요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2)

주제: 사순절 기간에 산상수훈을 묵상하며 주님의 마음을 본받자.

사순절 기간입니다. 지난 주간에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좇고 계시나요? 내게 비워할 것(미움, 교만, 어두움, 상처, 오해, 거짓, 위선, 게으름, 불의 등)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그 빈자리에 예수님을 채우고,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사랑, 용서, 겸손, 온유, 진리, 부지런한 성실, 믿음의 의 등)

마태복음은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것으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메시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사자 복음’ (마가복음=소, 누가복음=사람, 요한복음=독수리)이라고도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공과 책(curriculum)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은 산상수훈(山上垂訓, 즉 산 위에서 가르치신 뛰어난 교훈 말씀, The Sermon on the Mount)에 속합니다. 모세 오경처럼 마태복음도 5개의 교훈집(collections of teachings, five discourses of Jesus)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산상수훈 5-7장

(2) 제자들의 전도교훈들 (Instructions for missionary disciples) 10장

(3) 천국 비유들 (The parables of the kingdom of Heaven) 13장

(4) 신실한 제자도 (On sincere discipleship) 18장

(5) 종말 교훈과 비유들 (On the end of the present age) 24-25장

산상수훈이란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서쪽 지중해를 바라보시면서 언덕 위에 앉은 수많은 군중들에게 하늘의 왕국을 소개하시면서 설교하신 것을 말하는데, 너무 소중해서 “수훈”이라고 별명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헌장(Magna Carta)이라고도 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산상수훈은 앞으로 있을 천년왕국의 모습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천국 시민의 윤리강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교훈 중 진수를 모은 것이기에 암기하면 좋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도 이 말씀을 매일 묵상하며 암기했다고 합니다. 비록 그가 기독교인은 되지 아니해도 예수님을 매우 존경하고 닮기를 원했답니다.

그의 비폭력(non violence) 사상도 바로 산상수훈에 근거하였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싫어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아미쉬나 메노나이트 사람들도 이 산상수훈대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필라델피아에서 1시간 반 거리에 떨어진 랭케스더(Lancaster)와 오하이오주에 널리 살고 있는 아미쉬(Amish) 공동체와 메노나이트(Mennonite) 공동체는 이 산상수훈대로 살고 있습니다. 전쟁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산상수훈을 깊이 묵상하면 매우 영적으로 유익합니다.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5-7장은 암송하시면 좋습니다.

마치 구약 율법의 요약은 십계명이듯이, 산상수훈의 에끼스는 팔복(Beatitude)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속히 비교할 수 없듯이(롬 8:18), 팔복은 현세적 복이 종말에 받을 복의 전주곡임을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들이 오는 것을 보십니다. 원근 각처에서 많은 무리가 모여 들었습니다. 동서남북에 있는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육체와 마음의 병을 고치려고 왔습니다. 최근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도 나아왔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가 가르칠 때 군중은 서고, 랍비는 앉아서 강의를 합니다. 팔복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르치고 있어 예수님을 본받으려는 우리가 이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누구나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점을 아시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이며, 마음의 쉼을 얻고 평화롭게 하는 자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진정으로 뿌듯한 느낌 즉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포함됩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보람 있게 살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데서 오는 기쁨을 포함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전 인격이 균형 잡히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웃과 공동체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 양심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풍부한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복의 개념하고 성경말씀이 가르쳐 주는 복의 개념이 차이가 납니다. 가령 세상 사람들은 오복(The Five Blessings)을 말합니다. 오래살고(longevity), 돈 많은 부자(wealth)가 되며, 건강하고(health), 덕이 많아 자식을 많이 낳고(love of virtue), 잘 죽으면(peaceful death)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과연 이 말이 다 받습니까? 오래 산다고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괴로운 인생을 오래 사는 것보다 주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반드시 부자가 된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인하여 가정이 파탄 나거나 자식이 잘못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잘 죽는 것보다는 영생을 가지고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49장(통 377장) 후렴에서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부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편 1:1-3에 있는대로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렘 17:7 “그러나 무릇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신 6:24-26에서 “주님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하십니다.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주시면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너에게 복이 있을지니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12:2-3) 그래서 아브라함은 행복한 자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복,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영적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 보니 ptochos 란 말은 ‘구걸하다, 얼굴을 가리다, 가난하다’란 뜻으로 거지가 동냥을 할 때 얼굴을 가린다는 말에서 나왔답니다.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창피하여 남에게 자신을 노출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자신을 가리는 행위와 연관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우선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윗왕은 밧세바와 불륜의 관계를 가져 아기를 가지게 하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남편인 헷사람 우리야를 전사하게 하였고, 마침내 밧세바를 첩으로 맞이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 한 것으로 다윗의 욕망에서 시작하여 죄악으로 말미암은 일이었습니다. 나단이 와서 책망을 할 때에 다윗은 그제야 마음이 가난해져서 하나님께 회개를 하였습니다. “…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예배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통회하는 마음에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는 낮추는 자입니다. 겸손한 자입니다. 참된 겸손이란 내가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부족함을 깨닫고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 마귀의 유혹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무리들은 대를 쌓아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이 바벨탑은 달신(Nanna) 모형을 한 보름달 모습을 대의 꼭대기에 놓는 계단식 신전 탑(tiered temple tower)입니다. 오늘날 뉴에이지의 가르침은 나도 하나님이 된다는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3) 마음이 가난한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가난한 자는 아무에게 관심을 받지 않으며, 인기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둘째 아들이 돈이 풍족할 때는 하나님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난하게 되었을 때 남의 돼지 움막에서 살며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고향생각을 하며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며 하늘을 쳐다보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의지할 곳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위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잠언서에도 보면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잠 18:23)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잠 19:1) 이사야 맨 끝에 보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을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 66:2)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두 번째 복,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요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마 5:4)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몹시 슬퍼하던 사람이 매우 행복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여기서 애통하다는 단어는 자신의 죄를 철두철미하게 뉘우치는 애통(lament, mourn, bewail oneself, penthein, penthountes)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이란 단어는 죽은 사람을 위하여 애곡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 눈물과 더불어 터져 나오는 슬픔을 묘사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는 격려 혹은 위로(strengthening, encourage, consolation, comfort, parakaleo)를 받을 것이랍니다. 팔복은 모두 현재 이런 사람은 미래 이렇게 되리라는 희망적, 종말적 내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 복 있는 자의 생활을 할 때 미래의 약속이 현재 실현되기 시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꾸준히 이런 생활을 하면 그 약속이 완성되어, 천국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위로 가운데 날마다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되었고, 스랍들의 찬양소리를 듣게 될 때 그는 애통을 하였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며 크게 회개를 하였습니다(사 6:5). 이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사 6:6-7)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와 용서를 받습니다.

다윗도 애통하는 자였습니다. 삼상 30장에 보니 시글락에 도착했을 때 보니 아말렉 사람들이 침략하여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가버렸음을 발견했습니다. 다윗을 비롯하여 동료 부하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혀 갔습니다.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렘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잡혀 갔음을 알고,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 여호와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삼상 30:1-4).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김을 당할 때에 얼마나 많이 울었으면 시편 56:8에 보니,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며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흘린 눈물은 얼마나 됩니까? 얼마만큼 하나님의 병에 담기고 있습니까? 애통하는 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애통하며, 이웃의 아픔과 구원받지 못함을 인하여 애통하며, 민족과 조국의 구원을 위해 애통하는 자가 되셔서 하늘의 위로를 받아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복,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상속 받을 것이기 때문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마 5:5) 여기서 온유(溫柔 프라에이스, praeis)란 말은 난폭한 야생마가 훈련과 연단을 통해 주인이 쓰기에 잘 준비된 말(준마)로 변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고집불통의 사람이 말씀으로 부드러워져(soft and gentle, yielding, given to forbearance under injuries) 순종의 사람이 된 상태를 ‘온유한 자’라고 합니다. 할 수 없는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 마음이 녹아져 내려(melting down) 구원을 받고 의인의 반열에 들어선 사람을 ‘온유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뜻과 교만을 내리고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submissive to the Divine will) 사람이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이런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약속의 땅’을 말합니다. 시편 37:11에 있는 대로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和平)으로 즐기리로다”라고 말씀하신대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풍성한 축복을 받아 평화 속에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으로 거듭난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 5장 22절에 보니 성령의 열매 중 ‘온유’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앞서 살핀 두 가지 복 있는 사람과 다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애통한 자이며, 애통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온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네 번째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그들이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요 Blessed are they which do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마 5:6)

여기에 나오는 복 있는 자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즉 “복 있는 자들”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오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복수개념은 공동체의 개념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 있는 가정, 복 있는 교회, 복 있는 나라/마을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의(쯔다카, 디카이오)의 뜻은 정직한 것, 바른 것, 올바른 것, 옳은 사람, 올바른 생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의입니다. 의의 반대는 불의요 죄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7-19)

로마서 1장 29-31절에 보면 죄의 목록이 나오는데 그 첫째가 불의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저를 옳다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불의는 죄의 뿌리입니다.

다섯 번째 복,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마 5:7)

세리의 기도처럼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Kyrie, eleison = Lord, have mercy upon me” (눅 18:13)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언약궤의 뚜껑을 가르쳐 ‘시은좌’(mercy seat)라고 부릅니다.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번제의 피를 들고 들어가서 피를 뿌리며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기원하며 하나님의 임재(세키나)를 상징하는 은혜의 보좌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제사장들의 죄를 선언해 주심에서 생긴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긍휼(eleos)이란 말의 뜻은 “당연한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서 그를 돕는 미덕”을 말합니다. 죄인에게 저주는 마땅한 것인데, 하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저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의좋은 세 자매’이다.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라면 긍휼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은 것이다. 은혜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애정이라면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라고 했습니다.

섹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폴티아의 입을 빌려서 긍휼의 덕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긍휼은 결코 억지로 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고요히 내리는 빗방울처럼 하늘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긍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다 같이 축복한다”

여섯 번째 복,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마 5:8)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열납 되는 온전한 제물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불결하고 불완전하며 거룩하지 못한 상태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본다는 말입니다. 밤하늘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빛나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낮아지고 내가 없어질수록 주님은 내게 소중하고 마음 중심에 모실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보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던 자여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성전에서 예배드리는데 만군의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 심방하신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을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은데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고(겔 1:28)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를 계시록에서 자세히 기록하는데 실로 인간의 언어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 흔히 일곱 가지 죄악을 열거합니다. 첫째는 음욕, 둘째는 탐심, 셋째는 시기, 넷째는 교만, 다섯째는 미워하는 것, 여섯째는 혈기, 그다음에 거짓된 것, 이와 같은 죄악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으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이 더러운 마음을 어떻게 씻을 수가 있습니까?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히 9:13-14절에는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일곱 번째 복,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울 것이기 때문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마 5:9) 킹 제임스 성경은 원문에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맞습니다. 화목케 하는 자가 행복하니다.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고 하십니다. 제단 곁에는 소금이 수북이 쌓여 있는데, 이것으로 제물에 소금을 칩니다.

소금은 또한 부패하거나 썩지 않는 것을 상징합니다.(레 2:13; 겔 43:23, 24)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게 도와주면서 방부제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땅의 소금”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소식은 그 소식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의 삶을 보존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여러분은 이 땅의 소금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5:13) 물론, 제자들이 문자 그대로 소금은 아닙니다. 사실, 소금은 일종의 방부제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평화를 얻는 길>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소개됩니다.

주님: 아들아, 이제 평화와 참된 자유의 길을 가르쳐 주겠다.

첫째, 네 뜻을 따르기보다, 항상 남의 뜻을 받들기를 힘써라.(마 26:39, 요 5:30)

둘째, 남들보다 많이 가지는 것 보다, 항상 적게 가지도록 노력해라(고전 10:24)

셋째, 항상 낮은 자리를 취하고, 모든 이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가져라.(눅 14:10)

넷째, 항상 하나님의 뜻이 네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라.(마 6:10) 이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리라.

여덟 번째 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 Blessed are they which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너희들을 대적하여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들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매우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보상이 크기 때문이요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을 그렇게 핍박하였기 때문이다” (마 5:10-12)

여러분들의 행복지수는 어느 정도 입니까? 어떤 통계에 보니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5.8이라 합니다. 생을 살면서 전혀 불행한 사람을 0, 매우 만족하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을 10으로 한다면, 나의 행복지수는 1, 2, 5, 7 혹은 8이상 되는지요? 한때는 높았는데 지금은 낮은 상태든지, 늘 행복지수가 5 이하였다든지, 아침에는 높다가 오후에는 낮은 상태로 기복이 심하든지,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을 항상 모시고 살면 행복지수는 10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왕국 시민’이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로마 시민답게 프라이드를 갖고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왕국의 대사로서 살아야 할 윤리가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 왕국의 보상이 있습니다. 위로와 응답의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팔복을 암송하며 묵상하며 이번 주간 주님을 닮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이 곧 팔복입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삼위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여러분의 심령 속에 주님의 복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영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순수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되어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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