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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 뜻 | 만군의 여호와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킹제임스 성경 마제스티 에디션) 상위 148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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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킹제임스 성경 마제스티 에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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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의 뜻(What does the Bible mean with the …

‘만군(hosts)’은 히브리어로 쩨바오트(sabaoth)이며 ‘천국의 군대’를 뜻한다. 따라서 ‘만군의 여호와(LORD of hosts)’는 다른 말로 ‘천군의 하나님(God o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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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lorymission.tistory.com

Date Published: 5/25/2022

View: 9772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 네이버 블로그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 … 그 하늘과 그 땅과 그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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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18/2022

View: 1436

만군이란 무엇인가? (만군의 뜻과 의미) – 다음블로그

하늘의 사자, 천사, 이스라엘 군대, 천상의 존재 등 여러가지로 번역되나 주로 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왕상 22:19, 대하 18:18, 느 6:6). 한편 만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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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8/2021

View: 3498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라! (시 84:1-12) – 기멀전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일반적으로 번역하자면 하나님 그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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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0/6/2021

View: 8849

만군 – 대한성서공회

이 낱말은 ‘만군의 하나님’이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나 – 가장 흔히 … 여기서 이 칭호는 ‘(온갖) 세력과 권능의 여호와(또는 하나님)’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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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bs.bskorea.or.kr

Date Published: 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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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 대학마을교회 –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노라

만군의 여호와,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The Lord of Hosts입니다. 호스트는 파티의 주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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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univ.or.kr

Date Published: 7/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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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 —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 JW.org

히브리어 차바(단수. · 여호수아가 예리코 근처에서 천사 방문객을 보고 이스라엘 편인지 적군 편인지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이러하였다. ·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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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ol.jw.org

Date Published: 9/1/2021

View: 1369

만군의 주(56)

개역한글성경: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 … 그러나 그 뜻은 그것이 아니라 ‘ hosts’ 즉 ‘하늘의 군대’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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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bckorean.org

Date Published: 2/4/2022

View: 3400

[사무엘상 히브리어 설교말씀]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체바오트 …

이 동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각 마을에서 짐승을 잡아 바알과 아세라 신에게 바쳤지만 엘가나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 만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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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hb-bible.tistory.com

Date Published: 1/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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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만군의 여호와 뜻

  • Author: Charity Bapt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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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2.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xdr5i9UFhw

‘만군의 여호와’의 뜻(What does the Bible mean with the “LORD of hosts”?)

원문

‘만군의 여호와(LORD of hosts)’라는 이름은 구약 성경에 261번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상 1장 3절에서 처음으로 ‘만군의 여호와’로 불리셨다. ‘여호와(LORD)’는 야훼(Yahweh), 즉, 스스로 계신 자(the self-existent)와 구원하시는 하나님 을 의미 한다. ‘만군(hosts)’은 히브리어로 쩨바오트(sabaoth)이며 ‘천국의 군대’를 뜻한다. 따라서 ‘만군의 여호와(LORD of hosts)’는 다른 말로 ‘천군의 하나님( God of the armies of heaven)’ 이라 할 수 있다.

NIV 성경 버전에는 야훼가 ‘전능하신 여호와(LORD Almighty)’로 번역되어 있다. ‘전능하신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사사기 시대가 끝날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만군의 여호와(LORD of hosts)는 실로(Shiloh)와도 관련이 있다. 실로에 하나님의 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가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4:4). 언약궤는 무엇보다 야훼의 통치권(rulership)을 상징했다. 여호와께서 그룹(the cherubim) 사이에 좌정하시기 때문이다(삼상 4:4; 시 99:1).

어떤 사람들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스라엘 군대를 이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사사기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매우 약했었다. 한편,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전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면서(삼상 17:45)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라고 선포했다.

만군의 하나님의 속성(kingship)은 시편 24편 10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시 24:10).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일 뿐만 아니라, 천하 만국을 다스리시는 왕이시기도 하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슥 14:9)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사 37:16)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무릎 꿇게 하시고(사 24:21-23) 시온 산(Mt. Zion)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사 31:4-5; 34:12) .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천하의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주님이시다. 모든 권세와 능력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승리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실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올려드리는 기도를 들으신다(시 80:19).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은 없다.

지존하신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그 분 앞에 나아오는 자에게 항상 은혜를 베푸신다 . 영광의 왕이시며 천국의 군대에게 명령하시고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마귀를 완전히 멸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 그 분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이신 것이다(계 19:11-20).

번역/요약: GLORY MISSION MINISTRY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

으로 나아가노라” (삼상17:45)

만군의 여호와 (아도나이 쩨바옷트) יהוה צבאות

아도나이 (여호와) יהוה

쩨바옷트 (만군) צבאות

군대 צבא

צבאות 은 צבא 의 복수형

이 그림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 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사5:16) ​

‘만군’ 이란 모든 군대를 의미하는데

1. 모든 군대는 무엇을 말할까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다” (창2:1) 의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이렇습니다

“ויכלו השמים והארץ ו כל צבאם ”

“그 하늘과 그 땅과 그들의 모든 군대 가 완성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입니다

해 달 별 우박 지진 물 불 돌 ….. 보이는 만물과 하늘의 천군 천사 모두

‘모든 군대’ 라고 합니다

1) 보이는 만물을 군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 눈을 하늘로 들어 해와 달과 별들 곧 하늘의 모든 군대 를 네가 보

고 네가 미혹되어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말아야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온 하늘 아래 모든 민족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 주신 것이다”(신4:19)

2) 하늘의 천군 천사들 하늘의 모든 군대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저는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아계시고

하늘의 모든 군대 가 그의 오른 쪽과 왼쪽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상22:19)

“너는 내가 아버지께서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 를 보내시게 할수 없

는 줄로 아느냐?” 천사를 군대들로 말씀하십니다 (마26:53)

2. 하나님의 군대로 싸우는 일을 보면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

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

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수10:11)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왕하19:3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10재앙, 마지막 때의 인 나팔 대접 심판을 보

면 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싸우는 것입니다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 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

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계16:21)

3. 이스라엘의 군대

“사백 삼십년이 되는 바로 그 날에 여호와의 모든 군대 가 애굽땅에서 나왔은즉”

(출12:41)

“바로가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

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출7:4)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군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편에

서서 싸우시는 내용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느니라” (수5:14~15)

그러므로 이스라엘 군대가 여호와의 군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통솔

하시는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편에 있을 때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살 때는 여호와의 군대는 우리와 함께 싸우시나 죄를 지으면 여호와의 군대는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

지 아니하시나이다” (시44:9)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7)

마지막 때 이스라엘은 다시 군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

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겔39:10~11)

4.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

“너는 그리스도 예슈아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2:3)

아가서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같고 엄위한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아6:4)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예슈아의 신부가 되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도

록 훈련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만군의 여호와 예슈아를

따르는 좁은 길의 훈련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예슈아가 오실 때 강한 군사로 만

드셔서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과 천군 천사의 여호와의 군대와 함께 악한 마귀들의

군대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입니다 (엡6:10~19) 우

리의 싸움은 중보기도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

고 이를 위하여 구하기를 항상 애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6:18)

예슈아께서 오셔서 완벽한 승리를 이루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

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

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겠

고” (계19:14~15)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시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계4:8)

קדוש קדוש קדוש יהוה אלהי צבאות אשר היה והווה ויבוא

(8:4התגלות)

에벤에셀선교단John

만군이란 무엇인가? (만군의 뜻과 의미)

하늘의 사자, 천사, 이스라엘 군대, 천상의 존재 등 여러가지로 번역되나 주로 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왕상 22:19, 대하 18:18, 느 6:6).

한편 만군이 여호와를 수식하는 말로 쓰일 때는 ‘우주 만물’이라는 뜻이 된다.

‘만군의 여호오’ 혹은 ‘만군의 주’라는 말은 구약에서 약 250여 회 사용되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라! (시 84:1-12)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라! (시 84:1-12)

새로운 1년이 벌써 넷째 주가 지나가는 데 작심 3일이라고 다시 옛날로 다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작년에 후회했던 그 삶의 모습으로 다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실패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그것을 포착하기 어렵게 아주 서서히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잘못했을 때 금방 문제가 온다거나,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금방 하늘의 징벌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아주 포착하기 어렵게 서서히 진행되는 일들에 대해서 점점 미련해지고 어리석어집니다. 그러나 즉시 나타나지는 않지만 잘못된 길을 계속 가면 최종적으로 책임져야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엄청납니다. 목숨입니다. 죽음입니다. 망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선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의 형편이 어떻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절망의 해를 주신 것이 아니라 희망의 새해를 주셨습니다. 다시 일어서라고 기회의 새해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일어나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그 하나님의 자녀됨을 시위하십시오.

오늘 본문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으로 불려진 것은 한나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한나는 사사시대의 말기에 남편 엘가나로부터 사랑 받는 아내였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한나는 브닌나에게 많은 멸시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장 10절에 보면 자신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 당시 힘이 없었던 이스라엘이 강한 이방나라에 멸시와 천대를 당해야만 하는 처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적에게 멸시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오직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여호와이시라는 의미에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무엘상 17장에 가면 다시 불리워집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지 못하여 원수 블레셋에게 짓눌려 있었습니다. 더구나 사울왕을 비롯해서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위세 앞에 눌려서 40일 동안이나 벌벌 떨며 갖은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군대의 힘으로는 감히 대적 골리앗과 블레셋 군대와 싸워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이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뿐이심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만군의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치며 골리앗을 향해 당당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렇습니다. 수많은 적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괴로움을 당하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에서 오직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13년이라는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는 가운데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을 믿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기억하십시오.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일반적으로 번역하자면 하나님 그분은 군대들의 주인이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천군 천사들을 군대로 부리시는 분으로 자주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와 다윗,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들을 멸시하고 짓밟고 괴롭히는 원수들 앞에서 오직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감으로써 힘든 인생 여정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분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84편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데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시편 기자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방패이신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군대를 거느리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방패가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어떤 어려운 삶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요청할 때 우리 마음에는 어떤 심리적인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예들 들자면, 염치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내 삶이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할 때 내가 무슨 염치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가? 우리가 이럴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보호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서 도움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과 함께 또 하나 부르고 있는 명칭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니 야곱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믿음의 조상들을 말할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라는 조상들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서 가장 질이 낮은 조상님이 계시다면 그가 바로 야곱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야곱은 가장 욕심이 많았고, 가장 교활했고,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의 기도도 들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군대를 보내서 야곱을 보호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하셨을까요? 야곱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을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였을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사기도 좀 치고 해서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외삼촌에게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외삼촌이 없는 때를 골라서 그곳을 떠나갑니다. 한편으로는 외삼촌 라반이 복수의 칼을 들고 종들과 함께 자신의 뒤를 추격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고향이 가까워지면서 고향에 있는 형님 에서가 자기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어쩌면 그 옛날 장자권을 빼앗긴 분풀이로 자신을 추격해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앞 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야곱, 그는 지금 심각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한 부대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야곱을 호위해서 앞으로 인도해 갑니다. 창세기 32장 1절과 2절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기도한 후에 등장한 일련의 군대 호위를 받으면서 그는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군대라, 하나님이 보내셨구나.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하나임은 하나님의 캠프, 혹은 하나님의 진지라는 뜻입니다. 천사들의 호위가 시작되자마자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든든한 진지로 구축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이제 무엇을, 그리고 그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격이 없었던 야곱을 보호하시고 도우신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야곱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본래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 우리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천군 천사를 통한 군대를 보내어 에워싸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목소리 높여 불러보십시오. 우리 한 번 다같이 그분의 이름을 불러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우리가 그렇게 부르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군대를 거느리고 계시다가 우리의 부르심과 동시에 그의 군대인 천사들을 파견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 하나님께 도우심과 보호를 요청하는 일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지금 자신의 군대인 천사들을 파견할 준비를 마치시고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기를,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사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천사들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를 아십니까? 히브리서 1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사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천사들은 여러분과 저를 돕고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영들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 우리를 섬길 하나의 목적으로 이 위대한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군대의 사령관이 되시는 그분에게 속히 SOS를 타전하십시오.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그분은 우리의 안식처가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확실하다면 이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런 다음의 결론일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오늘 시편의 기자는 만군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장막 안에 거하는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주를 예배하는 장막, 주의 임재가 있는 성전에서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 예배를 상실한 채 살아왔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치 집을 잃어버린 외로운 사람처럼 그의 영혼은 집을 떠나 방황하던 한 마리의 참새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102편 7절에서 그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옛날 한국식 기와집을 연상해 보십시오. 겨울철 처마 밑에 둥지를 만들고 거기에 들어가 있는 새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런 둥지를 만들지 못하고 겨울철에 파르르 떨며 지붕 위를 배회하고 있는 불쌍한 참새들의 이미지를 한 번 그려보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그 누구도 받아줄 곳이 없었던, 둥지를 만들 곳이 없었던 이런 참새 같은 영혼들을 주님의 성전이 받아 주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많은 새들이 깃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주의 성전이 이런 새들을 받아 주었고, 거기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이 새들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오랜 세월동안 방황하던 자신의 영혼이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성전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은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 4절에서 시편 기자는 그가 새롭게 얻은 이 참된 행복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지금 시편의 기자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집이 이제는 나의 집이 된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교회가 구 성전에서 이곳으로 옮겨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느 날 현호와 아이들이 제게 “목사님은 이제 부자시네요”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현호가 하는 말이 “이 교회가 목사님 것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현호야, 이 교회는 목사님의 교회가 아니고 너와 우리들 모두의 교회다. 하나님의 교회란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아직도 영혼의 집을 갖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교회에 나오지만 뭔가 이 교회가 내 집이 아니고 남의 집처럼 느껴지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영혼의 모태와 같은 곳입니다. 초대 교부들은 종종 이런 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자격이 없다.”

다시 3절에서 묘사된 주의 성전에서 집을 얻은 행복한 참새, 행복한 제비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행복한 참새입니까? 아니면 외로운 참새입니까? 제가 제비냐고 묻지는 않겠습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참새입니까, 외로운 참새입니까?”

아마도 우리 한국 유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유머가 있다면 참새 시리즈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참새의 연약한 이미지가 이 땅을 살아왔던 슬픈 민초들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었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포수의 한 방의 총에 전기 줄에서 맞을 것을 두려워하고 떨던 참새의 이미지 속에서 불행하고 안전함이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이 유머 속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참새 시리즈의 시대적 변화 그 자체가 우리의 사회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참새 시리즈가 처음 탄생한 것은 60년대 였다고 합니다. 60년대 가난했던 시절에 태어난 최초의 참새 시리즈는 전기 줄에 나란히 앉은 부부 참새 중 하나가 포수의 총을 맞고 떨어지면서 한 말입니다. “여보, 내 몫까지 살아주오.”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던 그 시대의 풍경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90년대에 와서는 아주 바뀝니다. 포수가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쏘아서 떨어뜨리자 추락하는 새가 하는 말이 “왜 나만 쏴요, 재도 쏴요.”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훨씬 더 살벌해집니다. 총 맞은 참새가 “왜 나만 쏴요, 재도 쏴요”라고 하자, 총을 맞지 않은 참새가 이렇게 말합니다.

“재 아직도 안 죽었어요. 한방 더 쏴요.”

민심의 변화를 보여주는 유머입니다. 관용을 상실하고 이웃을 상실한 이 시대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화는 놀랍게 발전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함은 사라졌습니다. 그 마음에 참된 안식과 평화가 없이 우리의 영혼이 방황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쉴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진실로 믿으시면 영혼의 기나긴 방황은 끝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 만군의 여호와의 보금자리에서 이제는 제발 쉬십시오. 그는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그분은 우리의 권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앞에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불려졌던 때를 말씀하면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은 소년 목동 다윗이 거인 장군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면서 외쳤던 말씀입니다. 앞에 화면으로 띄웠습니다. 우리 다같이 힘차게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기에서 다윗이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그리고 그는 만군의 여호와를 신뢰함으로 이 전쟁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독교 신앙을 소유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수동적 은총들을 약속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보호의 약속이 그렇고, 안식의 약속이 그렇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를 두려움에서 보호해 주실 것이고, 방황하던 우리를 안식의 자리에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 수동적인 은총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약속 가운데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인생은 전쟁터입니다.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적을 물리치고 앞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힘입어 구체적인 승리를 경험하게 하는 약속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이 그에게 불리해 보여도 그는 보이는 상황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거느리시는 군대를 믿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본문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순간, 참으로 그분을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랬을 때 우리의 믿음은 권능의 통로로 역사할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십이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십이년 동안 병치레하느라 모든 재산을 다 낭비했습니다. 그래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넘치고 있었지만 그 많은 장애물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드디어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 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스쳤겠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당신의 옷자락을 스치고 있는 손길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여인은 “예, 저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누가는 누가복음 8장 4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앎이로다.”

예수님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손을 댄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바로 순간 성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흘러갔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권능의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믿는 자를 찾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믿으면 지금도 그 기적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세계적으로 많이 읽혔던 치킨 숲(Chicken Soup)이라는 아름다운 실화집에 실렸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고든과 신디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주 어린 딸 타냐가 있었습니다. 어린 딸 타냐가 어느 날 자신의 집 부엌 오븐 옆에서 놀다가 마침 오븐 위에 올려놓았던 펄펄 끓는 물 냄비를 건드려서 그 물이 얼굴 위로 쏟아져 중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어린 딸 타냐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고 수술을 받습니다. 대 수술이었습니다. 긴 수술이었습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이 부부에게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큰 화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뉴스뿐이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다급해진 엄마 신디는 소파에 엎드려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어떻게 해요. 예수님이 직접 들어가 주세요. 예수님이 만져 주셔요. 예수님이 고쳐주세요. 예수님이 직접요.”

한 참 기도를 하는데 누가 와서 툭툭 건드립니다. 보니까 이들이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이 교인 두 사람과 함께 와 있었습니다. “저희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도하러 왔습니다.” 이들 두 부부의 손을 잡고 기도하던 목사님이 “제가 들어가 보지요.” 목사의 신분을 밝히고 잠시 수술실의 허락을 받고, 목사님과 교인 두 분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고 나와서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기다려 보십시다.” 그리고 목사님 일행은 떠나갔습니다. 하루 밤을 지샌 다음 그 이튿날 아침 이들 부부는 허락을 받고 타냐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보니까 타냐는 잠들어 있었는데 딸의 얼굴을 보고 부부가 깜짝 놀랍니다. 화상이 씻은 듯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아주 깨끗한 얼굴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이 놀라운 기적 앞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함께 오셔서 기도해 주신 두 분이 누군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들 두 사람에게도 찾아가서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아주 의아해 하며 이렇게 말하시더랍니다.

“저는 집사님 한 분하고 찾아갔었는데요.”

“아닙니다, 목사님. 목사님과 두 분이 함께 오셨잖아요. 여보, 그렇잖아요?”

남편도 확인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아니라고, 자신은 집사님 한 분하고 둘이서 갔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냐, 세 사람이냐를 놓고 한참을 논쟁하다가 목사님이 갑자기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또 한 분은 예수님이 직접 오셨거나 예수님이 보내신 천사일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자 신디는 또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참, 맞아요, 목사님. 저도 깜빡 잊었습니다. 제가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직접 오셔 달라고 기도했거든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백성들이 힘들고, 아프고, 어려워하는 삶의 자리마다 부르면 천사를 대동하고 달려오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금년 한 해, 아니 우리의 일평생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나약한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리석은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색한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육신의 아버지와 든든한 관계를 맺듯이 내 생명의 아버지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의 든든한 관계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단은 모든 축복의 첫걸음입니다. 결단 없이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자리에 앉았다가 그냥 가지 마시고 결단하십시오. 결단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이제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믿으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리라!” 결단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지렁이 같은 너 인간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여기 이곳에 왔습니다. 종교적인 장난을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오면 무슨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 연약하여 왔습니다. 넘어져서 왔습니다. 실망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보호해주시고 안식을 주시며 권능을 주시는 만군의 여호와가 계십니다. 그분이 보내시는 천군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를 곤고하는 일들이 있을 때마다 그것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너는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할렐루야!” (이정익 목사)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노라

사무엘상 17:1-58, 요절 17:45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가노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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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다윗의 통쾌한 승리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The Lord of Hosts입니다. 호스트는 파티의 주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군대를 뜻합니다. 그래서 보다 일반적으로 번역하면 The Lord of Armies입니다. 성경에 이 단어가 무려 282번 등장합니다. 그런 경우에 거의 예외 없이 여호와 하나님은 천사들을 군대로 부르시는 분으로 요약합니다. 성경에 만군의 여호와로 표현할 때에는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요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향하여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고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권능으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그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상황이 그에게 불리해 보여도 다윗은 보이는 상황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다윗은 전쟁이 여호와께 속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싸웠습니다. 그 때 그는 골리앗을 한 순간에 격파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악령과의 싸움이요, 죄와 사망 권세와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했을 때 승리했습니다. 우리 또한 만군의 여호와를 믿을 때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위협하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군대는 맞은편 엘라 골짜기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었습니다. 가드에는 아낙 자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낙 자손은 장대한 족속입니다(민13:28-33). 그는 키가 여섯 규빗 한 뼘(3.3m)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습니다. 그 어린갑의 무게는 놋 오천 세겔(56kg)이었습니다.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는데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그 창날만도 철 육백 세겔(6.7kg)이었습니다. 그는 완전 무장을 하였습니다. 그 앞에는 방패 든 자가 딱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런 골리앗이 나타나 베틀채 같은 창자루를 휘두르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양 진영의 챔피언들끼리 싸워서 진편은 이긴 편의 종이 되자”고 소리 질렀습니다(8,9). 골리앗은 당장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엄포만 놓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만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40일간을 朝夕으로 나타나 위협했습니다. 골리앗이 조석에만 나타나는 것은 체구를 더 크게 보이고 위엄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사울은 골리앗을 볼 때마다 겁에 질려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골리앗 앞에서 어떠했습니까? 다윗은 군에 갈 수 없는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형들이 군에 입대하자 집에서 아버지의 양을 치다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면회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형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마침 골리앗이 나타나서 백성들을 위협하고 모욕했습니다. ‘야, 사울의 쫄개들아, 대장을 보내어 한판 붙어보자!’ 그러자 사울과 백성들은 기가 죽어 아무 소리도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24). 다윗은 이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은 그를 할례 없는 자로 보았습니다. ‘할례 없다’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사신 하나님의 군대로 보았습니다. ‘사신 군대’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사신 하나님의 군대로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에 블레셋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떤 눈으로,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는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됩니다.

민수기 13:33절을 보면 가나안을 정탐한 12두령 중에 10두령은 가나안 사람들을 보았을 때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에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이를 일컬어 메뚜기 자아상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메뚜기 자아상을 가졌을 때에 새 역사를 창조하는 대열에 설 수 없었습니다. 본래 그들이 메뚜기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파를 대표하는 두령,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메뚜기 자아상을 가졌을 때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땅을 악평했습니다(민13:32). 사람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면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12명이 똑같이 가나안 땅을 보았습니다. 10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거민이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했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았습니다. 10명은 그들의 거민은 강하고 대장부들로 보았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을 밥으로 보았습니다.

무엇이 똑같은 땅,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다르게 해석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아상을 따라 보았고 자아상을 따라 느꼈고 자아상을 따라 반응했고 자아상을 따라 말했고 자아상을 따라 행동했고 자아상을 따라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자아상이란 자신에 대한 생각, 자신에 대한 의견, 자신에 대한 가치, 자신에 대한 능력을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가의 의견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각자 자아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잡초 같은 인간,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봅니다. 반면에 자신을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봅니다. 이 자아상은 우리의 외모보다 우리의 내면에 형성됩니다. 외모가 자아상을 형성하는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입니다. 우리의 자아상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위기에 처할 때, 어떤 임무가 주어질 때, 갑작스러운 사건에 직면했을 때 드러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좋은 면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좋은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잘 나온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잘 나오지 않은 사진은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20년 만에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딸 조은이가 잘 나오지 않았다고 사진을 걸어놓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자기 얼굴이 잘 나온 사진을 걸어놓고자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내면의 자아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부정적인 자아상, 열등의식의 자아상, 어두운 자아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추억 집착형으로 주로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가지고 비판하고 원망합니다. 민수기 14장을 계속 보세요. 우리가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과거 역사를 회상하며 계속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부추기어 사람들을 규합하여 당을 짓는데 아주 탁월합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악평하는데 특출합니다(민14:2). 그들의 선동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눈으로 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열등하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일뿐입니다. 우리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도 잘 아시고 우리의 가능성도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열등감에 빠지거나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특출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사람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고 좋게 평가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악평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자신감이 있었고 용기가 있었습니다. 자신감과 용기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능력과 용기의 원천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고자 할 때 큰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말을 듣던 엘리압은 다윗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 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8).” 형은 양을 돌보지 않고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형은 다윗의 믿음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형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형의 책망 앞에 조금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당히 말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29)?” 그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제 사울은 다윗의 외모를 보고 무시했습니다(33). 이쯤 되면 다윗은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무시를 당하면서 굳이 전쟁터에 나갈 필요가 없다며 “잘 들 해 보세요” 하고 전쟁터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사울에게 자기의 과거의 무용담을 들어 자기도 용사임을 밝혔습니다. ‘어느날 목장에 사자와 곰이 침입했습니다. 다윗은 사자나 곰이 새끼를 움키면 그를 따라가서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자신을 해치려 하면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서 죽였습니다.’ 대개 목동들은 사자나 곰이 나타나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쫓아가서 양을 구했습니다. 이는 목자의 심정과 양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심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덧입게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또 그가 사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다윗의 전 인생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과거의 믿음을 현재화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골리앗의 손에서도 건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골리앗에 도전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군복을 입히고 머리에 놋투구를 씌우고 갑옷을 입혀서 보냈습니다. 다윗은 군복을 입고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시험적으로 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걷다가 거추장스러워 벗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막대기와 시내에서 가져 온 매끄러운 돌 다섯 개와 물매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겨 보려고 했습니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많은 재물과 병역을 면제하고 딸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모든 것을 내 팽개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막대기와 물매만을 들고 나갔습니다. 다윗이 가지고 간 매끄러운 돌과 물매는 사울이 준 것에 비해 시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과 물매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군복을 입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즐겨하고, 자기 몸에 맞는 것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물매는 무엇입니까? 물매란 목동들이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필수 제구입니다. 다윗이 물매로 골리앗의 이마를 꿰뚫은 것을 볼 때 다윗이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물매 던지는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물매를 던졌을 것입니다. 그는 수백 번, 수천 번 물매 연습을 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손은 물매를 하도 던졌기 때문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야구 선수 이승엽이 오늘의 이승엽이 되기까지는 우연히 저절로 되었겠어요? 다윗의 물매가 골리앗의 이마를 뚫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는 피나는 투쟁의 결과입니다. 이 물매는 그에게 비장의 무기였습니다. 이런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골리앗을 바라보니 골리앗의 허점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마였습니다. 사단은 사단입니다. 그러나 사단도 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사상과 이즘도 완전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6:17,18절은 보겠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우리는 날카로운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서 49:2a절은 말씀합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날카로운 말씀의 사람이 되려면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이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여야 합니다. 그 때 어떤 누구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사상과 이즘과 이데올로기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4,5절을 보면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했습니다.

골리앗은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점점 다윗에게로 나아왔습니다. 골리앗은 사방을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는 기가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완전무장을 하고, 방패 든 자를 앞세우고 나왔는데, 한 소년이 막대기를 들고 자기와 싸우겠다고 나오니 말입니다. 막대기는 들개나 들짐승들을 쫓을 때 사용합니다. 골리앗은 몹시 불쾌하여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로 왔느냐(43)?”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이 감히 나와 싸우겠다고 나와!’ 화를 내며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골리앗은 신경질을 부리며 거대한 몸짓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 왔습니다. 이 때 다윗은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 한 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빙빙 돌려서 물매로 골리앗에게 던졌습니다. 그러자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골리앗은 썩은 고목이 쓰러지듯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달려가서 그의 목을 밟고, 골리앗의 칼을 빼어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사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던 그의 교만한 머리를 들고 사울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57). 블레셋 군대들은 골리앗의 죽음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망갔습니다. 지금까지 숨어서 두려워 떨고만 있었던 이스라엘 군대들은 일어나서 함성을 지르며 도망가는 블레셋을 추격하여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무찔렀습니다. 그리하여 사아라임에서 가드와 에그론에 이르는 길에는 상한 블레셋의 군대가 다 뒹굴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골리앗은 칼과 창과 방패로 무장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주는 무기를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데 있음을 알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승리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개 한 마디 때려잡기도 힘든 막대기와 물매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어떤 대적도 이길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수에 있는 것이 아님을 믿었습니다(삼상14:7).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온전히 믿는 자들을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12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는 치유의 희망을 가지고 지나가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깃을 스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군가가 전혀 다른 의미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고 있는 것을 아시고 물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때 여인이 “저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내가 이 분의 옷깃을 만지는 순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터치는 믿음의 터치였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는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앎이로다(눅8:46).” 믿음은 능력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승리와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군의 여호와를 믿으십시오. 십자가의 놀라운 능력과 용서와 사랑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자신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우리가 자신의 눈으로 보면 거대한 물질과 권세 앞에 우리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또 장대한 외국 학생들에 비친 우리 선교사님들의 모습은 왜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보호자가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시고,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의 방패가 되시고, 나의 생명의 구주가 되십니다.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할 때에 거기에 능력이 있고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고 밝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이때 매사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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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

(Jehovah of armies) 이 표현은 성경에서 변화형을 포함하여 285회 나오는데, 히브리어 예호와 체바오트를 번역한 것이다. 이 표현이 나오는 곳은 대부분 예언서들 특히 이사야, 예레미야, 스가랴에 집중되어 있다. 바울과 야고보는 그 예언들을 인용하거나 참조하면서 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음역) 표현을 그들의 기록에 사용하였다.—로 9:29; 야 5:4. 사 1:9 비교.

히브리어 차바(단수. 복수는 체바오트)는 창세기 21:22, 신명기 20:9 및 여러 성구들의 경우처럼 기본적으로 문자적인 군대 곧 전투 부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단어는 “하늘과 땅과 그 모든 군대” 혹은 “해와 달과 별들, 하늘의 모든 군대”의 경우처럼 비유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창 2:1; 신 4:19) 복수형(체바오트)은 탈출기 6:26과 7:4, 민수기 33:1, 시편 44:9과 60:10에 나오듯이 이스라엘 군대를 가리키는 데 몇 차례 사용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에서 “만군”에는 천사 군대만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와 무생물인 하늘의 천체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군”은, 언제나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주로 천사 군대를 의미하는 것 같다.

여호수아가 예리코 근처에서 천사 방문객을 보고 이스라엘 편인지 적군 편인지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이러하였다. “아니요. 도리어 나는—나는 여호와의 군대의 군왕으로 이제 왔소.” (수 5:13-15) 예언자 미가야는 아합 왕과 여호사밧 왕에게 “정녕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분의 왕좌에 앉아 계시고 하늘의 모든 군대가 그분 곁에, 그분의 오른편과 왼편에 서 있습니다”라고 말하여 여호와의 영자(靈子)들을 분명히 가리켜 표현하였다. (왕첫 22:19-21) “만군의 여호와”에서 “만군”에 해당하는 복수형이 사용되는 것은 적절하다. 천사 군대가 그룹, 스랍 및 천사들로(사 6:2, 3; 창 3:24; 계 5:11) 구분되어 묘사될 뿐 아니라 조직된 집합체들을 형성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불러올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 (마 26:53)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간청하면서 그분을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느님 만군의 여호와”라고 불렀는데, 여호와의 하늘 보좌를 상징하는 계약의 궤와 그 덮개 위에 있는 그룹 형상과 관련시켜 말하는 것 같다. (사 37:16. 삼첫 4:4; 삼둘 6:2 비교) 엘리사가 있던 도시가 포위되자 엘리사의 종은 두려워하였으나 기적의 환상을 통해 그 도시 주위 산들에 여호와의 천사 무리의 일부인 “불말들과 불병거들이 가득”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하게 되었다.—왕둘 6:15-17.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능력—영적 피조물들로 이루어진 엄청난 군대를 통솔하는 우주 주권을 가진 통치자가 지닌 능력—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시 103:20, 21; 148:1, 2; 사 1:24; 렘 32:17, 18) 따라서 그 표현은 깊은 존경심과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여호와의 종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다윗은 감당하기 어려운 블레셋의 골리앗에게 지상의 어떤 군대의 도움 없이 ‘만군의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전투 대열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혼자서 도전하였다. (삼첫 17:45) 하느님의 백성 전체 혹은 개인은 문자적인 전투만 아니라 시련이 되는 다른 상황이나 중요한 일이 벌어질 때면 언제나 여호와의 주권적 지위의 위엄을 인식함으로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위엄은 그분이 하늘 법정에서 섬기는 막강한 군대를 통솔하신다는 점에 나타나 있다. (삼첫 1:9-11; 삼둘 6:18; 7:25-29) 예언자들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예언을 듣는 사람들에게 예언의 성취를 확신할 만한 한 가지 이유를 더해 주었다.

만군의 주(56)

만군의 주(56) 시편 46:7

한글킹제임스성경 : 만군의 주 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셀라.

KJV : The LORD of hosts is with us; the GOD of Jacob is our refuge. Selah.

개역한글성경: 만군의 여호와 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NIV : The LORD Almighty is with us; the GOD of Jacob is our fortress. Selah

여러분은 오늘 네가지 성경을 비교하시면서 차이점을 발견하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특히 한글 성경들

사이에서는 차이점이 거의 없을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지금까지 개역성경을 읽으시면서 만군의 주

의 뜻에 대해 어떻게 알고 계셨읍니까? 개역성경이나 NIV 같은 카톨릭 계열의 성경들은 <만군>을

‘Almighty’ 즉 ‘절대적인 힘을 가진’,또는 ‘전능의’ 란 뜻으로 말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렇게 알고 계시

겠지요. 그러나 그 뜻은 그것이 아니라 ‘ hosts’ 즉 ‘하늘의 군대’란 뜻입니다. 만군의 주는 히브리어로

‘여호와 사바오스’ 인데 사바오스는 ‘무리들’ 을 의미하지만 특별히 전쟁이나 섬김에 관계가 있읍니다.

이 이름은 주로 이스라엘이 곤경에 처할 때에 등장함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심판을 예언하는

예례미야(약80회), 학개(14회), 스카랴(약50회), 말라키(25회)에서 주로 많이 언급되고 있는것입니다.

성경서 host는 하늘의 군사를 뜻하는 곳은 개역성경과 NIV에서도 알려주고 있읍니다. 눅 2:13 에 보면

“하늘의 군사들(the heavenly host)”, 왕상 22:19 에는 “하늘의 모든 군대가(the host of heaven)”라고

army, troop, camp등의 용어를 안쓰고 host 란 용어를 쓰고 있읍니다. 그러나 ‘ 하늘의~’ 라는 용어가

빠진 곳에서는 뜻을 변개시켜 버렸읍니다. 그 예를 들겠읍니다. 사무엘상17: 20 에 보면 ” 다윗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양들을 양치는 자에게 남겨두고 이새가 명한대로 가지고 가니라. 그가 참호에 이르니,

군대(the host) 가 싸우려고 나가며 전투를 위하여 함성을 지르고 있었으며” 로 되있는데 이 구절은 여러

분이 잘아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NIV는 군대를 army로 해석하고 있어 여러분도 이스라엘의

사울의 군대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어느 성경이 맞을까요? 여러분은 사무엘상 17장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그 당시 적 팔레스타인의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이스라엘군대는 두려움에 의기 소침해 있었는데

어떻게 군대가 사기 충천할 수 있었겠읍니까? 이것은 다윗을 돕는 하늘의 천사들의 군대들이 다윗에게

역사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7장의 다른곳에서는 실제적인 군대가 army로 표현되고 있어 두

군대가 구별되고 있읍니다. 또 한군데 보시죠. 이사야 24:21 ” 그 날에 주께서 높은 곳에 있는 높은 자들의

군대(the host) 와 땅 위에 있는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라” …이 구절은 대환란후 주께서 모든 하늘의 악한

영적군대(정사들 권세들 : 엡6:12,골2:15)와 땅의 악한 영적 세력을 멸망시킨다는 내용입니다. 즉 host는

하늘의 영적세력의 군대로 천사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적세력도 host로 표현됨을 아셔야합

니다. 사무엘상 17:46에는 ” 오늘 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게서 머리를 취하

리라. 내가 오늘 필리스타인들의 군대(the host of the Philistian) 의 시체들을 공중의 새들과 땅의 들짐승

들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리라.”… 내용상 역사적 골리앗을 말

하지만 하나님은 앞으로 있을 적그리도의 모형으로 골리앗을 계시하시고 있어 다윗(예수그리스도의 모형)

이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킨다는 엄청난 의미를 개역성경과 NIV는 단지 실제적인 팔레스타인군대(army)로

만들었읍니다. 이제 만군의 주가 갔는 정확한 의미를 아시겠읍니까? 아셨다면 창세기 2:1 을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성경 또는 NIV와 비교해 보세요. 차이점을 찾는 분은 오늘의 글을 이해하신 분이고 모르시는

분은 이해하지 못한 분임니다. 개역성경과 한글 킹제임스성경의 차이점은 오늘의 본문에서 보듯이 단어가

한국말로 똑같이 표현 되었어도, 그 단어가 뜻하는 근본 교리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는것도 또한

아셔야 합니다. 세상에 떠도는 성경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Copyright © 2022 Bible Baptist Church International.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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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히브리어 설교말씀]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체바오트(삼상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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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무엘상 히브리어 설교말씀 중에서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체바오트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전능하신 분이며 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는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엘가나가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체바오트(삼상 1:3)

사사시대는 신앙의 격동기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소견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모든 사람들이 육적인 일에만 정신이 팔려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사라졌고 세상의 왕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제왕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되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필요 없다고 하면서 인간의 왕을 요구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인간의 능력과 의로 살아가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사라져 가고 인간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지만 인간은 이것조차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선택받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왕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갈 때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십자가 복음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엘가나입니다.

‘엘가나’라는 단어는 אלקנה(엘카나 511) 엘가나이며 אל(엘 410) 하나님, 이라는 뜻과 קנה(카나 7069) 세우다, 건립하다, 만들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사사시대의 엘가나는 사라져 가는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세우는 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서 살아갈 때에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건립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온전하게 영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세우고 만들고 쌓아서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있도록 힘썼던 사람입니다.

현재 시대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과학과 문명에 빠져 이것이 신과 같은 존재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물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세상과 발을 맞추어 눈에 보이는 스펙을 쌓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영적인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 않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엘가나와 같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따르고 세워서 온전한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노력하는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예배는 육적인 보이는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강단에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선포되어 영혼을 깨우고 살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 엘가나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엘가나의 신앙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엘가나는 항상 실로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3절 베알라 하이쉬 하후 메이로 미야밈 야밈마 레히쉐타하오트 베리제보아흐 라아도나이 체바오트 베쉴로 베솸 쉐네 베네 엘리 호프니 우피느하스 코하님 라아도나이

삼상 1: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엘가나는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엘가나가 실로에 올라갔다고 기록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실로에 올라오기를 싫어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됩니다. 농경시대에 들어온 백성들은 농사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이방인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각 마을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을 본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각 마을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엘가나는 예루살렘 북쪽 약 32Km 떨어진 실로에 가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곳에는 광야에서 가지고 왔던 법궤가 있는 장소입니다. 엘가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성읍에서 매년 실로로 올라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경배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편하게 자신의 성읍에서 바알을 섬기지만 엘가나는 달랐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막이 있는 실로로 올라온 것입니다. 이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실로에’라는 단어는 (쉴로 7887) 실로이며, שלה(샬라 7951) 평안하다, 형통하다, 휴식하다, 안심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실로는 어떤 곳입니까? 영혼의 쉼과 안식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며 평안함이 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형통의 복을 받는 장소입니다. 세상의 근심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 나오면 안심이 되고 육신은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영혼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1절 바이카할루 콜 아다트 베네 이스라엘 쉴로 바야쉐키누 솸 에트 오헬 모에드 베하아레츠 니케브솨 리프네헴

수 18: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실로는 어떤 곳입니까? 여호수아 군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복 전쟁을 할 때에 이스라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회막을 세웠던 곳입니다. 여호와의 성막을 세워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도록 했던 장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있는 곳이 바로 실로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지금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실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여 영혼의 평안을 허락하는 장소입니다.

10절 로 야수르 셰베트 미후다 우메호케크 미베인 라겔라이브 아드 키 야보 쉴로 베로 이케하트 암밈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예언을 할 때에 유다에게는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기를 예언했습니다. 이것이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른다고 했으며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실로가 오시기까지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실로’라는 단어도 (쉴로 7886)입니다. 현재 우리의 교회는 실로에 임재하시고 있는 주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엘가나가 실로에 올라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현재 구원받은 자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일에 하나님의 처소인 교회로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우상을 섬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죄악의 자리에서 일어나 빛의 자리인 주님이 계신 교회로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실로에 나와서 엘가나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엘가나의 신앙을 높이시고 칭찬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군의’라는 단어는 (차바 6635) 군대장관, 싸움, 전쟁, 무장하다, 라는 뜻입니다. 엘가나는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러 실로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지만 엘가나는 자신의 군대장관이 되시며 전쟁과 싸움에 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70인 역은 σαβαωθ(사바오드 4519) 큰 군대, 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큰 군대가 되셔서 나를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환난 풍파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싸워주셔서 승리하게 하시고 영적인 무장을 시켜주셔서 사탄의 무리들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실로와 같은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예배하며’라는 단어는 (샤하 7812 P.VTNG 전치사. 동사, 히트파엘(강조재귀), 부정사연계형) 엎드리다, 절하다, 경배하다, 섬기다, 라는 뜻입니다. 엘가나는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의 바알과 아세라 신이 전쟁에 능하고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경배하고 있지만 엘가나는 다릅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만 자신을 엎드리고 절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만군의 주님만을 위해서 예배를 드렸더니 자신의 아들인 사무엘을 통해서 자신도 영광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히트파엘 강조재귀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의 물질을 따라간다 하더라도 나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따라가야 합니다.

70인 역은 προσκυνεω(프로스퀴네오 4352 VNPA 동사, 부정사, 현재, 능동태) 예배하다, 경의를 표하다, 경배하다, 라는 뜻이며 προς(프로스 4314) ~에서부터, ~을 향하여, 라는 뜻과 κυνεω(퀴네오) 입 맞추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엘가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입맞춤을 의미합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떠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까? 오직 주님을 향하여 경배를 드리며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나가서 주님과 입을 맞추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입은 아무나 맞추지 않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자와 입을 맞추게 됩니다. 영적으로 우리들은 주님의 신부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입을 맞추는 것은 사랑의 증표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주님과의 입맞춤이며 사랑의 표시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않고 세상에 있다면 주님과의 입맞춤은 사라지고 우상을 섬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1절 카이 엘돈테스 에이스 텐 오이키안 휴론 토 파이디온 메타 마리아스 테스 메트로스 아우투 카이 페손테스 프로세퀴네산 아우토 카이 아노익산테스 투스 데사우루스 아우톤 프로세넹칸 아우토 도라 크뤼손 카이 리바논 카이 스뮈르난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따라와서 주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과 예물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경배하고’라는 단어가 προσκυνεω(프로스퀴네오 4352)입니다. 예수님께 경배하는 단어에 사용하고 있으며 사탄을 경배하라고 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입을 맞추지 않는 자는 사탄에게 입을 맞추는 자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림으로 주님과 입을 맞추어야 합니다.

‘제사를 드렸는데’라는 단어는 (자바흐 2076 P.VQNG 전치사. 동사, 칼(능동태), 부정사연계형) 희생을 드리다. 제사를 드리다, 잡아드리다, 라는 뜻입니다. 엘가나는 실로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데 빈손으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희생제물을 가지고 올라가서 제물을 잡아드렸습니다. 거룩한 동물을 가지고 올라가서 하나님께 잡아서 드렸습니다. 이 동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각 마을에서 짐승을 잡아 바알과 아세라 신에게 바쳤지만 엘가나는 정결한 짐승을 잡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70인 역은 εξ Αρμαθαιμ(엑스 아르마타임)이 나오는데 이것은 에브라임으로부터 나와서 실로에서만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70인 역은 더 정확하게 에브라임의 장소가 아닌 실로에서만 엘가나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교회에서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승리하신 날이며 원죄에서 죽었던 내가 살아난 날입니다. 이 날을 위해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주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제사를 드렸다는 것의 70인 역은 θυω(뒤오 2380 VNPA 동사, 부정사, 현재, 능동태) 제사하다, 제물을 바치다, 희생되다, 죽이다, 라는 뜻입니다. 엘가나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실로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물을 죽이고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지금 당장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7절 에크카다라테 운 텐 팔라이안 쥐멘 히나 에테 네온 퓔라마 카도스 에스테 아쥐모이 카이 가르 토 파스카 헤몬 휘페르 헤몬 에튀데 크리스토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는 누룩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묵은 누룩을 버리고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양이 되어 주셔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희생되셨느니라’는 단어가 θυω(뒤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이 되셨습니다. 나의 원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엘가나는 항상 실로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제물을 바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도 실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안 됩니다. 인간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장소에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주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는 곳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모두가 거짓된 예배입니다. 실로가 아닌 다른 장소에 있기 때문에 영혼에 쉼이 없는 것입니다. 안식이 없기 때문에 항상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져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이것은 영혼에 안식이 없는 예배입니다. 거짓된 우상을 섬기는 예배입니다. 또한 내가 율법주의에 빠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안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에 나와야 만이 안식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엘가나는 사사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인간을 왕으로 섬기려고 할 때에 실로에 찾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려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었던 자를 위해 십자가에서 싸워주셨습니다. 영원한 승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만군의 여호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니라 실로와 같은 복음이 있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세상의 물질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며, 인간을 섬기는 것도 아니며, 문명을 섬기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러 항상 실로와 같은 교회로 나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히브리어 설교말씀]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 성막 봉헌(레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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