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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으로 들어 가라 | Cbs 성서학당 누가복음 54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신우인 목사) 31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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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성서학당 누가복음 54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신우인 목사)
본문 말씀 : 누가복음 13:22-30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2.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3. 심령이 가난한 사람
4. 예수님께 속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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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주안에있는교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것이 다 포기하고 재미없게 살라는 의미이겠는가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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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ij.or.kr

Date Published: 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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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양의문교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유일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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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sheep.org

Date Published: 3/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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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칼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크리스천투데이

크고 넓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는 뜻이다. 불편함이 없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누구라도 선호하는 일이다. 그러나 너무 편하다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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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9/14/2021

View: 583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 다음블로그

좁은 길을 가려면 자기도 부정해야 합니다. 길이 너무 좁고 문이 너무 좁아서 뚱뚱한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짐이 많은 사람도 들어갈 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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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19/2022

View: 6235

[한경직 설교]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 오피니언 – 기독일보

故 한경직 목사. 마태복음 7:13~14 1947년 2월 9일 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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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4/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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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7:13절-14절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가톨릭정보

좁은 문, 좁은 길과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완전 다른 개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앉게 됩니다. … 고, 힘들다는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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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ria.catholic.or.kr

Date Published: 6/6/2022

View: 769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7:13~14). 이런 말이 있죠. “인생은 B와 D 사이다!” B와 D 사이가 뭔가요? C이죠. B는 Birth, D는 Death, 그리고 C는 Choice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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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7/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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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성서학당 누가복음 54강 \
CBS 성서학당 누가복음 54강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신우인 목사)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좁은 문 으로 들어 가라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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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4. 6. 1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2MfzSl_jWg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태복음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해서 7장에서 끝납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부분은 산상설교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를 마치시면서 청중들이 적용해야할 말씀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은혜로운 설교 잘 들었습니다.” 이게 아니라 지금 선택하고 결단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다양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서도 계속 그와 같은 말씀을 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인가 세상 나라인가? 하늘인가 땅인가? 하나님인가 재물인가?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우리를 두 개의 문 앞에 세우십니다. “넓은 문과 좁은 문이 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선택지는 무엇이 더 좋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는 멸망이고 하나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인가 천국인가 그 문제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둘 중 무엇을 선택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알아서 선택하라. 하지만 결과는 너희 책임이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시험대에 올려놓으셨지만 그 시험의 답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면서 좀 불편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을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법시험을 통과하는 이가 적습니다. 뽑는 인원이 아주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를 정복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산이 높고 길이 험해서 정상에 오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 이런 뜻일까요?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심히 어렵기 때문에 구원 받는 사람이 적다. 그런 의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과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이 좁은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좁은 문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종교는 결국 다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길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어떤 종교든 진실하게 믿으면 다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을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할 수 있지만 결국 그 길을 걷다보면 다 같이 정상에 도달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뭐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과 길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좁은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세상에 어떤 종교로도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 없어요. 최고의 단계의 수행이나 선행으로도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길은 구원 자체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하셨나요? 좁은 문을 통과하셨나요? “예”라고 대답하기 전에 우리가 점검해 봐야 할 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을 통과한 후에 우리가 걸어야할 길이 있는데 그 길도 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 좁은 문을 통과했는지는 좁은 길을 걷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런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의 육신이 편안해 하고 좋아하는 길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는 복이 있다.” 다 육신이 좋아하고 편안해 하는 성품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은 아닌 거예요. 결정적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박해와 고난을 감수해야 할 것인데, 그게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내 나라가 끝났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내 뜻대로 마시옵고”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인 거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누구든지!” 누구나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그 사람은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옛 사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것, 예전에 사랑하던 것, 하나도 부인하지 않고 그저 주님께서 주시는 혜택만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옛 사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물었던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돈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하나님처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잔뜩 지고는 좁은 길을 걷기는커녕 좁은 문을 통과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넓은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리브스라는 사람은 <텅빈 교회>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현대 미국 사회의 기독교 신앙은 수월하고 낙관적이며 편리하고 모순이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희생이나 훈련, 겸손, 내세를 보는 눈, 영혼을 위한 열정,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죄책감은 거의 없고 형벌도 없으며 하늘나라에서 보상을 받는 것은 실제로 확실하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것을 ‘소비자 기독교 신앙’이라고 부르면 제일 좋을 것 같다. 값은 싸면서 소비자 만족은 보증되는 것과 같다.”

카일 아이들먼 이라는 사람이 뜬 <팬인가 제자인가>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는 죽음의 심벌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죽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욕심과 꿈, 계획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 우리 자신은 끝나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래서 제자는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날 많은 교회가 너무 부담스럽고 치욕스럽다는 이유로 십자가의 메시지를 내던졌다. 그 결과, 제자를 자처하지만 십자가는 짊어지지 않는 팬이 교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희생할 필요가 없는 소비자 기독교 신앙,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는 팬 신앙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으로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주님, 저를 건져 주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 삶을 바꿔주십시오.” 그렇게 고백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이전의 삶의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 삶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면서 그분이 주시는 혜택만을 얻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완전한 삶을 허락해 주시기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수 있는 거예요.

높은뜻덕소교회를 섬기시는 오대식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예화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서 목회하실 때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예배 중에 남성 중창단의 특별 찬송 순서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찬양하러 나온 세 명의 남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야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큰 체구에다가 걸어 나오는 자세나, 팔과 목에 있는 문신들이 보기에도 위압적이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자 그들의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들이 찬양을 부른 후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짧은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다 야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아내가 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하면서 세 사람이 다 왼손을 앞으로 펼쳤는데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세끼손가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그 자리에 있는 일본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기에 모두들 숙연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혜를 알고 나니 더 이상 야쿠자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쿠자 두목에게 찾아가서 조직을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야쿠자의 두목이 농담으로 받고 믿어주지 않다가 결국 진심임을 알고 모든 조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탁자에 칼을 꽂더랍니다. 그들은 그 칼로 자신들의 손가락을 자르고서야 조직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 후에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위하여 무엇을 잘라내었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생문으로 들어가라.” 그런 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다 포기하고 재미없게 살라.” 그런 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주님을 따르는 길은 수월하거나 편리한 길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희생과 포기, 순종이 필요한 길입니다. 옛 자아에게는 죽음의 길인 게 분명해요.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 길이 자유와 해방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거짓된 삶을 벗어나 진정한 삶을 선물로 받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을 때 그 문을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그 문을 여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고 인간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닦아 놓으셨는데,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닦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피로써 그 길을 닦으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고생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이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것이 다 포기하고 재미없게 살라는 의미이겠는가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과 구원을 얻으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진정한 너 자신, 너 자신의 삶을 얻으라는 뜻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걸어야 하는 좁은 길을 위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좁은 길을 걷는 우리와 동행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은 쉽고 편안해 보입니다. 그 길은 아무것도 희생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의 욕망과 즐거움,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길에 인도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내달리지만 아무도 어디로 가야할지 그리고 그 길 끝에 무엇이기 기다리고 있는지 알려 줄 인도자가 없다는 거예요.

선장이 없는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넓은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공포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데메드리오의 선동을 받은 무리들이 바울의 일행이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연극장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박해를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연극장은 동시에 25,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가운데 놓고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쳐댑니다. 공포스러운 상황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곳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절).

많은 무리들이 대형 게이트로 들어와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긴 했는데 태반이나 자신들이 모인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군중심리로 모였을 뿐이라는 겁니다.

박해를 받고 있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 그리고 그들을 박해하는 수많은 무리들. 누가 길을 잃은 것인가요? 넓은 문으로 들어온 자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왜 돈을 모으십니까? 여러분은 왜 공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계신가요? 지금 여러분이 걷고 있는 길을 그대로 내달리면 그 끝에서 무엇을 만날지 아십니까? 언젠간 죽음이라는 것이 찾아올 것인데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계신가요? 이것을 모른다면 여러분도 길을 잃은 것입니다.

좁은 길은 겉으로는 어려운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쉬운 길입니다. 겉으로는 위험한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로써 그 길을 닦아 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길 위에서 선한 목자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시편 23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1-6).

다윗은 결코 편안한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가 걸은 길은 좁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안식과 평안, 기쁨과 승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지가 어딘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좁은 길을 걷기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포기와 희생이 아닙니다. 고난과 가난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나의 생명, 나의 길, 나의 목자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의 삶을 구원해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문, 두 길을 보여주시고 선택하고 결단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시험대에 올려놓으셨지만 그 시험의 정답을 알려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답을 다 보여주셨는데도 오답을 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길을 보여주셨는데 길을 잃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말입니다. 두려움 없이 좁은 문, 그리고 좁은 길을 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복음 7 장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설교요약 —-

우리 앞에 두 문과 두 길이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힘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실까요? 바로 좁은 문과 좁은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길이기 때문입니다. 큰 문과 넓은 길은 들어가기도 편하고 걸어가기도 편하여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걸어가지만 그 문과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생명”과 “멸망”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곧 영생과 영멸을 뜻합니다.

우리 앞에는 두 문, 두 길만 있을 뿐입니다. 생명 곧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이 있으며, 멸망 곧 영멸로 인도하는 문과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길이요, 다른 하나는 지옥 영벌로 들어가는 문이요 길입니다. 찾고 들어가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들어가고 걸어가기가 얼마나 편하고 쉬운가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길이냐 멸망의 길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는 자들만 금생에서도 영생을 맛보면서 살고, 내세에서 영생을 충만하고 완전하게 영원히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8문은 “영원한 생명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지금 영원한 즐거움을 마음으로 누리기 시작한 것처럼 이 생명이 끝나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할 완전한 복락을 얻어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좁은 문”은 생명으로 천국으로 인도하는 하나 뿐인 문, 곧 하나님의 문인 바른 문을 의미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잘못된 문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바른 문은 하나뿐입니다.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영생과 천국을 주시려고 오신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구주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도는 들어가면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유일한 중보자요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죄와 진노와 저주와 형벌 아래 있는 자들에게 의와 생명을 주려고 오신 유일한 구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참된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나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내 안에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좁은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문과 이 길 외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다른 문과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우리의 중보자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요 참된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신 유일한 구속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분의 독특한 인격과 독특한 그분의 구속 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수고와 고난이 있지만 또한 참된 평안과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복음을 듣게 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자들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문과 길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으며, 그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자기를 통제하고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주님 없이 자기의 생각과 욕심대로 살아가는 생활에 비해서는, 해서는 안 될 제한이 많기 때문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이 좁고 험하고 힘든 길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산다고 해서 고생과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상은 좁은 길을 가는 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고뇌와 인생의 허무와 비애를 겪게 됩니다.

좁은 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생명과 평안과 기쁨을 얻어 누리게 되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영원한 영광 가운데서 영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여 그분을 믿고 그분의 지체로 사는 길에 어떤 희생과 고난이 따른다고 해도 주님의 친히 함께 하심과 보호하심,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좁은 길 곧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자는 문이요, 길이 되신 주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계 19:16)로서, 선한 목자로서(요 10:9-15; 시 23) 함께 하시며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와 같이 좁은 문, 좁은 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에는 자기 부인과 제 십자가를 지는 어려움이 있지만, 또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좁은 문, 좁은 길에만 생명이 있고 참된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유일한 중보자와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나의 주(Lord)와 구주(Savior)로 모시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것과 주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넷째,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를 구속하신 주님의 것임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섯째, 날마다 순간마다 나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은덕을 받아들이는 것, 곧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한편 교회에 다니면서도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자들 가운데도 좁은 길로 가지 않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판 날에 주여 주여 하는 자들과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과 같이,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하시는 두려운 선고를 듣게 될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24-28을 보면,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절) 하면서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주님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27절).”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8절).

빌립보서 3:18-21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교회에 다니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면서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들은 생명의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멸망의 넓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무슨 말을 듣게 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안다”라고 하실지, 아니면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실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실지,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실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것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마태복음 5, 6, 7장을 일컬어서 산상 수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보화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셨다고 해서 산상 보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를테면 보석 가운데서도 핵심이 되는 보석이 다이아몬드인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이 마태복음 5, 6, 7장이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미치다시피 탐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중하게 읽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산상 수훈의 특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슫도인들에게 삶의 원칙을 제시해 주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생활 철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 의식과 생활 방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마태복음 5, 6, 7장에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과 빛이라.

형제를 미워하거나 형제를 향하여 욕하지 말라.

네 사지가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성한 몸으로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모두 좁은 길을 가는 신앙인의 생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한결같이 행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고, 수고와 희생과 땀이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했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몇 가지 각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갈등입니다.

신앙 생활은 엄밀히 말하자면 평안의 생활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고민이 많은 생활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싸움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언제나 자기와 싸워야 하고, 욕망과 싸워야 하고, 육신과 싸워야 하는 생활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언제나 자꾸만 정도에서 이탈하려는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질서를 깨 보려는 욕감이 들어 있고, 타락해 보고 싶은 속성도 들어 있고, 거역해 보고 싶은 마음도, 어떤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도 인간의 본성 속에는 들어 있습니다.

이 같은 욕망과 싸워서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본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바로 좁은 길을 가는 생활입니다. 그러자니까 그 길을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넗은 길은 사람들이 가기가 아주 쉽습니다. 거기에는 재미도 있고, 평안함도 있고, 굳이 갈등을 느끼며 싸울 필요도 없는 그런 길입니다. 주어진 대로 그냥 즐기며 가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그 길은 넒어서 가기는 재미있고 쉽지만 그 길은 결국 멸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기를 “너희는 좁은 길로 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려고 하면 갈등을 각오해야 합니다.

둘째는 청빈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되 좁은 길을 가려고 하면 이 청빈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양심껏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위로 하늘을 향하여 떳떳하고 아래로 땅을 향하여 떳떳하게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사람이 정도를 걸어가며 살아가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했고,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좁은 길을 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융통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융통성 없이 살다 보면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양심껏 살고, 믿음을 그대로 지키며 살자면 우선 돈을 제대로 벌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양심껏 살아가지고는 돈이 많이 벌어지지가 않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청빈을 각오해야 합니다. 가난이 무서운 사람은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저 넓은 길을 가면서 적당히 편법도 쓰고, 적당히 얼버무려 나가며 살아야 부자가 될 수 있고, 세상에서 적당히 입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처세술이고 이 시대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적당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적당히 속이기도 하고, 편법도 쓰고, 적당히 얼버무려 가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손쉽게,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면 개중에는 청빈을 감수하고 수고도 감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당히만 하면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입신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과감히 거부하고 청빈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로 이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지탱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청빈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고독입니다.

사람이 잘 살아가다가도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이 들 때 고독을 느낍니다. 사람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될 때 사람들은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넓은 길로 가면 그곳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기도 쉽고 재미도 있고 편하기도 하니까 사람들이 모두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길에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사람들은 수고롭게 좁은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언제나 외로운 길이고 고독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려고 하면 고독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죄수를 독방에 가두기도 하는데 그것은 특별 대우가 아닙니다. 죄인 중에서도 중죄인을 독방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것은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치도록 외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인들을 보십시오.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화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혼자입니다. 손자들도 노인들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미칠 일입니다. 할 일도 없고, 사람도 없고, 언제나 집에서 혼자입니다. 그래서 종종 아파트에서 노인들이 자살을 해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이 고독을 감수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 보십시오. 원칙대로 살아 보려고 힘써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따돌림을 당하고, 외면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합니다. 그것을 감수할 각오가 없으면 이 길을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라는 사람이 좁은 문이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책 속에서 여주인공이 이렇게 독백을 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게 보이신 그 길은 너무나 좁습니다. 그래서 두 살밍 나란히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은 홀로 가야 하는 고독한 길입니다. 이 길은 고독을 감수할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넷째는 자기 부정입니다.

좁은 길을 가려면 자기도 부정해야 합니다. 길이 너무 좁고 문이 너무 좁아서 뚱뚱한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짐이 많은 사람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을 통과하려면 먼저 자기 감량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를 비하해야 한다는 말이고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공개하기를 꺼려 하고 있습니다. 재산이 너무 적어 공개되는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고 너무 많아서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재산이 많은 사람도 공직을 맡을 수 있었고 부정을 한 사람도 공직에 앉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길이 갑자기 좁아지다 보니까 아무나 공직에 앉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 몇 명의 장관들이 예전과 같이 그 문을 통과하려다 도중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에는 너무나 몸집이 크고 하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체중을 조절하다 보니까 많이 가진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흠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돈을 벌고, 남 모르게 즐거운 사생활을 영위하면서 이런 길을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이 길을 가든지, 사적인 즐거움을 소유하려면 장관 좀 하라는 제의가 와도 “나는 이대로 그냥 살겠다”하고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 공직의 길을 가는 데도 자기 축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축소는 자기 부정을 말하고 자기 비하를 말합니다. 이 길은 그렇게 부끄럽게 삶의 몸집이 크거나 자기 하자가 많아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축소를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그냥 쉽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자기 부정이 있었습니다. 하늘 보좌도 버렸고, 영광도 버렸고 변하고 병들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강(飛降)이라고 합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종의 몸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정이고 자기 축소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예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고 제자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면 이렇게 축고되어야 합니다. 자기 확대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래서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 프란체스코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앗시시에서 어느 부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그는 사교계의 명사로, 탕아의 우두머리로 뒷골목에서 방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방탕을 하면서 살아가던 그가 어느 날 환상 속에서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 “은혜받은 자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때 그가 중생을 하게 됩니다. 그 말 한마디에 변화를 받고 새 삶을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전도자가 됩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버립니다. 방탕 생활도, 환락의 생활도, 세상에 대한 미련도 모두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부터 나는 좁은 길을 가련다.’ 그 후 그는 문둥병자들에게 찾아가서 입을 맞추기도 하고, 거지들과 함께 구걸을 하기도 합니다. 또 소외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 그를 가리켜 후대의 사람들은 “예수가 재현하여 다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를 “성 프란체스크”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기도를 남겼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이 있는 곳에 밝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에게는 신앙인이 가져야 할 생활 규범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 있고, 철학이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좁은 길을 걸어가는 생활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씁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한경직 설교]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본지는 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제공으로 매주 한 차례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7:13~14

1947년 2월 9일 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 니라”(마 7:13~14)

이 말씀을 읽으니 인생행로(人生行路)를 걷는 수 없는 인간의 움직이는 모양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 나 아이나, 지자( 智 者 )나 우자( 愚 者 )나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쉬지 않고 밤낮으로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1년 2년 길을 걸어갑니다. 이들이 걸어가는 길에 두 문이 있는데, 하나는 좁은 문이 있어 거기는 좁은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넓은 문이 있어 넓은 길이 따릅니다.

영적인 인생행로에는 이 두 가지 세계,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뿐이니 중간 문, 중간 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의 양 기로 (岐路)에 서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외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은 이 말씀을 의아하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중얼거립니다. “어찌하여 넓고 평탄한 길을 버리고 좁고 험한 길을 가라고 하느냐? 넓은 길이 좋거늘 어찌하여 예수는 좁은 길로 가라하시는가?”

그러나 가만히 그 가는 길의 끝을 보면 넓은 문은 길이 넓으나 점점 좁아지고 험하여 가서 마지막엔 멸망이 기다리고 있으나, 좁은 문은 처음엔 길이 좁고 험하나 나아갈수록 점점 길이 넓어지고 평탄하여져 마지막에는 참된 길, 생명의 길이 됩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어떤 바다에 맑은 강물이 흘러 들어가는데 봄이 오면 짠물에 살던 많은 고기 떼가 담수( 淡 水 )에 와서 알을 낳으려고 하구로 밀려들어옵니다. 어부들은 이 때를 이용하여 고기를 잡으려고 큰 그물을 가지고 하구에 넓고 크게 칩니다. 고기떼는 담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와 하구에 닿아 넓은 곳으로 갈까, 좁은 곳으로 갈까 주저할 때 한 지혜 있는 고기가 있어 외치기를”넓은 곳으로 가지 말고 좁은 곳으로 가라. 담수( 淡水)는 거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넓은 곳으로 가는 고기는 그물이 좁아짐에 따라 마지막에는 사망에 이르게 되고, 이 말을 들은 고기들은 목적한 담수에 올라가 알을 낳아 새끼를 친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내가 학생시대에 어떤 만화의 그림을 보았는데, 그 그림은 지금까지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그림은 수많은 사람들 이 한 길로 밀려가는데, 그 길이 처음에는 넓으나 차차 좁아져서 마지막엔 골짜기가 되고 막혀 버려서 그리로 가던 사람들이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돌아서려 할 때 뒤를 돌아보니 머리는 사자 같고 이빨은 악어 같고 발은 독수 리 같은 괴물이 채찍을 들고 서 있어 앞으로 가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 얼굴이 지옥상( 地 獄 相 )이 되어 아우성을 치는데, 괴물의 뒤 등을 보니’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니 아무리 넓고 가기 좋아도 그 끝은 사망입니다. 그 때에 가서 죄의 책임을 벗으려 해도 악마는 죄의 값을 내라고 채찍질하니 어떻게 벗어나겠습니까? 시편 23편에”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막대기 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사망의 골짜기'(Death Valley)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골짜기를 사망의 골짜기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기차가 발명되기 전인데, 남가주(南加洲)에서 금이 많이 난다는 소문이 전 미국에 알려져서 많은 미국인들이 가족을 이끌고 마차를 타고 남가주로 향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 남가주로 향하는 도중에 큰 골짜기가 있는데, 여 기에 비가 도무지 오지 않고 반 사막지대를 이루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은 기갈이 막심하여 많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상하게도 파란 호수(湖水)가 공중에 나타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기루 (蜃氣樓)라는 것인데, 실물같이 공중에 나타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이를 모르고 따라가다가는 갈수록 호수는 멀어져 마지막에는 사막 에서 죽고 마는 것입니다.

넓은 길로 가는 여행은 신기루(蜃氣樓)와 같은 것으로서 멀리 보면 호수 같고 행복의 길 같습니다. 좁은 길, 좁은 문은 어떠합니까? 좁고 험하나 생명의 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물론 좁다고 해서 못 들어갈 길이 아닙니다. 죄 짐을 벗어버리고 회개하고 홑몸만 되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젊은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기를, “착한 선생님이시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을 잘 지키라.” 청년이 말하기를, “어느 계명이오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청년이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을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사오나 아직도 제 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이 있으니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라오라. 그리하면 하늘에 보화가 있으리라.”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재물이 많은 자로 얼굴을 붉히고 근심하고 돌아갔습니다. 재물이 회개의 좁은 길을 갈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중세기의 이야기입니다. 플로랜스의 폭군 로렌조가 임종시에 너무 마음 이 번민되어 당시의 선지자 사보나로라를 청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하기를,”내 마음에 지금 세 가지 죄가 있어 나를 괴롭게 합니다. 볼레라 성을 억지로 빼앗은 것, 은행을 강탈하여 재물을 많이 빼앗은 것, 나를 반대하는 정치적 음모자를 많이 학살한 것, 이 많은 죄가 나를 눌러 견딜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야 이를 면할 수 있습니까?” 사보나로라가 대답하기를”하나님 은 선하시고 자비하심을 분명히 믿고 의지하셔야 합니다.”로렌조가 대답하기를”분명히 믿습니다, 사보나로라.”

“둘째로 당신이 불의하게 빼앗은 모든 재물은 도로 돌려주시오.” 이말에 로렌조는 처음에는 얼굴을 찡그렸으나 좋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셋째로 볼레라 성의 자유를 회복하여 모든 인민에게 자유를 주시오.” 이 말에 폭군 로렌조는 아주 노하여 아무 대답도 없이 돌아눕더니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좁은 문이었습니다. 재물까지는 내놓을 수 있었으나 권세는 내놓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죄라도 그냥 두고는 좁은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까워도 죄는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교만이나, 재물이나, 애인이나, 욕심이나, 시기를 내놓지 않고는 도저히 좁은 길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듯하나, 실상은 넓은 길로 가는 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좁은 길로 가지 않으면 천성 길로 가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를 보시오. 처음에는 믿는 것 같았으나 한 사람 두 사람,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볼 때 예수를 은 30냥에 팔고, 넓고 평안한 길로 가려다가 스스로 목을 매고 창자가 터져 죽고 말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어떤 이는 넓은 길로 가는 듯하나, 실상은 좁은 길로 가는 자가 있습니다. 바울은 야심이 만만한 청년이었으나 예수를 알게 된 순간부터 민족적 편견과 지식 같은 것을 분토같이 내버리고 신앙의 좁은 길로 걸어가 마침내 복음의 세계적 사명에 큰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 시는 바와 같이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유명한 클리브랜드 탑이 있습니다. 이 탑은 클리브랜드의 이름을 따서 지은 탑인데, 클리브랜드는 이 프린스턴 대학 출신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 한 사람입니다.

이 클리브랜드가 아직 젊은 학생시대에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유명한 집 자손으로 좋은 사람이었으나 나쁜 친구를 사귀게 되어 하루는 그 친구와 같이 좋지 못한 곳으로 놀러 가는 도중, 어떤 예배당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보니 게시판에 써 붙인 설교 제목이’죄의 값은 사망’ 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청교도의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양심에 이상한 충격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의 유혹을 물리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당에 들어가 설교를 듣고, 이로부터 좁은 인생행로를 택하여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한편, 그가 대통령 취임식을 하기 전날 이를 게재한 신문 보도를 쥐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한 죄수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학생시대에 클리브랜드와 같이 방탕한 곳으로 놀러 가던 그 친구였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즐기던 자였지만, 한 청년은 넓은 길로 가고 한 청년은 좁은 길로 갔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를 빚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동일한 지점( 地 點 )에서 갈라졌지 만 그 결과는 말할 수 없이 먼 거리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걸어가는 인생행로는 두 길, 두 문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넓은 길 하나는 좁은 길, 하나는 넓은 문 하나는 좁은 문입니다. 백두산 상봉에서 떨어지는 같은 물방울이나 서쪽으로 떨어지면 압록강이 되어 서해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떨어지면 두만강이 되어 동해에 들어갑니다. 오늘 이 자리 에 같이 앉아 예배보지만 여기도 두 가지 다른 길 다른 문으로 가는 자가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10년, 20년 후에 아니, 이후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 하나는 주님의 품에, 하나는 마귀에게 잡혀 지옥형벌 받을 자가 없다고 누 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1947년 2월 9일, 오늘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여러분에게 불초한 나이지 만 주님을 대신하여”좁은 문으로 좁은 문으로!”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 니다. 넓은 문은 처음에는 그 길이 넓어 가기가 쉬우나 마침내 험하여 사망 에 이르고,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길은 처음엔 좁으나 점점 넓어져서 마지막엔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입어 이 좁은 길로 가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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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News 가톨릭정보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마태복음7:13절-14절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3절..<"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여기서 ‘좁은 문’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문 이 좁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좁은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뜻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말은 하느님 말씀(복음)을 믿고 받아들 이고 실천하고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그 일이 어렵고 힘들긴 하지만 생명을 얻기 위해선 해야 할 일입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과 반대쪽에 있는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생명을 얻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문이 넓고 길도 널찍하다는 것은 그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고 편하고 재미있고 즐겁게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 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길’은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나타냅니다. 동서양 모두 옛날부터 사람의 일생을 나 그네로 비유하고, 종교를 ‘길’로 표현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길을 가지 말고 쉽고 편한 길로 가라고 충고하는 것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가 그 길을 가지 말라고 예수님을 말린 것은 좀 더 편한 길로 가시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 러가라.’ 하시면서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16,23). 14절..<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을 모두 뜻합니다.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라는 구절은 표현이 좀 어색하고 이상한데, 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원문대로 직역했습 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라고 의역했습니다. 생명으로 이끄 는 문이 좁고 그 길이 험하다는 것은,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생활이 재미도 없고, 불편하 고,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신앙생활은 이기심은 버리고 이타심은 기르면서 본능과 욕망은 억제해야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 삶은 어렵고 재미없고 힘든 삶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불쌍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리석게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로 가는 것을 주저하고 망설이고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그 길로 가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멸망으로 이끄는 문’ 외에 제3의 문 도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멸망할 사람은 많고, 구원받을 사람은 적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누가 구원을 받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미리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 면 좁게만 보이는 그 문을 향해서, 험하게만 보이는 그 길을 ‘지금’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느 쪽 길로 더 많이 가고 있느냐가 선택의 기 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떤 문을 향하고 있느냐, 그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생명의 문과 길을 일부러 좁고 험하게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 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래는 생명의 문과 길이 넓고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한눈을 팔고 딴 마음을 품으면 서 그 문이 좁아지고 길이 험해져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 6절을 보면, 하와가 사탄의 유 혹을 받고 선악과를 바라보자 그 열매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고, 먹으면 슬기롭 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다른 열매들이 맛이 없 었던 것이 아닌데, 선악과가 제일 맛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른 열매들이 맛이 있다 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이 실제로 좁고 험한 것이 아닌데도 우리가 자꾸 다른 문과 다른 길에 끌려서 그 문과 길이 좁고 험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사실 신앙생활에도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그 문과 길이 좁 고 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기쁨과 행복은 세속이 주는 쾌락과는 많이 다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세속이 주는 쾌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선택할 것인가, 그건 각자의 숙제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이 좁고 험하다고 불평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길을 기쁨과 행복 속에서 잘 걸어가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송영진모세 신부님의 마태복음 해설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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