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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 장 6 절 | [하루 한 장] 이사야9장_한 아기가 우리에게 188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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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5 [하루 한 장]“한 아기가 우리에게” (사9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말씀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이사야 9장은 전쟁의 상황에서
선포되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곧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직전이지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600년 후에 찾아올 메시야의
구원의 때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 날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될 것이고
갈릴리 땅이 영화롭게 되고
즐거움이 더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실 분은
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시는데
그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우실
바로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한 사건입니다
전쟁은 그치고 탐욕은 멈추고
진정한 평화가 선포됩니다
이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우리도 약함을 두려워 말고
아기 예수님을 더욱 의지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갑시다.

이사야 9 장 6 절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이사야 9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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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이사야9장_한 아기가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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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사야 9 장 6 절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8,780회
  • Likes: 좋아요 174개
  • Date Published: 2018. 12.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_TWf7f6RwLI

이사야 9

평강의 왕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1)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의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이사야9장6절)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감사하는 예배에 함께 해주신 성도님들과 가족분들게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예수님만큼 이 세상에 변혁을 가져 온 출생이 있을까요?

오늘 밤만 해도 지구 인구 삼분의 일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우리 각자에게도 얼마나 큰 축복과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오늘밤 구약성경에 예언 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잠시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신비한 것은 오래 전부터 태어날 것이 예언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도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팔백년 전에 이스라엘 선지자였던 이사야가 했던 예언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예지해서 말하는 걸 예언이라고 하죠.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것인지 아닌지는 예언대로 이뤄졌나 아니냐를 보면 증명이 됩니다.

구원자가 이 땅에 오실 것에 대한 모든 예언은 예수님의 생애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아기에게 붙는 수식어가 거창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정말 대단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예언이죠?

이 선지자가 예언한 이 아기는 누구일까요?

그의 어깨에 정사를 매었다고 한 걸 보면 아기는 왕이 될 아기입니다.

정사는 정권, 통치 그런 뜻입니다.

대단한 통치자가 될 아기라는 것이죠.

지구 역사 속에 존재했던 위대한 왕들을 한번 여기에 대입시켜 보시겠습니까?

징기스칸, 알렉산더, 나폴레옹, 세종대왕, 링컨, 그 누구를 대입해도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실한 사람이라면 자기는 그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방출신의 한 젊은 목수였던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예언들이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8장24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구약성경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메시야에 대한 수많은 예언들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것임을 믿는 우리 모두는 복 있는 성도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아기의 이름이 다섯가지로 불리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름이란 것은 단순히 남과 구별하기 위해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식이 장차 어떤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고 신중하게 짓습니다.

저희 부부도 서원이 이름을 지을 때 그랬습니다.

서원이는 잠언 31장에 ‘서원하고 낳은 아들아’ 라는 구절에서 감동을 받고 지은 이름입니다.

아들인줄 알고 장차 하나님을 위해 일하게 되길 소망하며 서원하는 마음으로 지었는데, 딸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름은 예수님이 이만큼 굉장한 분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이신데 당연히 굉장하고 위대하시죠.

성경은 의외로 하나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설명할수록 우리에겐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에스겔서 같은 데서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성경 중 가장 이해하기 난해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잖아요?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그러니까 땅의 일을 가지고 하늘의 일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설명하려 한다면 아버지가 세 살짜리 아들에게 자기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이 난감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빠는 우리나라 서열1위인 아이티기업의 CEO야’

이걸 아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들을까요?아버지는 그냥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사랑해주면 되는 것이죠.

오늘 예언자 이사야가 알려 줄 이 특별한 아기의 이름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해주실 것이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면 뭐하겠어요?

내게 무엇을 해주시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가지신 이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로 불립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각각 두 이름으로 해석되어 있지만 원문 성경대로 하면 ‘기묘한 모사’라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기묘한 모사’하면 느낌이 잘 오지 않죠?

성경은 이스라엘의 언어를 번역한 것이기에 우리 정서에 완전하게 일치되는 단어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대~박’이라고 하는 말을 영어로 정확히 표현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은 것이죠.

기묘한 모사는 영어성경에서는 원더풀 카운셀러 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탁월하고 놀라운 상담자, 중재자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놀라운 중재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중재자는 제삼자로서 당사자 사이에서 분쟁의 해결을 조정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둘 사이가 너무 나쁘면 누군가가 중재자가 돼서 화해를 유도하잖아요?

요즘 카카오 카풀 문제로 택시기사분들이 파업도 하고 시위도 하는 데 누군가가 이 문제를 중재하고 조정해야 갈등이 해소 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는 조정하기 어렵게 틀어져 버렸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얘기를 해보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친한 사람들한테 얘기하면 예의상 그게 잘 안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불의한 것, 악한 것, 죄 문제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부 알려주신 하나님의 속성 속에는 공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악에 대해서 창조주께서는 반드시 시비를 가려 처벌을 내리십니다.

그래야 공의로운 통치자이시죠.

그러니까 매일 죄를 짓고 나쁜 생각으로 살며 하나님을 싫어하는 인간과 하나님과는 관계가 좋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중재하러 오신 원더풀한 중재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왜 기묘하고, 왜 원더풀일까요?예수님이 탁월한 중재자인 이유는 그 중재하시는 방식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중재자라면 그 일을 위해 자기 자신을 전폭적으로 희생하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개입하고 안되면 빠지는 것이죠.

우리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완전히 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사랑의 중재자이시니 기묘한 모사, 원더풀 카운셀러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는 영원한 중보자이십니다.

오늘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중재로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 된 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다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선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아기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열 달 동안 자라나서 자연분만으로 태어 나셨습니다.

신이 잠시 사람 몸을 빌려서 내려오신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사람의 유전인자를 택해서 완전한 사람의 형상으로 존재방식을 바꿔 버리신 것입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몸이지만 승천하셔서 우리 같은 사람의 몸을 가진 채로 천국에 계시잖아요?오늘 밤이 말해주듯이 인간 역사의 한 시점에서 저기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인간이냐, 아니면 신이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 신이시며 완전한 사람으로 믿습니다.

올해 중국에선 크리스마스 금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중국 상점들은 일체 크리스마스 트리나 장식등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신론이 바탕인 공산주의사상에서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기독교의 확산은 위험한 일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조국인 이스라엘 국민들은 이 아기를 누구라고 생각할까요?

당연히 위대한 정치 지도자, 왕이 될 왕자의 탄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가에서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이 아기가 그 아기인가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구원자로 내려오신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가 하나라고 하셨을 때 신성모독죄로 체포한 것이잖아요?

그들이 늘 배우고 외우던 구약성경, 오늘 같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조금만 더 깊이 연구해 보아도 이 아기가 완전한 인간이며 전능한 하나님이신 놀라운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었을 텐데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사람의 경험과 지식은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늘 이사야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에 성탄의 교훈을 되새기는 게 아니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3) 다음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영존하신다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의미보다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신이시기에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란 무엇입니까?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존재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이 땅에 사는 동안 끝까지 아버지고 자식을 지켜줍니다.

미국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한 젊은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미국의 육사는 신병 괴롭히는 일에 정말 상상을 초월하게 악명이 높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인 신병이 들어왔으니 그 앞날이 안 보아도 뻔한 것이죠.

입대하는 날 그의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부대입구까지 아들을 따라 왔습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걸으면 부대 안이고 잔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들이 뒤돌아 부대를 향해 걸음을 떼는 순간, 아버지가 아들의 팔을 덥석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들면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와’

이 분이 하는 말이 아버지가 했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끝까지 견디고 육사를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돌아갈 집이 있고, 그곳엔 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서 돌아온 걸 이해하고, 따뜻하게 안아 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모든 고통을 이기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난 갈 데가 있으니까, 내가 갈 데가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니까’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자신감이 지탱해 주더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한번만 우리를 사랑해서 이 땅에 오신 게 아닙니다.

한번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천년전과 똑같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세상의 것들이 부족할 때도, 잠시 시련을 당할 때도 모든 상황 가운데 아버지처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심중에 담대함을 잃지 않고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4) 이 아기는 평강의 왕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의 평강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를 말합니다.

인류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전쟁 본능 때문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뺏기도 하지만, 사람 속에 자기보다 약한 자를 짓밟고 남과 다투는 악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왕국에선 죽이고 뺏는 전쟁을 끊임없이 해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평화의 조약을 맺는다고 평화가 오는 게 아닙니다.

분쟁하는 인간 본성에 평화가 와야만 사회가 평화로와지는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에만 전쟁이 있습니까?인간의 삶, 사람의 내면에도 항상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우리 안에 평강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시기심, 교만, 근심, 열등감, 정욕, 이런 것들이 늘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편해도 살만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 마음에 평화를 주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화는 우리 내면에 항상 있을 것이기에 어떤 외부 환경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 삶이 전쟁터와 같이 두렵고 위태함을 느낄 때에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이 평강이 모든 것을 이길 힘을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다면 지금도 전쟁터 같이 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정들만 해도 식구끼리도 서로 다투고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르며 지금보다 더 서로를 괴롭히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평강의 주님이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과 가정과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함께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삼십삼세에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서 삼십년 동안이나 보통 사람의 삶을 사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 긴 시간을 이 땅 자녀들의 고통과 괴로움과 고단한 생을 몸소 겪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때로 믿음에서 머뭇거리고, 때로 주저앉는지를 아십니다.

세상과,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참 지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사를 다 겪어보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해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더욱 우리의 특별한 중재자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평강이 되십니다.

오늘 함께 이 말씀을 듣고 이천년전 예수님의 탄생이 이렇게 나를 위한 것임을 감사하는 모든 분들 위에 예수님께서 평생에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의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부인하는 오류 – 믿음을 위한싸움

이사야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노먼 가이슬러와 론 로우즈는 위트니스 리가 이사야 9장 6절에 근거하여 “아들이 아버지이시다” 라고 말한 것은 양태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평문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약 30년 전에 그와 동일한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위트니스 리는 『어떠한 이단인가––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 주는 영 그리고 세 하나님!』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주장들의 허약한 논증체계를 무너뜨린 적이 있다.2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위트니스 리가 그 책에서 반박했던 쟁점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동일한 정죄를 재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이번 비평을 검토할 때, 위트니스 리가 성경 본문을 다루는 방식과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다루는 방식을 비교해 보면서 각측의 접근이 어디로 귀결될 지를 살펴보는 것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성경이 무언가를 말할 때 글자 그대로 그것을 의미한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그의 성경 해석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 즉 그분의 경륜에 근거한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삼일 하나님의 상호내재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본임을 보았다. 이와 달리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성경의 말씀들은 그것들이 말한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런 가정에 근거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가이슬러는 성경의 무오성을 확고하게 지지한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의 가르침을 재평가한 것을 비판하면서, “성경이 확증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확증하신다” 고 선포한다. 그들은 고린도 전서 11장에 있는 머리 덮는 것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지지하지 않는 교직원을 채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풀러 신학교가 “성경의 교리에 따른 정통으로부터 빗나갔다”고 정죄한다. 따라서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바로 삼일 하나님의 그 인격을 다룬 절인 이사야 9장 6절에 대하여 성경이 확증하는 것을 확증하지 않고, 자신들이 미리 정해둔 신학적인 모델을 유지하려고 말씀의 분명한 의미를 뒤엎기 위하여 학자적인 치장에 의존하는 것은 아이러니라 하겠다.

위트니스 리는 이사야 9장 6절을 확증함

가이슬러와 로우즈와는 달리, 위트니스 리는 성경이 확증하는 것을 확증한다. 이사야 9장 6절에 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라면, 어떤 왜곡함도 없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지지하겠다. 이 구절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분명한 말씀 그대로 성경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왜곡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바와 부합하는 것은 무엇이든 취하고, 자신들의 이해와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왜곡시킨다. 만일 당신이 성경의 말씀들을 왜곡시킨다면 손실을 입을 것인데, 이는 거룩한 말씀을 변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말씀에서 어떤 것을 감하거나 더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일이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든 못하든,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는다. 성경에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말할 때, 나는 “아멘, 아들은 아버지이십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관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관심한다.3

위트니스 리가 성경을 읽을 때 적용했던 첫 번째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한 계시로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든지 그대로 믿고 가르쳤다. 둘째, 그는 인접한 내용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사야 9장 6절이 있는 단락은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육체되심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예언한 곳들 중 하나이다. 셋째, 그는 그 단락이 쓰인 책의 내용을 검토했다. 그는 이사야 9장 6절의 사례에서 ‘아버지’라는 개념이, 이사야 63장 16절과 64장 8절에서 더 발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이사야 63장 16절은,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이라고 말하며, 이사야 64장 8절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9장 6절에서 영원의 아버지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한 것보다 더 발전된 내용으로 이 두 절의 말씀을 제시했다. 64장 8절에서 이사야는 9장 6절의 영원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말하고, 63장 16절에서는 그분께서 우리의 구속주이심을 말한다.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창조주, 특히 우리의 구속주로 계시되신다(요 1:3, 히 1:10, 롬 3:24, 딛 2:14). 영원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우리의 구속주시라는 것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의 아버지 곧 신격 안의 거룩한 아버지이시라는 해석을 확증할 뿐 아니라 견고케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9장 6절에 있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는 영원의 아버지가 신격 안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종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이사야서 전체의 맥락에 따른 것이 아니다.4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내재

위트니스 리는 더 나아가 이사야 9장 6절이 말한 그리스도의 육체되심에 관한 진리를 신성한 계시 전체의 맥락 안에서 고려했다. 특별히 요한 복음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관한 독특한 계시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에게서 온 독생자”라고 한 요한복음 1장 14절의 표현에서 ‘에게서(from)라는 헬라어 단어는 파라(παρὰ)이다. 위트니스 리가 이 단어에 대하여 그의 각주에서 설명하였듯이 파라(παρὰ)는:

‘…의 곁에’를 의미하며 ‘와 함께’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에게서 함께’(from with)이다. 아들은 하나님에게서 오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한편으로 아들은 하나님에게서 오시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요8:16하, 29, 16:32하).

주님은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요한 복음 14장 9절에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절들 자체도 요한 복음에서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다음의 사례들이 증명하듯이 위트니스 리 혼자만이 이렇게 연결지어 이해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알렉산더의 클레맨트(Clement of Alexandria)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이 갓난 아이는 누구인가? 우리로 그 형상을 따른 어린 자녀들이 되게끔 하는 분이시다. 그분의 위대하심이 동일한 신언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선포된다.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오 위대하신 하나님! 오 완전한 아이! 아버지 안에 계신 아들이시고 또한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시여.5 로버트 제이미슨(Robert Jamieson), A.R. 화우셋(A. R. Fausset), 데이빗 브라운(David Brown)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 절은 그분을 ‘기묘자’로 표시한다. 곧 그분은 ‘어린 아이’이시지만 또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기도 한 기묘한 분이시다(요한 복음 10장 30절, 14장 9절).6 B. B. 워필드(Warfield)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요한의 저술들)에서 그분은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10:38, 16:10-11참조)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듯, 상호침투로 인한 연합에 근거해 그분께서 아버지와 하나(요10:30, 17:11,21-22, 25참조)시라고 대단히 명쾌하게 선포하셨다. 그렇기에 그분을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 된다(요14:9, 15:21참조). 뿐만 아니라 그분은 자신의 영원성(“이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나는…이다’ 입니다.” 요8:58), 하나님과의 공동 영원성(“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요17:5, 17:18, 6:62), 그리고 신성한 영광 그 자체에 영원히 참여하심(“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교제 안에서,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 요17:5)을 명백하게 단언하심으로 아버지와 하나인 그분의 본질적 본성에 관한 모든 의심을 제거하신다.7

신격의 셋이 공유하시는 하나됨(oneness)은 단지 공통 목적만이 아니고, 단지 본성을 공유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상호 내주의 하나됨이다. 주님께서 요한 복음 10장 38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고 말씀하신 것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라고 하신 30절에 대한 설명이다. 이와 비슷하게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그대가 믿지 않습니까?”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그분의 말씀은 왜 아들을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 되는지(9절)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하나됨은 상호내주의 하나됨이다.

믿는 이들과 삼일 하나님의 상호 내재

아들과 아버지의 상호 내재하심에 관한 이 계시는 삼일성의 본체론에 관한 단순한 신학적인 고찰을 위해서만 성경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활을 위해서도 큰 의미가 있는 문제이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이다(벧전2:21). 물론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구속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이 참으로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을 단지 외적으로 모방하여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는 문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사는 문제라는 것이다. 요한 복음 17장 21-23절에서 주님 자신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도록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도록 하여 주십시오. [22]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온전하게 되어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23] 나에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이 보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트니스 리는 요한 복음 17장에 있는 주님의 기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요한 복음 15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계시된다(4-5절). 그러나 요한 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도록 기도하셨다(20-21절). 주님은, 그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신 것처럼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우리가 깨닫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에 관해서 그토록 놀라운 상호 내주의 하나됨이 있다. 그리스도는 이 상호 내주의 하나됨을 믿는 이들에게 재현해 오셨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그분의 믿는 이들 안에 계셔서 믿는 이들이 그분 안에 있게 하신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셔서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게 하는 것과 같다. 요한 복음 17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기도는 그러한 상호 내주의 하나됨의 계시이다.8

이러한 빛가운데 이사야서 9장 6절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감상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는다. 이 목적은 삼일 하나님의 상호 내주의 하나됨의 확대인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가 되신 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는 죽음을 죽으신 것도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셔서 아버지와 그영과 함께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시고(엡4:6, 갈2:20, 요14:17), 믿는 이들이 신성한 삼일성의 상호내주의 확대와 표현이 되도록 삼일성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요 17:21, 요일 4:13, 고전 12:13)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이사야서 9장 6절 해석에 대한 비평

이사야서 9장 6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되심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확증한 위트니스 리를 비평한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글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귀결된다.

‘아버지’는 ‘명백히 신약적인 용어’라는 잘못된 주장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첫째, 삼위일체의 첫 번째 위격으로 사용될 때, ‘아버지’라는 용어는 명백히 신약적인 용어이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틀렸다. 사무엘 하 7장 12-14상에서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호와에게서 임한 다음의 말씀을 전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견코케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이 예언은 역대상 17장 11-14절, 22장 10절, 28장 6-7절에서도 반복된다. 이것이 이중 예언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예표론에서 이 예언은 솔로몬을 가리켰지만,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아들이시라는 선포로 시작하며(마1:1), 다윗의 씨에 관한 그 예언들의 참된 성취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마 9:27; 12:23; 15:22; 20:30-31; 21:9; 22:42, 45; 눅 1:32; 롬 1:3; 계22:16).

가이슬러가 공동 저자로 되어 있는 한 책에서 그는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리라”고 한 것은 ‘다윗의 계보에 속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9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는 로우즈가 그랬듯이 이 절이 다윗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임을 인정한다.10 그리스도는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을 가리켜 ‘그의 아버지’라고 한 표현은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를 가리켜 말한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삼일성의 첫 번째 위격을 가리키는 ‘아버지’는 구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

더구나 히브리서1장 5절 하반절은 사무엘하 7장 14절을 인용한 후,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될 것이다.” 라는 이 예언적인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에 있는 모든 예표들보다 뛰어나시고 그러한 예표들의 성취이심을 보여준다. 1장 4절부터 14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뛰어나심을 보여준다. 따라서 히브리서 1장 6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이끄시어 세상에 다시 오게 하실 때, ‘하나님의 모든 천사는 그분께 경배하여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땅의 왕들의 통치자가 되셨다(롬8:29, 계1:5). 이것은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라 내가 또 그를 나의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라고 한 시편 89편 26-27에 분명하게 예언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금 신격 안의 아들과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아버지를 가리켜 예언적으로 언급한 구약의 사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또한 이사야서라는 책의 본질을 간과한다. 이사야서는 신약적인 주제들에 관한 예언적인 언급들이 특별히 풍성하여 ‘다섯 번째 복음’11이라고 불릴 정도다. 이사야서에 담긴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에 관한 예언들은 다른 어떤 예언서들보다 더 많이 신약 안에 인용되어 있다. 복음서들 안에는 “신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마 4:14; 8:17; 12:17; 참고 1:22; 3:3; 13:14; 15:7). 주 예수님은 신약의 은혜의 희년을 선포하시기 위해 회당 안에서 서셨을 때, 이사야서를 읽으셨다(눅4:17). 빌립은 이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던 이사야서의 내용으로 그에게 복음을 풀어주었다(행8:27-35).

그리스도의 육체되심과 십자가에 못박히심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특별히 중요하다. 이사야 7장 1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주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났을 때 이 절을 인용해 말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신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 하신 것이다. 보아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9장 6절 또한 육체되심에 관한 예언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 상반절과 부합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한 이사야 53장은 그분께서 사람에게 배척당하실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심지어 새 하늘 새 땅에까지 미친다(사65:17). 이 예언들 중 어느 것도 구약 시대에는 성취되지 못했지만,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이런 예언들은 신약의 감각 안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은 그리스도의 육체되심이다. 이사야 9장 6절은 구약 안에서 육체 되심을 가장 분명하게 예언한 말씀 중 하나이다. 가이슬러도 이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시아를 가리키는 구약의 단락 중에서 참으로 이사야 9장 6절보다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켜 말하는 말씀도 없다.”12 이 절은 사람들 가운데 태어난 한 아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은 틀림없이 그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리킨다. 이사야 9장 6절은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울 것을 말한다. 성경 외적인 것을 진리와 논리의 기준으로 붙든 나머지, 어떤 의미에서도 이 말씀이 아들이 아버지이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증거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사람의 전통을 붙드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태도이다(막7:6-9).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시는지를 우리가 이해하고 안 하고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의 첫 번째 요구는 우리가 그분 자신에 관한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 즉 하나님께서 확증하신 것을 우리도 확증하는 것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사야 9장 6절에 있는 능하신(mighty)하나님이 전능하신(almighty)하나님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은 틀린 주장이라며 반대한다.13 올바른 지적이다. 허나 그들이 동일 구절 안에 있는 영존하신 아버지가 한 하나님 아버지(엡4:6)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주장할 때, 원칙적으로 그들도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단순히 “예수님이 영원하심”을 의미하는가?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원래의 히브리어에 기초해 볼 때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은 영어로는 ‘영원의 아버지’ 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좋다” 고 말한다. 이사야서의 많은 말씀에서 사용된 ‘아버지’라는 히브리 이름의 구조는 ‘아버지’와 수식어로 구성된 복합명칭의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63장 16절과 64장 8절에 있는 ‘아버지’(אָבִינוּ)에 대한 축어적인 번역은 ‘우리에게 속한 아버지’(Father of us)이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라고 번역된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 9장 6절에 있는 직역된 ‘영원의 아버지’(אֲבִיעַד)는 일반적으로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는 ‘영원한 아버지’ 라는 신성한 칭호로 이해된다. 따라서 평판이 있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다섯 개의 영어 번역본들인 흠정역 성경(the King James Version), 미국 표준역 성경(American Standard Version), 미국 새 표준역 성경(New American Standard Bible), 새 국제판 성경(New International Version), 영국 표준역 성경(English Standard Version)은 그것을 ‘영원의 아버지’ 혹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번역한다

이사야서 9장 6절의 호칭을 ‘영원의 아버지’로 옮긴 번역을 일단 받아들인 후,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 이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억측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먼저 그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영원하심”을 의미할 수 있다고 상정하고, “그렇다면 그 용어는 그저 신성한 메시아의 영원성을 가리킨다고 힘주어 주장할 수 있을 법하다.”라고 말한다.14 그들은 자신들의 억측을 뒷받침하려고, “고대 구약의 탈굼(Targums – 아람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역자주)의 의역들”을 인용 소개한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이러한 해석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성경본문에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 언어를 충실히 반영하지 못한다.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사야 9장 6절에 있는 ‘아버지’라는 명칭은 복합어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이 אֲבִי, 인 반면, 그 복합어 명칭에서 ‘아버지’라는 말의 어근은 אֲבִיעַ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비록 히브리어 성경에서 ‘아버지’가 이름의 어근일지라도 그 용어가 본문 이해에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본문에 충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두 번째, 특별히 히브리어 구약 본문의 바탕에 깔린 의미가 명백하게 바뀌는 이런 경우에는 “구약 성경에 대한 탈굼의 단순 의역”을 권위있는 출처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탈굼은 구약의 일부를 아람어로 바꾼 랍비들의 의역이다. 구약 원문의 기초와 보조적인 고대 사본에 대한 주도적인 권위자들 중 하나인 메쯔거(Bruce Metzg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의 모든 번역들은 필연적으로 어느 선까지는 해석을 더하기 마련이지만, 탈굼은 미리 수립된 정책에 의해 해석을 유도해 간 점, 그리고 종종 번역의 범주를 너무 벗어나거나 심지어 의역을 하는 식으로 해석한 점에서 기존 번역들과는 차이가 있다.15

또 다른 저명한 구약 사본학자인 에른스트 뷔르트바인(Ernst Würthwein)도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성경의 다른 역본들 중에서 탈굼처럼 해석적인 요소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역본도 없다. 그들은 의역을 하고, 설명하는 어구를 추가하며, 그들 당대의 신학적인 추세를 따라 본문을 재 해석하고(어떤 때는 아주 대담하게), 본문을 그 당시의 생활과 정치적인 상황 등등에 결부시킨다.16

뷔르트바인 위 내용이 담긴 단락의 끝부분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단:

반 기독교적 논증의 영향 아래서 특별히 대담한 재해석이 가해진 곳은 이사야 52장 12절부터 53장 12절이다.17

뷔르트바인이, 육체되신 구속주의 핵심적인 방면을 폄하하는 “아주 담대한 재해석” 이라고 평가내린 탈굼의 그 단락이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글에서는 그들의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 단락으로 등장하고 있음은 의미 심장하다. 반 기독교적 논증이 ‘조나단 탈굼’(Targum Jonathan)의 이사야서 의역에 영향을 끼쳤다고 뷔르트바인이 우려를 표명한 것에 대하여 많은 명망있는 학자들도 공감한다.18 심지어 이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사야서 52장 12절부터 53장 12절에 대한 탈굼의 번역이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19

탈굼은 이사야 9장 6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신언자가 다윗의 집에 말하였다. “한 소년이 우리에게 나셨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분은 토라를 준수하려고 스스로 그것을 취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이전부터 불리웠다. 기묘한 모사, 전능한 하나님, 영원하신 분이라고. 곧 “그분의 날들 동안 평화가 우리 위에 증가되게 하실 메시아이시다.”20

핀란드에 있는 아보 아카데미(Åbo Akademi)의 유대학 분야의 구약 강사직을 맡고 있고, 1995년부터 탈굼 연구를 해 오고 있는 ‘국제기구 조종 위원회(the Steering Committee of the International Organization)의 일원이기도 한 로저 싸이렌(Roger Syrén)은 위 절에 대한 탈굼 학자들의 의역에서 “그분의 이름은 이전부터 불리웠다” 라는 표현은 별도로 독립되어 있다, 즉 히브리어 본문에서와 같이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묘사의 연장이 아니다라고 논평했다. 싸이렌은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따라서 탈굼 학자들은 메시아에게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기 9장 5절의 본문을 조작했던 것으로 보인다.21

또한 토라를 그 격에 맞지 않게 강조하는 것과 이사야 9장 6절에 있는 히브리어 단어의 일부인 ‘아버지’라는 신성한 칭호를 완전히 생략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성경이 고백한 것을 고백하기보다는 이렇게 생략한 해석을 옹호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의역한 탈굼에 근거해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셈이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사야 9장 6절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제거함으로써, 선입견에 근거한 신학적인 입장에서 본문 비평을 하고 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삼일성에 관한 자신들의 관념에 일치시키려고 ‘아버지’ 라는 단어를 제거하는 것은 본문 비평의 주요 원칙 중 하나인 ‘렉티오 디피킬리오 렉티오 포티오르’(lectio difficilior lectio potior), 곧 ‘더 어려운 독본이 더 믿을 만한 독본’이라는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이 원칙은, 텍스트에 차이점이 있다면 필사 과정에서 더 어려운 독본이 더 단순하고 논쟁의 여지가 적은 것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더 농후하므로 실상은 더 어려운 독본이 원문에 더 정확한 독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원칙이다.22 가이슬러 자신도 이러한 본문 비평의 원칙을 인정한다.23 이 원칙은 일반적으로 원어(헬라어, 히브리어)로 된 사본들 상의 차이점들에 적용되지만, 여기에서도 응용될 소지가 있다. 설령 원문의 의미가 어떤 사람의 신학적인 선입관에 배치된다고 하더라도 ‘단순화 된 의역’ 이 히브리어 본문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 학자들이 번역한 일부 영어 역본들이 맛소라 사본을 따르면서, 이사야 9장 6절을 번역할 때 신성한 칭호인 ‘아버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주목받아야 한다.24

유대인들이 주님의 초림에 관한 예언들을 오해하고 구약에 있는 예언들이 그분 안에서 성취된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랍비의 의역을 끌어들인 것은 그만큼 더 충격적이다. 우리가 탈굼 이사야서의 의역들이 ‘반 기독교적 논증’에 영향 받았다는 점을 수용하건 안 하건, 탈굼 학자들이 구약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구약의 예언들의 해석과 관련, 우리가 그다지 기댈만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동일한 글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도, 무오한 성경의 분명한 진술에 토를 단답시고 랍비의 의역에 호소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가이슬러의 모순된 진술들

셋째,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이사야서가 신격 안의아버지를 가리킴을 부인한 것은 또한 야훼(여호와)라는 신성한 이름에 관하여 가이슬러 자신이 출판했던 저술들과도 모순된다. 구약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이신 야훼와 아들이신 예수님에 관한 성경의 기록들은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와 관련되시는지에 관해 무언가를 말해준다.25

가이슬러는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2 세기 이단인 마르키온(Marcion)은 영지주의와 관련된 가장 위험한 운동을 대표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는 구약의 하나님이신 야훼와 같은 분이 아니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그 역사적인 뿌리로부터 단절된 것이다.26

우리는 이러한 분석에 동의한다. 우리는 또한 가이슬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야훼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셨다. 일부 역본에서 여호와로 번역된 야훼(YHWH)는 출애굽기 3장 14 절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에게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특별한 이름이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나는…이다’입니다.”라고 선포하신다. 이러한 진술은 그분께서 단지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하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이다’(I am)라고 하신 분과 동일하신 분임을 말한다. 그분을 둘러싸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했고, 참람하다는 이유로 돌을 집어들어 그분을 죽이려고 했다(막14:62; 요 8:58; 10:31–33; 18:5–6 을 보라). 예수님은 또한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다’ 라고 말씀하셨다(계2:8).27

가이슬러가 구약에 있는 야훼를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또한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을 야훼와 동일시하면서도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동일성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못 이해하기가 어렵다. 만일 구약의 야훼가 아버지이시고, 신약의 야훼가 예수님이시라면,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불리시기 때문에 그분은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가 되셔야만 한다는 식으로 이사야 9장 6절의 증언을 확증하는 것이 어떻게 이단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말씀의 분명한 의미를 뒤짚어 업는다

넷째,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해석은 종교개혁 당시부터 유래하는 성경 해석의 주요 원칙들 중 하나를 위반한다. 이 원칙은 센서스 리터레일리스(sensus literalis)라는 것으로서 루터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분명한 문맥 상의 정황 때문에 판단이나 수사적인 표현이 요구되거나, 혹은 이런 판단이나 수사적인 표현이 첨가되지 않으면 어떤 믿음의 항목을 명백하게 저해하는 우스꽝스런 결과가 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그것들이 요구되지 않는한, 그것들은 성경 어떤 곳에서도 인정 되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어디서든지 말씀에 대한 단순하고 순수하며 자연스러운 의미를 고수해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셨던 문법과 어법(usus loquendi)과 일치한다.28

루터는 다음과 같이 추가적으로 말한다:

성령은 하늘과 땅 위에서 가장 평이하게 글을 쓰고 말씀을 하는 분이시다. 따라서 그분의 말씀은 한 가지 그리고 가장 분명한 의미 그 이상을 갖지 않는다. 이것을 우리는 문자적 또는 자연적인 의미라고 부른다.29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이사야 9장 6절은 그 말씀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고 말함으로써, 성경의 영감있는 말씀을 사람이 만든 신학에 종속시켰다.

결론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자신들의 해석을 알리기 위하여 비성경적인 출처에 의존함으로써 이사야 9장 6절의 분명한 말씀의 영향력을 희석시키고, 사실상 육체되심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관해 성경이 말한 것을 부인했다. 그들이 이처럼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느라 애를 썼지만 그 귀추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에 대해 그들이 이해한 바에 대해 말하자면, 그러한 이해는 두 신성한 아버지—신격 안의 영원하신 아버지와 영원의 아버지이신 예수님—를 상정하는 상태로 귀결되며, 이것은 지지할 수 없는 견해이다.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30년 전에 어떠한 이단인가—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 주는 영, 세 하나님들!에서 지적한 바 있는 바로 그 오류이다. 신성한 계시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서 볼 때, 이사야9장 6절에 대한 가이슬러와 로우즈의 설명은 사실상 아무런 결과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런 설명은 신격의 셋 가운데 있는 관계를 믿는 이들의 하나를 위한 본이라기 보다는 객관적인 사색의 문제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움직이시는 하나님에 관한 계시인 성경의 기본적인 성격에 부합하지 않는다.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선택한 길은 궁극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린다. 그 결과는 성경 안의 신성한 계시의 총체와는 불일치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적으로 그려보고 있는 삼일성의 모델을 온전하게 고수했다는 자기 만족일 뿐이지 않을까.

이와 달리 위트니스 리는 삼일성에 관한 성경의 순수한 말씀을 살펴보고 고려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하여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이루고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거처 안에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는 것임을 깨달았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가르침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그러한 목적을 깨달아 그분의 신성한 경륜을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동참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마음의 갈망에 따라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거처를 경험하고 거기에 참여코자 하는 영적인 배고픔을 하나님의 백성 안에 창출하는 것이다.

각주

1 이 글은, 대부분의 신학자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소홀히 여겨온 온 삼일성에 관한 진리의 한 방면을 고찰하는데, 그것은 이사야 9장 6절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동일시됨이다. 독자들은 이것이 신성한 삼일성 안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관한 위트니스 리 혹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을 대표한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동일시됨에 관한 성경의 분명한 말씀을 참으로 지지하되, 두 분 사이의 영원한 구별 또한 지지한다. 이에 관해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사이에는 구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별되시고, 아들은 그 영과 구별되시며, 그영은 아들 및 아버지와 구별되신다. 신격의 셋은 상호내재 하심 안에서 동시존재하심으로, 그분들은 구별되시나 분리되지는 않으신다. 삼일 하나님 안에 분리는 없고 오직 구별만 있다.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상호 내재하심 안에서 존재하신다. 한 면에서 그 셋은 서로 안에 거하고 계시며, 동시에 그분들은 공존하고 계신다. 따라서 그분들은 하나이시다. 그분들은 분리되지 않으신다(『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1993, 17쪽(영문판))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출판물들에는 삼일 하나님에 관한 진리에 대해 균형 잡히게 제시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그중 19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출판된 것들은 다음과 같은데, 수년 동안 해당 사이트에서 내용읽기가 가능해 왔다:

『확증과 비평』(I:1, January 1996)창간호는 “삼일 하나님을 앎”이라는 주제를 다뤘다. 이 전문 저널은 다음 자료들을 포함한 일곱 개의 논문들을 게재하고 있다:

2 위트니스 리, 어떠한 이단인가-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주는 영, 세 하나님들 (What a Heresy—Two Divine Fathers, Two Life-giving Spirits, and Three Gods!)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77).

3 Ibid., p. 17.

4 Ibid., p. 13. George Rawlinson, The Pulpit Commentary: Isaiah, Vol. I (London: Funk & Wagnalls, 1910), p. 167, comments: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보다는 영원하심 또는 영원의 아버지. 그러나 여기서 다시 이 사상에 담긴 독특성을 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 호칭 앞의 관사를 생략한다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어떻게 해서 절대적으로 영원한 분으로서 한 영원하신 아버지, 한 창조주, 한 보존자, 한 보호자보다 더 많은 분이 인류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

라린손(Rawlinson)의 주석에 동조하는 한 설교에서 알 터크(R. Tuck)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은 아들이시지만, 그분에 대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주장은 그 모든 주장들 중 가장 놀라운 것으로 보인다. “아들이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는 이런 관점을 유지하셨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모든 사람의 일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참되게 본 사람치고 그분 안에서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없고, 그분으로부터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없다(181쪽).

5 Clement of Alexandria, “The Instructor [Pædagogus],” The Ante-Nicene Fathers, vol. II, edited by Alexander Roberts and James Donaldson (Grand Rapids, MI: Eerdmans, 1979), p. 215.

6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A Commentary on the Old and New Testaments, vol. 2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2002), p. 594, emphasis in original.

7 Benjamin B. Warfield,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68), p. 38.

8 Witness Lee, 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Messages 276-294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2004), p. 2957.

9 Norman Geisler and R. E. MacKenzie, Roman Catholics and Evangelicals : Agreements and Difference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5), p. 39

10 Norman L. Geisler, A Popular Survey of the Old Testament (Peabody, MA: Prince Press, 1977, 2003), p. 24. Ron Rhodes, Christ before the Manger: The Life and Times of the Preincarnate Christ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2), p. 235.

11 See John F. Sawyer, The Fifth Gospel: Isaiah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12 Norman Geisler, Christian Apologe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6), p. 336.

13 As, for example in Norman Geisler and Ron Rhodes, When Cultists Ask: A Popular Handbook on Cultic Misinterpretation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7), pp. 78-79.

14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사실상 영원의 아버지의 의미에 관해 두 가지 ‘적용가능한 관점(들)’을 열어두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우즈는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오직 하나의 해석만 가능하다고 말해왔다. “분명히 고대 유대인들은 ‘영원의 아버지’라는 문구를 메시아의 영원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사야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가 이것이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론 로우즈,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성경적인 반박 (Ron Rhodes, Reasoning from the Scriptures with the Jehovah’s Witnesses (Eugene, OR: Harvest House Publishers 1993), p. 166). 보아하니 심지어 가이슬러와 로우즈조차도 정확한 해석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불일치 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

15 Bruce Metzger “Important Early Translations of the Bible,” Bibliotheca Sacra 150:597 (January-March 1993), p. 42.

16 Ernst Würthwein, 구약 본문:성경 히브리어 입문(The Text of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to Biblica Hebraica), 에롤 로우즈(Erroll F. Rhodes)가 번역함(Grand Rapids, MI: Eerdmans, 1979) p. 76. Pierre Grelot, Les Poèmes du Serviteur (Paris: Les Éditions du Cerf, 1981), p. 222,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더 이상 번역 상의 문제와 부딪칠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심지어 다소 넓은 의미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심지어 70인역 이상으로 탈굼은, 나름의 통일성을 지닌 텍스트를 다시 짜맞춘 것이다.

17 Würthwein, op. cit., p. 76. Harald Risenfeld, Jésus Transfiguré (Copenhagen: Ejnar Munksgaard, 1947), 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 본질적으로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치환이 있음이 분명하다. 탈굼 번역시기 또는 그 후 시기에, 사람들 눈에 마뜩잖게 보이는 다른 메시아적 개념, 즉 고난 당하시는 메시아 개념을 대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이런 변화가 이뤄졌으며 거기에는 논박의 의도가 감춰져 있었다는 추정을 피할 수 없다.

18 E.g., J. Jeremias, “παῖς θεοῦ,” 제프리 브로밀리(Geoffrey W. Bromiley)가 번역한 신약에 대한 신학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제 5권. V, Gerhard Friedrich, ed., (Grand Rapids, MI: Eerdmans, 1967), 695:

우리가 이미 이사야 53장의 고난 본문들을 희석시키려는 70인 역의 초기 경향을 지적해 왔음에도[1965], Tg(탈굼)의 장(章)의 의미가 거듭해서 뒤집어지면서 이처럼 극심하게 왜곡된 것에 대한 개연성 있는 설명은 단 한 가지가 있다. 여기에서 반기독교적인 논박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Roger Syrén, “탈굼 이사야 52:13-53:12 와 기독교 해석,” 유대학 저널, (Journal of Jewish Studies), 40:2, (Oxford: Oxford Centre for Postgraduate Hebrew Studies, Autumn 1989), pp. 205-206:

I만일 우리가 좌우 양극단에 ’번역’과 ‘개작 (recomposition)이 위치한 선을 그어놓고 그 위에 탈굼 이사야 53장을 놓는다면,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은 확실히 두 번째 극단(개작)쪽에 더 가깝게 그 위치를 지정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개작’이라는 말은 그레롯(Grelot)이 탈굼 이사야 53장(章)을 특징 짓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로서, 그는 또한 이 본문과 Tg안에 있는 다른 ‘종의 노래들(‘Servant Songs’)의 일부를 아람 미드라쉬 (Aramaic Midrash)로 분류한다. 그런 경우 이사야 본문은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 역할 밖에 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이 부분을 “une transposition intentionnelle et systématique'(H. Riesenfeld)로 분류했다. 혹은 “번역도 아니고 심지어 의역도 아니며, 원래 글의 사상이나 구성을 조금도 담지 못한 다시 쓰기(rewriting)일 뿐으로,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세우기 위해 원래 글을 건축 석재로만 사용하였다.”(S. Nyberg)라고 평가했는데 적합한 비유라 아니할 수 없다.

19 E.g., Jostein Ådna, ““승리하시고 중보 기도하시는 메시아이신 이사야 53장의 종: 메시야 개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 이사야 52:13-53:12의 이사야 탈굼 안으로의 수용”(The Suffering Servant: Isaiah 53 in Jewish and Christian Sources), Bernd Janowski and Peter Stuhlmacher, eds. (Grand Rapids: Eerdmans, 2004), p. 190:

히브리어 성경과 탈굼 이사야 편(선지서들에 대한 탈굼 조나단의 일부)에서 이사야 52:13-53:12를 대강만 살펴봐도 히브리어 성경과 아람 역본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이 드러난다.

20 Roger Syrén, “T이사야 탈굼과 기독교적 해석,” 스칸디나비아 구약 저널: 3:1, (Aarhus University Press, 1989), p. 57. 주석: 구절에 매기는 번호는 번역본마다 다르다. 여기에 인용된 번역본은 이 구절을 이사야 9장 5절로 밝히는데 이것은 예를 들어 유대 타나크(the Jewish TANAKH)와 같은 입장이다.

21 Ibid., p. 60. See note 19.

22 렉티오 디피킬리오르(lectio difficilior)에 관해서는: Bruce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Stuttgart: United Bible Societies, 1971), pp. xxvi-xxvii; Bruce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Its Transmission, Corruption, and Restora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p. 209; Ernst Würthwein, The Text of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to the Biblia Hebraica, translated by Erroll F. Rhodes (Grand Rapids, MI: Eerdmans, 1979), p. 116; Philip Comfort, Encountering the Manuscripts: An Introduction to New Testament Paleography & Textual Criticism (Nashville, TN: Broadman & Holman, 2005), pp. 293, 386; D. A. Carson, The King James Version Debate: A Plea for Realism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9), p. 30. 를 보시오.

23 Norman L. Geisler, Baker Encyclopedia of Christian Apologetic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9), p. 552, quoting Ernst Würthwein. The Text of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to the Biblia Hebraica, translated by Erroll F. Rhodes (Grand Rapids, MI: Eerdmans, 1979), pp. 80-81.

24 예를 들어서 the JPS TANAKH(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85)는 ‘영원한 아버지(Eternal Father)’를 말한다. 맛소라 본문에 따른 성경(The Holy Scriptures According to the Masoretic Text)(Jewish Publication Society, 1917)은 이사야 9 장 6절을 옮길 때 기술적(記述的)칭호들(‘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모두를 결합한 하나의 복합적인 칭호의 음역인 ‘펠레-조에즈-엘-기벌-아비-에드-사알-살롬”(Pele-joez-el-gibbor-Abi-ad-sar-shalom). 을 사용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비'(Abi)즉 아버지(Father)가 대문자로 되어 있는 것은 번역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칭호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데이빗 스턴 David H. Stern 이 번역한 메시아닉 유대인의 번역본, 완벽 유대인 성경(The Complete Jewish Bible (Nashville, TN: Jewish New Testament Publications)또한 이 구절에 있는 ‘아버지'(Father)를 신성한 칭호로 보아 대문자로 표시하고 있다.

25 Norman L. Geisler, Baker Encyclopedia, op. cit., p. 732.

26 Norman L. Geisler and R. E. MacKenzie, Roman Catholics and Evangelicals, op. cit., p. 82.

27 Norman L. Geisler, Baker Encyclopedia, op. cit., p. 731.

28 Martin Luther, What Luther Says: An Anthology, Vol. 1, Ewald M. Plass, ed. (St. Louis, MO, Concordia, 1959), p. 93.

29 Ibid., pp. 91-92.

이사야 9장6절( 기묘자요 모사라 )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성탄절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열심을 만나는 날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이사야 선지자가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을 기묘자라 모사라고 불렀습니다. 영문으로 “Wonderful Counselor”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상담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의 위정자들처럼 자기 이익과 자기 뜻대로 백성을 억압하고 치리하는 통치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에 그분은 우리에게 최고의 상담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참 생명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사연들을 들어 주십니다. 꾸짖고 나무라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언제나 바른 해답을 제시해 주시는 상담자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창세기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실수를 반복하는 아브라함에게 꾸짖거나 야단치시기 보다는 아주 긴 세월 동안 그를 기다리시며 그의 수준에서 그를 빚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도 놀라운 상담자가 아니셨습니까?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을 사랑을 헤아려 보는 연말이 되시길 빕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사야 9장 6-7절)

전능하신 하나님이사야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 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큰 빛의 오심에 대한 기대로 말미암아 기쁨이 있으며한 아이가 처녀에게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도 그러합니다

이미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기묘자모사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선언됩니다

기묘자로서 그분은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분입니다. ‘모사로서 그분은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원수들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며아무도 그분을 대적하여 일어나지 못 할 것입니다

승리하심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시편24절과 같이영광의 왕이 뉘시뇨?’라고 외침이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잔존자들은여호와께서 강하시고 능하시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문들이 그 머리를 들 것입니다

그분은 의뢰하는 자들은그분이 장차 모든 적들을 제압할 것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날개 아래 안전하게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동정심이 없는 그러한 것일까요

능력이 많은 자들은 간혹 다른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크고 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말했을 때10:17-18),

그는 덧붙이기를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크고 능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을 행하실 뿐만 아니라천만인에서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하였습니다32:18).

맞습니다전능하신 하나님은 또한 돌보시며 동정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남용되지 않으며그분의 동정심을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바람과 파도도 숨을 죽이고그분은 마귀들을 신속히 복종케 하며천사의 많은 영들을 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소경의 외침에 멈추어 서시고손을 뻗어 문둥병자를 만지시고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 같은 수많은 사람들을 동정심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여러 염려를 마주 할 때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맙시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32:17).

적들이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산이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장애물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오늘날 그분을 거절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합니다

우리는 장래에 그분의 승리의 날의 충만함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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