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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후서 5 장 | 고린도후서 5장 4837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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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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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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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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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7/3/2022

View: 5203

고린도후서 5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고린도후서 5 · 12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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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7/7/2021

View: 4076

고린도후서 5 KLB –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 육체의 집이 무너지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의 영원한 집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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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9/4/2022

View: 2731

2016/01/13(수) \”고린도후서 5:1-10\”/ 작성: 송호욱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16절에서 비록 ‘겉 사람은 낡아지나’ 그의 속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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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0/11/2022

View: 7275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묵상 – 네이버 블로그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묵상 ·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 2 참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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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23/2021

View: 890

[스크랩] 고린도후서 (5 : 1~21) 주석

고린도후서 5장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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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ntiochministry.tistory.com

Date Published: 2/15/2022

View: 1715

매일성경 : 고린도후서 5:1-10,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

매일성경 : 고린도후서 5장 1절 – 10절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인생. □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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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10/21/2021

View: 5463

고린도후서 5장 1절 – 4절 – 다음블로그

고린도후서 5장 1절 – 4절 · 1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 2 정녕 우리가 여기에서 신음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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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5/27/2022

View: 6306

201909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장 …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 역시 이와 같이 남이 보든 안 보든 성실하게 사역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고후 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cpcgl.org

Date Published: 9/12/2021

View: 7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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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고린도후서 5장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린도 후서 5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 Views: 조회수 11,897회
  • Likes: 좋아요 113개
  • Date Published: 2021. 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vvPTt2DZlDE

고린도후서 5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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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2016/01/13(수) \”고린도후서 5:1-10\”/ 작성: 송호욱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16절에서 비록 ‘겉 사람은 낡아지나’ 그의 속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외부적으로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려움들은 그가 장차 경험하게 될 영원한 영광의 무게와 비교해 본다면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것 이었기 때문에 지금 환난을 당하고 있더라도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2013년 11월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하이옌으로 인해 타클로반 인근의 지역이 많은 피해를 입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약 3개월 후인 2014년 2월에 태풍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지역을 방문하여 한 선교사님으로부터 태풍 피해지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태풍 하이옌이 강타한 지역에 위치한 한 교회는 지붕이 날아가고 교회와 교회가 운영하던 유치원의 벽이 심하게 파손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파손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어도 태풍 앞에서는 별 수 없다며 오히려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손된 교회의 안타까운 사정이 한국과 미국 등의, 몇몇 나라에 알려지면서 이 교회를 향한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고 마침내 교회는 이전보다 더 튼튼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 단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님은 쓰러져 가는 것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는 말을 하며 이후 마을 주민들 가운데 교회에 출석하게 된 사람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살던 집이 파괴되고, 일하던 터전이 사라지는 것은 비단 태풍과 같은 재해로 만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아니면 일상에서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5:1)

현실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바울은 고린도후서5장을 시작하면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는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이는 코 끝에서 호흡이 멈추어 육체가 썩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은 그가 당하고 있는 커다란 고난으로 인해 어쩌면 자신의 목숨이 끊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 무너질 수 있는 유한한 인생을 비유한 ‘장막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과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던 바울은 아무리 견고하게 만든 장막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 장막은 언젠가는 무너지는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유한한 몸을 장막 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한 몸으로 영원한 나라에서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렵고 힘든 상황 앞에서 그것을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있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땅에서 죽음으로 인해 사라진다 하더라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었던 자들이 부활하여 육신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이 믿음이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이 끊어질 수 도 있는 상황 가운데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5:5)

5절의 말씀에서 환난 가운데 탄식하며 있을 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에 대한 희망을 통해 우리가 위로를 받게 되는데 그러한 일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지고, 생명에 위협을 받을 만큼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될 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그냥 두시지 않기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허락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죄와 흠이 많아 결국 죽음으로 이 세상을 마무리할 수 밖에 없던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존귀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인해 그 희생과 섬김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셔서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원히 거할 집과 그 나라를 바라보게 하심으로 앞에 놓인 많은 역경을 이겨나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7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은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어떠한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두 가지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차이의 모습은 7절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 이로라(5:7)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의 많은 문제 앞에서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이기심과 물질에 목을 매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께서 우리가 바라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손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며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어려움을 당당히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다른 모습은 8절과 9절의 말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리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5:8~9)

환경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때로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주님과 영원한 나라에서 안식 하며 평안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 시간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살도록 허락하신 시간에는 최선을 다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로 힘써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모든 환경을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며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거나 자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5:10)

우리는 마지막의 때에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보였던 행동과 했던 말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죽음으로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의 시작이 되지만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있음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삶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말씀을 통해 죽음의 위협과 고난 앞에서 담대함으로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나아갔던 바울의 모습을 통해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 장막 집은 무너지더라도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다시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우리의 힘이나 의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며 모든 역경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을 의지함으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녀된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 대한 약속을 받은 자들이기에 보이는 것 너머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우리에게 허락된 이 세상에서의 시간 동안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한분께만 기쁨을 드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해 봅니다.

기도

고마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시고 이 시간을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 드립니다. 우리에게 놓여진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어려움과 역경이 닥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임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역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길과 상황을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하오며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세상의 장막 집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무엇입니까?(1절)

2. 생명에 삼킨바 됨을 이루게 하시려고 보증으로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5절)

3. 어려움을 겪게 될 때 현실의 눈 앞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된 경우가 있다면 이야기 해 봅시다.(7절)

4. 바울이 사나 죽으나 그가 힘쓴 것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8절)

5.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허락된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10절)

(작성: 송호욱)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묵상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묵상

고린도후서 5장 1절-10절 말씀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표준새번역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1절>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2절>우리가 이 장막집을 벗을지라도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3절>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킴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4절>이런 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5절>

어제 묵상 본문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절>고 말씀하신 사도바울은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장막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천으로 만든 천막 같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지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부활의 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2절의 공동번역은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신음하고 있읍니다.”라고 말씀하는데 우리는 이 연약한 육신이 아니라 부활의 몸으로 하늘에서 살게 될 것을 소망하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이 부할의 몸을 입지 않는 사람들은 옷이 없어 벌거숭이가 되고 결국은 흙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로 사는 동안 육체로 인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덧 입기를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다.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서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읍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이시고 하나님의 은헤입니다. 그리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덧입는 소망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한 부활의 몸을 사모하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살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너질 것들에 대해서 미련을 버릴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이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에 머물러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6절>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7절>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8절>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서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9절>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10절>

오늘 6절과 7절에 개역개정은 담대하다고 말씀하지만 표준새번역은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표현이 더 마음에 옵니다. 그처럼 우리가 든든한 것은 육신의 몸을 가지고 살때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즉 눈으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살지만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고 사는 것입니다. 오히려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하늘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고 하늘나라에서 부활의 몸으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바라는 일이기는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러나 우리가 몸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 있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길르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고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았던 동안의 모든 행실을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몸이 있는 동안을 이용해서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1절>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부할의 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담대하게 이 땅에서 삽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듯이 살아 가기에 오로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기뻐하실 주님을 생각하고 그 일들을 위해서만 살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곤고했던 사도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0-24절>고 말씀하시며 죽어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은 일이나 교회를 위해서는 육신으로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담대한 믿음으로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승리하시기를 기도하며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스크랩] 고린도후서 (5 : 1~21) 주석

고린도후서 5장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ㅇ우리의 장막 집 – ‘장막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누스’는

천막을 가리키는 말로서 본문에서는 천막(天幕)이 일시적인 것이듯이 인간의 육신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육체의 한계성을 천막에 비유

한 것은 아마 그가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경험에서 얻은 지혜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행 18:3).

ㅇ무너지면 – 이 표현은 (1) 육신의 죽음, 또는 (2)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나타낸다

고볼 수 있는데, 전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혹자는 바울이 이렇게 죽음

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말을 한 것은 글을 쓰는 당시 심경(心境)의 변화를 반영하

는 것이라고 본다. 즉 바울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경험할 성도들 가운데 자신도 포함

되리라고 기대했었는데, 최근에 겪은 아시아에서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경험을 통해서

(1:8-11), 재림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견해이다(Harris). 그러나 이

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하지만 그보다는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음으로써 재림을 경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성도들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려는 의도가 더 강

하다고 볼수 있다.

ㅇ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하

여 본 구절의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쉽게 썩고 낡아지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 역시 마찬가지 운명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질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실망하거

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 해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5:38-54).

ㅇ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 성도들

을 위해 예비된 하늘의 처소(處所) 즉 하늘나라(요 14:2)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Hodge, Harris, Tasker), 또한 집단적인 몸 즉 고전 3:16;6:16에 언급된 ‘성전’

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E.E. Ellis). 이 두 견해에 대해 혹자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가리키므로 본 구절의 ‘집’도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

고 주장한다(Martin). 그러나 본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일시적인 집과 영원한 집의 비

교이지 몸과 몸의 비교가 아니다(Hodge). 성도들은 현재 유한한 장막에 거하나 나중에

는 영원한 장막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 본절의 강조점이다.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ㅇ탁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 본문에서의 탄식은 인간의 실존

적 유한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고난 때문에 튀어나오는 신음 소리

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의 고뇌를 표출하는 것이다. 즉 이 탄식은 인간 존재의 한계

성과 무기력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과 자유를 갈구(渴求)하는 것이며, 썩어질 육체를

벗어버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덧입게 될 것을 소망하는

염원의 소리이다(롬 8:18-25).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대한

표현인가하는 점이다. 가령 1절에 의하면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 즉 육신이 죽는

것으로 하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울은 육체의 질곡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을 빨리 맞고 싶어하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4절의 “벗

고자 함이 아니요”라는 표현에서 얻을수 있다. 그렇다면 그 탄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

대를 끝장내고 새로운 세대를 여는 때, 즉 주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을 때까지 땅 속에서 기다리지 않고 살아서 그 몸

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이다(Barrett). 따라서 본 구절은 바울이 살아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ㅇ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 본문의 ‘벗은 자’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 본

절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육체에서 분리된

영으로 형체와 활동의 능력이 없는 지옥의 영이라고 본다(Plummer). (2) 중간 상태 즉

죽은 후 부활하기까지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데 이 상태에 대해서 다시 두 가지 해

석으로 구분된다. 첫째, 죽은 신자들은 육체가 없이 의식만 남아있는 상태가 되어 육

체의 부활을 기다린다. 둘째, 죽은 신자들은 의식과 함께 ‘중간적인 육체’를 갖는다.

그런데 이것은 부활의 육체와는 다르다. (3) 죽어야 할 운명을 가리킨다(Lowery). (4)

주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되는 심판 때에 죄악이 폭로됨으로써 당하는 수치감이라고 본

다(Ellis). (5) 죽은 후 재림을 기다리는 몸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데

(Barrett, Tasker) 여기에는 (2)의 ‘중간 상태’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 데에는, 바울이 죽어서 몸이 없는 상태로 부활을 기다리기 보다는 살아서 주의

재림(再臨)을 맞기를 원했다는 전이해가 고려되어 있다(고전 15장). 여기서는 마지막

해석이 비교적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장막에…탄식하는 것은 – 본절의 내용은 2절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육체의 질곡

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ㅇ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 육체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장막을

벗어버리면 가능해진다. 그러나 바울은 이 장막을 벗어버리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늘

의 집을 덧입는 방식으로 벗어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것은 앞절(3절)에서도 다루었

던 바 죽지않은 상태에서 바로 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지기를 바울이 소망했음을 말해주

는 것이다(고전 15:44, 51). 그렇다고 이것이 죽은 성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으로 오

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죽은 자도 산 자와 동일하게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바울 자신이 말했기 때문이다(살전 4:15). 다만 바울은 살아서 영화로운 몸을 입기를

더 원했던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육체를 가지고 부활에 참여하고자하는 소망을 피력

하는 것은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고 어떠한 육체적 부활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반

박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ㅇ이것을..이루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육체나 죽은 자의 영혼이 부활의

몸으로 바뀌어지도록 준비해 주셨다. 이것을 보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

셨다. 여기서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라보나’는 최종적

인 지불을 보증하는 담보, 또는 환납(還納)하지는 않았지만 상품에 대한 권리를 인정

받는 첫 할부금이나 보증금을 뜻한다. 성도들의 심령에 내재해 있는 성령은 비록 성령

주신 하나님의 행위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한 거래로써 설명될 수는 없지만 영적인 몸

으로 썩을 육체를 대체시켜 주신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성령은 성도들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고후 3:18;4:16 엡 3:16), 말할 수 없는 탄식

의 기도로 성도를 도움으로써(롬 8:26, 27) 참다운 보증이 된다.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ㅇ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 바울은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여

전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본 구절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즉 비록 그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지만 그리스도와 실제로 함께 살고 있지

는 않다. 바울의 현재적인 거처와 예수님의 거처는 분명하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다. 따라서 본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단절(斷絶)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

니라 자신의 현재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ㅇ믿음으로 행하고…아니함이로라 – 본절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친밀성이 재림 이

후의 완전함에 못미친다는 현실적인 경험이기에 세상에서 육을 입고 사는 삶이란 그리

스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세계의 삶인 것이다(고

전 13:12).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ㅇ차리리 몸을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 여기서 우리는 처음에는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부활을 경험하고자 희망했던 바울이 점차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깨달아가는 변화를 볼 수 있다.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ㅇ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영광스러움이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확신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초연(超然)하

게 하며 오직 모든 관심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데 집중하게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매

우 중요한 핵심을 진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성을 재확

인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거나 그들을 위한

봉사자가 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일이다(4:5, 15).

또한 바울은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육의 몸을 입고 있을 때 당하는 모든 환난을 견디

어 낼 수 있었고(4:8, 9), 장막을 벗어 버리고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희망을 버릴 수

있었다(빌 1:21-24).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ㅇ그리스도의 심판대 –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 이

심판은 본래 하나님의 심판으로 표현되지만(마 25:31, 32; 롬 14:10) 본 구절에서 ‘그

리스도의 심판’으로 표현된 것은 심판에 있어서 일차적 기준이 그리스도이며, 또한 이

심판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문의 이 심판이 비기독교인

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모두 포함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세번째 것이 가장 보편

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하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최후의 심판대는 일

차적으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을 구분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마 13:36-43;25:31

-46;살후 1:6-10). 그러나 그 심판은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그들이 받을 상의 크

고 작음을 가리는 자리가 될 것이다(롬 14:12; 살전 1:3).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기쁨인 동시에 도전이기도 하다. 바울이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이 심판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ㅇ선악간에 그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 이 표현에 대해 혹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기본 교리와 모순된다고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

다. 왜냐하면 바울이 율법의 행함을 부인했을 때, 그것이 뜻하는 바는 율법의 요구 자

체를 폐기(廢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의로 내세

우려는 태도를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율법이 명하는 바 선에의 투신은 오

직 그리스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기초 위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

다(고전 3:10-15).

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ㅇ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 여기서 ‘주의 두려우심’은 절대자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

지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이나 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키는 공포

(창 35:5)가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 즉 미래의 심판자로서의 주님

(10절)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 곧 경외심을 가리킨다. 한편 ‘알므로’에 해당하는 혤라

어 ‘에이도테스’는 단순히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영적 비밀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체험

적으로 인식된 것임을 말해준다. 아마 여기에는 다메섹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ㅇ권하노니…바라노라 – 혹자는 본 구절과 관련하여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혹은 진실되지 못한 동기로 그들을 자기 편에

끌어들인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Barrett). 이런 추측은 어느정도 일리

가 있다고 여겨진다. 즉 본 구절에서 강조되는 바울의 진술은 위의 비난에 대한 답변

으로서 바울 자신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그분

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에 결코 진실하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자신을 전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고전 2:4) 그리스도의 복음만

을 전했음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확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4:1-5).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ㅇ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 바울이 자신의 진실된과 순수함을 하나님 앞과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할 때, 그를 대적하는 자들은 또다시 그것을 가리켜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

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사전에 그런 문제의 소지(素地)를 없애

고자 이 말을 하게 되었다. 이미 앞에서 천명한 바 있지만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

인들에게 천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못밖고 있다(3:1).

ㅇ우리를 인하여…대하게 하려하는 것 – 이는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

도 교회에 들어와 외부적인 자랑거리를 내세우며 자기들을 과시하였으나, 고린도 교회

의 성도들은 바울에 대한 그들의 비난을 반박할 어떤 내용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거짓 사도들을 반박

할 수 있는 논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과

거짓 선지자들을 비교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직접적으

로 접했다는 것(16절),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추천을 받았다는 것(3:1), 환상을

보았다는 것(12:1-7) 등을 자랑하지만 그 자랑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에 불과했

다. 이들은 무익한 자랑(12:1)을 하면서 대접을 받으려 하지만, 바울은 어떠한 외적인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으

며(3:1-6), 대접을 받거나 군림(君臨)하기 위하여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지도 않고 오

히려 스스로 종임을 선언했다(1:24;3:5;4:2, 5).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의 진

정한 사도인 바울을 자랑거리로 삼아도 되며 그것으로 대적자들을 반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ㅇ미쳤어도…정신이 온전하여도 – 본 구절은 바울 자신이 결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쳤어도’와 ‘정신이 온전하여도’란 표현이 구

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란 사실에 있다. 먼저 ‘미쳤어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

세스테멘’은 ‘황홀경'(ecstasy)의 뜻을 가지고 있는 ‘엑스타시

스’에서 파생된 말로 종교적 무아경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일

반적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막 3:21). 이에 반해 ‘정신이 온전하여

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누멘’은 ‘분별력 있는’, ‘자

제하는’의 뜻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언어적 분석을 배경으로 학자들은 위의 두 문구

가 지니는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 먼저, 전자는 개인적인

황홀경의 체험 중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고전 14:18), 또는 환상을 보는 것(12:1-7)등

을 가리키며, 후자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성으로 깨달은 바를 말하는 상태를 가리킨

다고 본다(Barrett, Kasemann, Denny, Harris). 이 해석을 취할 경우 전자는 하나님과

의 관계에서, 후자는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유익한 것으로, 이 둘은 결국 하나님과 고

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달리 혹자는 ‘미쳤어도’란 표현이 바

울의 영적인 긴장(stress of great spiritual emotion) 상태를 가리키는 바 항상 지니

고 활동했던 긴장이라고 본다(Tasker). 그러나 본 구절에서 이 표현은 그 상태가 일상

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한 특수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래서

알로(Allo)는 ‘엑세스테멘’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밝히지 않으나 적

어도 그것이 과거의 한 특정한 사건을 가리킴에는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바크

만(Bachmann)은 이것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이거나 12:7에 나타난 ‘계시’를 말하

기도 하고 혹은 바울이 고린도에 가슴 아픈 방문을 했을 때 일어났던 ‘분노’를 가리킨

다고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로 변화된 것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ㅇ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여기서는 바울이 자기 중심성을 버리

고 오직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살수 밖에 없는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여

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온인류의 죄를 구속하시

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헌신적인 사랑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해 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롬

8:39). 한편 ‘강권하시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케이’는

‘둘러싸고 밀어낸다’, ‘붙든다’는 뜻으로 이는 바울의 현신적인 행위가 그리스도의 사

랑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ㅇ한 사람이…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이 표현은 롬 5:15, 16과 매우

유사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 원리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자신이

그 원리에 따라 살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ㅇ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본 구절에서는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이 사상이 그의 사역의 원동력이며 또한 최종적인 목적이기

도 하다. 여기서 ‘산 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

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역시 동참한 자이다. 그

의 부활에 동참한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자이기에 ‘산 자’이다(요 5:24). 따

라서 이 체험이 있는 성도는 마땅히 아담 이후 창조자를 거역하고 자기가 스스로의 주

인 행세하던 삶에 대해선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

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로써 바울은 자기 중심적 삶을 사는 거짓 사도들

과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며 동시에 자신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ㅇ이제부터는…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 본 구절에서 바울이 ‘이제부터’라는 말

을 했을 때 그것의 의미는 바울이 편지를 쓸 때부터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깨닫고 난 후부터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성도는 육체적인 판단 기준을 버리게 된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사

람과 그리스도를 육체적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

참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났고(5:17;롬 6:3,4;갈 2:20),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인식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만 그것이 육적인 인식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육체적인 것은 왜곡

된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자기 중심적인 아집(我執)과 이기적인 태도가 그

것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자신이 유대인임을 자랑했던

것, 예수를 가리켜 사람들을 현혹케 하는 거짓 메시야라고 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을

탄압했던 것 등은(행 26:4-11) 바로 이 육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도께서 바울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그 때부

터 더이상 과거와 같이 육체적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ㅇ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

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

했다(요 15:1-7).

ㅇ새로운 피조물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

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20) 그는 새로운 피

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창조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

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

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

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

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

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

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고전 5:12, 13;갈 3:28;엡

2:11-22;골 3:11).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ㅇ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 믿는자들의 실존에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분도 하

나님이요, 그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

다(16, 17절). 구원 섭리에 있어 철저한 하나님의 주도성(主導性)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 신앙의 출발점이다.

ㅇ화목하게 – 본 구절에서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 가운데 하나인 ‘화해’에 대한 내용

이 진술되고 있다. 여기서 ‘화목하다’란 표현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

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범죄함으로 양자 사이가 분리되었고(사 59:2), 원수와 같은 적

대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롬 5:10).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

어지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던 담이 무너지고, 적대 감정이

해소 되었다(롬 5:10;골 1:15-22). 이 엄청난 화해의 작업은 일방적 관계의 파기자(破

棄者)인 인간이 할 수 없었기에 오직 하나님에 의한 주도권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총이기도 하다.

ㅇ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 뿐 아니라 전체 기독교인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누구라도 하나님

과 화해 했다면 그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은 자로서 수평적으로는 이웃과 화목

해야 하고 수직적으로는 아직 화해의 은총을 모르는 자에게 그리스도 사건을 전해야

한다(20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ㅇ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

리였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특별한 한 인간의 죽음을 넘어 하나님께

서 일으키신 예정된 사건임을 강조했다.

ㅇ저희의 죄를 아니하시고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적대적 관

계 또는 화목한 관계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내용이 ‘죄’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하

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이것을 달리 표

현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문제에 직접 간여(干與)하셔서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ㅇ화목하게 하는 말씀 – 18절에서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성도에게 부여하셨듯이

본구절에서는 그 직책 수행의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다.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ㅇ본절에서는 바울의 사역과 복음의 내용이 함축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ㅇ사신이 되어 – 바울의 사도직은 오직 그리스도의 화평의 메시지(엡 2:16, 17)를 전

파하는 데에 의미가 있을뿐 바울 자신은 말씀과 비견(比肩)되는 중요성을 갖지 못한

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할 뿐이다.

ㅇ하나님과 화목하라 –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라

는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당파와 시기, 질투로 인해 분열되어 있으며

또한 거짓 사도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된 고린도 교인들이 화목한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의 화목에 의해서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질병을 치유시키고자 했다. 한편 바울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ㅇ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의 공로가 죄인들에게 덕을 끼칠 수 있다고 보는 사상이 유대교에 있다. 그러나 바

울은 그러한 사상 이상을 진술하고 있다. 즉 예수는 상대적으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이다(롬 8:33, 34).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무죄함이

대속의 원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증언된다(히 4:15;7:26;벧전 2:22;요일 3:5).

ㅇ죄를 삼으신 것 –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의 뜻을 함축한다. (1) 그리스도의 성육

(成肉) 즉 죄있는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롬 8:3). (2) 그리스도께서

실질적인 죄인으로 취급되어 죄의 삯인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마 27:46).

ㅇ하나님의 의 – 본문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이 의는 하나

님의 능력의 현시를 나타낸다고 본다. 이 경우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정의 아래 있는 자들이다(Kasemann). (2) 이 의를 피조물

에 대한 창조주의 성실성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성실성이 실현된 것을 말한다고 본다(Stuhlmacher). (3) ‘칭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가 짊어진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게됨을 가리킨다고 보

는 것이다(갈 3:13, 14:빌 3:9; Hodge, Barrett, Harris, Lowery). 앞의 두 해석도 의

미론적으로 참고할수 있으나 세번째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금

까지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원리에 대해 진술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

서 대속의 원리와 관련되어 언급된 ‘의’는 칭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 춘천 대우인력

메모 :

매일성경 : 고린도후서 5:1-10,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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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육신의 장막으로 인해 탄식할 수 밖에 얺는 현실과, 동시에 성령을 부활의 보증으로 받았기에 고난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는 성도의 이중적인 실존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인생

■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고린도후서 5:1-10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 땅의 아름다움을 천국의 영광과 비교할 수 있을까?

■ 묵상과 설교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 생명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 살아가든 부와 명예를 위해 살아가든, 인생의 목표를 가진 사람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살아갑니다.

성도에게도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기 때문에,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겉사람은 낡아지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게 됩니다.

1. 낡아지는 것과 새로워지는 것

바울이 겉사람과 속사람을 대비시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대비관계가 아닙니다. 겉사람은 이 세상의 외적 환경에 노출된 우리의 삶의 모습을 가리키는 반면 속사람은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에 의존하는 삶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겉사람으로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아져 갑니다. 그러나 속사람으로서의 우리는 외부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 매일 우리는 새로워집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린도후서 5:1, 개역개정 성경)

낡아지는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맙시다. 우리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더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낡아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우리의 속사람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 천국에 대한 갈망이 우리에게 있길 소망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룩한 갈망은 곧 살아있는 성도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2. 타향살이와 고향살이

바울은 “몸으로 있을 때, 곧 이 세상 속에서의 삶의 상태를 가리켜 “주와 따로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고린도후서 5:6, 개역개정 성경)

비록 지금은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희미하게 볼 수 밖에 없으며 연약한 육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이 몸을 떠나게 되면 주와 함께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따로 있다는 것은 타향살이의 상태를 나타내는 반면 ‘함께 있다는 것‘은 고향집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갈망은 이 땅에서의 타향살이 대신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고향살이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생사를 함부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어진 삶의 상황 속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뿐입니다.

장차 영광의 주님을 뵈옵고 우리가 영광으로 온전히 변모될 것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이곳에서의 삶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큰 기대와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아 열심히 일한 종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큰 칭찬을 기대하며 열심히 일했고 두 배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성실했던 종들을 칭찬하였습니다.

우리도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나중에 주의 앞에서 칭찬받기 위하여 오늘을 부지런히 살아갑시다. 성실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큰 칭찬을 주실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 하루도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주어진 우리의 삶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합심 기도 제목

어르신들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영원한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추석 명절을 온 가족이 화목하게 보내게 하시고, 주신 축복에 감사하는 우리 가정들이 되게 하소서.

우리 교회를 통하여 지역 사회에 복음이 전파되며, 이 어려운 시기를 주님 주신 지혜로 극복하는 교회 되게 하소서.

■ 더 읽으면 유용한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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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GOSPEL

1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이라

이 단락에 나오는 “장막”은 몸이다.(벧후1:13)

그것은 진흙 헛간 같은 “땅에 있는 …집”으로 언젠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이어날 때 사도 바울은 “우리가…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진흙으로 지어진 집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히 지속될 새로운 집으로 들어간다.

벧후1:13 그렇도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각성시켜 기억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나니

그 변화는 죽은 즉시 일어나며(빌1:21-23) 그 집은 바울에 따르면 이전 것보다 더 바랄만하다.(8절)

따라서 이 집은 고전15장의 부활한 몸이 아니다.

대신 부활을 기다리며 입게 될 일종의 혼적인(soulish) 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 어떤 덮어씌우는 것을 가지고 계신다.

빌1:21-2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내가 육신으로 산다면 이것은 내 수고의 열매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으니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그것이 훨씬 좋으나

2 정녕 우리가 여기에서 신음하며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입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나

이 구절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그것이 훨씬 좋다.”고(빌1:23) 말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에 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은 뭣이든 다 옳고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결코 스스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없다.

마침내 당신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가 더 이상 당신과 주님의 관계를 해치거나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곳에 있다.

바울이 “정녕 우리가 여기에서 신음하며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입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나”라고

말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3 만일 우리가 옷 입고 있다면 벗은 채로 발견되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인이 벗은 채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케아 그리스도인들에게 “흰 옷”을 사서 그들의 벌거벗은 것을 덮으라고 말씀한다.(계3:18)

계16:15에서 또한 주님은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서 벗은 채로 다니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계19:8 이에는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고 씌어 있다.

계3:18 내가 너에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음으로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며, 또 안약을 네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공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관한 온갖 종류의 해석을 들었고, 그것에 관한 모든 종류의 주석들을 읽었다.

따라서 개략적으로 봤을 때 그 때에 당신은 하늘나라에서 영적인 몸을 얻고

그 영적인 몸은 당신이 구원받은 후에 행한 선행들로 짜여진 세마포로 옷입혀진다.

이곳 아래서 주님을 위해 일하는 동안

당신은 당신이 직접 입을 영적인 몸을 위한 한 벌의 옷을 한땀한땀 바느질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옷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의를 부여받는다는 것과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사64:6)

그러나 구원받은 후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일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어 우리로 그것들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것”(엡2:10) 이다.

우리는 “선한 일들에 유념하여 전력”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딛3:8)

어떤 구절은 “그가 멀리 흩뜨리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남음이라.”고 말씀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아는가?

그것은 신약의 은헤 아래 있는 바울 서신 고후9:9에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교리적인 신분을 지님은 물론

당신이 이 몸 안에서 실행하는 실절적인 의를 가지고 있는데 하늘나라에 가면

그것이 당신의 영적인 몸을 입히는 옷이 될 것이다.

당신의 옷이 얼마나 좋은가는 당신이 이곳 아래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서 행하는 일에 달려 있다.

4 이 장막 집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지고 신음하는 것은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 옷입혀 지고자 함이니,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서 삼켜지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만일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나는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에는 단순히 죽는 것 외에 그 무언가가 더 있다.

나는 닳아지지 않을 새 옷 한 번을 얻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중이다.

바울 자신이 그 새 몸을 얻으려고 신음한다고 했고, 그는 그 일로 짐을 졌다.

더 이상의 요통도 두통도 신장결석도 담낭결석도 없다고 상상해 보라.

더 이상 알약도 요법도 치료도 없고 늙거나 병드는 것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신음하고 있는 이유이다.

당신은 이 엉망이 된 것에서 빠져 나가고 싶다!

이따금 당신은 바울처럼 그저 이렇게 외치고 싶어질 때도 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롬7:24-25)

스턴이라는 박사는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늘 나라에 대해 향수병에 걸려 있소. 이제 그만 기도를 멈추고 나를 가게 해주오.’

그 마음 가짐을 불쌍한 버트란트 러셀과 비교해 보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삶은 누구도 도달할 수 없고 또 도달한다 해도 아무도 머무를 수 없는 목표를 향해

피로와 아픔으로 고통받으며 밤을 통과해 가는 기나긴 행군이다.’(인간의 자유 세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정신 장애를 겪는 얼간이들 중 하나였다.

수면제를 너무 많이 먹은 탓일까. 그는 지지리도 바보 같은 자보다도 더 바보였다.

만일 사고방식이 건전한 성경대로 믿는 사람과 한 영국 출신 사팔뜨기 무신론자 얼간이의 차이점을 알고 싶다면

사도 바울이 고후2:14과 롬8:31-39에서 묘사한 것과 버트란트가 인생을 묘사한 것을 비교해 보라.

달라도 어쩜 그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201909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장 11-21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http://thececc.com/wp-content/uploads/2019/09/20190913.mp3 어느 날 고대 그리스의 유명 조각가 ‘페이디아스’는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재건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가 작업하는 이 신전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조각의 전면 밖에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페이디아스는 무더운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이 거대한 조각의 뒷면을 공들여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볼 수 없는 구석 구석까지 찾아가 몇 시간 동안 힘들게 일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그의 조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이 신전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신전의 앞면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스승님께서 작업하시는 곳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곳 입니다. 왜 아무도 볼 수 없는 곳까지 굳이 열의를 다해 작업하시는 것입니까?” 어린 조수의 물음에 대하여 페이디아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네 방금 아무도 볼 수 없다고 했나? 자네는 틀렸다네. 하늘의 신이 보고 계시다네. 그리고 자네와 내가 알지 않는가?” 페이디아스는 신 앞에서도 당당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 역시 이와 같이 남이 보든 안 보든 성실하게 사역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고후 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자신이 어떤 자세로 사역해 왔는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정말 양심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섬김을 잘 아시기에 인정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11절에 보니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은 장차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그의 행위대로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악한 일을 저지른 자는 심판을 받고, 선을 행한 자는 상을 받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죽음 이후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통해 그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양심의 거리낌 없이 서기 위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기 위해 진실되고 성실하게 맡은 바 일을 감당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열심이 넘치는 바울의 열정을 보고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며 13절에서 기록한 것과 같이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그처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열심히 살아간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한 헌신이었음을 고백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사람들이 볼 때는 복음을 위해서 젊음, 건강, 부, 명예, 지위 그 모든 것을 버린 바울이 미쳐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삶이 그의 원수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미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 즉 바른 정신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기 위한 것임을 강조 합니다.

무엇이 이처럼 남들에게 복음에 미쳤다,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선교를 하도록 만든 것일까요? 바울이 14절에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기서 ‘강권하다’는 말은 ‘사로잡아 이끌고 가다’는 뜻과 ‘붙들고 가다’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미쳐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을 붙들고 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사로잡아 이끌고 갔기 때문에 그처럼 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교회를 향한 바울이 가진 사랑의 출처는 바로 죄인 된 우리들을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죽음까지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죠.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살아났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자신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지 말고, 사망 권세에게 자신을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라고 권면 합니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은혜를 받아 구원 얻은 사람들은 삶의 목적도 달라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 구원 받지 않았을 때처럼 옛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육신에 따라 사는 것을 거절하며 복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예수를 육신을 따라 인간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고 그를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17절 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요즘에는 스마트폰 사용 주기가 짧아져서 평균 2-3년 쓰면 핸드폰을 바꾼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기존에 사용하던 폰들 아직 쓸만 하거든요. 그래서 중고폰을 산 상인들이 고장 난 부품을 고쳐서 ‘중고’(Refurbished)로 다시 판매 합니다. 그런데 그거 보면 새 것처럼 보이는 게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고장난 폰을 고쳐서 새것처럼 만드는 차원이 아닙니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새로운 창조”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다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가 겪는 거듭남의 변화란 것은 기존의 존재가 아니라 전혀 색다른 존재로 새롭게 창조 되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는 자기 자신 밖에 모르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로 새창조를 입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새로운 피조물들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통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전에 육신대로 살아가던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 된 삶을 살아가며 복음을 위해 우리의 삶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며,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득 안고 복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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