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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후서 4 장 | 고린도후서 4장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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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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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은 CGNTV와 공동체성경읽기(PRS)가 공동기획하여 제작한 영상으로 무단으로 영상을 편집 및 재배포가 금지됩니다.
*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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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

고린도후서 4. …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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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9/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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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 KLB –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 Bible Gateway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 직분을 받았으니 낙심하지 않습 니다. 오히려 우리는 은밀하고 부끄러운 일과 간사한 행동을 버렸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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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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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2/(화) \”고린도후서 4:1-18\”/ 작성: 박창용

고린도후서 4장은 3장에 이어 하나님의 영광이 율법이나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설명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의 가르침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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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2/22/2021

View: 8571

매일말씀묵상. 9월 15일. 고린도후서 4장. – 하늘품은교회

고린도후서 4장. 영원한 영광을 기다리는 질그릇. 1. 사도는 자신이 받은 직분이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직분이기에, 어떤 어려움에도 낙심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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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11/21/2022

View: 2523

매일성경 : 고린도후서 4장 주석과 개요 – 구약장이

매일성경 : 고린도후서 4장 주석과 개요 · [1]. 낙심하지 아니함(1-2). · [2].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주 되신 것을 전파했음(5). · [3]. 하나님을 아는 빛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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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3/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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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후서 4장 주석 – 바울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고린도후서 제 4장 =====4:1 이러하므로 – 본절이 앞장에 이어짐을 나타내는 접속사로,`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 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것이므로’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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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6/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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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

영어 킹제임스 성경 (KJB) ; 고후 4:2, 오히려 정직하지 못한 숨겨진 일들을 버리고 간교하게 걷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 아니하고 도리어 진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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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jbstudy.net

Date Published: 10/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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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성경 / 고린도후서 4장 – 블로그 – 네이버

메시지 성경 / 고린도후서 4장 … 하나님은 너무도 은혜로우셔서 그분이 하고 계신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셨습니다. 그러니 이따금 힘겨운 시기를 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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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17/2021

View: 7742

약함의 이유(고후4:7~15) – 유평교회

약함의 이유(고후4:7~15) · 우리 모두는 동일한 영광의 직분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 우리 모두는 동일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 여기에 보기

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6/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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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
고린도후서 4장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린도 후서 4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 Views: 조회수 10,70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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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yKi0ERtMxmc

고린도후서 4

질그릇에 담긴 보배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1)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 바 ㄴ)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2016/01/12/(화) \”고린도후서 4:1-18\”/ 작성: 박창용

본문: 고린도후서 4:1-18

찬송가: 597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고린도후서 4장은 3장에 이어 하나님의 영광이 율법이나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설명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의 가르침과 사역에 오해를 갖고 대항하던 자들은 유대의 전통을 따라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던 이들로 여전히 율법에 매여 그리스도인의 규범(음식, 성, 결혼, 그리고 법적 소송 등)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채, 고린도의 개방된 문화 속에서 근친상간 죄를 범한 자들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로 인해 고린도 교회에 2차방문을 했었습니다. 누가도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았지만 고린도후서 12:14; 13:1-2에 ‘세번재 방문’이라 언급함으로 가슴아픈 ‘sorrowful visit’가 있었음을 유추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2:1절 이후 가슴 아픈 방문이었기에 다시는 가지 않기로 결심까지 했었던 차였습니다. 그로인해, 사도바울은 디도를 교회에 보내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알아보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쓴 바울은 드로아에 가서 디도의 소식을 듣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디도의 도착이 늦어지자, 마게도니아까지 바울은 이동하여 기다렸습니다. 결국 마게도니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교회에 있던 문제들에 대한 해결과 바울에 대항 했던 이들에 대한 돌이킴과 회개에 대한 소식을 듣고 3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마게도니아에서 고린도후서를 쓴 것입니다.

이런맥락에서, 사도바울은 4장을 통해 비록 2차방문 때 받은 수많은 모함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3장에 이어 부드럽고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은혜와 사명을 신학적으로 재정립하도록 도움으로 아픔과 상처를 아름답게 승화시킵니다.

먼저,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직분은 3장6절에 언급한 ‘새 언약의 일꾼’ 을 가리킵니다. ‘직분’ 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입니다. ‘Service’, 즉, 섬긴다 또는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은혜도 직분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은혜와 직분의 주인이 되면 이는 거짓이며, 3-4절에 언급된 대로 ‘복음을 가리는 것이며’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단호하게 직분의 목적을 정의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를 통해 바울은 은혜와 직분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둘째로, 이 분명한 직분의 목적을 위해 두 개의 그림언어를 사용합니다.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주목해야 할 두단어가 무엇입니까? ‘보배’와 ‘질그릇’ 입니다. ‘보배’를 뜻하는 헬라어 ‘테사우로스’(thesauros)는 간직된 것, 보석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배입니까? 바로 앞서 6절에 언급된 ‘영광을 아는 빛’ 이 그 보배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을 들어내는 영원한 빛을 뜻하며, 그 빛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연약하고 가치 없는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45:9; 시22:15)

뿐만 아니라,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겨쌈을 당하여도 답답한 일이 생겨도 박해를 받아 버린바 되어도 괜찮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동시에 보배를 담은 질그릇의 특권이 사명임도 언급합니다. 10절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다는 것은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왜 희생합니까? 그 희생 뒤에 그 죽음 뒤에 들어날 예수의 생명이 직분 맡은 질그릇 같은 우리들에게 나타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것은 부활의 승리 때문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된다는 바울의 신학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16절에 다음과 같이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왜 낙심하지 않습니까? 은혜로 말미암아 직분을 받은 자들은,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살아가는 이들은 겉사람은 계속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이며, 직분맡은 이들은 잠시 받는 환난에 떨지 않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고, 직분 맡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하는 것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들이 아닌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직분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와 동거하며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조금이나마 영광의 광채가 난다면 이는 우리의 공로와 수고 때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때문입니다.

둘째로, 직분을 맡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희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자신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시며 고난 받고 조롱당하셔야 했던 자기부인 이였습니다.

잊지맙시다. 우리의 연약함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그리스도, 그 복음만을 자랑하십시다. ‘하나님의 손이 짧지 않은 것은’ 바로 나 같은 죄인까지도 품고 사랑하시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질그릇같이 아무런 가치도 필요도 없는 내 안에서 광채를 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다. 또한 허물투성이인 우리에게 직분을 믿고 맡기시고 봉사를 통해 성령의 열매와 은사들을 더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하십시다. 그리하여, 이기심의 독성과 폐해를 되돌려 주고 받은 인생이 아니라 바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며 섬김의 본을 보이는 믿음의 명문가정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직분의 주인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많은 직함과 공로로 스스로를 포장하려고 애쓰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정직히 나의 나됨이 나에게 있지 않고 오로지 보배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만 있음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존귀한 보배를 담는 질그릇이라는 존재만으로 감사하며 정결한 삶 살아내는 100주년기념교회 모든 교우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교회에서 힘들게 봉사하고 누군가의 격려 또는 알아줌을 기대해 본적이 있는가?

2. 어떻게 하면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봉사에 매진할 수 있는 마음자세를 스스로 고취시킬 수 있을까?

3. 질그릇에 담긴 보화를 생각해 봤는가? 가치 있어 보이는가?

4. 지나친 포장이 보화를 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봤는가? 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작성자: 박창용

매일말씀묵상. 9월 15일. 고린도후서 4장. > 매일말씀묵상

(아래 관련 링크 클릭하여 드라마 바이블을 들으면서 묵상하면 더욱 도움이 됩니다. )

고린도후서 4장. 영원한 영광을 기다리는 질그릇.

1. 사도는 자신이 받은 직분이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직분이기에 , 어떤 어려움에도 낙심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고 밝힙니다 . 그러면서 그 직분을 감당하는 길은 복음의 진리에 물을 타지 않고 전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1~2). 그러나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며,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3).

2. 사도는 이것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4~6).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주실 때 , 그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 이 일은 복음의 진리를 그대로 전할 때 일어납니다. 이 확신은 사도로 하여금 복음에 물을 타는 모든 행위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에 대한 이런 확신이 없다면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거나, 복음에 다른 것들을 섞게 될 것입니다. 슬프게도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낯선 일이 아닙니다.

3. 사도는 자신이 질그릇에 불과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 복음은 영광스럽지만 , 그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부름 받은 사도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 사도는 자기를 증명하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가 증거하는 복음과 자기가 맡은 복음의 직분의 영광을 증명하고 싶어 할 뿐입니다.

4. 비록 자신은 질그릇이지만 , 그 안에 담은 보배를 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 능력이 자신을 통해서 나타난다면 ,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보배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7). 온갖 어려움과 환난을 다 겪고 있고, 그것이 고린도사람들에게 사도성을 부인하는 비난의 근거가 되었지만, 사도 자신은 오히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생명이 자신을 통해서 더욱 드러난다고 말합니다(8~10). 그래서 사도는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질 수 있습니다(11). 고난이 도리어 성화의 방편이라는 말입니다.

5. 사도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마지막 날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3~15). 고린도사람들과 함께 예수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게 서기를 바라기에, 그는 이 모든 고난을 견디며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육체는 날이 갈수록 노쇠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를 사도는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17). 기억하십시오 . 환난은 잠깐이고 가볍습니다 . 영원하고 무거운 영광에 비한다면 말입니다 (18). 그러므로 보이는 것에 의해 일희일비하며 살지 마십시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6. 우리는 질그릇일 뿐임을 기억하십시오 . 보배이거나 금, 은도 아닙니다. 인생의 고난 속에서 우리가 깨어질수록 나타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그러니 고난과 고통과 시험과 연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미 없는 고난은 없고,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의 고난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오직 마지막 날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사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하나님 앞에서 질그릇 인 것을 알게 하시며, 저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그 복음의 영광의 광채만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인생의 고난 중에 금가고 깨어지는 일을 만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남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매일성경 : 고린도후서 4장 주석과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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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 안에 있기에 어둠을 이기고 세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후 4:1-6; 어두움과 빛

어느 시대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방해가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 신인 사단은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역사하고 있다. 바울이 이러한 어두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복음의 빛을 전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1]. 낙심하지 아니함(1-2).

복음을 전파하다가 방해를 받으면 낙심하기 쉽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어두움 속에서 낙심하지 아니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아니했다. 부끄러운 일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도 아니했다.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거리낌없는 진리만을 나타냈다. 성도는 낙심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됨을 확신해야 한다.

[2].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주 되신 것을 전파했음(5).

말씀을 혼잡케 하고 마음을 혼미케 하는 사람의 어두운 역사 가운데서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파했다. 자칫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자들이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주 되신 것과 자기는 성도들의 종된 것을 전파하였다. 그는 오히려 더욱 더 낮아져서 복음을 받는 자들의 종이 되었다. 그는 종이 됨으로써 복음을 온전하게 전하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3]. 하나님을 아는 빛을 하나님께서 비춰주심(6).

사람은 씨뿌리고 물을 줄뿐이다.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전도자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진리를 전하면, 그 복음의 광채를 아는 빛을 하나님께서 비춰 주시는 것이다. 망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가리워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삶은 흘러 가면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그 삶에 예수 그리스도가 포함되면, 후회스럽지 않다.

고후4:7-18; 보배로운 생명

본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비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스스로를 의뢰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기를 원하신다. 그 이유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기”때문이다(7).

[1]. 질그릇에 가진 보배(7).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보배를 주셨다. ‘보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6)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 보배로운 생명을 질그릇 같은 우리의 육체 가운데 주셨는가? 질그릇은 깨어지기 쉬운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이것을 통해서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한다.

[2]. 생명의 능력(8-15).

질그릇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한다. 그러나 생명은 싸이지 아니한다. 질그릇은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보배로운 생명은 낙심하지 않으며 버린 바 되지 않으며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영광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성도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가기 몸에 넘치게 해야 한다(10-12).

[3]. 날로 새로운 속 사람(16-18).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다”(16). 바울은 많은 환난과 고난 속에서 겉 사람은 늙고 힘을 잃어 간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잠깐이다. 우리 안에 주신 보배로운 생명은 날마다 더욱 더 새로워지고 있으며, 보이지 않은 영원한 영광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속 사람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더 읽으면 유익한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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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후서 4장 주석

고린도후서 제 4장

=====4:1

이러하므로 – 본절이 앞장에 이어짐을 나타내는 접속사로,`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

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것이므로’라는 뜻이다(3:12-18).

이 직분을 받아…낙심하지 아니하고 –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를 능가하는 직

분을 부여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즉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때문이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행 9:1, 2).

하나님께서 그런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사 복음을 증거하는 직분을 맡기신 것이다. 바

울은 자기가 받은 직분이 정죄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복음을 전파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이므로(3:8)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자기를 향한 모든 적대적인 비난과 시

련에 대해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Bruce). 혹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을, ‘복음

을 선포하는 직무를 태만히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한다(Barrett). 실제로 바울은

그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직무를 이행함에 있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려는 각오로 매진(邁進)하였다(행 20:24).

=====4:2

숨은 부끄러움의 일 – 본절은 바울과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적 상황에서 바울이 변

증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본문의 뜻은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공동번역)이

다. 어떤 이들이 모종의 행위를 숨어서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이 드러날 경우 수

치가 돌아온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과 논쟁자들을 구

별하기 위하여 자신은 그런 일을 버렸다고 선언한다.’버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아페이파메다'(* )는 부정과거로서 이미 버렸음을 의미한다. 바

울이 이말을 사용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와 논쟁하는 자들이 그 일을 지금도 하고 있

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서 그 부끄러운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바

울더러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은밀

한 곳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적대자들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 ‘궤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누르기아'(*

)는 ‘교활’,`속임수’라는 뜻이며, 11:3에서는 사단이 하와를 미혹한 근본적 의

도를 묘사하는 것으로 ‘간계’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적대자들에 의해서 악선전을 당한

일이 있었다(12:16). 바울은 본절에서 이런 악선전에 대하여 자신은 결코 그런 파렴치

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 ‘혼잡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룬테스'(*

)는 ‘불순물을 섞다’는 뜻으로, 마치 약에 이물질을 섞어 약의 질을 떨어뜨

리는 것처럼 순수한 복음에 필요없는 것을 첨가시킴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혹자는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가르치지

않음으로해서 복음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Barrett). 본문은 이런

비난에 대한 바울의 답변일 수 있고,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이 보기에 도리어 복음의 본

질을 왜곡시키는 거짓 전도자들(2:17)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다.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 바울이 여기서 ‘복

음’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지 않고, 보편적인 개념인 ‘진리’라는 용어를 사용

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가해졌던 또다른 비난 즉 `바울은 어떤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비교적(秘敎的)인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해명하려는 의도 때문

이다. 그가 본절에서 계속하여 하나님앞과 모든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자신을 천거한

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의도를 지지해 준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을 천거하는

대상으로서 하나님 외에 ‘양심'(* , 쉬네이데신)을 든 것은 주목

할 만하다. A.D. 1세기경의 유대인 주석가 필로(Philo)가 ‘양심은 하나님의 파수꾼으

로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인간의 양심은 비록 인간의

타락 이후로 무디어지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선한 양심은 여전히 진리

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롬 2:15). 결국 바울이 양심에 호소하여 자신을 변증한 것은

인간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호소한 것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한편 바울이 ‘스

스로 천거한다’는 말이 3:1 내용과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천한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증거했음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

는 것이다(Harris).

=====4:3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 여기에서도 바울이 모호한 말을 전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음이 시사된다. 즉 바울은 소수의 영적인 마음을 가진 선택된 자들 만이 알

아들을 수 있게 전한다고 비난받았던 것으로 보인다(Barrett). 바울은 그렇게 비난하

는 자들을 향하여 만일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멸망의 길을 걷

는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바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공개된 방식으로 설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씌워져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고전 1:18;2:14). 여기서 ‘가리

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칼륌메논'(* )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임을 시사한

다(Bruce).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직분을 부여받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듯, 그리

스도의 영광을 거부하고 멸망에 이르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

루어진다는 계시의 이중적 측면을 보여준다.

=====4:4

이 세상 신 –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오노스'(* )는 고전

1:20;갈 1:4에서와 같이 ‘세대’의 의미이다(age, NIV).따라서 ‘이 세상 신’보다는 ‘이

시대의 신’이라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이름은 사단에 대한 별칭이다(Harris).이

외에도 사단은 `이 세상의 임금'(요 12:31),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요 악한

영'(엡 6:12)으로 불린다.사단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로 천사였으나 지고하신 하나님

과 동등해지려는 교만을 품었기 때문에(사 14:13, 14),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고(사

14:12, 15)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그러나 사단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눅 4:1-12). 그런데도 사단이 계속해서 성도를 타락

시키려고 애쓰며, 믿음이 없는 자들로 하여금 성도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활동을

펴는 것은, 하나님께 종말까지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 ‘혼미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

튀플로센'(* )은 ‘눈을 멀게 하였다’는 의미이다(has bilnded,

NIV). 따라서 ‘마음을 혼미케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 즉 영적인 눈을 멀게 한다’는

뜻이다. 사단은 사람들의 영안(靈眼)을 멀게 하여 영적인 어두움에 빠지게 하고 빛되

신 그리스도를 미워하게 만든다(요 3:19;벧전 5: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바울은 여기서 태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

를 염두에 두고 있다(Bruce). 본절의 ‘형상'(* , 에이콘)은 원형

(archetype)은 그대로 그린 초상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의 보이는 초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원형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

과 성품을 지니신 분임을 말해준다(빌 2:6).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

은 그리스도의 신성함 자체가 아니라, 하나니의 현시(顯示)인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

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4:5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 바울이 자신을 자랑한다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한

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게 은혜로 직분이 주어졌다는 것과(1절), 그 직분의 사명이 그리스도 예수가 ‘주’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인간적인 지

위나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는 그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울은 몸소 종의 형체로 오셔서 종의 직분을 다하신 예수(빌 2:7)의 발자취를 따랐

다. 한편 본문의 ‘주'(* , 퀴리온)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분을 가

지고 있음을 의미한다.그리스도 예수가 주라는 진술은 초대 교회로부터 전해오는 기독

교의 중요한 교리이자 신앙 고백이다.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사도

직의 본질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이 가져다주는 것이 죽음인(3:7)

반면, 복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자유라고 했다(3:17). 그런데 지금 바울은 율법의 정죄

로부터 벗어나 복음의 자유로 옮기워진 것의 또다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

다. 그것은 종이 되는 것이다.그는 기꺼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다(롬

1:1;빌 1:1).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하여도 종이 되는 것이며 그들

을 위하여 자신을 소비하는 것이다(12:15). 본절에서 바울은 그와 같은 사실을 기쁘게

증거하고 있다. 이는 사 40-48장에 나와 있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보여주듯이 비록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기쁘게 여기는 것과 같다(Martin).

=====4:6

어두운 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 바울은 자

신의 구원받음과 사도직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온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신 하나님

의 첫번째 빛의 창조(창 1:3)와 인간의 영적 무지을 몰아내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에

구원의 빛을 비춘 두번째 빛의 창조를 병행(竝行)시키고 있다. 첫번째 창조의 빛이 어

두움을 몰아내고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면, 바울의 영혼에 비친 구원의 빛은(행

9:3, 8;22:6, 9, 11;26:13) 그를 덮었던 영적 무지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였다. 이 지식은 구체적으로 말하

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복음에 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을 소유한 자는 그

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아는 자이고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심을 아

는 자이다(Harris).

=====4:7

보배 –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가리킨다.

질그릇 – 성경에는 질그릇에 대한 비유가 종종 사용된다. 가령 64:8에서는 하나님

과 그의 백성을 도공과 질그릇에 비유하면서 질그릇이 스스로를 빚을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고, 애 4:2에서는 질그릇의 깨어지기 쉬운 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묘사되

고 있으며, 딤후 2:20, 21에는 금그릇이건, 은그릇이건, 나무그릇이건, 질그릇이건 간

에 주인이 쓸 수 있도록 깨끗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것들 가운데,공통

적인 것은 질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질그릇은 앞에서 언급된

‘보배’와 극명하게 대조되어 가치없는 것으로 비유되어서 바울 자신과 성도들을 가리

킨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육체가 갖는 한계성과 연약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

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육체를 부정하거나 인간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오

히려 이것은 복음의 무한한 영광과 숭고함에 비교된 인간의 상대적 무가치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복음의 존귀함과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에 대한 대조는 (1) 복음의 능

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하고, (2) 인간의 연약성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이 나타남을 보여주며, (3)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 ‘우겨쌈을 당하여도’에 해

당하는 헬라어 ‘들리보메노이'(* )는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는 뜻으로 바울을 비롯하여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말해준

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앞절에서 언급된 대로 성도는

질그릇에 지나지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 즉 ‘능력의 심히 큰

것’의 원천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기 때문에 질그릇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 바울

이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자기를 지탱해 준 힘의 원천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추상적 이론이나 관념적 논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그의 사역에서 전

인격적으로 경험한 데서 기인한다(6:3-10;고전 4:9-13;15:30, 31). 실로 바울에게 있

어 자신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切感)하는 것이 그가 가장 강해질 수

있는 비결이었다(1:8, 9).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이 은유적 표현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전투적인 표현이다. 그 의미는 대적들이 포위하여 한곳에 몰아넣는다 하더라도 결코

움직일 틈이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지는 못한다는 것이다(Tasker).

=====4:9

핍박을 받아도…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바울이 계속해서 성도

들이 당하는 혹독한 육체적 고통을 사실화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혹자는 이것을

영지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Barrett). 즉 바울은 영지주

의자들이 육을 무시하고 영적인 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에 반대하여 육이 당하는 고통

을 사실화하고 도리어 육의 고통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과 앞절을(8절) 통해 바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 어떠

한 고난도 성도들을 궁극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주

의 영이 있고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는 것의 또다른 표현

이다(3:17).

=====4:10

예수 죽인것을 몸에 짊어짐은 – 본절과 11절은 바울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이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보여준

다. 그것은 고난을 통한 영광이고 죽음을 통한 생명이다. 한편 혹자는 바울이 ‘죽음’

에 관해 언급할 때,일반적으로 헬라어 ‘다나토스'(* )를 사용하는데 비

해 여기서는 ‘네크로신'(* )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단

순한 죽음외에 ‘죽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Barrett). 그렇다고 볼 경우 본문

은 성도로서 신앙적 삶을 지켜나가고자 할 때 예수의 죽음과 같은 고난의 과정이 계속

해서 반복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바울은 이것을 육체로 경험했고 그의 실존에는 이

런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다(6:5;고전 4:11;갈 6:17).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꺼

이 감내하는 성도들에게 부활을 통한 궁극적인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시가 나타나

고 있다. 성도들은 주를 위한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종말론적으로

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함으로써 영원히 승리하게 된다(롬 8:36;골 1:24).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패배의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

는 승리의 표징이다(엡 3:13).

=====4:11

우리 산 자가…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 ‘우리

산자’라는 표현은 죽음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만약 성도들이 그리스도

에 대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넘기워진다면 그것은 곧 그의 몸에 그리스

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증거이다. 그것은 죽을 육체가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는 것

을 뜻한다(고전 15:35-49). 여기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

는 모습으로 그날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육체적 생존’이 주의 재림에

확실히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주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재림에의 확실한 참여를 보장한다.

=====4:12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죽

음 가운데서의 생명’이라는 논지를 1:6, 7에서 언급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받는 고

난’과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곧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심할수록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더 좋은 영적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이다(Harris). 바울은 자신의 고난이 메시야적 고

난을 감내(堪耐)했던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본받는 것이라고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한

편 혹자는 본문이, 바울 자신은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을 것이지만 그의 성도들은 살아

서 주의 재림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고 본다(Dodd). 또 어떤 이는 바울의

끝없는 고난과 시련을 보면서도 편안하고 안일한 생활에 젖어있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

한 바울의 냉소적 비난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나(Calvin), 이 두 견해는 타당하지 않

다. 오히려 본문은, 예수께서 만인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하셨던 것처럼 바울 자신의 고난과 시련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유익하게 되

었음을 말하고 있다(골 1:24).

=====4:13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것같이 – 이 문구는 시 116:10의 인용이다.

그런데 시 116:10의 히브리어 본문 ‘헤에만티 키아답베르'(* )

는 다음 세가지로 해석된다. (1) 나는 믿었다. 고로 나는 말할 것이다. (2) `나는 굉

장히 고난받고 있다’고 말했을 때조차 나는 나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3) 나는 믿

는 고로 말하였다. 이상에서 바울이 의도한 것은 (3)의 해석으로 여겨진다. (3)은 본

절의 맛소라 본문(Massora Text)에 해당하는 70인역(시 115:1)에 대한 해석으로서 ‘내

가 믿는고로 말하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에피스튜사 디오 엘랄레사'(*

)의 의미를 그대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I be-

lieved;therefore I have spoken.”, NIV). 결국 바울은 본절에서 70인역의 시 115:1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질병과 그에 수반되는 낙담 속에서 하

나님의 구원을 헤아리며(시 116:1-11) 어떻게하면 하나님께 가장 적절하게 헌신할 수

있을까를 고려하였다(시 116:12-19).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여서도 복음을 굳게

믿었고 항상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생

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믿는 바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Harris).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 혹자는 본문의 ‘같은 믿음’이 고린도교인들

과 같은 믿음을 뜻한다고 보지만(Calvin) 그보다는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편 기자가 가졌던 믿음, 즉 어떠한 고

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신다는 믿음이 바로 바울 자신의 믿음이며 그것이

그로 하여금 어떠한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사도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근

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단지 바울 자신을

구원해 주신다는 개인적 차원의 믿음을 넘어 만인을 구원하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

=====4:14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 바울의 사도적 삶은 철저히 예수의 십자가와 부

활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예수께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십자가

의 고난을 본받았다. 바울이 온갖 죽음의 위협과 시련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으켜진 것처럼 바울 자신도 죽음에서 일으켜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11:2;엡 5:27;골 1:22).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 종말론적 구원의 날 바울과 그의 성도들은 함께 구원

의 기쁨을 나누며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날 바울을 비롯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게 되겠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정죄(定罪)의 심판대가 기다리

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열어주기 위해 온갖

비방과 오해와 육체적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런 사실이 고린도 교인들에

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어지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4: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바울

은 다시 1:6의 주제로 되돌아간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모든 고난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과 전도,이 모든 것들이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더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

함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다. 여기에는 바

울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 ‘그러므로’라는 표현은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앞에서 제시되었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전하는 고귀한 직

분을 받았기 때문이다(1절). 둘째,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리라

는 소망 때문이다(14절). 셋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윤택(潤澤)케 하고 하나

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15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 여기서 ‘겉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를 가진 이 세대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에 대조되는

‘속사람’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영적 실존을 가리키는

데(5:17;엡 2:5;골 3:9, 10;벧전 1:3), 장차 다가올 새로운 세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

도 있다. ‘겉사람’이 낡아져가는 것은 이 세대의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생성 소멸의 원

리이다. 그러나 ‘속사람’이 도리어 새로와지는 것은 중생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식이 새로와지며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

다(엡 4:15;골 3:10). 이 ‘새로와짐’은 종말론적 재림의 때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성

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이미 현재화되어 있다. 바울은 이것을 ‘날마다 새롭도다’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본문은 바울 자신에게도 적절하게 적용되는 바, 그의 육체는 끊

임없이 다가오는 고난들(1:7-9;4:8-11)과 세월의 흐름으로 하여 점점 쇠약해지지만 그

의 영적 실존은 나날이 새로와지는 것이다.

=====4:17

환난의 경한 것이…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본절에서는 두 가

지 사항이 강조된다. 하나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환난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받을 영광에 비하면 그 환난은 오히려

가볍다는 것이다. 이것은 ‘잠시’와 ‘영원’ 그리고 ‘경한 것’과 ‘능한 것’의 극명(克

明)한 대조로 잘 나타나고 있다.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당한 환난은 사실

상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1:8에서 고백한대로 그가 당한 환난은 너무 심하여

살 소망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것을 ‘경한 것’이라고 분

명히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하늘에서 받을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축복에 대한

소망을(골 1:5)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 여기서 ‘돌아보는’에 해

당하는 헬라어 ‘스코페오'(* )는 ‘주목하다’, ‘소망하다’의 뜻이다. 바

울과 성도들이 소망하는 것은 이 세대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영적인 것

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보이는 것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영원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자신이 후자를 바란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물질과 영, 현실과 이상

에 대한 이원론적(二元論的) 구별을 말하는 것으로서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만약 육체적인 것이 무의미하다면 그가 당한 육

체적 고통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하였다(1:6). 다만 바

울이 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며 결국 없어질 것

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종말론적 구원의 날

에 도래할 그 영원한 세계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보며, 미래의 종말론적인 것을 이미 현재적인 것으로 누리고 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을 가지고 보기 때문이다(히 11:1). 이런 바울의 모습은 유한한 육체를 입고 환난

이 현존하는 이 세대에 살고 있지만 이미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누리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의 한 모범이며, 마찬가지로 어떤 성도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

다면 바울과 동일한 영적 실존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린도후서 4장

고후 4:1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아 이 사역을 맡았기에 낙심하지 아니하며 Therefore seeing we have this ministry, as we have received mercy, we faint not;

고후 4:2 오히려 정직하지 못한 숨겨진 일들을 버리고 간교하게 걷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 아니하고 도리어 진리를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추천하노라. But have renounced the hidden things of dishonesty, not walking in craftiness, nor handling the word of God deceitfully; but by manifestation of the truth commending ourselves to every man’s conscience in the sight of God.

고후 4: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려졌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가려졌느니라. But if our gospel be hid, it is hid to them that are lost:

고후 4:4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In whom the god of this world hath blinded the minds of them which believe not, lest the light of the glorious gospel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should shine unto them.

고후 4: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또 예수님으로 인해 너희의 종이 된 우리 자신을 선포하노니 For we preach not ourselves, but Christ Jesus the Lord; and ourselves your servants for Jesus’ sake.

고후 4:6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For God, who commanded the light to shine out of darkness, hath shined in our hearts, to give the light of the knowledge of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Jesus Christ.

고후 4:7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고 우리에게서 나지 않게 하려 함이라. But we have this treasure in earthen vessels, that the excellency of the power may be of God, and not of us.

고후 4:8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해도 괴로워하지 아니하고 난처한 일을 당해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We are troubled on every side, yet not distressed; we are perplexed, but not in despair;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하며 Persecuted, but not forsaken; cast down, but not destroyed;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Always bearing about in the body the dying of the Lord Jesus, that the life also of Jesus might be made manifest in our body.

고후 4:11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For we which live are alway delivered unto death for Jesus’ sake, that the life also of Jesus might be made manifest in our mortal flesh.

고후 4:12 그런즉 이와 같이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 So then death worketh in us, but life in you.

고후 4:13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 하고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믿음의 동일한 영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으므로 말하노라. We having the same spirit of faith, according as it is written, I believed, and therefore have I spoken; we also believe, and therefore speak;

고후 4: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일으키사 너희와 함께 드러내 보이실 줄 우리가 아노라. Knowing that he which raised up the Lord Jesus shall raise up us also by Jesus, and shall present us with you.

고후 4:15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하여 있나니 이것은 많은 사람의 감사를 통해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함이라. For all things are for your sakes, that the abundant grace might through the thanksgiving of many redound to the glory of God.

고후 4:16 이런 까닭으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 For which cause we faint not; but though our outward man perish, yet the inward man is renewed day by day.

고후 4:17 이는 단지 잠시 존재하는 우리의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루기 때문이라. For our light affliction, which is but for a moment, worketh for us a far more exceeding and eternal weight of glory;

고후 4:18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While we look not at the things which are seen, but at the things which are not seen: for the things which are seen are temporal; but the things which are not seen are eternal.

약함의 이유(고후4:7~15)

제목: 약함의 이유

본문: 고린도후서 4장 7~15절

설교자: 최종혁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확신에 따라 행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자천했다. 자신을 변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사실 바울은 원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그는 복음을 위해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바울이 신뢰를 잃는 것은 곧 그가 전한 복음이 신뢰를 잃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올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그런 하나님의 일꾼들은 왜 낙심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 왜 그런 순수한 동기로 신실하게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은 어려움을 당할까?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며 낙심하고 어려운 상황에 넘어지며 복음을 위한 삶의 동기를 잃고 의무감만 남을까? 우리에게 이런 약함이 없다면 복음은 훨씬 더 잘 전파되지 않을까? 내가 이것만 더 잘할 수 있다면, 나에게 이런 상황만 없다면 더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이런 약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약함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절)

참 흥미로운 표현이다. 우리는 귀한 것은 귀한 것에 담는다. 음식을 열심히 준비해서 아무 그릇에나 담아내지 않는다. 비싼 선물을 사서 검은 봉지에 담아 주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어떤 질그릇인가?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잘 구워서 값이 나가는 도자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계속 사용하려는 용도로 만든 용기를 말한다.

딤후 2: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천하게 쓰는 그릇이 질그릇이다. 깨질 수 있고 그래도 괜찮은 용기다. 깨진 것은 재활용하거나 할 수 없다. 그저 다른 용도로 쓰다가 정 쓸 수 없으면 버리고 다른 그릇으로 대체할 뿐이다. 주방에서 매일 식사할 때 나오는 그릇을 생각하면 된다. 그저 평범한 그릇이다. 지금처럼 집집마다 다양한 용기가 많지 않았던 시대이기 때문에 질그릇에 귀한 보물을 담아 땅에 묻어 두기도 했다. 바울은 아마 그런 모습을 생각하며 참 역설적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런 역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질그릇에 담겨 있어야 할 것은 특별하지 않은 것이다. 귀하지 않은 것이다. 귀한 것이 질그릇에 담겨 있다면, 만약 그 상태로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면 우리는 그 보물의 가치도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내용물에 맞게 포장이 되어야 하고, 심지어 포장이 더 잘 되어야 내용물의 가치도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물세트들을 보면 포장에 그렇게 공을 들인다. 가끔 포장이 아까워 버리기 힘들 때도 있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은 질그릇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별하지 않은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있다. 그럼,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무슨 이유일까? 이유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우리가 어떤 질그릇이고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일차적으로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들 뿐 아니라 “이 직분”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바울은 “질그릇”이었을까? 우리가 볼 때는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예수님 다음이 바울 아닌가? 순수하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이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겸손의 표현인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바울은 많이 배우기도 하고 열정도 있었고 유대 사회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좋은 배경도 있었지만, 그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살펴봤던 것처럼 그의 대적들은 바울이 글은 잘 쓰는데 말에는 힘이 없다고 비난했다. 얼토당토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울도 딱히 그것을 반박하지 않았다. 말에 힘이 없다는 것은 특히 당시에 인정받던 그런 웅변술에 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준에서 바울의 설교는 형편없었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서 그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라고 말한다. 바울을 외적으로 봤을 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이 될 정도였다. 얼굴이 못생겼다는 의미보다 어떤 질병이 바울에게 있었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힘들어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바울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는 아니었다. 나중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 삼기도 했다. 더구나 바울은 그전에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를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도 그는 그런 약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구원 받은 후에 죄는 전혀 안지었을까? 그렇지도 않다. 그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고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죄를 즐거워하고 그 가운데 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육신의 연약함으로 죄에 넘어지고 좌절하기도 했던 것이다.

바울을 깎아 내리려는 자들은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바울을 비난하고 공격했다. 그것에 대해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인정했다. 자신이 질그릇임을 인정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질그릇에 보물을 담을 수 없으니 바울에게는 참된 보물이 없다고 공격을 했다. 앞서 말했듯 우리의 상식이 그렇다. 질그릇에 보물을 담지 않는다. 그럼 바울은 왜 이런 공격에 자신은 질그릇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질그릇임을 인정했을까?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살펴보자.

바울은 질그릇이었다. 그럼, 우리도 그런가? 딱히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도 다들 질그릇이었다. 누구 하나 완벽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인간의 연약함에 그들만의 연약함도 가지고 있었다.

믿음의 조상이자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던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이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누이로 속였던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 욥은 고난 중에 자신의 의를 내세우기도 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말을 그렇게 잘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자기 비하에 빠져 하나님의 명에 따르기를 계속 거부했고, 인간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하기도 했다. 기적의 선지자 엘리야는 어떤가? 이세벨의 협박에 도망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외적으로 왕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간음하고 살인한 사람이었다. 사사 시대의 사사들의 연약함은 우리가 사사기의 말씀을 통해 익히 들었다.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는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자 분노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복음서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어리석고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이런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유혹에 넘어지고 죄를 범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남들보다 어떤 능력이 빼어났던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이 남보다 뛰어난 능력과 지혜,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기로 선택하셨던 것 뿐이다.

우리도 질그릇인가? 그렇다.

고전 1:27-28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우리도 질그릇이다. 강하지 않고 지혜롭지 않다. 천하고 멸시 받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죄에 넘어지는 자들이다. 바울은 이런 질그릇인 우리가 보배를 가졌다고 말한다.

이 보배는 무엇인가?

이 보배는 무엇일까? 4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았다고 말했다. 즉, 이 보배는 우리가 받은 이 직분이다. 이 직분이 보배인 이유는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새 언약이 영광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바로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3:18). 주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4:6). 결국 이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즉 복음의 빛을 전하는 직분이기에 보배다.

이 직분은 단순히 어떤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다. 사실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관계적으로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직분을 받은 자로서 우리의 말과 삶으로 그 영광의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선포한다. 그래서 이 직분은 하나님을 전하는 직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누군가를 소개하는 일의 가치는 소개하는 사람의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이 직분의 가치는 하나님의 가치와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한다. 그리고 ‘거룩’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와 얼마나 다르신지를 말한다. 그리고 ‘영광’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분의 거룩이 위대하고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 위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보배로운 일을 하나님은 질그릇인 우리를 통해 하시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다.

왜 보배가 질그릇에 있을까? – 약함의 이유

이제 미뤄뒀던 질문들을 다시 꺼내보자. 왜 하나님은 질그릇에 보배를 두셨을까? 이제 일의 효율이나 효과를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더 강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래야 일하기가 더 쉽고 결과도 좋지 않은가? 또 바울은 왜 자신의 약함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인정했을까? 자신을 공격하는 그들보다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고 왜 주장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당한 고난보다 거둔 열매가 더 많다는 논리는 왜 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약한 이유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통해 한 사람이 구원 받고 그의 삶이 변화된다. 그 삶의 변화는 우리가 ‘기적’이라고 불러야하는 변화다. 이방신을 섬기던 사람들이 그 섬기던 신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긴다. 죄를 기뻐하고 죄에 물들어 죄에 종이 되어 살던 사람이 이제는 죄를 미워하고 선을 추구한다.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자들이 생명을 얻는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고 정말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말 특별한 어떤 힘이 이런 일을 만들어 낸다. 바울은 그것을 “심히 큰 능력”이라고 표현한다. 이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취게 하는 능력이다. 이 놀라운 능력이 이루는 일들을 볼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능력의 원천, 근원이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저들이 말하는 하나님에게서 그 능력이 오는가, 아니면 저들 자체에서 오는가?

바울의 대적들이 했던 말들이 사실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런 힘은 질그릇인 바울에게서 나올 수 없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없고 지혜도 없다. 그런 영향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한 복음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그 일은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것이 바울의 자기 변호였다. 자신의 약함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실제로 자신이 약함을 인정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 오직 하나님만 이 놀라운 구원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명백히 드러낸다. 여러모로 뛰어난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변하는 것이 그 사람 덕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약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증명했다. 그의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했다.

하나님께 능력이 부족해서 그 부족함을 채워줄 능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이미 사람을 구원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다. 하나님은 질그릇에 보배를 두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보이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울의 약함을 사용하셨고 다른 믿음의 선진들을 사용하셨고 오늘날 우리의 약함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능력의 예

바울은 8절부터 실제로 어떻게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8-9절)

계속되는 고난이 우리에게 있다. 그런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다. 우리를 짓누르는 상황들이 있다. 고민들이 있다. 걱정이 많다. 답을 알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사람들의 비난도 있다. 넘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연약함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망하지 않는다. 홀로 남겨지지 않는다. 낙심하여 멈추지 않는다. 참된 복음의 일꾼이라면 그런 것이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 무엇이 나타나는가? 내가 얼마나 신실하고 충성스럽고 능력 있고 용감하고 믿을만한 사람인지가 드러나는가? 아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11절)

우리는 계속해서 연약함 가운데 거한다. 죽음에 넘겨진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죽을 몸을 통해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울의 대적들은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바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고 그가 하나님의 사도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그의 고난과 연약함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짊어진 것이었고 그를 통해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났다. 지금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난의 삶을 통해 나타난다. 그 생명의 능력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절)

어찌보면 비꼬는 것처럼도 들릴 수 있는 표현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질그릇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그 결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이 전해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열매들이었다.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바울은 자신과 복음을 변호하면서 너희가 바로 그 증거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정리

다시 한번 약함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차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보배와 비교할 때 그 보배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모두 질그릇이다. 우리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도 하나님에 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들이다. 그런 우리를 통해 일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이 오로지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것임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신다.

한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약함’은 죄나 그것과 관련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쨌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사용하시니까 인격적 결함이나 부도덕도 어느 정도 용납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울은 직분을 받은 자로서 숨은 부끄러움의 일은 버렸다고 말했다. 성경은 단 한번도 하나님께서 악을 통해서도 일하시니 우리가 악에 거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악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함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연약함, 한계, 부족함을 말한다. 당연히 죄에 넘어지는 것도 우리의 연약함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은혜다. 하지만 그것으로 죄를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직분을 받은 자로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보며 낙심하고 어려운 상황에 넘어지며 복음을 위한 삶의 동기를 잃고 의무감만 남을 때가 있다. 내가 이것만 더 잘해도 좋겠고 저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 상황이 복음을 전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낙심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생각해야 할 것이 이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런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배를 두셨다. 그런 우리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때문이다.

도전

그래서, 우리가 영광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을 전하는 직분을 받은 자들로서 반드시 마음에 새겨 둬야할 세 가지가 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영광의 직분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13절)

바울은 시편 116편 10절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기 역시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같은 믿음을 가졌고 그래서 말한다고 한다. 우리도 믿은 자들로서 또한 말해야 할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영광스러운 복음의 직분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14절)

우리의 약함은 이 땅에서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난의 끝에 있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우리의 직분에 따르는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주님과 같은 부활의 소망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은 사실 죽음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더 나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 뿐이고, 그곳에 우리가 기다리고 또한 우리를 기다리신 주님이 계신다. 이 소망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삶의 목적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5절)

질그릇인 우리의 목적이 이것이다. 우리 삶을 통해 한 영혼이라도 더 얻고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영광의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목적이다. 그러니 약함에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후 12:9). 소망 가운데 맡겨진 일에 충성하라. 그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우리는 보배가 아니라 질그릇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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