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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 [생명의 삶] 20190128 창조주의 의도를 따라,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마가복음 10:1~16)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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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에게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칩니까?

성경이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을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18:3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들과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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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1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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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믿음 생활하는 자!, 누가복음 18:15-17

말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믿음 생활하는 자! · 성경: 누가복음 18:15-17 · 눅 18: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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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erounchurch.tistory.com

Date Published: 3/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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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누가복음 18장, 아는 사람만 안다.

여러분 교회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하나님 앞에서 왜 우리는 어린 아이와 병자가 되어야 하는지 한 번 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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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sambbang1.tistory.com

Date Published: 1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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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 – 뉴스앤조이

사실 믿음이란 분명히 선물을 받기 위해 벌린 어린아이의 빈손과 같습니다. 본문처럼 예수님의 팔에 안겨서 어떠한 계산 없이 축복을 순수하게 수용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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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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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 주일설교 – 휄로쉽 교회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12/16/18) 막10:13-16 ·오늘날 교회에는 가나안 성도들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더 급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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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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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같은 믿음’ 지니는 방법 5가지 – 크리스천투데이

지난 26일(현지시간)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지니는 방법 5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님께 구하라. 어린아이는 간신히 수지타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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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1~16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 강변동숭교회

생명의 삶: 2019.1.28 마가복음 10.1~16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 15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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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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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강)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갖자! (마 18:1-5) – 마태복음

⑴예를 들면 제자들이 계산한 200데나리온이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요, 보리떡 다섯 개를 통해서 믿음의 법칙을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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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3/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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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같은 믿음-은혜주일-170507-눅18 – sermon2

그냥 그대로. 믿으세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4 어린아이는 의존적입니다. *큰 아들이 겁이 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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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imdongwon.net

Date Published: 1/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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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와 같은 자 / 마태복음 18장 2절 ~ 3절 / 오늘의 말씀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너희 모든 삶을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만일 어린아이와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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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rmanel.tistory.com

Date Published: 10/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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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삶] 20190128 창조주의 의도를 따라,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마가복음 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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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 Author: CGN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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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 2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6t4Ax4qq9_w

성경은 우리에게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칩니까?

질문

성경은 우리에게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칩니까?

답변

믿음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성경 전체는 믿음을 권면하며 믿음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사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히브리서 11:6). 히브리서 11장 전체는 믿음과 믿음 있는 사람에 대한 장입니다. 믿음은 에베소서 2:8-9에 나와 있듯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우리 능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게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갑주의 일부인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믿음의 방패입니다(에베소서 6:16).성경이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을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18:3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배경에는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절)라는 제자들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2-5절).제자들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집중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십니다. “높아지는” 길은 바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온유함이 필요합니다(참고. 마태복음 5:5).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믿음과 더불어 어린 아이 같은 겸손함을 추구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천국의 관점에서는 가장 큰 자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야망, 교만, 오만을 모르고, 따라서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아이들의 특징은 겸손하고 잘 배운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교만과 위선과 거리가 멉니다. 야고보서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은 겸손에 상을 주십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10).마태복음 18:1-5에는 믿음이란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하고 위선 없는 믿음을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축복하고자 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마가복음 10:14-15). 아이는 어떻게 상을 받습니까? 열린 마음과 정직함, 순전한 기쁨으로 받습니다. 이런 종류의 행복한 진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때에 우리 믿음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물론 아이들은 쉽게 속고 엉뚱한 곳으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꾸밈이 없기에 진리를 놓치고 거짓과 꾸며낸 말에 속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은 그런 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겸손하고 정직하게 믿으라고 권하시며 어린 아이의 순진함을 예시로 드셨습니다. 어린 아이의 믿음을 따라하기 위해서는 그저 하나님을 말씀대로만 믿으면 됩니다. 아이들이 이 땅의 자기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마태복음 7:11).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누가복음 18장, 아는 사람만 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누가복음 18장

어린 아이 믿음

intro

평안하시죠? annaga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하나님 앞에서 왜 우리는 어린 아이와 병자가 되어야 하는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1. 누가복음의 어린 아이 그리고 병자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15~17

마태복음 18:1-5에는 믿음이란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의할 것은 그 아이는 부모에 의해서 예수님에게 나아온 아이들입니다. 자력이나 자기의 판단으로 나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아래의 누가복음을 보시면 자력으로 나아올 수 없어서 여러사람들의 조력으로 침상째 예수님 앞에 나아온 중풍 환자가 있습니다.

자. 어린 아이와 중풍 병자의 공통점을 알 수 있으시죠?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5장 18~20

2. 잘못 설교하는 설교자들..

주로 설교단에서는 어린아이는 겸손하고 순전하고 순종적인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겸손하고 위선 없는 믿음을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축복하고자 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마가복음 10:14-15).

하지만 어디를 보아도 어린 아이가 겸손하고 순종을 해서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아이들은 오히려 어리석고 현명치 못한 존재로 묘사가 됩니다.

3. 누가복음의 핵심 진리

따라서 어린 아이나 중풍병자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력으로는 해결을 못하는 능력이며 다른 구원자의 결정적인 역할이 필요한 점이라는 것이 이 성경의 핵심으로 봐야 합니다.

설교자들은 이 성경을 이용해서 신도들의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거나 훈책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니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4. 왜 타인의 조력에 의지하는 자가 천국의 주인 되는 것인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자기가 도저히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는 위급상황에서 타인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건져지는 것입니다.

대부분 신자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할 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즉 신자가 할 일은 일단은 하나님이 신자를 구원하시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분이 그분의 권세로 신자를 구원하시는 것을 믿지 못할 때, 신자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것이고, 이 땅에서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못한 자들을 발견하고 그들 위에 서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조직을 세우고 그 조직에서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해 경쟁을 할 것이고, 어린 신자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불신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론

누구의 조력에 의해서 신자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가?

누가복음 5장, 누가복음 18장에서 침상을 들고 온 조력자들과 어린아이를 안고 온 부모는 지금의 누구입니까?

누가 당신을 안고 안전하게 하나님 앞에 데리고 갈 수 있습니까?

아는 분은 벌써 아셨을 겁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아닙니다. 장로님도 아닙니다.

예수님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리고 병든 나의 몸을 맞길 때 그분은 당신을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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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 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 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 10:13~16)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사실 어린아이라면 보통 천진무구한 순수함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천진무구란 눈과 같이 희고 한 점의 때도 없는 순진함을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일 것으로 보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험악한 세상살이 하다 보니 세상의 때가 많이 묻게 되고 속을 일도 많다 보니 쉽게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어른들에겐 본문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그저 가르쳐 주는 대로 믿는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교훈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 초등학생들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나라의 치열한 교육 현실 속에서 아이들의 삶이 어른만큼이나 경쟁적이고 사회의 개인주의로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게 이기적이 되어 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사회가 척박해도 대체로 아이는 아이입니다.

가끔 어린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지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세상에 찌들지 않아 티 없이 맑고 고운 아이들의 미소와 눈빛을 바라보면 내 맘도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더욱이 한 발짝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면 나도 저렇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구나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어린아이는 이런 순수함, 가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일까요? 학자들 사이에서 60년대까지는 이 어린아이에 관한 내용을 “아이의 수용력”에 대한 이야기로 보았습니다(예를 들어 Vincent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London: Macmillan & Co. 1955, 412-422). 어린이의 특성이 모든 것을 순수히 선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분명히 선물을 받기 위해 벌린 어린아이의 빈손과 같습니다. 본문처럼 예수님의 팔에 안겨서 어떠한 계산 없이 축복을 순수하게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믿음인 것은 틀림없지요. 그래서 어린아이가 의미하는 비교의 중점이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순수한 “수용적인 자세”, 그리고 타인들의 보살핌과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절대 의존 상태”로 보았습니다(D. E. Nineham, Saint Mark, Baltimore: Penguin, 1963, 268).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성품인 것이 틀림없음에도, 본문이 진정 말하려는 바는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의 의도는 어린아이의 “무력하고 천한 사회적 위치”로 보입니다.

당시의 어린아이는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었을까요? 어린아이는 당시 여성의 천함, 가난한 자 부정한 자와 같은 무력함과 소외됨과 같은 계층의 사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오늘날 선진국의 어린아이 말고 제3세계의 아이들의 상황을 보십시오. 부유한 집 아이들이 아니고는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들이 허다하고 어떤 아이들은 일부 어른들의 범죄에 가까운 행동, 혹은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역사 속에서 빈곤과 기아로 시달리는 시절일 때 어린아이들은 자주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어른들의 범죄에 이용당하거나 영양실조로 아사하기 일쑤였습니다. 서양에서도 “올리버 트위스트”나 “성냥팔이 소녀” 같은 이야기가 그런 상황을 반영하지요. 어린아이는 당시 가정에서 사회에서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종속되었기에 쉽게 군림당하고 착취당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아이가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당시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 분개하셨습니다. 그분이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십시오!”라고 호소하고 다니신 것만 보아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얼마나 어린아이들을 하대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많은 노력으로 말미암아 당시 어린이를 부르던 보편적이었던 ‘아 새끼’란 표현이 점차 사라지고 어린이란 표현이 사회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지요.

당시의 어린아이는 부유층이나 귀족 같은 특권계층이 아닌 다음에는 현대사회와 같은 위치와 권리를 누리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부모는 신생아를 버려 노출에 죽게 내버릴 법적 권리가 있었습니다. 때론 낯선 사람이 신생아를 데려갔는데, 대부분 그런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답니다. 이방 문화에서 어린아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당시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체벌은 심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폭력적이었던 스파르타 문화에서는 사내아이들을 강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사내아이들이 7세가 넘으면 모두 막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하면서 때론 이유 없이 정기적인 채찍질과 폭력을 가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음식을 부족하게 제공해 훔치는 기술을 터득하게 했고 아이들의 모든 잘못에 대하여는 심한 채찍질로 다스리기도 했습니다. 스파르타처럼은 아니더라도 로마의 학교교육도 꽤 엄격했는데 주로 그리스출신 노예들로 이루어진 선생들은 학생들을 심한 체벌로 다스렸습니다.

유대의 어린아이도, 당시 주변 문화처럼 대체로 천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방어 능력도 없고 생산능력이 없던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복종해야 할 뿐 그 어떤 높임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1960년대 이후 학자들은 마가복음 10:15절을 어린아이의 “낮은 위치”를 말하는 마가복음 9:23~27절을 통해 읽어나감으로 아이의 성품이 아니라 당시 어린아이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5~37)

마가복음 10:13~16절의 본문이 위치한 큰 문맥인 8:22~10:52절에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하여지고 낮아져야 함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예수님의 삶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십자가를 언급하며, 그리고 그 이후에야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막 9:31)

사회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높아지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은 그러나 비천하게 낮아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십자가에 사형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공포를 느끼기만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막 9:32)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에만 관심을 보이며 한심한 논쟁을 벌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 9:33~34)

9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답답해하시며 진정 높아지기 위해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당시 낮고 보잘것없는 약자였던 어린아이를 예로 드신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낮은 자가 되어야 높은 자가 될 수 있다, 또한 이처럼 천한 자를 영접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가장 낮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는 역설적 진리입니다(막 9:35~37). 예수님은 어린이의 예를 통해 천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무력하고 천한 자의 자리까지 낮아짐이 진정 높아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어린아이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신분과 소외된 자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특히 37절 말씀은 마태복음 25:40절을 연상시키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어린아이란 표현 대신 직접 “작은 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가복음 10장 13~16절에서 사용된 어린아이의 의미라 생각됩니다.

마가복음 10장 13~16절은 세 단락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사람들이 데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마 그들을 만져주시며 축복해 주시길 원하기 때문입니다(16). 제자들은 그러나 그들을 꾸짖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그러하듯 그들도 어린아이를 하찮고 귀찮은 존재로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낮은 자리에 서라고 바로 전에 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막 9:30~37).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적 신분상승의 욕망을 채우는 곳으로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꾸짖음을 당할 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막 8:33).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 모두 여전히 영적으로 장님인 상태입니다(비교 막 8:17~2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면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사회적으로 낮은 자와 소외된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도 그런 모습이 되어야겠지요.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4~16).

본문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아니하면”은 낮아짐에 대한 요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력하여 공격당하기 쉽고 천한 자세로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마가복음 10장 14~16절에서 어린아이의 의미는 결코 이상적인 순수함이 아닙니다. 고대사회에서 어린아이는 그리 존중받지 못했는데 본문은 당시 어린아이의 낮은 사회적 위치를 예로 든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의미는 전체 문맥인 8:22~10:52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낮아짐의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상승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고 공격당하기 쉬운 천한 자의 위치로 낮아지는 자세가 오히려 높아지는 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낮고 천한 자의 겸손과 섬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천한 자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5~16절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제자들은 무력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자의 자세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는 의도를 지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정 자신을 천하게 낮추는 겸손한 자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어린아이들을 만져주시기를 원했고, 제자들을 그들을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며(13, 14) 어린아이를 안아 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까지 해 주시십니다(16). 이는 세상에서 천하고 낮은 자인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고귀하고 축복의 대상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동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낮고 천한 자로 자신을 낮추고 그런 위치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떠받드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높이는 사람에겐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를 떠받드는 우리 사회에서 이 표현은 이제 새로운 문화 번역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들어갈 자격으로 어린아이는 무력하고 천한 자의 의미입니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12/16/18)

막10:13-16

·오늘날 교회에는 가나안 성도들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더 급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바로 갈릴리 성도들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갈릴리 성도’란 ‘가나안 성도’와는 반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선교적 공동체를 함께 세워하가는 성도’를 말한다.

1)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말씀한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온 이유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안수하여 축복해주시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금했다.

·제자들이 아이들이 에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금한 이유는 그들 역시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을 잘 지키고 준수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행동을 저지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시고자 하신 일이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모르는 아이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공을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2-1)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어린 아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들, 율법적으로 보면 무가치한 자들에게도 열려 있다.

·그 당시의 어린이들은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 받지 못했다. 부모들의 소유뮬로 취급되었다.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고 하신 것은 율법적으로 보면 보잘 것 없고, 심지어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죄인 일지라도 천국은 열려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그 율법을 통해 인간 스스로 한계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다 지켜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계를 발견하고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 나오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이다.(롬3:19,20)

·다만 그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되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허용된다.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한 일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피조물인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나게 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 나신 이유는 오직 그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위함이었다.(요1:29)

·그런데 이 사실은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가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순수한 믿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천한 사람일지라도,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다.

*2015년부터 2만명 이상의 무슬림 난민이 예수님께 돌아온 이유

2-2)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누려지고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란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도 천국은 도래해 있고 누려질 수 있다.(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임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죽지 않아도 지금 당장 하나님의 다스림을 통치하심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고 또 누려진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경우 예수를 믿어 죽은 다음에 천국을 갈지 몰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의 삶을 누리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찬송가 가사

·그런데 사실은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서도 정말로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 믿음이다. 그것도 어린 아이같은 순수한 믿음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채우실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그 일들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순전하게 믿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주님은 아무 것이나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다면,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인가를 구하면 그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말씀이다.(요14:12; 15:7) *휄로쉽의 기도 제목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이다. 인내하면서 끝까지 믿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난다.

학습 및 적용 문제:

1) 제자들이 어린 아이를 금한 이유는 무엇이며, 또 예수님이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2)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 아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인지 두 가지를 말해보라.

3) 성탄의 계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묵상하며, 오늘 내가 천국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나누어보자.

(제85강)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갖자! (마 18:1-5)

(제85강)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갖자! (마 18:1-5)

본문은 1-10절이 연결된 말씀인데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 하나는 ‘어린아이의 비유’이고, 또 다른 비유는 ‘연자 맷돌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한 가지 주제, 즉 천국이라는 주제 속에 하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1-5절까지는 어린아이의 비유인데 흔히들 ‘어린이 교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아니라 어린아이를 통해서 어른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한마디로 천국의 주인 될 자격에 관한 교훈입니다.

‘천국시민의 자격이 과연 무엇인가? 또 천국 시민으로써의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 이런 교훈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누가 서열 제일이냐? 누가 킹 메이커냐? 누가 실권자냐?’ 여기에 온통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나이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앞에 세우고 세 가지의 교훈을 줍니다.

①’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②’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③’누구든지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린아이들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함이 된다’는 교훈입니다. 한마디로 어린아이의 순수성과 정직성과 겸손함을 들어 이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자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목 소개!▶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선택받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제자들이 천국에 합당한 인물이 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눈앞에 두고 대중들에게서 벗어나 제자들과 더 많은 시간들을 보내시며 그들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 당시 12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단 한 번도 만족을 주지 못한 늘 미숙하고 부족하며 연약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다리며 사랑하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주셨고, 잘못하면 고쳐 주셨고, 실수하면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천국백성으로 훈련시키셨고, 사명자로 훈련시키시면서 단 한 번도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향하고 계십니다. /믿/

▶1절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때에’ 마17:22-23절에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그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시기가 임박했음을 제자들에게 공포한 때’를 말합니다.

또 한 곳의 배경은 막9:33-34절을 보면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는 직위에 대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막10장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청원을 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여기 ‘그때는’ 주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둔 바로 ‘그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마땅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수난을 생각하고 죽음을 앞둔 안타까움으로 같이 고민해야 할 때요, 기도할 때입니다. 그런 때에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 ‘누가 킹 메이커냐?’는 문제로 핏발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으로 죽어 가는 아버지의 병상 앞에서 자식들이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 ‘누가 더 많이 상속받는가’를 논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상황이 임박했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 이것이 관심이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 질문을 천국의 성격이나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질문입니다. 이유는 천국은 계급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는 곳임을 요한계시록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그림자인 교회 역시 계급 사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나 교회에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질서가 존재합니다. 가정에 부부사이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남편이 사장이라고 해서 아내가 말단 사원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이들과 아버지 사이에 계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천국이나 교회는 계급사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질서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 속에는 그들의 어리석음이 들어 있습니다.

①예수님의 고통과 고난과는 무관한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②제자들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메시아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게 될 때 우리들이 무슨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요? 국무총리는 누가 하며, 국방부장관, 내부부장관, 교통부장관은 누가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아직도 세속적인 것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출세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누가 월급은 얼마를 받나? 누가 더 많은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자리 문제, 위치 문제입니다. 또 누가 좋은 것을 가졌는가? 큰집을 가졌는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가?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예쁜가 하는 관심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기를 외모에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남자를 보다 ‘누가 더 큰집에 사는가? 누가 더 멋진 새 옷을 입는가? 누가 더 좋은 자동차를 탔는가?’ 서로 비교하고 평가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관심은 온통 세속적인 것입니다.

③그래도 그들이 ‘천국에서’라는 분명한 범위를 정했다는 것은 신앙의 발전이 있었다는 평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주제가 이 땅이 아닌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주제는 천국임을 분명히 알았는데 그 천국의 개념이 미숙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누가 큰가?’를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눌린 자의 콤플렉스입니다. 항상 정치적으로 눌려있고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눌려있다 보니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짓눌려 살았으니 천국에서는 좀 높아져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억울하게 살고 있지만 천국에서는 한번 크게 윗자리에서 행세하며 살고 있는 그런 마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하고 나온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로마의 황제도 크고 분봉 왕 헤롯왕도 크며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이 큰 것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도대체 누가 큽니까? 라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 속에는 무엇인가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대가 어떤 기대입니까? 아마도 저들의 기대는 ‘그래 이 세상에서는 로마의 황제도 헤롯왕도 대제사장도 크지마는 천국에서는 열 두 제자가 크다’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외로 나타났습니다.

▶2절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전설에 의하면 이 어린아이는 베드로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만 성경에 기록이 없으니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실물을 통해서 교훈 하심을 봅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도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또는 둘의 백합화 겨자씨, 씨 뿌리는 일등을 통해 귀중한 진리를 교훈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장 인상적이고, 사실적이고, 실감나며 잊을 수 없게 만드는 확실한 교육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닌 실물교육을 중히 여겼습니다.

또 예수님은 크고 화려한 것들보다는 작고 사소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통해서 천국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⑴예를 들면 제자들이 계산한 200데나리온이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요, 보리떡 다섯 개를 통해서 믿음의 법칙을 말씀하셨습니다.

⑵존경받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멸시천대를 받는 사마리아인을 통해서 진정한 이웃사람을 가르쳤고,

⑶외식하는 헌금이 아니라 과부의 엽전 두 푼을 통해서 최선을 다한 헌금의 진리를 교훈 하셨고,

⑷지극히 적은 겨자씨를 통해서 교훈을 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대개의 경우 어린아이는 무시하는 수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인원은 장정만 6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어린아이가 계수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어린아이, 여자, 노인들을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존엄성을 가장 철저하게 인정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어른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귀중한 영혼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사회의 지도자가 되고 일꾼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천국에서 누가 큰가?’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할/

▶3절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이 대답 속에는 ‘누가 큰가?’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본문을 보겠습니다.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①돌이켜야 합니다. ‘너희는 돌이켜’ 여기서 말하는 ‘돌이키다’는 말은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즉 회개를 말합니다. 너희들이 자꾸만 위를 보느라고 높이 생각하고 있는데 돌이켜 굽히라는 것입니다. ‘위를 쳐다보았느냐? 내려다보아라, 큰 것을 생각하고 있느냐? 작은 것으로 낮추어라! 돌이켜 즉 반대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라, 돌이켜서 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만약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진리입니다.

회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진리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의 일 성도 세례요한의 복음의 일 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회개한 사람이라야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어서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한 길이라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떳떳한 일이 아니라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돌이킨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

여기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원으로 보면 ‘스스로 돌이키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치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새 사람으로 변화되듯이 천국시민의 자격을 가지는 것은 마치 이런 중생의 새로운 역사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전인적이고 전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중생하여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 아닙니까? 천국과 상관없는 중생, 천국과 상관없는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천국이 이렇게도 중요하다면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②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칼빈은 ‘단순성을 의미한다’고 했고, 클라크는 ‘단순성과 가르치기 쉬운 점’, 벵켈은 ‘겸손과 단순성과 잘 받아들이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간은 본래부터 악할 뿐만 아니라 그 악을 유전으로 받아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어른이 악하냐? 아이가 악하냐?’라고 묻는다면 삼척동자라도 어른이 더 악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습니다.

①어린 아이는 솔직합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나타냅니다. 거짓으로 꾸미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나타냅니다. 싫은 것 좋은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나타내 보입니다. 어른들은 솔직하지 못한데 비해 어린 아이들은 솔직합니다. 하나님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척 하는 사람, 이중적인 사람, 자기를 가리우는 사람, 위선적인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다윗은 어린 아이처럼 솔직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다 솔직하게 나타내 표현했습니다.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 뼈에 평안함이 없습니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납니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닙니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가 피곤하고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합니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습니다.'(시38). 하나님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솔직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린 아이처럼 솔직해져야 합니다.

②어린 아이는 안아주고 먹여주고 놀아주면 그저 좋아하고 즐거워합니다.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도 좋아하고 즐거워합니다. 비교적 욕심이 적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돈이 없어도 재산이 없어도 엄마 아빠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즐겁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 한 분 때문에 좋아하고 성도들 때문에 즐거워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성도들 때문에 즐거워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시16편에 다윗의 두 가지 즐거움과 기쁨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성도들 때문에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③어린 아이는 단순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잘 믿고 잘 따릅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아빠를 전적으로 믿습니다. 어린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듣고 잘 믿습니다. 그래서 쉽게 속기도 하지만 하여튼 잘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린 아이처럼 사람들의 말도 잘 듣고 잘 믿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속아넘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듣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사탄과 죄악의 소리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듣고 믿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인간의 고통 소리도 듣고 자연의 신음소리도 듣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누가 배고프다고 말하면 그대로 믿는 것이 옳습니다. 누가 아프다고 하면 그대로 믿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그대로 믿고 가고 사람들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대로 달려가서 도와주는 것이 너무나 옳은 일입니다.

어른들은 믿기를 주저합니다. 빌립은 믿기를 주저했습니다. 5천명을 먹이라고 말씀했을 때 빌립은 믿기 전에 먼저 따지고 계산을 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어도 5천명을 먹이기에는 모자랄 것이라는 계산부터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한 소년은 따지고 계산을 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저 믿고 따랐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에게 드렸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멘!/

④어린 아이는 특히 부모를 의존합니다. 어린 아이 때는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로 압니다. 그리고 엄마 품에 안긴 채 엄마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엄마의 젖을 먹고 엄마의 표정을 살피면서 행복해 합니다.

인간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찬송시인은 ‘주의 날개 그늘 밑에 내가 쉬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의존하듯이 우리 성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믿/할/

⑤요구가 많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부모가 해주어야 하고, 또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든지 부담감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것들이 당당하고 떳떳합니다. 만일 거절이라도 하는 날이면 울고불고 졸라댑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모와 자식간의 그 끈끈하고도 굵은 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의 정당하고 바람직한 요구에 거절하는 부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린아이의 요구가 정당하지 못하면 부모는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또 정당한 요구라도 부모가 능력이 없을 때 못 들어 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서 우리의 요구를 미루거나 거절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어떤 요구도 다 수용하시고 들어주실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구하면 응답이 없습니다. 약4:3절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할/

⑥어린 아이의 특성중의 하나가 쉽게 돌이킵니다. 야단치면 무서워하고 매를 들면 떨고 설득하면 알아듣고 다짐하면 순종합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어린아이는 좀처럼 보따리 싸 가지고 대문을 나서지 않습니다. 대문을 나서는 버릇을 어른이나 아이나 좋은 버릇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쉽게 돌아서는 것이 유리합니다. 빨리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돌아서면 징계가 가벼워집니다.

⑦정직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직은 상대적인 정직입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정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른에 비해서 훨씬 정직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편견이 약합니다. 어른이 말하면 액면 그대로 받습니다.

어떤 일을 달래기 위해 ‘어린이 공원으로 언제 놀러가자’ 약속을 하면 어린아이는 손꼽아 기다립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성, 정직성’을 가지라고 합니다. 단순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지지 않고 잘 믿습니다.

⑧쉽게 본을 따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모방성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 말씨, 사는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모방합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이 행동을 잘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인격교육, 사람교육이 중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승, 개나 고양이를 길들이는 데는 흥미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 데는 무관심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관심은 학교교육이나 자식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교육, 사람교육을 말합니다. 인격교육, 사람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언에서 ‘마땅히 행할 길은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면서 아주 강조를 하셨습니다. 또 결단코 라는 표현은 써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4절에서 말씀하는 초점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초점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모든 어린아이가 천국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초점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나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모 없이 자기들이 존재할 수 없고, 부모가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옷도 못 입고 부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게 어린아이들은 겸손합니다.

본문은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누가 천국에서 큰 사람입니까?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낮춘다는 것은 겸손, 즉 자기 비하를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는데 열심입니다. 지식을 높이고 가문을 높이고, 그래서 자존심을 굉장히 내세웁니다. 그런데 천국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으뜸이 됩니다. /할/

천국공식은 ‘작은 자가 큰 자이며, 낮은 자가 높은 자이며, 죽은 자가 산 자이며 주는 자가 얻는 자’입니다.

표현과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 자기를 과시하고픈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은 겸손의 덕으로 누르고 신앙의 힘으로 통제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교만 방자한 사람이 됩니다.

약4:6절에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리고 10절에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셨으며, 막9:35절에서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안아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본문의 중심교훈은 ‘어린아이들처럼 되라’는 것이고, 그 다음에 ‘어린아이들처럼 낮추라’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내가 매일 십자가 아래 죽노라, 겸손은 자기를 죽일 때만이 나타나는 미덕입니다.

천국은 신앙의 자만이나, 교만은 나는 당연히 라는 자만심을 허락지 않습니다. 천국의 문은 심히도 좁고 협착하여 겸손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할 것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가 되어서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할/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5절은 6절과 이어져야 이해가 됩니다만 주제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갖자’이기 때문에 5절까지를 본문입니다.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솔직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우리들이 믿음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믿음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그 자체가 자신을 항상 낮추는 겸손한 자입니다. 결코 아이들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본문에서 하신 말씀의 배경은 바로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도 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성경에서는 교만한 자를 얼마나 많이 질타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잠8:13절에서는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노라’고 했으며, 잠16:18절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또 잠18:12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약4:6절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고, 벧전5:5절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까지 미워하십니까? 그것은 사탄이 하와에게 최초의 범죄 시에 사용한 방법이 인간의 교만을 유발시킨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이 교만을 유발시킨 것은 선악과를 따먹기만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속삭임이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교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입니다.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교만을 범하려고 하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인 교만이 어린아이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여러 경험을 쌓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되도록 자신의 학력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자신의 경력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력서가 한 장으로 부족하고 여러 장을 쓰면 좋은 줄로 압니다. 명함에도 자신의 이름을 화려하게 장식하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학력도 없습니다. 경력도 없습니다. 이력서도 이름 외에는 쓸 것이 없습니다. 명함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냥 자연인 아무개일 뿐입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도 그냥 그의 이름이 아니라 아무개의 아들 누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그의 존재는 그의 부모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겸손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이 이와 같이 순수한 믿음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이름이 다만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발견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명함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명함이면 족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만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일한 권속임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세상적인 가치에 의해서 교회 안에서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일을 겸손으로 감당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합시다. /할/

▶어린아이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①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쉬지 않고 자라나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자라야 합니다.

②아버지의 형상을 닮아 가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그 부모의 붕어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③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결코 남에게 화를 내거나 악의를 품지 않습니다. 미움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④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말에 절대 순종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 쉽게 따르고 고칩니다.

순종은 성도로 하여금 무한한 상급의 주인이 되게 하는 열쇠입니다. 때문에 순종은 축복의 시작이며 관심입니다.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도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할/

▶오늘 우리에게 주요한 과제의 핵심은 ‘자녀를 어떻게 교육하느냐?’입니다.

유대인의 어머니들의 교육은 ‘쥬이쉬마더(Jewish Mother)’라고 해서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합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의 교육 방법과 교육철학은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교육학의 석학들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도 다 이해하지 못하며, 또 흉내를 낼 수 없습니다. 유대 어머니들의 교육 방법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아이들을 서로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들이 가정에서 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잘못된 교육의 관행들을 생각해 봅니다.

위협형입니다. ‘한번만 더 그런 짓 했다가는’하고 아이들을 위협하는 형입니다.

비교형입니다. ‘그 애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 하고 야단칠 때마다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조소형입니다. ‘잘한다. 잘 논다. 어디 두고 보자’ 하면서 아이 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변덕형입니다. 일관성 없는 교육방법입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언제는 꾸짖고, 언제는 그냥 넘어가고 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갈팡질팡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육방법들은 다 좋지 못한 유형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교육방법은 절대로 비교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시기, 질투, 경쟁심 같은 것들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키운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얼마나 공부를 못했던지 성적표에 이런 평가가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 여러분의 자녀가 이런 성적표를 받아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마 초상집이 됐을 것입니다. 자식농사 다 망쳤다고 절망합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그 성적표를 보고 얼굴하나 찡그리지 않고 오히려 ‘걱정할 것 없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축복 관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 어머니들은 동네에 유명한 랍비가 오시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복을 빌어주세요. 복을 빌어주세요’ 청한답니다. 이것이 저들의 풍속이요, 교육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아멘!/

어린아이같은 믿음-은혜주일-170507-눅18

▶ *유머 – 어린아이의 꿈선생님이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자기의 꿈이 무엇인가? 적어보라고 했습니다.어떤 아이가 우주비행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선생님은 이 아이에게 우주비행사가 되어서 어디에 가고 싶냐? 고 물어봤습니다.아이는 태양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선생님은 과학적으로 설명해줬습니다. 태양에 가면 타서 죽는다. 그래서 못 간다고 했습니다.그러자 아이가 말했습니다.“저는 밤에 갈 거니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태양에 밤이 어디있습니까?*어린아이같은 것이 좋은 것일까요?좋은 것도 있지만, 어린아이와 같으면 큰일 나는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애들끼리 놔두면, 서로 싸우고 울고, 요즘 애들은 욕도 아주 잘합니다. 이게 어린아이같은 것일까요?▶*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아이같은 믿음을 갖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같은 믿음은 무엇일까요?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어린아이같은 믿음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1/4 어린아이는 쉽게 믿습니다.*제 막내아들 어렸을 때 했던 장난입니다.지우개로 그림을 싹싹지웠습니다. 막내아들이 너무 신기해했습니다. 제가 장난으로 제 아들에게 이거로 얼굴지우면, 얼굴 없어진다! 제 아들이 깜짝 놀라며, 자기 얼굴을 지우지 말아달라고, 두려워 떨더라구요.- 여자분들이 가끔 얼굴을 지우셔서, 남자분들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분들도 계시죠?*아이들은 잘 믿습니다.아이들은 안 믿는 척하면서 믿고, 어른들은 믿는 척 하면서 안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른들은 믿는 척을 잘합니다.▶요6:9 “여기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멘.*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의 이야기입니다.5천명이나 모여있는 사람들이 배가 고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찾아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의 도시락으로 가져온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정말 이게 전부일까요? 5천명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고, 이 아이만 먹을 것이 있었을까요?*그럴 리가 없죠.어른들은 뺏길까봐 아까워서 잘 숨기고 있었을 겁니다. 내가 먹을 건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그러나 어린 아이는 달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도시락으로 기적을 이룰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도시락을 내어 놓았습니다. 믿음으로 내어 놓았습니다.*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은. 쉽게 믿는 믿음입니다.제가 아동부에서 전도사를 했을 때, 너무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요. 말씀을 스폰지처럼 쏙쏙 빨아들이는 것이 느껴져요. 너무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멘’이라고 안 해요. 그런데 믿어요.반대로 어른들은 ‘아멘’해요. 그리고 설교 끝나고 나면 저에게 와서 이렇게 물어요. “목사님 아까 그거 정말이에요?”▶*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세요.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입니다. 내 경험을 내려 놓으세요. “이게 이렇게 되겠어?”“이건 교회에서나 하는 말이지…”“나는 그렇게 해도 안 돼.”*말씀을 말씀으로 믿으세요. 그냥 그대로. 믿으세요.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2/4 어린아이는 의존적입니다.*큰 아들이 겁이 좀 많았습니다.엄마 아빠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동네가 떠나가게 울었습니다. 그렇게 엄마 아빠를 좋아했습니다.초등학교 4학년때로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잠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는데, 또 동네가 떠내려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큰 아들이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물론 요즘은 엄마 아빠 없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요즘은 엄마 아빠가 계신 것이 더 놀라기도 합니다. 좀 섭섭하기도 합니다.▶*껌딱지무슨 말인지 아시나요? 껌처럼 붙어다니는 존재. 라는 말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집 엄마들은 잘 아시죠? 잘 때도 떨어지지 않고, 더워서 땀이 줄줄 나는 날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어린아이 엄마들을 어른들이 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죠? 참 좋은 때다… 왜 그렇게 말하실까요? 붙어 있을 때가 좋은 때라는 겁니다.*어린아이에게서 배워야 할 두번째 교훈은…의존성입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부모에게 먹을 것을 얻어 먹어야 합니다. 부모에게서 돈을 타서 써야 합니다. 부모님과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개는 태어나자 마자 독립을 합니다. 심지어 개는 1살이 넘으면, 자기 자식을 자식으로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냥 남으로 보고 내쫓아 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달라요. 어른이 되어서 부모님을 의지합니다.*껌딱지 믿음.껌딱지같이 믿으세요. 떼어 지지도 않고, 늘 붙어다니는 믿음입니다. 그게 껌딱지 믿음입니다.하나님을 껌딱지같이 믿으세요.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붙어 다니는 것같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없이는 살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사세요.*살면서 간증거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런데 그 기쁨과 믿음이 쉽게 사그라듭니다. 쉽게 약해집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믿으세요. 늘 엄마 아빠를 따라다니는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멘.*아이가 이렇게 부모에게 붙어 있을 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조금 오해가 되는 말씀입니다.그것을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부모를 떠나지 않는다… 로 오해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부모가 아닙니다. ‘마땅히 행할 길’입니다.*어린 아이는 잘 믿습니다.쉽게 믿기때문에, 어릴 때에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믿은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떠나지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사실입니다.▶*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껌딱지처럼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3/3 어린 아이는 자랍니다.*저희 집은 아이들이 키 크는 것을 매달 기록합니다.매달 첫 날이 되면, 아이들의 키와 몸무게를 기록합니다. 작은 아이는 아직 자라고 있지만, 큰 아이는 이제 키가 안 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받아서, 키 안 재겠다고 합니다.아이들은 자랍니다. 안 자라면 스트레스 받습니다. 저도 스트레스 엄청 많이 받고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 이 키가 중학생때 키였습니다.▶눅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아멘.*예수님께서도 어릴 때에 지혜와 키가 자랐다. 라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아이들은 자랍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이 당연합니다.*안 자라면, 성장탕같은 약같은 것도 먹입니다.그래서 억지로라도 아이를 크게 키우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자라야 하기때문입니다.*그러나 어른이 되면 자라지 않습니다.어른이 되면 자라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크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어린아이는 자기가 부족함을 압니다.그리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배워서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우는 자세입니다. 그래야 성장합니다.*축구장의 선수들축구장에 가면 열심히 축구하는 선수들이 있고, 먹고 마시면서 축구를 구경하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사진을 보면서, 좀 균형이 없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뛰고 운동해야 할 사람은 앉아서 먹고 있고, 이제 그만 운동해도 될 사람은 부상을 당할 정도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정말 말씀을 배워야 하고, 정말 성경을 알아야 하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오히려 좀 아는 사람은 더 배우려고 합니다. 좀 균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아이들에게 배우는 3번째 교훈, 어린 아이는 자랍니다.우리의 믿음도 자라야 합니다. 나는 어른이라서 다 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서로 내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어린 아이처럼 자라는 믿음을 갖고 살기를 축원합니다.▶4/4 아이들은 미래다.▶눅18:15 사람들이 아기들까지 예수께로 데려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제자들이 보고서, 그들을 꾸짖었다. 아멘.*예수님께 사람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왔습니다.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안수기도를 하고 계셨기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얼른 나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아이들은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쓸모없는 존재들이었기때문입니다.그리고 바쁜 예수님께서 힘있는 어른들과 친해져야지, 아이들에게 시간 보내는 것을 제자들은 싫어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눅18:16 그러자 예수께서 아기들을 가까이에 부르시고,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아멘.*어린아이를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는 이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정말 옳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죽었을 때, 이들의 뒤를 이어서 교회를 이끌어간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와 같은 어린이였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의 미래였던 것입니다.*우리교회 오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아이들이 참 많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민 교회의 반 정도는 아동부가 없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한국 강남교회의 반정도에도 아동부가 없습니다.아이들이 없으면, 교회는 30년 안에 망합니다.*한국교회가 급속도로 망하고 있습니다.교회학교에 아동부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애키우는 것이 힘들어서, 애를 안 낳습니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없습니다. 그 망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릅니다.*아이들은 당장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오히려 애들이 뛰어 놀고, 애들이 어른 예배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없으면, 우리 교회는 30년 안에 망합니다. 30년 뒤에는 저도 은퇴해서 없습니다.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입니다.*교회리모델링이 공사를 왜 시작했을까요? 아동부와 중고등부 아이들 방을 제대로 만들어 놓자는 것이었습니다. 제 방이 중고등부 방을 지나서 들어갔습니다. 아이들이 제 눈치를 보더라구요. 그래서 제 방을 포기하고 위로 올라왔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본당에 방을 만들어서, 예배당을 줄이고, 아이들 방을 넓혔습니다.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니까요.▶*헌신과 투자아이들을 위해서 더 많이 헌신과 투자를 해야 합니다. 돈만 투자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더 많이 기도해주세요. 더 좋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교사로 헌신해주세요. 전도사님과 목사님에게만 맡기지 마세요. 변함없는 사랑으로 교사들이 헌신해줘야, 목사님 전도사님들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이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아이처럼 믿으세요. 어린 아이와 같이 쉽게 믿고, 의존적이고, 늘 성장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 / 마태복음 18장 2절 ~ 3절 / 오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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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장 2절 ~ 3절 (마태복음 18:2~3 / 마 18:2~3)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던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린아이는 자기 인생이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는 자기 스스로는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그 부모에게 의탁된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 아이가 사는 길은 오직 그 부모를 의지하는 길뿐입니다. 그 아이는 그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과 돌봄과 지킴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곧 어린아이는 전적으로 그 부모에게 맡겨진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라는 의미는,

성도 역시 자기 인생이 없는 자라는 말이요,

이는 곧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여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나는 없고)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결코 나의 제자(그리스도인)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인생을 예수님에게 전적으로 의탁하고 맡겨버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그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서 살까? 결코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인생을 자신이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엄마 아빠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이 여기며 자기 부모 곁에만 꼭 붙어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부모만 의지해서 살면 됩니다. 그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저 부모에게 손만 내밀면 됩니다. 이것이 그들이 사는 방법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와 같이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곁을 떠나면 죽을 같이 여기며, 어린아이들과 같이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여 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너희 모든 삶을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만일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절대 의존해서 살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고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배우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들판에 작은 풀 한 포기도, 하늘을 나는 작은 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산 자기 백성들이야 당연히 먹이고 입히시지 않으시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마 6:26~31)

너희가 너희 조상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농사도 짓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반석에서 물을 주어 다 먹고 마시며 살게 한 것을 알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사막과 같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살게 한 것을 믿는다면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다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이지요.

그런데도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에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맡기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기에 신앙생활이 늘 자신이 없고 확신이 없는 종교적 생활이 될 뿐인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린아이가 단순히 그 부모만을 절대 의지하여 사는 것같이, 하늘의 시민 된 성도 역시 하나님만 절대 의존하여 단순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살 것을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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