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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 믿음의조상 아브라함 11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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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중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
그는 어떻게 이 별명을 갖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
영상으로 알아보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야기 하늘필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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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 네이버 블로그

♧ 결론: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율법을 지켜서(행함)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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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23/2021

View: 4802

[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7) 믿음과 칭의 < 신학 < 기사본문

나중에 후처에게서 난 아들들 외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의미 있는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 이 엘리에셀이 있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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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10/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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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 – 기독일보

아브라함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표상이며 조상입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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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8/12/2022

View: 2304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로마서 4:1-25) – 다음블로그

사도 바울은 하늘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선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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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3/2021

View: 21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 주일설교 – 휄로쉽 교회

1)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시험 앞에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순종을 했다. · 2) 아브라함의 순종은 결국 부활 신앙으로 무장되었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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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ellowshipusa.com

Date Published: 2/3/2022

View: 9698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일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이삭을 바친 때문이 아니라,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자기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데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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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rok.org

Date Published: 9/30/2022

View: 558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창 12:1-9) – 기멀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로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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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8/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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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자 – 시사미래신문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러주시는 데서 시작합니다. 성경은 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셨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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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isamirae.com

Date Published: 7/30/2021

View: 3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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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조상 아브라함
믿음의조상 아브라함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 Author: 하늘필름
  • Views: 조회수 8,6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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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3.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QrUKeuCpq4

◆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 마침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내가 너의 자손(씨=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땅을 주겠다.'”(창 12:6)

☞ (가나안 땅에 들어와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또)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창 13: 14-16)

☞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쫓아가 쳐부수고 (이 전쟁은 이 시대 셰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음. 메소포타미아(엘람) vs 레반트지역(소돔) ) 롯을 구한 후,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탈취물의 1/10을 바치고 난 후의 일이다.

▶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또)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엘리에셀)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 가 될 것이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

⇒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개역개정)

☞ 이 사건과 이 성경구절이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게 된 근거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Q.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다고요? 무엇을 믿어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요?

A. 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주님)을 믿었고,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좇아갑니다.

▶ 바울은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각각 이 사실을 논증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셨습니다.”(롬 4:3)

이 일은 그가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롬 4:10) (할례는 아브라함이 99세에 받음)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롬 4:24)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소식(복음)을 들어서(들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율법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듣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주셨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갈 3:2-8)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맺으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 에 생긴 율법이 이를 무효로 하여 그 약속을 폐하지 못합니다(갈 3;17).

▶아브라함(BC 2166~1991)

▶모세의 출애굽(BC 1446년) – 시내산에서 율법 받기

♣ 결론: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율법을 지켜서(행함)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수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습니다. 할렐루야!

[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7) 믿음과 칭의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1~6)

이 후에

15장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칭의’를 논하는 15장을 ‘이 후에’로 시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람이 이제까지의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알아왔기 때문에, 지금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2장 1~3절에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면서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십니다. 그렇지만 아브람이 12장 후반의 애굽에서의 수모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13장에서의 롯과의 헤어짐, 14장의 롯을 구출하는 전쟁과 살렘 왕 멜기세덱과의 만남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여기 15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람의 대화가 가능해졌으며 아브람의 믿음을 이끌어내게 하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고 말문을 여시는 것은 이제까지 아브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절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님을 일깨워 주십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면 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불렀지만 그 배경이 두려움 때문이었다면 우리가 본받을 만한 믿음의 행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우상을 섬기던 이전 습관대로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만 하면 열심히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도 한번도 하나님께 질문을 하거나 말씀을 드린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람에게 자신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기쁨과 감사의 대상이요, 믿음과 교제의 대상임을 알라고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주시렵니까

그러면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브람은 마음으로 머리를 끄덕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바로를 혼내시면서 빼앗긴 아내를 되찾아주신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방패이셨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쳐서 이기고 조카 롯을 구하도록 감동하시고 도와주신 하나님 또한 자신의 방패 되심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말씀도 수긍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 외에 자신을 위해 무엇을 요구하신 적이 없으셨고 오히려 일방적으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만을 거듭하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애굽에서와 이번 롯을 구하는 전쟁에서 많은 재물을 얻도록 도와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람의 위상을 왕들의 영접을 받을 정도로 높여주셨으며,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을 때와 조카 롯과 헤어졌을 때에 즉시 나타나셔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는 ‘큰 상급’이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드디어 하나님께 그 입술을 열어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이제까지의 아브람은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단을 쌓았고 그 이름을 부르며 섬겼을 뿐, 하나님과의 대화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방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런 아브람이 드디어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동안 궁금하고 답답했던 이야기를 봇물 터뜨리듯 쏟아 놓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두려워 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었고,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와 상급이라는 말씀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후손과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반복하시면서도 자식도 땅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땅이야 어느 날 주시면 그날로 자신의 소유가 되겠지만, 이제 노인인 아브람에게 자식은 마냥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언제 생식 능력이 끊어질지 모르고,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사람 노릇을 하려면 20년 이상을 키워야 하는 것인데 왜 초조하지 않겠습니까? 또 땅을 주신들 자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브람은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자식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였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낳은 자가 아닌 길리운 자로 제 상속자를 삼았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을 언급하는 여기 15장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아브람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부지런히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던 일방적 관계에서, 궁금하고 답답했던 마음을 봇물처럼 쏟아내는 모습 말입니다. 우리는 믿어지지 않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아멘” 하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장성한 믿음의 경우이고 이제 믿음을 갖기 시작하는 아브람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것을 눈 딱 감고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궁금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인격적 신뢰의 관계를 믿음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겐 자식이 셋 있습니다. 나중에 후처에게서 난 아들들 외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의미 있는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 이 엘리에셀이 있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식’이며 ‘주인의 자식’이고, 이스마엘은 ‘육체의 자식’이며 ‘종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여기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은 ‘사람의 뜻으로 난 자식’입니다. 물론 이후에 엘리에셀을 자식으로 언급한 일은 없지만, 묵상할만한 의미가 있기에 지적하고 넘어갑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믿음과 칭의

(1) 여호와를 믿으니

아브람의 답답해하는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뜻으로 난’ 양자가 아닌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밖으로 불러내십니다.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은 온통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들을 보라고 하시면서 수없이 많은 별들처럼 아브람의 자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늘의 별들을 쳐다본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집니다.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나타나셔서 격려해주시던 하나님, 애굽에서 바로를 혼내시면서 빼앗긴 아내를 되찾아 주신 하나님, 조카 롯과 헤어지자 즉시 나타나 격려하시면서 이 땅을 주시고 후손을 땅의 티끌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던 하나님, 조카 롯을 구하도록 도우시고, 왕들 앞에 높임을 받게 해주신 하나님….

아브람은 그 일들을 떠올리면서 지금 하나님이 하신 말씀처럼, 두려운 분이 아닌 아브람의 방패가 되시며, 아브람에게 큰 상급이 되시는 분이심이 믿어졌고, 지금 “네 후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해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그의 위대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아브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라도 아브람의 자리에 있었다면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아브람의 믿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의 시작이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고와 섬세한 보살피심이 우리 마음에 믿음의 씨앗을 심으시고 싹이 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가 있는데, 그때에 우리의 믿음을 화합하여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고,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믿음의 생성 및 성장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우물에서 숭늉 찾듯 결론을 가지고 비난하거나 반박하지는 마시기를 부탁합니다.

(2)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는 이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칭의(稱義) 또는 의인(義認) 즉 아브람의 믿음을 여호와께서 ‘의롭다고 불러주셨다’, ‘의롭다고 인정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죄인은 뵐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브람이 갑자기 의로워졌다고 보기엔 좀 그렇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쌓고 엎드리는 행위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나아갈 수 없었지만, 이제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인격적 신뢰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브람과는 바른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람의 믿음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 아직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하나님께서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인정해주시고 그렇게 불러주신다는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었으니 얼마나 확신에 찬 믿음이겠는가’라고 생각하지만 아브람의 믿음은 그렇게 탄탄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아브람이 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온 이후에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경험한 지금에야 믿음이란 단어가 처음 나오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많은 분들이 믿음이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세상은 신념이 강한 사람이 성공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히려 매우 위험한 인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12~13)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성경강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

오늘은 아브라함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으며,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00년을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표상이며 조상입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을 때는 이미 하란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올라온 것은 몇 살 때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세상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60세였습니다. 그때 하란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입니다.

지금도 하란 우르파에 가면 아브라함이 태어났던 동굴이 있습니다. 그곳에 아브라함 기념교회가 있고, 욥이 살았던 곳과 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태어나서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가 혼잡해졌을 즈음에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갈대아 우르에 가서 살았습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업이 잘 안되어 고향으로 낙향했습니다.

고향 하란에 와서 10년 정도 살고 있을 때 아브라함이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아닙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후에 205세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 데라가 장사하려고 많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모두 때려 부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랫 동안 전해 내려오는 노아 홍수의 이야기도 전해 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노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의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요? 유대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과 달을 보면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계신 것은 확실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다는 이야기가 유대 역사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는 아주 큰 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단번에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세리 마태도 역시 예수께서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하고 나온 인물들입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사명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상당히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데 당장 이삿짐부터 챙겨 가지고 대문을 나서라고 하면 당장 그렇게 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갈 길을 모르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훗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쓴 것이 아니고, 아들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요셉에서 그 후손들에게 쭉 이어져 오다가 나중에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피상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잘 모릅니다. 또한 그가 책을 쓴 것도 아니기에 우리가 아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예수님도 책을 쓰지 않았고,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도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짜 위대한 인물들은 책을 쓰지 않았고 훗날에 누군가 그의 삶을 책으로 쓰도록 살았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 이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이유는 니므롯의 선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미지가 더욱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되시며,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전능하심과 신실하신 분이심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참된 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 영화, 명예, 권세를 다 누렸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을 모르면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인들고,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대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얻은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정도의 순종의 사람이었습니.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는 서로 독생자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창세 이후로 친구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절 양보했던 자였습니다. 조카 롯과 함께 가까이 살다 보니두 집안의 목자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택권을 조카에게 먼저 양보하였습니다. 양보 정신입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양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물질 관계와 인간 관계를 어느 것을 더 중요시 하는가 하나님께서 달아보였던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세 가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첫째로 물질 관계, 둘째로 인간 관계, 세째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 세가지 관계 중 어느 관계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지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인간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면, 물질은 따라오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물질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물질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디 가든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을 쌓았다는 말은 예배를 성실히 드렸다는 말입니다. 예배에 실패하고 인생이 실패한 자가 바로 가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은 대단한 담력의 사람이었습니다. 담력이 없었더라면 타향 팔레스타인 땅에 감히 발을 붙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권이 보장되지도 않았던 시대, 치안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만일 어떤 일이 벌어지면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을 겁쟁이로 보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겁쟁이는 따라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 간다는 것은 용기와 담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살렘 왕이며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십일조의 조상은 야곱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 드린 것이 아니라, 율법이 생기기 500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 접대를 잘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예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들어오던 자입니다. 아내 사라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손님이 오면 살진 송아지를 잡아 대접을 했습니다. 어떤 남편이 그렇게 손님을 데리고 집에 온다면 이혼을 하고도 열 번은 더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반가워하고 손님을 잘 대접을 하는 것은 복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다 보면 천사도 대접하고 하나님도 대접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처음 시작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문제를 가지고 매달린 자가 아니라 남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던 자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 명까지 하다가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다가 차마 조카 롯을 살려 달라는 말을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심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엎으시는 중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조카 롯을 구해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실한 삶은 옆에서 그의 삶을 지켜 보던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랄의 아비멜렉은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 상호조약을 맺자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불신자들이 볼 수 있을까요?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비방하는 것은 우리가 전혀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과 깨끗한 삶을 살면 불신자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전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재를 키우고 사람을 키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기른다는 것은 참으로 거룩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시킨 자가 318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가 다메섹의 엘리에셀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얼마나 믿음이 신실하였는지 그의 삶을 보면 때로는 아브라함 보다 믿음이 더 좋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 목회자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그 교회 사찰 집사에게 물어보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른 318명은 아브라함과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얼마나 믿음이 충성스러웠는지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상속자가 되었을 정도로 충성스러웠던 자였습니다.

[출처: READ THE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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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하늘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선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자신감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었다고 선포하였다. 그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한 실제적인 예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믿음의 실제적인 예로 들고 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1-3)

아브라함이 누구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아내 사라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하였다.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따라 하란으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아버지를 잃은 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와서 이방인이요 나그네로 살았다. 그가 약속의 자녀 이삭을 얻은 것은 이십오년년 후 그의 나이 백세, 사라는 구십세였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천막을 치고 나그네로 살았으며 단을 쌓은 삶을 살았다. 아브라함이 단을 쌓았다는 것은 단순히 감사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의 삶의 모든 원천이 다름 아닌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고 가나안 땅에 거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자녀가 여전히 없었다.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그돌라오멜의 전쟁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은 가정에서 기른 용사 삼백팔십 인을 이끌고 구출하였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 종들 가운데서 다메섹 엘리에셀을 그의 후사로 마음을 먹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의 약속의 말씀을 더욱 견고케 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창세기 15:4-7)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후사로 허락하신 것은 이후에도 최소 십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아직 자식 하나 없는 상태에서 아브라함은 그 몸에서 난 씨가 후사가 될 것이며 그의 자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로 여김을 받은 것은 그의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운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 후사가 없었지만 시간상으로 수백년에서 수천년에 걸쳐서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치 않고 말씀하신 그대로 믿었다.

다윗 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오직 믿음으로 영접하였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4:4-8)

그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은 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은 것은 그에 상응하는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믿음으로 영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일년을 넘게 숨기고 있다가 결국 나단 선지자에 의해 모든 것이 만천하에 알려졌고 깊은 곤경에 처하였다. 이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그가 주께 범죄하였음을 고백하고 자복하고 회개하였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편 51:4)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6-17)

그러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할례자만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할례자인 유대인이나 무할례자인 이방인 모두를 위해서였다.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로마서 4:9-12)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은 구십구세였다. 할례란 남성 성기의 양피를 잘라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과 맺은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삼았을까? 할례는 남성 성기의 숨겨진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양피를 잘라내는 것이다. 남성 성기의 가장 주요한 부위를 드러냈다는 의미는 인간 속에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는 깊은 자존심과 자랑을 겉으로 나타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부분을 하루에 적어도 서너번은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자존심과 한없이 높임 받고자 하는 이기심을 숨김 없이 드러내사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나 할례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입은 것에 대한 인을 치는 것이었는데, 마치 할례를 받아야만 의롭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오해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은 것이 먼저이고 나중에 의롭다함을 얻은 그 징표로 할례를 주셨다. 성경에서 할례자라 함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인 유대인을 가리키고 무할례자라 함은 이방인을 상징한다.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입고 그 후에 할례를 받은 것은 무할례자나 할례자 모두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자신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입는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으로 의를 입는 만백성의 조상이다.

또한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을 받은 백성들이나 율법 아래 있지 않는 모든 사람의 믿음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율법의 행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오기 이전 언약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로마서 4:13-17)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를 입은 후 수백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므로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입는다면 믿음으로 얻는 의는 헛것이 되고 동시에 언약도 폐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율법은 죄가 더욱 죄가 되게 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척도이며 의를 이루는 척도가 아니다. 만일 율법이 없다면 범함도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몽학선생일 뿐 구원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후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의 의는 율법에 속한 자 뿐만 아니라 율법이 오기 전 아브라함에 속한 자 모두에게 동일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는 자나 없는 자 모두에게 믿음의 조상이 된다. 사실 아브라함은 지상에 존재하는 세 종파 곧 유대교, 회교, 기독교 모두의 조상이 되었다.

어떤 점에서 믿음이 능력이 될까? 믿음의 능력은 그 믿음의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매일 믿음을 사용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다. 교실이나 사무실과 식당에서 의자에 앉을때에 믿음을 사용한다. 앉는 의자가 우리 몸을 지탱해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밤새 거리에 주차해놓은 차가 이상없이 모든 부품이 정상적으로 동작할 것이라는 믿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주저없이 시동을 걸고 운전한다. 그러나 누군가 의자의 한쪽 다리를 부러뜨러놓고 아닌것처럼 가장해놓았다면 동일한 믿음을 사용하였지만 결과는 지탱이 아니라 반대로 쓰러져서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믿음은 그 대상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아브라함이 믿은 대상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만드시고 운행하시고 공의로 통치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한번 말씀하신 것을 변개할 수 없고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그의 언약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착오없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라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4:35).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는대로 그 능력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대로 될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믿음은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이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대상이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시는 전능하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께서는 사천년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요 그의 하나님으로 불리움 받으시길 기뻐하신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로마서 4:18-22)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이었다. 이것이 진실되고 순결한 믿음이다. 그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얼핏 보기에 아브라함이 바라는 것이 육신의 자식과 적대적인 이웃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브라함이 진정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요 빛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얻는 것이란 사랑을 알고 빛과 같이 꼬이지 않고 휘지 않은 순결하고 정직하고 투명한 삶을 성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이 진정 바라는 것은 물질이 아니다. 명예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수 있는 자신감이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나아가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이는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입는 것이란 아담 안에서 잃어버렸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하고 그 앞에 아무 허물없이 설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으로 얻는 의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본적이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는지 알수가 없다. 우리는 오늘날 문자로된 성경 말씀이 있지만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이상 중에서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방문하사 말씀하신 적도 있다. 천사를 보내사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마치 하나님을 눈에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다 이루어 주실 것으로 믿었다. 구체적으로 그의 후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신다는 언약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었다. 히브리 기자가 믿음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렸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부딪혀서 돌파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생리학적으로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과 아내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믿음을 가질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도리어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 앞에서 언약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시고 그의 하나님이 되시기게 흔쾌히 기뻐하셨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서 2:23)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믿음의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나서 이 예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의를 얻은 모든 사람을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3-25)

그렇다. 바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은 그의 믿음의 실제적인 본을 따라서 아브라함과 같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과, 불가능한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부딪혀서 오히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더욱 견고하게 되어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의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율법 외에 하늘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범죄함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음으로 그 죄값을 다 갚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그를 믿는 자들을 기쁨으로 의롭다 하신다.

기도: 믿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하여 내어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사 그를 믿는 자마다 우리가 진정으로 얻기를 원하는 의의 옷을 입혀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천년전 아브라함 한 사람을 믿음의 본으로 삼으사 그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설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창22:1-5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는 믿음을 따라 이루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의미다.(창12:3) 또 하나는 말 아브라함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표본이 되었다는 말이다.

1)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시험 앞에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순종을 했다.

·성경에 나타나는 시험에는 사단이 주는 시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 있다. 사단이 주는 시험은 유혹으로서의 시험(temptation)으로, 결국은 우리를 멸망에 빠트리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연단을 통해 믿음을 세우기 위한 시험(trial)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탄이 주는 시험이든,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 주시는 시험이든, 모두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그 시험들을 이용하셔서 결국 우리의 믿음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후에는, 반드시 믿음의 시험을 하신다.(2절) 더욱 난감한 것은 그런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즉각적으로 순종한다.(3절)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출발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순종 한 것이다.

·또한 3일 간의 여정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을 텐데 그는 마음이 변치 않았다.(4절) 사실 처음 결단하기도 어렵지만, 한 번 결정한 것을 유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또한 아브라함이 칼을 내리칠 때 여호와의 천사가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불렀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적당히 시늉만 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것이다.(11절)

·사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도 이렇다. 어차피 할 거면서도 미적 미적 대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또 처음에는 순종했다가 상황 보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금방 포기하고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맞다면, 그저 적당히 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숨 다하는 수준까지 해보는 것이다.

2) 아브라함의 순종은 결국 부활 신앙으로 무장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이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서는 그가 자신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고 말한다.(히11:17,19) 결국 아브라함이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도, 자신이 이삭을 드린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이다.(5절)

·우리 같으면 기도를 해도 이왕이면 살려 달라 기도하고, 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텐데,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도 있고, 망해도 괜챦다고 한다.(빌1:20,21) 바울은 그분의 부활이 곧 자신의 부활을 가져올 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가 갖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 조차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임을 굳게 믿을 때이다.(히2:14,15)

·또 하나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사탄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완전히 이겨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 영으로 들어와 거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굳게 붙들 때 우리는 오늘도 사는 문제 때문에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미 승리하신 그분께서 우리 형편 처지 다 알고 살피시는 가운데 알아서 다 해주시겠다는 것을 굳게 믿을 때 우리는 모든 염려를 다 맡길 수 있다.(벧전5:7)

·실제로 우리는 순간 순간 위기 속에서 담대함으로 그 위기를 이겨낼 수 있으려면 결국은 부활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신앙의 표준은 천국 소망이요 부활 신앙인 것이다.

3) 하나님의 이끄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에비하신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사실 아브라함 역시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섭리적인 고난 앞에 실패할 때도 있었다.(창12:10)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약속의 땅에 기근이 왔을 지라도 결코 그 땅을 섣불리 떠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창12:12,13)

·하나님의 약속을 떠날 때마다 결과는 죄를 짓는 것이었고, 결국은 그런 결정이 삶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을 겪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롬8:6-8)

·그러나 믿음의 결단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주신다.(13절)

·‘여호와 이레’ 란 원래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쓸 것을 미리 아시고, 때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14절) 다만 그 은혜들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때 보게 되는 은혜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되리라’

·하나님은 무궁무진한 수를 갖고 계시다.(시139:17) 그러니 현재의 상황에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 생각대로 좌지 우지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맡긴다는 것은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현재의 상황에 순종해 가는 것이다.

학습 및 적용 문제:

1) 하나님의 시험 앞에 아브라함의 반응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보라.

2) 아브라함이 그런 순종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되는가?(히11:17,19)

3)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어떤 결과들이 있었는 지 자신의 삶의 경험들을 나누어보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창 12:1-9)

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 가운데 아벨, 에녹, 노아, 욥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선진들이 가졌던 믿음이나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나 본질상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로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메시야를 믿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4장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하였으며, 갈라디아서 3장 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인류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성도님들과 함께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내용을 살펴봄으로 그를 본받고 배우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그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성경에 보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증언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선지를 미리 알려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갈 곳을 지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지자 곧 바로 그의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야 좋을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증언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75세로서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요즘도 노인들이 자녀들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경우를 봅니다 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생을 편안히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75세의 나이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민을 간다면 아마 그를 아는 사람들이 다 만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도가 너무나 무모하게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은 미리 이민 간 친지의 초청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고,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미지의 땅을 향해서 떠난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일을 실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기만 하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이며,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해 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내용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약속이 실현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니 그 계획을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상식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면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패가망신을 자초하는 무모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으므로 무모한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오직 “예” 하고 “아니요” 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자기의 경험이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기는 믿는데 완전히 믿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의심합니다. 반신반의(半信半疑)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반신반의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반신반의했다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모험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단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예배드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데 힘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 든든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예배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분주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을 보고 열심히 산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신 대로, 그리스도인은 의식주의 문제조차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해결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요구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려면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아왔던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세상과 하나님, 둘 중 한 편을 선택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신앙은 우상과 하나님, 둘 중 한 편을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옛 생활을 청산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듯이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도 복을 내려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에 보니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아브라함 말고도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아벨, 에녹, 노아, 욥과 같은 분들도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도리 곧 이신득의(以信得義)를 설명할 때는 주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온 지 10년쯤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에게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렵니까 나는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가 기른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을까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한 창세기 15장 6절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도리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85세가 되었고 사라는 75세가 되었습니다. 자식을 주시려면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주셔야지, 이제는 다 늙어서 생리적으로 볼 때 자식을 잉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상식이나 경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었던 근거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시다 함은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명하시니 곧 빛이 생겨났습니다. 하늘에 무수한 천체들도, 땅과 바다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각종 동식물과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지으신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능하심은 하나님과 우상을 분별하는 근거입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거짓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손으로 돌이나 나무나 철로써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며 섬깁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뿐 아니라, 해와 달과 별들과 온갖 동식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므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 사라가 이미 늙어서 생리적으로 볼 때는 자식을 잉태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17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에 있었던 일과 백세에 있었던 일을 다 같이 칭의의 근거로 언급하는데, 그것은 두 사건이 다 후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생산하는 차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 사라를 죽은 자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믿었던 근거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근거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었습니다.

미쁘다 함은 믿을만하다, 신뢰할만하다는 뜻입니다. 약속은 이행할 것을 전제로 합니다. 만일 지키지 못할 것을 약속하거나, 또는 지키지 않을 것이면서 약속한다면 그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건들은 대부분 사기 사건입니다. 사람들에게 큰 수익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해서 투자하게 한 다음, 그 돈을 착복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약속을 하고서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미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해서 이 같이 말씀합니다.

“8)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9)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시 118:)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롬 3:4)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는 남을 의심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믿어도 안 됩니다. 고의적으로 남을 속이려는 사람도 있지만,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든지 믿어도 좋습니다. 아니 철저하게 믿을수록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될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함은, 우리의 행실이 깨끗하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의 나이 백 살 되었을 때 독자 이삭을 낳음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 때 사라의 나이는 아흔 살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더딘 것 같을지라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이삭을 바라보면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삭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들일 뿐 아니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물과 같은 아들입니다. 이삭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성경에 그 당시 이삭이 몇 살이었는지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이십 세 전후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백세에 낳은 독자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대를 이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할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더구나 아버지로서 어찌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의 신처럼 인신제사를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번 하나님의 지시는 하나부터 열까지 아브라함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저 같았으면 하나님께 나아가 명령의 부당함을 고하고 선처를 부탁 드렸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삼일 길을 걸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 아래 도착한 아브라함은 사환더러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니 여기서 기다리라” 하고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을 올라갔습니다.

도중에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이에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7절로 19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으니 이삭을 번제로 바칠지라도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위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자주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럴만한 이유를 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시험에 드는 것은 결국 믿음이 부족한 것이 그 원인인 것입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은 다릅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우리는 시험이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비에 따라서 태풍의 피해를 줄일 수 있듯이, 우리의 믿음의 상태에 따라서 시험에 들 수도 있고 시험을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거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기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을 알아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 바친 사건은 과연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함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자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자(창세기12:1-9)

우리가 보통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갈라디아서 3장 7절에서 유래되었는데요, 거기에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유된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또한 믿음생활에 모범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나 믿음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이 모범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11장 27절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갈데아 우르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이주를 합니다.

데라는 본래 가나안 땅까지 가려고 했는데(31절) 거기까지는 가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 205세의 생을 마치게 됩니다. 가족과 함께 하란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면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에 대한 여러 가지 요소를 만나게 되는데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일까를 살펴보며 나눌 때 크신 은혜와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Ⅰ.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러주시는 데서 시작합니다.

성경은 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셨는지, 거기에 무슨 자격이 있고 무슨 이유가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여 섬겼다는 말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할 때 세상의 많은 종교 중에서 내가 기독교를 택하였다, 세상의 많은 신들 중에서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여 섬긴다는 말을 합니다만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환경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였다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의 진리입니다.(행7:2-4, 수24:2-3))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시고 예수를 믿게 하셨다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섭리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으며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하나님을 믿어야하겠다는 마음도 주셨고 믿는 마음으로 교회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람, 아니면 매체가 중간역할을 하였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요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바울도 그렇고 저와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Ⅱ. 믿음은 떠날 것을 떠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여호와가 하신 말씀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떠날 것을 떠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옛 신앙을 떠나야 하고 옛 생활을 떠나야 하고 옛 습관을 떠나야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떠날 것을 떠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도 고향에서 그들에게 매여 있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장사라고 합니다(수24장 참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도 나의 옛 신앙과 옛 생활과 옛 생활방식을 떠나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하기 위해서도 신앙에 방해되는 것을 과감하게 떠나는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익숙했던 것하고 헤어진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이 정말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결단이었겠습니까?

당시 아브라함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5절에 아브라함의 일행을 소개할 때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었다는 말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매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이 안정되어서 이대로 살면 평안하고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떠나야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75세에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는 지금보다 오래 살던 시절이었고 아브라함도 그로부터 100년을 더 살고 175세에 죽었습니다만 그렇다 할지라도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떠났던 고향도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적지 않은 나이에 고향땅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대는 씨족 중심사회였기 때문에 가족들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어려운 결단을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Ⅲ. 믿음은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떠나야 할 것들을 떠날 뿐 아니라 아울러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고 가라는 곳에 가는 순종이 또한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나중에 보면 그곳이 가나안 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을 향해 어렵고 힘들고 위험해도 가야하고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을 위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책임져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는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야 합니다.

가는 길에 함께 하셔서 지켜주시고 위험 속에서도 보호하시고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야 합니다. 함께 하심의 은혜가 우선할 때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일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위험한 여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심을 확신을 가질 때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마28:20)는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을 믿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지 않으면 떠나야 할 것을 떠날 수 없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모두가 이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 믿음으로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믿음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물리치고 약속하신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 믿음으로 골리앗과 대항하여 그를 넘어트리고 나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믿음으로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을 이기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떠날 것을 떠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포기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붙잡기 위함이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축복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떠나지 않고 새로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갖기 위해서는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떠날 것을 떠나라고 하고 새로운 곳에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미 복이 되었습니다. 복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복을 확신하면서 여러분의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Ⅳ. 믿음은 복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복 주심을 믿고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 다시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든든하였겠습니까?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이제까지의 힘듬과 어려움도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와 함께 하셨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셨고 현장에서 나를 축복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예배는 사실 쉬운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넘어 체험의 신앙 순교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6절 하 반절에 보면,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드린 예배는 가나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과 다른 제단을 쌓고 그들과 다른 신께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선교사들이 와서 우리와 다른 예배를 드리고 다른 신을 섬긴다고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까?

아브라함의 경우도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땅에 왔으면 우리가 섬기는 신을 섬기고 우리가 섬기는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브라함은 그들과 다른 신을 다른 방식으로 섬겼습니다.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 일을 한 번이 아니고 가는 곳마다 가나안의 똑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고 이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가끔 달리다가 잠시 멈추게 될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과 가고 있는 길이 바로 가고 행하고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기본과 처음 그리고 조상을 생각해 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믿음의 선진들과 예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떠날 것을 떠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복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보여준 올바른 믿음의 모습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우리 가는 길이 아브라함이 갔던 믿음과 복된 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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